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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하지 마세요-55화 (55/74)

*여러분 모두모두 고마워요!!!55회

네 저주를 남에게 알리지 말라연참 1/2

유릭스의 머릿속에서 아까의 장면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브라운 레타는 그 오싹한 차림새에도 불구하고 호쾌한 미남이었다. 그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가련하게 ‘너무합니다!’라고 외치고 사라졌을 때, 백작이 멍하게 넋을 놓은 것도 이해가 갔다. 그녀도 사람이니 미남의 눈물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금방 올게요!’

헥센 백작이 그렇게 급히 달려나갈 줄은 몰랐다. 너무 놀라서 붙잡았는데, 그녀는 거세게 손을 뿌리치기까지 했다.

브라운 레타에게 생명이라도 맡겨 두었나 싶을 정도로 절박한 몸짓이었다.

하늘색 이브닝드레스를 펄럭이며 달려가는 헥센 백작의 뒷모습이 가슴에 못처럼 박혀 녹슬어갔다. 차마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유릭스는 그게 백번 옳은 결정이었다고 믿었다. 만약 그때 백작의 뒤를 따라갔다면…….

어쩌면, 브라운 레타를 붙잡고 열정적인 키스를 퍼붓는 백작을 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유릭스는 붙박인 듯 서서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선명한 깨달음이 호되게 그를 질책했다.

‘레타 경을 경계했는데, 방해꾼은 나였어.’

분명 헥센 백작도 브라운 레타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열렬히 마차 뒤를 쫓았을 리가 없다.

유릭스는 백작이 뿌리친 손을 내려다보다가 꾹 주먹을 쥐었다.

찬란한 달빛을 받으며 멀어지던 그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급박하게 찰랑거리던 검은 단발머리. 힘차게 바닥을 박차던 두 발.

그때 그녀의 심장은 얼마나 강인하게 뛰었을 것인가. 그녀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브라운 레타가 마차 아닌 용을 타고 사라졌어도 반드시 찾아내겠지. 그리고 누구보다도 뜨거운 열정을 품고 그에게 고백할 것이다.

‘저도 좋아해요. 정말로 좋아해요. 전부터 계속 좋아했어요.’

지금쯤 그토록 황홀한 고백을 선물 받고 있을 브라운 레타가 끔찍하게 미웠다. 황금보다 귀하고 잘 익은 술보다 향기로운 백작의 마음을, 브라운 레타는 허겁지겁 폭식하고 누구와도 나누지 않을 것이다.

상상은 잔인하게 유릭스를 짓밟았다. 백작은 이슬 내린 장미 같은 입술을 브라운 레타에게 허락할 것이다. 유릭스가 그랬던 것처럼 브라운 레타 역시 허겁지겁 그 입맞춤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더한 것을 욕심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 그 권리는 헥센 백작의 선물이니까.

사랑에 몸 바친 청년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백작은 거듭 사랑을 속삭이겠지……. 연인의 달콤한 대화가 들리는 듯했다.

‘레타 경, 당신을 사랑해요.’

‘정말입니까? 데이라 공작과 함께 있어서 오해했는데…….’

‘그분과는 친구일 뿐이에요. 내 마음은 오직 레타 경, 당신 것입니다.’

‘확인해 봐도 좋을까요?’

‘입 맞춰 보세요. 내 입술에 진실뿐임을 알게 될 거예요.’

음악처럼 오가는 밀어, 초승달처럼 은밀하고 종달새처럼 사랑스러운 눈짓, 야릇하게 얽히는 두 사람의 손가락…….

너무나도 낯설고 강렬한 감정이 유릭스의 온몸을 불살랐다.

뜨거운 불덩이가 배 속에서부터 기어올랐다. 위장을 모조리 태우고 명치를 지나더니, 심장을 잡아먹고 목구멍에서 넘실거렸다.

이대로 헥센 백작을 만날 수는 없다. 얼굴이 엉망일 것이다. 실제로, 옆에 선 경비병과 집사는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어두운 밤거리에서 야수와 마주치기라도 한 양.

그는 집사를 향해 말했다. 목소리가 요동쳤다.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보겠다고 전해주십시오.”

유릭스는 추악한 속을 감추듯 급히 돌아섰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마차까지 갔는지도 몰랐다. 직접 마차 문을 열자, 안에서 반쯤 졸고 있던 레이번이 번쩍 눈을 떴다.

“공작님?”

“돌아간다.”

“네? 하지만…….”

“어서.”

헥센 백작과 브라운 레타는 다정스레 한 마차를 타고 돌아오겠지. 그 안에서 이미 모든 오해를 풀고 달콤한 한때를 누렸을 것이다. 헥센 백작은 지금쯤 작은 새처럼 브라운 레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밀애의 시간을 음미하고 있으리라.

그 모습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태연하게 둘을 축복할 자신도 없었다. 차라리 무례하고 황당한 자로 낙인찍히는 편이 나았다.

“빨리 출발해.”

레이번은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마부석 쪽을 두드려 마차를 출발시켰다. 유릭스는 고통스럽게 뛰는 심장 위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동화 속 한 장면처럼 아름답던 정원이 이제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아, 나는 이토록 옹졸한 사람이었나. 이대로 가버리면 헥센 백작이 얼마나 의아하고 황당할 것인가. 오늘 찾아오라는 한 마디에 여왕의 부름을 받은 시종처럼 헐레벌떡 달려와 놓고, 작별인사조차 없이 사라지다니. 얼마나 별 볼 일 없는 인간으로 보일까.

그래도 할 수 없었다.

맞은편에 앉아 눈치를 살피던 레이번이 슬쩍 물었다.

“고백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셨습니까? 표정이 왜…….”

레이번은 가끔 욱하는 순간이 있지만, 상단의 레디아나 집사 할아범처럼 거침없이 구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는 눈보라 치는 언덕에 홀로 버려진 듯 보이는 공작을 살피다가 어물어물 말을 흐렸다.

레이번의 말을 듣자, 한 가지 안도할 거리가 떠올랐다.

‘고백하지 않아 다행이다.’

참으로 비참한 안도였다.

자신이 그 아름답고 잔인한 분수 앞에서 고백했다면, 이미 브라운 레타를 마음에 품은 헥센 백작이 얼마나 난처했을 것인가. 당연히 거절당했을 테고, 불편해졌을 테고, 친구로 지낼 가능성조차 사라졌을 테다.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지금쯤이면 백작과 브라운 레타가 저택으로 돌아왔겠지. 자신이 가버린 사실도 집사에게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백작은 크게 아쉬워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막 오해를 풀고 화해한 연인과 아늑한 시간을 보내야 할 테니까…….

쓰라린 상념에 잠긴 사이, 마차는 유릭스의 저택에 도착했다. 그가 숨 막히는 슬픔을 잊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유릭스는 한 나라의 존망이 걸린 전투에서 패배한 장수처럼, 만신창이가 되어 자신의 침실로 돌아왔다. 레이번이 뭔가 위로의 말을 하려고 끙끙거리는 걸 알아차렸으나, 지금은 기사에게 고마움을 표할 기운조차 없었다.

달칵, 침실 문이 닫혔다.

“하아…….”

유릭스는 문에 기대고 선 채 괴로운 한숨을 토했다.

수만 가지 감정이 천둥이 기른 야생마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그 포악한 말은 유릭스의 내면을 마음껏 짓밟았다. 풍요롭게 부푼 언덕을 사나운 앞발로 파헤치고, 관목 사이를 다니며 가지를 부러뜨렸다.

유릭스는 무력하게 선 채 실연의 아픔을 느꼈다. 그 아픔이 자신의 영혼까지 학대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백작은 브라운 레타와 웃고 있으리라. 그것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진실이었다.

진정 백작을 사랑한다면, 응당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대신 앞뒤를 생각하지 않고 달려가 백작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가슴의 불덩이를 토해놓고 싶었다.

브라운 레타 대신 나를 선택하라고, 내가 당신께 더 나은 남자라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하면, 백작님은 나를 경멸하겠지.’

그녀의 고결한 성실과 드높은 긍지를 생각할수록 무모한 충동이 사그라졌다. 백작은 잠시 난색을 표하겠지만, 곧 친절하게 웃으면서 그를 거절할 게 분명했다. 그런 다음에 애인 있는 자에게 구애하는 모습에 소리 없이 실망하리라.

유릭스는 백작이 자신의 어떤 품성을 높이 사 친구로 받아주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도저히 그 올바른 면을 버릴 수가 없었다.

백작이 다른 남자를 선택한 이 순간에도.

‘잊어야 해.’

하지만 어떻게 잊는단 말인가. 다디단 목소리, 가늘고 연약해 보이지만 단호하고 강한 손, 의지와 용기를 간직한 눈, 꽃잎처럼 부드럽던 입술, 거짓으로나마 오갔던 고백. 그 모든 기쁨을 어떻게 잊으란 말인가.

유릭스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그는 가시라도 깔고 앉은 사람처럼 벌떡 일어났다. 물론 정말 가시를 깔고 앉아서는 아니었다.

톡톡!

선명한 알림음이 그를 깨웠다.

헥센 백작이다. 유릭스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바로 달려가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치열하게 다투었다.

아마 백작은 이런 톡톡을 보냈을 것이다.

‘먼저 가셨네요! 제 애인을 소개해 드리지 못해 아쉬워요. 물론 공작님은 레타 씨를 이미 알고 계시지만요.’

‘나중에 셋이 같이 식사라도 해요^^ 우린 좋은 친구니, 공작님도 저희 사랑을 축복해 주시겠죠?’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단두대 앞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죄수처럼, 유릭스는 톡톡 앞으로 끌려갔다. 아무리 슬프고 절망적이어도 그는 백작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톡톡을 확인했다. 화면에 선명한 문장이 떠올라 있었다.

[먼저 가셨네요. 바쁜 일이 있으시다고 들었어요.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한 것 같아서 마음에 걸리네요.]

[사실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중요한 얘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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