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회
알 수 없는 마음연참 7/7
나인피스의 메인 메뉴, 나인피스.
숭덩숭덩 썬 돼지고기와 청경채를 기름에 달달 볶고, 매콤한 소스를 뿌린다. 부드럽게 구운 모닝빵의 속을 파내고, 볶은 음식을 그 안에 넣는다. 그대로 한 번 더 오븐에 넣어 돌려주면 완성!
그런 빵이 아홉 개가 나온다. 하얗고 네모난 접시에 세 개씩 세 줄로 놓인 아홉 개의 빵, 옆에는 꽃으로 살짝 데코.
부모님과 자주 오던 식당이다.
맛있는 식당이고 가격도 꽤 높지만, 사실 데이라 공작이 다닐 법한 고급 식당은 아니다. 명예로운 귀족들이 자주 가는 식당은 따로 있다.
근데 왜 여기를 골랐지?
“단주님, 전 여기 마차 두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렇게 말한 할아범이 마차를 끌고 사라졌다. 대충 대답해서 보내고, 식당 앞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짧은머리를 귀 뒤에 걸치고, 식당 유리창에 모습을 비추어 보며 모습을 점검했다.
공작이 어떻게 입고 올지 몰라 그냥 단정하게만 입고 나왔다. 무릎까지 떨어지는 벚꽃 색깔 원피스를 걸치고, 허리에는 폭이 넓은 끈을 제대로 묶었다. 짧은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굽 없는 단화에 장신구는 왼손 새끼손가락의 마법 방어 반지뿐.
성의 없는 차림새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사실 옷 고르는 데도 고민이 많았다. 고객 접대가 아니니 너무 정장처럼 보이면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데이트하듯 꾸며도 안 되고, 동네 친구 만나듯 너무 편해도 안 되고.
“으, 모르겠다.”
공작은 어차피 마법사 제복이나 입고 올 텐데, 뭐.
복잡한 마음을 접어두고 문을 열었다.
카운터를 지키던 직원은 오랜 단골인 나를 알아보았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오셨네요?”
“네.”
“데이라 공작님과 약속이 되어 있으시죠? 미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리로 바로 안내해 드릴게요.”
공작이 별 걸 다 이야기해 뒀네.
알겠다고 간단히 답하고, 괜히 긴장이 되어 긴 숨을 내쉬었다. 직원의 뒤를 따라 걷는 동안, 곁눈으로 슬쩍슬쩍 다른 테이블을 살폈다. 젊은 연인들이 대부분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다.
살짝 어둑한 실내를 밝히는 초에 향긋한 와인, 소곤소곤 이어지는 대화. 은은하게 흐르는 음악, 특별하고 달콤한 분위기.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리려 애써 봐도 자꾸 가슴이 쿵쾅거린다. 공작 앞에서 편안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쉽지가 않다.
나 왜 이렇게 긴장했어? 손바닥을 옷에 슥슥 문질러 닦았다.
“백작님.”
익숙한 목소리다. 눈이 마주쳤다.
잔잔한 음악이 뚝 멎는 듯한 착각이 인다. 내 차림이 민망할 정도로 완벽하게 차려 입은 공작은 앉은 채로 나를 올려다본다.
잘 다림질된 흰 셔츠에 캐주얼한 넥타이, 넉넉하게 걸친 코트. 공들여 다듬은 듯한 금발은 느슨하고 편안하게 이마를 덮고 있다. 정면에서 보면 부드럽고 상냥하게 이를 데 없는 얼굴이 나를 향해 미소를 만들어 보인다.
짙푸른 눈동자 속에서 촛불이 일렁거리는 것까지 선명히 볼 수 있었다.
…나 너무 대충 입고 왔나?
“안녕하세요.”
인사를 챙기며 침착한 척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공작은 마치 준비해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었다.
“다시 뵙게 되어 기쁘네요. 그날은 몸이 좋지 않으신 것 같아 걱정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전 멀쩡해요. 공작님은……?”
“저도 괜찮습니다. 그럼 주문할까요?”
데이라 공작 정도면 주문 안 해도 음식이 줄줄 나오는 고급 식당만 다닐 것 같은데. 그는 너무나 평범하게 메뉴판을 받았고, 내게 먹고 싶은 음식이 있는지 물은 후 주문을 마쳤다.
그 모습을 보는데 괜히 목이 타서 준비된 물만 몇 잔 마셨다. 데이라 공작은 잔뜩 예의를 차려 근사하게 입고 왔는데, 나만 너무 편하게 입은 것 같아 계속 신경이 쓰인다. 데이라 공작의 셔츠 소매를 살피니, 깔끔한 커프스버튼까지 달고 왔다.
“백작님, 무슨 걱정 있으십니까?”
“아, 아뇨.”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살짝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공작도 화답하듯 웃는다.
“여러 식당을 알아봤는데, 백작님이 이곳에 자주 들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에는 혼자도 종종 오셨다고 해서 이곳으로 골랐는데 마음에 드셨나요?”
“엇…….”
너무 당황해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공작이 그렇게까지 식당을 알아볼 줄은 몰랐다. 내가 그랬듯 공작도 아랫사람에게 시켰겠지만, 정성은 의외였다.
“네, 감사합니다. 사실 부모님과 자주 오던 곳이에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엔 그리움 때문에 가끔 혼자 오곤 했다. 혼자서는 다 먹지도 못할 나인피스를 시키고 청승맞게 추억에 젖었다가 저택으로 돌아갔다.
이런 이야기까지는 할 필요 없겠지. 그리고 이젠 그런 짓 하지 않는다. 잠시 주저하다가, 공작의 성의가 고마워 짧게 덧붙였다.
“공작님과도 함께 오게 되니 정말 좋네요. 요즘은 바빠서 올 일이 많이 없었거든요.”
“다행이네요.”
“네, 그렇죠? 다음엔 제가 꼭 대접할게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음식이 나왔다.
손으로 들고 먹기는 어렵고,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 빵과 고기를 슥삭슥삭 잘라 먹으면 된다. 공작이 어떻게 먹는지 알까 싶었는데, 그는 눈치껏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어벙벙하게 있으면 도와주려고 했더니.
그래도 내가 자주 오는 식당인데, 팁이라도 하나 주자!
“여기 나름대로 맛있어요. 너무 매우면 크림소스 달라고 해서 찍어 먹으면 덜 매울 거예요.”
“아, 네. 백작님은 매운 음식 잘 드시나요?”
“엄청 좋아하죠. 그래서 여기 오면 가끔 매운 소스 더…… 달라고…….”
어?
공작 뒤편의 유리벽 너머 낯익은 얼굴이 나를 보고 있다.
주름진 얼굴, 굽은 허리, 하얗게 샌 머리. 무엇보다도 나를 향해 웃는 저 인자한 얼굴. 그러나 그 눈동자와 미소 뒤에서 기괴한 모순이 번뜩인다.
“자, 잠시만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내가 일어서는 모습을 본 할머니가 슬쩍 몸을 돌리더니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려 한다.
“어…… 저 잠깐…… 화장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아, 네. 천천히 다녀오세요.”
아직 한 입도 못 먹은 음식을 두고 뛰다시피 걸었다. 식당 밖으로 나와 벽을 빙 돌았다.
할머니가 있던 자리로 가봤지만 아무도 없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남루한 차림새를 찾았는데, 골목 틈으로 쏙 사라지는 검은 옷자락!
허둥지둥 골목으로 달려갔다. 모퉁이를 여러 번 돌았다. 퀴퀴한 하수구 냄새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쓰레기. 한참 앞서서 뛰어가는 할머니의 뒷모습.
“할머니이이이!”
뛰는 소리, 펄럭이는 옷자락, 조금만 더 빨리 뛰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거리가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다. 할머니와 술래잡기라도 하는 기분이다.
“저주 풀어주고 가라고!”
사람 아니고 트릭스터라더니, 진짜 괴물이었어? 무슨 할머니가 저렇게 빨라! 관절이 뭐 저리 튼튼해!
“헉, 헉…….”
결국 숨이 턱 끝까지 차 멈추고 말았다.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허리를 굽힌 채 숨을 몰아쉬었다. 어찌나 뛰었는지, 땀 때문에 등이 축축했다.
겨우 호흡을 정리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젠장, 소름끼치게 조용하네. 할머니인지 트릭스터인지는 이 골목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 같다.
“진짜 너무하네. 사람 놀려?”
일단 공작한테 돌아가야겠다. 나 변비인 줄 알면 어쩌지?
잡다한 걱정과 함께 한 걸음 뗀 순간.
“…….”
불길한 느낌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오른쪽 발이 돌이 되어 있었다.
어둑한 골목에서도 돌덩이가 된 내 오른발이 똑똑히 보였다. 아니, 취소. 솔직히 보이진 않고 그냥 느껴졌다.
…나 아까 공작한테 대답 했나? 안 했나?
미친, 안 했구나! 갑자기 억울함과 분노가 밀려온다.
“할머니, 장난치지 말고! 빨리 나와서 저주 풀어주고 가라고!”
당연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우지직, 우지직, 온몸이 돌이 되는 끔찍한 소리가 들린다.
“공작님! 공작님, 나 도와줘요! 공작님! 대답! 대답했어! 이것도 대답으로 쳐줘어어!”
미르아 헥센, 스물일곱 젊은 나이에 대답 안 해서 죽다. 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