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회
어떤 오해는 달콤하다상황을 정리해 보자.
할아범은 데이라 공작이 나를 직접 ‘진찰’했다고 했다. 정확히는 몰라도 아마, 마법 정보상 주인이 한 것과 비슷한 일을 한 것 같다. 그때 그 정보상 주인도 내 몸에 손을 댄 후에 트릭스터의 저주에 걸린 것 같다고 했으니까.
그래, 거기까지는 어찌어찌 짐작이 간다. 근데 공작이 왜 사과하지?
할아범, 도움!
그러나 할아범의 표정 역시 나와 다르지 않았다. 할아범은 뜨악한 표정으로 무릎 꿇은 공작과 나를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할아범의 도움은 기대하기 어렵겠군.
내가 공작을 내려다보는 상황 자체가 당황스러워서 일단 고개를 저었다.
“저, 공작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몸에 트릭스터의 흔적이 남은 게 왜 공작님 때문인가요?”
그건 그냥 제가 빌어먹을 저주 쪽지를 뽑아서 그런 건데요.
저주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금제만 아니었어도 바로 오해를 풀어줄 수 있을 텐데. 그럴 수가 없으니 공작이 하는 말을 듣고 있는 것밖엔 방법이 없다.
“저는 트릭스터를 잡아 그 힘을 약화시키고 봉인하기 위해 수도에 왔습니다. 아마 트릭스터도 제가 자신을 추적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겠죠. 그래서 백작님을 이용한 겁니다.”
“네? 그게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지…….”
“백작님을 이용해 경고한 거죠. 더는 뒤를 쫓지 말라고, 그렇지 않으면 제 주위 사람을 위험에 빠뜨릴 거라고 말입니다.”
와, 어떻게 헛다리를 짚어도 이렇게 짚지?
너무 당황해서 말이 죄다 입안에서 녹아버린다. 어디서부터 아니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저주에 대해 언급할 수 없으니, 완곡하게 돌려서라도 공작 탓이 아니라고 설명해주자!
내가 머릿속에서 급하게 이야기를 정리하는 동안, 공작은 더없이 조심스럽고 정중한 태도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트릭스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존재입니다. 미리 예상하고 대비해야 했는데, 제가 부주의했습니다. 백작님께서 얼마나 놀라셨을지 생각하면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어, 아니요, 공작님, 그게요…….”
침착하자. 일단 공작은 지금 바닥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다. 일어나라 앉아라 실랑이할 시간에, 빠르게 상황을 수습하고 오해를 풀어주는 거다.
생각이 착착 정돈되었다. 좋아, 계획은 완벽하다. 할아범도 응원하듯 내게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무슨 오해를 하신 건지는 알겠어요. 그런데 저는 공작님 때문에 위험에 빠졌던 게 아닙니다. 이건 정말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오히려 대답 제대로 안 챙겨서 스스로 위험을 자초한 꼴이지. 할머니, 진짜 너무해.
“저는 공작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이미 트릭스터와 만난 적이 있어요!
흐업, 말이 안 나온다.
위아래 입술이 딱 붙어 버렸다. 아니, 도대체 말을 어디까지 막는 거야? ‘남에게 저주를 발설할 수 없다’는 규칙의 적용 범위가 이렇게 넓어? 반칙 아니야?
고개를 들고 나를 보는 공작의 표정이 오묘해진다. 나는 뱉을 수 없는 단어를 포기했다.
“아, 아무튼 공작님 때문이 아니에요. 저 때문이죠. 이건 정말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공작님 탓이 아니라 제 탓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트릭스터 할머니 탓이지. 내가 가게도 바꿔주고 돈도 많이 줬는데 나한테 그런 저주를 날리면 어떡해, 응?
“백작님…….”
공작의 얼굴에 촉촉하고 따스한 감정이 아른아른 드리워진다. 그가 살며시 내 손을 두 손으로 감싸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
“저를 위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다니 어떻게 감사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네?”
“백작님의 마음은 너무나 기쁘지만,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니, 애초에 당신 책임이 아니라니까요?
뭐라고 해도 공작의 오해를 풀어줄 수가 없으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얼이 빠져 있는데 공작이 설명을 이어갔다.
“트릭스터는 이미 백작님의 몸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마치 사냥감을 점찍어두듯 말입니다. 언제 또 트릭스터가 나타나 위험한 짓을 할지 모르니, 백작님의 몸을 보호할 방법을 마련해야 합니다.”
일단 내 몸을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 대답 중독자와 대화를 시작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대화를 끝내기 힘든 것만 제외하면, 공작과의 대화는 꽤 좋아서…….
아니지. 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공작이 죄도 없이 무릎 꿇은 이 심각한 상황에!
나는 재빨리 정신을 수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저택에 돌아가서 방법을 마련해 볼게요. 제 저택에도 경비 인원이 있거든요. 마음을 써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공작님 책임은 정말! 전혀! 이만큼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말씀드려요.”
“백작님, 저 때문에 위험한 일을 겪으셨는데 그렇게까지…….”
진짜 당신 책임 없으니까 감동하지 말라고!
공작은 내 훌륭한 인품에 감격한 듯 눈을 빛냈다. 전에 공작이 날 용서해줬을 때 내가 저런 표정을 지었을까? 하지만 그때 공작이 보인 관용은 진짜고, 지금 내가 보인 관용은 공작의 착각이다.
죄책감이 들 정도로 맑은 눈동자로 나를 보던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경비원은 백작님을 지킬 수 없을 겁니다. 트릭스터는 시공간마저 장난감처럼 다루는 존재입니다. 백작님이 쓰러져 계셨던 골목의 시간과 공간도 제멋대로였죠. 아무리 뛰어난 경비원이라 해도, 무력으로 트릭스터를 막을 순 없습니다.”
애초에 내가 대답만 잘 챙겨서 하면 위험한 일 없다니까요. 공작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트릭스터의 사냥감이 된 게 아니라고요. 그냥 저주라고, 저주!
저주를 저주라 말하지 못하고 트릭스터를 트릭스터라 부르지 못하고!
공작은 너무나 상냥하고 사려 깊은 얼굴로 제안했다.
“제가 방어에 특화된 마법사를 여럿 알고 있으니, 당분간 백작님을 지켜드리라고 부탁하겠습니다. 어떠실까요? 물론 고용 비용은 제가 전부 부담하겠습니다.”
“와우! 아니요!”
너무 놀라서 환호성을 지르고 말았다.
공작이 내 호위를 위해 ‘방어 전문 마법사’를 고용하고 비용을 지불한다고? 대체 왜? 풀릴 길이 요원한 오해 때문에 미쳐버리겠다.
도움을 청하듯 할아범을 바라보았다. 내 눈빛을 읽은 할아범이 재빠르게 나섰다.
“죄송하지만 저희 백작님은…… 그러니까…… 낯을 가리셔서요. 낯선 사람이 호위로 붙으면 아주 심하게! 불편해 하십니다. 너무 불편해서 잠도 못 주무세요. 그렇죠, 백작님?”
내가 그런 사람이었구나. 그래, 나는 반쯤 해탈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마법사 호위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끝내는 게 중요하니까.
“예, 그렇죠. 제가 그렇답니다. 어찌나 낯을 가리는지 몰라요.”
그렇게 낯가림이 심하면 어떻게 사업을 하겠냐마는. 하지만 이 순진하고 착한 공작님은 할아범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버렸다.
“그렇군요. 제가 미처 백작님의 편의를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네, 그런 건 괜찮고요. 생각만큼 위험하지 않을 거예요. 그니까 다 없던 이야기로 하는 건 어떨까요? 정말로 공작님 책임이 아니니까 제발 일어나세요.”
애초에 나는 트릭스터의 ‘사냥감’이 아니다. 그냥 저주에 걸렸을 뿐이다. 공작은 나를 무슨 가련한 흰 사슴 보듯 하고 있는데, 나는 사슴보다는 코뿔소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러나 이 대단한 공작은 물러나지 않았다.
“아뇨, 위험을 알고도 모르는 척할 수는 없습니다. 낯선 사람이 꺼려지시는 거지요?”
“예! 아주 많이! 꺼려지네요. 아는 마법사도 없고요.”
“그럼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백작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예?”
원래는 이렇게 얼빠진 대답을 할 작정이 아니었다. 지금 당신 말이 얼마나 어이없고 이상한 줄 아느냐고 예의 바르게 돌려 물으려고 했다. 근데, 근데 내 앞에 앉은 공작의 성실하고 잘생긴 얼굴을 보니…….
공작이 잘 되었다는 듯 싱그럽게 웃었다.
“저는 낯선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작품후기]낫자루님, hihihu님, 물결같이님, 루루슈아님, 장동우킬러님, 타르베히6님, reiraro님, blackkit님, Jnancy님, am125님, 소설같은삶님, 랭쿠머님, 김유연님, 블리나블리님, 화학고자인화학과님, 갉낡닭랅맑밝삵님, 미쯔조아님, 0스텔라0님, 라바트님, 삼됴님, 아아아어어님, 별비내리는님, Nyxiz님, 파카파카님, 로베리안님, 푸들은요정입니다님, 팔월초님, 이상한토끼님, 칼라뽕님, 켠G님, 별똥별0ㅅ0님, 룰루랄라^.^*님, CleverTrick님, 엘다르딘님, 라삐네님, 상큼한바람님, 또롱이언니님, 달빛사람B님, 레드벨벳카롱님, beolene님, 휘리미님, 뀨엥뀨님, 이미있는닉네임님, vavaciva님, 곰구미님, 바삭한바게트님, 가끔씩만님, 로열밀크티님, 이리이리왕님, 당분중독자ㅋ님, 알트라님, 아아아아야님, 하얀과꽃님, Greenraven님, 라순님, udes님, 너와나는토깽이님, 씰버라이트님, 안녕나는누구게님, 개인의결함님, lee시아님, MidnightB님, 한은지님, 로펜트님, 뉘시님, Likry님, 사이브런님, DK289님, 카인G크리티카님, 호두타르트님, 전편 코멘트 모두 감사합니다//ㅅ!!
*여러분 댓글 너무 많이 달아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어깨춤 추면서 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