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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하지 마세요-34화 (34/74)
  • *눈새들의 연애...:D34회

    에스코트연참 2/2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마법사가 나와 공작을 데리러 왔다. 그는 채도가 낮은 회색 머리카락에 검은 눈을 가졌는데, 안경을 쓰고 짧은 머리를 제대로 빗지 않았다. 마법사 제복까지 완벽하게 갖춰 입은 공작과는 달리 이쪽은…… 피곤하고 예민한 천재 느낌?

    마법사는 정체 모를 마법약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자기 연구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아무래도 마나 순환이…….”

    “트릭스터의 이동 경로가…….”

    “저주도 문제지만 축복의 실현 과정이…….”

    한 마디도 못 알아듣겠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마법 이야기에 금세 지루해졌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수학자들 사이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벌써 삼십 분째 가만히 앉아만 있으니, 슬슬 하품을 참기가 어려워진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아가씨는 누구십니까?”

    갑자기 튀어나온 내 이야기에 깜짝 놀랐다. 정체 모를 마법약이 든 솥을 관찰하다 눈을 돌리니, 안경알 너머에서 나를 주시하는 눈동자가 보인다. 어쩐지 번뜩이는 장난기를 본 것 같다.

    대답하기도 전에 공작이 끼어들었다.

    “피피온 경, 실례다. 아가씨가 아니라 백작님이야.”

    “아하.”

    피피온이라 불린 마법사가 머쓱하게 뒷머리를 쓸었다. 그렇게까지 민망해할 필요는 없는데, 정말 당황했는지 귀까지 붉어졌다. 생각보다 순진한 타입일지도 모르겠다.

    “진짜 실례했네요. 죄송합니다, 벌써 작위를 받았다고 하기엔 너무 어려 보여서.”

    “괜찮아요. 전 미르아 헥센이라고 합니다.”

    “아, 미르아 헥센!”

    피피온이 갑자기 손뼉을 쳤다. 드디어 찾았다, 하는 동작이라 좀 어리둥절했다. 나랑 아는 사이도 아닌데 왜 저렇게 반가워해.

    “그 톡톡 상단주시죠! 이름은 많이 들었습니다. 저도 집에다 톡톡을 좀 사다 보냈죠. 마법보다 훨씬 편하다고요, 하하. 갑자기 터질 위험도 없고요.”

    줄줄 이어진 말에 좀 당황했지만, 그냥 그러시구나 하고 웃었다.

    톡톡이 유명해지다 보니 내 이름도 덩달아 알려졌다. 그래도 마법사는 톡톡 같은 거 필요 없으니 모를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지?

    “칭찬 감사합니다. 잘 사용하고 계시다니 기쁘네요.”

    “그나저나 신기하네요. 데이라 경은 일만 하시는 줄 알았더니, 수도에 올라오자마자 좋은 일이 생기다니. 역시 사람을 만나려면 영지에만 있어선 안 되겠죠, 하하하!”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린지 훤히 읽혔다. 이런 오해를 하도 받아서 그런지 이젠 아무렇지도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래도 앞서 나가는 건 수도 사람들 특징인가 싶다.

    공작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바로 중재하고 나섰다.

    “피피온 경, 그만해. 백작님이 난감하실 테니. 나와는 좋은 친구일 뿐이야.”

    “예에? 아니, 이렇게 훌륭한 분과 왜 친구만……. 헥센 백작님도 아직 미혼인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죠. 설마 데이라 경이 내내 영지에만 있어서 걱정하시는 겁니까? 결혼하면 따라가야 할까 봐?”

    “피피온 경, 거기까지…….”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시죠! 데이라 경도 가정을 이루면 수도로 올라오실 겁니다. 당연히 상단 쪽에 맞춰야죠, 안 그렇습니까? 이쪽은 큰 사업이잖습니까.”

    “…….”

    레디아 못지않은 강적이군.

    나는 피피온이 줄줄 쏟아내는 핑크빛 미래 이야기를 들으며 반쯤 멍해졌다. 그가 너무 말을 빨리 한 탓이기도 하고, 어떻게 혼자서 이렇게까지 상상할 수 있나 기가 막힌 탓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피피온은 남 연애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다.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그냥 웃긴가 보다. 나도 모르게 픽 웃고 그의 말을 끊었다.

    “피피온 경은 재밌는 분이시네요. 저는 그냥 공작님과 우연히 만나 함께 왔을 뿐인데, 피피온 경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운명의 상대 같군요.”

    “이렇게 말씀도 잘하시다니! 마법사 모임에 한 번 와주십시오. 귀족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저희 모임은 어찌나 재미없는 인간들뿐인지 술도 진흙처럼 느껴진다니까요.”

    “피피온 경이 초대해 주시면 갈게요.”

    “이야, 영광입니다! 에스코트도 제게 맡기십시오, 이래 봬도 능숙합니다!”

    “그럼 기대하고 있어야겠네요.”

    농담으로 한 말 같아서 나도 농담으로 받았다. 어쨌든 쾌활한 사람이라 나도 마음이 가벼워지기는 했다. 내게 벽을 치고 대하는 귀족들보단 이쪽이 훨씬 더 편안하다.

    그때 옆에서 공작이 불쑥 말했다.

    “제가 초대하겠습니다.”

    “네?”

    “피피온 경과는 친분이 없으시니, 제가 초대하겠습니다. 에스코트도 제가 할 테니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냥 농담이었다고,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공작이 못을 박았다.

    “저흰 친구니까요. 그렇죠?”

    “…….”

    날 보는 공작의 눈이 어쩐지 간절하다.

    예, 그러시겠죠. 수도에서 새 친구 사귀어서 아주 좋으시겠네. 난 왜 이렇게 친구 소리를 들을 때마다 기분이 별로지? 내가 먼저 친구라고 말했는데.

    그 순간 옆에서 헉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나와 공작이 동시에 피피온을 돌아보았다. 그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우리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세상에.”

    “피피온 경?”

    “세! 상! 에! 전 두 분이 가시자마자 이 일을 톡톡으로 모두에게 알려야겠습니다!”

    아니, 뭔지 몰라도 하지 말아 주실래요?

    데이라 공작도 더는 여기 있어선 안 된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도 일어날 수 있게 살짝 팔을 받쳐 주었다. 몸에 밴 듯한 배려에 나도 모르게 함께 일어섰다.

    데이라 공작은 차가운 옆얼굴로 피피온을 내려다보며 경고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행동을 신중히 하길 바란다. 백작님의 드높은 명예에 흠이 갈 말은 애초에 입 밖에 내지 않으리라 믿겠다.”

    ‘백작님의 드높은 명예’라니, 되게 부끄럽고 간지럽다. 오히려 나보단 공작 명예가 대단하지. 그래도 괜한 소문이 나는 건 싫어서, 나도 눈에 힘을 주고 피피온을 바라보았다.

    피피온이 아까처럼 뒷머리를 쓸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도 흥분이 좀 가라앉은 것 같아 다행이다. 그가 데이라 공작과 내 눈치를 살피다가 꼬리를 내리듯 변명했다.

    “농담이었습니다. 그냥 두 분 보기 좋아서…… 이 좋은 소식을 저만 알기는 너무 아까우니까…….”

    “피피온 경.”

    “아, 네. 그럼요, 조심하죠. 백작님께도 깊이 사과드립니다.”

    피피온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허리를 꺾어 사과했다. 울상을 짓는 그 얼굴이 아까보다 훨씬 더 어려 보인다.

    아니,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뭘 이렇게까지 해. 난감하게 반걸음 뒤로 물러서며, 보기 드물게 냉정한 공작을 곁눈질했다.

    공작이라면 이래도 저래도 ‘다 사정이 있겠죠.’ 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머리통이 깨질 뻔했을 때도 이해해 주던 사람이, 별것도 아닌 내 명예 때문에 싸늘해지니 기분이 이상하다.

    아무래도 이 분위기는 내가 먼저 깨야겠다.

    “그럼 저희는 먼저 가볼게요. 두 분 할 이야기는 다 하신 거죠?”

    “네? 혹시 저 때문에 마음이 상하셔서…….”

    “아뇨, 정말 아니에요. 어차피 가야 할 시간이라서요.”

    “그, 그럼 이거라도 가져가세요.”

    피피온이 허둥지둥 방 구석을 뒤졌다. 정리를 지독하게 안 하고 사는지, 한가득 쌓인 물건 더미에서 뭘 찾는 데 한참이 걸렸다. 결국 그가 가져온 건 투명한 물병이었다. 맑은 물이 찰랑거렸다.

    이런 것까지 줄 필요는 없는데, 괜히 좀 미안하네.

    “투명 물약입니다. 사과의 뜻으로 드리는 거니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저 투명 물약 뭔지 알아요. 그냥 색이 투명해서 투명 물약이잖아요?”

    “그래도 맛있습니다.”

    피피온이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도대체 뭐가 뿌듯한 걸까. 더 깊게 묻고 싶지 않아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잘 마실게요.”

    근데 이거 온갖 잡동사니 속에서 가져온 건데, 괜찮으려나. 상한 거 아니야?

    일단은 잘 받아 들고 연구실을 나섰다.

    피피온의 배웅을 사양하고 공작과 둘이서만 건물 밖으로 나서니, 어느새 점심 무렵인지 해가 하늘 꼭대기에 걸려 있었다. 확실히 배도 좀 고프고.

    “그 물약은 웬만하면 드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옆에서 걷던 공작이 차분한 소리로 조언했다.

    “피피온 경은 쾌활하고 착한 마법사지만, 덤벙대는 면이 있죠. 그 물약도 얼마나 오래 되었을지 모르니 조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아, 네. 안 그래도 저도 이거 먹어도 되나 하고 있었어요. 그래도 투명 물약 이렇게 받아본 건 처음이라, 신기하네요.”

    작고 투명한 병을 들고 가볍게 흔들었다. 물이 찰랑찰랑 흔들렸다.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어서 도대체 무슨 맛일까 궁금하긴 한데, 공작 말 듣는 게 좋겠지.

    혹시 모르잖아, 피피온이 허둥거리다가 폭발물을 줬을…… 지도……?

    “공작님?”

    “네?”

    등골이 오싹하다. 사지가 뻣뻣하게 굳는 느낌이다.

    “이거 왜…… 부글거리죠?”

    물병 바닥에서부터 작은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온다. 기포가 이상할 정도로 많다. 마치, 마치 좁은 물병 안에서 회오리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내가 쥔 병이 점점 더 따뜻해지고 있다.

    그때 나는 보았다. 맹세할 수 있다. 회오리치던 기포가 갑자기 자기들끼리 모이더니 한 사람의 얼굴을 만들었다. 주름진 얼굴, 오싹한 미소, 나를 직시하는 눈.

    트릭스터 할머니?

    그때, 공작이 손을 뻗으며 짧게 외쳤다.

    “저한테 주십시오, 빨리!”

    그 말에 따를 틈도 없었다. 병이 갑자기 숯불처럼 뜨거워져서, 공작이 병을 쥐기도 전에 놓치고 말았다. 손가락 사이로 병이 허무하게 미끄러졌다.

    갑자기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병이 느리게 떨어지고, 모서리부터 땅에 닿는다. 단단한 돌바닥에 떨어진 순간.

    펑!

    “백작님!”

    엄청난 폭음이 귀를 찢었다. 시뻘건 화염이 나를 집어삼켰다.

    할머니…….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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