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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하지 마세요-32화 (32/74)
  • 32회

    에스코트연참 2/2

    메이페이아 코커 워필드 황제는 감이 좋았다. 그녀는 데이라 공작을 발견하고 딱 굳어지는 헥센 백작을 보자마자, 상황이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아니, 못 알아차리는 게 더 이상한가?’

    헥센 백작은 누가 봐도 어색하고 뻣뻣했다. 관절마다 녹이 슨 사람처럼 뻑뻑하게 움직였다. 황제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마침내 헥센 백작이 삐걱삐걱 입을 열었다.

    “안, 안녕하세요. 어…… 다시 뵈니 반갑네요!”

    가엽게도, 헥센 백작은 자기가 대단히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다고 믿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입꼬리를 파들파들 떨며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잘 지내셨죠, 공작님? 하하하.”

    “네, 감사합니다.”

    황제는 슬쩍 데이라 공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잘생기고 차가운 옆얼굴에도 당혹이 가득했다. 황제는 티 나지 않게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 혀로 입술을 축였다.

    ‘이것 봐라.’

    이 기묘하고 식은땀 나는 분위기. 두 사람 사이에 자기가 모르는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황제는 재미있는 연극을 보는 기분으로 상황을 관망했다.

    “백작님께서 오늘은 저택에만 계신다고 하셔서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여기서 뵐 줄 몰랐습니다.”

    “아, 그게 말이죠.”

    헥센 백작은 누가 봐도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외로 꼬더니 갑자기 눈을 빛냈다. 그런 다음 황제에게 시선을 꽂아 구조 사인을 보냈다. 물론 황제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미소를 지었을 뿐, 어떤 지원도 해주지 않았다.

    헥센 백작이 진땀을 흘리며 변명했다.

    “갑자기 황궁에 오게 되어서요. 예, 예정에 없었던 일이죠.”

    황제는 굳었던 데이라 공작의 표정이 일순 부드럽게 풀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음, 나의 신하는 참으로 순진하구나. 저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다니. 황제는 자애로운 군주인 척 헥센 백작의 말을 정정했다.

    “아니, 백작이 며칠 전에 알현 신청을 하지 않았나. 잠시 잊은 모양이지?”

    “폐, 폐하.”

    황제를 부른 헥센 백작이 안면 근육을 죄다 사용해 제발 협조해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황제는 비상한 눈치로 백작의 요구를 알아차렸지만, 부러 모르는 척 응하지 않았다.

    “응? 백작, 어디가 아픈가?”

    “아뇨……. 아뇨…….”

    “아무튼 오랜만에 경의 얼굴을 보니 좋군. 올해는 내가 사랑하는 신하들이 모두 수도에 모였으니 기쁜 일이지.”

    헥센 백작은 귀에 아무 말도 안 들어오는지 넋을 빼고 황제를 볼 뿐이었다. 황제는 단 아래 선 헥센 백작도 데이라 공작처럼 가까이 부를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놀리는 재미는 쏠쏠하지만, 더 하면 토라질지도 모른다.

    “올해는 강아지 디자인을 생각하고 있다지?”

    “네, 네……. 코커스패니얼 위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사업 이야기를 하니 조금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백작은 우스꽝스럽게 쩔쩔매던 모습을 지우고, 두 손을 모으며 바르게 섰다.

    “이번에도 내가 가장 먼저 사용해볼 수 있게 해주리라 믿고 있다.”

    “물론입니다. 폐하께서 저희 제품을 애용해 주시니, 늘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황제는 의연한 백작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백작은 영문도 모르는 채 따라 웃다가, 황제 가까이 선 공작을 보고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이랬다저랬다 어쩔 줄 모르는 백작을 보고 황제는 마침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저나 백작, 연기엔 정말 소질이 없구나. 왜 그렇게 눈 둘 곳을 몰라 하는지.”

    헥센 백작이 제자리에서 반쯤 뛰어올랐다. 황궁에 오느라 입은 푸른 드레스가 가볍게 펄럭일 정도였다. 백작은 이제 가여울 정도로 쩔쩔매며 무작정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폐하, 그건…….”

    “데이라 공작의 외양과 성품이 사람의 마음을 쉽게 빼앗기는 하지. 내가 청춘의 시간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나이가 들면 이렇다니까.”

    백작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흠, 아직 교제하는 사이는 아닌가. 황제는 거기까지 짐작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얼굴이 보고 싶어 부른 것이니, 둘 다 이만 나가도 좋다.”

    백작은 끙끙대며 대답하지 못했다. 마흔다섯 먹은 황제의 눈에, 그녀는 여전히 아이 같았다. 어엿한 상단주로서 제 일을 야무지게 꾸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꾸 놀리게 된다.

    먼저 답한 사람은 데이라 공작이었다.

    “그럼 함께 물러갑니다, 폐하.”

    “그래. 좋은 시간 보내고.”

    공작이 계단 아래로 내려가 백작 옆에 섰다. 그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자, 헥센 백작도 엉겁결에 무릎을 굽혔다. 입궁을 위해 차려 입은 푸른 드레스 자락이 부드럽게 바닥을 쓸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등을 돌려 멀어졌다. 황제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미소를 지었다. 평화의 시대가 오니 젊은 신하들 연애질이나 구경하며 한가롭게 놀 수 있구나, 그런 감상도 마음을 스쳤다.

    그때, 갑자기 헥센 백작이 돌아서더니 종종 뛰어왔다. 그리고 아까 섰던 자리에 서서 다시 무릎을 굽혔다.

    “마, 마지막으로 인사드리는 걸 잊었습니다.”

    “응? 아, 굳이?”

    어차피 아까 공작이랑 같이 인사했잖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백작을 보니, 백작은 반쯤 체념한 얼굴로 마지막 대답을 챙겼다.

    “그래도 신하된 자로서 마음에 걸려서……. 폐하, 다음에 뵐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그래, 나도 경을 자주 볼 수 있길 기대하겠다.”

    “네, 그럼 이만 물러갑니다.”

    황제는 간단히 손만 들어 대화를 마무리했다. 백작은 그제야 좀 안심한 듯 기다리던 공작에게로 걸어갔다. 제자리에 선 채 백작을 기다리던 공작은 부드럽게 에스코트하듯 그녀의 손을 잡았다.

    ‘청춘이로다, 청춘이야.’

    황제는 혼자 남아 낄낄거리며 남의 연애를 일찍 눈치 챈 자의 기쁨과 만족을 누렸다. 그러면서 밤에 자신의 남편에게도 오늘 일을 알려 주어야겠다 다짐했다.

    -

    정적, 정적, 정적.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만 일정하게 울린다. 소리를 들을 때마다 걱정도 하나씩 늘어난다.

    도대체 폐하는 왜 청춘의 시간을 운운했을까. 설마 또 오해를 받았나. 이러다 온 세상이 나와 데이라 공작이 연애한다고 오해하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지금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저…… 공작님?”

    “네.”

    드물게 말이 없는 데이라 공작이다.

    진짜 운명의, 아니, 트릭스터의 장난이 분명하다. 공작이 오늘 이 시간에 폐하와 만나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딱 오늘, 점심도 저녁도 아닌 딱 오전에!

    뭐라고 변명하지? 사실 오늘 입궁하기로 한 일을 깜빡 잊고 있었다고? 아니면 진짜 급하게 일정이 생겨 입궁한 게 맞는데 폐하께서 놀리느라 거짓말을 한 거라고?

    “저기…….”

    슬쩍 고개를 들어 공작을 살피는데, 그 말끔하고 정직한 눈이 보인다. 갑자기 입에 고여 있던 한심한 거짓말이 쓴 알약처럼 녹아 사라져 버린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적어도 두 번째 거짓말을 하지 말자. 그건 정말로 미안한 일이야.

    나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죄송해요, 거짓말해서.”

    공작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황궁 밖으로 나가는 넓은 통로 한가운데, 우리 둘만 멈춘 채 서 있다. 높은 천장과 화려한 문양 때문인지, 온몸을 조이는 긴장 때문인지 조금 어지럽다.

    “사정이 있었어요. 어쩔 수 없는 사정이었다고……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공작에게 내 상황을 하나하나 설명할 수는 없다.

    사실 저는 귀족 사교계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상단이 성공한 후에 작위를 받았기 때문에, 다들 제가 돈으로 작위를 샀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보는 눈 많을 황궁에 공작님을 호위처럼 데리고 올 순 없었어요. 공작님의 명예를 위해서요.

    …라고 길게 말하라고? 절대 못 한다.

    일단 공작은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유서 깊은 마법사 가문 출신 장남이었는데, 어떻게 내 처지를 이해할까.

    설령 그가 뛰어난 성품으로 내 상황을 이해한다 해도 자존심이 상한다.

    그래, 사실 나는 대단할 거 없는 사람이다.

    근데 그걸 공작은 몰랐으면 좋겠다.

    그때, 공작이 내 손을 놓았다. 멀어지는 온기에 가슴이 철렁한다. 아무 의미 없다는 사실을 아는데도.

    손을 놓고 내 쪽으로 돌아선 공작이 표정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제가 강권해 함께 다니게 되었으니, 백작님께서 불편해 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제가 너무 제 생각만 했습니다.”

    “아니, 불편해서 그랬다기보다는…… 핑계 대는 게 아니에요, 공작님. 정말 사정이 있었어요.”

    “그럼 그 사정이 뭔지 듣고 싶습니다.”

    “네?”

    화들짝 놀라서 공작을 보았다. 사정이 있다고 말하면 넘어가줄 줄 알았더니, 갑자기 그 사정이 뭔지 듣고 싶다니.

    예전에 마법 정보상에서 소리 지른 일은 넘어가 줬잖아? 내밀한 이야기를 듣게 해달라고 고집 부리지 않겠다면서?

    데이라 공작이 나를 보며 몇 차례 눈을 깜빡였다. 해야 할 말을, 입에서 사탕처럼 몇 차례 굴려 보는 사람처럼. 마침내 그가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저희, 그 정도 이야기는 나눌 수 있는 사이가 아닙니까?”

    …그게 무슨 사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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