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그동안 내심 "아 그때 자선 파티 마법사놈 이대로 처벌 없이 넘어가는 건가?" 싶어서 찜찜했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분들이 계셨다면, 이번편을 선물로 드립니다ㅋㅋㅋㅋㅋㅋ25회
어떤 오해는 달콤하다연참 1/2
레이번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렇게 됐으니 경도 참고해두면 좋을 거야.”
주군은 더없이 태연한 어조로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레이번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천천히 방금 들은 말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당분간 공작님이 헥센 백작의 호위를 맡는다는 말씀이십니까? 트릭스터 때문에요? 백작이 사람 많은 장소에 갈 때마다 따라다닌다고 말씀하신 게 맞습니까?”
“그래.”
유릭스는 레이번의 경청 능력을 칭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번은 순간 마법 정보상에서 대답하지 말라고 버럭버럭 소리치던 헥센 백작을 떠올렸다. 이 순간만큼은 그때의 그녀가 정말 부러웠다. 그 역시 지금, 개소리 집어치우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이번은 조금 다혈질일 뿐 모범 기사였다. 주군에게 고함치는 무례를 범할 수 없는 그는 달아나는 이성을 간신히 붙들었다.
“왜…… 왜요?”
“트릭스터가…….”
“아니, 그 부분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그게 공작님 탓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일 아닙니까?”
“내 탓이든 아니든, 백작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는데 손 놓고 있을 순 없지.”
“그럼 다른 마법사를 붙여주면 되잖습니까.”
“낯을 가린대.”
“…낯을 가려요? 누가요, 헥센 백작이요? 낯가리는 사람이 처음 보는 사람한테 대답하지 말고 입 다물라고 소리를 지릅니까?”
“경, 지나간 일을 너무 오래 기억하는군. 그땐 사정이 있었다지 않나.”
레이번은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고 싶은 마음을 겨우 눌러 참았다. 공작이 너무 덤덤해, 자기라도 난리를 쳐서 균형을 맞춰야 할 것 같았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낯가림이 심하면 어떻게 사업을 합니까, 예? 그쪽도 공작님 호의가 부담스러워서 거절하려고 핑계 댄 게 분명합니다!”
“나는 헥센 백작을 믿어.”
그렇게 말한 유릭스는 책상 앞을 떠나 창가로 갔다. 그리고 헥센 백작의 마차가 떠난 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새파랗게 질려서 호위 같은 건 됐다고 거절하더니, 아침 식사를 대접하자 속 편히 음식을 먹던 그녀가 떠올랐다. 유릭스의 입가에 스르르 달콤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공연히 창가를 쓸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평소에 식사를 제대로 안 하는 모양이야. 함께 아침을 먹는데, 백작의 집사가 평소에도 이렇게 좀 먹으라고 말하는 걸 들었거든.”
“공작님……. 지금 헥센 백작의 식사 취향이 중요한 게 아니고…….”
레이번은 앓는 듯한 소리로 그를 불렀다.
“제가 뭐라고 말해도 마음을 돌리지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말하겠습니다. 공작님이 백작을 지키겠다고 따라다니면 사교계에 도대체 무슨 소문이 돌지 생각해 보세요.”
“해야 할 일을 하는데 소문을 왜 생각하나.”
레이번은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입을 비죽거리며 침묵을 택했다. 그도 나름대로 모범적으로 살아왔는데, 공작과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비겁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제 말은, 그냥 좀 더 세련된 방법도 있다는 겁니다.”
“백작이 나를 수행하게 하는 방법도 있지.”
“네, 바로 그겁니다! 누가 봐도 자연스럽잖아요.”
“하지만 그건 백작의 명예를 존중하지 않는 짓이야.”
“…….”
레이번은 이번에야말로 영원히 입을 다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작의 말이 옳았다. 공작이 백작을 따르면, 사람들은 무슨 사정이 있나 보다 할 것이다. 그러나 백작이 공작을 따르면? 백작은 권력에 아부하는 자본이나 약점이 잡혀 꼬리를 만 늙은 개처럼 보이리라.
그러니까 왜 누굴 지켜준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선! 레이번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주군의 뜻이 너무나 확고했다.
“공작님, 저는 공작님과 나름대로 오래 함께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꽤…… 가깝기도 하죠, 제 착각입니까?”
유릭스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기사를 돌아보았다. 유릭스는 레이번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뛰어난 기사이고, 자신의 생활 전반을 책임지고 있기도 했다. 유릭스는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물론 우리는 가까운 사이지. 경, 나는 경을 무척 믿어.”
“그럼 이 정도 질문은 할 자격 있겠죠. 솔직히 말해보세요, 그냥 핑계죠?”
“응?”
“백작 옆에 있으려고 핑계 대는 거 아닙니까. 백작이 낯을 가리긴 뭘 낯을 가립니까. 누가 봐도 사업가 체질이던데!”
유릭스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창밖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환하게 햇살이 쏟아지는 창가에 그림처럼 선 공작의 아련한 뒷모습. 레이번은 그 풍경에서 주군의 대답을 짐작했다.
‘이러다 진짜 결혼하는 거 아니야?’
아무래도 헥센 백작의 의사가 중요할 것 같다. 레이번은 조만간 헥센 백작의 집사라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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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리의 마법 학교 입학이 머지않았다.
시기도 딱 좋다. 3월부터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니, 앞으로 한 달 정도만 준비해서 입학하면 된다.
“자, 이게 입학 원서야.”
조금 긴장한 채 맞은편에 앉은 리리에게 종이를 밀어 주었다.
리리는 펜을 잡고 잠시 머뭇거렸다. 봄 같기도 하고 여름 같기도 한 초록 눈동자가 조심스럽게 움직여 나를 담는다.
“저……. 정말 괜찮으세요? 그냥 학교 말고 사립 교습소에 가도 돼요. 거기가 수업료도 훨씬 저렴하고.”
“왜? 학교 장학금 안 나온다고 해서 그래?”
리리는 어릴 때 마법 능력이 발현된 경우도 아니고, 이제껏 마법으로 해놓은 게 없으니 어떤 장학금도 나오지 않는다. 마법 학교 입학금과 등록금이 꽤 비싸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아쉬울 수도 있는 부분이지.
하지만 나는 부자다! 으하하하!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우리 돈 많아. 마침 후원하는 마법사도 없으니, 너 후원한다고 생각하면 되지.”
그니까 어서 빈칸이나 채우라고.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 사각사각 이어진다. 두꺼운 입학 원서에 글자가 하나하나 새겨진다. 기분 좋은 소리로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창밖을 내다보며 화창한 날씨를 만끽했다. 모든 일이 잘 되고 있다. 톡톡 판매 수량은 새해를 맞이해 가파르게 상승 중이고, 웬만한 고객 응대는 영업부장인 레디아에게 맡겨 저주 신경 쓸 일도 별로 없고, 리리까지 잘 되었으니.
하나 문제가 있다면 데이라 공작인데. 으으음.
나 따라다니면서 지켜주겠다는 거 진심인가? 공작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허언을 할 사람은 아닌데. 사교계에 일 파장이나 그런 건 생각하는 건가? 나도 미혼이고 그쪽도 미혼이라, 둘이 붙어 다니면 사정 모르는 사람들은 잔뜩 입방아를 찧겠지.
하긴, 데이라 공작이라면 그런 거 신경 안 쓸 것 같기도 하다.
그때, 톡톡 소리가 났다.
“엇, 공작이다. 리리, 계속 써.”
[안녕하세요, 백작님. 말씀드릴 것이 있어 연락드립니다.
어제, 백작님 저택으로 초대장을 하나 보냈습니다. 보름 후에 제 저택에서 마법사 사교 모임이 있을 예정인데, 거기에 백작님의 마법사도 참석하면 어떨까 싶어서요. 이미 마법 학교에 다니는 사람도 많이 참석하는 자리라 리리 씨에게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백작님의 마법사가 원치 않으면 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가볍게 제안 드리는 것이니 부담 갖지는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정확한 모임 일시는 초대장에 따로 적어 두었습니다. 백작님께도 미리 알리는 편이 좋을 듯하여 말씀드립니다. ^^]
입학 원서를 쓰는 리리를 슬쩍 바라보았다.
리리는 몸이 좋지 않은 채로 오래 살아서 그리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다. 사람을 싫어하진 않지만, 여러 사람이 어울리는 자리를 즐기지도 못한다.
그래도 마법사 사교 모임이라니……. 가면 확실히 도움이 되지 않을까. 마법 학교에 아는 사람이 있다면 생활하기 훨씬 좋을 테고, 학교생활에 대한 조언도 미리 얻을 수 있고.
나중에 초대장 도착하면, 그때 얘기해봐야지. 일단은 답장이 먼저다.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야기해 보고 참석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작의 답장은 바로 도착했다.
[네, 알겠습니다. 백작님, 별다른 문제는 없으신지요? 트릭스터와 관련하여 위험한 일은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행히 아무 문제도 없었어요^^]
앞으로도 문제없을 것 같지만.
언제 답장이 오나 톡톡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머잖아 긴 문장이 떠올랐다.
[다행입니다. 혹시 백작님께서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앞으로 별다른 일이 없어도 연락을 드려도 될까요?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면 한결 마음이 놓일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오히려 공작과 연락하면 마지막 답장을 챙기지 못해서 괜히 위험해지는 거 아니야?
그러나 딱히 거절할 핑계를 찾을 수가 없다.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여 답했다.
[저는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공작님 편할 대로 하세요!]
[네, 불편하지 않으시다니 기쁩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연락한다고?
뭐야, 그럼 아침마다 연락한다는 소리야? 잘 잤어요, 막 이런 거 물어보려고? 막 어제 뭐 했는지 물어보고 그러려고? 진짜로 매일 매일 톡톡하자고?
[네, 공작님. 잘 알겠습니다!]
“주인님?”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리리가 원서를 쓰다 말고 이상하다는 듯 나를 보고 있다.
“어, 어어?”
“왜 그렇게 활짝 웃으세요?”
“…….”
내가? 손으로 괜히 뺨을 더듬었다.
“이, 인간적으로 호감 있는 사람이 맨날 톡톡하자고 해서.”
“아, 데이라 공작님이요?”
리리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깜짝 놀랐다. 얘가 그걸 어떻게 알아? 톡톡 화면도 내 쪽으로 되어 있어서 못 볼 텐데.
리리는 내 의문에 답하듯 환하게 웃었다.
“상단 레디아 씨한테 들었어요. 주인님이 데이라 공작님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인간적인 호감’을 발음하는 리리의 입꼬리가 수상쩍게 씰룩거렸다.
…레디아 걔는 어디까지 소문을 내고 다니는 거야? 리리랑 그런 이야기까지 나눌 정도로 친했어?
“응. 인간적인 호감이야. 걔가 뭐라고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인간적인 호! 감!”
“아, 그러시군요.”
“왜 그렇게 웃어?”
“제가 뭘요?”
리리는 시치미를 떼고 다시 원서에 집중하는 척했다. 방금 처음으로 연애하는 여동생 보는 표정으로 실실 웃었잖아! 왜 아닌 척해!
구차한 기분을 느끼며 대답했다. 젠장, 이건 저주 때문에 대답하는 거야.
“아무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리리는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져준다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근데 왠지 내가 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젠장, 다음에 레디아 만나면 가만 안 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