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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하지 마세요-51화 (51/74)
  • 51회

    네 저주를 남에게 알리지 말라연참 2/2

    아무래도 헥센 백작이 자신을 피하는 것 같다.

    [다행입니다. 어제 일이 무척 불편하셨을 텐데, 깊이 사과드립니다.]

    [아니에요. 공작님께도 똑같이 불편한 일이었을 텐데요.]

    [공작님, 제가 이제 업무를 해야 할 시간이라서요. 다음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백작님.]

    [감사합니다! 답장 안 주셔도 됩니다.]

    전날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백작이 업무를 해야 할 시간이라며 대화를 중단했다. 더 대화하고 싶었는데, 그날 일에 대해 더 자세히 묻고 싶었는데. 대화를 끝내고 싶은 기색이 역력한 백작의 답장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본래 누군가를 마음에 두게 되면, 이렇게 별것도 아닌 일에 가슴이 졸아드는 것일까.

    저녁 무렵에 다시 연락을 하면 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구실도 있었다. 트릭스터의 습격이 바로 어제였으니, 안전을 확인하는 연락은 자연스럽다. 아니, 직접 찾아가도 헥센 백작은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마음을 깨닫기 전이라면 그렇게 했을 텐데, 어쩐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신경이 쓰인다. 정말 미치도록 신경이 쓰인다.

    게다가 모임이 끝나던 날, 헥센 백작과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냐고 묻던 브라운 레타도 거슬렸다. 친구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의 슬픔과 조급함이란. 브라운 레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뭐가 다행이냐고 따져 물을 뻔했다.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

    생각할 게 너무 많아 머리가 복잡했다. 어찌나 헥센 백작 생각에 골몰했는지, 유릭스는 레이번이 들어온 줄도 몰랐다.

    “공작님, 아직도 이러고 계십니까? 또 헥센 백작 때문에 그러시죠? 그냥 연락해서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하세요.”

    “아니야. 느낌이 좋지 않아.”

    “도대체 왜요?”

    유릭스는 드물게 대답을 삼켰다.

    아무래도 잠긴 방에서 나눈 키스가 마음에 걸렸다. 헥센 백작은 정말로 내키지 않는 듯 입술만 가볍게 댔다가 바로 몸을 떨어뜨렸다. 그러고 나서 바로 고개를 돌려 문을 확인하는데, 단발머리 아래로 드러난 목과 턱, 붉은 입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헥센 백작을 안고 더 깊이 키스했다. 경솔한 짓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비겁한 마음도 있었다. 미리 약속하고 둘 모두 동의했으니까, 문을 열기 위한 행동이니까,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어떻게 그런 비열한 짓을 할 수 있었지?’

    그는 이제껏 모든 상황 속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려고 애써 왔다. 그리고 대부분은 성공했다. 그런데 헥센 백작 앞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홀로 사랑하는 상대 앞에서.

    헥센 백작이 그 비겁한 마음을 알아차린 건 아닐까. 그래서 피하는 것일까.

    “공작님?”

    유릭스는 레이번이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자책에 잠겨 있었다. 그의 마음에서, 본인은 다시없을 불한당이었고 헥센 백작은 너그럽게도 그 모든 잘못을 꾸짖지 않고 눈감아 준 천사였다.

    “공작님?”

    유릭스는 몰랐다, 그가 짝사랑의 한 증상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상대의 작은 행동에 대한 놀라운 과장과 망상이었다.

    이제 내가 싫어졌나. 친구로도 지내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백작님이 결혼이라도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아마 레이번이 주군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면, 심각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배를 잡고 뒹굴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이번은 기사지 독심술사가 아니었으므로, 목소리를 높여 주군을 망상에서 건져 주었다.

    “공작님, 톡톡 왔는데요!”

    레이번이 목소리를 높인 후에야 유릭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톡톡을 확인한 그의 눈이 커졌다. 그는 오랜 가뭄을 겪다가 단비 한 방울을 맞이한 듯 톡톡에 무섭게 집중했다.

    헥센 백작의 연락이었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여쭤보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키스 생각을 하고 있었던 탓인지, 무작정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어제 일을 꺼내며 도대체 왜 그랬느냐고 책망하면 어쩌지. 그녀가 말하기 전에 먼저 사과하는 게 옳을까. 한 번 방향을 잡은 부정적인 생각은 멀리까지 달려나갔다.

    그때 톡톡이 한 번 더 울렸다.

    [혹시 브라운 레타 씨를 아시나요? 어제 공작님 저택에도 왔었다고 들었어요.]

    레이번은 코앞에서 목격했다.

    순하게 풀어져 있던 유릭스의 눈빛이 일순 심각해졌다. 표정이 어두워지고, 입술에서는 웃음기마저 사라졌다. 딱 한 번 꿈틀거린 눈썹과 타자기를 두드리던 모양 그대로 허공에서 굳은 손에서, 초조와 불안, 막을 수 없는 질투가 진득하게 묻어났다.

    다른 남자 이야기를 왜 물어보지?

    -

    [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일로 물어보시는지요?]

    답장이 도착했다.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공작이 바쁘면 한참 후에나 답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레타 씨의 그 소름 돋는 유머감각과 감수성 때문에 연락한 건 아니다. 아니, 조금은 그런 이유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할아범 말대로 그 사람을 ‘처리’해 달라고 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할아범은 왜 갑자기 세상을 호러 장르로 만들고 그래. 옷 입은 게 마음에 안 들고 행동이 좀 무례하다고 사람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면, 밤길 무서워 살겠어?

    아까 대화를 급히 끝내버린 게 마음에 걸려서, 저녁쯤엔 내가 먼저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공작은 내내 톡톡만 쳐다보고 있었던 사람처럼 재빠르게 답장해 주었다. 그럼 이야기를 좀 이끌어 보자.

    [오늘 주문서를 받아서 오후에 만났거든요! 그런데 좀 독특한 분이시더라고요.]

    [그렇습니까? 레타 경은 마법사들 사이에서 반듯하고 친절하기로 유명합니다. 마법사 중에 그런 상식인은 드물죠.]

    [아 그렇군요!]

    상식인? 그게 상식인이라고? 마법사 사이에선 그게 반듯하고 친절한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 지난번에 공작 저택에서 본 마법사들은 적어도 레타 씨보단 나았는데?

    어이가 없어서 잠깐 손을 멈춘 사이 공작이 말을 던졌다.

    [그렇지 않아도 레타 경이 어제 백작님과의 관계를 묻더군요. 물론 백작님께 폐가 되지 않도록, 친구 사이일 뿐이라고 확실히 일러두었습니다. 혹시 그가 무례한 말을 하던가요?]

    [음, 조금 당황스러운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평판이 좋은 분이라고 하니 괜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레타 경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

    뭐라고 말하지? 그 사람이 내 ‘박력’에 반한 것 같다고? 막 낮의 별이 어떻고 밤의 태양이 어떻다는 개소리를 했다고? 자기가 새랑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했다고?

    무슨 소리를 해도 다 이상해.

    [특별한 말은 없었어요. 공작님은 오늘 잘 쉬셨죠?]

    어차피 레타 씨 이야기만 하려고 연락한 건 아니니까. 슬쩍 화제를 전환했다.

    [네. 백작님의 몸이 걱정이네요.]

    [아침에도 얘기했지만 전 아주 건강해요. 트릭스터가 감기까지 선물하진 않았나 봐요ㅎㅎ]

    [오랜만에 제 저택에 와주셨는데 좋지 않은 일이 많아 죄송한 마음입니다.]

    [공작님이 왜 죄송하세요. 다 트릭스터 때문이죠.]

    [혹시 한 번 찾아뵈어도 될까요? 얼굴만 뵙고 가도 괜찮습니다.]

    뭐야, 갑자기 훅 들어오네.

    너무 반가워서 바로 답장하지 못했는데, 공작이 연달아 톡톡을 보냈다.

    [그날 가실 때 제대로 챙겨드리지도 못한 일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어제 그런 일이 있었으니 트릭스터 일도 걱정이 됩니다.]

    [바쁘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제가 백작님 시간에 맞추겠습니다.]

    보통 한 줄로 길게 보내는 사람인데, 어쩐지 마음이 급한가 보다. 내가 바쁜 게 아니고 공작이 바쁜 것 같은데?

    공작이 와준다면야 좋지. 괜한 희망고문일지라도, 공작 얼굴을 보는 일이 싫을 리 없다.

    [공작님은 언제가 괜찮으세요?]

    [저는 당분간 저택에 있을 예정이라 언제든 괜찮습니다. 내일 아침에라도.]

    [이러다 오늘 온다고 하시겠어요!ㅋㅋㅋㅋ]

    [오늘 갈까요?]

    [ㅋㅋㅋ네 오늘 오세요 그럼]

    말이라도 고맙네. 공작이 나와 같은 마음으로 이런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만.

    나도 모르게 실실 웃고 있는데, 답장이 도착했다.

    [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예?

    [작품후기]*여러분 제가 어제 올릴 때 새 챕터 제목을 안 적고 그냥 그대로 올렸더라고요ㅋㅋㅋ 아무튼 새 챕터가 시작되었습니다...

    *내심 유릭스가 브라운을 쓱싹하길 바라신 분들이 계시다면 이번 작품은 피폐공포가 아니라서... 다다음 작품쯤에 뵙겠습니다 :D 제 유구한 취향 중 하나거든요ㅎㅎㅎㅎ 피폐없인 못 살아 정말 못 살아

    *하지만 지금같은 분위기도 너무 편안하고 좋아요ㅋㅋㅋ 뭔가 쓰는 제가 편안해요ㅋㅋㅋㅋㅋ 여러분도 가볍게 즐겨주시면 좋겠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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