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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 <크리스토퍼 메이어, 또는 루이> (13/16)
  • 외전
    <크리스토퍼 메이어, 또는 루이>

    곳곳에 자잘한 상처를 입은 애마가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투레질을 했다. 크리스토퍼는 달래듯이 갈기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애마가 거친 숨을 뿜었다.

    크리스토퍼는 시야가 좁은 투구 사이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서 말을 타고 있는 기사도 많이 지쳐 있을 것이다. 다음 격돌이 마지막이 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전투와 관련된 그의 예감은 아주 잘 맞는 편이었다.

    “이럇!”

    크리스토퍼는 랜스(기병용 창)를 힘 있게 움켜쥐며 말을 달렸다. 상대 기사도 말을 몰며 돌진하였다.

    대경기장이 무거운 긴장으로 조이고, 두 마리의 말과 두 명의 기사가 공격을 교환하며 스쳤다. 엇갈린 말이 반대편으로 달려갈 때, 끝까지 말 위에 남은 기사는 크리스토퍼뿐이었다.

    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나뒹군 상대 기사의 투구 안쪽에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와아아아아!”

    하늘로 높이 랜스를 치켜든 크리스토퍼에게 환호성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올해로 7연승이라는 기록을 경신한 기사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크리스토퍼도 투구를 벗으며 관객석의 어느 한 곳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곳에는 그의 아내와 뱃속의 아이가 누이와 함께 그를 응원하고 있다. 거리가 멀어서 얼굴도 구분이 되지 않는 관객석으로 크리스토퍼는 손을 흔들었다.

    이곳까지 수잔나와 로젤린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자네 정말 굉장했어. 7연승이라니 당분간 깨지지 않을 대기록이라고!”

    “내년에 크리스토퍼가 또 깨야지.”

    동료 기사들이 크리스토퍼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했다. 크리스토퍼의 승리를 축하하는 기사단원들의 모임이었다.

    크리스토퍼는 동료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의 눈은 연신 문가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눈치 챈 동료 기사 한 명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 친구 집으로 빨리 보내 줘야겠는데?”

    크리스토퍼도 멋쩍은 표정으로 웃었다.

    “미안. 수잔나의 산달이 얼마 남지 않아서 자꾸 걱정이 되네.”

    “언제는 수잔나 씨가 걱정이 안 된 적이 있었냐? 팔불출 녀석.”

    동료들이 짓궂게 놀리긴 했지만 덕분에 크리스토퍼는 자신이 주인인 술자리에서 일찍 풀려났다.

    언제나 수잔나 생각을 한다는 동료들의 놀림은 맞기도 했고 틀리기도 했다. 산달이 가까워지면서 언제나 하던 크리스토퍼의 걱정은 더 심해졌으니까.

    - 첫 아이라서 더 걱정이야.

    크리스토퍼는 급히 집으로 걸어갔다.

    수잔나는 걱정이 너무 심하다고 웃으며 핀잔을 주었지만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가능하다면 24시간 내내 옆에 있어 주고 싶었다. 계속 옆에 있으면 수잔나는 오히려 신경이 더 쓰인다며 나가 있으라고 밀어낼 것 같았지만 말이다.

    모임까지 일찍 빠져나와서 집으로 갔지만 크리스토퍼는 수잔나와의 시간을 내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손님이 응접실에 있었다.

    “크리스토퍼, 후작님이 오셨어.”

    수잔나는 매우 놀란 얼굴이었다.

    평민인 그녀에게 황족이기까지 한 클레타트 후작은 먼 하늘의 구름이나 똑같은 존재였다. 시댁인 메이어 남작가가 후작의 아래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가끔 얘기는 들었지만 만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높으신 후작 나리를 어떻게 대접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어정쩡하게 있던 수잔나는 크리스토퍼의 귀가에 겨우 안도하였다.

    변변한 대접은 받지 못하고 있었지만 클레타트 후작은 불쾌감 없이 인사했다.

    “약속도 없이 찾아와서 미안하네.”

    해가 떨어지는 늦은 시각이다. 이 시각에 약속도 없이 찾아왔다면 평범한 용건은 아닐 것이다. 은밀한 용건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후작을 수행하는 부하도 한 명 뿐이었다.

    수잔나를 다독여 안방에서 쉬게 한 크리스토퍼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오시는 길에 불편함은 없으셨습니까?”

    후작이 직접 메이어 남작을 만나기 위해 방문한 적은 있었지만 그 방문은 전부 남작의 본가였다. 분가하여 따로 사는 크리스토퍼를 만나기 위해 후작이 친히 방문할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크리스토퍼는 후작의 사람이 아니었다. 후작의 사람은 메이어 남작과 그의 장남이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날 찾아왔냐고 대놓고 묻고 싶은 걸 참고 넌지시 인사부터 했다. 후작은 그가 하려고 하는 말을 알고 있는 것처럼 낮게 웃었다.

    “레젠의 치안이 나쁘면 제국에서 갈 곳이 없겠지.”

    “예, 그렇군요.”

    찾아온 이유를 고민하다 보니 대답은 어색했다. 다행히 후작도 잡담으로 시간을 끌지 않았다. 몇 마디 어색한 대화 끝에 후작은 곧 용건을 꺼냈다.

    “자네가 머물기에 골든 나이트는 좁지 않나?”

    단도직입적인 말에 크리스토퍼는 잠시 대답을 잊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크리스토퍼의 배경을 잘 아는 후작의 한마디이다. 크리스토퍼에게는 긴 이야기를 들은 것과 다름없었다.

    골든 나이트는 황제의 직속 친위기사단이다. 쟁쟁한 귀족가의 자제들이 입단하는 골든 나이트에서의 위치를 결정하는 건 기사 개개인의 실력이 아니었다.

    크리스토퍼가 토너먼트에서 연승할 만큼 뛰어난 실력의 기사라지만 그는 고작 남작가의 차남이었다. 골든 나이트에서 크리스토퍼의 한계는 명백했다. 그는 절대 남작가 출신이라는 자신의 태생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후작의 지적을 받기 전에도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러나 후작에게 정곡을 찔리니 현실이 새삼 자각되어 크리스토퍼는 침묵했다. 침묵의 뒤를 잇는 것처럼 후작이 입을 열었다.

    “내 휘하의 기사단이 당장의 영예는 덜하겠지만 먼 훗날까지 자네의 날개를 펴기에는 알맞은 둥지가 아니겠는가?”

    메이어 남작은 과거에 후작의 기사였다. 그의 아들인 크리스토퍼에게도 후작이 제의를 한다는 건 큰 영광이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는 고개를 숙였다.

    “감히 바라지도 못하였던 큰 영광이지만 저는 이미 제 검과 충성과 목숨을 황제 폐하께 바쳤습니다. 제 주인은 황제 폐하이십니다.”

    단호한 거절이었다.

    후작은 잠자코 크리스토퍼를 바라보았다. 제 아비가 후작의 사람임을 알고서도 후작의 휘하가 아니라 황제의 친위기사단에 입단한 크리스토퍼다.

    후작이 천금을 약속하여도 그는 한 번 바친 검을 꺾지 않을 것이다.

    “역시.”

    짧게 웃으며 후작이 손을 저었다.

    “자네라면 그런 말을 할 거라고 짐작했네. 다만 나로서도 자네를 놓치기 아쉬워서 물어봤을 뿐이야.”

    “송구합니다.”

    “자네는 정말 자네 아버지를 빼닮았군.”

    칭찬과도 같은 말에 크리스토퍼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지만 그를 보는 후작의 눈동자는 싸늘했다.

    크리스토퍼는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도 제 아비를 빼닮았다. 메이어 남작이 절대 후작을 배신하지 않는 것처럼 크리스토퍼도 절대 황제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잘되면 골든 나이트에 내 수족을 하나 심어 둘 수 있는 기회였지만……. 넘어올 리는 없었나.’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았으니 실망도 없었다. 후작은 깔끔하게 단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제가 밖까지 모시겠습니다.”

    허둥지둥 따라 나선 크리스토퍼가 후작보다 앞서 문을 열었다. 그때는 두 사람 다 알지 못했다.

    만약 크리스토퍼가 클레타트 후작의 권유를 받아들여 은밀히 황제를 배신하였다면 메이어 남작가가 몰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골든 나이트에 심어둔 그를 잃지 않기 위해 후작은 메이어 남작도 팽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얼마 후, 황제가 메이어 남작을 추적한다는 정보를 얻은 후작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건 황제에게 바친 충성을 다짐하는 크리스토퍼의 얼굴이었다.

    클레타트 후작은 즉시 메이어 남작과 그 일가의 제거를 결심했다.

    * * *

    메이어 남작과 장남 마틴이 자살하였다. 생존한 남작의 두 자식에게 남은 건 기사의 긍지를 더럽힌 불명예와 막대한 빚이었다. 클레타트 후작의 도움으로 장례는 치를 수 있게 되었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값이 나가는 물건은 전부 팔았지만 빚을 갚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자력으로는 변제가 불가능할 만큼 막대한 빚이다. 크리스토퍼가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아버지와 자신의 지인들에게 돈을 부탁하였지만 밑 빠진 독에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많이 피곤하지?”

    오늘도 하루 종일 돈을 빌리러 다니다 지쳐 귀가한 크리스토퍼에게 로젤린이 다가왔다. 돈을 마련할 고민에 깊이 빠져들어 있던 크리스토퍼는 고개를 들었다. 따뜻한 코코아를 가지고 온 로젤린이 옆에 앉았다.

    “이러다가 오빠까지 쓰러지는 건 아닐지 몰라.”

    헐값으로 남작가의 저택을 팔면서 로젤린도 크리스토퍼의 집으로 옮겨왔다. 크리스토퍼는 어린 동생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있는 건 몸뿐인데 쓰러질 리가 있냐.”

    “예전이라면 얼굴도 있다고 말할 텐데 오빠 철들었네.”

    로젤린이 소리 내어 웃었다. 일부러 밝게 행동하는 것을 알고 있는 크리스토퍼는 자신도 편안하게 행동하려 애썼다.

    “나도 계속 집에 있지만 말고 일거리를 찾아볼까 해.”

    “로젤린, 너까지 고생할 필요는 없어.”

    “고생이 아냐. 내 일이기도 한걸. 오빠만 힘들게 할 수는 없잖아.”

    어린 동생이 벌써 일자리를 찾겠다는 결심을 크리스토퍼는 만류했지만 로젤린도 물러서지 않았다.

    “넌 아직 어려.”

    “평민이라면 벌써 일자리를 구했을 나이라구. 오빠는 내가 언제까지 돈도 못 버는 어린애인 것 같아?”

    “내 눈엔 넌 결혼을 해도 어린애로 보일걸.”

    “하나밖에 없는 동생 혼삿길 막히는 소리는 하지 마.”

    장난스럽게 웃으며 로젤린이 그의 어깨를 쳤다. 크리스토퍼는 어깨를 문지르며 씁쓸함을 삼켰다. 어리기만 했던 동생이 언제 이렇게 컸을까.

    “수잔나는?”

    “자고 있어. 언니 깨울까?”

    “아냐, 됐어.”

    다 마신 코코아 잔을 테이블에 놓은 크리스토퍼가 일어났다. 밖을 아무리 돌아다녀도 막막하기만 해서 집으로 돌아왔지만 로젤린과 대화하다 보니 이렇게 쉬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동생이 일을 하고 돈을 벌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오빠로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다시 나가려고?”

    “찾아볼 수 있는 길은 다 찾아봐야지.”

    집에 돌아온 지 한 시간도 안 되어서 다시 밖으로 나가는 크리스토퍼의 뒤를 로젤린이 불안한 얼굴로 따라왔다.

    “오빠, 괜찮아? 요새 안색이 안 좋아. 이러다가 오빠까지 쓰러지면…….”

    크리스토퍼는 문 앞에 서서 잠자코 로젤린을 내려다보았다. 한동안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를 못했는데 어느새 키도 훌쩍 컸다.

    아버지와 큰형이 자살하고 하루아침에 빚더미로 몰려 고생 중인 건 그녀도 마찬가지인데, 오히려 자신까지 염려한다.

    만삭이라서 몸이 불편한 수잔나를 돌보고 익숙하지 않은 집안일을 도맡아서 하고 있는 로젤린이다. 빚 걱정까지 하느라 몸도 마음도 편하지 않을 텐데 힘든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일찍 철이 들어 버린 동생이 대견하지만 안타깝기도 했다. 이럴 때는 오빠에게 어리광을 부려 주면 좋을 텐데.

    “넌 걱정하지 마.”

    그래서 크리스토퍼는 결심할 수 있었다.

    “빚은 오빠가 다 책임질 게.”

    죽은 이들의 불명예와 빚을 짊어져야 하는 사람은 자신이면 족하다. 아내와 뱃속의 아이 그리고 로젤린에게까지 그 빚을 지게 할 수는 없었다.

    걱정을 떨치지 못하는 동생의 머리를 한 번 헝클어준 크리스토퍼는 집을 나왔다. 로젤린은 그가 거리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참 동안 집 앞에 서 있었다.

    크리스토퍼는 일부러 집을 돌아보지 않았다.

    ‘기사단에서 탈단하자.’

    드디어 결심을 했다. 그는 아직 골든 나이트의 소속이었으나 기사단의 월급으로는 백 년이 지나도 빚을 갚는 건 불가능하다.

    이 지경으로 몰리고도 기사로서의 긍지가 그의 검을 꺾는 걸 거부하였지만 가족보다 소중한 건 없었다. 새삼 깨달았다.

    ‘기사단에 있는 것보다 외부에서 내 실력을 팔아서 돈을 버는 게 훨씬 나을 거야.’

    기사가 아니라도 검을 쓸 수 있는 곳은 많다. 크리스토퍼는 길을 걸으면서 신중하게 고민했다.

    용병. 당장 갚아야 할 빚이 있는데 단기간에 목돈을 융통하기가 어렵다.

    마수 사냥꾼. 희귀한 마수를 사냥하면 막대한 돈을 벌 수 있지만 희귀한 마수를 찾는 것도 어렵고 신참인 그는 사기를 당하기도 쉬웠다.

    몇 가지 선택지를 고민해 봤지만 해답은 하나밖에 나오지 않았다.

    ‘검투사…….’

    크리스토퍼는 입속을 맴도는 단어를 곰곰이 되새겼다.

    검투사는 기사들 사이에서 창부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는 위치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어떤 모욕을 당하더라도 가족을 지켜야했다.

    ‘내가 골든 나이트 출신이라는 건 충분한 화제성이 되겠지. 콜로세움에서 화제성이란 곧 돈이고.’

    기사로서의 과거까지 이용해야한다는 사실에 쓴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목돈을 안정적으로 빠르게 벌 수 있으며 수도 내에서 수잔나와 함께 살 수도 있는 선택지다. 그는 자신의 실력이라면 콜로세움에서 최강이 될 거라 확신했다.

    검투사가 되어서 내 실력을 팔자. 그렇게 결심을 굳혔지만 크리스토퍼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아버지가 후작님을 배신하실 리가 없어.’

    크리스토퍼는 아버지를 아주 잘 알았다. 그의 아버지는 작위를 이으며 기사로서의 임무에서 벗어났지만, 그래도 뼛속까지 기사였다. 클레타트 후작이 죽으라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이라고 하면 죽일 사람이다.

    메이어 남작이 클레타트 후작의 재산을 횡령하고 배신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모든 증거는 아버지를 가리키고 있잖아. 누군가가 증거를 조작하여 아버지를 누명을 씌운 걸까.’

    고민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지만 이번에는 해답이 쉽게 도출되지 않았다. 메이어 남작을 모함하고 죄를 뒤집어씌워서 이득을 보는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업상의 이유일까? 아니면 아버지가 사업하실 때 생긴 원한……? 젠장. 모르겠어.’

    남작가의 사업은 메이어 남작과 큰아들 마틴이 했다. 사업에 참여하지도 않고 분가까지 하여 따로 살고 있던 크리스토퍼는 영 짐작이 가지 않았다.

    ‘로젤린에게 물어 볼까? 그 애라면 아버지나 형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고……. 형이 형수님에게도 말한 적이 있을까?’

    크리스토퍼는 요양 중이라서 장례식에도 오지 못한 마틴의 전처를 떠올렸다. 지금처럼 상황이 안 좋을 때 찾아가면 그녀도 부담을 느낄 테니 나중에 방문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버지를 모함한 사람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그들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는 건 빚이었다. 우선 해결해야 할 것은 빚이다.

    한참 고민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크리스토퍼는 고개를 들었다. 고민에 빠져서 발길이 가는 대로 걷다 보니 도착한 곳은 메이어 남작가의 본가였다. 크리스토퍼는 어둑하게 보이는 저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어린 시절과 그의 가족들의 시간이 있던 저택은 이제 낯선 타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 기억과 시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수잔나가 아이를 낳으면 이 집을 꼭 보여 주고 싶었는데.’

    짧은 감상에 젖어 있던 크리스토퍼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내일 당장 기사단 본부에 탈단 의사를 밝혀야겠다. 그전에 그가 소속된 기사대의 기사대장에게는 미리 말하는 게 도리일 것이다.

    늦은 시간이지만 지금 말하지 않으면 결심이 흐려질지도 모른다. 다짐을 굳힌 크리스토퍼는 기사대장의 집으로 가기 위해 저택 앞에서 걸음을 돌렸다. 그때 그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크리스토퍼? 크리스토퍼 맞지?”

    낯익은 목소리다. 크리스토퍼는 크게 놀라워하며 인사했다.

    “피터!”

    “오랜만이다!”

    두 사람은 가볍게 포옹하며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옛 친구로 몇 년 전에 결혼을 하며 레젠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간 피터다. 거리가 멀어서 거의 연락을 주고받지 못한 친구와의 우연한 만남에 크리스토퍼는 근심도 잊고 순수하게 기뻐했다.

    “레젠에는 언제 왔냐?”

    “며칠 됐어. 네가 분가했다는 집 주소를 몰라서 우선 남작님도 뵐 겸 본가로 왔었는데……. 유감이야.”

    피터의 얼굴에서 반가운 웃음기가 사라졌다. 크리스토퍼는 일부러 대화를 돌렸다.

    아버지와 형의 죽음은 그에게 큰 고통으로 남아 있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날 못 찾았던 거야?”

    “응, 혹시 네가 오지 않을까 싶어서 이 근처를 며칠 둘러보고 있었어.”

    “기사단 본부로 찾아오지.”

    그 말을 듣고서야 피터는 뒤늦게 깨달은 표정이 되었다. 나사가 하나 빠진 것처럼 꼼꼼하지 못한 피터는 여전해서, 크리스토퍼의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게 했다.

    “밖에서 이럴 게 아니라 어디 들어가자. 저녁은?”

    “먹었어. 내가 묶고 있는 여관이 술집도 겸하는데 거기 갈래?”

    “가깝냐?”

    “여기서 안 멀어.”

    “그래, 가자.”

    피터가 짐을 푼 여관은 본가가 있는 고급 주택가를 벗어난 한적한 곳에 있었다.

    두 사람은 술과 안주를 주문하여 피터가 묶고 있는 방으로 올라와 술을 마셨다. 술집을 겸하여 소란스러운 1층을 벗어난 조용한 방은 오래 묵혀 두었던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은 곳이었다.

    “지내는 건 어때? 타지라서 힘들지는 않냐?”

    “적응하기가 어렵긴 해. 지금도 잘 적응하고 사는지 모르겠고……. 하지만 사는 게 다 그렇지 않겠냐.”

    “……그렇지. 사는 건 다 그렇지.”

    크리스토퍼는 피터의 말을 반복하며 씁쓸하게 술을 마셨다.

    “가게가 많이 어려워. 사실은 염치불고하고 네게 돈을 빌리려고 찾아온 거였는데……. 미안하게 됐다.”

    메이어 남작가의 몰락은 근방에서 유명하다. 며칠 묶으며 주변을 살폈다는 피터의 귀에 들어가기에도 아주 충분한 소식이었다.

    같이 자란 같은 나이의 친구가 같은 시기에 돈으로 큰 고민을 하고 있다는 현실이 왠지 외롭고 울적해졌다.

    첫마디 후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의 사정이나 돈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밀린 이야기가 많았다. 피터의 아이들과 곧 태어날 크리스토퍼의 아이의 얘기를 나누며 분위기는 많이 풀렸다.

    어느새 처음 주문하였던 술병이 다 비었다. 피터가 아래층에서 새 술과 안주를 가지고 올라왔다. 그 술병들도 곧 비었다. 술기운이 많이 오른 크리스토퍼는 다른 사람, 특히 가족에게는 말하지 못할 고민을 털어놓았다.

    “아버지의 죽음이 이상해. 후작님을 배신할 바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실 분인데 후작가의 자산을 횡령했을 리가 없어.”

    “뒤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확실할 거야. 누구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게 문제지만.”

    크리스토퍼는 술기운이 진하게 섞인 한숨을 뱉으며 빈 술병을 들었다. 거꾸로 들고 탈탈 흔드니 몇 방울이나마 술이 떨어져 입술을 적셨다.

    오랜만에 옛 친구와 만나서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걸까. 많이 취했다. 바로 앞에 앉은 피터의 얼굴도 자꾸 흔들리며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크리스토퍼, 너 괜찮아?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니야?”

    손발이 무겁고 머리마저 아팠다. 크리스토퍼는 테이블에 엎어졌다. 피터가 당황한 목소리로 그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얼마나 취했는지 손발이 제대로 움직이지를 않았다.

    ‘평소보다 적게 마셨는데…….’

    엎어진 채 눈을 감고 있으니 이대로 바닥까지 끌려들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잠이 쏟아지는 것처럼 의식이 차츰 멀어졌다. 근처를 서성거리던 피터가 방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닫고 복도를 걸어갔다. 피터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크리스토퍼는 몽롱한 잠속으로 빠져들며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좇았다. 멀어졌던 발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아니다. 피터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훨씬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발소리다. 한 명이 아닌 적어도 네 명 이상.

    여관에서 네 명이나 되는 남자가 신중하게 복도를 걸을 이유가 뭐가 있을까.

    그런 생각 속에 의식이 서서히 흐려지려던 찰나, 신중한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다. 크리스토퍼가 있는 피터의 방 앞이었다.

    ‘……이상한데.’

    본능적인 위기감이 의식을 붙잡았다. 탁자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팔다리에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마비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설마.’

    무서운 의심이 그를 찾아왔다. 피터의 말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었을까. 크리스토퍼는 이를 악물었다. 나중에 생각하자, 나중에.

    그는 힘없이 늘어진 손을 천천히 움직여서 칼자루를 쥐었다.

    곧 덜컹거리는 소리도 없이 조용히 문이 열리며 발소리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긴장으로 인한 땀이 등에 흘렀다. 숨죽인 발소리들이 차츰 가까워졌다. 살기가 방 안에 가득 찼다.

    제일 앞에 선 발소리가 가까이에 접근한 순간, 크리스토퍼는 엎드렸던 테이블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칼을 휘둘렀다.

    “크아악!”

    습격한 사내 중 하나가 피가 흐르는 팔목을 움켜쥐며 주춤거렸다. 간신히 기습에는 성공했지만 뒤에는 다른 사내들도 있었다. 그리고 크리스토퍼는 그중 한 사내의 얼굴을 알았다.

    클레타트 후작의 심복이었다.

    얼마 전 클레타트 후작을 호위하여 그의 집까지 방문하였던 부하다.

    ‘젠장! 젠장!!’

    그는 한순간에 모든 걸 깨달았다.

    이제야 모든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아버지가 어째서 죽어야 했는지. 아버지의 뒤에 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우고 죽였을 때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은 여태 아버지를 이용하였던 후작이다.

    “죽여!”

    소란을 피우는 것보다 크리스토퍼를 죽이는 게 먼저라고 판단한 사내들이 달려들었다. 평소라면 이 사내들을 제압하는 건 쉽지만 현재 크리스토퍼는 운신이 자유롭지 않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공격하고 방어하며 칼을 휘둘렀지만 옷자락이 차츰 피로 젖어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핏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젠자아앙!”

    크리스토퍼는 울분을 토하며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 나무로 된 창을 그대로 부서트리며 튀어나간 마비된 몸은 바닥에 제대로 착지하지도 못했다.

    간신히 부러지는 건 피했지만 옆구리의 상처는 더 찢어졌다. 어둑한 밤거리에는 도움을 청할 행인도 없었다.

    “잡아! 놓치면 안 돼!”

    아래에도 후작의 부하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크리스토퍼는 옆구리의 상처를 누르면서 필사적으로 달렸다.

    ‘순찰하는 제도 경비대를 만날 때까지만 버티면 돼!’

    그러나 큰 부상을 입고 마비약까지 중독된 사람이 추적을 뿌리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크리스토퍼는 100미터도 달리지 못하고 후작의 부하들에게 따라잡혔다.

    ‘난 여기서 죽을 수 없어! 절대!!’

    “으아아아아!!”

    크리스토퍼는 발악하듯이 외치며 칼자루를 꾹 쥐었다. 마비약으로 인해 희미하게 멀어진 눈앞으로 수잔나와 얼굴도 모르는 아이와 로젤린과 자살한 아버지와 형의 시체가 스쳐갔다.

    레젠의 일각에 흐르는 큰 강에 커다란 자루가 풍덩 빠진 건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 후작의 부하들은 최후까지 그들을 물어뜯었던 남자의 존재에 치를 떨었다. 마비약에 중독시켰는데도 다섯 명이나 죽었다.

    간신히 남자를 죽였다. 그 부상을 당하고도 살아남는다면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다.

    그들은 두 번 다시 이런 사냥감과 만나지 않길 바라며 강변으로 배를 저었다.

    깊은 물속에서 자루를 찢고 빠져나온 남자가 하류까지 떠내려갔다는 사실은 끝내 알지 못했다.

    크리스토퍼는 살아남았다.

    크리스토퍼가 부랑자들 틈에 섞여 레젠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한 달이 지난 후였다.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의식을 잃고 떠내려가다가 어느 사내에게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 사내가 시체를 뒤져서 물품을 훔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간신히 숨이 붙어 있는 걸 보고도 외면하고 도둑질을 할 만큼 악랄하였다면, 크리스토퍼는 죽었을 것이다.

    십 일만에 의식을 회복한 크리스토퍼가 제대로 걷게 되기까지는 이십 일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크리스토퍼는 검을 비롯하여 갖고 있던 모든 것을 털어 사내에게 사례로 주었다.

    대신 받게 된 사내의 허름한 옷과 망토를 뒤집어쓴 크리스토퍼의 인상은 한 달 전과 완전히 달랐다.

    한 달 동안의 병상 생활은 그에게 수척함을 주었고, 후작의 배신과 친구의 배신은 그에게 끝없는 고통과 분노를 주었다.

    우연히 과거의 지인과 마주쳐도 크리스토퍼를 바로 알아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수잔나…… 로젤린…….’

    크리스토퍼는 중얼중얼 두 사람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한 달이나 지났다. 수잔나는 이미 아이를 낳았을 것이다. 무사히 낳았을 거라고 믿었다.

    지금 당장은 두 사람이 무사한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이는 괜찮은지, 그것만이 절실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가 살았던 집은 이미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크리스토퍼는 망연자실하게 집 앞에 섰다.

    ‘어디로 갔을까? 도망을 쳤을까? 채권자들을 피해서? 아이는 어떻게 됐지? 수잔나는 무사할까?’

    끝이 없는 질문들이 그의 가슴을 턱턱 쳤다.

    완전히 몸이 회복되지 않은 크리스토퍼는 오직 가족들을 만나야겠다는 의지만으로 이곳까지 왔다. 그 끈이 끊어지자 이 자리에서 쓰러져 죽을 것 같은 절망감과 무력감이 덮쳤다.

    “누구세요? 남의 집을 힐끔거리면서 뭘 하는 거예요?”

    때마침 집에서 나온 중년의 부인이 불쾌한 시선을 던졌다. 크리스토퍼는 간신히 버티고 섰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후작의 눈이 어디에 있을지 모른다.

    “……이 집에 예전에 살던 사람의 지인입니다만, 이사를 갔습니까?”

    “빚쟁이들에게 쫓기던 젊은 부부랑 여동생이요?”

    여자는 불쾌한 시선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지만 크리스토퍼에게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저도 그 사람들이 집을 팔고 난 뒤에 들어온 거라서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빚쟁이들 때문에 난리가 났었대요. 밖에서 유일하게 돈을 벌어오던 남편이 야반도주를 하는 바람에 남은 가족들이 시달렸다지 뭐예요. 쯧쯧, 그 아가씨는 홀몸도 아니던데 어쩌자고 제 가족 내팽개치고 저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그런 놈과 결혼을 해서 그 고생인지.”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는 모르십니까?”

    “모르죠. 그 후의 소식은 못 들었어요.”

    이만 용건이 끝났으면 돌아가 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한 여자는 문을 쾅 닫으며 들어갔다.

    크리스토퍼는 넋이 나가 정처 없이 걸었다. 살던 집 근처에 오래 머무르면 후작의 부하에게 발각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간신히 그를 걷게 하였지만, 이내 의미가 없어졌다.

    수잔나도 로젤린도, 아버지도 형도 없는데 혼자 살아있어서 뭘 할까. 그냥 이대로 죽을까? 죽으면 수잔나와 로젤린을 만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긴 병상 생활로 인해 피폐해진 머릿속에 수잔나와 로젤린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충격이 겹쳤다. 크리스토퍼는 제대로 된 생각을 도무지 할 수가 없었다. 막막한 절망감만이 가슴을 쥐어뜯었다.

    태양이 한 번 졌다가 뜨고, 또 한 번 더 졌다가 떴다.

    광장의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그를 구걸하는 거지로 봤는지 몇몇 사람이 앞에 돈을 던져 주며 지나갔다.

    크리스토퍼는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식사도 하지 않았고 잠도 자지 않았다. 후작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위기감도 사라졌다. 혼자 남았는데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는 천천히 죽음과 절망의 늪으로 가라앉았다.

    “15살의 소녀가 콜로세움에 검투사로 데뷔합니다!”

    소란스러운 광장의 대낮에 콜로세움을 홍보하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첫 상대는 사흘을 굶어 굶주린 사자! 15살의 어린 이 귀족 소녀가 과연 사자를 죽이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배당이 어떻소?”

    “살아남는다는 쪽에 걸면 일확천금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결국 죽는다는 거잖아.”

    질문을 한 사내와 대답을 한 콜로세움의 사람이 서로 킬킬거리며 웃었다.

    15살의 귀족 출신의 소녀라는 프로필에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드러냈다. 그중에서 소녀의 승리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근데 정말 귀족은 맞소? 어느 촌구석 준남작의 딸내미는 아니겠지?”

    “놀랍게도 제도의 귀족이랍니다! 여러분들도 몇 달 전에 한 번은 들으셨던 적이 있을 거예요. 후작 나리의 돈을 횡령해서 몰락한 바로 그 메이어 남작가에서 생존한 유일한 자식이랍니다!”

    그 한마디가 서서히 꺼져가던 크리스토퍼의 의식을 순식간에 각성시켰다.

    “겨, 경기는 언제입니까?!”

    구걸하던 거지가 갑자기 질문을 하자 콜로세움의 사람은 깜짝 놀라면서도 충실히 홍보했다.

    “경기는 바로 내일! 형씨가 오늘 내내 구걸한 돈으로 제일 싼 자리 입장표 하나는 살 수 있겠구만.”

    “살아남는 것에 동화 한 닢이라도 걸어 보지 그래? 대박이 나서 거지생활 청산할지 누가 아나.”

    사람들이 웃으며 조롱했지만 크리스토퍼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앞에 내던져진 동전들을 주섬주섬 주워 모아 달려갔다. 등 뒤로 요란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다음날 콜로세움.

    누구도 믿지 않았던 기적적인 승리가 펼쳐졌다.

    15살의 귀족 소녀가 굶주린 야수에게 쫓기다 피투성이가 되어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구경하러 왔던 관중들은 소녀의 승리에 열광했다.

    가냘프고 여린 귀족 소녀는 사자의 피로 온몸을 흠씬 적신 채 살아남아 사자의 시체를 딛고 섰다.

    “로젤린!”

    “로젤린 메이어!”

    앞으로 10년 동안 콜로세움에 울리게 될 이름의 전초라는 것을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다.

    열광하는 관중석의 구석에서 입을 틀어막고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트리는 한 명의 남자가 있었다. 예쁘던 머리칼은 짧게 잘렸고, 고운 옷은 둔탁한 갑옷이 되었고, 부드러웠던 피부는 온통 피범벅이 되었다.

    그렇지만 로젤린은 승리하였다. 승리하여 살았다. 살아남았다.

    ‘미안해, 로젤린. 미안해…….’

    크리스토퍼는 숨죽인 채 오열하였다. 어린 동생이 지게 된 짐의 무게가 너무나 숨 막혔다. 그러나 그가 로젤린과 짐을 나눠지는 건 불가능했다.

    그가 접촉하였다는 걸 후작이 알게 되면 로젤린과 수잔나까지 위험해진다. 후작의 눈을 속이며 함께 빚을 갚게 된다고 해도 후작이 사라지지 않는 한 평생 안심할 수 없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복수.

    절망 속에 사그라졌던 복수의 불길이 다시 지펴졌다.

    * * *

    복수만이 그를 살게 했다.

    크리스토퍼는 조급한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무작정 후작을 습격한다면 성공 가능성이 낮다. 그는 후작저의 구도나 경호 체계를 전혀 몰랐을 뿐만 아니라, 알고 있다 하더라도 혼자 수십 명의 경호를 뚫고 후작을 암살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단번에 죽이는 건 너무나 자비롭다.

    그의 가족은 모든 걸 잃었다. 아버지는 평생 충성을 바쳤던 주군에게 배신당해 죽었으며 큰형도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 로젤린은 그 어린 나이에 무거운 짐을 홀로 짊어졌다. 그는 평생 도망자 신세가 되었으며 수잔나는 과부가 되었다.

    가족의 모든 인생이 일그러졌다.

    그가 절망을 맛본 것처럼 후작도 절망 속에 죽어야 했다.

    ‘후작을 좀 더 알아야 해. 후작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그것을 빼앗을 수가 있어.’

    그러려면 먼저 신분이 필요했다. 후작에게 접근하여도 의심 받지 않을 적절한 가짜 신분이. 머릿속으로 계획이 조금씩 세워졌다.

    먼저 크리스토퍼는 대륙 각지에서 뜨내기들이 제일 많이 모이는 용병단에 들어갔다. 대륙에는 인간과 인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용병은 어디서든 환영받는 집단이었다.

    크리스토퍼는 용병을 관찰했다.

    원하는 건 신참이라서 지인도 없고, 고향이 레젠에서 먼 지방이며, 고향에도 연고가 거의 없는 비슷한 나이의 남자였다.

    까다로운 조건인데다 상대방의 과거까지 캐내야 한다. 그는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달래면서 신중하게 선별했다.

    몇 달이 지나고, 마침내 적절한 후보가 나타났다. 루이라는 이름의 풋내기 용병이었다.

    루이는 필라헨 제국의 국경 지방에 위치한 작은 촌락 태생이었다. 성격도 소심한데다 실력도 보잘것없어서 같은 용병들에게도 짐이 된다며 따돌림을 당했다.

    먼저 접근하며 도와주는 크리스토퍼와 친해지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족을 고향에 남겨두고 용병 생활을 하느라 힘들지는 않아?”

    크리스토퍼는 가져온 술병을 주며 루이의 옆에 앉았다. 말수가 적고 소심한 루이지만 그가 ‘친구’라고 믿고 있는 크리스토퍼에게는 긴장을 풀었다.

    “넌 어떤데?”

    “임신한 아내가 있어. 지금쯤이면 아이를 낳았을 텐데 한 번 안아 주지도 못한 쓸모없는 아빠지.”

    “그럼 집에 가야지! 왜 안 가?”

    “도망자 신세니까. 나만 믿고 결혼한 아내에게는 면목이 없어…….”

    진실과 거짓이 비슷하게 섞인 씁쓸한 말은 루이에게 어떻게 들렸을까. 적어도 루이가 구구절절한 과거사를 말하기에는 충분했다.

    “사실 나도 면목이 없어서 고향으로 못 돌아가. 난 사람을 죽였거든.”

    술에 취하여 이웃과 말다툼을 하다 그만 실수로 죽여 버렸다는 과거를 루이는 간신히 털어놓았다.

    사냥꾼이었던 실력으로 그럭저럭 용병단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는 있었지만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은 그를 떠나지 않았다.

    “집에 빚도 있어. 용병으로 지내면 고향에 있을 때보다 돈을 많이 벌 것 같았는데 고향으로 부칠 돈이 없네. 부모님도 나이가 많으시고 아이도 둘이나 있는데 나란 인간은…….”

    술기운 때문인지, 밤의 감성에 젖었는지, 루이는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자신의 과거를 모두 털어놓았다. 크리스토퍼는 그날 밤에 그의 가족 관계와 친구 관계를 대부분 파악할 수 있었다.

    일주일 뒤 크리스토퍼는 루이를 죽이고 그의 신분을 훔쳤다.

    ‘내 복수와는 관계도 없는 무고한 사람을 죽였어.’

    크리스토퍼는 루이를 찌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복수만으로 채워진 가슴 안에서는 죄책감도 생겨나지 않았다.

    이제 그는 자신을 감히 기사라고 칭할 수 없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기사도는 더럽혀졌고 기사로서의 긍지도 꺾였다.

    여기에 있는 남자는 단지 복수에 눈이 먼 복수귀일 뿐이었다.

    신분을 훔쳤으니 이제 위장을 해야 할 때다.

    그가 후작을 아는 만큼, 후작도 그를 알고 있다. 이름을 바꾸고 신분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얼굴과 목소리와 말투와 그리고 검술까지.

    크리스토퍼 메이어의 흔적이 남지 않도록 모든 것을 바꿔야했다.

    깊은 절망감에 빠져 죽을 생각도 했던 크리스토퍼였다. 그에게 죽음과 고통은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크리스토퍼는 먼저 얼굴을 불로 지져 원래의 이목구비를 알아보지도 못할 큰 화상을 만들었다. 그 다음에는 성대에 깊은 상처를 냈다. 머리카락의 염색도 고려했지만 흔한 흑발이었으니 그대로 두었다. 재염색할 시기를 놓쳐 의심을 사는 건 피해야했다.

    제일 어려운 과제는 검술을 바꾸는 것이었다.

    기사로서 검을 배우며 익힌 습관과 버릇을 지워야했다. 한 명의 기사이자 검사로서 완성되었던 크리스토퍼에게는 더욱 힘든 과제였다.

    약간의 실수나 방심으로 과거의 습관이 나오지 않도록 그는 철저히 벗어던졌다. 눈여겨보았던 용병들의 거칠고 실용적인 검술을 떠올렸다. 그렇게 훈련하는 시간도 크리스토퍼는 낭비하지 않았다.

    얼굴과 목의 상처가 낫자마자 새로운 용병단으로 옮겼다. 루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용병 생활을 시작한 크리스토퍼는 실전에 부딪히며 조잡한 용병의 검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아주 가끔, 과거의 루이를 아는 사람이 나오기도 했다. 고향까지 같은 동명이인을 의심하는 기색이 있으면 즉시 죽였다. 날마다 피로 손을 더럽히고 있지만 죄책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루이는 돈이 필요했어. 돈을 버는 즉시 고향으로 보냈을 거야.’

    여유 자금이 생기자 루이의 고향으로 돈을 보냈다. 이 행동이 루이를 완전히 흉내 내기 위한 목적인지, 아니면 마음에 숨겨진 알량한 죄책감 때문인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흉내이든 죄책감이든 뭐든 상관없지만.’

    크리스토퍼는 가면 안쪽의 흉터를 손으로 문지르며 눈을 찌푸렸다. 흉측한 화상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지만 때때로 상처가 욱신거리면서 쑤셨다.

    결코 완쾌되지 않을 화상의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크리스토퍼는 복수를 생각했다.

    클레타트 후작의 행보는 특별히 변하지 않았다. 마치 메이어 남작의 죽음이 그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듯이.

    ‘아버지가 평생 후작과 후작의 모후에게 바친 충성의 의미는 뭐였을까. 나는 왜 기사가 되었던 거지?’

    후작의 기사로 살았던 아버지를 동경하여 기사가 되길 선택하였던 크리스토퍼다. 그는 아버지의 인생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도 부정당한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허무함과 고통은 언제나 복수라는 해답을 내놓았다.

    모든 생각의 끝은 오직 복수였다.

    용병들의 세계에서 명성을 얻은 크리스토퍼는 직접 용병단을 꾸렸다. 루이의 용병단은 소규모였지만 구성원 개개인의 실력이 일류였다. 크리스토퍼의 실력을 동경하여 용병단까지 따라온 이들이다.

    큰 용병단처럼 직접 전쟁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우는 건 어려웠으나, 소규모 용병단에게 들어오는 자잘한 의뢰는 명성을 알리기에 충분했다.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하는 루이 용병단.

    크리스토퍼가 바랐던 대로 소문이 났다. 차츰 귀족들의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어느 귀족의 대리인이 크리스토퍼를 찾아왔다.

    “멕켈 백작님의 대리인 자격으로 찾아왔소. 당신이 바로 그 루이 용병단의 단장인가?”

    순간 짜릿한 희열이 크리스토퍼의 눈앞을 어지럽혔다. 멕켈 백작은 클레타트 후작의 처남이다. 드디어 후작에게 끈이 닿았다.

    “그렇소.”

    거북하기 짝이 없는 크리스토퍼의 목소리를 들은 대리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크리스토퍼의 목소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반응을 한다.

    “큼큼, 의뢰를 받으면 무엇이든 한다는 소문을 들었소.”

    “적절한 대가를 치른다면 무엇이든.”

    “어린아이를 죽인다고 해도?”

    가면으로 가려진 크리스토퍼의 눈빛이 빛났다.

    이건 멕켈 백작이 단순히 허드렛일을 처리하기 위해 루이 용병단을 찾은 게 아니었다. 하나의 시험이었다. 어디까지 더러운 짓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시험.

    “물론이오.”

    “좋소.”

    대리인이 낮게 속삭였다. 단 둘만 있는 여관방이었지만 그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다.

    “백작님의 봉신 중 데노트 남작이 있소. 그에게 9살짜리 외아들이 있는데 그 아이를 죽이시오.”

    “의뢰비는?”

    “원하는 만큼.”

    크리스토퍼는 일부러 소리 내어 웃었다. 돌이 갈리는 것 같은 웃음소리에 대리인의 표정은 조금 창백해졌다.

    “받아들이겠소.”

    “이유는 묻지 않으시오?”

    “이유를 물으면 의뢰비를 더 주는 거요?”

    그의 대답에 대리인도 비로소 웃음을 지었다. 돈만 된다면 무엇이든 하는 루이 용병단이라는 수식어를 떠올리며 크리스토퍼도 웃었다.

    이유는 있을 것이다. 멕켈 백작이 데노트 남작의 영지를 환수하기 위해 후계자를 죽이는 것일 수도 있고, 데노트 남작이 멕켈 백작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나뿐인 자식이 살해당한 데노트 남작의 원한을 이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단지 루이 용병단을 시험하기 위한 목적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죄 없는 어린아이를 죽이게 되었다는 생각을 해 보아도 복수심만이 남은 심장은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나는 죽으면 분명히 지옥으로 떨어져서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될 거야.’

    그래도 상관없었다.

    복수만 할 수 있다면.

    부하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어떻게 어린애를 죽입니까?”

    “이번에 멕켈 백작을 잡으면 돈이 저절로 굴러들어올 거라고.”

    전자의 의견을 주장한 부하들은 용병단을 탈퇴했다. 크리스토퍼의 곁에는 돈만 된다면 어린아이도 서슴지 않고 죽이는, 단장 못지않은 악랄한 쓰레기들만이 남았다.

    후작의 시험은 크리스토퍼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어린아이를 죽이고도 제국의 실세 귀족인 멕켈 백작이라는 연줄이 생긴 것만을 기뻐하는 이 사람들이라면, 크리스토퍼도 거리낌 없이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다.

    멕켈 백작의 의뢰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단장을 찾는 분이 있소.”

    드디어 때가 왔다. 대리인이 그를 어느 귀족의 지방 별장으로 안내했다. 크리스토퍼도 아는 곳이었다. 클레타트 후작의 별장 중 한 곳이다.

    모르는 척 연기하며 대리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문 앞에 도착해서야 대리인이 속삭였다.

    “안쪽 방에는 제국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이 계시오.”

    “여기가 황궁이기라도 한 거요?”

    “제국의 적통 후계자는 황제가 아니질 않소.”

    크리스토퍼는 놀란 척 연기했다.

    “설마……. 클레타트 후작님?”

    대리인이 만족하며 문을 열었다. 크리스토퍼는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오후의 햇살이 따사롭게 비치는 너른 응접실에 클레타트 후작이 있었다.

    예상하고 있던 얼굴이었지만 살기가 끓었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후작의 목을 긋고 메이어 남작가가 너를 죽이는 것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제 손으로 제 기사를 죽이고도 장례를 위문한 가증스러운 얼굴을 짓이기고 싶었다.

    “무례한 놈! 예의를 갖추어라!”

    멕켈 백작의 못마땅한 목소리가 응접실 안을 울렸다. 크리스토퍼는 간신히 이성을 회복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후작은 쉽게 죽여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그는 주문처럼 그 말을 반복하면서 깊이 허리를 숙였다.

    “루이입니다.”

    귀족을 대하는 예법을 전혀 모르는 천한 평민의 인사에 멕켈은 더 못마땅한 얼굴이 되었다.

    “가면을 벗어라. 천것은 제가 어느 분을 알현하는지도 모르는군.”

    모멸적인 말이었지만 크리스토퍼는 담담히 가면을 벗었다.

    “……!”

    적나라하게 드러난 끔찍한 화상의 흉터에 멕켈이 크게 흠칫했다. 후작도 놀란 눈치였다.

    “가면을 쓰는 걸 허락하마.”

    “감사합니다.”

    크리스토퍼는 가면을 벗었을 때처럼 다시 담담히 썼다. 후작도 멕켈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길게 얘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놀란 기색을 거둔 후작이 지루한 어조로 말했다. 크리스토퍼가 언제나 들어왔던 후작의 목소리였다.

    “나는 개가 필요하다. 시궁창에서 구르는 것도 서슴지 않으며 도덕과 윤리도 없는 개가 필요하지.”

    “후작님께는 많은 기사가 있지 않으십니까?”

    “감히 말대꾸를……!”

    울컥하여 나서려는 멕켈을 제지한 후작이 대답했다.

    “기사는 이제 필요 없다.”

    “…….”

    간신이 억눌렀던 살기가 다시 끓어올랐다. 누구보다도 충직하였던 기사를 배신하여 죽인 후작이 이제 기사가 필요 없다고 단언했다. 아버지의 평생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내 개가 되지 않겠나?”

    클레타트 후작은 과거 그에게 자신의 기사가 되길 권하였던 것과 똑같은 어조로 자신의 개가 되길 요구했다.

    크리스토퍼는 입술을 씹었다. 찢어진 입술에서 핏방울이 떨어져 가면 안쪽에 고였다.

    ‘그래, 후작에게는 기사나 개나 똑같았던 거야.’

    그렇다면 자신은 개가 되면 된다. 기사로서의 과거를 버렸으니 개가 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먹이는 넉넉히 주십니까?”

    “개 먹이를 못 줄 만큼 가난해 보이나?”

    크리스토퍼는 대답 대신 후작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후작의 웃음소리가 머리 위로 울려퍼졌다. 그가 아는 후작의 웃음소리다. 놀라우리만큼 후작은 변한 것이 없었다. 솟구치는 살의를 억누르며 크리스토퍼는 다짐했다.

    지금 무릎을 꿇은 이 개는 언젠가 반드시 주인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이다.

    클레타트 후작의 부하가 되었지만 당장 후작의 신뢰를 얻게 된 건 아니었다. 크리스토퍼는 충실하게 후작의 명령을 이행하면서 후작에게 접근할 기회를 엿보았다.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되었다.

    크리스토퍼 자신이 죽는 건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후작은 위협이 되지 않는 로젤린과 수잔나를 내버려 두고 있다. 만약 그가 실패하여 후작이 메이어 남작가를 의심하게 된다면 로젤린과 수잔나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했다.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신중하게.’

    크리스토퍼는 후작을 볼 때마다 살기가 치솟는 자신을 다스리려는 것처럼 수없이 그 말을 반복했다.

    크리스토퍼는 후작의 명령은 무엇이라도 따랐다. 죽이라면 죽이고 살리라면 살렸다. 죄가 없는 무고한 사람을 후작의 명령 때문에 죽여도 마음의 동요는 전혀 생기지 않았다.

    결심하였던 대로 크리스토퍼는 후작의 개가 되었다.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개는 차츰 자신의 영역을 넓혀 주인에게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크리스토퍼는 후작의 바로 옆에서 후작과 독대할 수 있는 위치를 가졌다.

    마음만 먹는다면 후작을 죽일 수 있다.

    후작을 죽일 수만 있다면 자신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후작을 죽이고 후작저를 탈출하지 못하여 체포되어도 상관없었고, 멕켈 백작을 비롯한 후작의 다른 부하에게 살해당하여도 상관없었다.

    ‘후작만 죽이면 돼.’

    크리스토퍼가 바라는 건 오직 그것뿐이었다.

    또한 크리스토퍼는 고민했다. 후작의 염원이 무엇인지.

    클레타트 후작과 카를 5세의 권력 투쟁은 은밀히 계속되고 있었다. 메이어 남작가의 멸문도 권력 다툼이 없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사건이었다. 역시 후작의 염원은 황제가 되는 것일까.

    ‘황제가 되길 바라지 않는 자가 권력 투쟁을 할 리는 없어.’

    황제위를 노리는 황위 계승자간의 알력은 수천 년 전부터 끊이지 않았던 일이다. 황위를 노리는 자이니 당연히 황위에 오르는 것이 최고의 바람일 것이다.

    가장 좋은 복수는 후작이 황제가 되자마자 죽이는 것이다. 그때가 오길 기다리는 건 어렵지 않지만 후작이 황제가 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죽여야 해. 차츰 황위에 가까워지고 있을 지금에.’

    크리스토퍼는 결심을 굳혔다.

    드디어 좋은 기회가 왔다.

    이른 아침부터 주치의가 후작저를 방문하여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고 돌아간 날이었다. 크리스토퍼는 서재에서 술을 마시는 후작의 곁을 호위하게 되었다.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후작이 있었다.

    클레타트 후작은 스스로 검을 들고 자신을 지킬 실력이 없다. 이대로 칼을 뽑아서 후작을 죽이는 건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같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하던 후작 부인이 물러나자 마침내 후작은 혼자 남게 되었다.

    후작의 무방비한 등이 그의 바로 앞에 있었다. 후작 부인을 먼저 보낸 후작은 말없이 술만 마시고 있었다.

    지금이 바로 기다려왔던 때라는 것을 확신했다.

    크리스토퍼는 은밀히 손을 움직여서 칼자루를 잡았다. 위치도 좋다. 클레타트 후작을 죽이는데 1분 이상의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후작이 등받이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지루하고 따분하군. 루이, 넌 인생이 즐겁나?”

    크리스토퍼는 칼자루를 쥔 채 나직이 대꾸했다.

    “즐겁지 않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놈이 인생이 안 즐겁다는 얘기를 하는 건 처음이군.”

    피식 웃은 후작이 술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잔속에서 찰랑거리는 술이 몇 방울 술잔 밖으로 튀어 후작의 옷에 붉은 얼룩을 만들었다.

    잠시 그의 분위기를 살폈다. 이상한 질문이다. 술에 취했기 때문일까.

    “내가 황제가 되는 건 어머니의 염원이자 유언이었지. 마지막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기도 하고 카를과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줄다리기를 하는 건 즐거운 유흥거리지만 그래도 역시 지루해. 근본은 변하지 않는 건가.”

    크리스토퍼는 이상한 질문에 현혹되어 후작의 말을 들은 것을 후회하였다. 유흥거리라니. 단지 그것만을 위하여 형과 아버지는 비참하게 죽어야 했다는 말인가.

    더 이상 얘기를 들을 필요도 없었다. 크리스토퍼가 칼을 뽑으려던 때, 후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앞으로 난 몇 년 살지 못한다.”

    칼을 뽑으려던 손이 멈칫했다. 크리스토퍼는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을 불신하며 되물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완치할 수 없다는 진단을 오늘 받았다. 남은 시간은 길어야 3, 4년이라더군.”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몇 년 동안 후작을 죽일 기회만 노려왔는데 이제 그 기회를 잡으니 오래 살지 못한다고 말한다.

    크리스토퍼는 칼자루에서 손이 떨어졌다는 것도 모른 채 후작의 등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 속에 후작은 말을 이었다. 크리스토퍼에게 말을 하고 있지만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혼잣말에 가까웠다.

    “이상한 일이야. 죽는다고 하니 탐이 나더군.”

    “…….”

    “루이, 나에게 처음으로 황제의 자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

    “황제가 되어 내 손으로 제국을 멸망시키면 무척 재미있지 않겠나. 제국은 절대 내 이름을 잊지 못하겠지.”

    후작의 낮은 웃음소리가 스산했다. 그 웃음소리에 크리스토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천천히 머릿속으로 후작의 말을 정리하였다.

    후작은 아무리 늦어도 4년 후에 죽는다. 자신의 죽음을 알게 된 후작은 비로소 황제가 되자고 결심했다. 황제와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는 지금도 진심이 아니었던 후작이 처음으로 진심이 된 것이다.

    “즉위한 이후의 미래 같은 건 필요 없어. 어차피 죽을 인간이 후세까지 고려할 이유는 없지. 앞으로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고, 너 또한 더욱 충실한 개가 되어야 할 거다.”

    지금도 무자비한 후작이 직접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앞으로 후작이 황제가 되기 위하여 희생시킬 인명은 더욱 클 것이다. 그중에는 제2, 제3의 메이어 남작가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 후작을 죽여야 한다.

    머릿속으로는 충분히 알고 있지만 크리스토퍼는 망설였다. 진심이 되기로 결심한 클레타트 후작은 황위에 얼마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때에 후작을 죽이면 얼마나 통쾌한 복수가 될 것인가.

    결국 크리스토퍼는 칼을 뽑는 대신 후작의 뒤에 무릎 꿇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만족스러운 후작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크리스토퍼는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은 정말 후작과 똑같은 인종이 되었다. 복수를 끝내어도 절대 웃음을 되찾고 행복한 인생을 살지는 못할 것이다.

    * * *

    후작의 부하가 된 후 크리스토퍼는 일부러 수잔나와 로젤린의 행방을 찾지 않았다. 후작이 눈치 채는 걸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로젤린의 경기를 본 것도 데뷔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수잔나가 엠마라는 이름의 딸을 낳았다는 소식만을 간신히 접했다. 가족들을 버려두고 무책임하게 도망친 남자를 잊고 새 삶을 시작하는 게 수잔나와 엠마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일부러 소식을 좇은 적은 없지만 로젤린은 콜로세움의 유명인이었다. 로젤린이 검투사에서 은퇴하고 레젠을 떠났다는 이야기는 크리스토퍼의 귀에도 전해졌다.

    이제 수잔나는 혼자 남았다. 그녀가 혼자 남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신중하게 대응하던 크리스토퍼는 끝내 냉정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시내에 볼일을 가는 척하면서 얼마 동안 수잔나의 가게 근처를 맴돌았다.

    “엠마!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말고 집에 일찍 들어오랬잖니!”

    “알았어! 지금 가!”

    어린 소녀가 활달하게 외치며 수잔나에게 달려가서 안겼다. 엠마의 머리를 쓰다듬는 수잔나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머물렀다. 10년 전, 남작가가 멸문하고 임신한 몸으로 큰 고민을 하던 그녀의 얼굴에서 보지 못한 여유로움이었다.

    처음으로 보게 된 엠마의 얼굴에도 그늘이 없었다. 두 모녀는 크리스토퍼가 없어도, 그리고 로젤린이 없어도 충분히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

    두 사람의 행복을 직접 확인하자 눈물과 기쁨과 슬픔과 죄책감이 동시에 흘러넘쳤다. 차마 그들을 오래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의 가족이었지만 이제는 그의 가족이 아닌 수잔나와 엠마의 모습은 그가 박탈당한 과거이기도 했고, 그가 가질 수 있었던 미래이기도 했다.

    클레타트 후작만 아니었다면 저 두 사람의 사이에는 그가 있었을 것이다. 수잔나와 엠마의 모습은 더 이상 깊어질 리 없다고 여겼던 분노를 깊게 만들었다.

    크리스토퍼는 수잔나와 엠마를 보아도 그리움보다 분노를 더욱 크게 느끼는 자신의 마음에 씁쓸한 조소를 보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크리스토퍼는 몇 번 더 수잔나와 엠마를 찾아갔다. 가까이에서 보거나 말을 걸지도 못하고 다만 먼 곳에서 바라볼 뿐이었다.

    수확제의 아침에 몰래 바구니를 놓고 간 게 가장 가까웠던 접근이었다.

    크리스토퍼의 안에 있는 분노와 증오는 크리스토퍼 자신이 가장 잘 알았으나, 한 가지 궁금한 건 있었다.

    ‘만약 엠마를 안아 보고, 만약 수잔나와 얘기를 하고, 만약 로젤린을 만났다면 달랐을까……? 그랬다면 분노가 아닌 그리움과 애정을 더욱 많이 느낄 수 있었을까……?’

    만약이라는 가정뿐인 고민에서 답을 내는 건 어려웠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지. 그리움으로 마음이 무뎌지는 것보다는 복수를 간직할 수 있는 게.’

    애정이 아닌 복수가 남아 다행이라고 여기는 자신에게 또다시 조소를 보냈다. 자신의 안에 정말 복수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복수만을 원동력으로 삼고 있을 때 로젤린을 만났다.

    클레타트 후작에게 남은 시간은 짧았다. 후작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던 과거보다 과격한 행동을 옮겼다. 무턱대고 적대적인 세력에 속한 귀족을 암살하거나 가족을 인질로 삼아 협박하는 건 장기적으로 볼 때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클레타트 후작은 그가 집권을 한 후 장기적인 전망까지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황제위와 통치가 아니라 황제위와 파괴였다.

    후작의 행보는 은밀하였지만 거칠고 난폭했다. 크리스토퍼는 후작의 심복인 루이로서 공작을 하기도 했고, 연쇄살인마로서 레젠의 밤을 뒤흔들기도 했다.

    그날 밤에도 부하들과 습격을 했다.

    습격 대상은 옥스타인 공작의 손녀 멜리나였다. 열애에 빠진 소녀는 너무나도 쉽게 함정에 빠졌다. 옥스타인 공작은 명망 높은 귀족이다. 이 소녀를 납치하고 옥스타인 공작을 굴복시키면 신년 축일을 맞아 지방에서 상경하는 대귀족들에게도 후작의 입김이 커질 것이다.

    ‘쉽군.’

    크리스토퍼는 마지막으로 남은 멜리나의 호위기사가 부하들과 싸우는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최후까지 무릎을 꿇지 않고 버티고 있으나 그가 쓰러지는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머릿속에 있는 제도 경비대의 순찰 경로와 탈출 루트를 다시 정리하던 크리스토퍼는 희미한 인기척을 감지했다.

    근처의 담 위를 빠르게 걸으며 접근하는 한 명의 여자가 있었다.

    “하아앗!”

    뜻하지 않은 조우에 그는 숨 쉬는 것마저 잊었다. 다리가 반사적으로 움직여 그녀에게 다가갔다.

    로젤린이었다. 이목구비도 성숙해지고, 키가 많이 크고,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도, 그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10년이라는 긴 시간의 간극은 문제되지 않았다.

    “끄아아악!”

    한순간 넋을 잃은 것처럼 로젤린을 보던 크리스토퍼는 부하의 비명에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흐트러져서는 안 되었다. 복수의 때가 머지 않았는데 여기서 자신의 정체가 들통 나고 수잔나와 로젤린까지 위험해져서는 안 되었다.

    “비켜라.”

    마음을 다잡고 로젤린을 공격했다. 어느 정도 부상을 입힐 각오를 하고 공격했지만 로젤린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검을 쓰는 정석적인 공격도 발길질을 하는 변칙적인 공격도 그녀는 전부 방어했다.

    검을 부딪치고 로젤린의 단호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크리스토퍼는 깨달았다.

    이제 로젤린은 어리고 작았던 동생이 아니었다. 그녀는 한 명의 전사로서 완성된 강인한 검사였다.

    ‘많이 컸구나, 내 동생.’

    검끝에 흔들림을 담지 않으려 애쓰며 크리스토퍼는 로젤린을 공격하고,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검은 그 주인의 마음을 가장 또렷하게 비추는 거울이다. 크리스토퍼는 자신의 검이 음울하고 복수라는 이름의 욕망에 지배되어 있으리란 걸 알았다. 그가 기사로서의 자신을 버린 것처럼, 그의 검도 더 이상 기사의 검이 아니었다.

    하지만 로젤린은 달랐다.

    로젤린의 검은 올곧았으며 대담하였고, 또한 맑았다. 어린 시절 그가 가르쳤던 치기 어린 소녀의 검이 아니었다. 로젤린의 검은 완성된 전사, 아니 기사의 검이었다. 복수귀가 된 그가 스스로 버렸던 기사의 검이 이제 동생의 손에서 그에게 펼쳐졌다.

    그것을 깨닫자 로젤린과 조우하였던 순간보다 강렬한 충격이 그에게 밀어닥쳤다.

    간신히 로젤린을 따돌리고 애초의 계획대로 도주에 성공한 후에도 충격이 사라지지 않았다. 기사로서 완성된 로젤린의 검은 충격이었고 흥분이었으며 전율이었다.

    그의 검과 대비되는 로젤린의 검 앞에서, 크리스토퍼는 복수하기 위해 후작처럼 타락한 자신의 현재가 처음으로 부끄러워졌다.

    복수를 무사히 끝내고 살아남게 된다 하여도, 자신은 이제 두 번 다시 수잔나와 로젤린의 앞에 나설 수 없게 될 것이다.

    기사의 긍지와 신념을 꺾고 무고한 사람까지 죽이는 살인마는 가족을 만나서는 안 된다. 피로 더럽혀진 손으로는 수잔나와 엠마를 안을 수 없다. 로젤린과 더 이상 검을 섞을 수도 없다.

    크리스토퍼는 죽음을 결심했다.

    * * *

    로젤린은 10년 만에 옛집을 방문했다.

    과거에 메이어 남작가의 본가였던 저택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비워져 있었다. 저택의 주인이었던 상인은 전란으로 인해 피폐해진 레젠의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이사를 갔다.

    상인 가족이 이사를 가면서 저택은 다시 매물로서 시장에 나오게 되었다. 저택이 팔리기 전에 레젠으로 오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로젤린은 관리인의 양해를 구하고 저택의 문을 열었다.

    그동안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은 대문이 녹슨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로젤린은 열린 문 안에서 쉽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였다.

    ‘옛날에는 쫓기는 것처럼 집을 팔아치우고 나왔었는데…….’

    감회에 젖은 눈이 저택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헐값에 저택을 팔고, 세간살이도 하나 챙기지 못하고 맨몸으로 나와 크리스토퍼의 집으로 갔었다. 그때는 온 세상에서 쫓기고 내몰리는 기분이었다.

    ‘되돌아올 수 있으리란 생각은 전혀 못했어.’

    그녀가 홀로 빚을 갚게 되리란 생각도 전혀 못했다. 로젤린은 그녀가 태어났고, 또 십수 년을 살아왔던 저택의 옛 모습을 조용히 떠올렸다.

    현재의 저택과 10년 전의 저택은 많은 것이 바뀌었을까. 아니면 그대로일까.

    적어도 로젤린 자신은 많은 것이 바뀌었다.

    한 번 씁쓸하게 웃은 그녀는 마침내 대문을 넘었다. 여름이 되어서 정원에는 덤불과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났다. 몇 달 동안 정원사의 가위를 한 번도 받지 못하여 제멋대로 자란 수풀을 보니 왠지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이맘때의 여름이 되면 예전처럼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났을까.’

    로젤린의 어머니는 장미를 좋아했다.

    어머니가 죽은 후에도 정원에는 사시사철 장미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났었다. 새로이 주인이 된 상인은 장미 정원을 갈아엎고 새 꽃나무를 심었을까. 장미 정원을 그대로 가꾸었을까.

    군홧발로 짓밟히고 관리되지 않은 정원에서는 옛 모습을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그렇지만 로젤린은 저택 근처에 있는 삼나무를 발견했다.

    “와, 이 나무는 아직도 있네.”

    무심코 탄성이 나왔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서 나무의 등걸을 어루만졌다. 바람이 쏴아 불며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나뭇잎의 그늘을 흔들리게 했다.

    어렸을 때는 곧잘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서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치기 일쑤였다. 한 번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던 적 이후로는 나무를 타는 게 금지되었지만 말썽꾸러기였던 로젤린은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안절부절못하는 하녀에게 망을 보라고 시키곤 나무를 기어 올라갔다. 로젤린은 나무 위로 올라갔을 때 멀리까지 볼 수 있는 시야가 아주 좋았다. 아버지나 오빠가 귀가하는 모습을 먼 거리에서 바라보고는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 쪼르르 달려가곤 했었다.

    ‘그 하녀의 이름이 뭐였었지? 음……. 잘 기억이 안 나.’

    그 하녀도 남작가가 멸문할 때 짐을 싸서 나간 사람 중 하나였다.

    월급은커녕 생활이 어려운 지경이었는데도 끝까지 옆을 지켜 준 하녀들도 있었지만 이 저택을 팔게 되면서 모두 흩어지게 되었다.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 보고 싶다.’

    지금이라면 과거에 해 주지 못했던 보상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소식이 닿지 않는 게 아쉬울 뿐이다.

    과거의 기억과 변함이 없는 나무를 발견하고 기분이 조금 좋아진 로젤린은 커다란 청동 열쇠로 저택 정문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적막한 공기가 흔들리며 먼지가 커다랗게 일어났다. 콜록콜록 기침하고는 손으로 먼지를 휘저었다. 경매에 저택을 붙이기 전에 대대적으로 청소를 하긴 하는 걸까.

    ‘상인이라는 그 주인이 전쟁이 끝나고 한 번도 안 살았나 봐.’

    창문은 깨진 채 그대로였고 가구며 집기들도 부서지거나 흩어져 있었다. 바닥에는 시커먼 군홧발과 말라붙은 핏자국이 엉겨 있었다. 그 위를 다시 뽀얀 먼지가 두껍게 덮었다.

    대개 이만한 저택을 거래할 때는 내부의 가구까지 함께 거래되는 게 일반적이다. 로젤린도 가구째로 저택을 팔았었다. 그렇지만 내부가 이 지경이니 아예 가구를 전부 빼내고 빈집만 경매에 올라가게 될 것 같다.

    ‘그렇다는 건 여기 이 가구들이 전부 폐기 처분된다는 거지.’

    로젤린의 한숨에 선반의 먼지가 들썩거렸다.

    저택 내부의 가구들만큼은 그녀가 살았던 과거와 변한 게 많이 없어서 반가웠는데. 아마 눈으로 직접 보게 되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부서진 창문으로 비치는 오후의 햇살 속에 로젤린은 텅 빈 저택 내를 천천히 거닐었다. 고요한 저택에 로젤린의 발소리만 뚜벅뚜벅 울렸다. 한때 까르륵 웃음보를 터트리며 천방지축 뛰어놀았던 기억이 그녀의 걸음 뒤로 아득하게 흘러갔다.

    어린 시절 그녀와 오빠들이 해마다 키를 재며 흠집을 냈던 흔적은 남아 있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던 벽면에는 낯선 사람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아마 그 상인의 가족들이겠지.’

    로젤린은 중년의 부부와 늙은 노인과 네 명의 자식들이 그려진 초상화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이 저택에서 행복했던 만큼 이 사람들도 행복하게 살았을까. 적어도 좋은 기억을 갖고 떠나가 준다면 좋겠다.

    침실과 서재, 놀이방, 식당 등등 가족들의 숨결이 깃들었던 곳곳을 한 바퀴 돌아본 로젤린은 마지막으로 응접실로 향했다.

    오래된 기억을 되살려서 장식장 뒤를 조작했다. 그러자 반대편의 벽이 열리며 숨어 있던 공간이 드러났다.

    이곳에 수잔나와 엠마가 숨어서 전란을 피해 냈었다. 크리스토퍼의 도움 속에.

    어렸을 때 로젤린이 이곳을 알게 된 것도 크리스토퍼였다.

    - 우리 집에도 은신처가 있는 걸 알고 있냐?

    - 정말이야? 지하도를 지나면 레젠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고 그래?

    - 그만큼 좋은 은신처는 아니고.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는 로젤린의 머리를 크리스토퍼가 마구 헝클어트렸다. 평소에는 크리스토퍼가 머리를 헝클어트리면 짜증을 냈지만 그날은 비밀 장소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꾹 참았다.

    - 며칠 숨어서 지낼 수 있을 정도야. 보기보다 꽤 쾌적하고 아늑하다고.

    ‘오빠도 숨었던 적이 있어?

    - 엉. 아빠가 아끼던 도자기를 깨트렸을 때 며칠 튀었지.

    - 아빠한테 일러줘야지.

    혀를 날름 내밀고 얼른 아버지에게 달려가려는 로젤린의 뒷덜미를 크리스토퍼가 붙잡았다.

    - 야. 하여튼 방심을 못한다니까.

    - 아씨. 내가 강아지야? 왜 그런 데를 잡고 그래!

    뒷덜미가 잡혀서 버둥거리는 로젤린의 귓가에 크리스토퍼가 은밀하게 속닥거렸다.

    - 대신 비밀 장소를 하나 더 알려 줄 테니까 아버지에게는 말하지 마.

    로젤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곧 배시시 웃으며 오빠와의 거래에 응했다.

    - 거긴 또 어디야? 이번엔 아빠 방이랑 연결되어 있어?

    - 비밀 장소 내에 있는 곳인데, 아버지랑 형도 모르고 있을 걸? 내가 우연히 발견했을 때 녹슬고 경첩이 망가진 바람에 제대로 안 열려서 엄청 고생했어.

    다른 장소도 아니고 똑같은 은신처 내란 말에 로젤린은 조금 시큰둥해졌다. 그렇지만 작은오빠와 둘만의 비밀이라는 은밀한 즐거움은 재미있었다. 작은오빠는 로젤린이 나무를 타는 걸 봐도 혼내지 않고 같이 올라오는 유일한 가족이었으니까.

    과거의 추억에 웃음 지은 로젤린은 안으로 들어갔다. 가지고 온 램프에 불을 붙이고 천장의 고리에 매달았다. 끼이끼이 흔들리는 램프의 불빛이 벽에 비치며 일렁거렸다.

    내부도 수잔나와 엠마가 살았던 흔적 그대로였다. 정리되지 않은 화로와 이불이 구겨져 있었고 마른 식량의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었다.

    크리스토퍼가 수잔나와 엠마를 위해 준비한 것들이다.

    ‘……바보 같이. 그럴 바에는 언니랑 엠마에게 자기가 누구인지 말하고나 가지. 내색은 안 했지만 수잔나 언니가 오빠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이 바보야.’

    이제는 닿지 않을 투정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벽면을 훑었다. 벽면에 음각된 무늬를 손끝으로 더듬으면서 움직이다가 미세한 균열을 찾았다. 미리 알고 있지 않거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균열이었다.

    옆의 조각과 균열 안쪽의 조각을 함께 눌렀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장치가 해제되었다. 로젤린은 끼긱거리는 불쾌한 소음을 내는 작은 문을 열었다.

    이곳은 일종의 비밀 금고였다. 과거의 주인들은 정말 귀중한 가보나 귀금속, 유언장 따위를 이 비밀 금고에 은밀히 보관하였을 것이다. 크리스토퍼가 이곳을 발견했을 때는 낡아서 글씨가 제대로 읽히지도 않는 종이 몇 장뿐이었다고 했다.

    로젤린은 자신의 보물도 금고에 숨겨두었다. 어린 아이의 보물이었으니 아버지에게 선물 받았던 장난감 나이프나 가지고 놀았던 인형, 모양과 색이 예쁜 돌 정도에 불과했지만.

    ‘나이프는 지금도 쓸 만하겠어.’

    피식 웃으면서 장난감 나이프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어린 아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지만 부유하던 시절에 받은 것이니 칼자루와 칼집의 세공도 섬세하고 예쁘다.

    ‘보석이라도 박혀 있었으면 빚을 갚을 때 뽑아서 팔았겠지?’

    자질구레한 장난감들을 바라보던 로젤린은 일단 챙겨 넣었다. 버리기도 애매하고 두고 가기에도 애매하다.

    그래도 예전과는 달리 로젤린은 집이 있었고, 이제 이렇게 쓸모없는 것들도 집에 장식할 여유가 있었다. 프레데릭이 보면 아주 재미있어 할 것이다. 프레데릭도 어렸을 때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어린애였을까?

    로젤린은 무심코 소리 내어 웃었다. 장난감이나 가지고 노는 프레데릭이라니 정말 상상이 안 된다.

    저녁에 만나면 꼭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다지며 금고의 문을 닫으려던 그녀의 눈에 문득 한 장의 종이가 보였다. 바닥에 놓여 있어서 바로 보이지 않았던 종이였다. 예전에 이런 종이를 넣은 기억이 없다.

    고개를 갸웃한 로젤린은 종이도 챙겼다. 글이 적혀 있는 것 같지만 램프의 빛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다.

    램프를 들고 은신처 밖으로 나온 로젤린은 문을 원래대로 되돌려 닫았다. 먼지가 또 한 번 부옇게 일어났다. 로젤린은 먼지를 피해서 창가로 다가갔다. 오후의 햇살은 글자를 읽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밝았다.

    다급하게 쓰인 듯 휘갈긴 종이의 첫 문장을 읽은 로젤린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크리스토퍼의 편지였다.

    「로젤린.

    이 편지는 수잔나를 만나러 가기 전에 쓰고 있어. 너에게 편지를 쓰면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 걸지도 몰라. 수잔나에게 내가 누구라는 걸 밝히지도 않을 생각이면서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는 건 우스운 짓일까?

    기사가 되었더구나. 널 한눈에 알아봤지만 나설 수가 없었다.

    널 정말 돕고 싶었다. 의연하게 자란 널 보며 함께 기뻐해 주고 싶었어. 하지만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었던 건 베스메틱 백작의 별장에서 마구간의 말을 풀었던 것 정도구나. 상처는 괜찮니? 네가 있는 걸 알면서도 널 도와주지 않았던 나를 마음껏 원망해다오. 나는 복수를 위해서 너도 모른 척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복수가 아니었어도 너에게 밝히지는 못했을 거야. 기사가 된 너와는 다르게 난 이제 기사도 인간도 아닌 타락한 복수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를 손에 묻힌 채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 넌 모를 거야. 너에게 알리고 싶지도 않아. 너와 수잔나, 그리고 엠마만은 절대 몰랐으면 좋겠어.

    이 지경이 되어서도 내 가족들에게는 과거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다니 웃기지도 않아. 지금의 나는 너무나도 끔찍한 괴물이거든. 후작이나 다를 바 없는 괴물이지.

    그런 내게 너의 모습은 구원과도 같았어. 내가 버려야했고 빼앗겨야 했던 것들을 너는 오래도록 간직하고 더욱 빛나게 갈고 닦았더구나. 네가 내 동생이라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널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야.

    복수는 내가 할게. 이제 거의 끝났어. 모든 건 내가 짊어지고 갈 테니 너는 앞으로도 계속 그 빛나는 길을 걸어가렴.

    수잔나와 엠마에게는 말하지 말아 줘. 하루라도 빨리 날 잊고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도록. 너도.

    편지는 태우길 바라.」

    인사도 없는 짤막한 편지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다.

    예상하지 못했던 크리스토퍼의 편지를 읽으며 몇 번이나 한숨을 토했다. 구구절절 심정을 밝히지도 않고 지난 10년의 삶이 무엇이었는지 글자 하나 적지 않은 짧은 편지가 그녀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날 잊으라는 한마디 결론만을 남긴 편지가 안타깝고, 화가 나고, 슬펐다.

    ‘오빠는 진짜 바보야. 마지막에는 이기적으로 한마디 해 주면 안 돼?’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로젤린은 그저 하염없이 크리스토퍼의 마지막 흔적만을 바라보았다.

    루이로서 살았던 크리스토퍼의 삶은 이제 없다. 살아남은 사람은 누구도 루이를 알지 못했다.

    크리스토퍼는 그렇게 모두에게 잊혔다.

    그가 루이로서 지내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복수의 과정을 밟았는지 어떻게 살아갔는지, 모든 건 후작이 죽으며 함께 과거에 묻혀 사라졌다.

    로젤린에게 남은 건 이 편지 한 장뿐이었다.

    내가 모든 걸 짊어지고 갈 테니 날 잊으라는 편지.

    “……웃기지 마! 이 멍청아!”

    로젤린은 짐짓 큰소리로 외쳤다.

    “난 어렸을 때도 오빠 말을 안 들었으니까 지금도 안 들을 거야.”

    안 들을 거야. 안 들을 거야……. 로젤린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빈 저택을 웅웅 울렸다. 밖에서 듣는다면 마치 유령의 목소리 같을까.

    ‘억울하면 오빠도 유령이 되어서 나타나 보든가.’

    그렇게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절대 안 잊을 거야. 평생 오빠를 기억하면서 오빠에게 욕을 하고 오빠 흉을 보고, 오빠를 그리워할 테니까. 이건 날 따돌린 오빠에게 하는 복수야.’

    프레데릭이 들으면 또 웃어 버릴지도 모르는 다짐을 하며, 로젤린은 가방 안에 편지를 곱게 접어 넣었다.

    4일 후의 기사 서임식에서 로젤린은 가슴 안쪽에 크리스토퍼의 편지를 접어 넣은 채, 기사로서의 서임을 받았다.

    십수 년 전, 크리스토퍼 메이어가 골든 나이트로 서임되었던 바로 그 장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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