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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하지 마세요-31화 (31/74)
  • 하루나 이틀쯤 쉬고 올게요 새 챕터로 들어갑니당!31회

    에스코트연참 1/2

    [친애하는 헥센 경.

    생각건대 우리의 친교가 벌써 몇 해 째이다. 황실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경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음을 경도 알고 있으리라 기대한다. 새해가 되어 경의 반가운 얼굴을 기다렸는데, 만나지 못해 아쉽고 섭섭하구나.

    경의 분주한 생활과 마음을 헤아리는 일 역시 나의 몫이니, 나는 잠잠히 기다릴 뿐이다.

    중앙궁에서, 경의 좋은 벗이.]

    -

    저녁에 황궁에서 편지가 왔다.

    일단 분명히 해둬야 할 사실이 있다. 나는 황제 폐하와 ‘벗’이 아니다.

    그렇지만 마흔다섯 살의 폐하가 내게 무척 다정히 대해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톡톡을 판매할 때도 귀찮은 규제로 내 손발을 묶지 않고 오히려 도와주었다. 기술 독점 문제도 수월히 해결할 수 있게 해줬고.

    그리고 백작 작위를 내려준 사람도 그녀다. 물론 작위를 받아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뭐 어쨌든.

    “근데 새해 인사도 안 가니까 서운할 법도 하죠. 저택도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데.”

    “…….”

    편지를 거듭 읽는데, 옆에서 내용을 훔쳐본 할아범이 양심을 찌르는 소리를 했다.

    원칙적으로 귀족이라면 새해에 황제 폐하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는 게 맞다.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원칙’이고. 제국이 워낙 넓다 보니, 영지가 먼 귀족은 적당히 장녀나 장자, 신임하는 신하에게 선물을 들려 수도로 보낸다.

    물론 난 황궁과 아주 가까운 곳에 산다. 지금까진 매해 새해 인사를 갔었다. 근데 올해는?

    “할아범도 알잖아, 나 저주 때문에 정신없었던 거.”

    “그야 그렇죠.”

    “그리고 위험하단 말이야. 데이라 공작이나 직원들한텐 대답하지 말라고 할 수 있어도, 폐하한테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인사 대신으로 번쩍번쩍한 선물을 황궁으로 보냈는데, 돌아온 답신이 저 모양이다. 굳이 얼굴이 보고 싶으시다 이거지. 내 얼굴이 뭐 그리 보기 좋다고.

    “그래도 총애 받으시잖아요.”

    “무례를 용서 받을 정도는 아니지.”

    그래도 이런 편지까지 받은 이상 모르는 척 넘어갈 수는 없다. 폐하는 분명히 명령했다. 와서 얼굴 보여주고 인사하라고. 심지어 뭐 그렇게 바쁜 척하느냐고 타박까지 했다.

    “일단 가자. 알현 신청 좀 해줘.”

    “네, 그러죠. 데이라 공작에게도 같이 연락하겠습니다.”

    “아니야, 이번엔 진짜 하지 마. 무슨 핑계로 공작이랑 같이 황궁에 들어갈 건데? 황궁엔 뭐라고 말할 거야?”

    “아가씨.”

    할아범이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무슨 대단한 핑계가 있기에 저렇게 분위기를 잡아?

    “그건 공작이 알아서 하겠죠.”

    “…….”

    그니까 자기도 대책 없단 소리군.

    내 눈빛을 읽은 할아범이 억울하다는 투로 외쳤다.

    “정 방법 없으면 에스코트 부탁해도 되고요!”

    “에스코트으으?”

    기가 막혀서 되물었다. 할아범도 자기 말이 이상한 줄은 아는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한다.

    물론 공작이 나를 에스코트 해주면 자연스럽게 함께 황궁으로 갈 수 있다.

    다만 그 대단한 ‘데이라 공작’의 에스코트를 받아 황궁에 가는 게 너무 부담스러울 뿐!

    사교계에서, 에스코트는 단순한 호위가 아니다. 그보다 좀 더 긴밀하고 친밀한 관계를 연상시킨다. 예전에는 여성만 에스코트를 받았지만, 지금은 남성이 여성 귀족의 에스코트를 받는 일도 잦다. 동성끼리 서로 해주기도 하고.

    단순한 사랑, 우정, 뭐 이런 게 아니다. 서로의 명예를 걸고 하는 친분 과시랄까. 늘 그런 건 아니지만, 가문 사이의 동맹이나 약혼을 암시하는 행위로 해석되기도 한다.

    근데 만약 미혼인 나와 마찬가지로 미혼인 데이라 공작이 손을 잡고 황궁에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뭐라고 수군거릴까? 데이라 공작은 모욕적인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할아범이 소심하게 항변했다.

    “데이라 공작도 그러자고 할 겁니다.”

    “당연하지, 공작님은 성격이 워낙 좋으니까. 남들 시선 신경 안 쓸 수도 있어.”

    “그럼 뭐가 문젭니까?”

    “나! 내가 신경 쓰잖아!”

    언제까지 할아범과 공작을 데려가네 마네로 입씨름을 해야 할까. 아무래도 이번엔 내가 이겨야겠어.

    “할아범도 알잖아. 귀족들 나 귀족으로 생각 안 해. 그런 내가 데이라 공작 에스코트를 받으면, 공작도 괜한 소리를 듣게 된다고. 나야 익숙하지만 공작한테 폐를 끼칠 순 없잖아.”

    할아범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계속 우길 줄 알았더니, 이렇게 설득당하나? 하긴, 아무리 할아범이라도 공작의 명예가 무슨 상관이냐고 말할 수는 없겠지.

    “언제부터 이렇게 착해지셨어요?”

    “뭐?”

    “데이라 공작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사려 깊으시니……. 역시 사랑의 힘……. 위대해…….”

    “할아버어엄!”

    할아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쳐나갔다. 하여튼, 하루라도 나 안 놀리면 입에 가시가 돋는 게 분명해!

    -

    [백작님,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편안히 주무셨나요?]

    [네, 좋은 아침입니다! 공작님도 편히 주무셨죠?]

    [네. 혹시 오늘 외출할 계획이 있으신가 여쭤보고 싶습니다.]

    [아뇨, 오늘은 저택에만 있을 예정이에요.]

    [사실은 오늘 제가 일정이 생겨, 백작님과 함께 나갈 수 없게 되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저택에서 하루를 보낼 계획이라고 하시니 다행이네요.]

    [염려 마세요! 저택에 안전하게 있을 테니까요^^]

    [네, 백작님. 그럼 다른 기회에 뵙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바쁘실 테니 답장 안 주셔도 괜찮아요.]

    [네, 감사합니다.]

    [.]

    -

    황궁 앞에 도착해 심호흡을 했다. 아침에 공작한테 거짓말을 한 일이 좀 마음에 걸리지만, 그래도 우연하게라도 마주칠 일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다행이다.

    할아범은 마차에서 내리는 내 손을 잡아주며 물었다.

    “아쉽죠?”

    “뭐가?”

    “공작 안 와서.”

    “진짜 아니라니까.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진심이야.”

    황궁 앞이기도 하고 지키는 기사들 시선도 신겨 쓰여서, 더 대화하지 않고 황궁으로 들어갔다. 알현 신청이 미리 되어 있는 만큼 입궁 절차는 간소했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녀가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네.”

    알현실까지 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오랜만에 입은 거추장스러운 드레스가 좀 거슬렸지만, 굽 낮은 단화를 신고 또박또박 걸었다. 뒤따르는 할아범도 이번만큼은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화려한 장식과 웅장한 조각상을 지나, 마침내 알현실 앞에 도착했다.

    시녀가 안에 우리가 왔음을 알렸다. 대답은 한동안 들리지 않았다. 시녀가 조금 난감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안에 손님이 와 계신지라……. 아마 곧 들어오라고 하실 겁니다.”

    “괜찮아요.”

    손님? 어떤 손님이 와 있나. 부군과 따뜻한 대화라도 나누시나.

    괜한 추측을 하고 있는데, 반가운 허락처럼 문이 열렸다. 안에서 문을 열어준 또 다른 시녀가 옆으로 비켜나 길을 터주었다.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이 보인다. 금실로 구불구불 정성스레 수놓은 무늬가 시야를 어지럽힌다. 안내하듯 펼쳐 놓은 카펫을 밟고 한 걸음씩 나아가면, 붉은 벨벳을 덮은 제좌와 가까워진다. 할아범은 바깥쪽에 남았다.

    살짝 눈을 내리깔고, 손은 정중히 모으고, 정해진 자리까지 나아가 무릎을 굽혔다. 모자에 묶인 레이스가 스르르 흘러내려 뺨을 간지럽혔다.

    “폐하, 뵙기를 허락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백작, 내가 불러야만 얼굴을 보여주다니 서운하구나. 날 친조모처럼 여겨 달라 했더니.”

    이제 겨우 마흔다섯 살인데 할머니라니. 말도 안 되는 농담이었지만 상대는 황제다. 예의상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늘 다정하게 마음을 기울여 주시니 기쁠 따름…….”

    말이 뚝 멎었다.

    내 앞에는 분명 황제 폐하가 앉아 있었다. 결이 거칠고 억센 붉은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관도 평소처럼 삐딱하게 쓰고, 커다란 청안으로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다.

    “아, 백작에게 미리 말하지 못했구나. 경보다 먼저 온 손님이 있었는데.”

    아니, 손님이 왔다는 얘기는 들었는데요!

    제좌가 놓인 단으로 이어지는 계단 중간쯤. 여기서 만나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않았던 인물이 서 있다.

    봄 언덕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인상. 깔끔하게 다듬은 금빛 머리카락과 바다처럼 깊은 눈. 구김 하나 없이 말끔히 챙겨 입은 마법사 제복까지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둘이 만난 적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인사라도 나누렴.”

    …공작님이 왜 거기서 나와?

    [작품후기]Nerimaki님, 됴하라님, hihihu님, 중독바니님, 건시뭬님, 썹ol님, 잋현님, 룰루랄라^.^*님, 비버는비버비버해님, MidnightB님, 배부른초냥님, 달빛별비님, 아람닻별님, 마쯔조아님, bluestblue님, 루루슈아님, 상큼한바람님, 로베리안님, 대나무X님, 갉낡닭랅맑밝삵님, 해연아님, 비인강님, 파이네플님, 블리나블리님, 노낭님, 유타유타님, Nalgi님, Reinette님, 쏨쏨이네님, blackkit님, 쥬썅님, 몽뿌님, 라바트님, suxkaus님, Sen98님, 봄의바람님, reezbon707님, 모모새님, choco민트님, 잉여잉여07님, 또롱이언니님, 0p0p님, 뉘시님, 고희님, fffwok님, 로판의마당발님, 까망도롱뇽님, 김형서님, estel0509님, 캐스나인님, 소설같은삶님, udes님, 가끔씩만님, 로열밀크티님, 조코난님, 0스텔라0님, 0H정님, 너와나는토깽이님, 수퍄님, 개인의결함님, EST5713님, 카인G크리티카님, 김뭄님, 축하하면사실될일님, 장동우킬러님, moroo님, 전편 코멘트 모두 감사합니다//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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