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레데릭 츠바덴> (14/16)
  • <프레데릭 츠바덴>

    프레데릭 츠바덴은 올해 10살이 되었다. 또래의 아이들보다 키도 크고 훤칠하여 원래 나이를 말해 주면 놀라워할 정도지만, 확실히 10살이었다.

    “네가 노안이라는 뜻일지도 모르지.”

    “야, 키가 커서 그런 거거든?”

    친구에게 대뜸 늙어 보인다는 얘기를 들은 프레데릭은 울컥해서 카를의 뒤통수를 퍽 때렸다. 피하지도 못하고 머리를 얻어맞은 카를이 인상을 썼다.

    “날 때린 걸 투란이 알면 네가 무사할 거 같냐?”

    “치사하게 보모에게 이르는 게 어디 있냐?”

    “그거야 내가 싸워서는 널 못 이기니까.”

    싸움을 못한다는 걸 핑계로 내세우는 카를의 뻔뻔함에 프레데릭은 할 말을 잃었다. 카를이 킬킬 웃으며 프레데릭의 등을 탁 쳤다.

    값지고 깨끗한 옷을 입었으나 수행인도 없는 홀몸으로 친구와 단둘이 발트란의 시내를 걷는 이 소년이 필라헨 제국의 황태자라는 건 쉽게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프레데릭과 카를은 나란히 복잡한 시내를 걸었다.

    “근데 카를. 저 뒤에 우리 미행하는 애 말이야, 며칠 전부터 널 계속 쫓아오는 거 같지 않냐?”

    소리를 낮추어 속닥속닥 속삭이는 프레데릭의 말에 카를도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몇 미터 뒤에서 조심조심 따라오던 한 소년이 화들짝 놀라 건물 뒤로 몸을 숨겼다.

    카를이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누군지 알아. 나랑 같은 집에서 살고 있거든.”

    현재 카를은 슈벤하임 대공저에서 손님으로 지내고 있다.

    “하인이야?”

    “하인은 아니고.”

    하인도 아닌데 카를과 비슷한 나이이며 대공저에 살고 있는 소년은 한 명 뿐이었다.

    “……그럼 대공님 아들? 그러니까……. 도련님인가?”

    ‘도련님’은 프레데릭이 영 쓸 일이 없던 단어다. 프레데릭은 익숙하지 않은 그 단어를 매우 신중하게 말했고 카를은 킥킥거렸다.

    “응, 이름이 윌리엄인데 우리랑 같이 놀고 싶어 하는 눈치더라고. 네 이야기를 많이 해 줬거든. 데리고 올까?”

    “싸움 잘하냐?”

    “나보다 못할걸?”

    “됐어. 그럼 무슨 재미로 노냐.”

    프레데릭에 비하면 약골인 카를보다도 더 약하다는 말에 그는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소년들은 윌리엄이 몰래 미행을 하는 걸 모른 척하며 시내를 걸어갔다. 익숙한 길이었으므로 남문으로 나와 인적이 드문 벌판까지 오는 건 금방이었다. 소년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세 필의 말과 한 명의 여인이었다.

    “와, 투란! 말이 바뀌었네?”

    투란은 카를의 보모다. 평범한 제국식의 의복을 입고 있지만 제국인과 비교하면 피부색도 짙고 이목구비도 이질적이었다. 그녀가 순수한 제국인이 아니라는 증명이었다. 투란은 유목민 중 하나인 엔두르크 족 출신으로 제국인인 남편과 결혼하여 정착했다. 남편도 발트란에서 카를을 섬기고 있는 수행인이었다.

    말 세 마리의 고삐를 한 손에 잡고 있던 투란이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프레데릭과 카를에게 승마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소년들을 위해 가지고 오는 말은 언제나 조랑말이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조랑말 한 마리가 보통 말로 바뀌었다.

    “프레데릭은 키도 크고 실력도 많이 늘었으니까 어른들처럼 말을 타도 될 거야. 대공 전하께 부탁을 드리니까 흔쾌히 말을 주시던걸?”

    “그럼 이제 내가 탈 수 있다는 거지?”

    프레데릭은 신이 났다. 얼굴도 잘 모르는 대공이 그에게 말을 주었다는 것보다 이제 이 말을 자신이 탈 수 있게 되었다는 게 더 즐거웠다.

    즐거워하는 프레데릭과 대조적으로 카를이 투덜거렸다.

    “난 왜 아직도 조랑말인데?”

    “미안해. 카를은 다리가 짧아서 말을 못 타.”

    “푸하하!!”

    진심 어린 투란의 사과에 프레데릭은 배를 잡고 웃었고 카를은 씩씩거리며 프레데릭을 걷어찼다.

    한바탕 소란 후에 세 사람은 말을 타고 벌판을 달렸다. 투란에게 승마를 배우는 시간은 아버지에게 검술을 배우는 시간 다음으로 프레데릭이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여자에게 기마술을 배운다는 얘기를 들은 주변 어른들은 탐탁지 않게 여겼었다. 그 말을 전해들은 투란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갸웃했다.

    - 우리 일족은 남자가 전쟁이나 약탈을 하러 가면 터전과 아이들을 지키는 건 여자의 몫이야. 여자가 하지 못할 일은 없는걸.

    어른들과는 다르게 프레데릭은 투란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투란이 그가 아는 어떤 남자들보다 기마술이 뛰어난 건 분명했다. 여자에게 왜 기마술을 배우냐는 트집은 투란을 한 번이라도 이긴 후에 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도 벌판을 달리는 건 즐거웠다. 어른처럼 말을 타니 더욱 재미있었다. 시야도 훨씬 높이 트이고, 얼굴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도 예전과는 다른 느낌마저 든다.

    “너무 멀리 나갔다가 길을 잃으면 안 돼!”

    “괜찮아! 한두 번 와 본 곳도 아닌데!”

    멀리에서 걱정하는 투란의 당부를 뒤로 하며 프레데릭은 혼자 말을 달렸다. 친구인 카를도 라울도 겪지 못하는 오직 그만의 경험이었다. 커다란 환호성을 지르고 싶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어느덧 숲 근처였다. 언제나 말을 달리던 코스인데 평소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다.

    ‘이런 거 얘기해 주면 약 올라서 죽겠지?’

    키 작다는 게 공인되어 버린 카를도, 잔소리쟁이 라울도 모두 부러워할 것이다. 프레데릭은 킥킥 웃었다.

    그렇지만 즐거운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히이잉!”

    갑자기 말이 높이 울면서 앞발을 치켜들었다.

    “우왓!”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말의 목을 꽉 붙잡았다. 동시에 어깨 옆으로 날카로운 아픔이 스쳐갔다. 화살이었다.

    프레데릭은 깜짝 놀라 앞을 바라보았다. 인적이 드문 숲 쪽에서 말을 탄 다섯 명의 사내가 나타났다. 활을 들고 있는 사람도 있고 칼을 뽑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공통점은 그에게 살의를 품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신들 누구야?”

    자신에게 악의가 있는 어른들의 등장에 놀랐다는 걸 숨기기 위해 크게 외쳤다. 앞장선 사내가 실실 웃으며 칼을 겨눴다. 어린아이에 불과한 프레데릭을 얕잡아보는 태도가 역력했다.

    “네 어미에게 물어봐라.”

    프레데릭의 어머니는 아주 평범한 여인이다. 게다가 귀족도 아니다. 만약 어머니에게 해를 끼치려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프레데릭을 습격하는 번거로운 방법으로 원한을 풀 이유가 없었다.

    ‘혹시 카를과 착각을 하는 건가.’

    가까운 사람 중 어머니가 범상하지 않은 녀석이라면 카를뿐이다. 이 사내들은 카를을 암살하러 온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길게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사내들은 바로 공격을 개시했고 프레데릭은 늘 갖고 다니던 칼을 뽑았다. 곧 칼과 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벌판에 울렸다.

    프레데릭의 실력은 훈련을 받은 성인 남성에게 크게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연무장에서의 일대일 대련이 아니었다. 사내들은 암살자였고 프레데릭은 살기에 노출된 적이 없는 어린아이였다. 상처를 입히는 건 가능해도 사내들을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 능숙한 사내들은 곧 프레데릭의 미숙함을 눈치 챘다. 그들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이 여유롭게 프레데릭을 궁지로 몰았다.

    “칫!”

    프레데릭도 사내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모르는 게 아니었다. 크게 기합소리를 내면서 빈틈을 드러낸 사내 한 명을 공격했지만, 또다시 칼이 멈칫했다. 프레데릭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 사람들을 죽여야 자신이 살아남는다는 걸 머릿속으로 알고 있지만 평범하게 자라온 10살 소년이 갑자기 사람을 죽이는 건 무리였다. 프레데릭은 결국 이번에도 사내에게 치명상을 입히거나 죽이지 못했다.

    “제 어미의 악독함은 어디로 간 거냐?”

    사내들은 그것이 재미있는지 킬킬거리며 웃었다. 프레데릭의 몸에 상처가 차츰 생겨났다. 방어만으로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이대로라면 내가 죽을 거야. 내가 죽지 않으려면 이 사람들을 죽어야 해!’

    그렇게 결심을 하였는데도 망설임이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 그 무게가 어린 프레데릭의 팔에 묵직하게 걸려 있었다.

    “고개를 숙여!!”

    프레데릭이 갈팡질팡 망설이고 있을 때, 그의 우유부단한 마음을 자르듯이 먼 곳에서 투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투란은 말을 달리면서 화살을 겨누었다. 사내들은 투란이 오는 걸 알면서도 피할 겨를이 없었다. 삽시간에 쇄도한 화살이 사내들에게 명중했다.

    “넌 도망쳐!”

    “젠장! 이년은 또 뭐야!”

    투란은 활 대신 창을 쥐고 사내들에게 달려들었고 사내들의 목표는 난입한 그녀로 바뀌었다.

    사람을 제대로 공격하지 못하는 자신은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프레데릭은 이를 악물며 말에 올라 도망쳤다. 대련과 실전이 다르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한두 명의 사내들이 쫓으려 했지만 투란은 한 명의 사내도 놓치지 않았다.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거친 욕설을 뒤로 한 채 프레데릭은 달렸다.

    몇 분 동안 정신없이 달리던 그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카를은 무사할까?’

    카를을 죽이려고 했던 암살자들이 모두 자신에게 모였다면 다행이지만, 혹시 두 패거리로 나뉘었다면?

    일개 손님으로 가장하여 대공저에 머무르고 있는 카를의 호위는 보모를 겸하는 투란뿐이다. 지금 카를의 곁에는 카를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프레데릭은 즉시 말머리를 돌렸다.

    혼자 신이 나서 멀리 달려나간 프레데릭을 데려오겠다며 투란도 잠시 곁을 비웠다.

    조랑말을 끌고 시작지점으로 터덜터덜 돌아온 카를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황궁이었다면 까다로운 예법 선생들이 잔소리를 했겠지만 여기는 발트란이었고 투란은 카를보다도 황궁의 예법을 모른다.

    “윌리엄, 언제까지 숨어있을 거냐?”

    카를은 목소리를 높였다. 덤불 뒤에서 윌리엄이 몹시 놀란 표정으로 슬그머니 나왔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게 숨은 거였냐?”

    덤불 사이로 몸이 반 이상 보였는데 그걸 숨었다고 한 건지. 카를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고 윌리엄은 영문도 모르면서 따라 웃었다.

    “왜 자꾸 따라오는 거야? 대공 부인에게 들키면 혼날 텐데.”

    윌리엄이 갑자기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카를 님과 프레데릭과 치, 치, 친구가 되고 싶어서요.”

    예상은 했지만 너무나 예상 그대로의 대답이라서 카를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진짜 친구가 되고 싶다고 쫓아다녔단 말이지.

    “친구는 너도 많잖아.”

    “봉신의 아들들인 걔들과는 완벽한 친구가 될 수는 없잖아요. 언젠가는 제 봉신이 될 애들인데 친구는 평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요?”

    “그렇게 따지자면 넌 나중에 내 봉신이 될 거고, 프레데릭은 아예 논외 대상인 평민이잖아. 네 말대로 평등한 관계인 건 아니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내용이었는지 윌리엄은 굉장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완전히 정곡을 찔린 표정이다.

    “그, 그치만 카를 님과 프레데릭이나 라울은 굉장히 즐거워 보이시는걸요…….”

    “그건 아마 프레데릭의 성격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

    신분을 위장하고 있다지만 카를은 황태자다. 그가 황태자라는 걸 알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스스럼없이 친구가 될 사람은 프레데릭 외에는 찾기 힘들 것이다.

    대범한 건지 아예 무시하는 건지는 카를도 모르겠지만.

    ‘다리 짧다고 황태자를 놀려먹을 사람은 매우 희귀하긴 하지.’

    아까의 대화가 생각난 카를은 무심코 피식 웃었다. 카를과 프레데릭, 가끔은 라울도 합세하여 그 나이대의 소년처럼 어울려 노는 게 윌리엄은 무척 부러웠던 모양이다.

    “근데 넌 약골이라서 프레데릭이 별로라던데?”

    “예에?!”

    프레데릭은 별 생각 없이 했을 말을 전해 주니, 카를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놀랐다.

    “제가 카를 님이나 프레데릭은 못 이겨도 라울은 이길 수 있을 거 같은데요?”

    “라울은 잔소리로 프레데릭을 이기거든. 라울이 잔소리를 시작하면 프레데릭이 바로 백기를 든다니까.”

    “……그럼 프레데릭을 이기려면 뭘 어떻게 하면 될까요?”

    농담으로 꺼낸 얘기였는데 윌리엄은 무척 진지해졌다. 하긴 윌리엄에게 이런 농담을 하는 사람도 주변에 없었을 것이다. 명색이 대공의 유일한 후계자인 윌리엄이니까.

    ‘나도 레젠의 황궁에 있었으면 프레데릭처럼 스스럼없는 녀석을 못 만났을 거야.’

    카를의 어머니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슈벤하임 대공령으로 보냈지만 카를은 이곳에서 프레데릭이라는 좋은 친구를 만들었다. 좋은 친구란, 그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 이상의 가치라고 카를은 생각했다.

    ‘프레데릭이 나중에 내 기사가 되어 함께 레젠으로 가면 좋을 텐데 왠지 그 녀석은 발트란을 지키겠다면서 슈벤하임에 머물 것 같다고.’

    그렇게 되면 결국 프레데릭이 기사로서 섬기게 되는 주군은 어리바리한 이 윌리엄이 아닌가.

    ‘왠지 얄밉군.’

    카를은 괜히 윌리엄의 어깨를 툭 쳤고, 윌리엄은 영문도 모르고 프레데릭이 언제 오냐는 질문을 했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온 사람은 프레데릭이 아니었다. 투란도 아니었다. 낯선 사내들이었다.

    처음에는 벌판을 지나 발트란으로 가는 사람일 거라고 여겨 신경 쓰지 않았다. 도로가 정비되지 않아 길이 거칠지만 지름길이다. 인적이 드문 곳이지만 지나가는 사람이 아예 없는 지역은 아니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카를이었지만 사내들의 행동은 확실히 이상했다.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망을 좁히는 것처럼 두 사람에게 가까워졌다. 카를은 옆으로 힐끔 곁눈질했다. 이런 조랑말에 윌리엄과 같이 타고 도망치는 건 무리다.

    “누, 누구야?”

    윌리엄도 뒤늦게야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 챘다. 어린아이의 떨리는 목소리는 사내들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롭게 웃기까지 했다.

    “애초에 들은 건 꼬맹이 한 놈이었는데 여기에서 보니 셋으로 불어나 있어서 곤란하던 참이야. 어느 쪽이 카를이지?”

    카를의 얼굴이 긴장으로 하얗게 되었다. 이 사내들이 노리는 건 윌리엄도 프레데릭도 아닌 바로 자신이었다.

    ‘황궁에 있는 황태자가 가짜라는 게 발각되었군. 도망쳐야 해.’

    하필이면 투란도 잠시 곁을 비웠을 때다. 투란이 오기까지 시간을 벌거나 도망을 쳐야 하는데 둘 다 쉽지는 않아 보였다.

    그때였다. 윌리엄이 카를의 앞에 섰다.

    “내, 내가 카를이다. 무슨 용건이지?”

    카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윌리엄은 어리숙하지만 바보가 아니다. 그도 귀족이며 또한 대공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내들이 왜 카를을 찾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윌리엄은 카를을 가로막으며 카를을 자칭했다.

    “윌리엄!”

    윌리엄이 미끼가 된 사이에 도망을 쳐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다. 카를은 크게 외치며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네가 죽을 참이냐?!”

    “저를 부르시면 어떻게 해요! 카를 님을 보, 보호해야 한다고 아버지가 신신당부를 하셨단 말이에요!”

    “널 죽이고 내가 살아남으란 뜻은 아니야!”

    무기도 없고 도주할 수단도 없는 두 소년들이 옥신각신하는 광경을 보던 사내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는 모습이로구만. 걱정하지 마, 둘 다 죽여 줄 테니.”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눈짓하자 다른 사내들이 검을 꺼내든 채 다가왔다. 윌리엄은 덜덜 떨면서도 카를의 앞에서 비키지 않았다. 카를도 떨리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단념하지 않고 방법을 찾았다.

    프레데릭이라면 모를까, 카를의 실력으로 무기도 없이 이 사내들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이 사내들은 보잘것없는 어린아이 두 명을 앞에 두고 방심하고 있는 상태다.

    ‘모래 같은 걸 눈에 뿌리고 도망칠까. 투란은 지금 어디쯤에 있지?’

    투란과 프레데릭이 멀리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시간을 벌어야 한다. 도망을 쳐서든, 대화를 해서든.

    “왜 날 죽이려고 하는 거지? 누구의 소행이냐?”

    의연한 척 등을 꼿꼿이 세우는 카를의 태도가 가소로운지 사내가 히죽 웃었다. 그가 막 대답을 하려던 때였다.

    등 뒤에서 말이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카를!!”

    프레데릭이었다.

    “프, 프레데릭!”

    카를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물론 사내들은 프레데릭이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카를을 도와주기 위해 오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내가 카를을 베기 위해 칼을 높이 올렸지만 윌리엄이 몸통 박치기를 하며 사내의 팔에 매달렸다.

    “도망치세요!”

    사내는 거친 욕을 하면서 윌리엄을 내던졌지만 윌리엄은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샘솟았는지 얼굴을 맞으면서도 팔을 풀지 않았다. 그 틈을 타서 카를은 뒤로 피할 수 있었고, 프레데릭의 말이 그곳으로 달려왔다.

    “우와아아아!!”

    칼을 양손으로 거꾸로 잡은 프레데릭은 달리는 말에서 뛰어내리며 사내를 공격했다.

    “크아악!”

    말이 달리는 속도와 프레데릭이 뛰어내리는 무게감이 중첩되어 사내의 몸통을 단번에 꿰뚫었다. 피가 허공으로 튀었다. 프레데릭의 얼굴에도 붉은 피가 묻었다.

    “너희 괜찮아?!”

    프레데릭이 얼굴의 피를 닦을 생각도 못하며 다급히 물었다.

    그의 난입으로 한 명이 쓰러지며 흐트러지긴 했으나 사내들은 프로였다. 곧 당혹감을 수습하고 프레데릭을 공격하는 한편으로 카를을 쫓았다.

    “쳇!”

    사내의 몸통에 박힌 검은 쉽게 빠지지 않았다. 프레데릭은 쓰러진 사내의 검을 대신 쥐며 반격에 나섰다.

    “카를! 투란이 곧 올 거야!”

    투란이 가까이에 있다는 말은 카를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카를은 얼굴이 붓고 터지도록 맞은 윌리엄을 부축하여 도주하였고 그들을 쫓으려는 사내들은 프레데릭이 붙잡았다.

    자신이 공격당할 때는 제대로 반격하지 못했던 프레데릭이다. 하지만 카를과 윌리엄이 공격당하는 것을 보자 생각하는 것보다 빠르게 손이 움직였다. 그의 결단은 두 사람을 지켜냈다.

    ‘그렇구나. 아버지가 말하는 기사의 검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거였어.’

    아버지의 가르침이 어렴풋이 이해되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로만 깨달았던 가르침이 마음으로 깊이 이해되었다.

    주군에게 충성하고 약자를 수호하는 기사의 검.

    프레데릭의 머리 위로 허공을 자르는 묵직한 소리가 사납게 날아왔다. 허공을 날아온 창은 프레데릭과 검을 맞대고 있던 사내의 안면을 관통했다. 창에 꿰인 사내의 몸이 뒤로 크게 날았다.

    이어 프레데릭의 머리를 한 마리의 말이 도약하여 뛰어넘었다. 말 위에 올라탄 작은 그림자는 사내를 관통하여 바닥에 꽂힌 창대를 뽑아 쥐며 재차 공격에 나섰다. 말을 몰아 장애물을 뛰어넘고 바로 공격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매끄럽다.

    프레데릭이 아는 한 말과 한몸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투란! 타이밍 끝내줘!”

    빙긋 미소로 대답한 투란은 여유롭게 사내들을 몰아세웠다. 그녀가 있으니 이제 안전하다.

    “하아……. 죽는 줄 알았네.”

    프레데릭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투란 덕분에 두 번이나 무사히 사내들의 손을 벗어났지만 아직도 심장이 콩닥거린다. 카를이 윌리엄을 부축하여 그의 옆에 앉았다.

    괜찮냐고 다시 물으려 두 사람에게 고개를 돌린 프레데릭은 피범벅이 된 윌리엄을 보고는 대단히 놀랐다. 그러고는 이내 씨익 웃었다.

    “근성이 있으시네요, 도련님.”

    “진짜 아파…….”

    “아프면 울어도 돼요.”

    “카를 님이 안전해지기 전에는 울면 안 돼.”

    눈물이 글썽글썽 맺혀 있으면서도 윌리엄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윌리엄은 키도 작고 체격도 작다. 거기다가 고집까지 부리니 왠지 동생 같은 느낌이 들어서 프레데릭은 무심코 ‘도련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생일은 몇 개월 차이가 나지만 동갑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 * *

    카를의 예상은 맞았다.

    레젠의 황궁에서 마리아 2세가 아들로 위장하여 양육하던 가짜 황태자는 암살당했다. 가짜 황태자를 암살하고도 황태후는 카를이 어디 있는지 오랫동안 알지 못하다가 겨우 슈벤하임 대공령으로 눈을 돌렸다.

    황태후에게 카를의 위치가 발각되었으므로 슈벤하임 대공은 공공연하게 카를을 귀빈으로 예우하며 보호했다. 카를이 예전처럼 프레데릭과 단 둘이 놀러 다니는 건 불가능해졌다.

    대신 소년들은 발트란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에서 만났다.

    바로 아이기스 나이트의 기사단 본부였다.

    “마수도 때려잡는 기사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누가 암살하러 찾아오겠냐?”

    프레데릭의 호언장담에 윌리엄도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동의했다. 프레데릭과 카를, 그리고 가끔 라울이 함께 어울리던 일행에 어느새 자연스럽게 윌리엄도 끼어들게 되었다.

    나이가 같다는 걸 알게 된 윌리엄은 말을 편하게 하라며 프레데릭에게 권했다. 윌리엄으로서는 무척 긴장하며 건넨 제의였지만 프레데릭은 아주 쉽게 오케이 했다.

    하긴 황태자인 카를에게도 말을 놓는 프레데릭이니 윌리엄에게 말을 놓는 건 어렵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역시 좀 답답해.”

    기사단 본부의 방을 하나 강탈해서 놀이방으로 쓰고 있는 주제에 카를은 불만족스럽게 말했다.

    “황궁으로 돌아가면 더 답답해지지 않겠냐?”

    “……그건 그래.”

    갑자기 풀이 죽어 버린 카를의 등을 프레데릭이 팡 쳤다.

    “난 기사들이 훈련하는 걸 바로 옆에서 볼 수 있게 돼서 좋아.”

    “프레데릭, 넌 기사가 될 거야?”

    대공저에서 기사단 본부까지 가지고 온 간식을 먹으며 윌리엄이 물었다. 프레데릭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응.”

    아버지를 보며 막연하게 갖고 있던 기사의 이미지는 그날의 습격 이후 프레데릭의 안에서 차츰 뚜렷해지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아이기스 나이트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지금은 한결 명확해졌다.

    “난 꼭 기사가 될 거야.”

    “굉장해. 입단 시험은 언제 칠 건데?”

    대답하는 프레데릭의 목소리는 이번에도 자신만만했다.

    “내년쯤?”

    이번에도 윌리엄은 감탄만 했지만 카를은 비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11살짜리 기사는 좀 말이 안 되잖아?”

    “야, 내가 신기록을 세우겠다는데 불만 있냐?”

    “맞아. 프레데릭이라면 가능할 거예요.”

    프레데릭이 그날 싸우는 모습을 목격한 이후 열렬한 추종자가 된 윌리엄은 무조건 프레데릭의 편을 들었다.

    “네가 11살에 기사가 되면 나도 황제다, 황제.”

    “황제가 되는 건 당연한 거니까 다른 걸 내기 조건으로 걸어.”

    두 소년이 투덕거리는 모습에도 익숙해진 윌리엄은 이제 말리지 않고 쿠키만 맛있게 씹었다.

    “근데 이쯤 되면 ‘그 녀석’이 올 때가 되지 않았어요?”

    코코아까지 맛있게 비운 윌리엄이 끼어들자 소년들은 잠시 말싸움을 멈췄다.

    “응.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하세요.’라면서 잔소리를 하러 올 때가 됐어.”

    “레젠으로 돌아가도 그 녀석의 잔소리는 몹시 그리울 거야.”

    “그냥 레젠으로 데려가.”

    “싫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는 카를의 대답을 기다린 것처럼 문이 열리며 라울이 들어왔다.

    “조용히 하세요. 복도까지 시끄럽잖아요. 여긴 기사단 본부라고요.”

    순간 웃음을 터트리는 세 소년들의 반응에 라울이 깜짝 놀랐다.

    “왜,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어리둥절한 그 모습은 소년들의 웃음소리를 더욱 요란하게 했다. 혼자 영문을 알 수가 없어져 울상이 된 라울의 뒤로 소년들의 웃음소리가 번졌다.

    신분을 초월하여 모두가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순수한 어린 시절은 그렇게 소년들을 빠르게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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