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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하지 마세요-16화 (16/74)
  • 16회

    알 수 없는 마음연참 3/7

    “왜 이렇게 쉽게 용서해주시는 겁니까?”

    레이번은 불만 어린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침대에 앉아 있던 유릭스는 고개를 돌려 기사와 시선을 맞추었다. 유릭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다른 것을 물었다.

    “백작은 잘 돌아갔나?”

    “네. 집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데리고 가던데요.”

    “그래. 사람을 보내 배웅해야 했는데 깜빡 잊었어.”

    “아니, 공작님.”

    레이번은 도저히 공작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레이번도 헥센 백작의 입장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 입장을 알고 있다고 이미 벌어진 일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공작이 당한 일은 대단한 보상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쉽게 돌려보낸 것일까.

    유릭스는 침대 아래로 두 다리를 내렸다. 그런 다음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얘기해.”

    “제가 참견할 일이 아니긴 하지만, 이렇게 그냥 보내도 됩니까?”

    “내가 쓰러져 있는 동안 백작이 이미 돈이며 선물을 보냈다면서. 뭘 더 받아야 하나?”

    “그건 그냥 당연히 받는 거고요!”

    “당연히 받아야 할 것 말고 뭘 더 받으려고?”

    “…….”

    레이번은 말문이 막혀 침묵했다.

    솔직히 공작이 이 일을 크게 만들지 않을 줄은 알고 있었다. 그의 평소 성격을 고려했을 때, 백작에게 심하게 화를 낸다거나 그녀의 상단에 앙심을 품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하다못해 위로금이라도…….”

    “공작가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돈이 없어서 받는 게 아니잖습니까. 위로와 사과 차원이죠. 백작은 공작님과 척을 질까 두려워 많은 것을 약속했을 텐데,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유릭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조금 웃었다.

    만일 자신이 보상을 요구했다면, 헥센 백작은 어떤 단서도 달지 않고 고개부터 끄덕였을 것이다. 상단 수익의 절반을 해마다 떼어 달라고 해도 일단은 알겠다고 순종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유릭스 데이라 공작도 바보는 아니었다. 자기가 정당히 받아야 할 보상을 거절하는 게 경솔한 짓임은 잘 알았다.

    그래도 작은 병아리처럼 덜덜 떠는 미르아 헥센 앞에서는, 잠시 경솔한 바보가 되고 싶었다.

    “경, 위로와 사과는 이미 받았어. 반성문을 써왔거든.”

    공작은 헥센 백작이 허둥거리다가 놓고 간 종이를 슬쩍 들어 보여주었다.

    그는 헥센 백작을 보낸 후, 계속 침대에 앉아 구깃구깃한 반성문을 들여다보았다. 여러 번 고쳐 썼을 문장 너머로 헥센 백작의 말간 얼굴이 어른거려 기분이 이상했다.

    ‘반성문’을 소리내어 읽은 후, 자신의 분노나 힐책만 기다리는 백작의 모습은 유난히 작아 보였다. 도자기를 들고 머리를 내리칠 때는 억센 거인 같았는데.

    레이번은 공작의 손에 들린 종이를 보며 못마땅한 듯 물었다.

    “반성문이요? 뭐 얼마나 잘 썼기에 그렇게 바로 용서해 주셨습니까?”

    솔직히 유릭스는 처음부터 헥센 백작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 백작에게 말한 그대로, 그녀의 상황과 오해가 모두 이해 갔다.

    만약 백작이 들어와 오해가 있었다는 말부터 앞세웠어도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런데 헥센 백작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해해서 그랬고, 자신도 억울한 측면이 있고, 그러니까 서로 좀 봐주고 넘어가자고 우기지 않았다. 바로 무릎을 꿇고 반성문부터 읽었다.

    겁먹은 짐승처럼 떨면서 앉아 있는 헥센 백작을 보는 동안, 마음이 완전히 풀려 버렸다. 본래 분노도 없던 마음이 봄비 맞은 언덕처럼 말랑말랑하고 향기로워졌다.

    옷을 마저 갖춰 입으며 유릭스가 가벼운 투로 지시했다.

    “어쨌든 그 얘기는 다 끝났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 없다. 다음에 헥센 백작과 마주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하지만…….”

    “레이번 경, 그만. 어차피 몸에 큰 문제도 없잖아.”

    레이번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공작이 이미 결정한 일에 더 이상 참견할 수는 없었다. 그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얌전히 물러났다.

    혼자 남은 유릭스는 간단히 몸을 움직여 보았다. 의사도 오늘쯤에는 붕대를 풀자고 했으니 상처는 괜찮을 것이다.

    마나를 능숙하게 운용할 줄 아는 마법사는 본래 회복이 빠르고 체력도 좋다. 바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 백작의 걱정은 정말 무용하지만, 마음만은 고마웠다.

    ‘붕대를 풀고 백작과 만나면 좋았을 텐데.’

    괜히 아파 보여서 더 마음 쓰지는 않겠지?

    유릭스는 거울 앞에 서서 모습을 점검하며 계속 백작을 떠올렸다. 어지럽지는 않은지 가볍게 침실을 돌아다녀 보면서도, 의사를 맞이해 붕대를 풀 때도, 백작이 두고 간 반성문을 책상 서랍에 넣을 때도, 계속 그녀를 생각했다.

    밤이 되어 침대에 눕자 또 그 생각이 났다. 공작은 어둠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슬몃 웃었다.

    ‘바, 반성문이요…….’

    그렇게 말하며 백작이 어찌나 떨었는지.

    백작은 정말 긴장해서 그랬겠지만, 어깨를 움츠리고 눈치를 보는 모습은 비 맞은 새끼 오리 같았다.

    그래, 꽤 귀여웠다. 어쩌면 그래서 한껏 다정하게 이해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안색이 안 좋던데.’

    오늘은 헥센 백작도 푹 쉬겠지. 다행이다. 유릭스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짹짹. 새소리가 들린다. 눈을 감고 있지만, 왠지 밖이 밝은 느낌이다. 게다가 몸이 아주 개운하다.

    …어?

    벌떡 일어났다. 시간을 보니 벌써 열한 시 반!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똑같이 열한 시 반이다.

    “뭐야?”

    이 시간까지 퍼져 자고 있는데 할아범도 깨우러 오질 않았네. 급한 일은 없지만 그래도 오전에 간단히 상단 사람들과 연락해서 보고 받아야 하는데.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실에 있는 톡톡부터 확인했다. 과연, 상단 부서장들로부터 연락이 와 있었다. 황제가 은근히 원하던 강아지 디자인, 공공기관에 공급할 물량, 화두는 다양했지만 다행히 급한 연락은 없었다.

    간단히 확인하고 답을 주고 있을 때, 노크와 함께 할아범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이제 그만 일어나셔야죠.”

    “어, 할아범.”

    이미 일어나 있거든?

    아마 내가 점심까지 잘 줄 알았나 보다. 좀 머쓱해서 간단히 인사하고 업무에 집중했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영업부장은 늦게 일어난 나를 신나게 놀렸다.

    [단주님 왜 이제야 답장하심ㅋㅋㅋㅋㅋ 늦잠 잤어요?]

    [모르겠다 나 완전 기절하듯이 잠들어서 못 일어났어;;; 별일 없지?]

    [네네 아침 보고에서 말씀드린 그 학교 얘기 말고는 조용합니다 요즘 왜 상단 안 나와요?]

    [니네 나 가면 싫어하잖아 빈말ㄴㄴ]

    [헐 들킴]

    픽 웃음이 났다. 평화로운 하루다. 어제까지만 해도 피가 바짝바짝 말라서 죽을 것만 같았는데. 공작이 너그럽게 이해해준 덕에 모든 일상이 빠르게 제자리를 찾았다. 고맙기도 하고 좀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다.

    가까이 다가온 할아범이 내 톡톡 화면을 훔쳐보더니 어김없이 훈계했다.

    “밖에선 예의 차려서 대하라고 하세요. 누가 보면 친구인 줄 알겠네.”

    “얘 안 그래도 그런 거 잘해. 아, 할아범. 오늘 나 왜 안 깨웠어? 시계 소리도 못 듣고 자버렸네.”

    “며칠 내내 걱정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잖아요. 좀 푹 주무시라고 그냥 뒀습니다. 그리고 답장하셔야죠.”

    아, 맞다.

    [일해 답장ㄴㄴ]

    밀린 연락을 전부 확인한 후, 바로 톡톡을 끄지 않고 잠시 머뭇거렸다.

    데이라 공작은 뭐 하고 있으려나?

    내내 쓰러져 있다가 어제야 겨우 깨어난 건데, 별일 없었나? 붕대는 언제 푸나 모르겠네. 지금쯤 일어났겠지? 여러 궁금증으로 괜히 마음이 들썩였다.

    “아가씨, 점심 식당에서 드실 거죠?”

    “아니, 그냥 여기서 먹을래. 공작한테 연락해 봐야겠어.”

    “왜요? 잘 끝났다면서.”

    “잘 잤냐고 물어보려고. 붕대 언제 푸는지도 살짝 물어보고.”

    “…….”

    어제 그렇게 한심하게 울고 떠는 꼴을 다 보여 놓고 바로 연락하자니 얼굴이 좀 간지럽지만.

    손가락을 타자기에 올린 그 순간.

    “아가씨가 먼저 연락하시려고요?”

    “응?”

    날 보던 할아범이 눈썹을 까딱했다. 주름진 입에서 예상치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남자한테 선톡하는 거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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