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후기]*사실 이번편에서 트릭스터 시점이 살짝 나올 예정이었는데 너무 이른 등장인 것 같아 뺐습니다ㅋㅋㅋ 언젠가 쓸게요 트릭스터 시점ㅋㅋㅋ35회
에스코트
“백작님, 안 돼!”
거듭 나를 부른 공작이 불길을 뚫고 팔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화염을 헤치듯 나아와 나를 안았다. 균형을 잃고 공작의 품으로 안기듯 넘어졌다.
따뜻한 손이 내 등과 머리를 감싸는 것이 느껴진다. 얼굴이 공작이 가슴팍에 눌린 탓에 그의 심장 소리까지 고스란히 들렸다. 쿵쾅쿵쾅, 소리가 엉망이다. 마치 공포에 질린 사람처럼.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혀 뜨겁지 않았다.
질끈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공작의 품에 안긴 채 몇 차례 눈을 깜빡였다.
혹시 나 죽어가면서 환각을 경험하는 건 아니겠지. 그게 아니라면, 그만한 불꽃에 휩싸였는데 괜찮을 리가 없지 않은가. 뜨겁기는커녕 간지럽지도 않다.
“고, 공작님?”
겨우 부르며 손바닥으로 그의 몸을 밀어냈다. 고개를 들어 공작의 얼굴을 보니, 가여울 정도로 새파랗게 질려 있다.
푸른 눈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나를 살핀다. 공작이 내 머리에서 손을 떼더니 뺨을 감싼다. 상처 하나 없는 멀쩡한 뺨을. 내 얼굴이며 어깨를 더듬어 무사를 확인하는 손이 마구 떨리고 있다.
“저…… 저 괜찮아요.”
아무래도 공작도 괜찮은 것 같다. 폭음 때문에 달아났던 정신을 겨우 붙들고 주위를 살폈다.
불이 사라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불은 내 발밑에서, 공작의 등 뒤에서, 혀를 날름거리듯 사납게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한쪽 발을 들어 불을 피했지만 이상하게 열기는 전혀 없었다.
“이게 무슨…….”
자세히 보니, 나와 공작은 거대한 반구 안에 들어와 있다. 그 반구는 나와 공작을 보호하듯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일렁거렸다. 깊은 물 속에서 해가 비치는 수면을 올려다볼 때처럼, 빛이 제멋대로 흔들렸다. 신비롭고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뜨겁지 않은 불은 그저 귀여운 장난 같았다. 그래도 보이는 광경이 워낙 살벌하니 좀 무섭기는 했다. 왜 뜨겁지 않은 걸까, 분명 보기에는 무시무시한데.
아, 하고 작은 깨달음이 나를 찾아왔다.
“공작님이 하신 건가요?”
잘은 모르지만, 공작은 엄청난 마법사다. 그가 불의 열기를 빼앗고, 순간적으로 나를 감싸 마법 결계를 펼쳤다면. 그렇다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전부 설명된다.
타오르는 불꽃과 황금 결계가 공작의 등 뒤에서 날개처럼 어른거렸다. 공작은 여전히 놀란 듯 내 어깨에 손을 대고 있었는데, 드물게 평정을 잃고 동그래진 눈과 미미하게 벌어진 입술이 마음에 박혔다.
지켜준다고 하기에 조금 황당했었는데.
진짜 지켜줬어…….
그때 공작의 표정이 변했다. 공작도 나처럼, 드디어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다. 이내 핏기 가신 입술이 열렸다.
“아, 아니요. 이건…… 이건 제가 한 게 아닙니다.”
“네?”
“이 불은 그냥 환각입니다. 환각 마법의 일종이죠.”
…어?
다시 발밑을 봐도 불은 그냥 불이다. 환각이니 뭐니, 그렇게 느껴지진 않는다. 진짜 같아서 환각이겠지만.
아니, 그럼 이 금빛 결계는 뭐야?
“그럼 우리 주위에 이건……?”
“그건…….”
답하려는 공작의 말이 갑자기 끼어든 고함에 뚝 잘려나갔다.
“데이라 경! 갑자기 최상급 결계라니 무슨 일입니까!”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마자 불길과 금빛 결계가 전부 사라지기 시작했다.
불은 허공에서 진화된 듯 화르르 몸집을 줄이다가 모습을 감추었고, 결계는 위에서부터 스르르 녹는 듯 없어졌다. 마지막에는 우리 주위에 황금색 원이 꼬리를 문 뱀처럼 꿈틀거리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결계는 사라진 후에도 반짝이는 금색 가루 같은 것을 남겼다. 자세히 보니, 가루처럼 보이는 것들은 전부 빛이었다. 그 빛이 공작의 머리로, 어깨 위로, 등 뒤로 느리게 쏟아졌다.
아마 내 위로도 이 빛의 비가 내리겠지. 가까이 있는 공작의 눈동자에 무수한 별이 박힌 것처럼 보인다.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그 푸른 바다에 쏟아진 미지의 별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제야 결계 밖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 주위로 와글와글 몰려든 수십 명의 사람. 아까 헤어진 피피온의 얼굴도 보인다.
이들 모두 황실 마법사 건물에서 쏟아져 나왔다. 마법사 제복을 입은 사람도 있고, 피피온 경처럼 대충 주워 입은 사람도 보인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지만, 공통점은 분명하다.
모두 소처럼 눈을 크게 뜨고 나와 공작을 보고 있다…….
“뭐야, 뭐야?”
“갑자기 최상급 결계는 왜? 방금 그 불은 뭐였는데?”
“왜 둘이 껴안고 있어? 저 사람 누구야?”
“미르아 헥센 백작인데, 아무래도 데이라 경과…….”
신이 나서 떠들려던 피피온과 눈이 딱 마주쳤다. 나와 공작이 동시에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인 순간, 그의 두 입술이 딱 붙어 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마법사들이 입을 다문 건 아니었다.
“환각 마법 아니야?”
“근데 왜 결계를 펴? 위험하지도 않은 걸 가지고…….”
“최상급 결계 오랜만에 봤어. 요즘은 사용할 일 진짜 없는데.”
데이라 공작이 조심스럽게 내 몸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둘러선 마법사들을 잠시 무시하고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살피듯 움직이는 눈길이 더없이 조심스럽다. 방금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을 대하는 것 같다.
“다치진 않으셨습니까? 진짜 폭발물이 아니라 환각이었습니다. 무척 놀라셨을 텐데……. 미리 알아채지 못한 제 탓입니다.”
“아, 아니요. 공작님 탓이긴요. 저도 진짜 불인 줄 알았는데요.”
더듬더듬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결국 그 불은 그냥 환각이었다는 거지? 공작은 그 환각 때문에 놀라서 엄청난 결계를 펼쳤고. 그 결계, 딱 봐도 되게 컸는데 황궁 높은 곳에 있었던 사람은 전부 봤을지도 모른다.
우리 뒤에서 떠들어대는 마법사들은 당연히 목격했을 테고.
공작도 민망하겠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일 가지고 결계까지 썼네.
그러나 공작의 얼굴에는 부끄러움이나 민망함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는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공작은 차갑게 얼어붙은 낯을 피피온에게 돌렸다.
“피피온 경.”
목소리가 살벌하다. 이름이 불린 피피온이 어깨를 움찔하더니, 시키지도 않은 변명을 시작했다.
“아, 아니, 설마 제가 드린 투명 물약이 터진 겁니까? 아닌데, 분명히 잘 분류해 놨는데……. 분명히 그건 그냥 투명 물약이었는데요…….”
“이런 실수는 살인미수다. 환각 물약이 아니라 정말 위험한 물약이었다면 백작님께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이 안 되나?”
공작의 기색이 심상치 않다. 맹세하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이렇게까지 화가 난 공작을 본 적이 없다. 어느 정도냐면, 난 그냥 옆에 서 있을 뿐인데도 긴장이 된다.
화 안 내는 사람이 화내면 더 무섭다더니.
주위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일이 너무 커질 것 같아 재빨리 공작의 팔을 잡았다.
“저, 공작님. 일단 그냥 갈까요?”
이 많은 사람 앞에서 트릭스터 이야기를 꺼낼 자신은 없다. 나를 해부할 듯 바라보는 시선만으로도 이미 기가 질린다. 게다가 아까 순간적으로 심하게 놀란 탓에 빨리 어디 누워 다리 뻗고 쉬고 싶은 심정이다.
공작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얼굴에 가득하던 사나운 감정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공작이 부드럽게 내 손을 잡으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백작님도 놀라셨을 텐데……. 일단 저택으로 모시겠습니다.”
공작은 한 차례 경고해서, 피피온을 포함한 마법사들을 다시 안으로 들여보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둘이 무슨 관계야?”
무슨 소문이 날지 안 봐도 뻔하군. 이제 솔직히 해탈한 심정이다.
소문이야 어차피 내가 통제할 수 없으니,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자리를 떠나는 피피온만 주의 깊게 살폈다. 잔뜩 주눅이 든 그가 미안한 얼굴로 내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다.
피피온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이번 일도 트릭스터 짓이라면…….
상황을 간단히 수습한 공작이 나를 에스코트해서 마차로 데려갔다.
기다리고 있던 할아범은 갑자기 공작과 나타난 날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두 분이 어떻게 같이 오십니까?”
“우연히 마주쳤어.”
“근데 단주님 안색이 왜 그렇게 나쁘세요? 설마 또 위험한 일이라도…….”
지금은 좀 피곤하다. 빨리 조용한 마차에 앉아서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다. 나는 짧게 고개를 저어 할아범을 멈추게 했다.
“나중에 저택에서 얘기해 줄게.”
할아범은 눈치 빠르게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서둘러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공작은 자연스럽게 함께 탔다. 분위기를 살피던 할아범은 슬쩍 마차 문을 닫고 마부석으로 이동했다. 거기 마부랑 같이 앉아서 가면 힘들 텐데, 그냥 안에 있지.
바라보니 공작의 표정이 또 심상치 않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그 물약의 위험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또 사과할 기세다. 그가 마차 바닥에 무릎을 꿇게 둘 순 없으니 재빨리 말을 꺼냈다.
“사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내가 본 것을 간단히 설명했다. 병 안의 기포가 회오리를 이루었다가 사람의 얼굴을 만들어냈다고 하니, 공작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노인의 얼굴이라고 하셨죠. 어쩌면 트릭스터의 형상일지도 모릅니다. 그 괴물이 한동안 노인으로 변신해 돌아다녔다고 들었습니다.”
예에, 공작님은 모르시겠지만 그건 저도 이미 안답니다.
“사실, 환각 물약이라도 병에 들어 있다가 터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아무래도 트릭스터가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는 것 같군요. 며칠 정도는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도대체 트릭스터의 목적이 뭘까.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결국 아무 해도 없었지만, 불이 나를 덮칠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건 아마 공작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러니 놀라서 결계까지 사용했을 거다.
공작은 괜찮을까 싶어 얼굴을 살피니, 그의 표정이 결연하다. 뭔가 굳게 마음먹은 것 같다.
음. 왜 불길한 예감이 들지?
그때 공작이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무례한 청을 용서해 주십시오. 사흘 정도 제가 백작님의 저택에 머무르며 상황을 살펴도 되겠습니까? 백작님의 안전에도 그 편이 훨씬 좋을 것 같습니다.”
뭐지, 이 익숙한 전개는?
내 얼굴에서 뭘 읽었는지 공작이 급히 덧붙였다.
“물론 밤엔 침실 밖에 있겠습니다.”
……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