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하지 마세요-49화 (49/74)
  • *여러분이 이렇게 한마음 한뜻으로 트릭스터를 찾는 날이 올줄이야 할머니가 감동하고 계세요... 저는 또 조만간 다음 장으로 오겠습니다! 여러분 많이 웃어주고 좋아해줘서 너무 고마워요//ㅅ49회

    네 저주를 남에게 알리지 말라아무리 사랑 때문에 마음이 아파도 일은 해야 하는 법이다. 힘들다고 일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 상단은 진작 망했다.

    흠, 아니, 나보다 일 많이 하는 직원들이 있으니 망하진 않았을지도 모르겠네.

    어쨌든 사랑은 사랑이고 생활은 생활이니, 아침 일찍 눈을 떴다. 톡톡을 한 번 확인한 다음, 일부러 좀 더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당장 급하지 않은 서류를 하나하나 꺼내 꼼꼼하게 검토하고, 하녀들이 알아서 할 걸 알면서도 괜히 집무실 책상을 닦고, 쓰레기통을 직접 비우기까지 했다. 계속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정신없이 기다리게 될 것 같았다.

    뭘 기다리냐면…….

    [백작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 그렇게 가셔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잘 쉬셨는지요?]

    공작의 아침 톡톡을.

    공작은 늘 그렇듯 친절하고 다정하구나. 남의 속도 모르고. 말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알겠느냐마는.

    시간을 확인하니 평소보다 이르다. 공작도 어제 내가 급히 저택을 떠나 고민이 많았나 보다. 별로 길지도 않은 말 속에서 공작의 망설임이 느껴진다고 하면, 너무 과장이겠지?

    타자기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네, 공작님도 편히 주무셨죠? 저는 어제 조금 일찍 잠들었어요. 몸은 전혀 문제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행입니다. 어제 일이 무척 불편하셨을 텐데, 깊이 사과드립니다.]

    [아니에요. 공작님께도 똑같이 불편한 일이었을 텐데요.]

    의례적인 대답을 하고 나니 마음이 무겁다. 그래, 공작도 키스며 고백은 부담스럽고 불편했겠지. 혹시 내 짧은 고백 속에서 진심의 흔적을 발견하진 않았을까 걱정이다.

    대화를 더 잇고 싶은 마음과 여기서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다투었다.

    그때, 내 결정을 도우려는 듯 할아범이 들어왔다. 손에는 주문서를 든 채였다.

    “아가씨, 벌써 일하시네요. 주문서 왔습니다.”

    “아, 응. 잠깐만.”

    [공작님, 제가 이제 업무를 해야 할 시간이라서요. 다음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백작님.]

    [감사합니다! 답장 안 주셔도 됩니다.]

    이렇게 말해도 또 답장하겠지 싶어서, 잠시 톡톡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공작은 정말 거기서 대화를 끝냈다.

    …이게 고마운 일이기는 한데 괜히 기분이 이상하네. 점 하나까지 보내 가며 마지막 답장을 사수하더니, 이젠 이렇게 쉽게. 뭔가 마음이 변했나.

    답장 하나 가지고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것도 병이다, 병.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버리려 애쓰며 할아범으로부터 주문서를 받아 들었다. 할아범은 내가 주문서를 읽기도 전에 재빨리 설명했다.

    “꽤 유명한 마법사인데, 대량 구매를 할지도 모릅니다. 아가씨와 직접 이야기를 나눈 다음 결정하고 싶다더군요. 자기 톡톡은 있으니, 적힌 번호로 연락 달라는데요.”

    “응, 알겠어. 마법사 주문은 오랜만이네.”

    주문서를 내 톡톡 옆에 내려놓았다. 상대의 번호를 입력하는데, 가지 않고 기웃거리던 할아범이 슬쩍 물었다.

    “그것보다, 공작한테는 연락 안 왔습니까?”

    “왔어. 아침 인사야.”

    “일이 많았는데, 그냥 아침 인사요? ‘보고 싶은 나의 천사, 미르아에게.’ 이렇게 온 건 아니고요?”

    “소설 써?”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할아범은 정말로 달콤한 로맨스를 기대한 듯, 입술을 비죽거리다가 휙 돌아서 나가 버렸다.

    공작 생각을 안 하고 싶어도 주위에서 이렇게 난리를 치니 마음을 잡을 수가 있어야지. 일이나 하자.

    주문서의 이름부터 확인했다.

    브라운 레타. 여기도 꽤 큰 마법사 가문 아니었나? 웬만큼 힘이 있는 곳이니 할아범이 내게 가져다 줬을 것이다.

    [브라운 레타(16219494)와 연결합니다. 이전 대화 내역을 모두 불러옵니다.]

    [대화 내역 복원 중…… 복원 결과 0]

    첫 인사는 이미 준비되어 있다.

    [안녕하세요! 당신을 더욱 빠르게, 유쾌하게, 가볍게 만들어줄 최고의 친구 ‘톡톡’에서 연락드립니다.]

    [저는 헥센 상단주 미르아 헥센입니다. 주문서 관련해서 연락 드렸습니다. 확인 후 편하실 때 답신해 주세요^^]

    연락하기 조심스러울 정도로 이른 아침은 아니지만, 그래도 답장이 오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다. 다른 일이라도 하면서 기다릴까 싶어서 옆에 쌓아둔 서류철을 뒤적이는데, 갑자기 톡톡이 울렸다.

    [헥센 백작님, 반갑습니다!]

    [저는 브라운 레타입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백작님과 이렇게 직접 이야기를 나누게 되니 기쁘네요!]

    [네, 저도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영광입니다!]

    [주문서에는 저와 직접 이야기를 나눈 후 대량 구매를 결정하고 싶다고 적어 주셨는데요, 어떤 부분을 도와드리면 좋을까요?]

    [음, 사실]

    [이렇게 톡톡으로 하긴 조심스러운 얘깁니다.]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으신가요?]

    아하, 왜 이러지?

    이 사업을 오래 하다 보면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게 된다. 이렇게 대뜸 상담하고 싶다고 해놓고 잡담을 늘어놓는 사람도 많았다. 근데 몇 마디 나누지도 않고 갑자기 직접 얼굴 보자고 하니 당황스럽네.

    주문서를 좀 더 꼼꼼하게 읽었다. 예정 구매 수량은 대략 5백 개 정도. 적은 숫자는 아니다.

    그냥 허세부리는 놈일 수도 있지만, 혹시 또 모르지.

    게다가 계속 저택에 있으면 데이라 공작 생각만 날 것 같다. 지금은 최대한 바쁘게 움직일 필요가 있으니, 가서 만나자.

    결정을 내리고 나니 대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네, 좋습니다. 수도에 계신가요?]

    [네. 사실 데이라 경 저택에서 열린 사교 모임에도 참석했습니다. 우린 어제도 같은 장소에 있었던 셈이지요^^]

    [아, 그러시군요! 그럼 가까이 계시겠네요.]

    [오늘 당장이라도 가능하니 백작님 시간에 맞추겠습니다. 좋은 만남은 멀리 있는 별이 가까운 행성으로 빨리 오고 싶어 하듯이 빠를수록 좋으니까요~]

    [그럼 세 시쯤 뵐까요?]

    [좋습니다. 같이 향긋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비스킷처럼 나누고, 한결 가까워진 채로 저녁까지 함께한다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일부러 저녁 같이 안 먹으려고 애매한 시간 잡았더니.

    게다가 말투도 묘하게 부담스럽다. 좋은 만남은 멀리 있는 별이…… 뭐? 그거랑 만남이 빠른 거랑 무슨 상관인데. 문장도 이상해.

    나가지 말까. 근데 이미 나간다고 했잖아. 으으으, 큰 고객일지도 모르는데. 어차피 저택에 있어 봤자 공작 생각이나 날 거고.

    그래, 톡톡으로 사람 판단하지 말자. 어쩌면 아직 톡톡에 익숙하지 않아서 이러는 건지도 모르지.

    최대한 담백한 대답을 골랐다.

    [제가 저녁에는 선약이 있어서요. 다섯 시쯤에는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오, 아쉽네요! 백작님과 맛있는 식사를 즐기는 상상을 하는 동안 무척이나 행복했는데요.]

    [네, 저도 아쉽네요^^ 그럼 다른 날 뵐까요?]

    [아닙니다! 제가 백작님의 아름다운 시간에 맞춰야죠~ 제가 백작님 저택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주신다니 저도 기쁘네요. 그럼 오늘 오후 세 시에 뵙겠습니다.]

    [네, 나의 백작님. 만날 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또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톡톡을 나누면 나눌수록 아무래도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백작님? 기다리고 소망해? 오늘 만날 건데 뭘?

    브라운 레타 씨가 더 답장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많이 팔면 좋잖아.

    -

    브라운 레타 씨는 세 시에 딱 맞춰 왔다. 미리 응접실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노랗게 보일 정도로 밝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들어왔다.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멀끔하게 생겼다. 장난기가 넘치는 걸음걸이며, 빛나는 까만 눈, 데이라 공작보다 살짝 긴 앞머리를 탁탁 매만지는 손. 뭐랄까, 단정한 인상은 아니지만 그만한 활력이 느껴진다.

    다만 그 활력만큼…… 모든 것이 좀 과하다. 한 20년 전쯤에 유행했을 게 분명한, 레이스 달린 보라색 재킷. 거기다 아랫단이 나팔처럼 퍼지는 빨간 바지.

    무엇보다도 저 번쩍이는 금색 구두. 노란색이 아니다. 번쩍이는 황금색이다, 황금색.

    아니,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자. 아찔한 정신을 수습하며 인사를 하려고 일어났는데, 레타 씨가 좀 더 빨랐다.

    “하하, 안녕하세요, 백작님! 여기까지 오는 동안 새들이 어찌나 즐겁게 지저귀는지, 마치 백작님과 저의 첫 만남을 축복하는 것 같더군요.”

    심지어 말투도 과해. 무슨 연극 대사 읽는 줄 알았다. 거의 외워 온 대본 읽는 수준인데?

    “새들이 제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죠. ‘어서 가, 브라운! 용기 있는 자라면 주저하지 마!’ 얼마나 감격스럽던지요.”

    “네? 아, 네…….”

    무슨 소리야? 새가 뭘 어쨌다고? 마법사는 새랑 말도 하나? 나중에 공작한테 물어봐야지.

    “그럼 일단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까요? 톡톡과 관련해서 제가 도와 드릴 일이 뭔지 궁금하네요.”

    원래는 이렇게 급하게 이야기를 진행하지 않는다. 장사에만 관심 있는 인간으로 보이니까.

    근데 이 사람은…… 뭔가 다르다. 만난 지 15초 만에 느껴지는 이 불길한 기운. 공작 생각을 그만 해보겠다고 이 약속을 잡은 건 크나큰 실수였던 것 같다.

    빨리 얘기하고 돌려보내자!

    그때 레타 씨가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호탕하십니다! 괜히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이렇게 바로 물어봐 주시다니, 박력 넘치는 모습에 감탄했습니다. 큰일을 하시는 분이 맞네요, 맞아!”

    “아, 예에, 감사합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레타 씨의 얼굴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놀랍게도 그는 아직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저 사람 때문에 나까지 엉거주춤 서 있는데, 뭐가 궁금한지는 몰라도 일단 의자에 앉았으면…….

    “데이라 경과 교제하지 않는 게 확실합니까?”

    “…예?”

    내가 잘못 들었나. 놀라서 되묻자 레타 씨가 씩 웃었다. 새하얀 송곳니까지 모두 드러나는 시원하고 작위적인 미소였다.

    “저 브라운 레타, 정정당당한 사내입니다. 남의 연인을 꼬시는 취미는 없어서 말입니다.”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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