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의 밤>
화창한 여름 날씨만큼 화창한 표정의 귀부인들이 티타임을 갖고 있었다. 그들과 같은 티 테이블에 앉은 유일한 남자인 프레데릭만이 화창한 표정이 아니었다.
‘차를 마시는 건지 모래를 씹는 건지 모르겠군.’
긴장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찻물이 따갑다.
프레데릭은 살아오며 많은 일들을 겪었다.
최초로 마수와 대적하여 사냥하였을 때에도, 기사단을 지휘하며 적군과 전투를 벌일 때에도, 지금 이 순간만큼 긴장하지는 않았다. 호호호 웃고 있는 귀부인들의 앞이라는 이 자리는 마수들과 단독으로 마주쳤을 때보다 더 긴장되는 자리였다.
“어머, 대공 전하. 차가 입에 맞지 않으시나요?”
당시르 후작 부인이 근심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프레데릭은 저 목소리가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안다.
“날씨가 워낙 좋아 햇빛을 즐기다 보니 잠시 차를 마시는 것마저 잊고 있었군요.”
몸에 익은 에티켓대로 매끄럽게 대답은 했지만 프레데릭의 긴장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현재 그와 같은 자리에 있는 귀부인들은 당시르 후작 부인, 올람파 백작, 스턴 백작 부인이다. 한마디로 로젤린의 후원자들이었다. 그냥 후원자도 아니었다. 거의 10년 동안 로젤린을 지원한 그녀의 골수팬들이다.
언젠가 라울에게 농담 삼아 말했던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앞에 끌려나와 있는 프레데릭은 이 자리가 가시 방석이었다. 몹시 긴장되고 불편하지만 도망쳐서는 안 되는 가시 방석.
“북부에 비하면 확실히 햇살이 밝고 곱지요?”
북쪽 얘기가 나오니 프레데릭의 등이 움찔했다. 레젠의 북쪽에는 뭐가 있는가. 당연히 발트란이 있다.
그가 움찔거리거나 말거나 올람파 백작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 볼일이 있어서 남편과 함께 북쪽을 다녀왔는데 어찌나 춥고 눈이 많이 오던지요. 레젠에서 평생을 살던 사람은 적응하기가 많이 힘들 것 같아요.”
“레젠이 기후는 참 좋지요. 지나치게 덥지도 않고 지나치게 춥지도 않고, 괜히 제국에서 제일 번성한 도시가 된 게 아니라니까요.”
“저도 영지로 내려가면 레젠의 온화한 기후가 몹시 그리워져요.”
귀부인들은 저마다 레젠을 추켜세웠고 북쪽 사람인 프레데릭은 그냥 어색하게 웃었다. 그 북쪽으로 이제 로젤린이 가서 살게 되니 뭐라고 할 말이 있겠는가.
대화의 주요 화제는 살기 좋은 레젠의 장점이 되었고 말이 길어질 때마다 프레데릭은 움찔거렸다. 귀부인들은 그 후로도 한참동안 가시 방석의 가시를 촘촘히 박아 버렸다.
“로젤린이요.”
결국 정확히 로젤린의 이름이 올람파 백작의 입에서 나왔다. 프레데릭의 등이 저절로 꼿꼿하게 세워졌다.
“우리 로젤린은 발트란에서 잘 지냈나요? 감기는 걸리지 않았을지 걱정이에요.”
지난겨울에 감기가 걸린 건 오히려 프레데릭이다.
“물론 건강하게 지냈습니다. 기사단에 지급되는 방한 의복도 부족하지 않고요.”
“하아아……. 로젤린, 그 애는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는 애라서…….”
기껏 질문을 한 올람파 백작은 프레데릭의 대답을 건성으로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지은 죄도 없는데 추궁당하는 기분이었다. 아니, 지은 죄라면 있다. 로젤린과 약혼한 죄.
‘로젤린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아는 사람을 만난다고 했었지? 보고 싶다.’
현실도피적인 생각을 하며 프레데릭은 성실히 대답했다. 어쨌거나 성의 없이 대하거나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 자리다. 그녀들도 로젤린을 위한다는 마음은 똑같으니까.
‘역시 연적보다는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낫겠군.’
긍정적인 마음을 갖자 화제도 편한 쪽으로 돌려졌다.
“로젤린은 말이에요…….”
로젤린의 제일 오래된 후원자이자 제일 큰 후원자 중 한 명인 당시르 후작 부인의 눈동자가 아련해졌다. 레젠을 방문할 때마다 사교계에서 만남을 가졌던 프레데릭도 처음 보는 아련한 얼굴이었다.
“솔직히 처음 로젤린의 경기를 봤을 때는 호기심이었어요. 로젤린의 첫 경기가 어땠는지 아시나요?”
잘 모른다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녀가 말했다. 귀부인들은 서로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10년 전 과거의 추억에 젖었다.
“몰락한 귀족 가문의 어린 소녀가 굶주린 야수와 맞붙는다니. 상당히 자극적인 내용이긴 하지요.”
“맞아요. 저도 콜로세움의 경기는 그다지 즐기지 않았는데 그 홍보를 듣고 궁금해서 한번 들러 봤던 거예요.”
“단순한 호기심이었는데……. 그날 로젤린의 경기를 보면서 바뀌었어요.”
10년 전 로젤린의 첫 경기는 몰락한 귀족 소녀가 야수에게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구경하러 왔던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본래 여자 검투사들의 경기는 단순한 눈요기가 대부분이었다. 관객들은 단지 호기심을 충족시키길 바랐을 뿐이다. 그러나 구경거리에 불과했던 어린 소녀는 굶주린 사자에게 몰리고 부상당하고 흙바닥에 뒹굴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극적인 승리를 쟁취했다. 콜로세움의 관객들은 전율을 느꼈다.
“모두가 구경거리가 되어서 비참하게 죽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로젤린은 보기 좋게 기대를 배신하면서 이겨 버린 거예요. 엄청 짜릿했죠.”
스턴 백작 부인이 소리를 낮춰 웃었다.
“다음 경기에도, 그 다음 경기에도 그 애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어요. 언제나 도전하고 무릎 꿇지 않고 승리하였으니까요.”
로젤린과 계약한 콜로세움의 주인은 한스의 아버지였다. 처음에 그는 로젤린에게 귀족 소녀의 비참한 몰락과 죽음이라는 이미지를 씌운 단기간의 비지니스를 결정했었다. 하나 로젤린이 승승장구하자 그의 전략도 바뀌었다.
귀족 소녀의 비참한 몰락과 죽음은 언제나 승리하는 전투의 여신이라는 이미지로 변했다.
“아이리나 막델라히라는 별명은 참 잘 붙였지요. 누군가 장난처럼 꺼냈던 그 이름이 어느덧 로젤린을 뜻하는 별명으로 바뀌고, 로젤린은 그 이름처럼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어요.”
“역경에도 굴복하지 않고 승리하는 로젤린의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묘한 희망이 생긴답니다.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희망이요. 그래서 저희는 로젤린을 좋아하고 응원하는 거랍니다.”
올람파 백작이 마무리를 했다.
“싸울 때의 모습이 멋지기도 하고요.”
프레데릭은 로젤린이 검투사로서 싸우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그녀를 후원하는 귀부인들의 말뜻은 충분히 잘 알 것 같았다.
처음으로 그녀와 검을 나누며 대련했을 때 그가 느꼈던 감정, 완성된 기사의 검을 겪었을 때의 감정은 그녀의 경기를 본 사람들도 비슷하게 느꼈음이 분명하다.
기사로서 검을 쥐었을 때에도, 검투사로서 콜로세움에 섰을 때에도, 로젤린은 로젤린이었으니까.
머릿속을 오가는 생각을 정리한 그는 한마디로 마무리했다.
“확실히 그녀의 검은 눈을 사로잡지요.”
“10년이나 사로잡혀 있었던 사람들이 저희랍니다.”
귀부인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로젤린을 꼭 행복하게 해 주세요.”
굳이 프레데릭이 대답할 필요도 없는 당부였다. 그는 말없이 빙긋 미소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귀부인들도 미소를 지었다.
티타임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조성된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로젤린을 화제의 중심으로 삼아 담소를 나누던 프레데릭이 던진 한마디 때문이었다.
“스턴 백작 부인,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향수를 조향한 장인을 소개 받을 수 있을까요? 향이 아주 좋습니다.”
“제 전용으로 커스텀한 향수이긴 한데, 왜 그러시나요?”
“로젤린에게도 선물해 주고 싶어서요.”
프레데릭으로서는 순수한 의도였다. 스턴 백작 부인의 향수가 좋았으니 로젤린에게도 선물해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정말 그뿐이었다.
그런데 프레데릭의 대답을 들은 귀부인들의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
“……똑같은 향수를요?”
“예.”
“로젤린에게 어떤 말을 하면서 선물을 드리려고요?”
“스턴 백작 부인이 뿌린 향수가 좋아서 나도 샀다는 말이지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던 프레데릭은 갑자기 싸늘하게 변한 공기에 흠칫했다. 분명히 온화한 분위기로 바뀌었다고 확신했는데 왜 갑자기 가시방석이 돌아온 걸까. 그것도 아까보다 더 뾰족뾰족한 바늘을 달고서.
올람파 백작이 한숨을 쉬었다.
“전하가 어째서 서른이 넘도록 혼인을 하지 않으셨는지 아주 잘 알겠습니다. 혼인을 못하신 거지요?”
프레데릭은 뜨끔했다.
스턴 백작 부인은 엄히 질책하는 목소리로 캐물었다.
“로젤린에게 정식으로 청혼은 하신 게 맞나요?”
애매모호하게 말을 해 버리는 바람에 청혼의 마무리를 로젤린이 했다는 솔직한 대답을 하면 안 된다고 그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당시르 후작 부인이 부채로 티테이블을 단호하게 쳤다.
“이대로는 로젤린에게 전하를 못 보냅니다.”
항변의 여지는 전혀 없었다.
그렇게 하여 귀부인들에 의한 프레데릭의 교육이 시작되었다.
프레데릭이 혹독한 교육을 받고 있을 시간, 로젤린은 레젠의 번화가를 걷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있는 카트린의 말에 따르면 ‘미혼일 때의 마지막 합법적 데이트’였다.
“너랑 나란히 둘만 걸으니 참 좋네.”
“오늘 당시르 후작저에서 티파티가 있다고 들었는데 안 가셨어요?”
“후후후. 거길 갔으면 너랑 단 둘이서 못 만났을 거잖니.”
로젤린과 단 둘이 만날 기회를 위해 후원자들의 모임마저 걷어찼다는 카트린의 말에 로젤린은 그냥 피식 웃었다.
“앞으로 절 영영 못 만나는 것도 아닌데요, 뭘.”
“얘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너는 달라. 작년에는 검투사였고, 발트란에서는 아이기스 나이트였고, 이제는 메이어 백작님이 되었는데 이제는 슈벤하임 대공 부인이 되잖아.”
“……그런 논리인가요?”
“그럼.”
얼마 전 로젤린은 황제로부터 기사 서임을 받는 것과 동시에 메이어 백작이 되었다. 아직 영지를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했고 봉신과 관리들을 제대로 만나보지도 못했으니 실감은 잘 나지 않았다.
“메이어 백작령에는 언제 내려갈 거니?”
“다음 달이나 다다음 달에요. 백작이 되고 나니까 수도에서 처리해야 할 행정적인 일도 많더라고요. 골치가 아파요.”
평생 검만 쥐고 살았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카트린이 웃음을 터트리며 광장 안쪽의 벤치를 손짓했다. 두 사람은 광장을 가로질러 벤치에 앉았다. 여름의 무더위를 아주 조금은 잊게 해 주는 바람이 가늘게 불었다.
전쟁이 끝난 후 꾸준히 복구 작업이 이어지고 있지만 전쟁의 상흔은 도시의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전쟁의 후유증을 완전히 치유하려면 더 긴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수잔나와 엠마는 이제는 메이어 백작령이 된 구 베스메틱 백작령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로젤린은 두 사람과 메이어 백작령, 또는 발트란으로 가고 싶었지만 수잔나가 거절했다.
- 크리스토퍼는 없지만 넌 영원히 내 가족이야, 로젤린. 하지만 가족도 언젠가는 헤어지고 독립하는 때가 오는 법이잖아. 난 레젠에서 기반을 잡았고 이제 너도 너의 인생이 있어.
- 엄마랑 한스 아저씨가 요즘 자주 만나서 그래!
톡 끼어들면서 한마디 하는 엠마를 보는 로젤린의 눈은 휘둥그레졌고, 수잔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딸의 어깨를 쳤다.
- 이상한 소리를 다 해.
- 추, 축하해요, 언니. 한스가 돈을 밝혀서 그렇지 나쁜 놈은 아니에요.
- 아직 축하받을 관계 아니야.
얼떨결에 밝혀진 한스와의 만남 때문에 놀라서 그날의 대화는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나 수잔나가 말하려는 뜻은 그녀도 이해했다.
두 사람에게 짙은 그늘을 드리웠던 과거의 그림자는 이제 걷혔다. 살아 있는 사람은 과거의 기억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크리스토퍼가 바랐던 것처럼.
로젤린도 메이어 백작으로서, 프레데릭의 아내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네게 사과해야 할 일이 있어.”
가늘게 부는 바람을 음미하는 듯하던 카트린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로젤린은 씨익 웃었다.
“제 이야기를 소재로 한 연극을 후원하신 거요?”
“……알고 있었니?”
“연극의 기획 단계부터 어느 상인이 거금을 지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짐작했어요.”
“미안해, 네 사연을 멋대로 각색해서.”
“괜찮아요.”
몇 달 전, 메이어 남작가의 사연을 연극 무대에 올렸던 황제의 사과를 받았을 던 적이 있다. 그때보다 더욱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절 위해서 하신 일이란 거 알고 있어요. 결과적으로도 좋은 반향을 이끌어냈고요.”
“……실은 사과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어.”
과감하게 로젤린에게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이던 카트린이 그녀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말을 골랐다.
“순수하게 네가 기사가 되길 바라서 아이기스 나이트를 추천한 게 아니었어.”
이번에는 로젤린도 조금 놀랐다. 예상하지 못했던 사과다.
“네가 검투사를 그만둘 거란 얘기를 듣고 메이어 남작가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조사를 해 봤는데 당시의 정황이 아주 이상하더라구. 메이어 남작님이 후작을 배신했다는 걸 믿지 못하겠다면서 주변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했거든. 밑받침이 될 물증은 전혀 없었지만……. 그래서 클레타트 후작과 정적인 슈벤하임 대공의 기사단에 널 추천한 거야. 정말 남작가의 몰락이 조작되었다면 대공 전하가 진실을 알고 있거나, 널 도와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거의 일 년 동안 숨겨 왔던 진심을 겨우 밝힌 카트린은 치맛자락을 꼭 쥐었다.
“솔직히 네가 로열 가드에 입단하지 못한 걸 다행이라고 여겼어. 로열 가드의 기사단장이 후작의 처남이었으니 혹여 남작님의 죽음이 부당한 것이라면 딸인 너도 위험해질 것 같았거든.”
“그랬군요…….”
“확실한 게 아니니까 그때는 너에게 말하지 못했어. 내 마음대로 행동해서 정말 미안해.”
그녀의 과거를 추적하며 미래까지 자신의 추측대로만 행동한 건 확실히 카트린의 잘못이 맞았다. 카트린의 예상과는 달리 프레데릭이 진실을 몰랐다면, 또는 로젤린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녀의 미래는 아주 다르게 펼쳐졌을 것이다.
그러나 로젤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프레데릭과 만나게 해 주셨잖아요. 그리고 카트린의 추천을 받았지만 아이기스 나이트가 되기로 결정한 건 저니까요.”
담담하지만 흔들림 없는 대답이었다. 로젤린이 현재 자신의 모습에 확신을 갖고, 또 후회하지 않기에 나올 수 있는 대답이었다.
카트린의 뺨이 발그레해졌다가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래서 네가 좋아. 대공 전하에게 어떻게 널 보내지?”
“결혼식에는 오실 거죠?”
“못 오게 해도 갈 거야. 결혼한 후에라도 네 눈에 눈물이 한 방울이라도 흐르게 하면 암살자를 고용해 주겠어.”
“그 말은 꼭 프레데릭에게 전할게요.”
한 명은 진심이고 한 명은 농담인 대화의 한 토막이 여름 햇살 사이를 잔잔하게 흘러갔다.
‘……암살자를 고용하겠다는 게 진심일지도 모르겠다.’
로젤린이 그런 생각을 한 건, 10분이 지나고도 결심으로 이글거리는 카트린의 눈동자를 본 후였다.
* * *
저녁 무렵에 로젤린은 대공저로 돌아왔지만 프레데릭은 아직이었다.
“티파티가 밤늦게까지 이어집니까?”
“저도 그게 궁금한데요.”
라울도 미리 얘기를 듣지 못한 듯 의아한 표정이었다. 사교계 활동에 전혀 의욕이 없는 프레데릭이 밤늦도록 티파티를 한다니 상당히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로젤린은 걱정 반, 궁금증 반으로 그를 기다렸지만 결국 프레데릭은 로젤린이 잘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프레데릭이 새벽에 귀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로젤린이 일어나기도 전에 다시 저택을 나가서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갑자기 그가 부지런해지다니 무척 낯설다.
‘……부지런히 일한다는 건 좋은 뜻이니까.’
왠지 허전한 마음을 그런 생각을 하며 달랬다.
이틀 동안 얼굴을 못 본 프레데릭과 겨우 만날 수 있었던 건 그날 오후였다. 메이어 백작령의 관리들이 보낸 편지와 서류를 읽고 있던 로젤린은 프레데릭의 방문을 받았다.
똑똑똑.
“로젤린, 나다.”
프레데릭의 목소리가 좀 낯설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노크 소리마저 평소와 다르다. 로젤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문을 열었다.
“들어오…….”
인사를 하려던 로젤린의 목소리는 농밀한 장미향에 묻혔다. 로젤린은 입까지 작게 벌리며 수백 송이의 장미 꽃다발을 얼떨떨하게 받았다.
“……이게 뭔가요?”
“붉은색 장미의 꽃말은 열정적인 사랑이지. 널 위해 준비했어.”
여전히 낯선 목소리다. 어딘지 일부러 배에 힘을 꽉 주고 억지로 굵게 만들어 낸 음성 같다.
로젤린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프레데릭의 목소리를 듣고, 그윽한 미소를 짓고 있는 프레데릭의 얼굴을 보고, 꽃말 따위를 읊으며 건네준 빨간 장미로 시선을 돌렸다.
외모마저 평소와 다르다. 적당히 헝클어지는 대로 놔두던 머리칼도 깔끔하게 빗어 넘겼으며 옷도 대공저 내에서 편하게 입는 평상복이 아니라 격식을 차린 예복에 가까웠다. 깔맞춤도 완벽하다. 절대 프레데릭이 직접 고른 옷이 아니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징조라던데…….’
감동하기에 앞서 로젤린은 걱정부터 했다.
하룻밤 만에 프레데릭이 변했다. 그리고 어제 프레데릭은 티파티를 가졌다.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당시르 후작 부인에게 한소리 들었나 보죠?”
“……아니, 이건 그냥 널 위해 준비한 나의 마음과 사랑을 표현한…….”
“그 멘트는 스턴 백작 부인이 가르쳐 주셨을 것 같은데요. 그분 취향이 좀 느끼해서 부군이 맞춘다고 고생이 많으세요.”
“…….”
프레데릭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입가의 미소는 거두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어떻게 들은 건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이 다음 단계는 뭡니까?”
“먼저 좋은 와인으로 분위기 조성을 하며 데이……. 헉.”
훈련받은 매뉴얼을 그대로 이야기하던 프레데릭은 뒤늦게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열심히 유지하고 있던 미소마저 사라졌다. 이건 말로 하는 게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옮겼어야 하는 일인데.
로젤린도 기어이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안 어울리네요.”
“……이런 건 싫어? 꽃도 별론가?”
“아니요. 멋 낸 프레데릭도 좋고, 꽃도 좋은데 안 하던 행동을 하는 모습이 재미있어서요.”
재미있다는 건 칭찬일까? 욕은 아니겠지? 프레데릭이 고뇌하는 사이에 로젤린은 여유 있게 장미향을 음미했다. 여름의 꽃은 역시 장미가 좋다. 팔이 아플 정도로 부담스럽고 커다란 꽃다발이라는 문제는 있었지만.
‘꽃다발의 꽃을 몇 송이로 하면 되는지는 그분들이 안 알려 주신 모양이야.’
프레데릭이 들었다면 또 정곡을 찔렸을 것이다.
“데이트 장소는 뭐라고 들으셨는데요?”
“으음……. 무난하게 센디엘 축제를 권유하라고 했지.”
“가요.”
“응?”
“축제 가자고요.”
기껏 준비하였다가 얼굴을 마주본 지 5분도 안 되어서 밑천이 털려 버린 프레데릭이다. 좌절하고 있던 그는 축제를 가자는 로젤린의 권유에 금세 부활했다.
“이번에는 실수 안 할 테니까 나만 믿으라고.”
“데이트 일정도 받아 오셨나 봐요.”
“물론이지.”
결국 데이트 신청을 한 건 로젤린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미처 떠올리지 못한 그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앞으로 꽃다발은 적당한 사이즈로 해 달라는 말을 하면 또 기가 죽을까?’
그리고 로젤린은 꽃향기를 맡으며 고민했다. 즐거운 고민이었다.
* * *
센디엘 축제는 일 년에 단 한 번 만날 수 있는 전설 속 비운의 연인을 기리는 행사에서 비롯된 축제이다. 최초에는 연인의 날로 시작되었던 축제는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규모가 커졌다. 현재는 여름철의 제일가는 축제로 손꼽혔다.
데이트 신청으로는 무난하고 적절한 자리였다.
“그래서 일정은 어떻게 됩니까?”
축제날 점심 식사를 하며 로젤린이 물었다. 당시르 후작 부인을 비롯한 귀부인들에게 속된 말로 빡세게 교육을 받고 온 프레데릭이다. 축제날의 일정도 지침서를 받았을 게 분명하다.
과연 프레데릭은 마치 외워온 것처럼 일정을 줄줄이 이야기했다.
“5시로 예약한 레스토랑이 있어.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다가 8시가 되면 소원 배를 띄우러 가자. 그리고 뱃놀이를 하면서 느긋하게 쉬다가 귀가하는 건 어떤가?”
정석적인 일정이었다. 다만 프레데릭 혼자 짰다면 예약도 하지 않은 채 적당히 식사를 하고 적당히 구경을 하는 것으로 끝났을 데이트 일정이기도 했다.
로젤린은 디저트로 나온 꿀에 절인 과일을 먹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드레스 코드는 어떻게 할까요?”
이건 미리 교육을 받지 못한 모양이다. 프레데릭의 대답은 조금 늦게 나왔다.
“네가 입고 싶은 옷……?”
“아무래도 드레스는 준비하는데 시간이 걸리니까요. 드레스를 입을 거면 가발도 따로 마련하는 게 좋을 거고요. 화장도 제대로 하고 액세서리까지 제대로 갖추려면 미리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지금부터 시작해도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지 걱정인데요. 저녁 식사를 예약한 곳이 귀족만이 출입 가능한 레스토랑이 아닌가요? 허술하게 입으면 난감하지 않을까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부분이었는지 프레데릭은 멍한 표정이었다.
‘정말 못 들은 모양이잖아. 하긴 그분들에게 치장을 준비하는 건 너무 당연한 과정이라서 프레데릭에게도 설명하는 걸 잊으셨나 봐.’
다른 건 몰라도, 데이트에 관한 일은 교육받은 것을 응용하지 못하는 프레데릭의 혼란을 로젤린이 덜어 주기로 했다.
“그냥 편하게 바지나 입죠.”
뒤늦게야 그가 흠칫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저녁 식사 예약은 늦춰도 되니까 천천히 옷을 골라.”
“첫 일정이 늦춰지면 그 뒤의 일정도 조금씩 밀릴 텐데 괜찮겠어요?”
“…….”
프레데릭이 말을 잃었다. 미간에 주름까지 잡고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그를 잠시 구경하다가 피식 웃었다.
“데이트는 다음에도 있으니까요.”
“……미안. 내가 일찍 일정을 알려 줬어야 했던 건데 미처 생각을 못 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번이 첫 데이트도 아니다. 첫 데이트도 아닌데 기본적인 실수를 해 버렸다는 자각으로 다시금 프레데릭을 고뇌하게 만들었다는 걸 모르는 로젤린은 남은 디저트를 입으로 옮겼다. 근심 없이 잘 먹고 잘 지내니 어쩐지 요즘 살이 쪘다는 느낌까지 든다.
데이트 복장으로 바지를 골랐지만 과거처럼 단출한 복장은 아니었다. 빚더미에 눌려 있던 로젤린은 사치하는 습관이 없었고, 값비싼 평상복은 전부 후원자들이 지원해 준 옷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메이어 백작임과 동시에 슈벤하임 대공의 약혼녀였다. 검소한 것도 좋지만 신분과 지위가 높은 사람은 그 위치에 합당한 품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로젤린은 생각했다.
‘그동안 돈이 없어서 못 입은 거지 싫어한 건 아니니까.’
틈틈이 재봉사에게 주문한 옷들로 옷장은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다. 발트란으로 돌아가면 이사벨이 그녀의 옷을 더 많이 만들어 줄 것이다.
옷장이 채워지는 만큼 로젤린도 부유한 메이어 남작가의 영양으로 자라던 습관이 되살아났다. 새 옷을 주문하고 새 옷을 입는 건 확실히 즐겁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새 옷을 입은 모습을 보여 주는 건 더욱 즐겁다.
오늘도 프레데릭에게 보여 줄 생각을 하니 옷을 고르는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로젤린은 그녀의 시중을 드는 하녀들과 머리를 맞대며 데이트 복장을 골랐다.
마침내 최종적으로 하녀들이 가지고 온 복장을 보며 로젤린은 갸웃했다.
“괜찮긴 한데 덥지 않을까?”
“저녁에 나가셔서 뱃놀이까지 즐기고 오시니 이 정도가 딱 좋지 않을까요? 여름 감기는 독해서 걸리시면 큰일나요.”
“여름 감기에 걸린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고민하던 로젤린은 수긍했다. 약간 더울 것 같지만 옷이 마음에 드니까 감수할 만했다.
하녀들의 시중을 받아 은은한 수를 놓은 셔츠와 부드럽게 무두질한 검은색 가죽으로 만든 조끼를 입었다. 화사한 색상의 겉옷 위에는 짧은 망토를 걸쳤다. 수선화 모양의 은 브로치로 망토를 고정하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신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머리칼은 남자처럼 포마드 기름으로 넘기는 대신 작은 핀을 나란히 두 개 꽂았다. 핀에 장식된 1캐럿의 루비는 로젤린의 검푸른 머리카락 색과 잘 어울렸다.
가벼운 화장을 해 주던 하녀 한 명이 아쉬운 한숨을 쉬었다.
“오늘 같은 날에 외출을 하시니 지나가는 남자들의 눈까지 확 사로잡을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으셨으면 했는데요.”
로젤린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녀가 아쉬워하는 건 이해하지만 아쉬워하는 포인트가 우스웠다.
“지나가는 남자들을 사로잡아서 뭐 하려고?”
“저희 주인님이 이렇게 매력적이시다! 라고 자랑하고 싶어요.”
“맞아요. 로젤린 님은 편하게 남자처럼 입으셔도 멋지지만 드레스로 성장하셔도 얼마나 아름다운걸요.”
“아부해서 여름 보너스라도 노리는 거야?”
“조금은요.”
하녀들도 웃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단장이 전부 끝났다. 문을 열고 나가니 문 밖에는 늘 그렇듯이 프레데릭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낮게 탄성하며 로젤린의 뺨에 키스했다.
“내가 미쳤었나 보다.”
“왜요?”
“이렇게 아름다운 널 남자로 착각할 수가 있었지?”
“역시 당신은 남자를 좋아했던…….”
“그것만큼은 절대 아니야!”
결사적으로 항변하는 프레데릭에게 웃음을 보내고 팔짱을 꼈다. 다정히 팔짱을 끼면서도 프레데릭은 매우 긴장한 눈치였다.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오해받는 건 아닐지 전전긍긍하는 눈치다.
‘큰일이야. 놀려 먹는 게 재미있어지잖아.’
평생 가게 될 프레데릭의 흑역사를 손에 꽉 쥐고 로젤린은 쿡쿡 웃었다.
“근데 검을 가져가도 될까요? 없으면 허전해요.”
그녀가 하는 말에 반대를 하지 않는 프레데릭은 이번에도 선선히 끄덕였다. 로젤린은 마수의 뼈로 만든 단검을 허리에 매는 것으로 외출 준비를 끝마쳤다. 장식용으로는 보이지 않는 투박한 검집이지만 발트란의 상점에서 구매했을 때부터 마음에 드는 단검이다.
프레데릭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를 타고 도착한 레스토랑은 예약석으로 이미 만석이었다. 성대한 축제날이니만큼 프레데릭과 유사한 데이트 일정을 짠 남자들이 아주 많을 것이다.
“며칠 전에 급조한 일정인데 용케 자리가 났군요.”
“사실은 올람파 백작이 자신이 예약했던 자리를 양보해 줬어.”
“정말요? 나중에 따로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올람파 백작도 일정이 있었을 텐데도 그녀를 위해 기꺼이 양보해 준 게 고마웠다. 그리고 그녀를 보는 프레데릭도 의지에 불탔다. 올람파 백작에게 명당까지 양보 받은 데이트이니 절대 망쳐서는 안 된다.
레스토랑의 넓은 홀에는 악단의 연주가 잔잔히 흘렀다. 로젤린은 레드 와인을 마시며 천천히 주변들 둘러보았다. 테이블의 손님은 대부분이 부부나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 한 쌍이었다. 파트너를 바라보는 시선들에 저마다 정감과 애정이 가득하다.
“아는 사람이라도 있나?”
어린 송아지의 고기로 만들었다는 부드러운 스테이크를 썰던 프레데릭이 문득 물었다.
“당신과 저도 레스토랑의 다른 손님들처럼 다정한 한 쌍으로 보이는 걸까 궁금해져서요.”
“오늘 축제에서 최고의 커플상을 뽑는다면 바로 우리가 될 거야.”
호된 교육을 받고서야 간신히 ‘평범한’ 데이트 일정을 짠 남자가 말은 뻔뻔했다. 대답 없이 웃음만 터트리는 로젤린의 와인잔에 프레데릭이 살짝 잔을 부딪쳤다.
“너의 눈…….”
“‘눈동자에 건배’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죠?”
정말 그 말을 하려고 했던 프레데릭은 찔끔했다.
“아니야. 너의 눈동자는 저 밤하늘의 별보다 아름답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
“아직 별 안 떴습니다.”
“내 마음에 떴어.”
가벼운 말장난을 하며 식사를 즐기는 두 사람의 테이블 옆으로 새로 들어온 손님들이 지나갔다. 무심코 시선을 올린 로젤린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녀의 변화를 의아해하며 올려다본 프레데릭은 헉 하는 소리를 냈다.
새 손님 한 쌍도 거의 비슷하게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폐…….”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로젤린의 어깨를 카를이 꾹 눌렀다. 그러고는 자신의 입술 위에 검지를 들었다.
“아하하. 프레데릭, 로젤린. 자네들도 식사를 하러 온 모양이지?”
“예에…….”
“오늘 같은 날은 다 그렇지.”
얼떨떨하게 말을 흐리는 그녀를 대신해서 프레데릭이 끼어들었다. 다른 눈치는 없는 그였지만 지금 상황이 뭔지는 이해했다. 카를의 옆에서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여자는 황후다. 만년 신혼인 이 부부도 오늘의 축제를 즐기기 위해 잠행을 한 모양이다.
종종 있었던 일이었다. 황제와 황후는 정략결혼을 하였음에도 금슬이 무척 좋은 부부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바라.”
“너도.”
두 사람은 우연히 밖에서 마주친 친구답게 짧은 인사를 자연스럽게 나누었다. 프레데릭은 곧 잠깐 손에서 놓았던 와인잔을 들었고 카를도 황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안쪽의 테이블로 걸어갔다.
로젤린이 가슴을 쓸며 안도했다.
“예상하지 못한 분을 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신분을 감추고 몰래 나오신 건가요?”
“종종 그래.”
“잠행하신 거라면 호위 문제도 있을 텐데 괜찮아요?”
“잠행 일정은 아주 극소수의 심복들만 알고 있으니까 문제없을 거야. 이제까지도 문제되지 않았고.”
“그렇군요…….”
호위도 없이 황후와 단 둘이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온 황제를 로젤린은 곁눈질했다. 힐끔거리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황궁 밖에서 황제 부부와 조우하니 왠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어렸을 때 폐하와 같이 자라셨다고 했죠?”
“난 그때 평민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황태자와 불알친구가 되어 버렸지 뭐냐.”
“왠지 그때도 두 분이서 신분을 감추고 발트란의 시내를 돌아다녔을 것 같아요.”
프레데릭이 씨익 미소했다.
“정답이야.”
“아주 장난꾸러기들이었을 것 같아요.”
“그거 알아? 내가 내 말을 갖게 되었을 때에도 카를은 키가 작고 다리가 짧아서 조랑말밖에 타지를 못했어.”
지금도 황제는 프레데릭보다 키가 많이 작다. 어렸을 때는 더 작았을 것이다. 감히 황제를 곁눈질하며 무엄한 상상을 해 버리고 만 로젤린은 무심코 웃어 버렸다.
“말이 나왔으니 어렸을 때 이야기 들려주세요.”
“식사 도중의 화제로 괜찮겠나?”
“안 될 건 없죠.”
“좋아. 그럼 내가 발트란의 거리를 평정했던 9살 때의 일부터 이야기를 해 주겠어.”
과장된 목소리로 과거를 풀어 놓는 프레데릭의 이야기를 들으며 로젤린은 식사를 했다. 그녀의 앞에 쾌활한 사고 뭉치였지만 골목대장이기도 했던 어린 소년의 모습이 차츰 뚜렷해졌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소년이었다.
프레데릭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일정보다 늦은 시각에 레스토랑에서 나오게 되었으므로 두 사람은 산책을 생략하고 바로 강의 상류로 올라갔다.
전설 속의 연인은 넓고 넓은 강에 가로 막혀 서로를 만나지 못한다. 그들은 배에 편지를 적어 띄워 보내는 것으로 서로의 소식을 접했다. 때로는 소원을 담고, 때로는 염원을 담고, 때로는 애정을 담으면서.
이 에피소드는 센디엘 축제 때 소원을 적은 종이배를 띄워 보내는 행사로 변화했다.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진 강변에는 배를 띄우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보통 귀족들은 상류에서 뱃놀이를 하며 종이배를 띄웠다. 로젤린과 프레데릭도 미리 준비한 배를 탔다.
“멋진데요?”
놀잇배에 올라탄 로젤린은 작게 감탄했다. 서너 명이 타기에 적절한 작은 배지만 지붕에 휘장을 둘러 주변의 시선을 차단한 선실이 있어서 생각했던 것보다 아늑한 분위기였다. 선실 안에는 여유롭게 쉴 수 있도록 푹신푹신한 쿠션과 간단한 다과를 먹을 수 있는 낮은 테이블까지 있었다.
“센디엘 축제 때 뱃놀이를 한 적은 없나?”
“어렸을 때는 갑갑하게 배를 타는 것보다 밖에서 종이배를 띄우는 게 더 재미있었거든요. 검투사 생활을 할 때는 같이 올 애인이 없었고요.”
신기하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는 로젤린을 보며 프레데릭은 안도했다.
레젠의 데이트 명소는 그녀가 과거에 후원자들과 들렀던 곳이 대부분이었다. 덕분에 프레데릭의 데이트 목표에는 ‘로젤린이 겪어 보지 않은 곳’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처음으로 그 목표가 달성된 순간이다.
강의 상류에는 로젤린과 프레데릭의 배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어느덧 하나둘씩 주인을 찾은 배들이 불을 밝히기 시작하면서 강은 금세 불빛들로 환하게 빛났다. 하인들이 조각배를 타고 주변을 왔다 갔다 하며 주인의 시중을 드느라 뱃전에는 강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연신 들렸다.
선실에서 도수가 낮고 달콤한 와인만 가지고 나온 두 사람은 뱃전에 앉았다.
“북서쪽에 녹색 휘장을 두른 배가 보여?”
“뱃머리에 여신상이 조각된 배요?”
“응, 저거 카를이 탄 배야.”
“여기서도 가까운 곳에서 뵙게 되네요.”
“……데이트 코스가 너무 전형적이었던 걸까.”
다시금 고뇌에 빠진 프레데릭의 손등을 로젤린이 웃으며 쓰다듬었다.
“평범한 게 제일 좋은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기왕이면 평범한 기억보다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기고 싶은 프레데렉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놀잇배마다 밝혀진 램프가 강의 수면에 비치며 일렁거렸다. 선선한 강바람을 맞으면서 주변의 배를 구경했다. 휘장에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배도 있고, 로젤린이나 카를의 배처럼 아무런 문장이 없는 배도 있었다. 그저 하나의 배에 불과할 뿐인데 그곳에 탄 주인의 개성이나 성향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재미있었다.
“저 배는 왠지 세 명이 탄 것 같지 않아요?”
로젤린은 혀까지 내두르며 구경하고 있는데, 프레데릭은 그런 로젤린을 보며 마른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었다.
‘어깨동무…… 하고 싶다…….’
모름지기 한 쌍의 연인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때는 스킨십이 빠져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나란히 앉아 있는 것도 좋지만 프레데릭은 좀 더 그녀와 접촉하고 싶었다. 소박하게, 어깨동무라도.
사실은 더 깊고 농밀한 접촉을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무래도 여긴 야외인데다 주변의 눈도 많으니까.
프레데릭은 헛기침을 하며 부드럽게 로젤린의 손등을 더듬었다. 뱃전에 편하게 놓인 그녀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더듬어 올라갔다. 간지러운지 로젤린이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뜸 들이지 말고 이리 와요.”
그러고는 박력 있게 프레데릭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프레데릭은 얼떨결에 그녀에게 어깨를 안겨서 기대었다.
‘……어라. 이게 아닌데.’
그가 원했던 게 어깨동무가 맞긴 맞는데, 뭔가 반대가 된 것 같다.
프레데릭은 슬쩍 눈동자를 옆으로 움직였다. 뱃전에 걸어 놓은 램프의 빛을 받아 그윽한 음영이 진 로젤린의 얼굴은 기분 탓인지 분위기 탓인지 왠지 평소보다 잘생겨 보였다.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도 잘생겼다.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어요?”
“마, 맞습니다.”
프레데릭은 반사적으로 대답했고 로젤린은 미소하며 뺨에 키스했다. 그녀의 입술이 닿은 곳부터 짜릿하고 간질간질한 달콤함이 스며들었다.
반대든 아니든 뭐가 문제지.
그는 로젤린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입술을 겹쳤다. 바닥으로 밀려 넘어진 로젤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즐거운 웃음소리가 프레데릭과 맞닿은 입술 사이로 달콤하게 흩어졌다.
“아 잠깐. 이러다가 배가 뒤집히겠어요.”
로젤린이 프레데릭을 살짝 밀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작은 배는 바닥에 두 사람이 몸을 겹쳐 쓰러지는 것만으로도 옆으로 흔들거렸다. 겨우 그녀에게서 몸을 뗀 프레데릭이 탄식했다.
“다음번에는 꼭 크고 튼튼한 배를 장만하자고.”
“거기서 뭘 하려고요.”
“이 뒤의 과정일 게 당연하잖아.”
“하여튼.”
짐짓 눈을 흘기며 로젤린이 프레데릭의 옆구리를 퍽 때렸다. 그녀로서는 장난스럽게 때린 것이지만 기사로서 단련된 주먹을 맞은 프레데릭은 진짜 아팠다. 아파도 내색을 할 수 없으니 더 아프다.
어느덧 시간이 되었다. 멀리 광장에서 터트린 폭죽이 하늘로 치솟으며 색색의 꽃을 밤하늘에 가득 피웠다. 사람들이 탄성을 지르며 폭죽을 감상했다.
이제 소원을 적은 종이배를 띄울 때다. 근처의 놀잇배에서 띄운 손바닥만 한 종이배들이 밤의 강을 흘러갔다. 오늘 하루 중 가장 부산스럽고 가장 기다려온 순간이다.
“로젤린, 네가 빌고 싶은 소원은 뭐지?”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쪽지를 내려다보던 로젤린이 고개를 한 번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제가 바랐던 모든 것은 다 이루어졌거든요. 과거도 보상 받았고, 당신도 있고……. 여기서 감히 무엇을 더 바라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램프 빛을 깊게 머금은 그녀의 눈동자가 빙긋 가늘어졌다.
“당신의 소원은요?”
“난…….”
소원을 말하려던 프레데릭과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려던 로젤린의 시선이 동시에 움직였다. 희미하지만 분명한 살기가 두 사람의 본능을 날카롭게 깨웠다.
로젤린과 프레데릭을 스쳐간 살기가 향하는 곳은 황제가 탄 배였다.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했다.
“폐하를 노리는 게 맞지요?”
“아마도. 황궁의 경비를 뚫는 것보다 잠행 중을 노리는 게 쉬우니까. 카를이 방심했군.”
황제 부부가 탄 배는 다른 귀족들의 배와 차이가 없는 배였다. 호위 체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를 노리는 자들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속 편하게 데이트를 할 때가 아니었다. 잊지 않고 검을 가져오길 잘했다.
로젤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프레데릭이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하아, 내 데이트가…….”
말은 그렇게 아쉬워하면서도 이미 손은 검을 챙기고 있었다. 로젤린은 미소하며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내가 카를의 배로 갈 테니 뒤에서 백업을 부탁해도 될까?”
“예, ……조심하세요.”
그가 실수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프레데릭이 낮게 웃었다.
“출정을 나가며 배웅을 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군. 너도 다치지 말고.”
좀 더 얘기를 하면 좋겠지만 오래 대화할 시간은 없다. 프레데릭은 아쉬운 시선을 로젤린에게 남기고 놀잇배 밖에서 대기 중인 하인의 조각배를 불러 탔다.
카를의 배로 움직이는 조각배는 다섯 척이었다. 조각배 한 척에 최대 두 명이 탔다고 가정하면 10명이다. 그들은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배들 사이를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후작을 제거한 뒤니까 방심할 만도 하지.’
하지만 호위도 거의 없이 이런 곳을 나오다니 그의 잘못은 명확하다. 혀를 한 번 차고는 노를 젓는 하인을 재촉했다.
‘땅 위에서 10명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좁은 배 위라는 게 문제야. 뒤집어질 가능성도 있고.’
슈벤하임 대공령은 내륙 지역이다. 수군의 정비는 미흡했고 프레데릭도 수전에는 자신이 없었다. 한마디로 헤엄을 못 쳤다.
‘물에 빠지면 나도 끝이군. 물에 빠지는 것도 싫지만.’
그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카를의 배는 가까워졌다. 예상했던 대로 놀잇배 위에는 호위기사와 시종이 각각 한 명씩뿐이다. 뒤에서 접근하는 프레데릭의 존재를 알았는지 암살자들의 배가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프레데릭은 검집에서 칼을 빼고 뱃머리에 섰다.
배에 남아 있던 로젤린의 머릿속에 문득 의문이 생겼다.
‘프레데릭이 수영을 할 줄 알던가?’
헤엄을 잘 친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없었다. 반면에 로젤린은 검투사로서 수전을 경험한 적이 있다. 여름에는 콜로세움에 물을 채워서 수전처럼 꾸민다. 수군처럼 제대로 훈련을 받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배 위에서 싸우는 경험이 있었다.
‘차라리 내가 갈 걸 그랬나.’
흔들리는 배 위에서 균형을 잡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가 아니라 강이니 크게 흔들리지는 않겠지만.
하지만 이미 프레데릭이 출발한 후다. 그렇다면 뒤에 남은 그녀는 그를 믿어야 했다.
로젤린은 근심을 잠시 지우고 주변을 관찰했다.
암살을 지휘하거나 지원하기 위한 사람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그녀의 역할은 그들을 찾는 것이었다.
잔잔하였던 강의 수면이 크게 흔들리며 소란이 번졌다. 카를의 배가 있는 곳이 어수선해졌다.
“웬 소란이지?”
“싸움이 난 건가요?”
놀잇배를 탄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시선을 향했다. 이윽고 소란 속에 비명과 당혹감이 섞이기 시작했다.
“물러서십시오!”
“암습이다!”
강변에서 대기 중이던 황제의 호위들이 뒤늦게야 상황을 파악하고 배를 띄웠다. 로젤린이 있는 배에서 카를의 배를 확인할 수는 있지만 그곳이 상황이 어떤지는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로젤린은 걱정스러운 시선을 주변으로 돌렸다. 근처의 배들은 예상하지 못한 소란에 당혹하여 우왕좌왕하거나 뒤로 빠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이들 가운데에서 정반대의 행동을 취하는 배를 찾아야한다. 그 배가 곧 암살자들과 한패일 것이다.
‘……저 배인가?’
의심스러운 배가 한 척 있었다. 어느 가문의 배인지 확인할 수 있는 문장도 없다. 다른 놀잇배처럼 평범하지만 그 배는 뒤로 빠지지 않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큰 의심이 되지 않았다. 당황하여 어떻게 행동을 취해야 할지 모르는 배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소란을 틈타 짐을 갖고 조각배로 은밀히 하선하는 사람이 있었다. 조각배는 조금씩 황제의 배로 향했다.
‘확실히 이상하군.’
로젤린은 하인을 불렀다.
“강변으로 가서 현재 소란이 일어난 놀잇배의 호위병들에게 저 배를 놓치지 말라는 전언을 전해라.”
“아, 알겠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영문을 모르고 당황하던 하인은 그녀가 가리킨 배를 눈에 새기며 힘차게 외쳤다.
하인을 보낸 로젤린은 멀어지는 조각배를 눈으로 쫓았다. 뒤늦게 황제의 배로 향하는 것도 의심스럽고, 갖고 내린 짐이 무엇인지도 의심스럽다.
‘일단 가 봐야 알겠지.’
로젤린은 망토를 벗고 머리핀을 뺐다. 치장하는데 공을 들인 하녀들이 보면 무척 아쉬워할 테지만 망토를 입은 채라면 거추장스럽다. 조끼와 부츠까지 벗어 던진 그녀는 마수의 뼈로 만든 나이프를 입으로 물고 강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수영은 자신이 있다. 그리고 조각배를 몰아서 접근하는 것보다 헤엄을 치며 접근하는 게 발각될 확률이 낮았다.
‘지금이 여름이라서 다행이야. 겨울이면 시도도 못했겠는걸.’
그녀는 조각배의 위치를 간간히 눈으로 확인하면서 천천히 수영을 했다. 소란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황제의 배에서 싸움이 커지고 있다는 것과 똑같은 의미였으나 덕분에 로젤린이 발각될 확률은 낮아지고 있었다.
마침내 조각배에 다다랐다. 배에 올라타고 있는 남자는 두 명이었다.
‘이대로 올라가서 공격을 할까. ……아니, 상황을 좀 더 두고 보는 편이 좋겠어.’
로젤린은 들통 나지 않도록 배의 고물에 접근하여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 남자들의 주의는 주변이 아니라 황제의 배로 쏠려 있었다.
“호위를 따돌려서 좋은 기회라고 여겼는데, 젠장.”
“어쩔 수 없지. 이런 일을 대비해서 이것을 가져온 것이니 말이야.”
귀를 쫑긋 세우고 뱃전의 대화를 듣던 그녀는 의아했다.
‘이것? 가지고 온 짐인가?’
아마 남자들이 놀잇배에서 가지고 하선한 짐일 것이란 짐작이 들었다. 네모난 형태다. 상자에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 짐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저자들은 확신하는 걸까.
의문이 커졌지만 검은 천으로 단단히 덮여 있는 네모난 상자는 도무지 내용물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지금 덮칠까, 아니면 짐이 무엇인지 알 때까지 기다릴까?’
고민하는 사이에 황제의 배가 가까워졌다.
프레데릭은 짜증이 났다. 정말정말 짜증이 났다.
‘며칠 내내 특훈을 하는 것처럼 오늘 데이트를 준비했는데 다 망쳤잖아!’
이놈들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자신은 로젤린과 오붓하게 앉아서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을 것이다. 다른 날도 아닌 연인을 축하하는 축제다. 하필이면 이런 날을 골라서 습격을 하다니 상도덕이 없는 암살자가 아닌가.
‘제일 상도덕이 없는 건 호위까지 떼 놓고 놀러 나온 저 놈이고!’
짜증이 섞였으니 자연히 칼질은 거칠어졌다. 프레데릭은 좁은 뱃전에서 거침없이 암살자들을 상대했다. 선실 앞을 지키는 황제의 유일한 호위기사도 분투하고 있었다.
‘젠장! 발밑까지 흔들려서 짜증이 더 나!’
마음에 안 드는 것들뿐이다.
“내 데이트 어쩔 거냐!!”
“무슨 말을…… 컥!”
옆에서 칼을 휘두르던 암살자가 프레데릭이 기합처럼 우렁차게 외치며 휘두른 칼에 베여 강으로 풍덩 빠졌다. 그 바람에 좁은 선체가 흔들려서 균형을 잃을 뻔한 그는 간신히 발을 버텨 넘어지지 않았다.
근처에 온 대부분의 암살자들은 정리되었다. 황제의 호위들도 하나둘 씩 가까워졌다.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전하가 없으셨다면 호위병들이 올 때까지 버티기 힘들었을 겁니다.”
선실 앞의 호위기사가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 인사를 받아 봤자 망친 데이트가 되돌아오지는 않는다. 프레데릭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근데 이걸로 다 끝난 게 맞을까?”
“예?”
“극비 사항인 폐하의 잠행 일정까지 알고 있는 놈들의 준비치고는 허술한 느낌이 들어서 말일세.”
프레데릭은 강으로 빠지거나 뱃전에 쓰러진 암살자들의 시체를 둘러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곳인데다 마음이 급하여 암살자들을 전부 죽였지만, 역시 한두 명은 살려 두는 게 좋았을까.
‘로젤린은 어디에 있지? 다른 일행을 로젤린이 파악했으면 포로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쿵 하는 소리가 나며 놀잇배가 크게 흔들렸다.
“뭐, 뭐지?!”
하마터면 강으로 빠질 뻔한 프레데릭은 겨우 뱃전을 붙잡았다. 배의 고물에 조각배 한 척이 세게 부딪혔다.
“이젠 끝이다! 죽어라, 황제!!”
조각배 위에 서 있는 남자는 참으로 진부한 대사를 내뱉었지만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진부하지 않았다.
화약통이었다. 개수가 적은 것도 아니었다. 심지는 커다란 상자에도 연결되어 있었다.
“제기랄!”
프레데릭은 급히 달려가려 했으나 남자는 이미 부싯돌로 심지에 불을 붙인 후였다. 선실과도 아주 가깝다. 저 거리에서 저만한 양의 화약을 터트린다면 남자는 물론이고 이 놀잇배까지 큰 타격을 입는다. 선실의 황제는 생사를 장담하기 힘들 것이다.
조각배의 남자들은 말 그대로 죽음을 각오하고 화약을 터트릴 준비를 했다. 남자를 제압할 시간이 없었다.
“카를! 안에서 나와!”
다급하게 선실에서 황제 부부를 끌어내기 위해 달려가던 프레데릭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조각배의 뒤에서 흰 손이 불쑥 솟아오른 것이다.
마치 물귀신처럼 솟구친 흰 손은 화약통을 쥐고 있는 사내의 발목을 붙잡았다.
“어, 어?! 으악!!”
기습을 당한 남자는 균형을 잃고 강물로 풍덩 빠졌다. 물에 빠진 화약은 쓸모가 없어진다.
프레데릭만이 아니라 조각배에 있던 다른 남자도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대응이 늦었다.
“너, 넌 뭐냐!”
“데이트 망친 원한을 갖고 있는 물귀신이다.”
물속에서 솟아난 사람은 물론 로젤린이었다. 로젤린은 남자의 공격을 매끄럽게 피하며 단검으로 상자에 연결된 심지를 잘랐다. 그러고는 단번에 남자의 팔을 꺾어 쥐며 바닥에 쿵 눌렀다.
“끄아악!”
어깨 관절이 빠진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늘어졌다. 프레데릭은 무심코 혀를 찼다.
‘저 기술에 당하면 되게 아프지.’
부부 싸움을 하다가 관절이 빠지는 상상을 해 버린 그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만약에 부부 싸움을 하게 된다면 꼭 2m 이상 떨어져 있어야겠다.
그제야 겨우 황제의 호위들이 도착했다. 호위들에게 남자들과 화약을 넘겨 준 후에야 로젤린이 놀잇배로 올라왔다.
“괜찮아요?”
“나는 괜찮은데, 너…….”
비로소 로젤린을 가까이에서 바라본 프레데릭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로젤린은 여기까지 헤엄쳐서 왔다. 헤엄을 치는데 거추장스러운 망토며 조끼는 다 벗었다. 즉 셔츠만 입은 채 물에 젖어 있다.
물에 젖은 머리칼이 늘어진 얼굴은 몹시 섹시하다. 백 번, 천 번을 봐도 질리지 않을 섹시함이었다. 문제는 얼굴 외의 부위도 젖었다는 사실이었다. 안 그래도 얇은 여름 옷감이 흠뻑 젖어 몸에 달라붙었다. 탄력적인 근육으로 이루어진 늘씬한 몸매가 부각되고 가슴이 도드라졌다.
“아, 안 돼!”
프레데릭은 반사적으로 외치며 허겁지겁 자신의 망토를 벗었다. 그러나 로젤린은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예? 뭐가 안 돼요?”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선실의 문을 열었다.
“폐하, 메이어입니다. 무사하십니까?”
선실 안쪽에서 황후를 보호하듯이 앞을 가로막고 있던 황제가 반색했다.
“메이어 백작! 그대도 와 있…….”
반색했던 목소리는 애매하게 흐려졌고, 황제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로젤린은 황제의 등 뒤에서 살그머니 얼굴을 내민 황후와 눈이 마주쳤다.
물에 젖은 로젤린의 얼굴과 머리카락과 몸매를 바라본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갑자기 놀라서 큰 충격을 받은 건 아닌지 로젤린이 걱정하고 있을 때, 자그마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사, 사, 사…….”
“황송합니다만 한 번만 더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까?”
황후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로젤린은 정중하게 부탁했고, 황후가 어떤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된 황제는 헛웃음을 지었다.
프레데릭이 자신의 망토로 로젤린을 푹 덮은 것과 황후가 외친 건 거의 동시였다.
“제 드레스에 사인을 해 주세요……!”
* * *
“……드레스에 사인을 해 준 적이 많았나?”
“귀족의 부탁은 아니었지만 속옷이나 맨가슴에 사인을 한 적도 있는 걸요.”
“……그 드레스, 폐하의 생일 선물이라서 무척 아끼던 드레스라고 들었는데.”
“어쩐지 무지하게 비싸 보이더라고요.”
비슷한 일을 많이 겪은 로젤린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지만 프레데릭은 왠지 심란해졌다. 입은 옷에 사인을 해 달라는 건 이해할 수 있겠지만 속옷과 맨가슴이라니? 같은 여자의 부탁이니 다행이지만 만약 남자가 한 부탁이었다면?
‘아냐, 여자의 부탁이라도 문제잖아. 속옷에 맨살이라고.’
심각하게 고민한 프레데릭은 한 가지 결론을 내놓았다.
“나도 사인해 줘.”
“됐습니다.”
농담이라고 여겼는지 그녀는 웃음으로 넘겼지만 진담이었던 프레데릭은 좀 더 심각해졌다. 다음번에 무슨 핑계를 대고 자연스럽게 사인을 해 달라고 부탁하면 될까.
“답답한데 망토를 벗으면 안 될까요? 어차피 마차에는 저랑 당신밖에 없잖아요.”
로젤린과 프레데릭은 현재 대공저로 귀택하는 마차 안에 있었다. 소원을 적은 배를 띄우는 행사는 황제의 암살 시도라는 사건을 겪으며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프레데릭은 강변으로 올라오자마자 망토로 둘둘 감은 로젤린을 안고 마차에 탔다. 마차는 곧장 대공저로 말머리를 돌렸다.
“안 돼.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여름인데요, 뭘.”
“여름이라도 방심하면 안 돼.”
옆자리에 앉아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끌어안은 채 단호히 말했다. 제대로 닦지 못한 로젤린의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은 망토에 작은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하아.”
암살 시도도 무산되고 로젤린도 무사했으니 다행이지만 한숨은 끊임없이 나왔다. 원래 예정대로면 밤늦게 돌아오는 마차 안은 핑크빛 사랑의 무드와 색깔이 가득차야 했다. 하지만 무드는커녕 한바탕 싸우고 난 후에 물에 홀딱 젖은 로젤린을 데리고 귀가하는 길이 되다니.
계획과는 아주 많이 어긋나게 되었지만 로젤린을 위해 준비한 선물은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게 손톱만큼 위안이 되었다.
프레데릭은 내내 가지고 있던 작은 상자를 꺼냈다. 계획대로라면 종이배를 띄우고 난 후 분위기를 잡으면서 그녀에게 건네려 했던 선물이었다.
“선물? 뭔가요?”
“열어 보면 알 거야.”
망토 사이로 손을 내민 로젤린은 상자를 열기도 전에 무척 즐거워하며 살펴보았다. 바로 상자를 열어서 선물을 확인하는 것도 좋지만, 어떤 선물일지 추측을 하는 것도 좋았다.
손바닥 보다는 크지만 한 손으로 들기에도 부담이 없는 사이즈였다. 어느 정도 무게는 있었다. 그 무게가 상자의 무게인지, 내용물의 무게인지는 모호했다.
살짝 흔들어 보니 안쪽에서 고정되어 있는지 흔들리는 느낌은 없었다. 목걸이라고 보기에는 작은 상자지만 다른 액세서리라고 보기에는 큰 상자다.
즐거운 고민을 하며 로젤린은 상자를 열었다.
“향수군요.”
상자의 내용으로 고민했던 추측들은 다 틀렸다. 미소가 방긋 얼굴 전체로 번졌다. 프레데릭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네 이미지로 조향한 향수야. 내가 요구한 건 비비드한 색채의 느낌을 가졌지만 기본적으로 무심한듯 시크하고 쿨한 감성에 머스큘러한 멘탈을 베이스로 하여 포인트는 엣지있게…….”
난해한 설명이 이어지는 프레데릭의 말을 로젤린이 끊었다.
“조향사가 엄청 고생을 했겠는데요.”
향수병을 돌려보는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가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하여 심란하던 프레데릭의 마음도 풀렸다.
“수확제 때 네 향수가 참 좋았거든. 그 후로 네가 향수를 쓰지 않아서 안 좋아하는 건 아닐지 고민했지만 다행이야.”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 향수 같은 사치품을 쓸 만큼 익숙하지 않아서 잘 쓰지 않았던 것뿐이에요. 이제 프레데릭에게 선물까지 받았으니 자주 써야겠습니다.”
“향이 마음에 들지 걱정인데 지금 상황이 영…….”
아무래도 향수를 뿌리기에 좋은 옷차림이 아니어서 아쉬워하는 프레데릭의 코끝에 문득 묵직한 머스크 향이 스쳤다. 그의 목덜미에 향수를 뿌린 로젤린이 머스크 향을 맡으며 살짝 키스했다.
“향이 좋네요.”
마차 안의 밀폐된 공간에 로젤린을 이미지로 한 향수와, 로젤린의 체향이 물씬 다가왔다. 그녀의 입술이 스친 목덜미의 피부가 화끈거리면서 뜨거웠다. 프레데릭은 숨을 크게 삼켰다.
“마차 안에서 부도덕한 행위를 해도 될까?”
“키스만요.”
키스뿐이어도 황공하다. 꿉꿉한 습기가 차올랐던 마차 안은 이내 달뜬 숨소리와 달콤한 향으로 채워졌다.
* * *
황제의 암살 기도 사건은 빠르게 해결되었다.
로젤린의 조력으로 체포하였던 두 사내의 심문과 화약의 출처를 추적한 결과였다. 배후에 있었던 것은 클레타트 후작의 잔존 세력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하였던 일이다.
황제가 잔존 세력을 파악한 이상 문제의 해결은 쉬웠다. 황제는 지체 없는 소탕을 명령했고 그 결과는 여름이 지나기 전에 밝혀질 것이다.
축제날 빚어진 약간의 소란으로 들썩거렸던 제도 레젠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평온을 되찾은 레젠에서 한곳만이 시끄러웠다. 바로 황제의 집무실이었다.
“그래서 내 데이트는?”
카를의 책상 앞에 마주앉은 프레데릭이 구시렁거렸다. 암살의 배후를 캐내고 상황이 안정되자마자 프레데릭은 바로 망쳐 버린 데이트 건을 꺼냈다.
“도와준 건 감사하지만 자꾸 큰소리를 내니까 감사한 마음이 사라지잖아.”
카를도 투덜거렸다.
“모처럼 데이트를 망친 건 나도 똑같아.”
“넌 네가 방심해서 망친 거고. 아무리 잠행이라도 최소한 호위기사 몇 명은 대동을 했었어야지.”
방심했다는 건 전부 그의 실수가 맞았다. 할 말이 없어진 카를은 어깨만 으쓱했다.
“며칠 전 메이어 백작에게 따로 치하를 했는데도 부족해?”
“그건 그거고, 내 데이트는 데이트고.”
“데이트는 앞으로도 평생 할 거잖아.”
“앞으로 있을 수많은 데이트와 지난 센디엘 축제날, 그 시간, 그 순간에만 할 수 있는 데이트는 다르지.”
프레데릭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은 매끄러운 말에 카를은 감탄했다. 스턴 백작 부인에게 교육받은 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웃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좋아. 뭘 바라?”
그제야 프레데릭이 싱긋 웃었다.
감기 걸리면 안 된다고 프레데릭이 망토를 둘둘 감은데다, 대공저로 귀택하자마자 따뜻한 물로 씻었다. 덕분인지 로젤린은 감기에도 걸리지 않고 무사히 평소의 컨디션으로 돌아왔다.
평소로 돌아왔다는 건 할 일도 많아졌다는 뜻이다. 황제의 암살 배후가 걱정되긴 했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그것이 그녀의 임무는 아니었다. 프레데릭으로부터 간간히 근황을 들으면서 로젤린은 자신의 일을 했다.
암살의 배후가 완전히 밝혀지고 황제가 소탕 명령을 내렸다는 걸 듣고 나서야 완전히 안도할 수 있었다.
‘이번 사건으로 후작님의 일은 완전히 끝난다면 좋으련만.’
제2, 제3의 클레타트 후작이 나타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프레데릭이 희희낙락한 얼굴로 그녀를 찾아온 건 소탕 명령이 떨어지고 일주일 후였다.
“이 안대를 쓰라고요? 왜요?”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그러지.”
까만색 안대를 든 프레데릭이 싱글벙글 웃었다. 눈 전체를 가리는 긴 안대였다.
“센디엘 축제 때 데이트를 제대로 끝내질 못했잖아. 마무리를 하려고.”
“그건 좋지만 안대는 왜 써야 하는 겁니까?”
“깜짝 놀라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
장난을 치는 짓궂은 아이처럼 눈을 빛내는 프레데릭을 보니 더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처럼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다.
결국 로젤린은 프레데릭에게 받은 안대를 머리에 썼다.
‘……어두워.’
완벽한 어둠이 찾아왔다. 어둠에 공포를 느끼는 건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렇지만 주변을 더듬거리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쥐는 사람이 있었다.
“걸을 수 있겠나?”
마주잡은 손의 온기가 등불이 되었다. 로젤린은 어깨를 펴며 미소했다.
천천히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었다. 언제나 다녔던 익숙한 길이 어둠으로 덮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낯선 길로 변모했다.
“오른쪽 벽에 꽃병이 있으니까 왼쪽으로 두 걸음 와. 그 다음에는 모퉁이가 있다.”
하나씩 설명하는 프레데릭의 인도를 따라 걸어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프레데릭의 손만 잡고 걸어가고 있으니 왠지 묘한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설렌다면 이상한 걸까.’
어느덧 기대감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이 어둠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프레데릭이 무엇을 준비하였을지.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기대감이 커졌다.
“복도까지는 무사히 나왔고……. 으음, 계단을 내려가는 건 위험하겠지?”
“벌써 계단인가요?”
계단이라는 걸 알고 신중하게 발을 앞으로 내밀었는데도 불현듯 몸이 아래로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짧게 비명을 지르는 그녀를 프레데릭이 붙잡았다.
“역시 위험해서 안 되겠다. 잠깐만 가만히 있어 줘.”
그는 로젤린을 붙잡은 그대로 양 팔로 안아 올렸다. 평소처럼 안았을 뿐인데 시야가 봉쇄되어 있기 때문인지 훨씬 높은 곳까지 올라간 느낌이 들었다. 로젤린은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프레데릭이 낮게 웃었다.
“이런 것도 좋은데?”
“뭐가 좋다는 건데요?”
“네가 완전히 나에게 기대고 있다는 짜릿한 느낌?”
한가한 잡담을 하며 로젤린을 안은 채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프레데릭에게 완전히 의지한 몸이 그가 움직일 때마다 아래위로 조금씩 흔들렸다.
앞도 뒤도 보이지 않고 발조차 허공에 붕 떠 있는데 그녀를 안고 있는 프레데릭의 존재감만이 선명했다.
‘이런 걸 노리고 안대를 쓰라고 한 건 아니겠지.’
안대가 커서 뺨이 붉어진 걸 프레데릭이 보지 못할 테니 다행이다. 로젤린은 살그머니 그에게 기대었다.
이럴 때는 둔감한 프레데릭은 로젤린을 무사히 안고 있는 데만 신경을 쏟았다. 계단을 내려와서 저택의 정문으로 나왔다. 앞에는 이미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안대를 쓴 로젤린과 프레데릭을 태운 마차는 이윽고 길을 출발했다.
그와 마차를 탈 때는 늘 그렇지만 오늘도 그와 단둘이 마차 안에 있다. 마주잡은 손을 무심코 더욱 꼬옥 쥐었다.
“무슨 생각을 하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프레데릭이 물었다. 안대를 쓰고 있기 때문일까. 손가락 위를 문지르는 프레데릭의 손끝이 유달리 또렷하다. 로젤린은 손가락을 움츠렸다.
“마차가 크게 흔들리지 않고 바퀴가 부드럽게 굴러 가니 잘 닦인 도로 위를 가고 있는 것일 테지요? 게다가 모퉁이를 크게 꺾지도 않았으니 성문 밖이 아니라 성내를 계속 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후, 훌륭하군.”
현재 상황을 분석하는 대답을 결코 원하지 않았을 그의 목소리가 떨떠름하다. 그가 어떤 표정인지도 눈에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농담입니다. 어디를 가는 건지 상상도 할 수가 없어서 궁금해요.”
“기대한 만큼 즐거울 테니 걱정하지 마.”
프레데릭은 언제나 그녀의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다. 로젤린은 가늘게 미소하며 프레데릭의 손가락 사이에 깍지를 꼈다.
마차는 그 후로 몇 번 정지했다가 다시 출발했다. 아마도 마차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문을 통과한 모양이라고 로젤린은 생각했다.
드디어 마차가 완전히 멈추었다. 마차의 문이 열리며 기울어가는 저녁 햇살이 마차 안으로 쏟아지는 게 어슴푸레하게 느껴졌다.
“다 왔다.”
“이제 풀어도 됩니까?”
“아직.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조금만 더 하고 있어.”
로젤린은 프레데릭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명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게 여겨지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프레데릭의 인도를 받아 오게 된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인 듯하다.
대공저 안을 걸을 때처럼 손을 잡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는 복도지요?”
“오, 맞췄어. 이제 곧 복도 밖으로 나갈 거야.”
프레데릭의 대답처럼 복도는 곧 끝이 났다. 낮은 계단을 세 단 내려간 로젤린의 뺨으로 서늘하게 식어가는 저녁 무렵의 바람이 스쳤다. 복도를 나와 다시 야외로 나왔다. 기분 탓인지, 바람에 물비린내가 약간 느껴졌다.
“자, 여기야.”
프레데릭이 로젤린의 뒤통수에 묶여 있던 안대의 끈을 풀었다.
오래도록 어둠에 잠겨 있던 눈은 저녁 햇살에도 따가웠다. 로젤린은 몇 차례 눈을 깜빡거리며 빛에 적응했다. 이윽고 시야가 훤히 트였다.
“……프레데릭, 이건…….”
탄성이 나왔다. 로젤린은 멍하니 프레데릭의 이름을 부르며 앞을 바라보았다.
맞은편이 한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넓은 호수에 화환과 비단 휘장으로 장식된 놀잇배가 떠 있었다. 그리고 호수 변에는 갖가지 모양의 램프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마치 센디엘 축제가 열리는 밤처럼.
“축제의 마무리를 제대로 못했잖아. 폐하께 부탁해서 황궁의 별궁을 빌렸어. 내일까지 방해할 사람은 없을 거다. 늦었지만 같이 즐겨 볼까?”
“……예.”
만면에 활짝 웃음이 번졌다. 지금 느끼는 이 기쁨과 감탄을 전하고 싶은데, 표현할 언어가 떠오르지 않아 다만 그의 손을 잡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안다는 것처럼 프레데릭이 그녀의 이마에 입 맞췄다.
놀잇배에 올라 황궁의 시종들이 가지고 오는 저녁 식사를 했다. 센디엘 축제날 좁았던 배와는 다르게 너르고 여유 있는 놀잇배는 호수 위를 느긋하게 떠다녔다.
식사를 다 끝냈을 무렵에는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프레데릭이 손짓하자 호수 변의 램프에 일제히 불이 켜지며 폭죽이 하늘에서 터졌다. 그날의 밤처럼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을 규모의 폭죽은 아니지만 로젤린을 즐겁게 하기에는 아주 충분했다.
“우리 둘만을 위한 폭죽과 축제라니 무척 사치스러운 기분이 들어요.”
“발트란에서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공저에는 연못이 없어서 유감이야.”
“그럼 오늘 마음껏 즐기고 가야겠는데요.”
“당연하지. 여기 소원을 적을 종이배를 준비해 뒀다고.”
프레데릭이 기다린 것처럼 선반에서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배로 접을 수 있는 종이와 깃펜이 준비되어 있었다.
“강을 떠내려가지도 않고 날짜도 지났지만 신들은 너그러우니까 며칠 늦어도 소원을 들어줄 거야.”
그의 말을 듣고도 로젤린은 선뜻 펜을 들지 못했다. 이미 로젤린은 바라던 모든 것을 다 가졌다. 더 이상 바랄 게 있을까.
“내 소원을 먼저 적을까?”
잠시 그녀를 바라보면서 미소를 짓던 프레데릭이 먼저 종이에 소원을 적었다. 짧은 문장이었다.
‘로젤린이 많은 욕심을 갖는 것.’
갑자기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가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로젤린은 무엇을 쓰려 한 건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욕심을 가질 수 있기를, 10년 동안 가문의 빚과 의무에 짓눌려 있던 그녀가 오직 자신만을 위한 사사로운 욕심을 가질 수 있기를. 자신만의 목표를 가질 수 있기를. 자신만의 행복을 가질 수 있기를.
그제야 로젤린은 자신이 빌게 될 소원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프레데릭과 함께 하는 이 순간. 그녀의 제일 큰 욕심. 그녀의 제일 큰 바람.
곧 그녀의 삶이자 인생이었다.
프레데릭과 함께 하여 완전해진 자신은 이제 앞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이며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럼 배를 접자고.”
“배를 접는 건 10년 만에 처음이에요.”
“나도 진짜 오랜만이야.”
“센디엘 축제에 참가한 적이 없었어요?”
프레데릭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동안 나는 빌고 싶은 소원이 전혀 없었으니까. 널 만나기 전까지는.”
담담한 그의 목소리가 로젤린의 안에 깊이 스미었다. 그녀는 짐짓 소리 내어 웃었다.
“큰일인데요. 둘 다 배를 아주 엉망으로 접겠어요.”
“……여분의 종이로 연습부터 할까?”
10분 후, 어설프게 접힌 두 종이배 연못 위를 가볍게 떠다니다가 서서히 아래로 가라앉았다.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진 램프의 빛이 수면에 이지러졌다. 로젤린은 호수에 반사되는 불빛을 보며 살며시 기대었다. 프레데릭이 그녀를 안으며 속삭였다.
그 속삭임에 로젤린은 또 다시 행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