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트릭스터와 자선 파티연참 1/2
공간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기사는 세상에서 가장 제정신이 아닌 사람과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친 사람처럼 넋이 나갔다. 마법사도 너무 당황해서 할 말을 잃은 듯 보였다.
다음 순간, 마법사가 반쯤 입을 벌렸다. 나는 눈을 부라리며 또 소리쳤다.
“대답! 하지 말라고!”
마법사가 합 입을 다문다.
나도 내가 미친놈처럼 보일 걸 안다. 근데 어쩌라고, 이 빌어먹을 저주 때문인데. 몸이 돌로 변하는 경험도 안 해봤을 놈들이 왜 자꾸 대답하고 난리야!
두 사람을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다가(후드 때문에 눈빛은 안 보였을 것 같긴 하다) 휙 몸을 돌렸다. 내 뒤에 붙은 할아범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혼잣말을 했다.
“아이고, 머리야…….”
알아, 나도 창피해!
안내 직원은 아무래도 진성 또라이가 찾아왔다 여기는지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며 뛰듯이 걸었다. 설명할 기운도 없고 괜히 또 대화를 나누다 피곤해지기도 싫어서,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는 가장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직원이 두 번 노크한 후 문을 열어 주었다.
“사장님, 손님 오셨습니다. 두 분 들어가시면 됩니다.”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큰 책상 너머에 빨간 머리 꼬마가 하나 앉아 있었다. 길게 길러 잘 관리한 머리카락에서 반짝반짝 윤이 났다. 얼굴에 화장기가 전혀 없고 옷도 그냥 아동복인데, 표정이나 분위기가 묘하게 어른 같았다.
키도 작고 몸집도 작아서, 큰 책상 너머에 있으니 더 조그맣게 보였다. 설마 이 어린애가 유명한 정보상인가?
의아한 채로 서 있으니 할아범이 옆에서 속삭였다.
“저주에 걸려서 몸이 어려졌다고 합니다. 놀라는 티는 내지 마세요.”
그래서 저주에 빠삭하다고 한 건가? 근데 본인 저주도 못 푸는 사람 정보를 어떻게 믿고. 그 정보가 정말 유용했으면 본인 저주부터 풀지 않았을까?
그때, 꼬마 사장님이 앳된 목소리로 권했다.
“앉아.”
책상 맞은편에는 의자 두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할아범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았다. 꼬마는 기록지처럼 보이는 종이를 들고 짧게 훑어보더니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빨간 머리카락과 잘 어울리는 초록색 눈동자. 이름은 로즈일지도 모르겠다.
“저 집사한테 얘기는 대충 들었어. 얘기를 들었다고 해야 하나, 눈치를 챘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상태를 좀 보려고.”
그러더니 꼬마가 의자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책상을 빙 돌아 내게 오는 작은 몸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 맞은편까지 다가온 꼬마가 말랑말랑한 손을 들어 내 이마에 톡 얹었다.
좀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엄청나게 작은 금속 동그라미가 내 모든 혈관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탐색하는 느낌? 몸 안쪽이 차례로 차가워졌다.
이러면 뭘 알 수 있는 건가. 신비로운 마법의 세계로군.
“교묘한 저주야. 아마 다른 마법사라면 이렇게 해도 저주를 알아차리지 못하겠지.”
꼬마가 손을 떼고 책상으로 돌아갔다. 할아범은 꼬마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재촉하듯 물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기다려 봐. 아무래도 우린 같은 놈한테 당한 것 같으니까.”
꼬마가 서랍장을 뒤져 얇은 책 한 권을 꺼냈다. 너무 얇아서, 책이라기보다는 몇 장 짜리 안내서 같았다. 꼬마는 그 책을 책상 끝으로 쭉 밀어내 내가 잡을 수 있도록 했다.
나는 책 제목을 느리게 따라 읽었다.
“트릭스터에 대하여?”
“그래, 트릭스터. 마법사조차 저주의 굴레에 묶어둘 수 있는 강력하고 악랄한 놈이지.”
“내 저주가 이…… 괴물 때문이라고요?”
표지에 그려진 무시무시한 녹색 덩어리는 정말 ‘괴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진흙처럼 끈적거리는 몸에 붙은 수십 개의 눈, 칼처럼 뾰족하고 기괴한 이빨들.
그때 꼬마가 턱짓을 하며 조언했다.
“책 뒤집어 봐.”
뒤쪽 표지를 확인했다. 거기에는 중절모를 쓰고 회중시계까지 찬 말쑥한 신사가 그려져 있었다. 모자 끝을 살짝 잡은 손에는 흰 장갑까지 꼈다.
“괴물이면서 신사, 식인귀면서 다정한 이웃, 행운을 가져다주는 요정이면서 파멸로 인도하는 악마.”
꼬마가 건조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어쩌다가 트릭스터에게 잘못 걸린 건지는 몰라도 좀 힘들 거야. 저주는 몇 년짜리지?”
“일 년이요.”
“그나마 다행이네. 잘 살아남아 봐.”
“……네?”
나는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꼬마는 왜 못 알아들었느냐는 투로 반복해서 말했다.
“잘 살아남아 보라고. 어쩔 수 없잖아, 저주는 저준데.”
“어쩔 수 없다고요?”
“그럼 뭐 어쩌겠어?”
“아니, 트릭스터인지 뭔지를 찾아내서 죽이거나 하는 방법도 있잖아요?”
“죽인다고? 트릭스터를?”
꼬마가 큰 소리로 웃었다. 그 웃음을 들은 순간, 어쩌면 내 짐작보다 나이가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달관과 분노, 좌절과 슬픔이 동시에 묻어나는 기이한 소리였다. 목소리는 앳된데, 젊은 사람의 웃음처럼 들리지가 않았다.
“트릭스터는 죽일 수 없어. 트릭스터를 죽이는 일은 너 스스로를 죽이는 것과도 같지. 무슨 소린지 알아?”
“모르겠는데요.”
뭔 한가한 수수께끼야.
“트릭스터는 일종의 변수야. 운명의 아이러니 같은 거지. 사랑해서 결혼한 두 사람이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거 본 적 있어? 아니면 원수처럼 지내다가 갑자기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은? 트릭스터는 그런 모순 같은 존재라고.”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라고요?”
꼬마가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되게 억울하네. 자기는 마법사거나 마법 이론 전문가일지 몰라도 나는 그냥 장사해서 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트릭스터가 뭔지 알 게 뭐야.
꼬마는 갓난애를 대하는 듯한 태도로 설명을 이어갔다.
“살아 있는 괴물이지만, 평범한 생물은 아니라는 거지. 죽이고 살리고 할 수가 없다는 소리야. 그니까 그냥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여. 어차피 일 년짜리 저주라며?”
“그건 그렇지만…….”
“평범한 저주였으면 도와주려고 했는데, 트릭스터는 안 돼. 그냥 가. 돈은 잊지 말고 내고.”
뭐 해준 것도 없으면서 돈을 내래.
장사하는 사람으로서 너무 기가 막혀서 쳐다만 보고 있었다. 꼬마가 슬쩍 내 얼굴을 살피고 선심 쓴다는 듯 덧붙였다.
“대신 그 책은 가져도 돼.”
“정말 방법이 없겠습니까?”
할아범이 극진한 투로 물었지만, 꼬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그 얼굴에 노인 같은 수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린 낯에 천진난만한 기쁨과 기대감이 깃들었다.
“그러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그 저주가 좋은 선물을 가져다줄지도 모르잖아?”
“…….”
개소리 들으러 오느라 시간 낭비했군. 이미 이 저주 때문에 이름 모를 마법사와 기사 두 사람에게 미친놈으로 낙인찍혔는데.
“네, 알겠어요.”
간단히 대답하고 일어섰다. 꼬마가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잘 가라고.”
“잘 있어요.”
꼬마가 더 대답하기 전에 재빨리 밖으로 뛰어나가 쾅 문을 닫았다.
접수대 직원이 벌써 끝났느냐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괜히 피곤해지고 싶지 않아 무시하고, 할아범이 값을 치르게 내버려 뒀다. 돈이 아깝지만 별 얘기 못 들었으니 돈 내기 싫다고 우길 순 없으니.
할아범 손에는 꼬마가 준 트릭스터 책이 들려 있었다. 저건 뭐 때문에 가져왔는지 모르겠다. 할아범도 돈이 아까웠나?
앉아서 기다리던 마법사와 기사가 일제히 내게 시선을 꽂았다. 기사의 눈빛이 또렷하게 읽혔다.
‘저 미친놈.’
나도 그냥 무시했다. 일 년 내내 잘 살아남아 보라는 비관적인 소리를 듣고 나니, 창피해하거나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마법사의 반응은 기사와 좀 달랐다. 그는 나와 할아범을 한 번씩 바라보더니, 할아범 손에 들린 책에 눈을 고정했다.
트릭스터에 대하여, 짧은 제목을 읽은 그가 나를 흘끗 보더니 무어라 말하려 했다. 마법사의 입이 벌어지는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저 대답 중독자와 말을 섞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아가씨, 같이 가요!”
할아범이 허둥지둥 쫓아 나왔다. 엉엉 울 나이는 지났지만, 할아범에게 안겨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나 돌이 되어서 죽지는 않겠지……?”
“그럼요. 우리 딱 일 년만 버팁시다.”
“그래…….”
터덜터덜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푹신한 의자에 반쯤 눕듯이 하고도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할아범은 마차에서도 그 트릭스터 책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몇 장 되지도 않는데 뭘 그리 열심히 읽는지.
책 표지를 구경하고 있자니, 갑자기 마법사의 이상한 시선이 떠올랐다.
“할아범, 혹시 아까 봤어? 그 잘생긴 마법사가 이 책 엄청 쳐다보더라.”
“아, 느꼈습니다. 시선이 엄청 따갑던데요. 누군지는 몰라도 기세도 대단하고, 평범한 마법사는 아닐 겁니다. 근데 아가씨가 그렇게 하셨으니…….”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하는 소리에 확 성질이 치밀었다.
“나도 답답하니까 그런 거 아니야! 진짜 이상한 놈 아니야? 왜 그렇게 자꾸 대답하는데? 하여튼 데이라 공작도 그렇고 마법사 놈도 그렇고, 대답 못 해서 원한이 사무쳤나 왜 그렇게 하는 짓이 똑같…….”
응?
그러고 보니 그 마법사가 가지고 있던 검……. 데이라 공작도 마검사 아닌가? 오늘 수도로 올라왔다고? 데이라 공작도 곧 수도로 온다고 했잖아.
…나 우량 고객한테 입 닥치라고 한 거야?
[작품후기]해피탄님, 고양이버찌님, 샘샘이님, 오뚜기카레님, 로열밀크티님, 민야화님, 로펜트님, 아람닻별님, 라바트님, 델리케이트님, beolene님, 앙마루님, 김철식님, 고소플룸님, 전편 코멘트 모두 감사합니다//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