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하지 마세요-28화 (28/74)
  • *저는 사실 이 장면을 직원 시점으로 쓸까 생각했습니닼ㅋㅋㅋ 갑자기 허공에 대고 할머니를 찾는 단주님... 그런 단주님을 바라보는 거친 표정과 불안한 눈빛...☆ 이런 느낌으로?28회

    어떤 오해는 달콤하다연참 1/3

    새까만 정장을 입은 공작이 나는 듯 들어온다. 무슨 조화인지 온몸에 환한 기운을 두르고 검까지 뽑은 그가 단숨에 책상으로 뛰어올랐다. 도는 길을 찾지 않고 그대로 종이가 널린 책상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마차에서 눈여겨본 구두가 책상에 부딪히며 다급한 소리가 울렸다. 공작의 푸른 눈이 긴박하게 번뜩였다.

    “백작님, 괜찮으십니까!”

    나를 보호하듯 훌쩍 안아 드는 단단한 두 팔. 처음으로 안긴 품은 넓고 단단했다. 너무나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는 숨결과 체온. 공작은 마치 온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나를 가려 지키듯 내 몸을 세게 안아주었다.

    나를 번쩍 든 공작이 나를 꼼꼼하게 살폈다. 넘칠 듯 일렁이는 염려와 친애가 내 몸을 흠뻑 적셨다. 한 사람에게 이토록 순식간에 잠겨 들 수 있나.

    “공작님…….”

    돌덩이가 되었던 하반신이 말랑말랑 돌아오는 게 느껴진다. 위기감이 사라지자 마음도 금세 무르게 변하다.

    어쩌면 내가 이 사람에게 답하는 일을 자주 잊는 이유는, 이 사람이 이상할 정도로 특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 내 귀에 꽂힌 목소리.

    “둘 다 왜 저래……?”

    “쉿.”

    “미쳤나 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야. 멍하게 있을 때가 아니라고!

    화드득 공작의 가슴을 밀어내며 마구 고개를 저었다.

    “괘, 괜, 괜찮아요! 저 완전 괜찮아요!”

    이제 확실히 알겠다. 데이라 공작은 모든 괴물로부터 나를 지켜줄 것이다.

    근데 딱 한 가지, 창피함으로부턴 못 지켜주겠지!

    공작의 어깨 너머로 상단 사람들의 얼굴을 본다. 공작이 뛰어오느라 허공으로 날려 팔랑이는 종이. 넋이 나간 모두의 얼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직원들. 당장 의사를 부를 태세인 레디아의 얼굴.

    그리고 상황 파악 못 하고 내 몸을 구석구석 살피는 공작.

    “공격을 받은 겁니까? 상처는, 아니, 혹시 내상인가요?”

    “아, 아니요. 전 괜찮아요……. 진짜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공격도 없었어요.”

    “네?”

    “저…… 전 아무렇지도 않다고요.”

    공작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에 있다. 조금만 잘못 움직이면 코가 부딪칠 것 같다. 괜찮다고 다시 한 번 말하려는데, 공작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왜 부르신 건가요?”

    “…….”

    아무래도 그냥 돌이 되는 게 나았을 것 같다.

    미칠 듯한 침묵. 침묵. 침묵. 직원들도 공작도 나만 바라본다. 나는 구출된 귀족 아가씨처럼 공작의 품에 안겨서 멍청하게 눈만 깜빡거리고 있다. 공작이 뽑은 검만 상황 모르고 시퍼렇게 빛난다.

    망했다.

    어떻게 수습하지?

    돌이 될 뻔해서 그랬다고 말하고 싶지만, 또 저주가 입을 막겠지. 그렇다고 없던 위험을 지어낼 수도 없고. 사람을 돌게 하는 정적이 이어지는데 아무도 입을 열 생각도 않는다. 심지어 공작마저도 넋이 나가 내 입술만 본다.

    “저, 저기.”

    뭐라고 하지. 뭐라고 해야 자연스럽지. 뭐라고 해야 내 행동에 정당성이 생기지? 갑자기 허공 보며 할머니를 찾다가 공작을 부른 행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음. 어떻게 해도 설명 안 되겠군.

    그냥 막 나가기로 했다. 몰라, 어차피 내가 단주야!

    “바, 밖에 너무 오래 계신 것 같아서요. 무료하실 테니 안에 들어와 계시라고 말씀드리려고 했죠……. 하하.”

    “…….”

    “…….”

    공작도, 직원들도 대답하지 않는다. 심지어 눈치껏 따라 웃는 직원도 없다. 당연히 어이없겠지. 그렇게 목숨 걸린 사람처럼 불렀으면서 이제 와 별일 아니었다고 하니까.

    이번만큼은 공작도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다. 그는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미안합니다, 젠장, 내가 설명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게 아니에요! 그 망할 트릭스터 때문이라고!

    아무래도 일단 분위기를 풀어야겠다. 나는 재빨리 레디아에게 시선을 돌리며 외쳤다.

    “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공작님 한 분 들어와 계신다고 문제 있을 거 없잖아! 그렇지? 아하하!”

    “아, 예, 그렇죠……. 하하하! 하하하하!”

    레디아가 기계처럼 손뼉을 치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참신한 미친놈과 마주친 듯 얼어 있던 직원들이 떨떠름하게 호응하며 함께 손뼉을 쳤다.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반응했다.

    “그래. 혹시 밖에 안 들릴까 봐 소리친 거야.”

    “사람이 갑자기 할머니가 보고 싶을 수도 있지!”

    “근데 단주님 할머니는 단주님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

    “조용히 해. 두, 두 분 다 참 정열적이시네요! 하하. 젊다, 젊어.”

    굳어버린 안면 근육을 억지로 움직여 미소 짓는 직원들이 보인다. 레디아도 완전히 평상심을 잃고 식은땀을 흘리며 억지로 소리를 내어 웃고 있다.

    흑, 강요해서 미안합니다, 직원 여러분. 근데 내가 살고 봐야죠.

    “일단 자리 좀 정돈할까요, 공작님?”

    공작은 풀어진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나를 내려놓지 않았다. 바닥에 좀 내려줘야 다시 의자에 앉을 텐데.

    “공작님, 공작님? 저 정말 괜찮아요.”

    공작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기분이 상한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으으으. 곧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공작은 나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주었다. 중심을 잡고 서자, 공작이 내 흐트러진 차림을 정리해 주었다. 목 부분 옷깃을 정리해 주는 손길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들고 기다렸다.

    왠지 목이 조금 간지럽다. 시선이 꽂힌 듯. 공작의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살짝살짝 맨살을 스친다.

    “흡.”

    갑자기 가까이 앉은 레디아가 갑자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왜 저래? 곁눈으로 보니 레디아뿐만이 아니라 모든 직원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왜…… 뭔데? 왜 그러는데, 그냥 웃고 넘어가기로 했잖아.

    재빨리 살피니 그들은 죄다 내 매무새를 다듬어주는 공작의 큰 손을 보고 있다. 정적 속에서 3초가 흐른다. 내 생각도 흐른다. 3, 2, 1…….

    “와우! 공작님,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미친, 나 공작을 무슨 집사처럼 부려먹었어!

    나도 모르게 공작의 한 손을 덥석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공작의 손이 어찌나 큰지, 내가 두 손으로 잡아도 손가락이 한참 튀어나온다. 공작은 잠시 잡힌 손을 보다가 본인도 놀란 듯 손을 뺐다.

    “아, 예,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를…….”

    “아니요, 제가 실례했죠. 어…… 네, 실례했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네, 저도 괜찮아요. 그럼…… 보고 계속 진행할 테니, 어디 옆에라도 앉아 계실래요?”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비록 부서진 문짝이 입구 쪽에 넘어져 있고, 종이는 엉망이 되었고, 분위기는 박살 났지만 태연한 척하는 거야.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레디아가 벌떡 일어나 자기 의자를 공작에게 내어주었다.

    “여기 앉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네.”

    “네?”

    “네?”

    레디아는 계속되는 대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본인 쪽에서 말을 그쳤다. 갑자기 레디아가 사무치게 부럽다.

    레디아는 진행자처럼 자연스럽게 서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럼 보고를 마저 진행하겠습니다.”

    공작은 자리에 앉은 후 검을 집어넣었다. 공작도 민망하겠어…….

    이어지는 사람들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도 안다. 찢어진 보고서, 부서진 문, 어수선한 공기, 내가 미쳤나 살피는 직원들, 이런 분위기에서 계속 보고를 진행하는 건 웃기는 일이다.

    근데 도저히 여기서 그만하자고 말할 수가 없다. 이 직원들 나가면 서로 톡톡으로 불나게 연락하겠지? 나와 공작의 기행을 사방에 알리며 헛소문을 퍼뜨리겠지? 레디아는 도와주기는커녕 그 소문에 부채질을 하겠지?

    게다가 옆에 앉은 공작은? 나한테 무슨 생각으로 소리쳐서 불렀느냐고 따질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 소리 지르는 게 취미냐고 물어볼 수도 있지. 진짜 끔찍하다. 나 뭐라고 대답해야 해?

    “그럼, 여기서 마칩니다. 단주님, 괜찮겠죠?”

    뭐야, 언제 끝났어.

    레디아는 대충 마무리하고 끝내자는 눈빛을 발사하며 나를 노려보고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를 둘러보았다. 차분한 척하느라 안면 근육이 벌벌 떨린다. 물론 날 보는 직원들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올해도 잘 부탁드리고요, 대답 안 하고 나가는 거 잊지 마세요. 오늘 보고는 여기서 마칩니다.”

    “네, 단주님…….”

    무심코 대답한 누군가가 놀라서 입을 막는다. 나는 너그러운 척 웃으며 마지막 대답을 챙겼다.

    “다들 대답하지 마시고. 조용히 나가 주세요. 그럼 이상.”

    “네, 알겠…….”

    두 번이나 실수하는 너. 내가 기억해 둔다.

    “자, 모두 안녕!”

    이번에야말로 직원들이 조용히 나가기 시작했다. 안에는 종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의자 미는 소리, 헛기침 소리만 가득하다.

    공작도 갈 준비를 할 줄 알았는데, 그는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않고 나를 보고 있을 뿐이다. 내게 묻고 싶은 게 많은 듯 꿈지럭거리던 레디아도 공작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용히 몸을 돌렸다. 마지막에 내게 동정의 눈길을 던지는 것도 잊지 않고선.

    모두가 나간 회의실에 나와 공작 둘만 남았다.

    후, 그래. 준비됐다. 공작이 따져도 어쩔 수 없어. 순발력으로 승부한다!

    “백작님,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공작 표정이 너무 무섭다. 살려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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