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절벽엔딩을 잠깐 상상해보았습니다ㅋㅋㅋ 곧 다음편으로 올게요!53회
네 저주를 남에게 알리지 말라“제게…… 실망하셨습니까?”
턱이 뚝 떨어졌다. 정말, 얼굴은 그대로 멈춘 상태에서 아래턱만 뚝 떨어졌단 소리다. 나 방금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야?
공작이 농담입니다, 라고 외치며 웃기를 기다렸는데 침묵만 이어졌다. 이러다 내가 돌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긴 침묵이었다. 공작은 그동안 좌절이 먹구름처럼 짙어지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오해를 어떻게 풀어줘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세련된 말은 떠오르지 않으니 그냥 간단하게 부정하자.
“아뇨, 전혀 아닌데요.”
“…….”
“어…….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저희 분명히 미리 약속한 거였고요. 그냥 열쇠로 생각하자고 서로 이야기했으니까 그걸로 된 거 아니었나요?”
“제가.”
답하는 공작의 목소리가 떨렸다. 잔잔한 연못에 바람이 스쳤을 때처럼, 아주 미세한 떨림이었다. 아마 공작을 잘 몰랐다면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정도의, 작은 동요. 얼굴에도 딱 그만큼의 슬픔이 어려 있었다.
늘 침착하던 사람이 흔들리자 나도 깜짝 놀랐다.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오는 줄 알았더니, 왜 이러는 걸까?
“제가 다른 마음으로 그랬다면…….”
“네?”
“저는, 백작님과 한 모든 일을 열쇠로 생각하지…….”
바위에 박힌 검을 뽑듯, 공작이 무언가 비장한 한 마디를 꺼내던 그때.
“백작님! 백작니이임! 백작님, 문 좀 열어주세요!
저택으로 들어오는 철문 쪽에서 요란한 고함이 들렸다.
소란을 알아차렸는지 저택에서 할아범이 뛰어나왔고, 경비원들의 고함이 뒤를 이었다.
“미리 약속도 안 되어 있다면서요! 돌아가십시오!”
그러나 나는 일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왜냐면 목 놓아 나를 부른 저 목소리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기억 못 할 리가 없지, 바로 오늘 낮에 만난 그 미친놈이니까!
“자, 잠시만요, 공작님. 제가 가서 해결할게요.”
보통 또라이가 아닌지라 내가 가야겠다. 공작을 이대로 두고 가기도 미안해서, 일단 두 손으로 공작의 팔을 잡았다. 내 손이 닿은 순간 공작이 앉은 채로 움찔했다.
나는 그 푸른 눈을 들여다보며 당부했다.
“여기 잠깐 계시다가 저랑 마저 얘기해요. 알겠죠?”
“네. 하지만, 브라운 레타 경의 목소리 같았는데…….”
“맞아요. 금방 갔다 올게요!”
공작이 대답하기 전에 냅다 뛰었다.
할아범도 정원을 가로질러 철문 쪽으로 뛰는 게 보인다. 나이 들어서 저렇게 전속력으로 달리다니.
공작이 뭔가 말하려고 했다. 뭔가, 뭔가 심상치 않은 말을 하려고 했어. 빨리 저 불청객을 돌려보내고 공작에게 돌아가야 한다.
과연 브라운 레타 씨는 문 밖에서 경비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큰 고객이니 마구 내쫓기도 그렇고, 진짜 난감한 상황이네.
철문 너머로 나를 본 레타 씨가 반갑게 외쳤다.
“백작님, 백작님! 역시 와주셨군요. 먼 곳에 계셔도 당신이라면 제 외침에 이끌리실 줄 알았습니다! 우리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운명의 별을 백작님도 느끼셨지요? 아, 별빛에 젖은 당신의 모습이여, 경탄을 금할 수 없어라!”
진짜 얘한테 화술 가르친 선생 잡아다가 평생 이놈이랑만 얘기하는 형벌을 내려야 한다.
이쪽으로 오던 할아범도 걸음을 멈추더니 토하는 시늉을 했다. 경비원도 자기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래, 이해한다.
나는 문을 사이에 두고 레타 씨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 밤에…… 무슨 일이세요?”
이를 꽉 깨물고 말하느라 턱이 아플 지경이다. 그러나 이 눈치 없는 놈은 발랄하게 외칠 뿐이었다.
“아까 길을 걷다가 백작님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장미 꽃다발을 봤지 뭡니까. 무척 고민했지만, 이 노란 장미를 백작님께 드리지 않으면 잠자리에 장미 넝쿨이 감긴 듯 아플 듯하여 이렇게 달빛 쏟아진 밤길을 달려왔습니다!”
그러면서 레타 씨가 불쑥 꽃다발을 내밀었다. 물론 문 밖에서.
“백작님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노란 장미 꽃다발은 확실히 예뻤다. 한 송이 한 송이가 그렇게 크지 않았고, 그 작은 것들이 모여 있으니 앙증맞기까지 했다. 줄기는 가시 하나 없이 말끔히 손질된 상태였고, 상한 꽃잎은 한 장도 없었다. 심지어 물까지 뿌려 왔는지 꽃잎마다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꽃다발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어깨와 가슴을 부풀린 샛노란 재킷과 초록색 나팔바지……. 설마 일부러 장미꽃처럼 입고 온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차라리 아까 그 빨간 재킷이 훨씬 나아.
“…….”
진짜 뭐라고 해야 하냐.
“안 받을게요.”
“네?”
“이렇게 한밤중에 불쑥 찾아오셔서 꽃다발을 내밀면 제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갑자기 사랑한다고 하면 제가 뭐라고 해야 하나요.”
“저, 그건…….”
레타 씨의 낯빛이 싹 바뀌었다. 그가 우물우물 망설이더니 내게 한 마디 했다.
“하지만, 분명 백작님은 이런 걸 좋아하신다고…….”
“네? 누가요. 누가 제 얘기를 하던가요?”
그때, 뒤에서 누군가 슥 다가왔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올 사람은 할아범밖에 없는데, 할아범은 내 오른쪽에 있다. 누군가 싶어서 뒤를 돌아보았다가 심장이 떨어지도록 놀랐다.
“공작님!”
저기서 기다리고 있으라니깐!
공작이 나를 한 번, 레타 씨를 한 번 바라보았다. 달빛 때문인지는 몰라도, 레타 씨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기묘하게 차가웠다. 공작은 몇 초 정도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레타 씨를 향해 물었다.
“제가 즐거운 시간을 방해했나요?”
아주 낮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따지듯 물은 것도 아니고 사나운 어조도 아니었는데, 내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건 레타 씨도 마찬가지인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공작은 당장 결투라도 할 기세였다. 왜 이러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난 내 정원을 결투 장소로 빌려줄 마음이 추호도 없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급하게 끼어들었다.
“제, 제 손님이세요. 이제 바로 돌아가실 거예요. 그렇죠?”
“하지만…….”
“제가 백작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어서요.”
공작이 온화한 미소를 띠우며 레타 씨의 말을 끊었다. 분명히 표정은 온화한데 주먹은 꽉 쥐고 있다. 왜, 왜들 이렇게 경직되어 있는지 몰라. 공작은 최대한의 인내를 발휘하는 게 분명한 태도로 꾹꾹 눌러 뱉었다. 레타 씨의 차림을 훑어보면서.
“오늘 평소와는 아주 달라 보이시네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렇게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미리 약속되지 않은 방문인 것 같은데 이만 돌아가시죠.”
레타 씨는 사기라도 당한 사람처럼 나와 공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잘생기고 우스꽝스러운 얼굴에 아이처럼 천진한 배신감이 어렸다.
그는 노란 꽃다발을 들고 있던 팔을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장미가 일제히 바닥으로 얼굴을 떨구었다. 처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니라고 하셨으면서……. 백작님, 분명히 아니라고…….”
“레타 씨, 좀 진정하시고요.”
달래려고 말을 시작했는데, 레타 씨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와 공작을 바라보더니 팩 등을 돌렸다.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
“너무합니다! 말을 해주시지!”
탁탁탁, 수치심과 슬픔을 안은 채 멀어지는 구둣발 소리. 마차 문 열리고 닫히는 소리. 천천히 속도를 내는 마차.
그리고 내게 찾아온 깨달음 하나.
경비원에게 빽 소리쳤다.
“문 열어요!”
경비원은 한밤의 미친 쇼에 혼이 나간 얼굴로도 재빨리 문을 열어주었다. 소리 없이 열린 철문 사이로 바로 튀어나가려 했다. 빌어먹을 마지막 대답을 사수하기 위해!
“백작님!”
공작이 내 팔을 낚아채듯 잡았다. 근데 지금 이럴 시간이 없어요! 당신이 하려던 중요한 말도 못 듣고 돌덩이가 될 수는 없잖아!
나는 팔을 휘둘러 공작의 손을 뿌리쳤다.
“금방 올게요!”
마차 뒤를 따라 달렸다. 마차는 사람 속도 모르고 멀어져 갔다. 안 돼, 안 돼, 안 돼! 할머니, 진짜 나한테 이럴 순 없어! 저 망할 놈은 대답 안 하고 도망가는 게 특기야! 차라리 공작처럼 꼬박꼬박 대답해서 사람 미치게 하는 게 나아!
“레타 씨! 레타 씨!”
목이 터져라 불렀다. 누가 들으면 날 버리고 떠나간 연인 잡으러 가는 줄 알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 그것보다 더 위급한 상황이야, 목숨이 걸렸어!
주위 풍경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마차, 마차, 멀어지는 마차만 보였다. 말발굽 소리, 바퀴 굴러가는 소리, 나를 돌덩어리로 만들기 위해 시시각각 다가오는 운명의 발소리!
“야, 서라고오오!”
높은 비명이 밤하늘을 찢어버릴 듯 울렸다.
그걸 마지막으로 마차가 작은 점처럼 변해 멀어져 갔다. 더, 더는 못 뛴다. 나는 망연히 마차 뒤꽁무니를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이제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빨리 저택으로 달려가서 톡톡으로라도 답장을 보내야 하나. 그것도 인정해 주나. 아니, 돌이 되기 전에 레타 씨에게 톡톡을 보낼 수 있나. 공작은? 공작한테는 뭐라고 하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일단 다시 저택으로 뛰자!
굳게 결심하고 반쯤 몸을 돌린 그때.
기적처럼 마차 소리가 가까워졌다. 멀리 사라지던 마차가 다시 내게 가까이 오고 있었다. 내 쪽으로 향한 말머리를 보고 안도감에 몸이 무너질 뻔했다.
이 무례하고 상식 없는 놈 때문에 돌 되어 죽을 뻔한 게 벌써 두 번째다. 욕이라도 퍼부어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게 한이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마차 쪽으로 걸어가려던 순간.
갑자기 공작의 한 마디가 머리를 스쳤다.
‘레타 경은 마법사들 사이에서 반듯하고 친절하기로 유명합니다. 마법사 중에 그런 상식인은 드물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패션. 믿을 수 없는 수준의 의사소통 능력.
공작은 레타 씨를 보고 이렇게도 말했다.
‘오늘 평소와는 아주 달라 보이시네요.’
섬뜩한 예감이 가슴을 스친다. 뛰느라 땀이 솟은 몸이 금세 차가워진다. 등이 오싹하다.
마차가 마침내 내 앞에 멈췄다. 마차를 끄는 말의 콧잔등에 요사스러운 달빛이 어른거리고, 그 커다란 눈은 어쩐지 나를 노려보는 것만 같다. 지나다니는 이 하나 없는 고요한 거리. 바람이 흔들리는 나뭇잎. 숨을 죽이며 노래조차 하지 않는 벌레와 새들.
마차 문이 열린다. 우스꽝스러운 노란 재킷과 초록색 나팔바지를 입은 남자가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땅을 밟는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꽃다발이 들려 있다.
아까는 황당하기만 하던 이 남자가, 갑자기,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워진다.
하지만 도망칠 수는 없겠지.
이 존재가 바로 내 인생의 모순이라면.
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바람이 일제히 달려들어 눈이 시렸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눈앞의 존재를 노려보았다.
“당신.”
두려워하지 마. 용기 잃지 마. 두 손을 세게 말아 쥐며 추궁했다.
“당신 트릭스터지?”
[작품후기]레티엘님, 하날애이기님, 알트라님, 젤라튄님, ㅇㅁㄴㄹ님, 푸른물속유영님, Jevawok님, treehyun0208님, hihihu님, 시루떡S님, Rmdpr님, 알수없는게시자님, Nermaki님, 씰버라이트님, 너와나는토깽이님, 쥬썅님, elffy님, 모라별님, 수수무님, Jnancy님, ERTAF님, ㅣ이자벨ㅣ님, 싱싱한알래스카연어님, bluestblue님, 빠라람님, Elian.Elenist님, 더블뚝님, 라바트님, 진데렐라님, 뉘시님, lcanUcan님, 김뭄님, 0스텔라0님, 아아아아야님, 로판의마당발님, 고희님, 켠G님, 눈ㅅ눈님, 까망도롱뇽님, 카인G크리티카님, 돈없어님, 메옴님, 웅앵쓰님, 포포체님, 뀨우뿌님, feelso0님, 누에삐오님, coralyak님, 축하하면사실될일님, 네버린a님, 김형서님, 오리쓰님, 빵쓰님, 푸들은요정입니다님, 슈크림붕어님, 쏨쏨이네님, 미아미님, 티라노사우르스11님, 조코난님, chatterbox님, 그냥쓰면님, 석류가님, 찌니찌나님, wjrmaxhd님, 십오월님, 이상해꽃님, 노네임2님, LEeOo님, 베리피치님, Likry님, 썹ol님, 레몬e님, 레이dk님, 장동우킬러님, 소를리님, 여우와부엉이님, HETH5622님, 선풍기가빙글님, pato님, reezbon707님, 가락식혜님, 상큼한바람님, dewdrop님, 또이이잉님, OMG0916님, 033님, 빛부스럼님, Sen98님, 전편 코멘트 모두 감사합니다//ㅅ!
*기획 단계에서 예상한 이번편 반응: "헉 저게 진짜 트릭스터면 여주 죽이는 거 아니냐;;; 개무서워;;;"
그러나 지금 할머니의 이미지가 너무 친근해져버렸네요... 역시 이맛에 소설씁니다 낄낄낄 뭐든지 예상대로 안 되는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