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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보석> (16/16)

<축복받은 보석>

센디엘 축제에서 일어났던 황제의 암살 기도는 프레데릭과 로젤린의 활약으로 인해 실패했다. 잔당은 신속하게 소탕되었다. 암살 소동이 마무리되었을 때는 어느덧 무더위가 한풀 꺾인 늦여름이었다.

로젤린은 가을 햇살이 화창하게 내리쬘 무렵에 발트란으로 귀환하였다.

귀환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좋은 소식이 있었다. 신관장이 길일을 골라 준 것이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새 계절이 움트는 내년 봄으로 정해졌다.

“올해 안으로 길일을 받아오시겠다고 자신만만해하셨는데 전하께서 많이 실망하셨겠어요.”

이사벨의 농담에 로젤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일반 귀족의 결혼식 준비에도 몇 달이 걸리는데 하물며 대영주의 결혼식이다. 내년 봄으로 예정된 결혼식도 상당히 빠른 진행이었다.

프레데릭이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는데도 노골적으로 실망했다. 프레데릭답다면 다운 모습이라고 해야 할지.

‘……실망하는 얼굴이 귀엽게 보이다니. 나도 큰일이야.’

실없는 태도가 왠지 프레데릭을 닮아가고 있는 것 같아서 로젤린은 식은땀을 흘렸다. 프레데릭은 무척 좋아하고 사랑하는 남자이지만 그의 실없는 태도는 닮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실없는’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이사벨은 척척 일을 진행시켰다.

조수들의 도움을 받아 로젤린의 신체 사이즈를 꼼꼼히 측정했다. 이전에 한 번 사이즈를 측정한 적이 있었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 새롭게 기록하는 게 좋다고 그녀는 설명했고, 로젤린도 수긍했다. 특별히 어렵거나 힘든 일도 아니다.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이면서 얌전히 서 있던 로젤린은 생각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일 년 정도 지났어. 시간이 참 빨라.’

이사벨이 만든 드레스를 입고 프레데릭의 파트너로서 수확제의 대연회에 참석한 게 벌써 작년 이맘때의 일이다. 어느덧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났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떠올랐다. 이제 겨우 숨을 돌렸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다. 스무 해가 넘는 그녀의 인생에서 고작 일 년, 정확히는 몇 달에 지나지 않은 시간이 과거와 미래를 모두 아우르게 해 주었다.

검투사로서 보낸 10년이 가치 없다고 여기는 건 아니다.

하나 아이기스 나이트에 입단하고 프레데릭과 인연이 이어지게 된 지난 1년은 그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값진 하루하루였다. 미소가 저절로 로젤린의 입가에 그려졌다.

작년의 수확제에서는 프레데릭의 임시 파트너였다.

올해의 수확제에서는 그의 정식 약혼녀로서 참석하게 된다. 이미 프레데릭과 공공연한 관계는 되었지만 공식석상에서 두 사람의 약혼 사실을 알리는 건 그때였다.

가만히 상상해 보았다.

드레스를 입고, 프레데릭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연회장에 입실하는 건 똑같은데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 광경을 생각하니 왠지 얼굴에 열이 올랐다.

“다 끝났어요!”

이사벨이 굽혔던 허리를 펴며 줄자를 조수에게 넘겼다. 잠깐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던 로젤린도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설마 뺨이 붉어진 건 아니겠지.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옷감을 골라 보셔야죠, 메이어 경.”

습관대로 ‘메이어 경’하고 불러 버린 이사벨이 흠칫하며 입을 가렸다.

“이젠 대공 부인이 되실 분인데 입에 익지 않아서 실수를 했네요.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정중하게 사과하는 그녀에게 로젤린은 싱긋 웃었다.

프레데릭과 결혼하면 메이어 백작이자 슈벤하임 대공 부인이 되는 그녀다. 그러나 그녀의 사회적인 지위가 달라지게 되었다고 하여 그녀가 가진 기사로서의 자긍심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기사이자 백작이었으며 프레데릭의 연인이었다. 모두 로젤린 자신이었다.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도 아닌 이사벨 씨가 갑자기 멀어지시면 많이 섭섭해요.”

이사벨은 발트란에서 기사단의 동료 외에 처음으로 사귀게 된 지인이다. 공적인 만남으로 인해 알게 되었지만 본의 아니게 사적으로도 많은 인연을 가졌다.

로젤린의 상담을 들어 주기도 했고 자택을 방문하기도 했다. 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이사벨의 딸 에밀리아에게 가끔 검술을 가르쳐 주기도 하면서 왕래는 더욱 잦아졌다.

신분과 나이 차이는 있지만 친구라고 일컬을 수 있는 좋은 관계였다.

적어도 로젤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정작 이사벨이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민망하겠지.

일부러 장난스럽게 대꾸했지만 조금 불안했다. 정중한 예의를 차리면서 거리를 두는 대답이 나올까 봐 조마조마했다.

놀란 얼굴로 바라보던 이사벨도 이윽고 미소했다.

“제가 유부녀가 아니었다면 방금 하신 말을 엄청나게 오해했을 거예요.”

그녀의 대답도 장난스러웠다.

마음에 걸렸던 관계가 친구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긴장이 풀리고 약간의 어색한 웃음이 찾아왔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마주보고 작게 웃은 두 사람은 한담을 나누며 원단 견본을 둘러보았다.

“이번엔 재단해야 할 드레스가 많으니까 메인 예식 때 입을 드레스 외엔 제가 임의로 고르고 나중에 보여드릴게요.”

제례, 본식, 피로연 등 결혼식 당일에만 필요한 드레스가 최소 세 벌이었다. 며칠 동안 축제처럼 성대하게 진행되는 결혼식이니 이사벨을 비롯한 재봉사들은 관계자 중 그 누구보다 바쁠 예정이었다.

이사벨은 화사한 봄의 결혼식에 어울리는 색과 드레스들의 색 배합을 꼼꼼하게 설명해 주었다.

“반드시 색상의 배합을 고려하실 필요는 없지만 하루 안에 연이어 진행되는 의식인 만큼 주의하시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의외로 사람들에게 강하게 기억되고 회자되는 건 여주인공의 드레스거든요. 유행하는 디자인도 참고해 보시라고 가져왔어요.”

여름에 프레데릭을 보좌하여 레젠까지 갔던 라울에게 부탁한 자료였다.

북쪽의 발트란은 아무래도 최신 유행에 뒤처지는 감이 있다. 로젤린이 결혼식에서 유행을 선도하는 디자인을 보이면 여러모로 강렬한 인상이 남을 것이다. 이제 슈벤하임 사교계를 지휘하는 건 그녀의 몫이었다.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를 마리안 대부인의 영향력을 완전히 덜어 내는 게 좋았다.

작년에 이사벨이 드레스를 재단해 주었을 때에는 의욕이 전혀 생기지 않았었다. 그때는 건성으로 아무렇게나 골랐었는데, 이젠 로젤린도 이사벨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이같이 사소한 일 하나하나가 그녀의 변화를 알리고 있었다. 로젤린은 이런 변화가 좋았다.

“레젠에 다녀오시면서 마음에 드는 디자인의 드레스는 없으셨어요?”

“바로 생각나는 게……. 아! 절 후원하셨던 분의 생일파티에 초청되었을 때 본 드레스인데 코사지가 어깨부터 긴 소매 밑단까지 잔잔하게 장식된 게 예쁘더라고요.”

서툴고 막연한 설명도 이사벨은 꼼꼼히 메모했다. 좋은 아이디어가 되길 바라며 로젤린은 떠오르는 드레스들을 이야기했다. 두 명의 여자가 만나 드레스를 얘기하니 자연히 대화는 길어졌다. 가벼운 잡담과 일상 이야기도 섞이며 웃음도 함께 흘러 나왔다.

이사벨이 따가운 목을 차로 적시며 넌지시 물었다.

“요즘 대공 전하께서 근심하시는 일이 있으신 것 같다고 들었어요. 라울이 걱정하는 눈치던데 짐작되시는 일이 없나요?”

“프레데릭이요?”

로젤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금시초문이었다.

“저에게 따로 말한 건 없었습니다. 그런 낌새도 눈치 못 챘고요.”

“그럼 별일 아니신 걸까요? 라울이 괜한 걱정을 했나 봐요.”

그녀의 말처럼 라울의 기우라면 걱정 없겠지만. 로젤린은 스콘을 깨물어 먹으며 생각했다. 일단은 프레데릭을 잘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로젤린의 예상은 틀렸다.

프레데릭은 정말 고민 중이었다. 그녀에게 말하지 못할 고민을.

“라울입니다.”

“…….”

노크 소리도 못 듣고 심각한 고민 삼매경에 빠져 있는 그를 라울이 걱정스럽게 바라다보았다. 올 초에 있었던 반란을 진압한 후 슈벤하임 대공령은 무탈하고 평화로웠다. 한데 정작 대공인 그가 근심에 젖어 있으니 자신이 알지 못하는 큰일이 또 있는 건 아닌지 염려되었다.

물론 프레데릭이니만큼 쓸데없는 고민을 진지하게 곱씹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라울은 여러 모로 의심을 버리지 못하며 불렀다.

“프레데릭 님!”

큰소리로 부르니 뒤늦게야 고개를 들었다. 라울이 들어왔다는 것도 이제야 눈치 챈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지?”

“이사벨이 재봉사들을 대표하여 부탁드릴 게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만…….”

라울은 말꼬리를 흐리며 프레데릭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가 혼자 고민을 안고 있는데 직설적으로 캐내도 괜찮은 건가.

시선이 뚫어지게 쫓아오자 프레데릭이 질색했다.

“이러지 마. 나에겐 로젤린이 있어.”

“…….”

많고 많은 귀족 중에 하필이면 그의 유모가 된 어머니를 원망하며 라울은 결심했다. 이 인간을 배려할 필요가 뭐가 있나. 그는 귀찮은 배려와 탐색 따위는 집어치우고 돌직구를 던지기로 했다.

“고민하고 계신 게 뭡니까? 괜히 한숨을 푹푹 쉬시니까 다른 보좌관들도 눈치를 본다고요.”

프레데릭이 머쓱한 표정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티가 많이 났나?”

“엄청요.”

“사적인 일이라서 일부러 얘기를 안 한 거였다만.”

“공적으로도 영향을 끼치고 있으시니 그냥 자백하십시오.”

고민을 들어 주는 상담자가 아니라 취조자에 가까운 태도로 윽박질렀다. 프레데릭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결혼할 때 로젤린에게 줄 예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군.”

본래 슈벤하임 대공가에는 대공 부인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패물이 있었다.

7대 전의 대공 부인이 지참금으로 가지고 온 목걸이였다. 그 목걸이는 삼십 여 년 전 프레데릭의 할머니가 아들의 결혼을 축하하며 마리안 부인에게 손수 물려주었다.

이제 로젤린의 소유가 될 패물이었으나 그녀에게 주기가 꺼림칙했다.

이전의 대공 부인들과 마리안 부인의 상황이 달랐다. 대공 부인들 중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완벽한 사람들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마리안 부인처럼 반역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반란죄로 처형된 마리안 부인의 소유였던 패물을 로젤린에게 선물로 주어도 되는 것인가. 프레데릭의 고민은 그것이었다.

“고민이 되시긴 하겠군요.”

라울도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대공가의 안주인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패물은 그 값어치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로서 가치가 있다. 전 주인이 반란죄로 처형되었다는 게 찜찜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별 것 아니라고 쿨하게 넘길 사람도 있겠지만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면 끝없이 쓰이기 시작하는 고민이었다.

덩달아 라울도 고민을 시작했다.

“어머님의 패물을 새롭게 세공하는 건……. 내키지 않으시겠고요.”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이 프레데릭이 인상을 썼다.

윗대에서 물려받는다는 의미에서 그의 친어머니의 패물도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프레데릭이 절대 선택하지 않을 방법이었다. 친어머니는 그의 치부였으니까.

그렇다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달리 없었다.

“어쩔 수 없지요. 새 패물을 준비하셔야겠습니다.”

“나도 그래야겠다는 생각은 하는데 어지간한 보석으로는 영 만족스럽지 않아. 적어도 마리안 부인이 갖고 있던 패물보다는 훨씬 값진 것이어야 하질 않겠나? 드래곤이나 때려잡으러 가 볼까. 드래곤의 심장이 굉장한 보석이라면서?”

“드래곤은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거고요.”

“검은 황야의 마수 중에 드래곤 비슷한 놈은 없나?”

실없는 소리를 하던 프레데릭은 곧 원래의 화제로 돌아왔다.

“레젠에 갔을 때 보석상들을 만나 보긴 했지만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이번 고민의 해답은 쉬웠다. 라울이 가지고 온 자료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안 그래도 이 일 때문에 왔습니다. 다음 달에 레젠에서 보석 경매가 열리는데 이사벨이 경매에 올라올 예상 보석들을 찾아보고 몇 가지 구입을 요청했습니다. 우선은 결혼식에 사용할 보석들로요.”

보석 경매라니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이었다.

“레젠 보석상들은 올해 전쟁 때문에 내후년에나 정기 경매가 열릴 거라고 하던데.”

“급박히 결정된 임시 경매라고 합니다. 니스 백작가가 파산을 하면서 소지 중인 보석들을 내놓았다는군요.”

니스 백작가는 소유한 영지가 작았으나 중개 무역에 관여하면서 큰 부를 쌓은 가문이었다.

수년 전 대를 이은 백작이 도박에 중독되었다는 소문이 있더니 파산할 만큼 큰 손해를 입은 모양이다. 한때는 보석 수집에도 열을 올리던 가문이었으니 이번 경매에는 값진 보석들이 출품될 것이다.

어쨌든 프레데릭에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프레데릭은 라울이 가지고 온 자료를 뒤적였다.

“경매에서 최고가로 낙찰될 거라고 예상되는 보석이 뭔가?”

막힘없이 대답하던 라울이 껄끄러운 표정이 되었다.

“예상되는 보석은 있습니다만 가급적이면 그 아래의 보석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뭐길래 그러나?”

“……‘에델의 태양’입니다.”

프레데릭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에델의 태양’은 누구나 최고가로 낙찰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만큼 유명한 보석으로 필라헨 제국의 남서쪽인 에델 왕국에서 채굴된 다이아몬드였다. 최초의 소유주였던 귀족 영양이 보석을 가슴에 품고 자살하였다는 비극적이고 그럴 듯한 배경 스토리까지 있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유족은 보석이 불길하다는 이유로 다른 귀족에게 팔았다. 새로운 주인이 된 귀족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 다음 주인은 병으로 요절했다.

‘에델의 태양’은 그렇게 주인들을 옮겨 다니며 불행을 전염시켰다. 많은 사람을 불행에 빠트린 보석은 어느덧 세간에서 이렇게 불리기 시작했다. ‘저주받은 보석’이라고.

아이러니한 것은 저주받은 보석의 악명이 높아지고 불길한 소문이 커질수록 보석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현재 에델의 태양은 대륙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보석 가운데 하나였다.

가장 유명하며 가장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프레데릭이 원하는 보석이었다.

“가격은 얼마가 되어도 상관없으니까 낙찰 받아오라고 해라.”

호쾌한 결정을 내린 프레데릭과는 달리 라울은 꺼림칙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불길하지 않습니까? 되도록 재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주라는 건 단순한 소문이야. 보석의 희소성과 가치를 올리기 위한 수작에 불과한 거라고. 보석을 소유한 사람이 반드시 불행해진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불길한 소문이 붙은 건 사실이니 결혼 패물로 드리기엔 적절하지 않을 것 같군요.”

라울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자료를 좀 더 신중히 넘겨 본 프레데릭은 다른 보석들을 몇 개 더 골랐다. 에델의 태양만큼 유명한 건 아니지만 충분히 값진 보석들이었다.

“결혼식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다른 루트도 알아봐라. 일단 이번 경매에서는 이 정도가 좋겠군. 에델의 태양을 최우선으로 낙찰받는 걸 잊지 말고.”

저주를 받았다는 흉흉한 이야기를 단순한 소문으로 치부한 프레데릭은 대수롭지 않게 명령했다. 라울은 석연치 않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으나 군말 없이 물러났다.

‘……프레데릭 님의 말씀처럼 단순한 소문이라면 더 할 나위 없을 텐데.’

프레데릭의 집무실을 나가는 도중에도 보석에 얽힌 불길한 이야기들만 자꾸 생각났다.

워낙에 유명한 보석이니 낙찰을 받아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라울의 다음 고민은 프레데릭의 대리로 경매에 참석하게 될 보좌관을 고르는 일이었다.

다음 달, 프레데릭의 책상 위에는 경매에서 무사히 낙찰 받은 ‘에델의 태양’이 놓여졌다.

* * *

‘에델의 태양’이라는 이름 그대로 보석은 찬란하게 빛났다.

프레데릭은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의 옐로우 다이아몬드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투과되는 각도에 따라 보석의 광휘가 깊어졌다. 눈이 부실 만큼 찬란하며 정신이 빨려 들어갈 만큼 황홀했다.

‘굉장하군…….’

보석에 관심이 없는 프레데릭마저 감탄할 만큼 아름다웠다. 불길하게 붙어 있는 소문까지 이 보석이 지닌 마력처럼 여겨졌다. 이 보석의 아름다움에 홀린 사람이 자신의 인생까지 바치기에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지겨움도 느끼지 않고 오랫동안 보석을 바라보던 그는 뒤늦게야 이물질 같은 것을 발견했다. 적색과 황색 중간쯤의 광채를 지닌 옐로우 다이아몬드에 얼룩이 묻어 있었다.

프레데릭은 손수건으로 다이아몬드의 표면을 문질렀다. 방금 떨어진 핏방울처럼 선명한 붉은색 얼룩은 조금도 지워지지 않았다. 마치 표면이 아니라 다이아몬드의 내부에서부터 스며 나온 핏방울 같다. 아주 선명하고 붉은 핏방울.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저주받은 보석. 프레데릭의 뇌리에 문득 그 한마디가 스쳤다.

‘설마……. 그런 건 단순한 소문이라고. 이 얼룩도 보석 특유의 무늬겠지.’

색상이 이질적인 무늬가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지만, 어쨌든 프레데릭은 열심히 부정했다. 소문이다, 소문. 소문, 소문.

에델의 태양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보석이었으나 액세서리로 세공되지는 않았다. 저주를 받았다는 불길한 소문이 있는 보석에 손을 대는 걸 두려워한다는 이유도 있었고, 보석이 큰 탓에 쪼개지 않으면 액세서리로 세공하기 힘들다는 이유도 있었다.

당연히 프레데릭은 보석을 쪼개어 세공할 예정이었다. 보석 자체의 가치보다는 로젤린에게 줄 예물로서의 가치가 더 컸으니까. 이 보석을 어떻게 세공하면 로젤린에게 어울릴지 고민했다.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라면 적당하지 않을까. 티아라나 팔찌 등으로 분산하면 너무 자잘하게 쪼개질 것 같고……. 포인트는 목걸이에 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며칠 내로 세공사를 불러와야겠군.’

불길한 소문을 잊기에 좋은 즐거운 상상이었다.

상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똑똑 노크하는 소리에 이어 로젤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레데릭, 안에 있습니까?”

프레데릭은 하마터면 보석을 떨어트릴 뻔했다. 로젤린에게는 비밀로 감춰 두고 깜짝 선물로 준비했는데!

얼른 보석함에 도로 에델의 태양을 넣고 책상 서랍에 밀어 넣었다. 로젤린이 설마 이유도 없이 책상 서랍을 뒤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 어서 와.”

깜짝 놀라서 목소리까지 갈라졌다. 프레데릭은 얼른 기침하는 시늉을 했다.

로젤린은 업무 시간 중에 이유 없이 집무실로 찾아오지 않는다. 이제 그녀는 그의 호위기사로 근무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로젤린을 만나는 건 언제나 반갑지만 일부러 그를 찾을 만큼 큰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심각한 표정이 아니었다.

“절 부르셨다고요?”

“……내가?”

“예.”

“누구에게 들었나?”

“방금 라울 씨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

라울, 이 자식이.

프레데릭은 로젤린에게 보이지 않게 구시렁거렸다. 그녀가 오기 직전 보석함을 건네주고 간 사람도 라울이었다. 보석을 보면서 히죽거리고 있을 자신의 모습이나 구경하라고 그녀를 보낸 게 분명하다.

“오해가 있었나 보군.”

“그렇군요.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로젤린은 인사하고 쿨하게 등을 돌렸다. 프레데릭은 그녀가 집무실을 나가기 전에 후다닥 달려가 문을 탕 닫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려고?”

“업무 중이시잖아요. 열심히 일하셔야죠.”

“…….”

농땡이 피우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이 전해졌다. 프레데릭은 짐짓 한숨을 쉬었다.

“단호하고 쿨한 너도 좋아하지만 오늘처럼 가을 햇살이 아름다운 날에는 우리에게도 따뜻한 유예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요약해 주세요.”

“잠깐만 있다 가면 안 될까.”

그제야 로젤린도 피식 웃었다.

로젤린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소파로 걸어간 프레데릭은 먼저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무릎을 탁탁 건드리며 가리켰으나 로젤린은 무시하고 그의 무릎이 아니라 옆자리에 앉았다. 프레데릭이 애석한 눈빛을 던지는 것도 무시했다. 언제 사람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집무실에서 남세스러운 행동은 절대 하기 싫었다.

막상 그녀가 가까이에 앉자 프레데릭이 흠칫하며 등을 뒤로 젖혔다.

“또 왜 그러세요?”

“……향수 냄새가…….”

로젤린은 무심코 손목의 냄새를 맡았다. 그녀가 뿌린 향수는 센디엘 축제날 프레데릭에게 선물받은 그 향수였다.

“너무 많이 뿌렸습니까? 별로예요?”

“아니!”

프레데릭이 강하게 부정했다.

“별로가 아니라, 너무 좋아서 문제지. 네 향수라는 걸 알면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을 하려고 하거든. 위험해.”

“…….”

대낮부터 못하는 소리가 없다.

로젤린은 프레데릭이 앉은 쪽으로 허리를 굽혔다. 프레데릭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로젤린은 다가갔다. 프레데릭이 물러났다. 로젤린은 더 다가갔다. 프레데릭이 소파 구석에 갇혔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묘했다. 난처함과 곤란함으로 희미하게 붉어진 얼굴은 이리저리 둘러보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지만, 반면에 눈동자에는 묘한 기대감이 있었다. 입가가 움찔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로젤린은 웃음을 참았다. 결국은 좋아하고 있잖아, 이 남자.

“프레데릭.”

일부러 은근한 목소리로 부르자 프레데릭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로젤린은 그의 기대를 가볍게 배신해 주었다.

“앞으로 향수 뿌리지 말까요?”

“아, 아닙니다.”

“위험하다면서요.”

“제가 참겠습니다.”

“무엇을요?”

“……이것저것?”

애매하게 말끝을 흐리는 프레데릭의 손이 로젤린의 허리 옆에서 방황했다. 당장에라도 그녀를 끌어안고 키스라든가 그 이상의 무엇을 하고 싶은데 참고 있는 눈치였다. 여기가 집무실만 아니었다면, 혹은 로젤린이 처음부터 무릎에 앉았다면 이미 저질러 버렸을 것이다.

로젤린은 계속 모르는 척하며 프레데릭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눈 감아 보세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프레데릭이 얼른 눈을 감았다. 이 뒤에 이어질 순서는 뻔하지 않겠는가. 키스부터 바로 시작해도 좋고, 눈 감고 있는 그에게 장난을 쳐도 좋고.

로젤린의 머릿속에도 몇 가지 상황이 떠올랐다. 당사자인 프레데릭도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긴 집무실이었다.

일을 하는 집무실.

엄연한 공적인 공간이다.

기대감으로 한껏 부풀어 오른 프레데릭의 입술에서 손을 뗀 로젤린은 그의 목덜미에 향수를 뿌렸다.

“……엉?”

‘비비드한 색채의 느낌을 가졌지만 기본적으로 무심한듯 시크하고 쿨한 감성에 머스큘러한 멘탈을 베이스로 하여 포인트는 엣지 있는 향’이라며 그만이 기억하고 있는 복잡하고도 농밀한 향에 프레데릭이 눈을 떴다. 로젤린은 어느새 소파에서 일어나 있었다.

“향수에 익숙해지면 해결이 될 것 같습니다. 익숙해져서 위험해지지 않도록 노력하세요.”

“로젤린, 그게 아니라…….”

“휴식 시간 끝났습니다.”

어정쩡하게 앉아서 멍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그에게 로젤린은 마지막으로 생긋 웃음을 남기고 등을 돌렸다.

결국 놀림만 당했다는 걸 깨달은 프레데릭은 홀로 남은 집무실에서 좌절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위험하든 안 위험하든 가만히 입 닥치고 있을걸. 로젤린이 남기고 간 향수의 잔향만이 그의 곁을 감돌았다.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 프레데릭도, 싱글거리면서 돌아가는 로젤린도, 저주받은 보석을 찜찜하게 여기는 라울도 알지 못했다.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감춰진 보석함, 그 안에서 에델의 태양이 불길한 빛을 번들거렸다는 사실을.

프레데릭, 마리안 부인, 윌리엄과 엘자 부부가 머물던 슈벤하임 대공저에는 이제 프레데릭 혼자만이 남았다.

‘혼자라고 해서 예전과 크게 다른 점은 못 느끼겠지만.’

프레데릭은 저택 뒤편의 벤치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마리안 부인은 대공저를 양분하여 각각 동쪽과 서쪽에 머물렀다. 마치 각자의 집에 사는 사람들처럼 저택 내에서는 어지간해서 얼굴도 마주치지 않았다.

혼자 살고 있는 지금과 다른 건 거의 없었다.

다만 윌리엄의 부재는 가슴을 허전하게 했다.

친부도 친모도 닮지 않았기에 오히려 그와 좋은 형제가 될 수 있었던 윌리엄이다. 윌리엄이 마리안 부인을 닮거나 그녀를 이해했다면, 프레데릭은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잃었을 것이다.

‘가을을 넘기면 많이 추워질 텐데 잘 지내고 있을지 모르겠군.’

프레데릭은 성에 유폐되어 엘자와 조용히 지내고 있는 윌리엄을 떠올렸다.

지금은 직접 윌리엄을 찾지 못하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형편을 살펴보기만 했다. 언젠가 세월이 지나 마리안 부인의 죄가 시간에 씻기어 나가면 윌리엄을 만나게 될 기회가 올 것이다. 프레데릭은 스스로에게 타이르듯이 생각했다.

높게 펼쳐진 가을 하늘만은 변함이 없었다. 정원도 밝은 햇살에 물들어 색색의 단풍과 꽃으로 무르익었다. 내년에는 가을 정원의 풍경을 혼자가 아닌 로젤린과 둘이 보게 된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허전하였던 마음에 따뜻한 온기가 번졌다.

과거에 메이어 남작가의 본가였던 저택은 다른 귀족에게 팔렸다. 프레데릭이 그전에 매입할 수도 있었지만 로젤린이 만류했다.

‘대신 대공저의 정원 한쪽을 로젤린의 옛집 정원과 비슷하게 꾸미는 건 어떨까.’

무심코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꽤 괜찮았다.

로젤린에게 그녀가 성장하였던 메이어 남작가의 정원에 어떤 추억이 있는지 듣기도 했고, 직접 방문하여 보기도 했다. 전란을 겪은 정원은 황폐하여 과거의 아름다움을 많이 잃었지만 프레데릭은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었다.

그때, 이유를 알 수 없는 한기가 프레데릭을 덮쳤다. 뒷목에 소름이 돋고 서늘하게 식었다. 머리 위쪽의 공기가 칼날처럼 찍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살기였다.

프레데릭은 반사적으로 벤치에서 일어나 몸을 피했다.

콰앙!

그가 피하자마자 머리 위에서 묵직한 물체가 낙하했다.

벤치의 등받이, 즉 프레데릭의 머리가 있던 위치에 직격한 물체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박살이 났다. 산산조각이 난 것의 정체는 화분이었다. 깨진 화분 조각과 화분에 가득 담겨 있던 흙, 제라늄이 나뒹굴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피하는 게 조금만 늦었다면 화분이 직격한 건 그의 머리였을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마침 안쪽의 복도를 걷고 있던 집사가 허둥지둥 창문을 열었다. 프레데릭은 대답하기 전에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대범한 그였지만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졌으니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다친 곳은 없다. 위에서 실수를 한 모양이야.”

고개를 들고 위를 바라보았다. 3층의 창문이 크게 열려 커튼이 나풀거리는 게 보였다.

그러나 그곳에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만약 하녀가 청소를 하다가 실수로 화분을 떨어트렸다면 집사처럼 사색이 되었을 텐데 사죄하는 목소리도 도망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떨어트린 순간 재빠르게 도망을 친 것일까.

“다, 당장 범인을 찾겠습니다!”

만류할 틈도 없이 집사가 안쪽으로 들어갔다.

프레데릭은 아직도 소름이 돋아 있는 뒷목을 문지르며 나풀거리는 커튼을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바람이 세게 불어서 화분이 떨어졌을 가능성도 있겠다. 실수 때문에 책망을 당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보다는 그편이 나았다.

그날 오후 내내 집사는 하녀와 하인을 꾸중했지만 범인은 나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화분이 떨어진 시간에 3층 복도를 지나간 사람도 없었다.

“역시 바람이었나 보군.”

송구해하는 집사의 보고를 들은 프레데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다치지도 않았고 실수한 사람도 없으니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하필이면 그 시간에 바람이 세게 불고 그 위치로 화분이 낙하한 건 ‘단순한 우연’이었을 것이다.

판단을 내린 프레데릭은 그날 밤이 지나기 전에 사건을 잊었다.

하나 ‘단순한 우연’은 화분으로 끝나지 않았다.

호크만 백작저를 방문했을 때였다.

호크만 백작은 저택에 두 마리의 애완견을 기르고 있었다. 평소에도 그를 잘 따르던 개들이 갑자기 프레데릭에게 짖었다. 목줄을 끊을 것처럼 흥분하여 크게 짖었다. 호크만 백작과 훈련사가 아무리 혼을 내고 타일러도 멈추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이 녀석들과 어제 사냥을 다녀왔는데 흥분이 식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당황한 호크만 백작이 진땀까지 뻘뻘 흘리며 사죄했다.

개를 자극하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 있던 프레데릭은 괜찮다고 대답하면서 뒤를 힐끔거렸다. 개들이 그가 아니라 그의 뒤쪽을 보며 짖고 있는 듯한 느낌은 착각일 것이다.

그날 프레데릭의 머리 위로는 2개의 화분과 화병이 더 떨어졌다.

프레데릭처럼 반사 신경이 빼어난 사람이 아니었다면 큰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아니면 죽었거나.

실내라고 하여 안전한 건 아니었다.

하루만에 죽음의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기고 지친 심신으로 귀가한 그는 또 한 번 위기를 겪었다. 복도에 장식용으로 세워 둔 갑옷 앞을 지날 때였다. 갑옷이 들고 있던 할버드(도끼 모양이 날이 달린 창)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그의 발 앞에 쿵 찍혔다.

“…….”

예리하게 빛나는 할버드의 날이 복도를 쩌억 가른 광경을 목격한 프레데릭은 할 말을 잃었다. 한 걸음만 더 나갔다면 저 날이 자른 것은 복도가 아니라 그의 발등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머리거나.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애써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우, 우연이겠지……. 하하하하…….”

단단히 고정되어서 갑옷이 장식되어 있던 동안 단 한 번도 빠지거나 떨어진 적이 없었던 할버드가, 하필 그가 지나가는 그 순간에 떨어진 것도 전부 우연일 것이다. 오늘 하루 종일 유달리 그의 머리 위로만 화분이며 무거운 물체들이 떨어진 것도 전부 우연일 것이다.

보석의 저주 따위는 절대 아니다.

우연이다.

“저주 같은 게 어디 있냐고. 하하하…….”

짐짓 크게 웃은 프레데릭은 주위를 몹시 경계하며 침실로 올라갔다.

우연은 또다시 반복되었다. 한밤중에 우연히 바람이 세게 불었고 우연히 창이 깨져서 우연히 깨진 유리 파편들이 그의 침대까지 날아들었다.

“살다 보면 이런 우연도 있는 거야. 인생은 재미있어.”

프레데릭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뭔가 있다.

라울은 확신했다. 갑자기 프레데릭 근처에 낙하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는 목격자의 증언을 듣고, 프레데릭이 서 있는 곳으로 지붕의 조각상이 굴러떨어지는 걸 직접 목격하고 내린 결론이었다. 프레데릭이 지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손상된 곳 하나 없던 조각상은 기가 막힌 타이밍에 부러지며 떨어졌다.

프레데릭만 한 실력자가 아니었으면 며칠 사이에 죽어도 몇 번은 죽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편적으로 내릴 결론은 하나였다. 프레데릭을 살해하려는 암살자. 그러나 라울은 프레데릭이 며칠 전에 무엇을 낙찰했는지 알고 있었다.

“보석 버리시죠.”

프레데릭은 집무실의 창가에 서서 불안한 듯이 밖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또 위에서 무엇인가 떨어지는 건 아닌지 경계하던 그는 뜬금없는 라울의 말에 반문했다.

“보석을 왜 버려?”

태연하게 대꾸하고 있었지만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머리로 물건이 떨어지면 노이로제가 걸리실 만도 하지.’

라울의 추측에는 한 가지 틀린 점이 있었다. 프레데릭이 낙하 사고만 당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그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에델의 태양을 처분했을 것이다.

“위험하시잖습니까. 에델의 태양을 가지게 되신 날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닙니까? 목격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는데 암살자가 날 노리고 있는 것 같다.”

“참신하지 못한 변명이십니다.”

“…….”

그래도 프레데릭은 보석의 저주라는 걸 인정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라울이 계속 쳐다보는 게 느껴져졌지만 무시했다. 이제 와서 보석 때문에 저주를 받고 있다는 걸 어떻게 인정하겠는가.

‘저주 따위에 지는 것도 싫고 말이야.’

그는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걸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햇볕을 쬐는 척하며 창틀에 몸을 기대었다.

“암살자가 아니라면 실수로 떨어트리는 사람이 있는 거겠지. 세상에 저주 같은 게 어디 있…… 으악!”

“프레데릭 님!”

쿠웅, 텅!

크게 놀란 라울이 외치는 소리가 창틀이 무너져 떨어지는 굉음에 섞였다. 창틀과 함께 창밖으로 곤두박질칠 뻔하였다가 간신히 벽을 붙잡은 프레데릭이 떨리는 목소리로 웃었다. 먼지로 뿌연 창밖에서 사람들의 놀란 비명과 웅성거림이 올라왔다.

“부, 부실 공사로군. 하하하하…….”

라울은 입을 쩍 벌린 채 말도 못 꺼내고 있었다. 바로 코앞에서 프레데릭이 큰 부상을 당할 뻔하였으니 충격이 더 컸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그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를 겨우 꺼냈다.

“메, 메이어 경에게 에델의 태양을 진짜 선물하실 겁니까?”

“……세공사에게는 우선 낙찰 받은 다른 보석으로…….”

결국 간접적으로 보석의 저주라는 걸 인정해 버린 프레데릭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로젤린에게는 말하지 마라. 휩쓸릴까 봐 일부러 며칠 동안 만나지도 않고 있으니까. 걱정을 끼치기는 싫다.”

“알겠습니다…….”

라울도 간신히 대답했다.

일단 그 자리는 물러나왔으나 나중에 냉정을 회복한 라울은 이사벨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저주이든 암살자이든 프레데릭이 큰 위험에 처했는데 로젤린에게 함구하는 건 옳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프레데릭의 위험은 이사벨의 입을 건너서 로젤린에게 전해졌다.

어쨌든 로젤린에게는 말하지 말라는 프레데릭의 명령은 지켰다.

로젤린이 이사벨의 방문을 받은 건 오후 훈련이 막 끝났을 시간이었다. 현재 로젤린은 프레데릭을 배신하고 죽은 사무엘을 대신하여 아이기스 나이트의 정기사이자 제1기사대의 기사대장으로 승진했다. 기사단의 누구도 견주지 못하는 출중한 실력뿐만이 아니라 전쟁 중에 드러난 지휘 능력까지 고려된 인사였다.

기사단에도 로젤린과 프레데릭의 관계는 공공연한 소문이었다. 동료들은 로젤린을 어떻게 대우하면 될지 고민했고 그들답다면 그들다운 단순하고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결혼해서 정식으로 대공 부인이 되기 전까지 로젤린은 우리의 동료 기사다!’

실제로도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로젤린은 동료들의 배려가 고마웠다.

메이어 백작이며 후에는 대공 부인이 될 그녀가 프레데릭 휘하의 일개 기사로 오랫동안 남아 있을 수는 없다. 이후의 어떤 모습으로 어떤 위치에 서게 되든 그녀 자신의 본질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로젤린 메이어는 아이기스 나이트의 기사대장으로서의 직분에 충실한 기사였다.

여전히 기사단의 기숙사에서 머무르고 있는 그녀는 바빠서 만나기 힘들다는 프레데릭의 변명을 의심하지 않았다. 보석의 저주 때문에 고초를 겪고 있으리라는 상상은 하지도 못했다.

“에델의 태양이라면 저주를 받기로 유명한 보석이 아닙니까? 프레데릭이 왜 알면서 산 거죠?”

프레데릭은 보석을 수집하는 취미나 욕심이 없다. 당연히 나올 질문이었는데 이사벨이 어색하게 미소했다.

“전하께서 굳이 보석을 사신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요?”

애매하게 흐린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은 로젤린은 얼굴을 조금 붉혔다. 프레데릭이 저주라는 불길한 소문까지 무릅쓰고 보석을 매입할 이유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하나뿐이다.

쑥스러워진 로젤린은 슬그머니 말문을 돌렸다.

“니스 백작의 소유인 줄 알았는데 어느 틈인지 풀렸나 봅니다.”

“파산하는 바람에 가산을 거의 대부분 처분했다고 해요. 로젤린도 에델의 태양에 관심이 있었어요?”

“6년 전 에델의 태양이 시장에 오랜만에 나왔을 때 후원자 한 분이 보석을 사려고 니스 백작과 경합이 붙었거든요. 결국 실패하신 걸 몹시 아쉬워하셨는데 정작 니스 백작은 6년 만에 파산이라니…….”

니스 백작이 파산한 이유는 달리 있겠지만 수백 년 동안 번성하던 부유한 백작가가 에델의 태양을 매입하고 6년 만에 파산하였다는 사실 자체는 좀 오싹했다. 게다가 프레데릭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 아닌가.

‘그런데 조금 이상한걸.’

후원자가 보석을 매입하기 위해 많은 조사를 했기에 로젤린도 주워들은 이야기가 많았다.

에델의 태양을 소유한 주인이 불행해지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평범하게 살았던 주인은 더 많았다.

저주를 믿지 않았던 그녀의 후원자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재정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해서 에델의 태양을 구입하는 바람에 불행해지는 게 아니냐고. 로젤린도 어느 정도 동감이었다. 본래 에델의 태양처럼 오래되고 유명한 보석에 그럴 듯한 소문이 붙으면 가격이 더 치솟는 법이다. 과거에 보석을 소지하였던 사람이나 상인이 그럴듯하게 날조하였을 가능성이 컸다.

소문이 커지면 커질수록 사람들은 아주 약간의 불행도 크게 과장하여 소문에 붙였다. 소문이 커지는 것과 에델의 태양의 몸값은 비례하여 올라갔다.

소유하였던 사람들의 불행은 죽음과 병, 파산 등등 다양했다. 자식이 앓아눕자 저주를 무서워하여 바로 에델의 태양을 팔아치운 사람도 있었다. 니스 백작처럼 몰락할 때까지 에델의 태양을 처분하지 못하고 궁지에 몰려 죽은 사람도 있었다.

다양한 불행이 에델의 태양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러나 그 많은 그림자 중, 프레데릭이 겪고 있는 연이은 사고는 없었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 봐도 선례를 찾을 수가 없었다. 보석을 갖고 죽은 사람은 병사하거나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였던 게 전부였다. 프레데릭이 겪고 있는 일처럼 집요한 살의를 표출한 적은 없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선례도 물론 있겠지만……. 프레데릭처럼 연이어서 수난을 당하는 불행이라면 이미 소문이 났을 거야.’

이사벨이 돌아간 뒤에도 로젤린은 생각에 잠겼다.

‘보석을 매입한 타이밍에 우연히 프레데릭을 노리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은 어느 정도나 될까.’

이 가설도 문제가 있었다. 프레데릭이 며칠 내내 생명의 위험에 노출될 만큼 내성과 대공저의 경계는 허술하지 않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흐름이 저주로 넘어갔다. 이 기막힌 우연과 불가능한 생명의 위협을 한번에 해명하는 유일한 이유는 저주뿐이었다.

‘이렇게 고민만 하다가 더 불행해지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깊고 깊은 고민에서 허우적거리던 로젤린은 결국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에서 아무리 혼자 생각해 봤자 해결되는 것도 없고 해결책을 찾을 수도 없다. 직접 부딪혀 보는 수밖에. 지금까지는 프레데릭이 요행히 치명상을 피하고 있다지만 그가 계속 위험에 노출되는 건 바라지 않았다.

프레데릭이 에델의 태양을 갖게 된 지 5일만이고, 로젤린이 프레데릭의 얼굴을 보는 것도 5일만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프레데릭을 찾으러 집무실이 아니라 내성 전체를 헤매고 다녀야 했을 텐데.’

이젠 집무실에만 오면 바로 프레데릭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자신만이 아니라 프레데릭도 확실히 변했다. 로젤린은 잠시 저주에 대한 고민을 잊고 미소를 지었다.

“프레데릭, 접니다. 지금 들어가도 되죠?”

인사를 했지만 대답 대신 돌아온 건 쿠웅 하는 굉음이었다.

놀란 로젤린은 반사적으로 문을 벌컥 열었다. 그녀가 목격한 것은 바닥에 쓰러진 무거운 책장과 책장에서 불과 몇 ㎝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프레데릭의 모습이었다.

“오, 오랜만이야.”

프레데릭이 진땀을 흘리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책을 너무 많이 넣었더니 책장이 조금 약해진 모양이야. 하하…….”

“네에…….”

약해진 책장이 하필이면 프레데릭을 겨냥하고 쓰러졌다는 말인가. 로젤린은 책장이 토해 낸 책들로 난잡한 바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암살자가 숨었다가 책장을 밀쳤을 만한 공간은 당연히 보이지 않았다.

일단은 프레데릭의 곁에서 두고 보아야 할 듯하다.

“데이트 신청하러 왔습니다. 가엔라인 경에게 추천을 받았는데 음유시인이 아주 멋지게 노래하는 식당이 있대요. 오늘 저녁 시간 나죠?”

“조,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내가 요즘 바쁜……. 아! 가까이 오지 마!”

로젤린이 다가가자 프레데릭이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연신 주변을 둘러보며 위험한 물건이 가까이에 있는지 살피고 있었다.

“…….”

그녀까지 위험에 처해지는 걸 막으려고 한다는 건 로젤린도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가까이 오지 말라는 얘기를 직접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로젤린의 표정을 알아차린 프레데릭이 갑자기 한없이 어색한 기침을 했다.

“내가 감기에 걸려서 그런 거다.”

“상관없습니다.”

상관없다. 프레데릭의 곁이 위험하다는 것도.

로젤린은 성큼성큼 발을 내딛었다. 프레데릭이 주춤거리며 물러섰지만 두 사람은 곧 손을 잡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섰다. 당황하던 프레데릭이 경계심을 곤두세우며 주변을 살피는 기척이 느껴졌다. 로젤린도 긴장을 삼켰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예고 없이 프레데릭을 노리며 시시때때로 덮치던 위험이 침묵했다. 제법 긴 시간이 흐를 때까지.

저주인가. 우연의 일치인가. 의문은 여전히 남았지만 그녀가 취해야 할 행동은 명확했다. 로젤린은 프레데릭의 손을 잡았다.

“데이트하러 가요.”

의심스러운 눈으로 천장을 살피던 프레데릭이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바바라가 추천한 식당은 고급 레스토랑은 아니었지만 활기찬 분위기였다. 조촐하게 차려진 무대에서 음유시인이 노래하고 사람들은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새로운 노래를 리퀘스트하고 돈을 주면 음유시인과 악단은 과장된 연기를 하며 넙죽 절했다.

시끌벅적한 소란과 노랫소리를 즐기며 식사와 술을 즐기는 식당이었다. 평민으로 자라고 현재도 잠행을 주로 다니는 프레데릭의 취향에 딱 맞는 곳이었다. 로젤린도 좋아하는 분위기였다. 요리의 맛이야 대공저의 요리사와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사람이 살아간다는 생기가 넘치는 분위기는 언제나 즐거웠다. 프레데릭과 만날 핑계를 대기 위해 바바라에게 추천받은 식당이었지만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예전이라면 프레데릭도 즐겼을 테지만.’

로젤린은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넣고 끓인 스튜를 뜨며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같은 스튜를 먹는 프레데릭은 요리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뻣뻣하게 긴장한 얼굴은 그가 사방을 경계하고 있다는 걸 뜻했다. 로젤린도 완전히 방심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프레데릭이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긴장하는 것도 걱정이었다.

“천장이 무너지는 걸 걱정하면서 올려다보지 않아도 됩니다. 저주가 무서워요? 저는 당신과 함께 있다면 저주 따위는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당신은요?”

조용히 말을 던졌다. 프레데릭의 시선이 비로소 로젤린에게 돌아왔다.

“당신과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무런 일도 없었잖아요.”

이사벨이 전해 준 라울의 설명에 따르면 거리를 걸을 때 프레데릭의 머리를 부수기에 적절한 무게의 물체들이 두어 개 떨어졌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느닷없이 창틀이나 화분이 떨어지는 일도 없었고, 가게의 간판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일도 없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거리였고 평범한 데이트였다.

“……그렇군.”

뒤늦게 프레데릭이 작게 웃었다. 상황을 얼버무리기 위한 웃음이 아니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는 로젤린의 입가에도 미소를 번지게 했다.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어. 역시 넌 내 승리의 여신이야.”

느끼한 말을 하는 걸 보니 평소의 프레데릭으로 회복한 모양이다. 그는 겨우 식사다운 식사를 시작했다. 테이블에는 새로 주문한 맥주잔이 놓여졌다. 프레데릭이 맥주잔을 단번에 벌컥벌컥 비웠다.

“술을 마신 것도 5일 만에 처음이야.”

“저주의 기한이 5일인 건 아닐까요? 거짓말처럼 아무런 일도 없잖아요.”

그녀의 장난기 어린 질문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끄덕하던 프레데릭이 문득 한숨을 쉬었다.

“……에델의 태양을 낙찰한 걸 언제 알았나? 저주 따위는 무시하고 근사하게 세공해서 주고 싶었는데 다 틀렸어.”

“지금부터라도 모르는 척하겠습니다.”

“받으면 깜짝 놀라는 척해 줘야 한다.”

“미리 연습도 할게요.”

진지하게 대화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듯 소란스러운 식당의 한가운데에서도 서로의 목소리는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확히 서로에게 닿는다. 서로의 존재감으로 가득 차 있기에 저주도 범접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낯간지러운 상상을 하면서 로젤린은 미소했다. 이대로 끝나 웃으면서 넘길 수 있는 해프닝으로 마무리되길 바랐다.

식사를 끝내고 식당을 나올 때까지 우려하였던 일은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프레데릭이 겪었던 일들이 꿈이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평화로웠다. 위험도 발생하지 않았고 식사도 괜찮았고 분위기도 즐거웠다. 평범한 식사와 평범한 저녁이었다.

저주의 시간은 이렇게 끝났을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네가 저주를 풀어 줬다고 믿고 싶군. 하지만 역시 예물은 다른 보석으로 해야겠어.”

못내 걱정이 되는 표정이었다. 5일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잘 만큼 시달린 프레데릭이었으니 로젤린에게 선물하는 게 꺼려지는 건 당연했다. 차라리 지금 자신이 먼저 저주를 받은 게 잘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로젤린과 프레데릭은 산책을 하며 광장을 거닐었다. 저주라는 화제가 있는 대화는 여느 때보다 풍성했다. 로젤린은 이사벨에게 전해들은 프레데릭의 위험이 일부분이었다는 걸 알고 혀를 내둘렀다.

“솔직히 반신반의했었는데 저주라는 게 진짜 있었나 봅니다.”

“하하……. 난 아직도 믿기지 않아.”

프레데릭도 짐짓 한탄했다. 지금에야 로젤린과 농담처럼 얘기할 수 있지만 지난 5일 동안은 마음을 한순간이라도 편하게 한 적이 없었다.

그의 한숨은 번잡한 광장의 소란에 묻혀 사라졌다. 겨울이 되면 분수대도 작동을 중지하고 근처에서 노는 아이들도 적어질 테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발트란에는 아이들의 활기도 흘러넘쳤다.

두 사람은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길을 돌아서 광장의 구석에 섰다. 광장이 주황색으로 타들어가는 저녁놀로 물들었다. 저녁놀을 받은 프레데릭의 얼굴도 평소보다 짙었다.

로젤린은 무심코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며칠 동안 조금 야위었을까. 눈밑에 다크서클이 생긴 것 같기도 하다. 엄지로 눈가를 문지르며 뺨에 살짝 키스했다. 다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를 잃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에델의 태양은 어떻게 할 건가요?”

프레데릭도 그녀에게 팔을 두르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대로 소지하기도 꺼림칙하고 남에게 되파는 것도 꺼림칙하니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버리는 건 어떨까? 검은 황야를 고려 중이야.”

“좋은 생각입니다. 검은 황야에 버린다면 마수의 먹이가 되거나 마계로 흘러들어갈 가능성도 있겠어요.”

“저주받은 보석에게는 알맞은 엔딩이군.”

처분할 방법을 정하고 나니 마음도 홀가분해졌다. 돌아가는 즉시 검은 황야로 말을 달려서 에델의 태양을 버릴 작정이었다. 그동안 어디에서 위험이 닥칠지 모르기에 흑염룡을 타지도 못했다. 녀석도 몸이 근질근질할 테니 좋은 운동이 될 것이다.

마침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꼬치구이를 파는 노점이 성황 중이었다.

프레데릭은 로젤린과 잠시 떨어져서 꼬치구이를 사러 갔다. 익숙하게 꼬치구이를 사고 동화를 내미는 젊은 남자가 대공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상인은 바쁘게 참새 고기를 굽고 소스를 발랐다.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광장에 번지며 사람들을 하나둘씩 유혹했다.

아이들은 광장에서 뛰어노는 한편 부모님에게 꼬치고기를 사달라고 졸랐다. 프레데릭과 로젤린처럼 다정하게 산책하는 연인과 부부도 있었고 웃음을 터트리는 친구들도 보였다.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평화로운 하루였다.

‘두 번 다시 저주 받았다는 물건은 손도 대면 안 되겠다.’

프레데릭은 결심을 굳히며 로젤린이 기다리고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야! 공 잡아!”

“너무 높게 던졌잖아! 어떻게 잡으란 거야!”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외쳤다.

“아저씨! 공 잡아 주세요!”

아무래도 자신에게 외치는 것 같아서 프레데릭은 등을 돌렸다. 가까이로 공이 날아들고 있었다. 아이들이 던진 공이다. 한 손으로도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는 속도였다.

그러나 프레데릭이 잡기 위해 손을 내민 순간 갑자기 공에 가속도가 붙었다. 공은 마치 대포에서 발사된 포탄처럼 묵직하고 빠르게 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

몸서리처지도록 익숙한 느낌이었다. 5일 내내 그를 노렸던 바로 그 느낌이다.

기겁한 프레데릭은 다급히 몸을 틀었다. 날아든 포탄, 아니 공은 그의 코앞을 스쳐지나가며 분수대에 명중했다.

쿠아아앙!

아이들이 공놀이에 쓰는 공과 돌로 조각한 분수대의 조각상이 부딪혔을 뿐인데 마치 포탄이 명중한 듯한 굉음이 울렸다. 동시에 조각상이 쩌적거리며 갈라졌다. 공에 명중당한 충격으로 갈라진 조각상이 펑 하고 박살이 났다. 가장 큰 파편이 프레데릭을 노리고 날아든 건 당연한 결과였다.

이 모든 게 한순간에 벌어졌다.

“방금 분수대가 박살 난 거야?”

“엄청 큰 소리는 뭐지?”

너무나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사람들은 허둥지둥 당황했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던진 공 때문에 조각상이 박살이 났다는 걸 믿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꿈을 꾸는 게 아닌지 눈을 비비는 아이도 있었다.

조각상의 파편 사이로 퐁퐁 솟아나는 물줄기를 맞으며 프레데릭이 로젤린을 돌아보았다.

“……저주가 안 끝난 모양이다.”

“…….”

아연실색한 로젤린은 어떤 대답을 하면 될지 알 수가 없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 * *

한 명의 여자가 있었다. 부유한 가문의 영애였다.

한 명의 남자가 있었다. 몰락한 가문의 기사였다.

여자와 남자는 가문의 명예와 부귀를 위해 정략혼으로 맺어졌다. 비극은 여자가 남자에게 첫눈에 반하면서 잉태되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지만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가 사랑한 건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엇갈리는 마음속에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태양처럼 빛나는 남자에게 지참금으로 줄 보석을 안고 기다렸다. 찬란한 태양의 빛을 머금은 보석은 마치 남자의 분신 같았다. 여자는 보석을 보며 남자를 생각하고 그리워했다.

그날은 몹시 화창했다.

새롭게 맺어질 부부를 축하하는 것처럼 푸른 하늘로 태양이 떠올랐다. 남자의 마음이 비록 다른 곳에 있더라도 그의 아내가 되는 사람은 그녀였다.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남자와 결혼하는 사람도 그녀였다. 언젠가 남자도 그녀의 마음을 받아 줄 때가 올 것이다.

그것만이 그녀가 웃으며 결혼식장에 서 있게 하는 힘이었다.

여자는 기다렸다. 남자가 그녀에게 줄 결혼반지를 갖고 모습을 나타내게 될 순간을.

태양이 서쪽 하늘로 넘어가고, 동쪽 하늘로 떠올라 서쪽으로 넘어가고, 또 서쪽으로 넘어가고, 또 서쪽으로 넘어갈 때까지.

남자는 가문의 명예와 부귀를 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선택했다. 여자가 결혼식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남자는 연인과 도피했다.

보석은 더 이상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지 않았다.

태양에 닿을 것처럼 높고 높은 탑의 꼭대기에서 여자는 보석을 품에 안고 몸을 던졌다. 한때는 태양과 같은 광휘로 빛나던 보석은 이제 그녀의 피로 물들었다.

어느덧 태양이 지고 거리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광장에서의 사건 이후 두 사람은 서둘러 프레데릭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다행히 돌아오는 도중에는 아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프레데릭은 책상 서랍의 깊숙한 곳에 넣었던 보석함을 꺼냈다.

에델의 태양은 인공적인 램프의 불빛을 받아도 아름답게 빛났다. 그러나 프레데릭에게는 더 이상 에델의 태양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손을 대는 것조차 꺼림칙하고 소름이 돋았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왠지 붉은 얼룩이 더 커진 느낌이야.’

반면에 로젤린은 신중하게 보석을 관찰했다.

“무척 아름답습니다.”

“그래봤자 저주받은 보석이지만 말이지.”

“저주 같은 게 있다고는 믿기지 않아요.”

로젤린은 순수하게 감탄하며 보석을 들었다. 이 보석을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마음이 훈훈하며 차분하게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어루만지니 마치 인간의 체온처럼 따스한 온기마저 느껴졌다. 미리 정체를 알지 못했다면 사람을 홀리는 치명적인 마력으로 저주를 뿌리는 보석이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보석이 프레데릭을 죽이려 한 걸까?’

로젤린은 보석을 약간 위로 올렸다. 램프의 빛이 투과되며 붉은 얼룩이 짙어졌다. 보석의 빛을 훼손하는 것만 같은 얼룩이 순간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븐 경.]

어디에선가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애달픈 흐느낌이 부드럽게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 사……. 안 돼요…….]

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알지 못하는 여자의 흐느낌이라는 이유로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녀의 흐느낌은 절박했고 필사적이었다. 로젤린은 흐느끼는 소리를 좇으며 물었다. 누구입니까. 당신은 누구이기에 애달프게 저를 찾는 건가요.

[당신……. 사…….]

“로젤린!”

프레데릭의 다급한 외침이 울렸다.

보석을 손에 쥔 채 의식이 몽롱하게 흐려지던 로젤린은 간신히 환청에서 깨어났다.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프레데릭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로젤린, 너…….”

“예?”

무심코 반문한 그녀는 멈칫했다. 볼이 축축하고 뜨거웠다.

“이상하네요. 왜 눈물이 안 멈추지…….”

당황하여 손등으로 눈 밑을 문질렀지만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끊이지 않고 뚝뚝 떨어지는 눈물만큼 그녀의 내면도 요동쳤다. 슬픔과 원망이 격하게 소용돌이쳤다. 그리고 소용돌이를 덮어 누를 만큼 커다란 애정이 몰려와 눈물이 되었다.

영문도 모르고 흐느끼는 로젤린을 프레데릭이 꽉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가 축축해질 때까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보석 때문인가?”

목까지 먹먹하여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로젤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데릭의 표정이 굳었다. 저주이든 뭐든 그가 혼자 감당하는 것이라면 문제없었다. 하지만 로젤린에게도 해가 된다면 얘기가 달랐다.

“미안하다. 이런 보석은 사는 게 아니었어. 당장 검은 황야에 버리고 오마.”

에델의 태양은 살아있는 사람을 저주하여 죽일 만큼 힘이 있다. 마수만이 존재하는 황폐한 땅에 보석을 버리겠다는 걸 인식하면 저주의 위험성은 더 커질지도 모른다.

‘상관없지.’

프레데릭은 냉정한 시선을 보석에 꽂았다. 로젤린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기 전에 진작 포기하고 처분했어야 했다. 지금이야 그녀가 이유 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뿐이지만 자신에게 닥치던 위험이 로젤린을 겨냥하지 않으리란 장담은 하지 못한다.

그녀의 눈물이 본심이 아님을 알면서도 가슴이 쓰라렸다. 이 보석은 로젤린의 눈물을 대가로 바칠 만큼 가치가 없었다.

“……잠시만요.”

에델의 태양을 보석함에 다시 넣으려는 프레데릭을 로젤린이 붙잡았다.

“보석에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주가 있지.”

“아니요, 저주만 있는 게 아니에요.”

로젤린은 방금 자신이 환청과 환각으로 목격하였던 것을 표현하기 위해 적당한 단어를 찾았다.

“아마…… 유령?”

“그럼 더 빨리 처분해야겠군.”

그녀의 말을 듣고도 프레데릭은 결심을 돌리지 않았다. 로젤린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보석의 소문이 진짜는 아닐지 몰라도 최초로 보석을 소유하였던 여인이 자살을 한 건 사실입니다. 처분하기 전에 확실히 확인하고 싶어요.”

“자살한 유령이 보석에 깃들어 있다고 해도 어떻게 확인을 한다는 건가? 이전에도 보석의 저주를 풀기 위해 마법사들이 몇 번 고용되었지만 소용이 없다고 알고 있어.”

“이번에는 될 겁니다.”

로젤린은 대답했다. 근거와 이유는 없지만 이번에는 보석의 유령, 어쩌면 약혼자에게 배신당하고 자살한 여인일지도 모르는 그 유령이 응답하리란 확신이 들었다. 여인의 흐느낌은 지금 돌이켜 보아도 가슴이 아릿하게 아플 만큼 절실했다.

프레데릭은 이유를 묻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확고한 뜻이 있는 걸 재차 확인한 그는 항복했다.

마법 협회에 의뢰를 하고 강령술을 할 수 있는 마법사가 고용되기까지는 이틀이 걸렸다. 대공이 저주 때문에 마법사를 고용한다고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길 수는 없었으므로 일은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그동안 프레데릭은 그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모든 물건들을 싹 정리한 창고에 스스로 갇혔다. 침대도 없었고 식탁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보석함 하나뿐이었다. 벽이나 천장을 무너트리지 않는 한 보석이 저주를 발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가 옆에 있으면 보석이 당신을 죽이려 하지 않는 느낌입니다.”

로젤린의 의견에 프레데릭도 어느 정도 동의했다.

실제로 그녀와 있을 때는 단 한 번의 위협이 없다가 거리를 두자마자 그를 죽이려 했다. 또한 그녀는 보석과 이유를 모르는 교감을 나누기도 했다.

“보석이 변덕을 부릴 수도 있지.”

그는 창고의 창문 밖에 서 있는 로젤린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지금 내 모습이 대단히 우스꽝스럽다는 건 알아.”

다른 사람이 보기엔 프레데릭은 보석의 저주가 무서워서 숨어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로젤린은 그가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그녀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창문 너머의 프레데릭에게 싱긋 미소 지었다.

“갇혀 있는 걸 보니까 색다른 플레이 같아서 재미있어요.”

“……정말?”

장난스러운 그녀의 대답에 프레데릭도 솔깃하는 표정을 지었다. 곧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치며 웃었다.

이틀이 지나 우여곡절 끝에 마법사가 도착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에델의 태양이군요. 이제까지 4명의 마법사가 이 보석의 강령술에 실패했는데 저에게도 기회가 내려오게 되었다니 기쁩니다.”

마법사의 눈동자는 도전에 대한 의욕과 기대감으로 빛났다.

통성명을 마친 중년의 마법사는 곧장 창고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으슥한 창고에 있는 사람은 프레데릭과 로젤린, 마법사 세 명 뿐이었다. 아니, - 로젤린의 말에 의하면 - 보석의 유령도 있다.

마법진은 보석을 중심으로 복잡하게 그려졌다. 마법에 문외한인 두 사람은 묵묵히 마법사의 행동을 보기만 했다.

로젤린은 유령이 슬퍼하고 있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그녀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계속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프레데릭으로서는 믿기가 힘들었다.

남자에게 배신당해 죽었으며 현재에도 사람을 저주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있는 유령이 선량할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지 않을까. 피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여기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 하지는 않을지 걱정이었다. 마수를 사냥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유령을 사냥하는 건 어떻게 해야 되나.

‘신관이라도 한 명 부를걸 그랬나.’

로젤린이 그의 염려를 아는 것처럼 어깨에 기대며 속삭였다.

“괜찮아요. 악의는 없는 유령일 겁니다.”

곧이어 동굴이 울리는 것처럼 웅웅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법진이 반응하고 있었다. 창고 안의 공기가 소용돌이치듯이 세차게 술렁였다. 마법진으로부터 몰아치는 바람으로 인해 눈을 뜨고 있는 것도 힘들었다.

“성공한 건가?”

겨우 바람이 멎었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시선을 앞으로 던진 프레데릭은 크게 놀랐다. 마법진의 정중앙, 보석이 놓인 곳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화려하고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웠으나 평범한 여자는 절대 아니었다. 반투명하고 창백하며 다리 부분이 흐릿한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누가 봐도 유령이었다.

“오오! 내가 드디어 성공했어!”

“……!”

자신의 강령술이 성공한 마법사는 으하하하 웃으며 양 팔을 들어 올렸고, 프레데릭은 진짜 유령이 나타나자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로젤린만 침착하게 유령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이었습니까?”

양손을 앞에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스르르 시선을 움직였다. 고개를 드는 동작마저 연기처럼 가벼워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했다.

유령의 시선이 로젤린에게 향한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맺혀 있던 눈물이 또르륵 떨어졌다.

[스티븐 경.]

실체가 없는 그녀의 몸이 연기처럼 허공을 흐르며 로젤린에게 향했다. 반사적으로 로젤린을 보호하며 앞을 가로막으려는 프레데릭을 로젤린이 조용히 만류했다. 이윽고 가까이 다가온 유령이 로젤린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으나 반투명한 손은 로젤린에게 닿지 못하고 통과할 뿐이었다.

유령이 탄식했다.

[이런 몸이 되어서 당신을 포옹하지도 못하는군요.]

긴 속눈썹을 내리깔면서 눈물을 훔치는 그녀의 모습은 환청으로 들었을 때보다 더욱 애틋하였다. 하지만 그때처럼 로젤린의 마음을 크게 흔들지는 못하였다.

‘보석을 직접 만졌으니까. 내 마음에도 직접 이 유령의 심정이 전해졌었나 봐.’

마치 자신이 겪는 것처럼 큰 슬픔은 아니었으나 슬퍼하는 유령을 안쓰럽게 여기기에는 충분했다. 로젤린은 부드럽게 미소했다.

“스티븐 경이 당신의 약혼자였습니까?”

[그렇습니다. 전 마가렛이라고 해요.]

유령이 눈물을 닦으며 로젤린을 애절하게 올려다보았다. 옆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프레데릭은 왠지 언짢아졌다.

‘왜 이 유령은 내 앞에서 로젤린을 연인을 바라보듯이 보는 거야.’

의문은 바로 해결되었다.

[죄송해요. 당신이 스티븐 경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너무 닮았어요. 내 사랑과 너무 닮아서 자꾸만 당신을 착각하게 되네요…….]

“…….”

다행히 로젤린에게 해를 끼칠 유령은 아닌 듯하다. 대신에 언짢음은 커졌다. 다른 사람이 자기 애인을 연인 보듯 하는 걸 달가워할 남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어쨌든 유령이다. 프레데릭이 흥미진진하게 구경 중인 마법사에게 유령을 퇴치할 방법을 몰래 질문하려던 때, 로젤린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직도 당신을 배신한 스티븐 경을 원망하십니까? 그래서 원혼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해치시는 건가요?”

정중한 어조였으나 애꿎은 사람을 저주하는 마가렛을 책망하는 목소리였다. 마가렛이 당황하며 얼굴을 감쌌다. 만약 유령도 얼굴이 붉어질 수 있다면 지금 분명히 그녀의 뺨은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아, 아니에요. 저는 이승에 미련이 남은 원혼은 맞지만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힌 적은 없어요. 제가 저주를 한다는 건 후대에 덧붙여진 소문이고요]

“하지만 저는 분명히 목격했습니다. 며칠 사이에 있었던 일들도 당신의 저주가 아니었다는 겁니까?”

마가렛은 고개를 푹 숙였다.

[……저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스티븐 경이, 아니 스티븐 경을 너무 닮은 당신이 저 남자와 다정하게 지내는 걸 보니 참을 수가 없었단 말이에요! 전부 저 남자 때문이에요!]

화살은 갑자기 프레데릭에게 날아왔다. 마가렛은 프레데릭에게 삿대질까지 하며 화를 냈다. 뜬금없이 저주가 전부 자기 탓이라는 매도를 당한 프레데릭은 어이가 없었다.

“이봐, 마가렛 양.”

[당신 따위에게 불릴 이름이 아니야!]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내 잘못이라는 건가?”

[몰라서 물어? 스티븐 경에게 꼬리치지 마!]

마가렛은 프레데릭의 뺨을 때리지 못한다는 걸 매우 아쉬워하는 태도로 발을 동동 굴렀다.

[스티븐 경! 저 남자는 안 돼요!]

“……왜 안 됩니까?”

로젤린도 황당했다. 강령술까지 써서 보석에서 불러낸 유령이 갑자기 프레데릭에게 화를 내면서 헤어지라고 강요할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심지어 이 유령과 자신은 초면이다. 유령이 먼저 그녀를 알게 되었다고 해 봤자 겨우 며칠 전이었다.

차라리 소문처럼 보석의 소유자들을 저주한다는 게 납득이 쉬울 것 같다.

[저 남자는 남자잖아요!]

여전히 마가렛은 프레데릭을 삿대질하며 엉뚱한 화를 내고 있었다.

과거의 약혼자를 닮은 로젤린에게 이입을 하는 건 이해되었다. 하지만 화를 내는 이유는 이해되지 않았다. 프레데릭은 남자가 맞다. 남자라서 싫어한다는 걸 보니 혹시 마가렛은 남자 혐오증인가? 그런데 스티븐 경도 남자잖아? 혹시 자신처럼 중성적인 외모의 여자였나? 마가렛은 동성애자? 진지한 고민에 빠진 로젤린에게 마가렛이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호소했다.

[당신이 여자와 야반도주를 했다면 원혼이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스티븐 경, 당신이 저를 버린 것도 당신의 가문을 배신한 것도, 전부 당신을 꼬신 그 남자 탓이에요! 남자는 안 돼요! 여자를 만나라구요!!]

“…….”

어이없어하던 프레데릭도, 황당해하던 로젤린도, 흥미진진해하던 마법사도 모두 침묵했다.

변해 버린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하고 혼자 화를 내던 마가렛도 뒤늦게야 당황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뭐예요? 왜 날 그렇게 봐요?]

“…….”

[약혼자가 남자와 야반도주해서 버려진 여자 처음 봐요?!]

물론 처음 보는 건 맞았지만.

며칠 내내 저주에 시달렸던 스트레스와 피로감이 갑자기 프레데릭을 덮쳐왔다. 그 망할 저주의 원인이 겨우 이거였다니.

“당신 약혼자랑 눈 맞았다는 남자가 날 닮았나?”

[그건 아니지만 어차피 다 똑같은 호모잖아!]

“…….”

유령만 아니었다면 벌써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입을 열 때마다 작년의 흑역사가 떠오르고 있는 프레데릭은 민망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민망함으로 얼굴을 붉힌 프레데릭의 모습을 오해한 마가렛은 더 화를 냈다. 결국 로젤린이 상황을 수습했다.

“마가렛 양. 한 가지 오해를 하고 계신데 저는 일단 스티븐 경이 아닙니다. 제 이름은 로젤린 메이어입니다.”

[당신이 스티븐 경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잠깐, 성함이 뭐라고요?]

“로젤린 메이어입니다.”

당연히 여자 이름이다.

남자에게 여자 이름이 붙여졌다는 걸 이상하게 여기며 고개를 갸웃하는 마가렛에게 로젤린은 침착하게 한마디했다.

“그리고 여자고요.”

[……네?]

“여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 사람의 약혼녀예요.”

마가렛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연신 로젤린의 아래위를 훑었다. 남자와는 달리 목젖이 튀어나와 있지 않은 밋밋한 목과 불륨감 있는 몸매를 몇 번이고 거듭해서 확인한 마가렛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죄, 죄, 죄, 죄송해요! 죄송해요!!]

어쩔 줄 모르고 연신 머리를 숙이며 사과하는 그녀에게 프레데릭이 뻔뻔하게 끼어들었다.

“어떻게 로젤린을 남자라고 착각할 수가 있나? 기가 막히는군.”

[죄송해요!]

“아무리 유령이 되었다고 해도 로젤린의 아름다움을 몰라본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죄송해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마가렛은 무조건 잘못했다고 사과했고, 프레데릭은 흑역사의 트라우마를 아주 조금 해소할 수 있었다.

로젤린이 어색하지만 부드럽게 미소했다.

“오해가 풀렸다니 다행입니다.”

[죄송해요, 스티븐 경…….]

“저는 당신의 약혼자가 아니에요, 마가렛 양.”

[……그렇죠.]

부드러운 태도였으나 로젤린은 단호하게 자신에게 겹쳐 보이는 약혼자의 존재를 부정했다.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마가렛은 어딘지 힘 빠진 얼굴로 일어났다. 프레데릭에게 겹치던 스티븐의 연인도 부정당했고, 로젤린에게 겹치던 스티븐도 부정당했다. 긴 세월 동안 그녀를 원혼이라는 이름으로 보석에 얽매여 두고 있던 감정과 존재가 이제야 부정당했다.

마가렛은 스티븐과 스티븐의 연인이 아니라, 로젤린과 그녀의 연인 프레데릭을 바라보았다.

[……이젠 제가 정말 잠들어야 할 때가 되었나 봐요. 스티븐은 이미 이 세상에 없는데 혼자 남아서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고 있었네요.]

얽어매고 있던 감정이 부정당하며 끊어지자 마가렛의 몸은 차츰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이제야 비로소 그녀가 죽음의 안식에 접어들게 되리란 직감이 들었다. 사랑에 배신당한 마가렛의 눈동자는 여전히 서글펐다.

[저는 긴 시간 동안 보석에 깃들어 있으면서 작은 힘을 얻었어요. 스티…… 로젤린 님의 약혼자분에게 해를 끼치려 한 것도 이 힘이었어요. 사죄가 되지는 않겠지만 대신 로젤린 님의 행복을 빌어도 될까요?]

로젤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투명하게 흐려지는 마가렛이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당신과 당신의 연인이 항상 축복받는 사랑을 할 수 있기를.

아련하게 흩어지는 목소리가 마지막이었다.

마법진에는 에델의 태양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로젤린은 허리를 굽혀 보석을 들었다. 한 점의 얼룩도 없는 옐로우 다이아몬드의 광채가 투명한 빛으로 빛났다.

* * *

마침내 보석의 세공이 완료되었다.

“어때?”

프레데릭이 보석함을 열었다. 과거에 에델의 태양이라고 불리던 옐로우 다이아몬드는 세공사의 손을 거쳐 로젤린을 위한 목걸이와 귀걸이로 재탄생했다. 태양처럼 빛나는 옐로우 다이아몬드를 장식하기 위해서는 부가적인 보석이 필요 없었다. 심플한 디자인이기에 보석의 매력은 더욱 돋보였다. 이 보석에 한때 사람을 저주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붙었다는 건 누구도 쉽게 연상하지 못할 것이다.

“굉장해요…….”

보석함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로젤린은 겨우 한마디 감탄을 했다.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아름다워서 적절히 표현할 단어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프레데릭도 기분이 좋았다. 저주에 시달릴 때는 이러다가 진짜 죽겠다 싶을 정도로 조마조마하긴 했지만 고생을 겪은 보람은 충분했다. 그녀가 걱정할 테니 두 번 저주를 겪고 싶지 않았지만.

목에 걸어 주려는데 겨우 고개를 든 로젤린이 만류했다.

“나중에.”

로젤린의 뺨이 약간 붉었다.

“결혼식 때 웨딩드레스를 입게 되면, 그때 직접 걸어 주세요.”

“당장 결혼하자.”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마주잡는 프레데릭의 어깨를 치며 쑥스럽게 웃었다.

예물도 완성되었고 드레스도 한 벌씩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대공저도 몇 달 뒤에 맞이할 새로운 안주인을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갖추어 가고 있었다. 봄이 되면 정원도 공사가 시작된다.

모든 게 순조롭고 모든 게 행복했다.

로젤린은 프레데릭에게 기대어 앉아 보석함을 만지작거렸다.

“언젠가 저와 당신의 아이에게 이 예물을 물려주게 되겠죠?”

“그때는 아빠가 저주받았다는 쪽팔린 이야기는 생략했으면 좋겠군.”

피식 웃는 프레데릭에게 로젤린도 미소로 대답했다. 나중에 아이가 성장하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궁금해할 나이가 오면 하나하나 알려 줄 것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어머니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은 것도, 자랑하고 싶은 것도 아주 많다.

로젤린은 그날을 기대하며 보석함을 닫았다. 대대손손 축복을 전하게 될 예물이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될 날을 기다리며 조용히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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