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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하지 마세요-2화 (2/74)
  • [작품후기]짧고 빠르게 가볍게 가는 게 목표입니다. 잘 부탁드려요!2회

    올해의 운세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마음에 쏙 든다.

    새해를 맞아 짧게 자른 검은색 머리카락이 목 언저리에서 찰랑거린다. 보라색 같기도 하고 군청색 같기도 하지만, 멀리서 보면 그냥 검게 보이는 눈동자가 거울 속에 또렷하게 박혀 있다.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단정하면서도 값비싼 옷을 챙겨 입었다. 장인이 직접 짠 모직으로 만든 겨울 정장인데, 두꺼우면서도 둔해 보이지 않는다.

    성공한 사업가인 내게 꼭 맞는 옷이라고 할 수 있지!

    “단주님?”

    할아범이 어딘지 떨떠름한 투로 나를 부른다. 거울에 비친 할아범에게 시선을 돌리며 되물었다.

    “응? 왜?”

    “그냥 점 보러 가는 것뿐인데요. 왜 그렇게 신이 나셔서…….”

    “그냥 점이라니! 부정 타게 그런 말 하지 마.”

    이렇게 말하니 내가 미신을 무척 잘 믿는 사람 같은데, 나는 미신을 믿지 않는다. 그냥 딱 한 가지, 새해에 그 점술가 할머니의 바구니에서 뽑는 운세만 믿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잘 맞아떨어졌다고.

    콧노래를 부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스물두 살부터 스물여섯까지, 최고의 운세만 뽑았다. 스물일곱이 된 올해도 비슷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제 출발할까?”

    “또 이 늙은이를 끌고 나가시려고요?”

    “그럼 나 혼자 나가?”

    놀란 척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할아범이 싫은 척 한숨을 내쉰다. 사실은 나랑 나갈 때마다 손녀랑 나들이 다니는 것처럼 좋아하면서, 한 번씩 싫은 척을 한다니깐.

    “이제 슬슬 시녀도 고용하시라니까요.”

    “성질에 안 맞아.”

    “그래도 엄연한 귀족인데…….”

    “아, 누가 날 귀족으로 본다고!”

    짐짓 짜증스러운 척 내쏘자 할아범의 투덜거림이 쑥 들어간다. 어휴, 시원해.

    할아범 입장도 이해는 한다. 스물두 살에 작위를 받아 어엿한 귀족이 된 후, 시녀도 기사도 맞이하지 않았다. 그대로 스물일곱 살이 되었으니 할아범도 아쉽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당분간 시녀고 기사고 들일 마음이 없다. 어차피 원래 일하던 사람들 많은데, 뭐. 교양 있고 콧대 높은 귀족 출신 시녀나 얼굴 멀끔한 기사는 필요 없다고.

    “얼른 출발하자.”

    모르는 척 외투를 걸치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할아범이 구시렁거리면서도 뒤를 따라온다. 아, 진작 이렇게 가면 좀 좋아?

    -

    “이야, 할머니 출세하셨네.”

    점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열일곱 살 때 부모님과 처음 왔을 때는 허름한 비닐집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이동식 점포처럼 바뀌었다. 심지어 이 점포를 끌고 다니는 말도 한 마리 있다.

    안도 엄청 넓어지고 깔끔해졌다. 이동에 초점을 둔지라 엄청 튼튼하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잘 관리되고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사실 이 이동식 점포는 내 선물이다. 할머니 덕에 내 운이 좋아진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기분이 있지.

    허리가 굽은 할머니는 주름진 얼굴로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어서 와요, 백작님.”

    “어휴, 백작님은 무슨.”

    대충 손을 젓고 의자에 앉았다.

    할머니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나무 테이블에는 고급스러운 실크가 깔려 있었다. 물론 이것도 내가 선물했지!

    부드러운 실크에 두 팔을 얹고 턱을 괴며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진짜 내 할머니처럼 인자하게 웃었다.

    “그래요, 올해도 포춘 쿠키로?”

    “응. 오늘 느낌이 너무 좋은데?”

    할머니가 준비한 바구니를 내밀었다. 종이로 개별 포장한 과자가 자기들끼리 부딪쳐 바스락거렸다. 아, 이 종이 소리. 좋은 운이 내게 오는 소리로다.

    나는 몇 차례 바구니 안을 헤집고 하나를 뽑았다.

    종이 포장지를 풀고, 포춘 쿠키를 반으로 똑 부러뜨렸다. 안의 빈 공간에서 돌돌 말린 작은 쪽지가 툭 떨어졌다.

    실크가 깔린 테이블을 구르는 쪽지에 올해의 성패가 걸려 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엄지와 검지로 살짝 그 쪽지를 들었다.

    아, 좋은 거여야 하는데.

    쪽지를 도르르 풀고 실눈을 뜬 채 글자를 확인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글자가 하나씩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가지고자 하면 못 가질 것이 없는 한해입니다. 수확할 작물이 차고 넘쳐 가득하고, 풍요로운 가을은 끝나지 않을 듯 이어질 것입니다.]

    “으아!”

    나도 모르게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쪽지를 구기듯 손에 쥐고 그대로 허공에 한 방 먹였다. 쿠키를 입에 쏙 집어넣고 아그작 아그작 씹으며 행복을 만끽했다.

    집사 할아범한테는 좋은 운이 나올 거라고 했지만, 막상 이 자리에 앉으니 긴장했다. 하지만 역시 내 촉은 틀리지 않았다.

    올해도 최고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겠어. 아, 너무 좋아!

    할머니는 내 난리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웃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안주머니에서 청동전이 가득 든 주머니를 꺼내 테이블에 탁 올려놓았다.

    금속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아주 영롱했다.

    “고마워, 할머니.”

    “운은 자기에게 달린 것인데 무얼.”

    그렇게 말하면서도 할머니는 슬쩍 주머니를 챙겼다. 그 모습을 보니 비실비실 웃음이 났다.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는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 보였다.

    “그럼 내년에 또 올게!”

    신이 나서 말하고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 집사 할아범에게 쪽지를 보여 주고 자랑해야겠다!

    그때, 입구 가까운 곳에 덩그러니 놓인 또 다른 바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바구니 안에는 쪽지 모양으로 접힌 종이가 가득했다.

    내가 어딜 보는지 알아차린 할머니가 등 뒤에서 목소리를 높여 설명했다.

    “새로운 건데, 그냥 재미로 보는 겁니다. 하나 해보셔도 좋고. 그건 공짜로 드리죠.”

    “그래? 이게 뭔데?”

    작은 테이블에 놓인 바구니 앞에는 안내문이 적혀 있었다.

    [장난꾸러기 신 트릭스터와 함께하는 축복 또는 저주

    당신의 운을 시험해보세요. 쪽지의 반은 축복, 반은 저주! (효과 지속은 1년)

    축복의 종류: 야식을 아무리 먹어도 건강이 나빠지지 않음 / 아침마다 쾌변을 함 / 염색한 사람의 원래 머리색을 볼 수 있음 / 기타 등등

    저주의 종류: 식당에 가서 메뉴 선택을 할 때 절반 확률로 실패함 / 방문하는 공중 화장실이 높은 확률로 더러움 / 씻는데 갑자기 찬물이 나올 수 있음 / 기타 등등]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야식을 먹어도 건강이 나빠지지 않는 축복은 좀 탐나는데?

    “그럼 나 이거 하나 뽑는다?”

    “예에.”

    할머니는 뒤에서 뭘 하느라 분주해 이쪽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진짜 축복이나 저주일 리 없으니, 제일 위에 있는 쪽지를 들었다. 그런 다음 바로 확인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할아범이 마차 옆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쪽지를 팔랑팔랑 흔들어 보이며 마차에 올랐다. 할아범이 재빨리 내 옆에 앉아 문을 닫았다. 마차가 덜컹이며 저택으로 출발했다.

    “할아범, 이거 봐라? 무슨 축복과 저주 쪽지인데, 할머니가 하나 공짜로 줬어.”

    “그래요?”

    할아범은 시큰둥하게 쪽지를 보더니 관심을 꺼버렸다. 올해의 운은 궁금하지도 않은지 묻지도 않는다.

    “왜 그래?”

    “너무 점에 심취한 거 아닙니까?”

    “뭘 걱정하는지 알겠는데, 나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믿진 않거든?”

    아무튼 저렇게 걱정이 많아서야.

    콧노래를 부르며 쪽지를 펼쳤다. 어차피 운도 좋겠다, 이왕이면 재밌는 게 나오면 좋겠는데.

    모서리까지 꼼꼼하게 눌러 접은 쪽지를 펴 내용을 확인했다.

    [친절한 사람이 되어 보세요! 앞으로 마지막 대답은 당신의 몫입니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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