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참입니다 다음편!48회
고백은 마법처럼연참 2/2
“…….”
유릭스가 애써 만든 미소에 금이 갔다. 로지는 아예 몸을 앞으로 기울여 무릎에 팔꿈치를 댔다. 흥미가 넘쳐나는 표정으로 그녀가 몰아치듯 물었다.
“어땠냐? 어땠어? 응? 내가 젊은 놈들 연애 얘기 듣는 게 얼마 만인지.”
“스승님, 트릭스터가…….”
“지금 그게 문제야? 나 늙은이라고 따돌리냐, 어?”
유릭스는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깊은 한숨을 막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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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물에 몸도 녹이고 침대에 누워 선잠이나마 잤더니, 몸이 한결 나아졌다. 공작이 보냈는지 의사도 왔다 갔다. 가벼운 감기 기운이 있으니 잘 쉬라고만 했다.
큰일도 아닌데, 뭐 의사까지 보내고 그래. 하긴, 나 같아도 공작이 내 저택에서 이런 일을 겪으면 의사를 보내겠지.
잠기운을 완전히 떨치며 정신을 차리고 있는데, 갑자기 할아범 생각이 났다.
할아범 어디 있지? 리리는 내 옆에 있으니 됐지만, 할아범은? 혹시 할아범, 혼자 어디 있다가 트릭스터한테 당한 건가!
바로 그때,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문이 벌컥 열렸다. 모습을 보인 사람은 할아범이었다. 안도가 나를 집어삼켰다.
근데 할아범 표정이 좋지 않다. 사색이 되어 뛰어오는 할아범을 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쳐 불렀다.
“할아범!”
“아가씨,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아아!”
“할아범, 도대체 어디 있었어?”
할아범은 공작 저택에 함께 들어오지 않았다. 마차도 적당히 세워 둬야 하고, 처리할 일이 있으니 바로 따라오지 않았겠거니 했다. 그 뒤에는 너무 정신없는 일이 벌어져서 제대로 살피지 못했고.
근데 도대체 어디 있다가 지금 오는 거지?
“혹시 할아범도 어디 갇혀 있었던 거야? 안 좋은 일 있었어?”
“아뇨, 전 조용한 후원으로 나가서 좀 쉬고 있었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느라고.”
“…….”
사람 걱정 시켜 놓고.
갑자기 맥이 빠져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할아범이 나를 툭툭 치며 눈치를 주었다. 그제야 대답이 나갔다.
“아, 그래. 그랬구나. 나도 큰일은 아니었어.”
“큰일이 아니라뇨, 마법사들한테 다 들었습니다. 안에서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 찬물에 홀딱 젖다니, 감기 걸립니다. 일단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시죠! 가서 단 음료를 마시고 배를 채우면 좀 나을 겁니다.”
“아, 그건…….”
좀 아쉬운데.
물론 지금 당장 공작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건 아니다. 진솔한 대화라고 해도, ‘아까 일은 서로 잊읍시다.’의 연장선이겠지. 그런 마음 아픈 대화는 하기 싫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바로 돌아간다니.
그때 리리와 눈이 마주쳤다. 보석 같은 녹색 눈에 염려가 가득하다. 그 눈을 보니 괜히 뭉갤 필요가 없다 싶다.
공작과는 나중에 다시 만날 수 있겠지. 만나봤자 친구로서겠지만.
쓰린 속을 감추며 기운이 난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돌아갈 준비는 빠르게 끝났다. 내가 침대에 누워 선잠에 든 사이, 리리가 이미 모든 짐을 다 챙기고 마차까지 준비시킨 덕이었다. 알고 보니 할아범이 돌아온 것도 리리가 찾아내 불러서였다. 심지어 리리는 공작가에 부탁해 갈아입을 옷까지 마련해 두었다.
물론 할아범도 나름대로 할 일이 있었다.
“그럼 제가 데이라 공작에게 소식을 전하고 오겠습니다.”
“응. 배웅할 필요 없다고 해줘. 어차피 지금 바쁠 거야.”
할아범을 보내고, 리리와 함께 방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복도를 지나 1층으로 내려가자마자, 아까와 똑같은 장면을 목격했다.
마법사들 수십 명이 우글우글 몰려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중간에 우뚝 서서 멍하게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침묵, 침묵, 침묵. 다들 뭔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다. 설마 내가 여기서 공작과의 연애사라도 풀어줄 거라고 믿지는 않겠지? 우리는 당신들이 기대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그냥 모르는 척하자.”
나만큼이나 당황한 리리에게 작게 당부하고,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진짜 부담스럽네.
바다가 갈라지듯 마법사들이 우르르 움직여 길을 내주었다. 어지러운 발소리,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소리, 웃음소리, 걱정하는 목소리……. 어차피 누구와도 말을 섞어선 안 되니 이대로 자리를 떠야 한다.
움직이는 사람은 나와 리리뿐이라, 우리 둘의 발소리만 저벅저벅 뒤를 따랐다. 그때, 다급한 발소리가 하나 더 끼어들었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발목을 붙잡았다.
“백작님!”
아, 공작 목소리다.
나는 이제 어떤 상황에서든 공작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수백 명의 군중 속에 공작이 섞여 있다면, 그때도 바로 그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공작이 나를 찾으면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공작님.”
뒤를 돌아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었다. 놀란 얼굴로 내게 뛰어오는 공작을 보니 심장이 지끈거린다. 가득한 마법사가 전부 사라지고 나와 공작만 남은 것 같다.
“배웅해주시지 않아도 괜찮은데요. 바쁘시잖아요.”
공작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몸이 좋지 않으신가요? 그래서 빨리 돌아가시는 겁니까? 저녁 식사라도, 아니, 오늘 하루는 여기 머무르셔도 좋을 텐데…….”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죠. 저도 제 저택으로 돌아가 쉬는 게 편하고요.”
어느 정도 예상한 권유라 바로 거절했다. 오늘 공작과 저녁까지 함께 먹으면 바로 체할 것 같다.
빠른 거절의 말에 공작이 멈칫했다. 그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가, 무언가 다짐한 듯 다시 시선을 들어 나를 보았다.
“그렇죠……. 당연히 백작님의 몸이 우선입니다. 마차까지 제가 모시겠습니다.”
주위를 에워싼 마법사들이 숨 쉬는 것까지 멈추고 우릴 보고 있다. 심지어 몇몇은, 공작을 뻥 차인 남자인 양 불쌍하게 쳐다본다. 이러니까 우리 둘이 무슨 소설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드는데, 솔직히 저 입 가볍고 법석 떠는 마법사들이 무슨 소문을 퍼뜨릴까 무섭기까지 하다.
그래도 저 사람들 보는 앞에서 마지막 에스코트까지 거절했다간 서로 민망해질 것 같다. 더 시간 끌지 않고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공작이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평소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고 삼가는 듯한 몸짓이었다.
에스코트를 받으며, 공작 뒤로 허둥지둥 뛰어오는 할아범의 모습을 슬쩍 확인했다. 할아범은 숨을 몰아쉬며 내 옆에 붙어 서려 했다가, 공작을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흐뭇한 미소 짓지 마. 지금 그런 상황 아니니까!
결국 우리는 결혼식 하객처럼 양 옆에 모여 선 마법사들 사이로 행진하듯 걸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마법사들도 눈치가 있는지 이번에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
대신 최대한 예의를 지키는 척하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아까 들었어? ‘개새끼들아, 지금 그럴 상황 아니라고!’”
“‘야, 밖에 다 닥쳐!’ 이것도 있잖아.”
“조용히 해, 또 화낼 수도 있어.”
아, 제발 저놈들이 내가 한 욕을 다 잊어 줬으면. 고개를 돌려서 쑥덕거리는 놈들을 한 번씩 노려볼까 고민하는 순간.
눈치 없는 피피온의 목소리가 정확히 내 귀에 꽂혔다.
“역시 데이라 경은 박력 있는 모습에 반한 건가!”
“오오오! 그런 취향이었다니!”
“하긴, 마법사라면 다 박력 있는 연인에 대한 환상은 있잖아?”
“…….”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 놈이나 거기 동조하는 놈들이나.
너무 어이가 없어서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도 내게 공감해 저 마법사들을 째려보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근데 공작은…… 그냥 수줍게 얼굴을 붉힐 뿐이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않고 난처한 듯 시선만 이리저리 헤맨다.
…아무래도 마법사들은 다 이상한 것 같아.
문을 열고 저택 밖으로 나갔다. 할아범이 미리 마부에게 말을 전했는지, 마차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할아범이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리리를 먼저 마차에 태웠다. 그런 다음 공작의 손을 놓았다. 내 손이 빠져나가는 순간, 공작이 미세하게 움찔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쉬워서 그러나, 붙잡고 싶은가, 그런 착각이 우르르 일어났다.
이제 별거에 다 의미부여를 하는구나. 스스로의 상상력이 놀라울 뿐이다.
망상을 떨치며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배웅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평소와 달리 공작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공작의 표정을 살피니, 어딘가 이상했다. 묘하게 내 눈치를 살피면서 말을 하려다 말고, 하려다 말았다. 그러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백작님, 저는…….”
뭐지?
설마…….
말도 안 되는 기대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내 희망이 만든 괜한 기대. 하지만 지금 여기서, 여기서 공작이 뭔가 말한다면…….
그러나 공작은 말을 바꾸었다. 내 표정에서 무언가 좋지 않은 징후라도 읽은 양.
“아닙니다. 다음에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그럼 그렇지. 기운이 쭉 빠졌다. 목소리도 절로 힘없어졌다.
“네, 공작님.”
그가 더 대답하지 못하도록 바로 등을 돌려 마차에 탔다. 문을 닫았고, 일부러 정면만 노려보며 창밖에 선 공작과 눈을 맞추지 않았다. 공작이 내 옆얼굴에 끈질기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자꾸 기대하게 되는 거야.
마음이 너무 이상하다. 짝사랑하는 사람이랑 키스도 하고 고백도 주고받았는데,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나.
마차가 출발하는 순간에도 나는 차마 공작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저택과 정원 풍경이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날씨는 언제 흐렸냐는 듯 눈부셨다. 구름이 양떼처럼 한가롭게 둥둥 떠가고, 나뭇잎마다 햇빛이 튀어 눈부셨다. 공작과 헤어져 그 풍경을 바라보니, 마차 덜컹이는 소리마저 슬픈 음악 같다.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구나.
그렇게 우리의 고백은 마법처럼 사라졌다.
[작품후기]*이렇게 6장. 고백은 마법처럼 (사라졌다)를 마무리합니다! 껄껄껄 소제목 드디어 고백 나왔다고 하신 분께 이 기쁨을 바칩니다.
*소설 제목 줄임말 물어보신 분 계신데 저는 친구들하고 얘기할 때 '야 그 계속 답장하는 소설..'이라거나 '답장ㄴㄴ 있잖아'라거나 '그 답장빌런 소설'이라고 합니다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