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회
알 수 없는 마음연참 5/7
순발력 있게 머리를 대충 짜고 샤워가운을 걸쳤다. 욕실 문을 열고 젖은 발로 허둥지둥 나갔다. 젖은 손을 가운에 아무렇게나 문질러 닦으며 책상으로 직행했다.
상단에서 온 연락일 수도 있지만, 직원들은 이 시간에 내게 톡톡을 보내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누가 상단주에게 한밤중에 톡톡을 보내겠는가. 다들 퇴근할 시간인데.
그러면 이 시간에 톡톡 보낼 사람은 단 하나!
뒤집었던 톡톡을 다시 세우고 화면을 확인했다. 새 톡톡히 왔다는 편지봉투 표시가 떠올라 있다. 검지로 톡, 하고 누르자 문장이 나타난다.
[❕▶▶ 하 오 미 ㅋㅏ 지 노 ◀◀✬➄❖☪ ✤세상그 어디에서도 ^^ 볼수없엇☆던■■실시간■■ 게임 무 ➅ 료 ♢ 체 험 머 ☜ 니 지 급~~!!]
…….
시발.
진한 허탈감이 밀려온다. 나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단발머리를 대충 털면서 다시 욕실로 돌아갔다. 수건으로 몸을 잘 닦고, 머리도 제대로 말렸다.
중간에 또 톡톡 소리가 난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이번에도 스팸이겠지.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다.
솔직하게 인정하자면 온종일 공작의 답장을 기다렸다. 어제 공작이 보여준 행동에 그렇게까지 감동했나.
아니면 할아범 말대로 진짜 관심이 있는 건가? 아니지, 공작이랑 나랑 뭘 했다고 갑자기 이렇게 관심이 생겨?
원래 누구한테 성애적인 호감이 생기려면 특별한 일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막 넘어져서 서로 잡아주다가 몸이 겹쳐 키스하게 된다든지. 하다못해 처음 눈이 마주친 순간 종소리가 들린다든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든지, 얼굴이 새빨개진다든지.
으, 모르겠다.
한숨을 내쉬고 다시 욕실에서 나갔다. 또 스팸이겠지만, 드문 업무 연락일 수도 있으니 톡톡을 확인했다.
[답장이 늦어 죄송합니다.]
헐, 미친.
온몸을 마사지하던 중압감과 불편감이 말끔하게 씻겨 내려간다.
[사흘 정도 일을 하지 않고 쉰지라 조금 바빴습니다. 내내 밖에서 지내다가 지금 톡톡을 확인했습니다.
붕대는 어제 다 풀었습니다. 저는 아주 건강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어제 백작님의 안색이 좋지 않은 듯 보였는데, 돌아가 충분히 휴식하셨는지요? ^^]
바로 의자에 앉아 타자기를 두드리다가 멈칫했다.
잠깐만.
이 사람은 점심에 보낸 연락에 지금 답장했는데, 내가 너무 바로 답장하면 너무 없어 보이지 않나? 왠지 할 일 없이 책상에 앉아서 연락만 기다린 것 같잖아. 나도 오늘 나름대로 일도 하고 바빴는데.
그러다 문득 저주에 생각이 미쳤다.
그래, 쓸데없이 시간 끌지 말자. 이러다 돌이 되면 어쩌려고?
[네, 공작님의 배려 덕분에 충분히 쉴 수 있었습니다.]
[붕대도 다 푸셨다니 정말로 다행이네요!]
그래도 다행이다. 톡톡 소리를 무시하고 씻었는데, 욕실에서 늦게 나왔으면 거기서 돌이 될 뻔했어.
답장은 금세 도착했다.
[네, 감사합니다. ^^]
그러고 나서 뭔가 더 연락이 오지 않을까 했는데, 공작의 말은 거기서 끝이었다.
이대로 대화 끝내려는 건가? 아니,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끝낸다고? 그야 우리가 할 말이 많은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칼같이 끝내려 하니 좀 당황스럽다.
[공작님께 식사라도 한번 대접하고 싶은데, 어떤 음식을 좋아하시나요?]
그래, 자연스러웠어.
공작은 내가 가문 차원에서 제안한 보상을 모두 거절했다. 그쪽이 다 필요 없다고 해서 굳이 받으라고 우기지는 않았지만, 식사 정도는 대접할 수 있지 않나. 저번에는 이야기도 제대로 못 나눴으니까.
공작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입력 중이라는 문장은 나타났는데, 답장이 오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렸다.
[식사는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백작님, 죄송하지만 지금은 대화가 조금 어려운 상황입니다. 나중에 다시 연락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어……. 무슨 일이지?
다 늦은 시간이라 급한 일도 없을 텐데. 그래도 금방 대화를 끝내려고 한 이유가 있었구나 싶어 재빨리 답장했다.
[네, 알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시기 바랍니다!]
평소의 공작이라면 알겠다는 대답 정도는 했을 텐데, 이번에는 정말 긴급한 일이 있는지 간단한 답장조차 오지 않았다.
공작이니까, 게다가 수도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 내가 모르는 바쁜 일이 있겠지.
몇 분 정도 더 지켜보다가 침대로 갔다. 공작과 나눈 톡톡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나한테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했지. 근데 왜 내가 얻어먹지? 감사의 표시로 겸사겸사 내가 사려고 했는데.
이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야겠다.
답장을 받고 마음도 편해졌겠다, 바로 잠들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계속 공작의 얼굴과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 왜 침대에 누워서 그 사람 생각하는 거야?
인간적인 호감이다. 음, 맞아. 바로 그거야.
-
“이제 다 됐어?”
불퉁하게 묻는 목소리.
유릭스 데이라 공작은 톡톡에서 눈을 뗐다. 책상 너머 간이 의자에는 빨간 머리 꼬마가 앉아 있었다. 못마땅한 듯 눈썹을 미간으로 모은 채였다.
타이밍 좋게 헥센 백작의 답장이 도착했다.
[네, 알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시기 바랍니다!]
유릭스는 백작의 답장을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실례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어려졌다고 너까지 날 무시하는 거냐? 흥.”
“그럴 리가요, 스승님.”
유릭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책상을 떠났다. 그런 다음 한참 어린 꼬마에게 정중히 에스코트를 청했다.
“기다리시게 해 죄송합니다. 아는 사람에게서 연락을 받은지라.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톡톡 같은 건 나중에 답장해도 되잖아.”
유릭스는 빙긋 웃고 대답을 피했다.
스승의 말이 맞았다. 헥센 백작은 급한 일로 연락한 것도 아니고, 그냥 안부를 물었을 뿐이다. 나중에 답장했어도 상관없었으리라. 하지만 점심 무렵 도착한 톡톡을 늦게 확인한 순간, 서둘러 대답해주고 싶었다.
헥센 백작은 아마 자신의 답장을 기다리지 않았겠지만. 무척 큰 상단을 책임지는 상단주가 아닌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니, 아마 톡톡을 보낸 것조차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유 모를 아쉬움을 느끼며 유릭스는 집무실 문을 열었다. 스승을 데리고 응접실로 가며 그가 물었다.
“지난번에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지요. 트릭스터에 대해서는 더 알아내신 게 있습니까?”
“그래서 직접 온 거 아니냐.”
“톡톡을 하나 장만하시죠. 생각보다 아주 편합니다.”
“내가 와서 귀찮다?”
“그럴 리가요.”
복도를 지나 응접실 문을 열었다. 유릭스는 스승을 상석으로 안내했다. 스승은 짧은 다리를 까딱거리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까는 얼굴에 우수가 깔렸다. 외양과 어울리지 않는 고뇌였다.
트릭스터의 저주를 받아 어려진 마법사, ‘세상의 모든 마법 레이버’의 주인, 유릭스의 어린 날 스승. 한때 미르아 헥센에게 ‘저주를 풀 방법은 없다’고 단언한 꼬마 로지가 팔짱을 끼고 유릭스를 바라보았다.
“저번에 트릭스터 놈이 한동안 노인으로 위장하고 다닌 것 같다고 했잖아. 여기저기서 점을 봐주고 다닌 것 같은데,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녔는지는 전혀 모르겠고. 지금은 완전히 종적을 감춰서 흔적을 찾을 수가 없구나. 그래도 수도에 있는 건 분명해.”
“마법사들도 소식을 모른다고 합니까?”
“그래. 게다가 저주에 걸린 사람이 있어도, 자기 저주는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을 수 없으니 힘을 합하기 어렵지.”
“그렇군요……. 당분간은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급히 수도로 올라왔는데, 괜히 서둘렀네요.”
그래도 서두른 덕분에 헥센 백작의 자선 파티에 참석했다.
유릭스의 마음으로, 갑자기 그런 생각이 스몄다. 물론 거기 참석해 괜한 오해를 받기도 하고 소동도 일으켰지만, 얻은 것도 많았다. 마나 통로가 막힌 하녀도 도왔고, 무엇보다도 헥센 백작이…….
“참, 스승님.”
헥센 백작이 떠오르자 물을 것이 하나 더 생겼다.
“그때 헥센 백작이 레이버에 들렀던데……. 뭘 물어보러 왔습니까?”
스승이 바로 대답해주리라 짐작했는데, 그녀는 심드렁한 투로 반문했다.
“그건 왜? 고객 개인정보는 노출 못 한다. 그쪽은 마법사 아니고 일반인이야. 협력할 의무 없어.”
“제가 백작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렇습니다.”
“그럼 직접 물어보지 않고.”
유릭스는 고민했다. 개인적인 일을 직접 물을 정도로 헥센 백작과 자신이 가까운가?
유릭스는 바로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헥센 백작은 그저 미안함에 자신에게 먼저 연락했을 뿐이다. 서로 고민을 털어놓을 정도로 친한 건 아니었다.
“그건 조금……. 그 정도로 편한 사이는 아닙니다.”
“뭐야, 본인한테 직접 못 묻는 걸 내게 묻는다고? 음침한 놈.”
스승의 타박에 유릭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흔들던 로지는 슬쩍 그의 표정을 살폈다. 기분이 상했나. 말 한두 마디로 토라져서 쩨쩨하게 굴 놈은 아니지만, 못 본 세월이 기니 변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유릭스가 깊은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헥센 백작에게 큰 실례를 저지를 뻔했군요. 이렇게 묻고 다닌 걸 알면 백작도 마음이 불편하겠죠. 스승님은 역시 현명하십니다.”
로지는 입을 다물고 눈만 깜빡였다. 그녀의 제자는 세월의 흐름도 이겨내고 여전했다.
“나중에 백작에게 직접 물어야겠습니다. 도와줄 일이 있나 궁금하군요. 마침 조만간 식사도 함께하기로 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유릭스의 표정이 어딘지 기묘했다. 로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본디 잘생긴 놈이지만, 지금은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 입술 끝에 간질간질하게 감도는 기쁨의 미소. 맑은 뺨에 스민 설렘과 기대감.
허, 로지가 헛웃음을 쳤다. 그녀는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 설마 관심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