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하지 마세요-41화 (41/74)

41회

고백은 마법처럼

미니 드레스는 오랜만에 입는다.

어깨를 드러내는 형태의 간단한 옷이다. 어깨와 가슴 부분에는 붉은 포인세티아를 연상시키는 꽃 장식을 가득 달아 포인트를 주고, 허리에는 마찬가지로 붉고 얇은 끈. 무릎까지 풍성하게 퍼지며 떨어지는 치마는 채도가 살짝 낮은 펀치핑크.

그 위에 짧은 코트를 걸치면 끝이다.

솔직하게 인정한다. 평소에 즐겨 입는 스타일은 아니다.

사교계에서 워낙 불쾌한 무시를 당하다 보니, 옷이라도 좀 진중하게 입으려고 애써 왔다. 파티나 모임에 나갈 일이 있으면 회색, 검정, 어두운 파랑을 많이 선택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지.

뭔가 공작 눈에 확 달라 보이고 싶다. 뭔가, ‘와, 오늘 새로워!’하는 느낌을 주고 싶다.

사랑은 본래 발견이 아닌가. 이 사람이 이렇게 생겼었나, 이런 성격이었나, 이런 향기를 갖고 있었나, 그렇게 놀라면서 사랑이 시작되는 거 아니냔 말이다!

“잘 어울리네요, 주인님. 주인공 같아요.”

함께 단장을 마친 리리가 나를 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리리야말로 새벽이슬에서 태어난 은빛 요정 같다. 마른 몸에 보기 좋게 살이 붙고, 병에 시달리느라 파리했던 얼굴에도 건강하게 혈색이 올랐다. 얼마 전에 맞춘 하늘색 드레스도 잘 어울렸다.

내가 리리를 보고 감탄하듯, 공작도 날 보고 감탄했으면 좋겠다. 애정 어린 감탄 같은 거. 오늘도 새롭게 사랑스럽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마워, 리리. 너도 옷 맞추길 정말 잘했다. 맘에 들지?”

“그럼요.”

“자, 얼른 가자.”

할아범은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잔뜩 힘을 준 내 모습을 본 할아범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리리와 함께 데이라 공작 저택에 간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할아범은 계속 저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댄다. 무슨 뜻으로 저러는지 알 것 같아서 왜 그러느냐고 따지지도 않았다.

“데이트 가시나 봐요?”

“뭐?”

어처구니가 없어서 툭 던지듯 대답하고, 리리를 마차로 밀어 넣었다. 마차 밖에 선 채 할아범에게 당부했다.

“제발 오늘은 공작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마.”

“무슨 말이요?”

“쓸데없는 말 전부!”

“아, 우리 단주님이 평소에는 이렇게 안 입는데…… 이런 말이요?”

“할아범. 그럼 공작이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

“글쎄요, 음…….”

할아범은 검지를 세워 입술 끝에 대고 고민하는 척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예리한 척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랑스럽다고? 막 사귀고 싶다고? 결혼하고 싶다고?”

“제발 좀!”

휙 등을 돌려 문을 닫았다.

물론 마차 안의 상황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마차에 먼저 앉아 있던 리리가 입술을 꾹 깨물고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들 나 놀리는 게 그렇게 재밌나?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주인님. 집사님도 그래서 농담하신 걸 거예요.”

“그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한숨처럼 대답했다. 그런 얘기를 들어도 긴장이 풀리지 않는다. 오늘 가서 아무 사건도 없이, 공작 얼굴만 잘 보고 올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근데 공작은 뭐 입었으려나? 또 제복 입었겠지?

데이라 공작이 머무는 저택은 그리 멀지 않아서, 마차는 금세 목적지에 닿았다.

잘 꾸며진 앞뜰을 가로지르는 동안 지나간 일이 떠올랐다. 공작의 저택에 방문한 건 세 번째다. 처음에는 내가 공작의 머리통을 깬 일 때문에, 두 번째는 트릭스터 할머니 때문에 기절해서…….

그 두 번과는 마음이 너무나 달라 낯설고 놀라울 뿐이다.

그때 할아범이 마차 문을 열었다.

“내리시죠, 단주님.”

마차 밖으로 내리려는데, 희고 매끈한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할아범의 손이 아니라서 놀라 고개를 들었다.

데이라 공작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상기된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운 채 나를 맞이했다. 바로 손을 내밀지도 못하고, 바보처럼 입을 벌리며 공작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새롭게 보이는 쪽은 나보단 공작이다.

평소 자주 입던 마법사 제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목을 가리지 않는 새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 편안한 루즈 핏 코트를 걸쳤다. 코트는 검정색이 아니라 약간 붉은빛이 도는 갈색이었다.

평소의 정중하고 모범적인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환하게 드러난 곧은 목과 코트의 적갈색이 선명하게 대비되어 보인다. 튀어나온 목울대 아래로 살짝 벌어진 셔츠 깃까지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오늘 이상하게, 이상하게 뭔가…….

“백작님?”

“아, 네!”

의아한 부름을 들은 후에야 번뜩 정신이 들었다.

공작의 손에 내 손을 살짝 올려놓았다. 공작이 손가락을 접어 내 손을 소중하게 감쌌다. 간지럽고 몽글몽글한 느낌이 몸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올랐다.

“마…… 마차 앞으로 오실 줄은 몰랐네요.”

눈을 제대로 못 쳐다보겠다. 마차 아래로 내려가며 더듬더듬 변명하자, 공작이 즉시 답했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백작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지라.”

아, 이대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다. 공작은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고나 있는 걸까?

리리도 뒤따라 내렸다. 공작 뒤에 있던 마법사가 리리에게 다가갔는데, 리리를 에스코트할 마법사인 듯했다. 얼굴은 묘하게 익숙한데 바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공작 얼굴을 보는 대신 그쪽을 보자, 공작이 내 손을 아주 살짝 당겼다. 내 착각이겠지만, 자기를 봐 달라고 채근하는 것처럼 느껴져 또 얼굴로 열이 올랐다.

“피피온 경입니다.”

“안녕하세요, 백작님.”

피피온이 넉살 좋게 바로 인사를 건넸다. 처음 봤을 때는 머리도 엉망이고 옷도 대충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말끔해서 못 알아보겠다. 얼마 전에 만난 사람을 못 알아차린 게 민망해서, 좀 더 예의를 차려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오늘은 뭔가 전이랑 달라 보이시네요?”

“피피온 경도 마찬가진데요?”

“하하, 그땐 제가 너무 엉망이었죠.”

“아니에요.”

오히려 피피온과 대화하니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삐걱거리던 팔다리도 이제야 조금 제대로 움직이는 것 같고, 주위 풍경도 슬슬 눈에 들어온다.

이제야 공작을 제대로 볼 용기가 나서 고개를 들었는데, 공작의 표정이 어쩐지 차가웠다. 그는 서늘한 옆얼굴로 피피온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삼키는 듯한 몸짓을 했다.

왜, 왜 저러지. 화가 났나?

타이밍 좋게 공작이 얼굴을 돌렸다. 한겨울이던 낯에 순식간에 봄이 찾아왔다. 피피온을 바라볼 때의, 책망하는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오히려 조금 내게 무언가 사정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극적인 변화에 놀라 눈만 깜빡이는데, 공작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백작님, 오늘 즐거운 날이 되셨으면 합니다. 마법사들이 실례가 되는 짓을 저지르지 않게 제가 잘 이야기했는데, 혹시라도 마음 상하는 일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아, 네.”

뭐, 사교계에서 그리 좋은 대접을 받는 몸은 아닌지라. 이 정도 말을 왜 저렇게 애원하듯 하고 그래. 그냥 말하면 되지. 괜히 긴장했네.

너무 시원하게 대답했는지 공작의 얼굴에 당혹이 어렸다. 피피온이 뒤에서 작게 속닥거렸다.

“제가 뭐랬어요. 백작님은 괜찮다고 할 거라니까.”

“경은 소문내기 좋아하는 그 입 좀 다물었으면 좋겠군.”

공작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아까 피피온을 보던 공작의 표정도 그렇고, 공작답지 않은 방금 말도 그렇고, 둘이 무슨 일 있었나?

리리와 시선을 교환했다. 리리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 살짝 고개를 저어 보였다. 더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공작이 물어 왔다.

“그럼 들어갈까요?”

“아, 네.”

문 옆에 서 있던 시종이 재빠르게 문을 열었다.

열린 문 너머로 마법사들이 우글거렸다. 생각 외의 인파에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어림잡아도 수십 명은 된다. 연회장도 아닌 입구에 왜 이렇게 사람이 몰려 있지? 아니, 그것보단…….

왜 다 나만 쳐다봐?

[작품후기]*ㅋㅋㅋ여러분 트릭스터 등장에 성원해줘서 기뻐요//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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