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하지 마세요-36화 (3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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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코트연참 1/2

진짜 귀를 의심했다. 이 공작님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왜 갑자기 우리 집에 오겠대, 그리고 침실이 뭐가 어떻다고?

“백작님의 명예에 흠이 갈 일은 없을 겁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황실에도 이 일을 보고하고 문서를 꾸리겠습니다. 비공식적인 방문이 아니니 염려 마세요.”

공작은 차분한 척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 무슨 소린지는 알겠다. 황실이랑 가문에도 얘기를 해서, ‘비공식적 동거’라는 오명을 피하겠다는 뜻이다.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다. 어차피 내 명예야 한 줌도 안 되는 수준이니 그런 걸 걱정하진 않았다. 내가 놀란 이유는 그냥…….

“정말 이 일이 그렇게 심각하다고 생각하세요?”

물론 나도 갑자기 불을 봐서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불은 아무 해도 끼치지 않았다. 보기에 좀 무서웠을 뿐이지.

그런데 공작이 이렇게까지 펄쩍 뛰며 위험하다고 하니 좀 얼떨떨한 기분이다. 내가 비마법사라 그런가, 그냥 트릭스터의 작은 장난 같기도 한데. 만약 트릭스터가 우리를 정말로 해치려고 했다면 환각에서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공작의 표정은 너무나 진중했다.

“백작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압니다. 하지만 아주 작은 위험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 그냥 지금처럼 어디 나갈 때만 함께 가도 되지 않을까요?”

“네,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

으, 불리한 화제가 나왔다.

공작은 순하고 다정한 눈빛으로 내 양심을 공격했다. 그러려고 했는데 네가 거짓말 했으니 앞으로 어떻게 믿느냐고 묻는 것 같다. 그냥 내 과대망상이겠지만, 그래도 양심이 아프기는 하다.

아니, 하필이면 황궁에서 딱 마주칠 게 뭐야?

한탄하며 공작의 시선을 피했다. 어째 하나하나 다 공작 뜻대로 되어 가는 느낌이다. 말로는 이길 수가 없군.

“일단은…… 점심이라도 같이 먹고 더 생각해 봐요. 제가 대접할게요.”

“네, 백작님. 그럼 저는 식사 후에 황실에 보낼 문서를 준비하겠습니다. 공식적인 파견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저기요, 아직 우리 집에 있으라고 얘기 안 했는데요.

그러나 공작은 내 표정을 읽지 못하고 안심한 낯으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말하는 듯한 얼굴에 차마 거절의 말을 내던질 수가 없었다.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씨는 엄청 좋네. 어휴.

“네, 가서 좀 더 얘기해 봐요.”

이놈의 대답. 분위기를 못 잡게 해.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동안 공작의 제안을 어떻게 거절할지 궁리해보자. 그러니까 일단은…….

“네, 백작님. 제가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그러실 필요까진 없지만……. 설명해주신다면 잘 들을게요.”

“감사합니다.”

“네.”

“네, 백작님. 특별히 불편한 곳은 없으신가요?”

“아주 멀쩡해요. 환각 마법이었잖아요. 공작님도 괜찮으시죠?”

“네,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다치신 곳 없으니 저도 안심했습니다.”

“네, 걱정해주셔서 감사…….”

…생각 못 하게 하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야?

결국 나는 저택으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 대답을 주고받아야 했다. 진짜 1년 후에 이 저주만 풀려 봐라. 매일같이 공작한테 마지막 대답을 양보할 테니까!

-

어쩌면 할아범이 말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공작이 내 저택에 머물다니. 저택을 관리하고 내 생활 전반을 돌보는 할아범도 피곤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러나 할아범은 내 기대를 완벽하게 배신했다. 마차에서 내려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공작이 며칠 내 저택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마자 손뼉까지 치며 이렇게 외친 것이다.

“세상에, 모시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뇨, 업무 때문에 머무는 것이니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럴 수는 없죠. 어쩌면…… 어쩌면 쭉 같이 살지도 모르는데!”

“할아범!”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 할아범은 입을 비죽거리며 꿍얼거리고, 공작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나는 야수처럼 소리친 일을 수습하고자 애써 빙긋 웃었다.

“부디 편안히 계세요. 그때 그 기사님과 함께 지내셔도 괜찮아요. 방은 많으니까요.”

“아, 그런가요?”

“제 저택에는 시녀나 기사가 없어서……. 공작님의 가신이 온다면 그 사람이 머물 곳도 준비할게요.”

“백작님의 저택에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 레이번 경만 부르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감사하죠. 그럼 식사부터 하실까요?”

자연스럽게 식당으로 데려갔다. 아마 공작이 만족할 정도로 호화로운 음식을 차리진 못하겠지만, 내 요리사도 쓸 만하다고.

손을 씻고 앉아 잠시 기다리는데 어색한 침묵만 흐른다. 습관처럼 상석에 앉았는데, 공작을 상석에 앉히는 게 맞나 고민이 된다. 아니지, 그래도 내가 집주인인데 그럴 필요 없잖아.

정작 공작은 자리 따위는 아무 상관도 없는 얼굴로 식당을 둘러보고 있다. 그러다 나랑 딱 눈이 마주쳤다.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가 변명했다.

“아, 신기해서 살펴봤습니다. 자선 파티에 왔을 때는 제대로 보지 못해서요. 그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네요.”

“네, 그렇죠. 평소에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 공간이에요.”

공작이 이유를 물으려는 듯 입을 벌렸는데, 때마침 들어온 할아범 때문에 말이 끊어졌다.

할아범은 난처한 기색으로 종종 다가왔다. 공작의 눈치를 살핀 할아범이 내 귀에 입술을 가까이 했다. 작은 목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공작님이랑 위층에서 좀 기다리실래요? 식사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는데…….”

“뭐? 왜?”

“아가씨가 돌아와서 샌드위치나 먹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지금 준비된 게 샌드위치 밖에 없습니다. 요리하려면 시간이 좀 걸려요.”

아, 맞다!

솔직히 이렇게 갑자기 손님을 데려오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평소처럼 샌드위치 좀 먹고 말려고 했더니.

나는 당황해서 할아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할아범은 공작에게 대충 둘러대라는 눈짓을 보이곤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니까 제가 맨날 샌드위치 드시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니,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지. 그냥 간단히 만들 수 있는 걸로 하라고 해.”

“그래도 공작인데 어떻게 그렇게 대접합니까?”

“굶기는 게 더 나쁘지 않아?”

진짜 세기의 고민이다. 공작에게 샌드위치를 먹이는 것과 굶기는 것 중 어떤 게 더 실례일까. 할아범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데 갑자기 공작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아무거나 먹어도 괜찮습니다. 갑자기 머물게 되었으니 마음 쓰지 마세요. 평소 드시던 음식이면 충분합니다.”

“아, 그럼요. 물론이죠.”

적당히 대답하고 할아범을 돌려보내려는데, 갑자기 할아범이 허리를 똑바로 폈다. 그러더니 나와 공작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시커먼 꿍꿍이가 나이 든 얼굴 한복판에 도사리고 있다.

오, 뭔진 몰라도 불길한데?

그 순간 할아범이 공작을 향해 선언하듯 말했다.

“저희 단주님은 평소에 샌드위치만 드셔서요. 저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아니, 공작이 그거 물어봤어? 궁금한 내색이라도 했어? 도대체 내가 평소에 뭘 먹는지 공작한테 왜 말하는 건데?

“저런. 그렇군요. 걱정이 클 만도 합니다. 잘 먹어야 기운이 나는데 말이죠.”

고개를 홱 돌려 공작을 바라보았다. 아니, 왜 여기서까지 예의 바르게 구는 거야. 그럴 땐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 그렇군요.’라고 대답해서 할아범을 무안하게 만들어야지!

그러나 공작은 내게 시선을 주지 않고 할아범과만 대화를 이어갔다.

“매번 영양은 문제없으니 된 거 아니냐고 하시는데, 그래도 사람이 어떻게 매일 샌드위치를 먹습니까.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해야죠.”

“그 말이 맞습니다. 게다가 샌드위치만으로는 섭취할 수 없는 영양소도 있고요.”

“공작님은 제대로 식사하는 사람을 좋아하시죠?”

“네? 아…….”

할아범의 지원 요청에 공작이 당혹한 듯 눈을 깜빡였다. 아무리 공작이 착해도 저런 말에 낚일 사람은 아니지. 나는 나를 사이에 두고 내 식사에 대해 토의하고 있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한숨을 참았다.

이러다 주방에서 요리 다 할 때까지 이러고 있겠네.

그때 공작이 나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제 저 미소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바보처럼 심장이 쿵 떨어졌다. 열이 오른 얼굴을 감추느라 뺨에 손을 대는 나를 보다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제 기호를 백작님이 고려해 주실 이유는 없지요. 제가 백작님의 생활에 말을 보탤 권리도 없고요.”

아까까지 실컷 말 보태지 않았어?

할아범이 실망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공작을 들쑤셔 날 매번 식당에 앉히려고 한 모양인데, 어림도 없지. 그리고 내가 공작이 뭐라고 하면 냉큼 들을 줄 알고? 날 뭘로 보고 말이야.

내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공작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저와 있는 동안은 식당에서 함께 식사해 주시겠습니까? 지나친 참견이라 나무라지 마시고, 우정 어린 부탁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아니, 친구로서…… 아니, 제 말은…….”

뭐라고 하나 보자. 할아범과 편을 먹고 내 소중한 샌드위치를 뺏어가려는 공작을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모양 좋게 움직이는 그 입술이 갈 길을 잃고 헤맸다. 그때 할아범이 구원자로 나섰다.

“사랑의 부탁이죠! 하하하!”

아니, 할아범은 공작이랑 친하지도 않으면서 갑자기 왜 저렇게 들떴어? 공작이 내 저택에 온 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벌써부터 내 남편 대하듯 하냔 말이야.

놀랍지 않게도 공작은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그때 공작과 제대로 눈이 마주쳤다. 내 눈동자에 도대체 뭐라고 적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공작이 말을 급선회했다.

“그……것도 좋지만 집사의 마음이라고 해두죠.”

“예?”

“네?”

할아범과 내 입에서 동시에 소리가 튀어나갔다. 공작은 드물게 말을 주워 담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 미미하게 붉어진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배가 좀 고프네요.”

“아, 예에……. 빨리 가서 준비하라고 하죠…….”

할아범이 이상한 얼굴로 공작을 바라보다 어물쩍 자리를 떴다. 할아범이 사라진 후에도 공작은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 않고 식탁보와 눈싸움을 했다.

이상한 건 그뿐이 아니다. 배가 고프다고 했으면서, 차려진 음식에는 예의 없지 않을 정도로만 손을 댄 후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은 그때까지도 붉었다.

뭐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건데. 왜 괜히 사람 오해하게 해. 진짜 날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냥 희망 같은 거지 진심으로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나는 내 얼굴도 저런가 싶어 은수저 뒷면에 슬쩍 비춰 보았다. 왜곡된 얼굴에서는 어떤 마음도 제대로 읽어낼 수 없었다.

후,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나는 공작처럼 식기를 내려놓았다. 탁 소리에 공작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눈이 마주친다. 심장이 또 나대기 시작한다.

“공작님.”

“네?”

“혹시 저…….”

입이 턱 막힌다.

저 좋아하세요, 라고 물어보다니, 세상에서 가장 멋없는 짓이다. 내가 좋아한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나 좋아하냐고 묻는다고?

공작의 대답과 상관없이 평생의 수치다.

“저……금 좋아하세요?”

진짜 내 인생 어쩌면 좋아. 살다 살다 남한테 이런 거 묻는 날이 올 줄이야.

다행히 공작은 특유의 좋은 성격으로 내 질문을 받아 넘겼다. 표정이 좀 이상해지기는 했지만.

“저금……이요?”

“네, 저금…….”

둘러대는 말이었는데 공작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그는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성의껏 답했다.

“저는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를 영지의 문제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공작이 애매하게 말을 흐리더니 갑자기 결연하게 선언했다.

“혼자일 때 절제를 배워야 미래의 배우자에게도 폐가 되지 않겠죠. 배우자의 씀씀이에 관여할 정도로 궁핍하지는 않지만, 저 스스로는 믿음직한 배우자가 되려고 노력 중입니다.”

“…….”

면접 보세요?

“아, 네, 그러시구나. 든든하네요. 아니, 그러니까, 배우자 되실 분이 든든하겠어요…….”

당황해서 더듬더듬 대답하자, 공작도 너무 앞서갔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난처한 얼굴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 어마어마한 대답 중독자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다니, 별일이다. 자기도 놀라긴 했나 보지?

갑자기 배우자 어쩌고 해서 깜짝 놀랐네. 나한테 하는 말인 줄 알았어.

슬쩍 은수저를 뒤집어 다시 내 얼굴을 확인했다. 어쩐지 뺨이며 귀까지 다 새빨개진 것 같다. 화들짝 놀라 수저로 열심히 토마토 스프를 퍼먹는 척했다.

이러니까 내가 착각 안 하고 배겨? 다 공작 탓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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