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하지 마세요-13화 (13/74)

*전편 리리와의 대화 살짝 수정했습니다ㅋㅋㅋ 뭔가 리리 대답 이후로 군더더기를 붙이기 싫어서 생략했는데 혼란을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ㅋㅋㅋ 표현해준 여러분 고마워요bbbb(수줍13회

트릭스터와 자선 파티연참 2/2

침묵의 경매,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도 호스트 자리에 앉은 내게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다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든다. 무척 안전하게 느껴지는군. 아까의 놀란 마음도 천천히 가라앉아, 나는 완전히 평상심을 되찾았다.

맨 앞자리에 앉아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가장 좋은 자리를 배정받은 데이라 공작과 그 기사가 작게 무어라 속닥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쩐지 공작의 표정이 조금 굳어 있다.

무슨 일이지? 경매 물품이 마음에 안 드나?

경매도 어느새 중반이다. 지금까지 내놓은 물건은 전부, 기대 이상의 값에 낙찰되었다. 물론 다 내 배만 불리는 돈은 아니고, 상단 운영도 하고 이 자선 파티 비용도 충당하고 하겠지만, 그래도 뿌듯하다.

그때,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쩐 일인지 기사는 따라가지 않고 제자리에 남아 있다. 화장실이라도 가나? 아까 심각한 표정이더니 볼일이 급했나?

잠시 공작과 기사의 대화를 상상했다.

‘화장실이 급하군.’

‘그럼 다녀오시죠.’

‘그래, 다녀오지.’

‘네, 다녀오세요.’

‘응.’

‘네, 얼른…….’

‘그래.’

‘같이 가드려요?’

‘아니, 경이 자꾸 대답하니까…….’

왠지 저 공작이라면 이랬을 것 같다. 그러다가 급한 일 못 참아서 결국 대답하는 거 그만두고 화장실로 달려간 거겠지.

혼자 킬킬 웃으니 옆에 있던 할아범이 이상한 사람 보듯 날 쳐다본다. 얼른 표정을 정리하고 경매에 집중하는 척했다. 물론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다.

공작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왜 나한테, 사람마다 사정이 있으니 이해한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했을까. 다른 놈들은 진짜로 사정이 있다고 절절 빌어도 콧방귀도 안 뀌던데.

확실히 데이라 공작은 다른 귀족과 좀 다르다.

게다가 꼬박꼬박 날 백작님이라고 불렀지. 빈정거리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황실에 톡톡을 바치고 산 작위라며 비웃고 인정 안 해주는 놈들도 널렸는데 말이다. 어떤 놈들은 대놓고 날 그냥 ‘헥센 아가씨’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가씨는 무슨 아가씨야, 어엿한 백작님 된 지가 벌써 몇 년인데.

참 나도 안 됐다. 귀족 사회에서 얼마나 화나는 일이 많았으면, 공작이 보여주는 당연한 예의에 이렇게 하나하나 감동하고 있냐.

톡톡이 성공한 후 내게 한정 모델을 달라고 매달리는 귀족도 많았지만, 보란 듯 더 콧대를 세우며 잘난 척하는 놈들도 많았다. 그놈의 자존심. 하여튼 남 이겨 먹고 싶은 놈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물론 나는 더러워도 비위를 잘 맞춰 주는 편이다. 자존심이 돈 벌어다 주는 것도 아니고, 뻣뻣하게 굴 필요 없잖아?

그래도 잘난 귀족 놈들에게 큰소리칠 수 있는 대단한 명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든다. 왜 돈 많은 놈들이 작위 사고 정치 하려는지 알겠다니까.

그렇게 한가롭게 잡생각이나 하는 사이, 경매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서로 쓸데없는 말을 안 하니까 진행 속도가 어마어마하다.

벌써 물건이 몇 개나 지나갔는데, 데이라 공작은 나타나지 않았다. 옆에 앉은 기사도 슬슬 초조한 기색이다.

설마 공작 변비인가?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아아아아악!”

여자의 높은 비명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변이 고요해 비명이 더 선명하게 들렸다.

사람들은 침묵을 내던지고 무슨 일이냐고 웅성거리느라 바빴다. 그러나 나는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경매장을 벗어나 뛰었다. 머릿속이 두려움 때문에 새하얗게 변했다.

리리의 비명소리다. 리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

경매장을 빠져나온 유릭스 데이라 공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복도를 달리듯 걸었다. 물론, 미르아 헥센 백작의 짐작대로 볼일이 급해서는 아니었다.

불길한 마나의 흐름이 그를 이끌었다.

마법이란 결국 마나를 느끼고 모으고 운용하고 안정시키는 행위인지라, 힘이 강한 마법사일수록 그 흐름에 예민했다. 유릭스 데이라 또한 마나에 민감한 강한 마법사 중 하나였다.

‘뭔가 이상한데.’

거대한 힘이 요동치고 있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에 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위험한 마법 현상을 다스리고 해결하는 것도 그의 의무 중 하나였다.

그렇게 급히 모퉁이를 돌던 중, 유릭스는 달갑지 않은 장면을 목격했다. 경매장과 그리 멀지 않은 복도였다.

“놔주세요!”

깊은 숲에 사는 요정처럼 보이는 여자가 거세게 저항하고 있었다. 옅은 은색 머리카락에 봄 잎사귀처럼 싱그러운 녹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였다. 입은 옷을 보니 하녀였는데, 웬 불한당에게 붙들려 있었다.

유릭스는 지금 정말 급한 용무가 있었지만, 상황을 보니 이쪽도 정말 급한 용무에 속하는 듯했다. 하녀를 붙잡은 사내는 유릭스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언성을 높였다.

“내 말 들어 보라고! 당신은 어마어마한 마나를 가지고 있어. 내가 도와줄 테니까 이리 와 봐!”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놓으시라고요!”

하녀가 있는 힘껏 저항하며 남자를 콱 뒤로 밀쳤다. 서둘러 달려간 유릭스가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리고 엄정한 낯으로 밀려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마법사인 것 같은데, 그만 하시죠. 무슨 무례입니까?”

“당신도 마법사요?”

남자는 유릭스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눈을 부라렸다. 그러면서 유릭스 뒤에 선 하녀를 손가락질로 가리켰다.

“그럼 눈이 옹이구멍인 모양이군! 저 하녀는 엄청난 마나를 가지고 있어. 마나를 주입해서 조금만 길을 터주면 엄청난 힘을 갖게 될 거라고!”

말 자체는 옳았다.

유릭스는 자기가 찾아다니던 불안정한 마나의 근원이 이 하녀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렸다. 제국을 억지로 구겨 통조림에 넣고 봉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하녀의 몸은 강대한 마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시들고 있었다. 아마 평소에 건강도 좋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문제는 하녀의 마나가 아니었다. 유릭스는 진절머리를 내며 물었다.

“올바른 절차가 있다는 걸 모릅니까?”

한눈에 봐도 하녀의 옷차림이 흐트러져 있었다. 이런 과격한 상황에서 하녀가 스스로 옷을 벗으려 하진 않았을 테니, 심한 몸싸움을 하다가 저렇게 된 모양이었다.

“낯선 사람이 나타나서 마나를 주입하겠다며 끌고 가는데, 당신 같으면 따라갑니까. 백작가에 공식적으로 문서를 보내 일을 진행했어야죠.”

“날 비난하는 거요? 아파 보이니까 내가 도움을 주려고 한 거요! 그런데 감히 내 도움을 거절해?”

남자는 정말로 억울한 듯 소리쳤다.

유릭스는 이런 부류가 정말 싫었다. 길 가는 사람 붙잡고 마법사로 만들어줄게, 하는데 누가 쫄래쫄래 따라간단 말인가. 거절하는 게 당연한데 ‘감히 내 도움을 거절했다’니.

“그만 하십시오. 당신을 기억했다가 마법 재판에 회부할 겁니다.”

유릭스는 남자의 얼굴을 꼼꼼하게 살폈다. 남자의 얼굴은 말끔하고 인상도 나쁘지 않았다. 옷을 보니 어디서 귀하게 자란 마법사 도련님인 듯했다. 어쭙잖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앞뒤 못 가리는 꼬맹이였다.

마법 재판 이야기까지 나오자 남자의 낯빛이 싹 달라졌다. 그는 유릭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자신이 달려들어도 될 상대인지 계산하더니, 이를 갈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곧장 목표를 하녀로 바꾸었다.

“당신도 같은 생각인가? 응? 내가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해?”

하녀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유릭스는 남자의 한심한 작태에 고개를 저으며 하녀를 인도해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남자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마법사가 되면 이딴 하녀 일은 그만둬도 된다고! 난 불쌍한 일반인을 도와주려고 한 거야!”

남자가 와락 하녀에게 달려들었다. 유릭스가 즉각 막아선 탓에, 세 사람은 한 덩어리가 되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남자는 때를 놓치지 않고 하녀의 몸에 자기 마나를 욱여넣었다.

어마어마한 마나 폭주가 시작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아아아악!”

하녀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녀는 거품을 물고 사지를 버둥거렸다. 심한 발작이었다.

유릭스는 이를 갈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무슨 경솔한 짓이냐고 화를 낼 틈도 없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남자는 폭주하는 하녀를 보다 네 발로 기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유릭스는 그 뒤를 따라가는 대신 하녀를 진정시키기를 택했다. 일단은 이쪽의 생명부터 구해야 했다.

이따금 마법은 쓰지 못하는데 마나만 지닌 사람이 있다. 마나의 통로가 막힌 것이다. 다른 마법사가 그것을 발견해 길을 터주면 되지만, 그건 아주 위험한 작업이었다. 병을 고치듯 몇 시간을 들여 신중해야 할 마나 주입을, 방금 저 남자가 막무가내로 시도했다.

하녀의 몸에서 마나가 폭발하며 마구 요동쳤다. 평범한 사람은 느낄 수 없겠지만, 유릭스는 위험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일단은 그의 마나로 이 사람을 진정시켜야 했다.

‘마나 인공호흡을 실제로 시도하는 건 처음인데.’

유릭스는 버둥거리는 하녀의 몸을 붙들고 억지로 멈추게 했다. 목을 뒤로 꺾으며 급하게 숨을 헐떡이는 하녀를 보니 주저나 망설임도 사라졌다.

그는 하녀의 몸을 짓누르다시피 하고 하녀의 코를 막았다. 그런 다음 발작하는 환자에게 혀 씹힐 각오를 하고 입술을 겹쳤다.

벌어진 입을 통해 숨을 불어넣듯 빠르게 마나를 주입했다. 고도의 정신 집중이 필요한 작업이라, 온몸에서 식은땀이 솟았다.

키스하는 듯한 낭만적인 자세지만, 사실 마나 인공호흡은 대단히 불쾌한 작업이었다. 유릭스는 내장을 토해 하녀에게 먹이는 듯한 역겨운 느낌에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게다가 하녀가 가진 마나는 낯선 마나의 침입을 거부하며 날뛰었다. 그때마다, 유릭스는 토한 내장을 다시 삼키는 듯 속이 메스꺼웠다. 이대로라면 못 참고 정말로 토악질을 하고 말 것 같았다.

그래도 진땀을 흘리며 씨름하니 성과가 보였다. 하녀의 발작이 점차 잦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급한 불은 껐다 싶었던 그 순간.

“리리! 리리이이!”

거센 고함과 함께 누군가 성난 들소처럼 돌진해 왔다.

유릭스는 잠시 입술을 떨어뜨리고 고개를 돌렸다. 마나를 심하게 운용한 탓에 현기증이 났는데, 다가오는 이가 헥센 백작이라는 것만큼은 바로 알 수 있었다.

헥센 백작은 전속력으로 달려오면서 사나운 고함을 내질렀다.

“리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개새끼야!”

흐트러진 하녀의 옷, 바닥에 누워 정신을 잃은 하녀, 비명, 키스. 유릭스는 자기가 무슨 오해를 받았는지 즉각 깨달았다.

아니라고 해명하기도 전에, 헥센 백작이 복도에 장식된 도자기를 들었다. 그런 다음 그대로 공작의 머리를 퍽 내리쳤다. 그야말로 물 흐르듯 매끄러운 연결 동작이었다.

“너 같은 놈은 죽어야 돼! 좋은 사람인 줄 알았더니!”

유릭스는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헥센 백작의 얼굴이 증오와 분노로 얼룩져 있었다. 짧은 시간에 저 사람의 다양한 표정을 보는구나. 아니라고 해명하려고 했는데 머리가 너무 뜨끈하고 아팠다.

정신을 잃어가던 유릭스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축 늘어진 하녀의 몸을 안고 목 놓아 통곡하는 헥센 백작의 얼굴이었다.

“리리, 죽지 마! 죽지 마, 제발 죽지 마아아!”

순식간에 눈물 콧물 범벅이 된 백작을 보며 유릭스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안 죽었는데…….’

세상이 캄캄해지며 의식이 완전히 사라졌다.

자선 파티는 바로 종료되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깨진 도자기 조각만 속없이 반짝거렸다.

[작품후기]*이 장면을 쓰고 나서 두 명의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Q. 발랄 로판에서 여주가 남주 뚝배기를 깨도 될까? 여주가 남주 뚝배기 깨는 소설 본 적 있어?

A1. 새 지평을 개척하는 거지...ㅎ

A2. 안 될 건 뭐임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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