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하지 마세요-15화 (15/74)

[작품후기]샘샘이님, 로펜트님, 라바트님, 푸1님, S느루2님, 로열밀크티님, beolene님, 하홍홍홍님, 상큼한바람님, 델리케이트님, 전편 코멘트 모두 감사합니다//ㅅ!!15회

알 수 없는 마음연참 2/7

데이라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얼굴을 확인할 용기도 내지 못하고 바로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공작이 앉은 채로 움찔했다.

대답을 기다리면 그냥 나가라고 소리를 지를 것 같아서, 바로 써온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미르아 헥센입니다. 저는 사흘 전 자선 파티에서 장식 도자기로 공작님의 머리를 내리쳐 상해를 입혔습니다. 이 일로 공작님은 물론이고 공작님의 주변 사람에게도 크게 피해를 끼쳤습니다.”

화를 낼 거면 이쯤에서 소리를 지르지 않을까 했는데, 공작은 조용했다. 나는 종이를 든 내 손이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동정이나 용서를 사려고 일부러 떠는 게 아닌데, 오해 받을까봐 겁이 났다. 지금은 모든 일이 다 무섭고 조심스럽다.

“공작님이 제 친구이자 고용인인 리리에게 해를 끼쳤다고 생각해 그런 짓을 한 것인데, 모든 것은 제 오해였습니다. 공작님은 리리를 도와주셨고, 공작님 덕분에 리리는 앞으로 아주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공작님은 리리에게 해를 끼친 게 아니라 리리를 도와주셨습니다.”

리리의 이름을 발음하자 눈물이 핑 돌았다.

리리를 어쩌면 좋지. 만약 공작이 상단을 빼앗아가거나 작정하고 보복하면, 리리를 마법 학교에 보내줄 수 있을까? 겨우 건강한 몸으로 살아가게 되었는데, 공작의 눈 밖에 나서 학교도 가지 못하면?

나 때문이다. 내가 경솔하게 행동해서……. 하지만 그 상황은 진짜…….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또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치료를 위한 비용은 당연히 제가 모두 부담할 것이고, 그 외에도 위로가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해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다시 한 번 정말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적어온 글은 여기서 끝났다.

공작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나는 종이를 든 두 손을 무릎으로 떨어뜨리고, 가만히 공작의 힐난을 기다렸다.

여기까지 오면서 할아범과 다 이야기하고 왔다. 공작이 뭐라고 하든 무조건 빌자. 어차피 이쪽은 엄청난 귀족에 엄청난 마법사다. 상황이야 어찌 되었든 내가 억울한 사람 머리통을 깬 것도 사실이다.

차라리 고함을 지르거나 빈정거리면 대화하기가 쉬울 텐데, 공작은 계속 침묵했다. 침대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는 그가 어떤 심정일지 모르니 미칠 것 같다.

식은땀이 배어나는 손을 슬쩍 치마에 문질러 닦는데,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백작님, 일단…… 일어나서 말씀하시죠. 아니, 의자를 가져오라고 하겠습니다.”

소리를 지를 줄 알았는데, 일어나라고 권하는 목소리에는 당혹뿐이었다. 고개를 드니, 공작의 얼굴에는 뜻밖에도 분노가 없었다.

사람 도와주다가 머리통이 깨졌는데,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지? 심지어 그는 미미하게 웃고 있었다.

“아니요, 전 괜찮습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요. 무척 피로하셨던 모양입니다.”

바로 거절하자 공작이 사려 깊게 덧붙였다. 그러면서 좀 더 분명한 미소를 지었는데, 웃고 싶어서 웃는 게 아니었다.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당황스럽고, 고맙고, 미안하고, 창피한 감정이 한 덩어리가 되어 밀려왔다. 나는 그 감정에 납작하게 짓눌려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엉망이 되었을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는데, 머리 위로 공작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때는 위급한 상황이라 저도 경솔했습니다. 그 고용인을 안전한 장소로 데려간 후에 처치를 시도해야 했는데, 복도에서 급하게 진행하고 말았죠. 백작님은 마나도 느낄 수 없고, 마나 인공호흡이 뭔지도 전혀 모르셨을 테니 오해하신 게 당연합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해해 줘서 고맙다고? 아니, 그렇게 쉽게 이해해줄 일이 아니지 않으냐고?

선의로 행동한 사람은, 자기의 선의를 인정받지 못하면 억울해진다. 꼭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어도 오해받는 일은 당연히 불쾌하지 않은가.

근데 이 사람은…… 뭐지? 혹시 머리를 너무 세게 맞아서 아직 제정신이 아닌가?

멍하게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공작이 침착하게 말을 덧댔다.

“다행히 저는 마법사라, 다른 사람보다 회복도 빠르고 체력도 좋은 편입니다. 며칠 누워서 지내기는 했지만 상처를 회복하는 과정이지 몸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백작님께서 너무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 그래도…….”

“그 고용인과 친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려다보는 눈이 따뜻하고 정답다. 이 공작은 왜 저런 눈으로 나를 보는 것일까. 솔직히, 억울한 마음도 없지는 않았는데 공작이 이렇게 나오니 그마저도 부끄럽다.

“백작님 입장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행동했을 겁니다. 저도 그랬을 테고요. 그렇다면 당연히 백작님을 이해해 드려야겠죠.”

내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겨우 공작을 올려다보니, 그는 내 얼굴에서 무엇을 읽은 것인지 걱정스런 목소리로 재촉했다.

“그러니까 이제 일어나세요. 당장 쓰러질 것처럼 보입니다.”

주춤주춤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내내 무릎을 꿇고 있었던 탓인지, 아니면 공작 말대로 기력이 떨어진 것인지,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휘청거릴 정도는 아니었는데, 공작은 앉은 채로 재빠르게 내 손을 잡았다.

“실례합니다. 잠시 앉아서 기다려주세요. 손님 대접이 엉망이군요.”

“아, 아뇨, 괜찮아요.”

“이러다가 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제가 너무 죄송할 것 같아 그렇습니다.”

공작은 자기 침대 모서리에 나를 앉혔다. 긴장으로 차가워진 손에 공작의 온기가 남았다. 이상한 기분에 주먹을 한 번 쥐었다가 폈다.

졸지에 주인을 등지고 앉게 되었다. 뒤에 있는 공작도 의식되고, 이래도 되는 건가 싶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공작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종을 울려 사람을 부른 그는 기운이 날 만한 단 음료를 내오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내게 다른 설명을 건넸다.

“그때의 그 마법사를 꼭 찾아내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작정하고 숨어버린 듯한데, 다른 마법사들이 도울 겁니다.”

그때, 시종이 하얀 머그컵을 들고 왔다. 시종은 내가 공작 침대에 걸터앉은 모양을 보고 놀란 것 같았다. 그래도 잠깐 눈을 크게 떴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그컵을 받아들자, 진한 핫초코 냄새가 났다. 이유도 모른 채 마음이 울렁거렸다.

핫초코를 한 모금 머금는데, 등 뒤에서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기운을 차리고 돌아가세요, 백작님.”

나라면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머리를 내리친 사람에게, 약간의 분노도 없이 이해와 용서뿐이다. 자기도 친구를 위해서라면 똑같이 행동했을 테니까 나도 용서해준다고? 그런 일이 정말 가능한가?

뭐라고 말해야 내 마음이 전해질지 몰라 주저하는데, 공작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 이번 일로 걱정이 많으셨겠지요. 큰 상단을 책임지고 있는 분이니 염려의 크기가 짐작이 갑니다. 다행히 저는 아무렇지도 않으니, 백작님께서도 잊고 돌아가시면 좋겠습니다.”

어째 나보다 공작이 위로의 말을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머그컵을 쥔 채 그를 돌아보았다.

가만히 앉은 모습이 어쩐지 이전과 달라 보인다.

그 전에도 눈에 띄는 생김새였지만, 이제는 그 얼굴 곳곳에 스민 따스한 온기와 배려를 발견할 수 있다.

몇 번이나 마주쳤지만, 유릭스 데이라 공작은 그저 톡톡 너머에 존재하는 사업 상대에 불과했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내 현실로 튀어나온다. 한 사람이 가진 색깔과 향취가 전부 느껴진다.

이렇게 생긴 사람이었나.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나?

심장이 빨리 뛴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화르르 뜨거워지는 뺨에 손을 대며, 동요하는 기색을 감추려고 물었다.

“정말 제가 해드릴 일이 없을까요? 작은 보상이라도…….”

“괜찮습니다. 몸도 거의 다 회복되었고요.”

“그래도 제 마음이 편치 않아서요. 치료비와 보상이 될 선물은 몇 가지 가져왔지만, 공작님께서 원하시는 게 있다면 뭐든 해드리고 싶습니다.”

아까까지는 공작이 내 상단에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근데 지금은, 정말로 데이라 공작이 원하는 일을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도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번 자선 파티에서는 제가 소란을 피웠습니다. 너그럽게 잊어주시고 다음번에도 초대해 주신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진짜 이 사람은 배려가 지나치다.

나도 모르게 휙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일은 다 잘 되었는데 멍청하게 눈물이 났다. 진정해보려고 억지로 핫초코를 마셨지만 별 소용없었다. 나는 얼굴을 긁는 척 뺨에 번진 눈물을 닦아냈다.

공작은 나를 더 울리는 대신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편안히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있다간 진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서, 나는 벌떡 일어섰다. 그런 다음 그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게 슬쩍 몸을 틀어 인사했다.

“나중에 또 인사하러 올게요.”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도 대답은 살가웠다.

“언제든 환영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공작이 더 대답하기 전에 뛰다시피 방을 벗어났다.

반쯤 넋을 놓은 상태로 저택을 나와, 허둥지둥 내 마차로 돌아갔다. 고용인 몇 명과 마주쳤는데 그들이 우는 내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다.

마차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할아범이 내 얼굴을 보고 경악해서 달려왔다.

“아가씨! 주인님, 괜찮으세요? 왜 이렇게…….”

“공작이 괜찮대.”

짧게 대답하고 마차에 올랐다. 할아범이 급히 따라와 맞은편에 앉았다. 마차가 덜컹이며 출발하자마자 할아범이 나를 붙잡고 몰아치듯 질문을 쏟아냈다.

“왜 그러세요. 공작이 뭐라고 했기에, 협박이라도 당하셨어요? 아니면…….”

“아니야. 아니야, 공작은 진짜 괜찮대. 오히려 나보고 집에 가서 잘 쉬래.”

“그럼 왜 이렇게……. 이 머그컵은 또 왜 가져오시고……. 왜 우세요, 아가씨.”

그 말을 듣고 손을 내려다보니 정말 컵을 들고 왔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래서 그냥 울면서 웃었다.

“창피해서.”

할아범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눈물을 벅벅 문질러 닦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솔직히 우리 상단이 너무 걱정이었거든. 그 걱정이 너무 커서 별로 미안하지도 않았어……. 내가 실수했지만 되게 억울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공작이 너무…….”

진짜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감정이 미친 듯 요동치고 나를 보던 공작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공작이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웃어주었을 때 나는 너무 창피해서 울었다. 내 한심한 계산속을 다 들킨 것 같아서.

할아범은 더 말하지 않고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나는 중얼거렸다.

“데이라 공작은 사람이 아니야……. 분명히 천사야…….”

“그래요, 그래요.”

“분명히 어디 병원에서 날개 떼고 왔을 거야…….”

“예, 그렇죠.”

“천사라서 그렇게 잘생겼나?”

할아범이 떨떠름한 얼굴로 날 보았다.

“아가씨, 1절만 하세요.”

난 진지하다고.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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