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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하지 마세요-22화 (22/74)
  • *예약연재를 걸어둔지라 제가 확인한 닉네임까지만 적게 됩니다ㅠㅠㅠ여러분 코멘트 많이 달아줘서 너무 고마워요!22회

    어떤 오해는 달콤하다연참 2/2

    여긴…… 천국인가?

    그렇게 생각하기엔 공기가 너무 익숙하다. 그냥 사람이 사는 평범한 저택 같다. 낯선 이불 냄새, 흐린 시야로 들어오는 낯선 천장, 천국처럼 특별하고 황홀하지는 않다.

    나 왜 이러고 있지.

    차근차근 되짚다가, 갑자기 둑이 터진 듯 기억이 쏟아졌다. 유리벽 밖으로 할머니를 봤고, 급하게 쫓아갔는데 골목이 끝없이 늘어나 잡지 못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이 돌로 변하기 시작해, 데이라 공작에게 대답을 안 한 걸 깨달았는데…….

    “헉.”

    벌떡 몸을 일으켰다. 두 손을 펼쳐 정신없이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손은 말끔했다. 손가락 관절 하나하나까지 다 제대로 움직여졌다. 이불에 덮인 발도 꼼질꼼질 움직여보았다. 전부 정상이다.

    그때 옆에서 인기척이 났다. 움찔 놀라 그쪽을 보니, 의자에 앉아 침대에 엎드려 있던 할아범이 부스스 몸을 일으킨다.

    “하, 할아범!”

    “세상에, 아가씨!”

    할아범이 나를 와락 껴안았다. 죽음을 이기고 살아 돌아온 사람을 대하는 듯 간절한 태도다. 심지어 할아범은 입속으로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하고 중얼거렸다.

    잠시 안겨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여기 어디야? 나 왜 여기 있어? 나…… 나 또 돌 됐었지! 근데 어떻게…….”

    “모르겠습니다.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냥 공작이 갑자기 아가씨를 안고 마차로 왔습니다. 아가씨는 이미 쓰러져 있었고……. 괜찮으세요? 또 돌이 될 뻔한 거예요?”

    “어어. 뭐지? 어떻게 된 거지?”

    나 어떻게 살아난 걸까? 설마 그 할머니가 내가 소리친 것도 대답으로 인정해 줬나? 그런 건가? 아니, 그렇게 너그러운 괴물이었단 말이야?

    일단 공작한테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상황 판단이 안 될 것 같다.

    그리고 이상한 점이 하나 더 있다.

    “근데…… 여긴 어디야?”

    내 침실이 아니다. 크지 않은 침대와 저만치 놓인 카우치를 보니, 작은 방 같기는 한데.

    “데이라 공작 저택입니다.”

    “응?”

    “공작 저택이요!”

    입을 딱 벌리고 굳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내가 왜 여기 있어?

    멀쩡한 내 집 놔두고 왜 공작 집에서 눈을 떠? 설마 쓰러진 것 때문에 공작이 당황해서 여기로 데려왔나? 아니지, 일단 날 안고 마차로 왔다며? 할아범한테 맡겨서 보내면 되지.

    “공작이 아가씨가 아무래도 마법에 당한 것 같다고, 자기가 진찰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주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게다가 정말 마법 질병일 수도 있으니 혹시 몰라서 알겠다고 한 겁니다.”

    “으아.”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진짜 엉망이다. 그 할머니 그냥 모르는 척 내버려둘 걸 그랬나.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이 망할 저주를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잖아.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래, 그럼 지금이라도 인사하고 가자.”

    진짜 공작한테 끔찍하게 폐만 끼치네. 도자기로 머리를 내리치지 않나, 이젠 식사 자리에서 뛰쳐나가 쓰러진 채 발견되지 않나. 날 어떻게 생각할까.

    “지금 이미 새벽 두 시입니다, 아가씨……. 한참을 쓰러져 계셨어요.”

    “미치겠다……. 공작도 자겠네.”

    인사 안 하고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는 사람 깨워서 인사할 수도 없고.

    옷차림을 보니 내가 입고 왔던 옷도 아니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여성용 잠옷이다.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잠옷을 보고 있으니 할아범이 설명했다.

    “공작이 직접 아가씨를 진찰한 후에 시녀들 불러서 옷 갈아 입혔습니다. 몸에 별 문제는 없다고 했는데, 이상하게 공작 표정이 좀 안 좋던데요.”

    “표정이 안 좋았다고?”

    당연히 표정이 안 좋았겠지. 얼마나 황당하겠어. 내가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 놓고, 갑자기 사라졌다가 실신했는데.

    손으로 눈가를 벅벅 문지르며 한숨을 참았다.

    그래, 할아범 앞에서 너무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진 말자. 할아범의 눈도 피로와 놀라움 때문에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다. 공작한테는 내일 날이 밝자마자 정말 정중하게 사과해야지.

    “일단 알겠어. 할아범도 좀 쉬어야겠다. 옷은 왜 아직도 안 갈아입었어, 자러 가지.”

    “아가씨가 이렇게 쓰러져 있는데 제가 잠이 옵니까!”

    “할아범…….”

    감동이 반이고 당혹이 반이라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진짜 내 인생 어떻게 되려고 이러냐. 이제 정말 온 힘을 다해 마지막 대답에 집중해야겠구나. 한순간의 실수 때문에 목숨이 날아갈 뻔했어.

    “난 괜찮을 거야.”

    두 번이나 죽을 뻔하니 사람이 초연해지나 보다. 화도 나고 짜증스럽기도 하지만 일단은 상황을 헤쳐 나가는 게 먼저다. 진짜 좌절스럽지만 일단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일단 할아범도 좀 쉬어. 할아범이 먼저 쓰러지겠다. 나도 마저 쉬고 생각 좀 정리해야겠어.”

    “흑, 아가씨…….”

    “내일 아침에 공작한테 인사만 하고 바로 떠나자.”

    할아범을 내보내고 혼자 멍하게 생각에 잠겼다. 오만가지 잡생각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녀 잠도 오지 않았다. 돌로 변하던 순간의 끔찍한 감각이 자꾸 온몸을 덮쳤다.

    그래, 이제 진짜 단단히 마음먹고 정신 차리는 거야. 다시는 이런 실수 하지 말자!

    굳게 다짐하고 잠시 뒤척였는데.

    눈을 감았다 뜨니 아침이었다.

    “…….”

    못 잘 줄 알았는데, 놀라고 피곤하긴 했던 모양이지.

    일단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를 손으로 빗어 대충 정리했다. 내 옷을 찾으려고 기웃거리다가, 작은 옷장을 발견했다. 열어보니 내가 입고 온 옷 대신 다른 옷이 걸려 있었다.

    내 옷 어디 있지?

    이른 아침이라 할아범도 아직 오지 않았다. 지나가는 하녀에게라도 물어볼 요량으로, 슬며시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으악!”

    너무 놀라서 바로 비명이 나왔다.

    문 옆에 서 있던 사람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와, 깜짝이야. 그렇게 바로 옆에 서 있으면 어떡해. 귀신인 줄 알았잖아.

    면전에서 소리를 질렀으니 불쾌할 법도 한데, 상대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깨어나셨습니까? 옷시중을 도와드릴까요?”

    “네?”

    이제 보니 잘 차려 입은 시녀다.

    기본적으로 하녀와 시녀는 좀 다르다. 시녀는 귀족 출신도 많고, 교육도 훨씬 더 엄격하게 받는다. 무엇보다도 말벗이나 밀착 시중 등 귀족과 가까운 일을 도맡는다.

    공작 저택이니 당연히 시녀가 많겠지 생각했지만, 내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일단 거절이다.

    “아, 아니요. 그냥 옷만 찾으러 나온 거예요. 제 옷 어디 있나요?”

    “입고 오신 옷은 지저분해져서 손질하고 있습니다. 옷장에 새 옷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어, 그냥 제 옷 입어도 되는데…….”

    “죄송합니다. 이미 세탁한지라…….”

    정말로 미안한 듯 말하는 모습이 되게 부담스럽다.

    사실 내 저택에는 시녀가 한 명도 없어서, 시녀에 익숙하지 않다. 이렇게 부담스러운 존재였나. 깍듯한 태도에 살짝 기가 질려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냥 준비된 거 입을게요.”

    “네, 도와드릴까요?”

    “아니요, 혼자 입어도 돼요.”

    어차피 요즘은 옷이 다 간소해져서 굳이 도움 받을 것도 없다. 나는 바로 고개를 젓고 인사했다.

    “그럼 이만.”

    시녀가 더 대답하기 전에 문을 살짝 닫았다.

    준비된 작은 욕실에서 몸을 씻고, 옷도 갈아입었다. 어제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꿈도 꾸지 않고 푹 잔 덕인지 몸은 가뿐했다. 얼른 준비하고 공작한테 가서 사과해야지.

    그 사람한테는 사과할 일만 생기는 것 같아.

    잠깐 거울을 보며 거의 다 마른 머리를 빗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노크했다.

    “할아범이야? 얼른 들어와.”

    “백작님, 접니다.”

    헉, 공작이다.

    빗을 팽개치다시피 내려놓고 거울 앞을 떠났다. 그리고 급히 달려가 문을 열어주었다.

    이른 아침인데, 바로 외출해도 될 정도로 말끔하게 차려 입은 공작이 밖에 서 있었다.

    할아범도 함께였다. 어쩌다 둘이 같이 왔지? 공작이 데려왔나?

    “얼른 들어오세요.”

    일단 옆으로 비켜나 공작과 할아범에게 길을 터주었다.

    빠르게 표정을 살피니, 이번에도 공작은 딱히 기분이 상한 것 같진 않다. 그래도 얼굴이 좀 어두워서 걱정이다. 그래, 나라도 어이가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일단 함께 카우치에 앉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내가 카우치에 엉덩이를 붙이고 할아범은 내 뒤에 자리를 잡고 섰는데, 공작은 내 맞은편에 우뚝 서 있을 뿐이다. 놀라고 당황해서 엉거주춤 일어서려는데, 공작이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백작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엥?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해 쳐다만 보니, 공작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진다. 빚어놓은 듯 깨끗하고 아름다운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너무 낯설다.

    “백작님의 몸을 진찰하는 과정에서 트릭스터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트릭스터는 잔인한 장난을 일삼는 마법적 존재인데, 그 트릭스터의 흔적이 백작님 몸에 저주처럼 깊이 남았더군요.”

    “예에?”

    이게 무슨 소리지, 저주처럼 남은 게 아니고 진짜 저준데요?

    “아무래도 저 때문에 백작님까지 트릭스터의 장난에 휘말린 것 같습니다.”

    아니, 내가 저주 쪽지를 뽑은 건 공작과 만나기도 전인데?

    “저는 지금 트릭스터를 쫓는 중입니다. 그 사실을 안 트릭스터가 저를 교란하기 위해 백작님을 이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공작은 깊은 바다와도 같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그 모습이 멋지고 가련하기는 한데, 좀, 좀 황당하다.

    “위험한 일을 겪게 해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저기, 무슨 오해를 하신 건데요?

    [작품후기]오해가 없으면 소설이 진행이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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