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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하지 마세요-11화 (11/74)
  • 11회

    트릭스터와 자선 파티연참 2/2

    그때 할아범이 내 망상을 싹둑 잘라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아까 데이라 공작 마차랑 마주쳤잖아요. 그대로 저택으로 갔을 텐데, 그 시간에 마법사 거리에 올 수 있을 리가 없죠.”

    곰곰이 생각하다가, 역시 할아범 말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설마 공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중간에 마차에서 내려서 걸어왔겠어?

    “그건 그래.”

    고개를 끄덕이고 두 다리를 편히 쭉 뻗었다.

    그래, 데이라 공작은 아닐 거야. 설령 맞다 해도, 난 후드까지 뒤집어썼는데 다시 만난다 한들 알아보겠어?

    “많이 답답하시죠?”

    할아범이 슬쩍 물었다. 마차만 타면 자더니, 오늘은 어쩐지 멀쩡해 보인다. 염려하는 소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하긴 하지.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친구라도 만나면 좋을 텐데요.”

    “그러게.”

    건성으로 대답하고 멍하게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거리에 쏟아지는 햇빛이 찬란했다. 할아범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저택으로 돌아가는 내내 말이 없었다.

    -

    헥센 상단 자선 파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나는 되도록 외출을 자제하고, 사람과의 만남을 피하고, 대화도 줄였다. 상단에도 거의 나가지 않았다. 어차피 상단주 없어야 더 잘 돌아간다. 자기들끼리 으쌰으쌰도 하고.

    그러던 중 자선 파티 참여자 명단이 도착했다.

    익숙한 이름도 있고 낯선 이름도 있지만, 전부 우리 고객이다. 헥센 상단은 폼 안 나게 부자만 초대하지 않는다. 이름난 학자거나 저명한 기술자거나, 아무튼 명예로운 사람에게 초대장을 보낸다.

    졸부 귀족 파티가 아니란 말씀!

    긴 명단을 쭉 훑어보는데, 익숙한 이름이 하나 보였다.

    [유릭스 데이라.]

    데이라 공작이네?

    마지막으로 대화한 이후 연락이 없어서 잠시 잊고 있었다. 인생에서 다시는 만나기 힘들 대답 중독자였지……. 현실에서는 그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명단을 가져다준 할아범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권했다.

    “다시 생각해 보시죠? 파티에 참석했다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데, 아프다고 핑계를 대서 피할 수도 있잖아요?”

    “거물들이 오잖아. 얼굴도 안 보여주고 피할 순 없지.”

    “올해 한 번 빼먹는다고 뭐 큰일이 난다고…….”

    할아범은 입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솔직히 나도 할아범 말에 동의한다. 근데 안 갈 수가 없는 걸 어쩌겠어.

    “준비나 철저하게 해줘. 나도 그날 오래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네, 단주님.”

    할아범은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얼굴로 대답하고 휙 등을 돌렸다. 문으로 가는 할아범 뒤에 대고 외쳤다.

    “응, 할아범!”

    참으로 쓸데없는 대답에 할아범이 휙 뒤를 돌아보았다. 그냥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참.

    -

    크게 하는 일도 없이 뒹굴거리고 있는데 자선 파티 당일이 되었다.

    저택의 커다란 연회장과 1층, 2층, 3층, 앞쪽 정원, 뒤쪽 정원까지 전부 사용하는 웅대한 파티였다. 그만큼 사람도 많이 오고 돈도 많이 들었다.

    화려한 연주를 선보일 오케스트라, 능수능란한 마술사들(마법사가 아니다), 경품 당첨과 경매 진행을 도와줄 이벤트 전문가, 수많은 요리사, 대부분 귀족인 손님들의 시중을 들 시종과 시녀 무리…….

    “아무튼 돈지랄이야.”

    거울 앞에 앉아 있다가 나도 모르게 툭 내뱉었다.

    짧은 머리가 부스스해지지 않게 잘 다듬어주던 하녀 리리가 놀라지도 않고 작게 웃는다.

    “오랜만에 주인님이 욕하는 거 들으니 재밌네요.”

    “그래? 나도 너 오랜만에 봐서 좋아.”

    툭 대답하며 거울을 통해 리리의 모습을 살폈다.

    사실, 진짜 귀족처럼 보이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리리다. 색이 옅은 은빛 머리카락에 보석을 박아놓은 듯 반짝거리는 녹색 눈동자. 그야말로 서리 맞으며 핀 한 송이 꽃 같은 청초하고 여린 자태까지.

    건강하기만 했다면 더할 나위 없었을 텐데.

    “요양은 잘 다녀왔어?”

    내 질문에 리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인님 덕분이에요. 하녀 요양까지 보내주는 주인님이 어딨어요.”

    “너 아픈 것보단 낫잖아. 좀 더 쉬라니까, 괜히 자선 파티 맞춰 올라와선. 안색도 안 좋아진 것 같아.”

    사실 리리는 평범한 고용인이 아니다. 고아인데,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보육원에서 데려와 나와 함께 지냈다. 나이도 비슷해서,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힘들 때 기대기도 하고.

    부모님은 몸이 약한 리리를 겨울마다 따뜻한 남쪽 해변으로 보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나도 그렇게 하고 있다.

    “집사님이 주인님 답답할 거라고 해서요.”

    “할아범이? 왜?”

    “이유는 못 들었지만, 그냥 그렇다고 하시던데요?”

    저주에 대해 말할 수 없으니 대충 둘러댔겠지. 리리가 온다고 저주가 풀리는 것도 아닌데 괜한 짓이다.

    “할아범은 왜 쓸데없는 소릴 해서 아픈 앨 데려와.”

    리리가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만져 주며 소리 내어 웃었다. 활기차고 높은 웃음소리. 그래도 많이 건강해졌다. 내 귀를 스치는 리리의 손가락은 여전히 차갑지만.

    단장을 마치고 일어나서 리리 쪽으로 돌아섰다. 이슬 내린 숲의 요정 같은, 작고 연약한 얼굴을 보며 약속을 받아내듯 말했다.

    “리리, 아프지 마. 알겠지?”

    리리는 안다. 내가 부모님을 연달아 잃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두 분은 주무시다 돌아가셨지만, 오래도록 세월이 주는 고통과 싸워야 했다. 그래서 나는 아픈 사람을 보는 게 힘겹다.

    리리는 구구히 말을 덧붙이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우리 주인님.”

    그렇게 리리와 한참을 더 대화했다. 할아범이 괜히 아픈 애를 데려왔다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그래도 리리와 얘기하니 답답한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그 뒤로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사람들 앞에 얼굴을 내보이고, 환영 인사를 하고, 한 명씩 대화를 나누었다. 내 저주 때문에 우스꽝스러운 짓을 해야 했지만.

    그 우스꽝스러운 짓이 뭐냐면…….

    “네, 다음 분.”

    할아범은 화려한 객실 문밖에 서서 사람들을 한 명씩 내게 보내고 있다. 여러 사람과 한꺼번에 대화하면 저주에 걸려들 위험이 커지기 때문에, 딱 한 명씩만 상대하는 중이다. 물론 여러 사람에게 한꺼번에 대답하면 되긴 하지만, 그래도 위험은 최대한 피하는 게 좋으니까.

    나와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 워낙 많아서 솔직히 도망치고 싶다. 파티장에 사람이 너무 바글거리는 것도 불안하다. 솔직히 이 시간이 빨리 가버렸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작은 객실에 앉아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만 있으니 불안이 증폭되는 느낌이다.

    저주받기 전에는 사람들 사이를 자유롭게 쏘다니며 수다도 떨고 영업도 했는데, 이게 다 무슨 일인지.

    그때, 할아범이 객실 문을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지쳐서 축 늘어진 나를 불렀다.

    “단주님, 단주님!”

    “어엉?”

    손님 접대에 지쳐서 의자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다가 바로 허리를 똑바로 펴고 앉았다. 할아범이 열심히 신호를 보냈다. 손을 허리춤에 댔다가, 입을 벙긋거렸다가, 미치겠다는 듯 손을 털다가…….

    뭔 소리야? 어쩌라고? 도망치라고?

    할아범은 내 멍한 표정을 보고 다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문을 활짝 열어 다음 손님을 들여보냈다.

    안으로 들어서는 두 남자를 보자마자 나는 그대로 벌떡 일어났다.

    미친, 미친, 미친!

    진짜 미친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정보상에서 마주친 미남자 둘이 그때처럼 걸어오고 있었다!

    심지어 둘 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움찔했다.

    왜…… 왜 움찔하는데?

    마법사 제복을 입은 남자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움직였다. 내게 가까이 다가온 그가 첫 인사를 고르듯 머뭇거렸다. 제발, 알아본 건 아니겠지. 나 그때 후드도 잘 쓰고 있었는데!

    그가 내게 손을 내밀어 인사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유릭스 데이라입니다.”

    “아, 예에. 저는 미르아 헥센입니다……. 와주셔서 영광…….”

    손을 맞잡으면서도 정신이 하나도 없다. 미친, 진짜 데이라 공작이었어. 어떡하지? 알아봤나? 눈치 못 챘지? 모르는 거지, 응? 나 그때 많이 또라이 같았나?

    그때, 공작이 어색하게 말을 대답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예, 분명 처음입니다. 그렇지요?”

    알아봤다. 알아봤어. 그래놓고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해주고 있어!

    심장이 쿵 떨어지고 미소를 유지하는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냥 지금 창문으로 뛰어내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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