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12/16)

<에필로그>

클레타트 후작이 사망하고도 멕켈 백작은 항복하지 않았다. 후작의 반란군이 완전히 진압된 건 후작령에서 최후의 최후까지 몰리고 난 다음이었다.

멕켈 백작과 반란의 주모자들은 최후의 저항 끝에 체포되었다. 그들은 레젠이 탈환되면서 체포되었던 클레타트 후작 부인과 나란히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에 비하여 슈벤하임 대공령의 내전은 금방 진압되었다. 프레데릭이 무사 귀환하고 마리안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란군의 기세는 완전히 꺾였다.

반란에 동조하였던 영주들은 영주 본인과 후계자가 평생 발트란의 감옥에 수감되고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하는 처벌을 받았다.

반면에 아이든 백작가는 아이든 백작을 비롯한 직계 전부가 처형당했다. 백작의 작위도 박탈당하고 백작령도 몰수당하는 것으로 아이든 백작가는 두 번 다시 그 이름을 볼 수 없게 되었다.

- 대부인의 유일한 아들이며 발트란이 함락되었을 때 반란군에 의해 영주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후환을 남겨 두어서는 안 됩니다.

신하들은 윌리엄의 처형을 요구했다. 그러나 프레데릭은 윌리엄의 처형만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반대를 무릅쓰고 윌리엄을 유폐시키는 것으로 처벌을 끝냈다.

비록 작위와 사유 재산이 전부 몰수되어 일개 평민 신분이 되었으나 윌리엄은 목숨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형을 원망하지 않고 조용히 유폐될 성으로 내려갔다. 윌리엄의 아내 엘자도 프레데릭의 허락을 받아 윌리엄을 따라갔다.

그렇게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을 때에는 어느덧 여름이 찾아와 있었다. 기나긴 겨울을 보낸 후인지 작년보다 무척 더운 여름이었다.

“물어볼 게 생각이 났는데…….”

레젠의 여름은 발트란의 여름보다 덥다. 레젠의 더위에 욕을 하며 늘어져 있던 프레데릭이 문득 카를을 돌아보았다.

남이 다스리는 도시에 와서 한가하게 늘어져 있는 프레데릭과는 다르게 카를은 바빴다.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레젠의 복구는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란의 상처가 아물기 위해서는 더 오랜 시간과 자금이 필요할 예정이고, 카를의 일은 여전히 많았다.

그래도 친구라고 카를은 일단 들어주는 성의는 보였다.

“뭐지?”

“몇 달 전에 있었던 일이야.”

발트란을 탈환하였던 날, 로젤린과 있었던 이야기를 들은 카를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래서?”

“그래서 내가 어떤 대답을 했어야 했던 건지 알 수가 없다는 거지. 로젤린은 그 후에 다시 그때 일은 꺼내지 않지만 아무래도 가끔 생각이 나더군. 로젤린은 뭐가 필요한 걸까?”

“…….”

잠시 프레데릭을 바라보던 카를은 묘한 얼굴 그대로 한숨을 쉬었다.

“메이어 경이 안타깝군.”

“로젤린이 왜?”

“너 때문에.”

“내가 왜?”

“그 이유를 깨닫지 못하는 시점에서 이미 넌 문제가 크다.”

어쨌든 그의 잘못이라는 말에 프레데릭은 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말실수를 한 것 같지는 않은데 뭐가 문제란 건지. 고민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이 문을 노크했다.

“메이어 경의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전달을 받자마자 프레데릭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식간에 방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카를은 생각했다. 앞으로 자진해서 잡혀 살 모습이 훤히 보인다고.

“로젤린, 들어가도 될까?”

설레는 마음으로 탈의실 문을 노크했다.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기척이 나더니 로젤린이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문이 열렸다. 로젤린의 옷시중을 도와주었던 시녀가 공손히 인사하고 탈의실을 나갔다. 재빨리 들어와서 문을 닫은 프레데릭은 두근두근 설레는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로젤린이 그곳에 서 있었다.

방의 한중간에 서서, 어우러진 고급스러운 예복 차림의 로젤린을 본 순간, 숨이 콱 막혔다. 등 뒤에서 쏟아지는 찬란한 여름의 햇빛이 마치 후광처럼 그녀의 주변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오늘을 위해 새로이 재단한 예복은 늘 그랬지만 역시나 잘 어울렸다. 백색의 예복에 화려하게 어우러진 장식은 금색 수실이고,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부츠는 묵직한 빛을 머금은 검은색이다. 황금색 망토를 고정한 브로치는 진주와 홍옥으로 장식되었다. 망토에 수놓인 문장은 다름 아닌 황가의 문장이었다.

“……멋있어.”

프레데릭은 황홀하게 말했다. 로젤린이 약간 머쓱한 빛으로 웃었다.

“어색하지 않다니 다행입니다.”

오늘은 로젤린이 카를 5세에게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는 날이었다. 동시에 메이어 백작의 작위를 받는 날이기도 하다.

카를은 메이어 남작가의 명예를 되찾아주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후작의 소행이었음이 공식적으로 밝혀지고 메이어 남작가는 불명예를 벗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공적을 고려하여 메이어 남작가는 메이어 백작가로 격이 높아졌다.

초대 메이어 백작이 된 로젤린의 영지는 과거 베스메틱 백작령이었던 곳이었다.

- 베스메틱 백작을 치기 전부터 영지는 너에게 줄 계획이었다. 하지만 내가 너에게 작위를 내리면 나에게 소속된 봉신이 되는 거니 다른 좋은 방법을 찾고 있었지.

작위를 고민하던 프레데릭과 그녀에게 하사할 영지를 고민하던 카를의 이해가 일치했다.

- 기왕 황제가 내리는 작위를 받는 김에 골든 나이트에 입단할 예정은 없나?

넌지시 로젤린에게 물으니 대답은 프레데릭이 했다.

-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절대 안 돼.

비장하기까지 한 대답에 로젤린은 그냥 웃었다.

- 제안을 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한 영광입니다.

이제 잠시 후면 로젤린은 일개 영주의 기사가 아니라, 황제로부터 서임 받은 정기사이자 필라헨 제국의 백작이 된다.

프레데릭은 헛기침을 두어 번했다.

“작위를 받고 나와 완전히 동등해지면 말하려고 했던 건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지금 말해야겠어.”

“서임식장으로 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식이 끝나고 얘기하면 안 됩니까?”

“아니, 지금 꼭 네게 말하고 싶어.”

그의 목소리가 매우 진지하였으므로 로젤린도 더 이상 만류하지 않고 경청할 준비를 했다. 프레데릭은 여전히 그의 눈에 후광을 두른 것처럼 반짝거리는 로젤린을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내 부모에 대해서는 너도 알고 있지? 난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아버지처럼 될 생각도 없다.”

뜬금없는 시작이었다. 로젤린은 의아해졌지만 일단은 계속 들었다.

“죽으면 죽었지 절대 외도하거나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는 일은 없을 거야. 평생을 걸고 맹세하마.”

“…….”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네가 제일 먼저 보이고, 밤에 잠을 자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이 너였으면 좋겠다. 30년쯤 지나서 호호백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더라도 너와 있고 싶어.”

“…….”

“그리고 또…… 너와 나를 닮은 우리의 아이들로 대공저가 북적거리면 몹시 행복할 거야. 물론 아이가 있어야 행복하다는 뜻은 절대 아니지. 원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없어도 상관없어.”

두서없이 얘기를 하던 프레데릭의 목소리는 조금씩 횡설수설이 되어 갔다. 라울에게 단단히 교육을 받고 왔는데 막상 로젤린의 앞에서 얘기하려고 하니 제대로 생각이 안 났다. 프레데릭은 몹시 좌절한 기분으로 로젤린의 표정을 살폈다.

그건 그런데, 얘기하면서 제일 중요한 걸 빼먹은 기분이 든다.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던 로젤린이 이내 눈가를 접으며 미소했다.

“결혼할까요?”

“무, 물론!”

반사적으로 대답한 프레데릭은 그녀에게도 물었다.

“넌 어때……? 나로도 괜찮은가?”

로젤린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깐 눈을 감았다.

날짜를 계산하면 일 년도 되지 않는 지난 시간들은 그녀가 살아온 평생만큼 충만하게 그녀의 안을 채우고 있다. 그 시간 동안, 그녀는 10년간 바라왔던 간절한 소망을 이루었다. 가족을 되찾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행복을 다시 알게 되었다.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프레데릭이 있었다.

만약 프레데릭이 없었다면, 프레데릭을 만나지 못했다면, 소망을 이루고 가족과 행복을 찾은 그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프레데릭 또한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그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로 완성되었다. 로젤린은 그것이 무척 좋았다. 그리고 프레데릭도 무척 좋아할 것이라 믿었다.

로젤린은 그녀의 남은 평생과 시선을 나누며 살아갈 남자에게 속삭였다.

“제 대답은 아주 예전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로젤린과 프레데릭이 다시금 완전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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