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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코트연참 2/2
피피온은 황제가 자신을 왜 불렀는지 알고 있었다. 분명 갑자기 폭발한 환각 물약 때문이겠지. 그는 알현실 앞에 서서 초조하게 손을 쥐어뜯었다. 여기까지 안내한 시녀가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주었지만,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침내 알현실 문이 열렸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피피온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살짝 비틀거렸다.
“만나서 반갑네, 경.”
황제에게 첫 인사를 빼앗겼다. 인사를 위해 손을 올리고 허리를 숙였던 피피온이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졌다.
“아, 예, 폐하. 영광입니다.”
더듬더듬 대답하니 황제가 빙긋 웃었다. 그리 화가 나지는 않은 듯했다. 이어진 목소리는 다정하고 부드럽기까지 했다.
“경이 데이라 공작과 헥센 백작을 만났다고 들었다. 물론 환각 물약이 폭발한 것도 문제지만…… 내게 상황을 잘 설명해 줄 수 있겠지?”
“예, 예, 물론입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상황 보고를 받고 싶은 거면 그냥 문서를 꾸려 올리라 하면 될 텐데, 왜 굳이 불러들였을까. 피피온은 슬쩍 황제의 얼굴을 살피며 의중을 읽으려 했다.
황제는 뜻밖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젊은 애들 연애에 관심 많은 한가한 중년처럼 보였다고 할까.
‘착각인가?’
착각이든 아니든 명령을 받았으니 입을 열 수밖에.
피피온은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마법사 건물에서 있었던 일을 떠들기 시작했다. 데이라 공작과 함께 온 헥센 백작, 그리고 그 둘과 나눈 대화까지.
황제는 좋은 청자였다. 그녀는 피피온의 말을 경청하며 때때로 적절한 반응까지 보여 주었다. 잘 들어주는 이가 있으면 말하는 이도 절로 신이 나는 법, 피피온은 어느새 긴장도 잊고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때 데이라 경이 그렇게 말했죠. ‘제가 마법사 모임에 초대하겠습니다. 우린 친구니까요.’ 그런데 그때 헥센 백작 표정이 어찌나 싸늘하던지, 어휴……. 만년설도 그것보단 더 따뜻할 겁니다.”
“하하, 경은 말을 정말 재미있게 하는군. 그래서?”
“저는 예리한 촉으로 바로 알아차렸죠. 뭔가 있다!”
“오호라.”
“그런데 두 분이 한사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저는 생각했죠. 아, 이것이 바로 본인들만 비밀이라고 생각하는 비밀 연애인가.”
“아직 교제하는 사이가 아닐지도 모르지.”
“아, 저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는데 폐하께서는 참 예리하십니다.”
피피온은 적절한 아부도 곁들였다. 나중에 황제가 환각 물약이 폭발한 일을 추궁할지도 모르니, 미리 기분 좋게 해두자는 생각이었다. 물론 황제도 피피온의 얕은 수를 알아차렸지만, 이야기가 더 듣고 싶었으므로 모르는 척 재촉했다.
“내 거기 없어 직접 못 본 게 한이군.”
“그래서 제가 선물로 투명 물약을 하나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게…… 실수였던 거죠. 환각 물약일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황제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누구나 실수는 하지. 그 다음엔?”
황제가 깊이 따지고 들지 않자 피피온은 한결 더 안도했다.
“데이라 경과 헥센 백작님이 떠난 후 갑자기 창밖에서 펑!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허둥지둥 창가로 가서 밖을 바라봤는데, 이게 웬걸! 데이라 경이 최상급 결계를 펼친 채 헥센 백작을 안고 있었죠. 이야, 낭만적인 광경이었습니다. 넘실거리는 불꽃, 황금 빛줄기가 어른거리는 결계, 그리고 꼭 안은 채 서로에게 의지한 연인……!”
피피온의 머릿속에서 두 사람은 이미 세기의 연인이 되어 있었다. 황제는 굳이 지적하지 않고 호응했다.
“정말 굉장한 광경이었겠어!”
“맞습니다, 맞습니다. 사실 요즘은 최상급 결계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데이라 경도 그만큼 놀란 거겠죠! 평소라면 환각 마법과 진짜 폭발은 금세 구별했을 텐데, 지켜야 할 사람이 있으니 눈이 흐려진 모양이죠!”
“일리가 있군, 일리 있어.”
“지금껏 저희 황실 마법사들이 데이라 경을 만나러 영지로 갔지, 데이라 경이 수도에 온 건 처음이지 않습니까. 수도로 오자마자 이렇게 사랑이 싹트다니! 역시 뛰어난 마법사는 사랑도 남다르다는 것일까요?”
“아하.”
“데이라 경은 친구라고 하지만, 그 둘이 친구면 전 평생 왕따였습니다.”
피피온이 호기롭게 수다를 끝냈다. 황제는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피피온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말한 대로, 직접 그 광경을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이 나이가 되면, 젊은 놈들 연애가 그렇게 궁금한 법이다.
“안 그래도 데이라 공작이 내게 문서를 보내 왔지. 당분간 헥센 백작 저택에 머물며 에스코트를 한다더군. 트릭스터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나. 그래서 말인데, 경.”
황제의 표정이 바뀌었다. 피피온은 기류의 변화를 읽고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 물약은 처음부터 환각 물약이었던 건가? 정말 경의 실수로 투명 물약과 뒤바뀐 게 맞나? 트릭스터가 중간에 장난질을 쳤을 가능성은?”
“아, 그건…….”
피피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건 정말 투명 물약이었다! 왜 갑자기 환각 물약으로 바뀌었는지 모르겠다!’라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피피온은 정리를 좀 싫어하고 덤벙댈 뿐이지 부도덕한 마법사는 아니었다.
“연구실을 뒤져 확인해 보니, 제 실수가 맞았습니다. 황궁에서 소란을 일으켜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피피온이 비장의 부사를 외치며 눈을 빛냈다.
“보통 환각 물약은 그런 식으로 폭발하지 않습니다. 떨어뜨려서 깨진다고 불꽃을 만들어내지도 않고요. 그 과정에서…… 트릭스터의 개입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황제는 잠시 생각에 잠겨 침묵했다.
트릭스터, 이 기이한 괴물을 잡기 위해 데이라 공작이 수도까지 올라왔다. 마법사가 아닌 황제는 트릭스터에 대해 잘 모르지만, 무척 위험하고 괴상한 존재라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트릭스터는 어디까지 개입하고 있을까. 그리고…….
“목적이 뭘까?”
“예?”
“트릭스터의 목적 말이다. 만약 그 폭발이 정말 트릭스터의 짓이라면,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지?”
“어……. 글쎄요.”
피피온은 슬쩍 대답을 피했다.
솔직히 그가 보기에, 환각 물약이 터져 벌어진 나쁜 일은 하나도 없었다. 백작과 공작이 낭만적으로 포옹했고, 그 광경을 수많은 황실 마법사가 지켜본 게 다였다. 그런 상황에서 트릭스터의 목적을 물으면 한 가지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둘을 이어주려고?
그러나 피피온은 도저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황제가 지금 개소리로 자신을 조롱하느냐며 버럭 화를 낼지도 모르니까.
그때 황제가 불쑥 말했다.
“둘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예?”
“아, 어흠, 아닐세. 나가 보시게.”
피피온은 갑자기 근엄한 척하는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황제는 거듭 손을 저었다.
“나가 보래도?”
“아, 예……. 그럼 물러갑니다…….”
밖으로 나온 피피온은 고개를 갸웃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닫힌 문 너머에 앉아 있을 황제의 얼굴과 그녀의 추측을 떠올렸다. 그리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음, 잘 어울리기는 해.’
-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함께 살면 단점이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기분 좋게 시작한 동거가 절교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지.
내가 데이라 공작과 동거하는 건 아니지만, 단점이 보인다는 게 무슨 소린지 알 것 같다.
“아니, 손님방에서 주무시라니까요…….”
“백작님과 너무 먼 곳에 있으면 여기 온 의미가 없습니다. 트릭스터가 잠을 틈타 해를 가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럼 옆방에서 주무세요. 침대를 준비하라고 할게요.”
“제가 잠을 자다가 트릭스터를 막지 못하면 백작님이 위험해집니다.”
“그럼 뭐예요. 손님방도 안 가고 옆방도 안 가면, 제 침실에 있겠다고요?”
공작이 제자리에서 반 뼘쯤 펄쩍 뛰어올랐다. 그는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런 짓을 해서 백작님의 명예를 훼손할 수는 없지요. 저는 여기 있겠습니다.”
아마 나보다는 공작의 명예가 훼손될 텐데. 잡념을 밀어두고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물었다.
“…여기요? 지금 여기?”
“네.”
“제 침실 문밖에요?”
“아주 적절한 장소라고 할 수 있죠.”
그렇게 대답한 공작은 짐짓 뿌듯한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얼굴을 보며 사람이 양심 아파 죽을 수도 있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잠도 안 주무세요?”
“저는 마법사라 며칠 정도는 자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마법은 뭐 만능인가요?”
“그건 아니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군요.”
공작은 맑게 웃으며 나를 안심시키려 했으나 그 시도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아니, 그냥 손님방에서 자면 될 걸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 지금까지 트릭스터가 밤에 날 공격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왜 갑자기 밤을 새워 가며 날 지키겠대? 아무리 물약이 폭발해서 놀랐다고 해도 그렇지.
“이러시면 제 마음이 너무 불편하지 않을까요……?”
“백작님은 사려 깊고 선량한 분이니 마음이 편치 않으시리라 짐작합니다. 하지만 안전에 관한 문제만큼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그러더니 공작이 깊고 심오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공작은 아는 것 같다, 그렇게 쳐다보면 내가 순간 말을 잃는다는 걸.
모양 좋은 입술이 시를 읽듯 다정하게 움직였다.
“백작님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플 겁니다. 부디 제 마음도 헤아려 주세요. 백작님을 잃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뭐, 뭐야, 진짜.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어버렸다. 이번에는 얼굴을 비춰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얼굴이 불이라도 붙은 듯 화끈거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지금 목소리를 내면 분명히 더듬거릴 거다.
그때, 오른쪽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헉, 헉…….”
휙 고개를 돌리니 할아범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우리를 번갈아 보고 있다. 눈에 설렘과 기쁨이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나와 시선이 부딪친 할아범은 고개를 저으며 오른손을 팔랑거렸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두 분 다 하던 거 계속 하세요. 얼른얼른.”
“…….”
입술을 꾹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몇 초쯤 서 있었을까. 이 고집 대회에서 내가 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엔 충분한 시간이 흐르고.
“그럼 그냥 같이 들어가요.”
문고리를 돌려 그대로 문을 열었다. 미리 불을 피워놓은 침실에서 훈기가 흘러나왔다.
“저도 오늘 잠이 안 오네요. 말상대 좀 해주실래요?”
여기서도 안 들어간다고 우기면 2차전 시작이다. 그리고 나는 한 종목에서 두 번 지지 않는다. 어디 덤벼 보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