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참이에요 여러분!46회
고백은 마법처럼연참 2/2
그 순간,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렸다. 그때까지도 문고리를 잡고 있었던지라 손에 진동이 느껴졌다.
“주인님, 됐어요?”
리리의 목소리다. 나는 문에서 한 걸음 떨어지며 대답했다.
“아니, 소용없었어.”
밖이 순간 조용해졌다. 물론 그 정적은 아주 순간에 불과했다. 머잖아 마법사 놈들 잡담이 폭발했으니까.
“진짜 키스했나 봐.”
“키스했다고? 저 안에서? 둘이?”
“웬일이야. 집에 가서 동생한테 말해줘야지.”
“그냥 톡톡으로 얘기하면 되잖아.”
마지막은 피피온 목소리다. 나가면 넌 두 대다.
분노로 속을 끓이고 있는데 밖에서 리리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주인님,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키스가 아니라…….”
리리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웅성거림이 이어졌다.
“그래, 키스는 너무 약하잖아. 젊은 사람 둘이 밀폐된 방에서 키스만 하다니.”
“건전해도 너무 건전해.”
“그럼 역시, 둘만 있는 공간에서 하는?”
“바로 그거……!”
“야, 밖에 다 닥치라고!”
이번엔 배 속에서부터 욕이 올라왔다. 키스 타령할 때는 기가 막히고 화가 났는데, 이번엔 그냥 어이가 없고 또 어이가 없을 뿐이다.
공작도 내게 공감하리라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공작은 또 진지했다. 나도 모르게 붕붕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진짜 안 돼요.”
이렇게 밖에 사람을 많이 세워 놓고? 말도 안 되잖아. 아니, 트릭스터가 나한테 이렇게까지 할 리 없어.
그러나 공작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뭐든 해봐야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죠!”
“백작님이 내키지 않으신다면 제가 먼저 해보겠습니다.”
“아니, 그게 먼저 나중이 있어요?”
“네?”
“네?”
나란히 되묻자 공작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기울이고 생각에 잠겼다가, 정중하게 물었다.
“그럼 동시에 할까요?”
“네? 그게 무슨……. 따로 할 수도 있는 거였나요?”
우리 지금 왜 서로 말이 안 통하지? 공작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다. 내가 도대체 왜 이러는지 파악하려는 모양이다. 저기요, 무슨 소린지 알아듣고 싶은 마음은 나도 똑같거든요?
타이밍 좋게 밖에서 소리 죽인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왜 동시에 못해?”
“하나, 둘, 셋! 하고 하면 되잖아.”
“하긴, 그렇게 하면 좀 웃기긴 하겠다.”
도대체 뭘 하라는 건데? 뭘? 둘만 있는 곳에서 하는, 키스보다 건전하지 않은, 그게 내가 생각하는 거 말고 또 뭐가 있는데?
리리가 또 톡톡 문을 두드렸다.
“주인님, 사랑고백이요…….”
“…….”
그게 왜 건전하지 않은지 아무나 설명해 줄래?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아 공작을 보았는데, 공작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끄덕이긴 뭘 끄덕여. 그럼 공작은 마법사들 얘기를 듣자마자 ‘사랑고백’이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그게 왜 안 건전해, 왜!
숨 막히는 정적을 잠시 견뎠다. 후, 한차례 숨을 내쉬었다.
그래, 진정하자. 내가 뭘 생각했는지 아무도 몰라. 아무도 내가 변태라고 생각 안 해. 아니, ‘둘만 있는 곳에서 하는 키스보다 깊은 행위’를 사랑고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이상한 거 아니야?
일단 침착한 척 대답을 챙겼다.
“고마워, 리리. 시도해 볼게.”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 공작을 보았다. 그래, 공작도 몰라. 내가 무슨 생각 했는지 모를 거야. 공작이 독심술사도 아니고 어떻게…….
눈이 마주쳤다. 표정이 바로 읽혔다.
젠장, 알아차렸군.
나는 문에서 한 걸음 떨어지며, 공작 쪽으로 완전히 몸을 틀었다. 그런 다음 밖에서 듣지 못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저기, 제가 평소에 그런 생각만 하는 건 아니거든요?”
공작이 조용히 셔츠를 주워 입었다. 위에서부터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면서,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아니, 저는 백작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짐작조차 가지 않네요.”
“…….”
모르는 척해주니까 더 비참해. 예전에도 한 번 느낀 건데, 공작은 모르는 척 더럽게 못한다. 지금만큼은 거짓말에 서툰 공작이 원망스러웠다. 얼굴이 화르르 불타는 느낌이라 갑자기 조금도 춥지 않다.
공작은 나를 구해주듯 말했다.
“그럼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기분이 엄청 이상하다. 살면서 고백을 안 받아본 건 아니지만, 고백 예고는 또 처음이네.
진짜 고백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서, 손바닥에까지 땀이 난다. 손을 축축한 치마에 문질러 닦으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준비됐어요.”
공작이 나무처럼 굳건하게 선 채 나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표정이다.
웃는 얼굴, 당황한 얼굴, 기가 막힌 얼굴, 속상한 얼굴, 너그럽게 이해해주는 얼굴……. 공작의 수많은 표정을 보아 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지금은 또다시 새롭다.
이상하게도 공작은 조금 슬퍼 보였다. 아쉬운 것 같기도 했고, 추위에 시달리는 나보다 더 심하게 떠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가 긴장을 풀어내기 위해 손을 한 번 쥐었다 펴는 모습을 보며, 나까지 바짝 얼고 말았다.
뭐야. 이거 진짜 고백 아니야. 분위기에 속아서 괜히 긴장하지 마! 받아줄까 말까 생각도 하지 마! 기뻐할지 호들갑 떨면서 좋다고 할지 고민하지 마!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공작의 눈동자가 좌우로 오가다가, 한 지점에 고정된다. 나에게. 그가 바라볼 존재는 온 하늘과 땅에 나뿐인 것처럼.
공작이 살짝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그의 동작 하나하나를 감각한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마저도.
마침내 공작의 입술이 열렸다.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마저도, 들을 수 있을 것처럼 고요했다.
“백작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예상한 표현인데도 가슴이 쿵 떨어졌다.
심장이 발밑으로 떨어져 함부로 바닥을 구른다. 고개를 숙이면 볼품없이 떨어진 심장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공작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한 걸음쯤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딱 그만큼의 거리를 무심히 흘러오는 고백의 언어. 가짜 고백, 그런데도 쓸데없이 열정적인 고백이 연달아 가슴에 부딪쳤다.
“언제부터인지 알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존경이었고, 언젠가부터 그 이상이었습니다. 저는 백작님과 우정이 아닌 사랑을, 아니, 오직 둘만이 나눌 수 있는 모든 마음을 나누고 싶습니다.”
손끝조차 닿지 않았다. 그런데도, 키스할 때보다 머릿속이 새하얗다.
“부디 저의 연인이…… 모든 사랑을 바칠 유일한 사람이 되어 주십시오.”
공작의 목소리가 나무 같다고 느낀 적이 많았다. 이제 그의 목소리가 내 마음에 울창한 숲을 이룩한다. 마음 어귀에서 날갯짓하던 모든 새가 기다렸다는 듯 그 숲에 깃든다.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꿈에서나 마주친 꽃이 일제히 피어나 불을 밝힌다.
당신은 누구이기에, 몇 마디 말로 내 안에 세계를 빚어 놓는가.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거짓 앞에 나 홀로 진실할 수밖에 없었다.
“저도 좋아해요.”
공작이 숨을 멈춘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손가락 하나 움찔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너무나 고요한 정지여서, 세상의 모든 시계가 움직이기를 멈춘 듯한 착각이 인다.
때로는 뻔한 거짓말에 속지만, 때로는 쉽게 내 마음을 읽는 당신. 나를 알아차렸을까. 갈 곳 없는 이 마음을?
몰랐으면 좋겠다.
부담스러워하는 얼굴을 보게 된다면 견디기 어려울 것 같다.
공작처럼 절절하게 말할 솜씨는 없다. 뭐라고 말한단 말인가. 나는 방금 당신이 만든 숲을 돌아다니며 나무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 줄 거라고? 샘을 발견하면 기뻐하며 달게 목을 축이고, 잘 익은 열매를 따 먹을 때는 당신과 나눌 수 없기에 슬퍼할 거라고?
“정말로 좋아해요. 전부터 계속 좋아했어요.”
연달아 고백하자 공작의 눈이 커졌다. 그가 무어라 말할 것처럼 입을 벌렸지만, 모든 말이 입 안에서 솜사탕처럼 녹아 버린 듯했다.
더 마주보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공작이 너무 진지해서, 속고 말았다. 나 혼자 잔뜩 들뜨고 말았다.
“백작님…….”
공작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철컥.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가 났다. 열쇠를 돌려 문을 열 때 나는, 바로 그 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소리를 들었다. 달칵, 하고, 내 안 깊은 곳에 있던 문이 열리는 소리.
그 순간 직감했다. 하나는 가짜고 하나는 진짜였던 고백이, 누구도 연 적 없던 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밟은 적 없는 땅에, 방금 공작이 발자국을 남겼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오래도록 이 발자국을 바라보게 될 것 같다.
“열렸네요.”
가벼운 어조를 꾸며 말하고, 고개를 들어 웃었다. 공작은 마주 미소 짓는 대신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내 얼굴을 살핀다. 일부러 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뭐, 짝사랑 정도로 청승 떨긴 싫다. 섣불리 공작에게 알려 부담을 주기도 싫고.
“나갈까요?”
지금은 해야 할 일부터 하자.
이상할 정도로 내게서 눈을 떼지 않던 공작이 그제야 움직였다. 그가 뭐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벌렸는데, 왠지 겁이 나서 대답을 듣지 않고 바로 문을 열었다.
문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열렸다.
밖에는 수십 명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얼굴들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냥 웃고 말았다. 그러자마자 빌어먹을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축하해요!”
“드디어 밖으로 나왔네!”
“와, 얼굴 완전 파랗다.”
마법사들은 홀딱 젖은 나와 공작의 몸을 보고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새삼스럽게 화낼 기운도 없다. 그냥 모든 말을 무시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하는 수밖에.
그러다 피피온을 발견했다. 나는 제일 가까이 있는 그의 어깨를 턱 짚고 씹어 뱉었다.
“이것도 다 톡톡으로 말할 거예요? 응?”
그럴 거라고 하면 너 진짜 깡깡 깡깡 맞는다.
다행히 피피온도 눈치가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는 바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 아니요, 말 안 합니다!”
“그래요. 다른 분들한테도 말 잘 해 주시고.”
소문이라도 나면 밤길 무사히 못 다닐 줄 알아라.
착하게 미소를 지은 후 리리의 손에 몸을 맡겼다. 추위에 떨었다가 열이 올랐다가, 다시 추위에 떨고 또 열이 오르기를 반복한 몸은 해초처럼 늘어졌다. 건강해진 리리가 나를 단단히 부축했다.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주인님, 몸이 얼음 같아요. 얼른 손님방이라도 들어가서 따뜻한 물에 몸 좀 녹여야겠어요.”
“응, 고마워.”
비실비실 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주위로 몰려드는 여러 마법사를 뿌리친 공작이 급히 내게 다가왔다.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괜찮아요. 리리랑 갈 테니 방만 하나 빌려주세요.”
“그래도…….”
아, 지금은 공작 얼굴을 못 보겠다. 마음이 너무 울렁거려. 나는 재빨리 그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아까 그 말이요, 괜히 마음 쓰지 마세요. 그냥 열쇠 같은 거였잖아요. 그렇죠?”
공작이 입을 벌렸다. 말이 나오려다가, 그의 입으로 다시 말려 들어갔다. 그는 핏기 없을 게 분명한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겨우 답했다.
“…네. 일단은 쉬셔야죠.”
왠지 공작 표정이 처량해 보인다. 속상한 사람은 공작님이 아니라 나라고요. 내 기분이 이래서 괜히 공작 표정도 어둡게 보이는 모양이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세 좀 질게요.”
공작은 말없이 우리를 손님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문을 닫고 헤어지기 전에 공작은 뭔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였는데, 내 꼴이 너무 엉망이라 말을 눌러 참는 것 같았다.
“그럼 편안히 계시기 바랍니다.”
“감사해요. 공작님도 좀 쉬셔야겠어요.”
나와 공작이 인사를 마치자, 리리가 문을 닫았다. 공작 집에서 쉬는 두 번째 날이 되겠네.
괜히 마음이 울렁거려 닫힌 문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공작은 모르겠지, 내가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내가 한동안 문만 보면 자기 생각이 나리라는 것도 까맣게 모르겠지.
“주인님?”
“아, 응. 얼른 씻어야겠다.”
아주 달고 쓰고, 어지러운 마법에 걸린 느낌이다.
‘백작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엄청 피곤한데, 왠지 잠들지 못할 것 같다.
[작품후기]*고백한다고 했지 사귄다고는 안 했다...라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