소설리스트

답장하지 마세요-56화 (56/74)
  • *여러분 여기서 끝내면 여러분이 너무 답답하니까 연참합입니다~!56회

    네 저주를 남에게 알리지 말라

    “갔다고?”

    “네. 급한 일이 있다던데요?”

    헐레벌떡 돌아오니 공작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인사도 안 하고 떠날 정도의 급한 일이 생기다니, 솔직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

    “근데 저 사람이랑은 무슨 얘기 하셨습니까? 그냥 그거죠, 대답?”

    “맞아. 아, 공작이 오해한 거 아니야?”

    일단은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놀란 경비원을 격려하고, 할아범과 함께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무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이 한꺼번에 벌어져 머리가 멍했다.

    나를 침실까지 데려다주며, 할아범이 조언했다.

    “오해는 바로바로 푸는 게 좋습니다. 아까 공작 표정이 너무 안 좋더라고요. 진짜 급한 일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좀.”

    “알아…….”

    여전히 좀 얼떨떨한 기분이라, 할아범에게 대강 인사하고 문을 닫았다.

    침실에 혼자 남으니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공작이 오해했을까. 뭘, 나와 레타 씨의 관계를? 공작과 나는 그냥 친구일 뿐이니 오해가 생긴다 해도 치명적인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아까 공작은 분명히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고 했다.

    ‘제가 다른 마음으로 그랬다면……. 저는, 백작님과 한 모든 일을 열쇠로 생각하지…….’

    후, 짧은 숨을 내쉬었다. 혼란이 조금 가라앉았다.

    공작이 무슨 말을 하려나 생각하며 여기까지 뛰어왔다. 의문은 나를 달리게 했고, 기대는 내게 용기를 주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갑자기 용감해져 대담한 짓을 벌일 때가 있는데, 나한테는 그게 바로 지금이다.

    그래, 얘기나 해보는 거야. 차이면 뭐 어때서, 돌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

    톡톡 앞에 앉았다. 공작의 톡톡 번호를 입력하고 타자기에 손을 올렸다. 뭐라고 보낼지 미리 생각한 것도 아닌데 손가락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먼저 가셨네요. 바쁜 일이 있으시다고 들었어요.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한 것 같아서 마음에 걸리네요.]

    [사실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중요한 얘기예요.]

    공작이 뭐라고 답장할지 모르겠다.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 떠난 거라면 답장은 나중에 오겠지. 저주 때문에라도 나는 답장이 올 때까지 깨어 있을 작정이었다.

    톡톡 앞에 앉아 밤을 지새워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답장은 금방 도착했다.

    [네, 백작님. 인사도 못 드리고 가서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음, 잠깐만.

    이성이 내 손을 붙잡고 속삭였다.

    ‘이런’ 얘기를 톡톡으로 할 수는 없어, 안 그래? 그건 가장 싫은 고백 방법 1위에 선정되기도 했잖아.

    [내일 다시 뵙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지금 당장 말하지 못한다고 해도, 용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공작도, 공작도 나를, 그냥 친구로만 생각하지는 않는 걸지도 모른다. 나와 한 일을 그냥 열쇠로만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만약 정말 그렇다면…….

    공작은 금세 답장했다.

    [네, 내일을 기다리겠습니다...]

    어쩐지 답장이 시무룩해 보인다면 기분 탓일까? 아니, 그보단 어딘지 힘없어 보인다. 그냥 실수로 온점을 여러 번 찍었겠지, 뭐.

    나라도 경쾌하게 답했다.

    [내일 뵐게요!]

    공작과의 톡톡을 마무리 짓고 비장한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그와 내가 처음으로 서로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았던 순간을 기억한다. ‘반성문’을 써갔었지. 장식장에 잘 올려둔 머그컵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깨끗한 새 종이를 찾아 침실 테이블에 앉았다. 봉투와 펜도 하나씩 준비했다.

    그래, 할 수 있어.

    마침 밤이었다. 달과 별과 사랑의 에너지가 내게 힘을 주었다.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뛰어난 작가가 되어 유려한 편지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펜이 종이 위를 긁으며 춤을 추었다.

    [공작님, 미르아 헥센입니다.

    말로 설명하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을 것 같아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어제 브라운 레타 씨와의 일로 저를 오해하지는 않으셨는지요? 그분에게 꼭 돌려받을 물건이 있어 급히 따라갔던 것뿐,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저와 레타 씨가 은밀한 관계라고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왜 제가 갑자기 이런 해명을 하는지 의아하시리라 믿습니다. 공작님, 저는 공작님께 오해받고 싶지 않고, 특히 사랑에 관한 문제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거기서 손이 뚝 멈추었다. 펜을 강하게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나는 창밖으로 펼쳐진, 비단 같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감상적인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밤의 도움을 받는다면 어떨까?

    나는 뾰족한 펜촉이 내 심장에 닿아 있는 양, 조심스럽게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나갔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사랑’이라는 단어는 삭막한 종이 위에 뜨는 무지개 같았다. 나는 그 문장에 눈을 두고 몇 차례 반복해서 읽었다. 내 안의 뜨거운 감정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공작님의 정직과 고결을 늘 존경합니다. 어떤 방향이든 이 마음에 대한 진솔한 대답을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서명을 마치고, 용기가 사라지기 전에 종이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 심장은 아까 레타 씨 뒤를 따라 달렸을 때보다 더 심하게 날뛰었다. 당장 내 몸에서 튀어나와 편지봉투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듯했다.

    진정하자. 진정해. 이제 내가 할 일은 내일 이 편지를 공작한테 주는 것뿐이야. 어쩌면 우리 마음이 같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지도 몰라. 아니면 혼자 설레발치는 인간이 되어 개망신을 당하거나.

    아니, 부정적인 생각은 접어두자.

    나는 봉투를 내버려 두고 옷을 갈아입은 후 바로 침대로 뛰어들었다. 공작의 얼굴을 보고 고백한 것도 아니고, 아직 편지조차 건네지 않았는데,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공작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뭐라고 대답할까. 혹시 내 착각은 아닐까? 거절당하면 앞으로 공작 얼굴을 어떻게 보지? 아니, 그래도 문제없지. 공작은 언젠가 자기 영지로 돌아갈 테니까.

    내일 아침에 이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지금의 용기가 사라지지 않았기를.

    그래, 나는 할 수 있다. 내일은 꼭 고백할 것이다.

    -

    아침 햇살에 눈을 뜨자마자 깨달았다. 내 바람과 달리 어젯밤의 용기가 깡그리 사라졌음을.

    잠에서 깬 바로 그 순간, 나는 세계 제일의 변덕쟁이처럼 결심을 바꾸었다.

    고백하지 말자!

    도대체 무슨 짓이야. 만약 공작이 내 착각에 놀라며 곤란한 낯으로 거절한다면? 상상만으로도 창피해서 사망이다, 사망! 게다가 공작과 더는 친구로도 지내지 못하겠지. 우리는 어색하게 서로를 피할 것이고 톡톡조차 하지 않게 될 게 분명하다.

    테이블에 그대로 두었던 편지를 읽어보았다.

    [왜냐하면 제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아, 새벽 2시에 눈물을 흘리며 쓴 일기도 이것보다는 낫겠다.

    사춘기 때 이런 일기 많이 썼었지. 다음날에 다시 보면 창피해 죽을 것 같은 일기. 어제는 솔직하게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아침에 보니 왜 이리 한심하고 감정 과잉인지 모르겠다.

    나는 편지를 들고 가운 차림으로 집무실로 갔다. 책상에 앉아 다시 새 종이를 꺼냈다. 이번에는 차분하게 생각하고 써야겠다.

    간단히 오해만 풀어주자. 오해 안 했을 수도 있지만, 찜찜한 것보단 나으니까.

    내가 트릭스터의 저주 때문에 레타 씨를 따라갔다고 쓸 수는 없으니까, 어제 썼던 것처럼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서…….

    아니, 잠깐만. 쓸 수 없는 거 확실해?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 뒤에 걸쳤다. 아침이 돌려준 이성이 열심히 활동했다.

    나도 할아범도, 저주에 대해 ‘말’하려 했을 때는 입이 열리지 않았지. 하지만 종이에 적는 건? 그건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잖아?

    만약 트릭스터의 저주를 종이에 써서 알릴 수 있다면, 어제 일어난 일뿐만 아니라 지나간 많은 일도 다 설명할 수 있다.

    될까?

    나는 새하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어제와는 다른 의미로 쿵쿵 뛰었다. 긴장, 기대, 이상한 두려움까지…….

    펜 끝이 느리게, 하지만 확실하게 종이에 닿았다. 나는 잠시 그대로 머물다가 신중하게 글자를 적어 나갔다.

    [공작님, 미르아 헥센입니다.

    사실 저는 트릭스터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헉, 적힌다.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나는 나쁜 짓을 하려는 아이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럴 리 없지만, 할머니가 내 주위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방해할 것만 같았다.

    1분 정도 가만히 머물렀는데, 할머니는커녕 바람 한 줄기 느껴지지 않았다. 아침 햇살만 평화롭게 창가에 넘실거렸다. 부지런한 새들의 다정한 노래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씩 웃었다.

    저주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허점이 있다니! 할머니, 이건 몰랐지? 트릭스터도 별거 없구만?

    [누구와 어떤 대화를 하든, 마지막 대답은 제가 해야만 하는 이상한 저주입니다. 마지막 대답을 하지 않으면 온몸이 돌로 변합니다. 그래서 어제 브라운 레타 씨의 뒤를 급히 따라갔던 거예요.

    제가 이 저주를 받은 건 새해 첫날인데요, 그때…….]

    한 문장 한 문장 쉽게 완성되었다. 저주를 설명하는 편지 전체를 쓴 시간보다, ‘사랑한다’는 한 문장을 쓴 시간이 더 길다. 하긴, 저주 이야기가 더 쓰기 쉬우니까.

    [이렇게 편지로 저주를 알릴 수 있다는 사실을 더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거예요. 제아무리 트릭스터라도 완벽하지는 않은 모양이에요, 그렇죠?]

    의기양양한 심정으로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잠시 잉크를 날려 보낸 후, 종이를 접었다. 일이 너무 쉽게 풀려 얼떨떨하기도 하고, 기분이 좋기도 하고, 이상하게 섭섭하기도 하고.

    그래도 이 저주 때문에 공작과 가까워졌는데.

    아니야, 그래도 공작이 오해하게 두는 것보단 나아. 게다가 이걸 계기로 우리 둘이 협력해서 트릭스터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러는 사이에 어쩌면 공작의 마음도…….

    망상은 그만두자.

    공작에게 전할 편지가 교체되었다. 아침에 쓴 담백한 편지가 봉투로 들어가고, 밤에 쓴 고백은 내 손에서 구겨졌다. 얇은 종잇장이 구겨지는 소리가 귓가에서 바스락거렸다.

    쓰라린 안도와 후회를 동시에 느끼며, 집무실의 장작 난로 속에 편지를 던졌다.

    ‘당신을 사랑해요.’

    어제 내 심장에 새긴 글자가 불 속에서 까맣게 그을리더니 곧 재가 되어 사라졌다. 감정도 이렇게 쉽게 태워 없앨 수 있다면, 나는 단 몇 초 동안만 슬퍼하면 되었을 텐데.

    불꽃은 내 고백이 담긴 종이를 한낱 연료로 먹어치우고 태연하게 혀를 날름거렸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 한참이나 그 불을 노려보았다. 내 마음에, 어제와 같은 용기가 다시 찾아오기를 기다려 본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환한 아침이지 감상적인 밤이 아니었다. 마법의 시간은 끝났다.

    마침 할아범이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식사하셔야죠. 샌드위치로 갖다 드려요?”

    “아니, 오늘은 식당에서 든든하게 먹을래.”

    혼자 있기 싫어.

    난로에서 억지로 시선을 잡아 뜯었다.

    타닥타닥 불티가 튀는 소리만 나를 뒤따랐다. 이게 더 나은 결정이야, 고백은 무슨 고백,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나는 침묵으로 그 주장에 동의했다.

    -

    텅 빈 집무실.

    잉크병, 장작 난로, 공기 정화용 식물. 헥센 백작과 일상을 함께하는 사물이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아주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그 평화의 공간에 침입했다.

    이 존재는 문이나 창문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헥센 백작이 편지를 태운 장작 난로 앞에 불쑥 솟아났다.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늙수그레한 할머니의 형상을 한, 트릭스터였다.

    주름진 입술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거친 나무토막 같은 손을 난로 쪽으로 뻗었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애들이군.”

    난로 속의 시간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흩어진 재가 다시 모였다. 편지는 거의 다 타서 부스러졌다가, 반만 불탔다가, 맨 처음 불에 닿은 모서리만 새까맣다가, 온전해졌다. 그 후 중력을 거슬러 트릭스터의 손아귀로 떠올랐다.

    트릭스터는 배부른 고양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편지를 잡았다. 시간이 완벽하게 되돌려진 덕에, 종이에는 접힌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

    트릭스터는 그 자국대로 편지를 접었다. 그런 다음 태연하게 봉투의 내용물을 바꿔치기했다.

    그녀는 저주의 내용이 적힌 편지를 천천히 읽어 보았다. ‘제아무리 트릭스터라도 완벽하지는 않은 모양이에요, 그렇죠?’라는 문장을 읽을 때는,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샜다.

    “남한테 말하면 안 된다니까. 예외는 집사 하나로 족해.”

    저주에 대한 증언은 그대로 불에 던져졌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고 재가 되어 부스러졌다.

    그것은 트릭스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연기보다 더 은밀히 사라졌고, 돌아온 헥센 백작이 편지 봉투를 챙기는 모습을 어두운 곳에서 지켜보았다.

    [작품후기]*아 여러분 우리의 노란장미 브라운 레타를 가엽게 여기는 분들이 많던데 걱정하지 마세요...:D 답장ㄴㄴ는 억울한 사람 없는 해피해피를 지향합니다 껄껄 그렇다고 다같이 산다는 건 아니고요ㅋㅋㅋㅋ

    *가끔 코멘트에서 '공작한테 이런 방법으로 저주를 알릴 수도 있지 않나요?'라고 말씀 주신 분도 계셨는데 무슨 방법을 쓰든 우리의 할머니는 빈틈이 없으셨을 겁니다ㅋㅋㅋㅋ 너무 스포같아서 딱히 후기에서 언급하진 않았는데, 이번편에 나왔으니깐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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