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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하지 마세요-52화 (52/74)
  • .52회

    네 저주를 남에게 알리지 말라농담한 건가? 아니, 농담을 이렇게 진지하게 한다고?

    깜짝 놀라서 바로 답장을 보냈다.

    [지금 오신다고요?]

    몇 분을 앉아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근데 공작에게선 답장이 없었다. 진짜 바로 책상 앞을 떠나서 준비하러 간 건가?

    그럼 나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벌떡 일어나며 목소리를 높였다.

    “할아범, 할아범!”

    -

    마차가 움직이는 소리마저 경쾌했다. 바퀴가 구르는 소리, 말발굽 소리, 이따금 말들을 재촉하는 마부의 목소리가 즐겁기 이를 데 없었다. 옆에 앉아서 궁시렁거리는 레이번의 목소리마저 듣기 좋았다.

    “갑자기 이 밤중에 백작한테 가시다니……. 오랜만에 일찍 자려고 했단 말입니다.”

    “경은 저택에 있어도 된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공작님을 어떻게 혼자 가시게 합니까. 백작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자기 기사한테 존경 못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백작님은 그런 오해를 하는 분이 아니야. 그분의 인품이 얼마나 훌륭한지 경은 아직 몰라.”

    레이번이 기가 막혀 입을 다문 줄도 모르고, 유릭스는 헥센 백작 생각에 잠겼다.

    백작이 선뜻 오늘 오라고 해주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생생한 열정과 기쁨을 몰랐다. 그러나 헥센 백작이 오늘 오세요, 라고 말한 순간, 유릭스는 단숨에 환희에 사로잡혔다.

    ‘그래, 브라운 레타는 잊어버리자.’

    근거 없는 낙관이 유릭스의 가슴을 부풀렸다.

    헥센 백작이 브라운 이야기를 꺼냈을 때, 심장이 떨어질 정도로 놀랐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상상력은 실로 놀라워서, 그는 단 몇 초만에 브라운 레타와 헥센 백작의 결혼식까지 상상하고 말았다.

    하지만 헥센 백작은 브라운 레타에 대한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당황스럽게 굴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안도했는지.

    그래도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며 확인하고 싶었다. 무엇을, 브라운 레타가 백작의 마음을 조금도 사로잡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렇게 자문한 유릭스는 곧 인정해야 했다. 그래, 지금 그걸 확인하고 싶어서 간다.

    아주 치사하고 정당치 못한 마음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스스로가 통제되지 않았다.

    지나간 일을 떠올리는 사이, 마차가 헥센 저택 앞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경비원이 커다란 철문을 열어주었다. 잠시 멈췄던 마차가 환히 불을 밝힌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런데 정원 중앙에,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창밖을 보던 유릭스가 상체를 세우며 단번에 자세를 바로 했다.

    “마차를 세워야겠어.”

    “여기서요?”

    “어서.”

    레이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나마 마부석 쪽을 두 번 두드렸다. 마차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마차 연 유릭스가 레이번을 돌아보았다.

    “경은 안에 있어도 좋아.”

    백작과 단둘이 만날 생각에 들뜬 그가 급히 마차 밖으로 나갔다. 천국에 발을 디딘 듯한 행복감이 밀려왔다.

    사실, 정원은 어느 모로 보나 평범했다. 정원 입구에서 현관까지 이어지는 넓은 길은 잘 다듬어져 있을 뿐, 화려하지도 독창적이지도 않았다. 그 길 양옆으로 늘어선 키 작은 관목들도 눈여겨볼 구석이 없었다. 정원 가운데 큰 분수가 있기는 했지만 이도 특별한 장식은 아니었다.

    그러나 헥센 백작이 서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정원의 나뭇잎 하나마저 특별해졌다.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다시 떨어지는 물방울조차 달콤했다. 더없이 마법적인 풍경이었다. 어쩌면 사랑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마법인지도 모른다.

    유릭스는 분수 옆에 선 헥센 백작을 향해 서둘러 나아갔다. 그러면서 마치 감탄사처럼 그녀를 불렀다.

    “백작님.”

    키 작은 정원등이 백작의 얼굴에 아른아른 빛을 던졌다. 유릭스가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 백작이 얼굴을 붉히며 조금 웃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였을 때, 길고 흰 목에서 달빛이 춤을 추었다.

    백작은 발목을 살짝 드러내는 길이의 하늘색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치맛단이 퍼지지 않는 차분한 옷이었다. 레이스 같은 장식이 전혀 없어, 우아하고 차분한 일상복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그제야 유릭스는 자신이 지나치게 정중한 차림으로 왔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헥센 백작을 만날 생각에 들떠 정장이나 다름없는 옷을 차려입고, 커프스며 행커치프 같은 액세서리까지 챙겼는데. 혼자 신이 나 왔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조금 부끄러웠다.

    그러나 헥센 백작은 언제나처럼 친절하게 웃을 뿐이었다.

    “공작님, 진짜 오셨네요.”

    “네. 내내 걱정했습니다.”

    내내 보고 싶었다고 말할 뻔했다. 당신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싶었다고 고백할 뻔했다. 그러나 유릭스는 현명하게 자신의 마음을 감추었다.

    다행히 헥센 백작도 무언가 이상한 기류를 읽어내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유릭스의 얼굴을 살피더니, 만들어낸 미소를 걸어 보였다.

    “특별한 문제가 있어서 오신 건 아니죠?”

    “네. 트릭스터 일도 있고, 얼굴을 뵈면 안심이 될 것 같아서요. 무례한 방문이 아니었다고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청합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필요는 없어요. 저도 무료하던 참이었는데요, 뭘.”

    그렇게 대답한 헥센 백작의 시선이 살짝 움직였다. 유릭스의 목에서 허리까지. 당장 연회에 참석해도 될 정도로 차려입은 그 모습을 보던 백작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몇 초 정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전에 없던 정적이 유릭스의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역시 내가 불편해지신 거야.’

    그날의 갑작스러운 키스 이후, 헥센 백작은 자신을 심하게 피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 모습을 사랑에 빠진 이의 수줍음이라 하겠지만 유릭스는 그 정도로 교만하진 않았다.

    유릭스는 기묘한 불편함을 이대로 모르는 척 넘기고 싶지 않았다. 그건 이미 저지른 잘못보다 더 비겁한 잘못이다. 브라운 레타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뤄야 했다.

    유릭스가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말했다.

    “백작님, 잠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여기요? 아, 네.”

    백작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금세 진정하고 분수대에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심각한 말을 하려고 이러나 고민하느라 느릿해진 백작의 움직임이, 유릭스의 눈에는 더없이 우아하게 비쳤다.

    유릭스는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눈높이가 맞았다.

    이 갑작스러운 행동에 헥센 백작이 놀라서 입을 벌렸다. 공작이 당연히 자기 옆에 앉으리라 예상했는데, 맞은편에 무릎을 꿇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유릭스가 말했다.

    “백작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물어보세요, 라고 할 줄 알았는데, 한참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헥센 백작은 전혀 다른 질문을 했다.

    “…혹시 꼭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야만 할 수 있는 질문인가요?”

    “네?”

    긴장되는 순간인데도 불구하고 유릭스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헥센 백작이 가끔 이렇게 엉뚱한 행동을 할 때마다, 유릭스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즐거웠다. 정적인 풍경 속을 걷다가 갑자기 어여쁜 흰 사슴과 마주친 기분이었다. 내내 사람 없는 설원을 헤매다가 작고 앙증맞은 발자국을 발견했을 때의 느낌 같기도 했다.

    유릭스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럼 그냥 옆에 앉아서 물어보시죠…….”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백작님께 용서를 빌어야 할지도 모르니 여기 있는 게 나을 듯합니다.”

    “…예?”

    백작의 얼굴에 바로 의문이 떠올랐다. 살짝 기울어지는 고개가 놀랍도록 사랑스러웠다.

    유릭스는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이제껏 자신을 괴롭힌 질문을 꺼내 놓았다.

    “혹시 지난번 제 저택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제가 불편해지셨나요?”

    “……예에?”

    또 그 표정이다. 헥센 백작이 가끔 보여 주는, 황당해 미치겠다는 표정. 실망하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힐난일지도 모른다. 유릭스의 심장이 빠르게 뛰며 불안을 알려 왔다.

    “백작님이 원치 않으시는데 제가 거칠게 행동해서, 마음이 상하신 건 아닐까 여쭤보고 싶습니다.”

    백작이 입을 딱 벌렸다. 유릭스 안에서 희망과 불안이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승자는 불안이었다. 유릭스는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제게…… 실망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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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얘넨 왜 이렇게 서로 사과를 많이 하나요?

    A. 제 취향입니다^^! 너무 좋아요! 서로 무릎 많이 꿇는 소설 있으면 제발 추천해주세요!

    *"네 실망했어요."

    "...ㅠㅠㅠㅠ"

    "이렇게 삽질을 하다니 실망했어요!"

    "...???"

    "공작님 좋아해요!"

    "...!!!"

    ~HAPPY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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