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하지 마세요-39화 (39/74)
  • *'인간적인 호감' '친구' 드립이 지겨우실 여러분을 위해...:D39회

    에스코트

    유릭스는 헥센 백작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침대와 조금 떨어진 카우치에 가만히 앉은 채, 그녀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아무래도 나 때문이겠지.’

    애인도 아닌 남자가 침실에 들어와 있으니, 껄끄럽고 불편한 마음도 백번 이해가 갔다. 그러면서도 밖에 있지 말고 안으로 오라고 해준 마음이 무척 고맙고 미안했다.

    헥센 백작이 잠들면 곧장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는데, 그녀의 뒤척임이 생각보다 길었다.

    유릭스는 말짱한 정신으로 커피를 몇 모금 마셨다. 그런 다음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 창문 하나하나에 방어 마법을 걸었다. 트릭스터가 좀도둑처럼 창문으로 들어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대비는 필요한 법이었다.

    ‘조금 둘러볼까.’

    트릭스터가 헥센 백작에게 흔적을 남겼으니, 저택에도 위험한 짓을 했을지 모른다. 유릭스는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침실 곳곳을 살폈다. 위험한 약물이나 저주의 흔적이 없는지 알아야 했다.

    그러다 문득 장식장에 시선이 머물렀다.

    침실에 있는 작은 장식장에는 헥센 백작의 기념적인 물건이 놓여 있었다. 유리 너머로, 첫 번째로 출시한 톡톡이 보였다. 기계의 크기가 지금보다 더 크고 투박했다.

    몇 줄에 걸쳐 전시된 톡톡을 보던 유릭스의 얼굴로 미소가 번졌다.

    헥센 백작은 정말로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상단 사람들도 그녀를 좋아할 수밖에 없으리라.

    ‘저건 뭐지?’

    장식장 맨 아랫줄에 톡톡 아닌 물건이 하나 놓여 있었다. 톡톡만 전시한 장식장에 넣어 뒀으니, 분명 특별한 물건일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 물건은 유릭스의 짐작만큼 특별하지는 않았다. 평범한 머그컵이었기 때문이다. 뭔가 의미 있는 컵인가, 잠시 생각하던 유릭스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흘러나갔다.

    “아, 이거…….”

    유릭스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이건 헥센 백작이 그의 집에서 가지고 나간 머그컵이었다.

    헥센 백작이 ‘반성문’을 써온 날. 그녀는 반성문을 두고 가고 대신 머그컵을 가져갔다. 나중에 레이번으로부터 머그컵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데, 귀한 물건도 아니고 그녀의 당황스러움도 이해가 가서 크게 마음을 쓰지는 않았다.

    그때 레이번에게 이런 농담을 한 것도 기억났다.

    ‘백작님도 반성문을 두고 갔으니, 물물교환이라고 생각해.’

    ‘지금 농담이 나오십니까?’

    레이번은 그때까지도 헥센 백작을 못마땅하게 여겨, 물물교환 운운하는 주군의 농담을 듣고 정색했다.

    우연히 같은 물건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만, 묘한 확신이 들었다. 유릭스의 저택에서 사용하는 모든 물건은 장인에게 의뢰해 제작한다. ‘우연히’ 그와 같은 물건을 가지게 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했다.

    이 물건을 왜 여기 두었을까?

    톡톡이 출시 순서대로 진열되어 있으니, 헥센 백작에게는 의미 있는 공간일 텐데. 그곳에 왜 자기 저택에서 가져간 머그컵을…….

    공연히 마음이 간지럽고 얼굴이 뜨거워졌다. 달콤한 상상 속에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헥센 백작이 자기 가슴 위에서 콩콩 뛰는 느낌이었다.

    그는 사뿐사뿐 뛰는 헥센 백작을 소중히 들어올려, 자기 심장 가장 깊은 곳으로 안내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유릭스는 고개를 젓고 생각을 떨쳐냈다. 지나친 추측은 하고 싶지 않았다.

    머그컵에서 억지로 시선을 떼고 돌아선 유릭스가 조심스럽게 침대를 살폈다. 헥센 백작은 그새 잠들어 있었다. 편안히 감긴 눈과 아이처럼 천진하고 순한 표정이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는 테이블로 가서 촛대의 촛불을 전부 껐다. 순식간에 어둠이 찾아왔다. 유릭스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조용하고 어두운 복도로 나온 그가 허리를 펴고 똑바로 섰다.

    수상한 낌새는 하나도 없는, 평온한 날이었다. 어쩌면 트릭스터는 당분간 조용할지도 모른다.

    막연히 밀려온 안도감 때문일까. 자꾸만 장식장 안에 있는 머그컵 생각이 났다. 혹시 헥센 백작은 그 컵에 무슨 의미를 둔 건 아닐까. 혹시, 추억처럼 간직한 건 아닐까? 너무 지나친 의미부여일까?

    어수선하게 일어난 기대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

    “예, 너무 의미부여 하셨네요.”

    다음날, 부름을 받고 헥센 저택으로 온 레이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선언을 들은 유릭스의 가슴으로 실망감이 차올랐다. 그 돌연한 실망감 때문에, 유릭스는 자기가 희망적인 대답을 기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안에 톡톡 아닌 물건은 그 컵밖에 없었어.”

    “그래서요?”

    “톡톡은 분명 백작님께 소중한 물건이니…….”

    “컵도 소중할 것이다?”

    “…….”

    유릭스의 얼굴에서 황금 모래알처럼 반짝반짝 빛나던 무언가가 스르르 사라졌다. 스스로도 자기 생각이 지나치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그들은 지금 헥센 백작의 집무실에 있었다. 헥센 백작은 저만치 있는 집무용 책상에 앉아 톡톡으로 무언가 분주히 업무를 보는 중이었다. 톡톡에 박힌 시선은 한 번도 유릭스나 레이번에게 박힌 적이 없었다.

    적어도 레이번이 느끼기에는.

    레이번은 혹시 몰라 목소리를 더 낮추었다.

    “백작이 공작님께 관심이 있다면 저렇게 일만 할 리 없잖습니까.”

    “본래 성실하고 뛰어난 사람이야. 내가 있다고 업무에 집중하지 못 할 이유는 없지.”

    아, 이놈의 콩깍지. 레이번은 가슴을 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그래도 한두 번쯤은 쳐다볼 법도 합니다. 관심이 있다면요.”

    “경이나 내가 안 볼 때 쳐다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을 들은 레이번은 또 슬쩍 헥센 백작을 살폈다. 그녀는 아까보다 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레이번은 헥센 백작의 저택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깜짝 놀랐다. 혼자 황궁으로 간 후 돌아오지 않은 것도 이상했는데, 갑자기 백작 저택에 머물게 되었다니. 부랴부랴 짐을 챙겨 새벽에 백작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무슨 큰일이 났나 했는데, 사건의 경위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환각 물약이 터졌고, 트릭스터의 수작인 것 같으니, 백작을 밀착 보호해야겠다는 소리였다.

    그러더니 공작이 갑자기 머그컵 이야기를 꺼냈다. 웬 머그컵이지 싶었는데, 공작은 너무나 황당한 상상을 하고 있지 않은가!

    처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단단히 빠진 모양이었다. 도대체 자기가 없는 동안 무슨 다양한 일이 있었기에 이러는지. 레이번은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는 느낀 바를 그대로 말해줄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레이번은 주군이 상처 입을 것을 알면서도 솔직히 고백했다.

    “제가 봤을 때, 마음 있는 쪽은 백작이 아니고 공작님 같은데요.”

    “…….”

    유릭스는 입을 꾹 다물고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조심성도 잃고 헥센 백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슨 상상을 했는지 천천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상하긴 했어.”

    혼잣말을 하며 공작이 지난 일을 되짚었다.

    어제만 해도 위험했다. 하마터면 백작에게 ‘귀엽다’고 말할 뻔했다. 평민 친구가 많았다는 말에 그녀가 어찌나 놀란 표정을 짓던지. 동그란 눈과 살짝 벌어진 입술, 올라간 눈썹이 심장에 해로울 정도로 귀여웠다.

    그녀가 자꾸 우정이니 친구니 할 때마다, 동의의 대답은 했지만 어리둥절했다. 정말 그건가, 이렇게 달콤한 긴장감이 우정인가? 어릴 적에 친구들과 이런 감정을 공유한 적이 있었나?

    백작이 너무 해맑게 ‘친구가 되었다는 거죠!’라고 소리쳐서 더 고민할 틈이 없었다.

    하지만 이건, 이 마음은?

    유릭스는 손으로 눈썹 부근을 문지르며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갑자기 이 집무실에 자신과 백작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거리는 아득히 멀어지고, 자신은 머나먼 한 지점에서 하염없이 백작만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할아범, 이것 좀 치워줘.”

    집사에게 종이 뭉치를 건네는 헥센 백작의 손끝. 저렇게 하얗고 단정하고 애처로운 손을 본 적이 있었나. 놀랍게도 그는 저 손을 잡기도 했었다. 작은 손이 자신의 손바닥에 얹어지던 느낌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집중하느라 살짝 찌푸린 얼굴은 유릭스의 눈에 그야말로 그림 같았다. 표정이 변할 때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눈썹, 깨끗한 뺨에 흐트러진 까만 머리카락, 좌우로 분주하게 움직이거나 한 지점에 머무는 검은 눈, 고집스럽고 단호하게 꾹 다문 입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추상화 같기도 했고, 이른 봄의 풍경을 옮긴 수채화 같기도 했고, 화려하고 현란한 빛을 표현한 유화 같기도 했다.

    어떻게 한 사람의 얼굴에 세상의 모든 기법이 다 존재하는가. 심지어 유릭스가 아직 모르는 기법까지도 그 얼굴에, 헥센 백작 안에 있었다.

    그 순간에 유릭스는 직감했다. 그는 마치 더없이 난해한 작품을 만난 듯 오래도록 저 얼굴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끝내 작품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그것은 사랑의 속성 중 하나일 뿐이다. 영원한 불가해.

    언제부터?

    어쩌면 처음 만난 그때부터인지도 모른다. 그 순간의 헥센 백작을 떠올릴 때마다, 그는 남몰래 미소 짓곤 했으니까.

    ‘제가 마지막으로 대답할 거라고요! 그니까 둘 다 대답하지 마!’

    세상 억울하고 서러운 듯 외치던 백작의 모습이 그대로 그의 마음에 각인되었다.

    어떻게 한단 말인가, 백작은 자신을 그저 좋은 친구로만 생각하는데. 하지만 그는 백작과 완전히 다른 관계가 되고 싶었다.

    세상 어떤 친구가, 서로 입을 맞추고 결혼을 하고 잠자리를…….

    옆에서 레이번이 속삭이는 소리에 상념이 끊어졌다.

    “이틀 남았으니까 힘내십시오. 그리고 제발 그만 쳐다보세요. 집사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잖아요.”

    과연, 백작 옆에 선 집사가 ‘왜 저래?’하는 표정으로 유릭스를 보고 있었다. 집사는 그저 의아했을 뿐이지만, 유릭스에게 그 의아함은 엄중한 질책처럼 다가왔다.

    유릭스는 공연히 시선을 돌리고 다른 일을 하는 척했다. 그는 자각의 낭만을 즐길 틈도 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레이번에게 대답은 해주었다.

    “그래, 그만 봐야겠어.”

    그날부터 헥센 백작의 태도도 이상해졌다. 그녀는 비실비실 공작을 피하고, 눈이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가 요란스럽게 손부채질을 했다. 허둥거리고, 넘어지고, 물건을 떨어뜨렸다.

    유릭스 역시 백작에게 선뜻 다가갈 수 없었다. 혼자만의 마음을 강요하는 느낌을 주기도 싫었고, 섣불리 마음을 꺼내 놓았다가 어색한 사이가 되기도 무서웠다.

    그렇게 아무 소득 없이 이틀이 흘러갔다.

    “사흘 내내 폐를 끼쳤습니다. 다음 기회에 대접할 기회를 주세요.”

    “아니요, 제가 감사하죠. 저 때문에 굳이 저희 저택에서……. 너무 감사했어요.”

    “아무 일 없었으니 다행입니다.”

    “예, 그렇죠…….”

    “그럼 돌아가겠습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그럼 이만.”

    “네, 공작님.”

    “백작님이 먼저 들어가시죠.”

    “아니에요. 먼저 가세요.”

    “그래도…….”

    “공작님. 이제 그만.”

    마지막 말을 하는 헥센 백작의 얼굴 근육이 파들파들 떨렸다. 영문을 모르는 유릭스는 그녀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 일단 마차에 올라탔다.

    창문을 열고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헥센 백작이 검지를 들어 입술에 댔다.

    ‘제발 쉿.’

    수줍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런 행동을 하니,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 생소한 떨림이 유릭스의 입술에서 대답을 앗아갔다.

    이 인사를 끝으로 둘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헥센 백작은 멀어지는 공작의 마차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늘어뜨린 채 힘없이 돌아섰다. 그녀는 처음 겪는 짝사랑의 충격에 휘청거리는 상태였다.

    유릭스의 상황은 좀 달랐다. 그는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내내, 다음에 헥센 백작과 만날 핑계를 생각하느라 바빴다. 그는 앞으로 남은 일정 몇 가지를 꼽아 보았다.

    일단 가장 가까운 행사는 마법사 사교 모임이다. 그때 꼭 백작을 초대해야 했다. 그것보다 더 늦게 얼굴을 보게 되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맞은편에 앉은 레이번이 보다 못해 한마디 던졌다.

    “진정 좀 하세요. 사흘 내내 실컷 얼굴 보셨잖습니까.”

    그리고 이 모든 답답한 상황을 지켜보는 한 존재가 있었으니.

    그 존재는 헥센 백작이 마련해 준 이동식 점포에 앉아 한가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돌돌 만 잎담배를 입에 문 그는 쭈글쭈글 주름진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낄낄 웃었다.

    쪼그라든 입술 사이로 노래와도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이 바보들.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겠구만.”

    [작품후기]Elian.Elenist님, hihihu님, 김뭄님, 아람닻별님, 비버는비버비버해님, 고희님, 맛비님, 0ㅂ0님, 또롱이언니님, 별똥별0ㅅ0님, 로베리안님, 나의보석님, 모집님, beolene님, 비인강님, 아아아아야님, Nerimaki님, 유우우유님, 축하하면사실될일님, 0스텔라0님, 몽뿌님, niley님, Percico님, blackkit님, 잉여잉여07님, bluestblue님, dewdrop님, ERTAF님, 슈크림붕어님, elffy님, 긴시뭬님, MidnightB님, Rmdpr님, reezbon707님, lcanUcan님, Reinette님, Sen98님, 알수없는게시자님, 뉘시님, 포포체님, Jnancy님, 아비안님, 소설같은삶님, 이상해꽃님, 뀨루뀨쑤님, 김형서님, vbjjh님, 베리피치님, 장동우킬러님, 까망도롱뇽님, 푸들은요정입니다님, 푸른물속유영님, 켠G님, pato님, Sol14님, 눈ㅅ눈님, Brianna님, 뀨우뿌님, 쏨쏨이네님, 됴하라님, estel0509님, 0p0p님, 소를리님, 레몬e님, HETH5622님, 세니먼님, udes님, 카인G크리티카님, 치칼라님, 니엉덩이내꺼ㅅㄱ님, 벽꽇님, mutagen님, 리이카님, 더블뚝님, 빠라람님, 인류의시발점님, 여우와부엉이님, 0H정님, 전편 코멘트 모두 감사합니다//ㅅ!

    *쌍방 자각 후의 동거(???) 삽질을 쓸 수도 있었지만 빠른 진행을 위해서 대충 생략합니다 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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