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시작의 바람
전장의 공기는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흥분, 공포, 살기, 피 냄새, 비명, 그런 것들이 항상 공기 아래에 자욱하게 가라앉은 채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로젤린은 어깨를 가볍게 떨고는 팔뚝을 문질렀다. 묘한 소름이 돋는다.
막사 밖은 아침 식사 준비를 하는 취사병들로 소란스러웠다. 휘장을 걷고 막사를 나온 로젤린은 잠시 자리에 선 채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베스메틱 백작의 본성이 있었다.
레젠을 출발한 프레데릭 일행은 발트란으로 가지 않고 샤렌의 브류나크 나이트와 합류했다. 브류나크 나이트는 프레데릭의 지휘하에 베스메틱 백작령 방향으로 진군했다. 베스메틱 백작군과 몇 차례 크고 작은 접전이 있었으나 승리는 항상 슈벤하임 대공군이 가져갔다.
로젤린이 최초로 경험한 전장은 어이가 없을 만큼 간단했다. 두 군대의 지휘관을 비롯한 기사단의 역량 차이는 감히 비교할 수준이 못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백작령의 도시들도 소극적으로 방관했다. 오히려 대공군이 가까이 진군하자 성주가 직접 성문을 열고 나와 군량을 제공한 도시도 있을 정도였다.
베스메틱 백작의 직속 기사단과 조우하는 것만 아니라면 슈벤하임 대공군은 거의 무인지대를 달리듯이 백작의 본성으로 질주했다.
레젠을 출발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슈벤하임 대공군은 베스메틱 백작의 본성을 포위했다. 농성전이 시작된 지는 오늘로 5일째였다.
“안녕하십니까.”
프레데릭의 막사로 아침 식사를 담은 쟁반을 들고 가던 병사가 로젤린에게 인사했다. 로젤린의 막사는 프레데릭의 막사 바로 옆에 있었다.
“오늘은 내가 들고 가지.”
로젤린은 시종에게서 쟁반을 받아 프레데릭의 막사로 들어갔다. 쟁반에 있는 식사는 언제나 이 인분이었다.
“좋은 아침, 로젤린.”
아침 식사 전에 가볍게 몸을 풀던 프레데릭이 로젤린에게 방긋 인사했다. 로젤린이 식사 쟁반을 들고 오는 것을 본 그는 얼른 자신이 대신 쟁반을 들었다.
“취사실까지 직접 간 건 아니겠지?”
“설마요. 막사 앞에서 만났습니다.”
가볍게 대화하며 간이 탁자에 앉았다. 고기를 듬뿍 넣은 스튜와 버터로 볶은 감자, 빵 등이었다. 군량이 넉넉하여 식사의 질은 나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식사가 먹을 만하지?”
프레데릭과 로젤린은 매 식사를 함께했다. 항상 바쁘고 일이 많은 전장에서 두 사람이 여유 있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로젤린은 전쟁터의 일과가 백병전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이번에 알았다. 쉴 새 없이 전서구들이 하늘을 오가고 군사 회의가 열렸다.
전쟁터에는 지휘관과 기사, 병사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공병과 잡역부, 군수물품의 관리자 등도 엄연히 전장의 일부였다. 소규모의 원정군도 이 정도인데 대규모의 부대가 움직이면 어느 정도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포위전에서 식량이 떨어지면 산지옥이 따로 없지. 식량이 씨가 마르면 수레를 끄는 말과 소부터 시작하여 군마, 그다음은 인육까지 먹게 되는 거야.”
“네에…….”
로젤린은 나무 스푼으로 듬뿍 들어 올린 고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식사 중에 나올 화제는 아닌 것 같은데. 프레데릭의 센스는 가끔, 아니 꽤 자주 의심이 되곤 한다.
“백작의 본성도 식량 사정이 안 좋을까요?”
“당분간은 괜찮겠지. 본성 자체가 전투적인 목적으로 지어진 건 아니지만 나에게 싸움을 걸 정도라면 식량 비축은 해 두었을 테고.”
프레데릭이 감자를 우물거리며 막사 너머에 있을 베스메틱 백작의 본성 쪽을 보았다.
“수원을 찾아서 식수로에 독을 푸는 방법도 있지.”
“네에…….”
로젤린은 마시려던 물컵을 그냥 도로 탁자에 내려놓았다. 눈치라는 걸 길러 주면 좋으련만.
소소하게 신경 쓰이는 면은 있지만 그래도 프레데릭과의 대화는 즐겁다. 생각해 보면, 프레데릭을 강하게 인식하게 된 것도 마수 떼의 습격이 있던 밤에 기사단을 지휘하는 모습이었다.
‘그때는 지금 생각해도 멋있었어.’
“……그 웃음은 뭐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니 프레데릭이 괜히 켕기는 기색으로 입 주위를 더듬었다. 입가에 음식물이 묻은 게 아닌지 걱정하는 얼굴이다.
평상시에는 한없이 풀어지고 있는 이 남자가 선두에서 군대를 지휘하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얼굴이 된다는 걸, 본인은 알고 있을까.
“그냥요.”
프레데릭이 괜히 머쓱해하며 스튜를 떴다.
“아무튼 공성전은 병법에서 제일 하책이야. 시일도 오래 걸리고 병사와 군수물자의 피해도 크며 전쟁이 끝난 후 회복하기도 어렵지. 지금 공성전을 하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그럼 최고의 책략은 뭔가요? 기습전?”
로젤린은 베스메틱 백작령으로 진군하며 마주친 첫 번째 전투를 떠올렸다. 빠르게 이동하는 와중에도 정찰병을 넓게 운용하여 백작군을 발견한 프레데릭은 기습을 감행했다. 결과는 두 말 할 것 없는 큰 승리였다.
“아니, 전쟁이 필요 없는 것.”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대답이었다. 이어 설명하려는 프레데릭에게 손을 올려서 입을 다물게 한 로젤린은 잠시 생각했다가 대답했다.
“전쟁을 하지 않고 승리하는 게 제일이라는 뜻입니까?”
“맞아.”
프레데릭이 마치 자신이 정답을 맞힌 것처럼 즐겁게 웃었다.
“전쟁은 어떤 방식이든, 아무리 일찍 종결이 되든 피해가 나게 되어 있으니까. 외교적인 승리이든 군사적인 위협만으로 거둔 승리이든 아예 전쟁을 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그런 의미에서 후작의 행보는 확실히 무리수지. 상당히 조급한 선택을 했어.”
대화의 끄트머리는 클레타트 후작에게 이어졌다. 후작이 영지로 도피하여 반란군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며칠 전에 들려왔다. 레젠에 있을 수잔나와 엠마가 걱정이었다.
걱정되는 건 발트란도 마찬가지였다. 요새에 있던 브류나크 나이트는 직접적인 공격은 하지 않고 발트란을 포위한 채 장기전에 돌입했다.
본성에 식량은 넉넉히 비축되어 있다지만 전란에 휩쓸리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하물며 마수 떼로 하여금 발트란을 습격하게까지 한 마리안 부인이니.
“……전쟁이 빨리 끝날까요?”
“끝나도록 노력해야지.”
프레데릭이 담담히 말하며 마지막으로 남은 빵조각을 스튜에 듬뿍 찍어 입으로 옮겼다. 로젤린도 거의 식사를 끝마쳤다.
“새 공성 병기가 후방에서 도착하였으니 오늘 내로 성벽을 무너트리고 저녁 식사는 성내에서 먹는 게 목표다. 이만한 규모의 성을 공략하면서 더 시간을 들이는 것도 한심해.”
본성 밖으로 도주한 피난민과 본성을 왕래하였던 상인들을 통해 성내의 지리를 파악했다. 베스메틱 백작의 본성은 발트란처럼 성내에 내성은 건축하지 않았다. 성벽을 넘는다면 곧 전투의 끝이었다.
“로젤린.”
프레데릭이 잠시 뜸을 들였다가 불렀다.
“성내를 그린 지도를 외웠다고 했었던가?”
“제가 활용할 일은 없겠지만요.”
로젤린은 전투가 있을 때에 프레데릭의 옆에서 호위했다. 그녀가 직접 부대를 지휘하는 일은 없으니 지도를 외울 필요는 없겠지만 브래넌의 충고가 떠올랐다.
- 경도 대공 전하를 섬기려면 기본적인 전술 공부는 해 두는 게 좋을 걸세. 전하께서는 친히 전선에서 전군을 지휘하시는 분이 아닌가. 호위기사가 군대를 지휘할 가능성은 거의 없겠으나 최측근의 기사이니 전술을 배워 나쁠 건 없을 게야.
지도를 외우는 한편으로 군사 회의의 내용이나 부대를 지휘하는 전장의 흐름 등도 파악하려 노력했다. 의아한 부분이 있으면 전투가 끝난 후 프레데릭에게 물었다. 프레데릭은 꽤 좋은 선생이었다.
대답을 들은 프레데릭이 빙긋 웃으며 제안했다.
“그럼 성에 진입하는 부대의 일부를 직접 지휘해 보는 건 어때?”
전쟁터에서 입는 갑옷은 아이기스 나이트로써 입는 가죽 갑옷과는 달랐다. 철제 갑옷을 입는 건 처음이었지만 이젠 많이 익숙해졌다.
취사실에서 일하는 하녀 한 명의 시중을 받아 트랜지셔널 아머(체인 메일과 판금을 결합한 갑옷)를 입었다. 그다음으로 슈벤하임 대공가의 문장이 수놓인 서 코트(갑옷 위에 입는 긴 옷)를 갑옷 위에 입는 것까지 도와준 하녀는 인사하고 물러났다.
본래대로라면 종기사가 해야 할 일이지만 로젤린은 종기사도 없고 정기사도 아니다.
정기사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내가 어떻게 부대를 지휘한담…….’
한숨이 푹 나왔다. 원칙적으로 기사대를 지휘하는 건 정기사의 신분이어야 한다. 게다가 로젤린은 지휘관으로서의 훈련과 교육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 부대를 맡기겠다는 프레데릭의 제안을 바로 거절했지만 프레데릭도 순순히 말을 거두지 않았다.
- 걱정하지 마. 성벽이 함락되면 백작군의 사기는 완전히 꺾일 테고, 시가전이 벌어진다고 해도 큰 규모는 아닐 거다. 경험 많은 부대장을 붙여 줄 테니까 부대를 지휘하는 게 어떤 분위기인지 파악하는 정도로 생각하면 될 거야. 뭐, 부대를 지휘하는 일도 기사의 책무이지.
- 하지만 저는 평기사이고…….
- 기사대장을 임명하는 건 총지휘관인 내 맘이다.
- ……항명할 권리는 없습니까?
- 자기야.
- …….
갑자기 들려온 느끼한 목소리에 로젤린의 팔뚝에는 소름이 돋았다.
-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프레데릭.
- 이번에 부대를 맡아 주면 안 부르마.
- 왜 그렇게 저에게 부대를 넘기시려는 건데요?
- 네가 많은 경험을 하면 좋겠어.
순간 말문이 막혔다. 프레데릭은 가문의 빚을 갚고 기사로서의 명예 회복을 위해 오직 한 길만을 걸었던 그녀의 시야를 틔워 주고자 했다. 그녀의 미래에 기사로서 반드시 주군을 지키고 죽는 외길은 이제 존재하지 않으니까.
- 명령이 아니라 부탁인데, 응? 안 되나? 응? 응?
프레데릭이 로젤린의 손등에 쪽쪽 키스를 하면서 채근했다. 어리광인지 부탁인지 명령인지 모르겠다는 혼란 속에 로젤린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기뻐하며 손등이 아니라 입술에 키스하려던 프레데릭의 입술은 이를 닦고 오라는 말로 튕겨 냈다. 프레데릭은 조금 상심했지만 로젤린도 이건 물러서지 않았다. 식사 후에 바로 키스하는 건 좀 그렇다.
그 후 공성 병기가 도착했다. 군사 회의에는 프레데릭의 호위기사가 아니라 기사대장 중 한 명으로서 참석했다. 프레데릭은 꽤 예전부터 로젤린의 부대를 고민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기사대장으로서의 임명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로젤린은 부상을 입어 후방으로 물러난 기사대장을 대신하여 임시로 배속되었다. 그녀의 부대장은 프레데릭이 장담하였던 것처럼 20년 이상 기사단에서 복무한 중년의 평기사였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아이기스 나이트에서도 지휘한 경험이 없습니다. 제가 잘못된 판단을 한다면 따끔하게 충고해 주십시오.”
수염이 덥수룩한 부대장은 로젤린의 첫인사에 머리를 긁적거렸다.
“먼저 솔직한 말씀을 하셨으니 저도 좋은 말로 에두르지는 않겠습니다. 저희 부대는 일개 기사대일 뿐입니다. 시가전도 거의 없으리라 짐작되는 전투이니 대장님이 실수를 하셔도 전황에 지장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전공을 세운다고 해도 두드러지지 않을 테고요.”
“하지만 제가 실수한다면 부대원들이 위험하지 않습니까. 말씀하신 것처럼 성벽만 함락된다면 전투는 끝난 것과 다름없습니다. 끝난 전투에서 제 전공을 세우기 위해 무모한 진격은 감행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부대를 지휘하는 게 처음입니다. 전장의 기운에 흥분하여 잘못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조금 시큰둥하게 대답하던 부대장이 긁적이던 손을 멈추었다. 그는 거의 딸뻘에 가까운 로젤린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전장에서 이골이 난 몸이니 충고는 해 드릴 수 있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는 건 대장님이라는 사실은 잊지 마십시오.”
“명심하겠습니다.”
로젤린은 심호흡을 하며 그녀의 부대원들을 둘러보았다. 부대를 지휘할 때는 시야를 넓게 가져야 한다는 프레데릭의 충고도 떠올렸다.
새롭게 도착한 공성 병기는 개량한 대포였다. 일반적인 대포의 사거리를 월등히 넘는 개량 대포는 안정성이 검증되지 않아 아직 전선에 배치되지는 않은 병기였다. 프데레릭은 빠른 전쟁의 마무리와 대포의 성능 테스트를 겸하기로 했다.
불발한 대포 한 대가 폭발할 뻔한 위험은 있었지만 다른 대포들은 그 위력을 마음껏 뽐냈다. 성벽에 배치된 궁수대의 화살이 닿지 않는 사거리 밖에서 포탄이 빗발쳤다. 마침내 성벽의 한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진격하라!”
프레데릭의 호령에 맞추어 기수병이 붉은 깃발을 크게 흔들었다. 기세가 오른 대공군의 함성 소리가 하늘에 메아리쳤다.
로젤린이 지휘하는 부대도 성내로 진입했다. 예상대로 본격적인 시가전은 없었다. 사기가 완전히 꺾인 백작군과 소규모의 접전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프레데릭의 엄명으로 인해 대공군은 민간인을 약탈하지 않고 오직 병사들만 상대하며 진군했다.
“내부 지리는 알고 계십니까?”
로젤린이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잠시 멈추었을 때 부대장이 수염에 튄 피를 문지르며 물었다.
“지도는 외웠습니다.”
“제가 충고해 드릴 게 없겠는데요.”
부대장은 실소했다.
“단지 제가 부대를 지휘한다면 아무리 적군의 지휘 체계가 무너졌더라도 첨탑을 지나쳐 진입하는 길은 피하고 싶다는 건 말씀 드리겠습니다.”
부대장의 손짓에 따라 로젤린도 시선을 옮겼다. 진입로 가까이에 첨탑이 있다. 로젤린이 미처 고려하지 못하였던 부분이었다.
“백작군의 지휘 체계는 엉망이지만 간혹 분대 단위로 기습하는 적병이 있을 가능성은 큽니다. 시가전에서 지리를 훤히 파악하고 있다는 건 굉장히 큰 이점입니다.”
“유의하겠습니다.”
로젤린은 기습을 주의하며 부대를 진군시켰다.
성내는 혼란스러웠다. 곳곳에서 불이 나고 국지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많은 수의 병사는 항복하거나 도주하였으나 끝까지 저항하는 병사도 있었다. 로젤린의 부대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잘한 전투를 거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목표는 베스메틱 백작의 생포, 또는 백작저였다. 로젤린의 부대는 후자였다.
백작저를 지키는 부대는 남아 있었다. 그들은 최후의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본래 전투 목적으로 건설된 것도 아닌 평범한 귀족저다. 방어선은 어렵지 않게 뚫리고 정문이 활짝 열렸다. 로젤린은 부대를 지휘하는 기사의 목을 베며 제일 먼저 백작저로 진입했다.
백작저 내부는 혼란스러웠다. 사용인들이 백작저에서 도주하기 전에 한 차례 쓸고 갔는지 온갖 기물이 널려 있었으며 도둑질의 흔적이 역력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충성스러운 사용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대공군을 피해 도망쳤다.
“무기를 들지 않거나 항복하는 자는 공격하지 않는다!”
로젤린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거듭 외쳐서야 약간이나마 진정되었다. 사용인들은 덜덜 떨며 저택 밖에 하나둘씩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저택의 내부 수색을 부대장에게 일임한 로젤린은 제일 먼저 백작의 집무실과 서재로 향했다. 혹시나 중요한 서류가 남아 있는지 살펴보았으나 소득은 없었다. 벽난로에 종이재가 가득한 걸 보니 이미 정리하여 태운 듯했다.
‘후작님이나 마리안 부인과 주고받은 서신이 있다면 좋을 텐데.’
로젤린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책상 서랍을 꼼꼼히 뒤졌다.
“대장님, 어디에도 백작의 일가는 없습니다.”
저택의 수색을 끝마친 부대장이 보고했다. 사용인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으로 보아 백작이 저택에 없으리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베스메틱 백작의 일가는 단출했다. 아내와는 사별하였고, 미혼의 누이는 별장에서 프레데릭을 도주시키며 자결했다. 남은 건 어린 아들 한 명이었다.
‘아들이 10살이라고 했지.’
백작이 도주를 했다면 당연히 어린 아들을 데리고 갔을 것이다. 하지만 사용인들은 입을 모아 백작의 도주를 부정했다. 성벽이 무너지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백작은 직접 갑옷을 입고 최후의 전투를 하기 위해 떠났다는 이야기였다.
사용인들의 말이 진실이라면 백작은 성내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들은 미리 대피시켰을까.
“성이 포위되기 전부터 도련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련님이 병약하신 분이라 포위되면 치료를 받기 어려워서 백작님이 포위되기 전에 도련님을 대피시키셨던 것 같습니다.”
사용인 한 명이 덜덜 떨며 말했다. 다른 사용인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용인들을 심문하던 부대장이 의견을 말했다. 로젤린도 동감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백작저의 본채 내로 다시 들어갔다. 만에 하나의 경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로젤린은 백작 일가의 침실부터 차근차근 넓은 저택을 조사했다. 다시 서재와 집무실을 지나 응접실로 들어왔다. 꼼꼼히 살피던 그녀는 장식장 근처의 벽이 살짝 밀리는 느낌을 받았다.
“여기 벽을 허물어라.”
병사들이 즉시 도끼를 가져와 벽을 부수었다. 작업에 착수한 지 몇 분 되지 않아 자욱한 먼지를 남기며 벽은 무너졌다. 벽 너머는 시커멓게 뚫려 있었다. 안쪽에서 차갑고 습한 공기가 밀려왔다.
추측이 맞았다. 과거 메이어 남작가의 본가에도 이처럼 비밀 통로가 숨어 있었다.
“바로 눈치를 채셨군요.”
램프를 가져온 부대장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로젤린은 짤막하게 대꾸했다.
“비슷한 걸 많이 봤습니다.”
그녀는 직접 선두에 서서 비밀 통로 안쪽을 걸어갔다. 부대장이 차출한 일부 병사들과 뒤를 따랐다.
비밀 통로는 일직선이었다. 한 손에는 바스타드 소드를, 한 손에는 램프를 쥐었다. 한참을 뚜벅뚜벅 걸어가며 이쯤 되면 백작저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을까, 생각하던 차였다.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살기가 향했다.
반사적으로 바스타드 소드를 휘두르려던 로젤린은 곧 멈칫하며 칼을 떨어트렸다. 그러고는 맨손으로 쉽게 상대를 제압했다. 부대장이 바로 바닥에 무릎 꿇린 공격자를 램프로 비췄다. 로젤린은 상대가 공격하였던 나이프를 발로 멀리 차며 허리를 숙였다. 웅크린 채 떨고 있는 사람은 중년의 부인이었다.
“혹시 도련님의 유모입니까?”
그녀는 바르르 떨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로젤린은 병사들에게 턱짓했다. 병사들이 그녀와 부대장을 지나쳐 통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평생 무기를 쥐어 본 적 없이 살았을 중년 부인은 로젤린이 그녀를 풀어 준 후에도 감히 도망치거나 다시 나이프를 찾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사용인들에게 듣자니 도련님의 몸이 편치 않으시다면서요. 이렇게 밀폐된 지하는 공기도 좋지 않고 습기도 많아서 상태가 더 악화되신 건 아닐지 걱정입니다.”
로젤린은 다독거리듯이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웅크린 여인의 어깨가 파르르 경련했다. 통로 안쪽에서 병사들이 돌아온 건 그때였다.
“찾았습니다! 대장님!”
제일 앞에 선 병사의 양팔에 어린 소년이 안겨 있었다. 힘없이 적군의 병사에게 안겨 있던 소년이 여인에게 가느다란 팔을 뻗었다.
“유모…… 괜찮아?”
“도련님!”
여인이 벌떡 일어났다. 병사들이 막아섰으나 로젤린은 소년을 건네주라고 명령했다. 한눈에 보아도 병세가 심한 소년을 끌어안은 유모가 무작정 로젤린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부탁입니다. 대공 전하께 아뢰어 의사의 진료를 받게 해 주세요! 제발!”
“물론이죠. 거절하실 분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로젤린은 칼을 칼집에 넣고 유모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전투는 이 순간 끝났다.
베스메틱 백작은 전투 중에 전사했다.
중요한 서류를 전부 파기하거나 태웠으나 일을 담당하였던 관리들은 남아 있었다. 대다수의 행정 관리들은 백작이 죽고 성이 완전히 함락되면서 항복했다. 성이 포위되기 전에 도주하였던 관리들도 하나둘씩 돌아왔다.
그들을 통해 알아본 재정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난치병인 아들의 치료로 인한 지출이 상당했다.
- 백작령이 국경 지역인 데다 통과하는 상인의 왕래도 잦아 세액은 풍족합니다. 문제는 병으로 돌아가신 마님과 마님의 병을 물려받은 도련님으로 인한 지출이 컸습니다. 한데 몇 달 전부터 출처를 알 수 없는 목돈이 들어와 도련님의 치료에 유용하였습니다. 아마 백작님께서 몰래 백작가의 가보를 파신 게 아닌가 합니다.
백작가의 재정을 관리하던 자는 그렇게 진술했다. 프레데릭은 다른 방향으로 판단했다.
‘후작이 자금을 융통해 줬겠군.’
아들의 치료비를 위해 클레타트 후작과 결탁했다면 무모한 전쟁도 이해되었다.
치료비 때문에 영지민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한 백작의 직할령은 민란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몰려 있었다. 클레타트 후작의 지원이 없었다면 해를 넘기 않고 민란이 발생했을 것이다.
영지민의 이탈도 많았다.
‘빈민가의 빈민들을 이주시켜도 되겠는데.’
프레데릭은 생각에 잠겼다. 일단은 전쟁이 끝난 후에 고민할 사안이다.
클레타트 후작이 끝까지 그를 도와줄 것이라고 베스메틱 백작은 믿었을지도 모르나, 결과적으로는 이용만 당했다.
별장에서 그를 구해 준 실비아의 부탁도 있었다. 프레데릭은 베스메틱 백작의 아들의 치료비를 지원하는 대신 본성에서 추방하고 인근 도시에 저택을 마련해 주었다.
유모를 비롯하여 남은 사용인들은 백작의 아들을 죽이지 않는 것뿐만이 아니라 재정 지원을 해 주는 것에 크게 감사했다.
본성 밖까지 베스메틱 백작의 아들을 배웅한 로젤린은 백작저로 돌아왔다. 프레데릭은 백작저를 임시 처소로 이용하고 있었다.
성이 함락되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성벽은 무너진 채 그대로였다. 보수 공사를 전혀 하지 않은 무너진 성벽은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성내도 죽은 시체들만 간신히 수습하여 묘지에 묻었다. 집이 불타거나 무너진 난민들은 간신히 비와 바람을 피할 곳만 찾았다.
곳곳에 임시 막사가 지어져 부상병을 치료 중인 성내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의사를 비롯한 의료진의 수도 턱없이 부족하여 인근 도시의 의사들까지 불러 모았다.
성은 점령된 후에도 여전히 전쟁의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그렇게 보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로젤린은 백작저로 천천히 말을 몰아오며 상황을 둘러보았다. 현재 프레데릭은 백작령에 새 봉신을 임명하거나 영지를 분할하지 않고 있었다. 백작저에 남은 사용인들은 새 주인이 오기 전까지 일시적으로 프레데릭을 섬겼다.
“돌아왔나? 백작의 아들은 어떤가?”
긴 소파에 앉아서 서류를 넘기고 있던 프레데릭이 로젤린의 귀가를 반갑게 맞았다. 로젤린은 자연스럽게 프레데릭의 옆자리에 앉았다.
“별다를 게 있나요. 백작이 전사한 것도 그럭저럭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입니다.”
패배한 영주, 하물며 먼저 선전포고를 했다가 패배한 영주의 직계이다. 베스메틱 백작은 물론이거니와 소년도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소년은 아버지가 죽었다는 원망보다 자신을 살려 주고 후원까지 해 주는 프레데릭에게 감사하며 먼 길을 떠났다. 이제 살아서 두 번 다시 고향을 밟지 못할 것이다.
귀족이면서도 영지의 운영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였던 로젤린에게는 조금 씁쓸한 결말이었다.
일순간에 가문이 몰락한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는 건 편하지 않았다. 로젤린은 화제를 돌렸다.
“성에는 언제까지 머무르실 예정입니까?”
프레데릭은 베스메틱 백작령을 파악하는 한편으로는 성내의 치안을 거의 수습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프레데릭은 성내의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벅찬 상황이었다.
서류를 든 프레데릭이 로젤린의 허벅지에 냉큼 머리를 눕혔다. 씁쓸하게 굳어 있던 로젤린의 입가가 저절로 풀렸다. 그녀는 허벅지를 베고 누운 프레데릭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떡밥을 던졌으니 미끼를 물 때까지는 기다려야지. 아이든 백작을 둔 채 이대로 그냥 군을 움직이면 아무래도 배후가 좀 불안해.”
“전 프레데릭이 본성을 점령하자마자 회군하여 레젠이나 발트란으로 떠날 줄 알았습니다.”
로젤린의 목소리가 조금 머쓱했다. 일은 거의 하지 않고 늘 도망만 다니는 시간이 길었지만 그래도 10년 이상 영지를 다스린 프레데릭이다. 대국을 넓게 보는 시야는 로젤린의 생각 이상이었다.
“그래서 부탁을 드릴 게 있습니다만.”
“좋아.”
로젤린은 짧은 웃음을 머금었다.
“들어 보시지도 않고요?”
“네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환영이지.”
얼른 말해 보라는 얼굴로 프레데릭은 서류마저 손에서 놓고 로젤린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묘하게 나이보다 어려 보였다. 스무 살의 프레데릭은 어떠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로젤린은 말했다.
“성을 공격하였을 때처럼 일개 기사대라도 좋으니 제가 지휘해도 될까요? 물론 작전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요.”
프레데릭의 말처럼 많은 것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지휘관으로서는 이제 막 첫 걸음을 내디뎠을 뿐인 풋내기지만 단순히 기사로서 전장에 섰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으로서의 책임도 있고 의무도 있다. 크고 작은 부상은 있었으나 부대의 병사들이 죽지 않고 귀환하였을 때는 굉장히 기뻤다. 부하들의 생명이 그녀의 판단에 달려 있다는 건 두렵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기쁨과 보람이 있었다.
이것 또한 기사의 길이었다. 그녀가 기사로서 죽지 않고, 기사로서 살아가며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로젤린의 결심에 프레데릭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프레데릭이 노린 미끼는 곧 효력을 나타냈다.
아이든 백작가는 마리안 부인의 친정이자 그녀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가문이다. 아이든 백작가가 주축이 된 마리안 부인의 지지 세력은 프레데릭이 고의로 연출한 미끼를 물었다.
베스메틱 백작의 저항이 예상외로 강하여 프레데릭이 성을 공격하며 큰 피해를 당했다는 거짓 연출이었다.
거짓 정보에 속은 아이든 백작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은밀히 기사단을 움직였다. 이 첩보는 프레데릭도 오래지 않아 파악했다.
로젤린과 그녀의 부대는 기습 부대로서 성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매복했다. 일부 부대이긴 하나 그녀가 부대를 지휘하는 본격적인 전투는 처음이다. 긴장된 공기가 언덕 위에 깔렸다. 기습 부대 전체를 지휘하는 건 로젤린의 상관인 장교다.
로젤린은 자신이 경험 부족이라는 걸 잘 알았다. 적절한 타이밍에 기습을 명령하고 후퇴하는 적을 쫓는 적절한 거리 등은 교본이 아니라 경험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이다. 이번의 전투 또한 그녀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너무 긴장하지는 마십쇼.”
곁에서 몸을 낮춘 채 웅크린 부대장이 속닥거렸다. 최초의 전투 이후 부대장은 처음보다는 로젤린을 친근감 있게 대하게 되었다.
“적절한 긴장은 좋지만 첫 전투에서 긴장이 지나친 나머지 여기가 엇나간 놈은 아군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여기가’라고 말하며 부대장은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그런 얼간이들은 훈련 때 걸러 내거나 빡세게 정신 교육을 시키려고 하지만 실전은 역시 예상하기 힘들죠.”
로젤린은 자신이 칼자루를 지나치게 꽉 움켜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손가락의 힘을 풀며 그녀는 약간 웃었다.
“마수를 토벌하러 갔을 때보다 더 긴장되는군요.”
“그러고 보니 아이기스 나이트라고 하셨죠? 아이기스 나이트의 기사와 작전에 참여한 건 처음인데 색다른 기분이 들더군요. 전투에 무뎌질 때로 무뎌졌는데도 대장님을 보면 묘하게 머릿속이 뜨거워지면서 흥분이 됩니다. 마수를 살육하는 기사라서 그럽니까?”
“그래요? 한 번도 의식한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속닥속닥 나누는 사이에 아이든 백작의 기사단이 보였다. 로젤린은 대화를 멈추고 입술을 깨물었다. 부대장도 긴장된 시선을 백작의 기사단으로 옮겼다.
아이든 백작은 베스메틱 백작군의 부상병까지 동원하여 펼친 연극을 철석같이 믿고 기사단을 움직였을 것이다. 그것이 프레데릭의 노림수였으니 로젤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해야 했다.
언덕 위의 긴장된 공기를 알지 못하는 아이든 백작의 기사단은 천천히 진입하고 있었다. 군마가 ‘투루루’ 투레질하는 소리와 척척 나아가는 병사들의 군화 소리가 서서히 커졌다.
로젤린은 칼자루를 다시 꽉 쥐었다. 숨을 어떻게 쉬는지도 모르겠다.
언덕 맞은편에 매복한 장교의 옆에서 벌떡 일어난 기수가 깃발을 크게 휘저었다. 로젤린은 목소리를 높였다.
“쏴라!”
동시에 양측에서 궁병이 화살을 언덕 아래로 발사했다. 하늘을 새까맣게 메우며 날아온 화살이 아이든 백작의 기사단을 덮쳤다.
“우와아악!”
“기습이다! 진열을 정비해!”
온갖 비명과 외침 소리가 마구 뒤섞였다. 제어를 잃고 흥분한 군마가 날뛰었다. 화살에 이어 미리 준비한 바위와 통나무까지 공격으로 소비한 로젤린은 두 번째 명령을 내렸다. 그녀의 병사들이 그녀의 뒤를 따라 언덕길을 내달렸다.
최초의 기습으로 진열이 완전히 흐트러지고 동요하는 백작의 기사단과 기습에 성공하여 사기가 오른 대공의 기사단의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로젤린은 바스타드 소드를 크게 휘둘렀다. 날카롭게 그은 칼날에 베인 어느 기사의 말이 쓰러졌다. 쓰러지는 말에 깔린 기사가 다급히 몸을 피하기도 전에 로젤린은 투구의 틈으로 칼을 내리꽂았다.
퍼억.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익숙해진 사람을 죽이는 감촉이다. 로젤린은 얼굴에 튄 피를 닦을 틈도 없이 다음 목표를 향해 검을 그었다. 승리다. 그런 확신이 로젤린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슈벤하임 대공의 기사단은 아이든 백작가 기사단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승리한 프레데릭은 명분을 얻었다. 아이든 백작가의 개입이 확인되었으니 더 이상 대공가 내부만의 일이 아니었다.
프레데릭은 마리안 부인과 아이든 백작가를 반란군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마리안 부인과 그녀를 지지하는 봉신까지 반란군으로 정의되었다.
그리고 프레데릭을 지지하는 봉신들도 기사단을 정비하여 일부는 발트란의 포위군에 합류하고 일부는 아이든 백작가의 세력을 견제했다.
어느 정도 배후가 방비되자 프레데릭은 결정을 내렸다.
“자, 그럼 먼저 후작부터 치러 가 볼까.”
로젤린은 끝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예감했다.
백작령의 행정 관료는 대부분 그대로 고용되었다. 프레데릭이 본격적으로 치안을 안정시키고 내부의 정리를 추진하자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신뢰하는 신하에게 영지의 총 관리 책임을 맡긴 프레데릭은 다음 출정을 준비했다.
클레타트 후작이 제도 레젠을 포위한 지 일주일이 경과하고 있었다. 야전에서 패배한 황제군은 레젠에서 농성전을 선택했다. 필라헨 제국의 중심지인 제도 레젠이 반란군에게 포위를 당했다. 어떤 혼란이 벌어지고 있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로젤린은 레젠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부터 걱정으로 밤을 지새웠다.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피난하라고 수잔나에게 미리 언질하긴 했지만 수잔나가 따랐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발트란은 당분간 현재와 같은 고착 상태가 계속될 테니 우리는 동쪽으로 가지.”
군용지도에서 프레데릭이 대공군을 뜻하는 말을 동쪽으로 움직였다. 발트란이 아니라 레젠으로 먼저 가겠다는 뜻이다. 로젤린은 무심코 안도의 숨을 돌렸다.
브류나크 나이트의 기사단장이자 샤렌의 기사단을 지휘하여 프레데릭과 합류한 포스터지 경이 걱정했다.
“베스메틱에서 레젠으로 가려면 5할이 넘는 낙오병을 각오하고 최대한 속도를 올려도 열흘 이상 걸립니다. 병사들의 피로는 극에 달할 거고요. 게다가 황공하오나 폐하께서 그동안 레젠을 방어하실 수 있을까요?”
포스터지의 우려는 당연했다. 제도 근방에서 집결하였던 황제의 친위기사단은 후작군에게 패했다. 타지역의 친위기사단이 도착할 때까지 레젠의 농성을 성공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황궁을 지키는 근위대 로열 가드의 기사단장이 클레타트 후작의 처남이었다.
내부의 불안요소를 안고 있는 황제가 장기간 농성에 성공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클레타트 후작도 친위기사단이 도착하기 전에 속전속결로 승부를 내려 할 것이다. 황제이든 후작이든 오래 지속되어서 이로울 게 없는 전쟁이었다.
“레젠을 꼭 방어할 필요는 없지.”
프레데릭이 씨익 웃으며 손에 쥔 말을 북쪽으로 꺾었다.
* * *
누구나 예상하였던 것처럼 황제의 농성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기세가 오른 후작군에 비하여 제도 경비대와 근위대의 숫자는 턱없이 적었다. 거기다 황제는 근위대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처지다.
수적으로 훨씬 불리한 황제는 민병까지 강제 징집하여 후작에게 맞섰다. 민병을 징집하며 선포한 공문에서 클레타트 후작은 온갖 말로 매도되었다. 고향이 짓밟힌다는 복수심을 이용하여 민병대의 사기를 높이고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래도 민병대는 민병대였다. 강제로 징집되어 훈련을 전혀 받지 못하고, 무기와 방어구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민병대는 그야말로 화살 받이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민병대와 제도 경비대의 시체를 밟은 후작군은 마침내 레젠의 성문을 돌파했다. 해가 질 무렵이었다. 후작은 황제에게 매도당한 그대로 행동해 주기로 했다.
클레타트 후작은 레젠의 약탈을 허락했다.
그렇지 않아도 악화될 때로 악화된 제도의 민심을 단숨에 바닥으로 추락시키는 행위였다.
“엄마, 어떡해? 황제님이 전쟁에서 완전히 진 거야?”
수잔나는 훌쩍거리며 안겨 오는 엠마를 꼭 끌어안았다. 집 밖은 완전히 무법지대였다. 도망치는 사람들과 쫓아가는 병사들과 살해당하는 사람들의 비명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집이 비어 있는 척 불을 다 끄고 숨죽이고 있었지만 병사들이 들이닥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막심한 후회가 수잔나를 짓눌렀다. 로젤린이 피난하라는 편지를 급히 보냈을 때 받아들여야 했다. 당시에는 로젤린의 편지를 반신반의하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수잔나도 로젤린과 메이어 남작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연극을 보고 돌아와 하염없이 울기도 했다. 연극과 소문이 사실이라면 로젤린뿐만 아니라 수잔나 또한 10년을 속고 원망했다는 뜻이 된다.
그때에 로젤린의 편지가 왔다. 내전이 발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예측도 쉽게 믿기 어려웠으나, 무엇보다 이 소문의 끝을 보고 싶었다. 죽은 시아버지와 사라진 남편을 더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도망쳤어야 했다. 엠마를 위해 도망쳤어야 했다.
“어이! 이 집은 안 털어 간 모양인데?”
문 바로 밖에서 병사들이 외쳤다. 굳게 잠근 문이 덜컹거렸다.
“엄마아……!”
엠마가 비명을 삼키며 파고들었다. 이 아이만은 살려야 했다. 수잔나는 엠마를 침대 밑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엠마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을 주었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도 절대 보면 안 돼. 알았지? 소리도 내면 안 돼. 눈을 감고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있으면 곧 해가 밝을 거야.”
“엄마는?”
수잔나는 애써 웃으며 빠르게 속닥거렸다.
“엄마는 나쁜 사람들이 우리 엠마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막고 있을게.”
엠마의 이마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키스를 한 수잔나는 침실 밖으로 나갔다. 약탈이 허락된 점령지의 젊은 여자다. 그녀가 무슨 짓을 당하게 될지는 뻔했다. 그렇다면 최대한 엠마가 볼 수 없어야 했다.
각오는 굳혔지만 몸이 벌벌 떨렸다. 수잔나는 주방에서 가져온 식칼을 움켜쥐고 구석에 몸을 웅크렸다.
덜그럭거리던 문이 기어코 부서졌다. 대여섯 명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것 봐! 내가 이 집에 사람이 있을 거라고 했잖아.”
“아까 그년보다 젊어서 할 맛은 나겠네.”
병사들이 저속한 소리를 히죽거리며 수잔나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쥐고 있는 칼이 횃불 빛에 번득거렸지만 오히려 비웃었다.
“오, 오, 오지 마!”
“어이구, 앙탈도 부릴 줄 아냐?”
앞장선 병사가 찔러 보라며 가슴을 들이밀었다. 수잔나가 어설프게 찌른 식칼은 병사의 갑옷을 스치지도 못했다. 병사는 마음껏 낄낄거리며 수잔나의 뺨을 후려쳤다. 묵직한 따귀를 맞은 수잔나의 몸은 힘없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병사들이 킬킬거리며 수잔나를 둘러쌌다. 시커먼 그림자들이 수잔나의 몸 위로 늘어졌다. 그들의 목적이 재물이 아니라 젊은 여자라는 건 분명했다.
수잔나는 바닥에 몸을 웅크리며 눈을 감았다.
‘집을 뒤지지 않는다면 차라리 잘 됐어. 엠마만 무사하다면……!’
바지춤을 풀며 다가오던 병사가 갑자기 피를 내뿜었다. 피에 젖은 칼날이 병사의 목을 관통하며 튀어나왔다.
“끄어억!”
목이 관통된 병사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누, 누구야!”
기척도 없이 접근하여 단번에 동료를 죽인 습격자다. 병사들은 크게 놀라 무기를 빼 들었지만 한 발 늦었다. 습격자는 반격할 틈도 주지 않고 순식간에 병사들을 하나씩 처리했다.
수잔나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모든 병사들이 죽어 있었다. 습격자는 커다란 망토를 쓴 장신의 남자였다. 후드를 깊이 눌러 쓰고 있어 얼굴이 제대로 안 보였다.
“고, 고맙습니다…….”
수잔나는 이 남자가 순수히 자신을 도와주러 온 게 맞는지, 혹은 다른 목적이 있는지 탐색하며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남자는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단순히 재물만 노리러 온 거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혹시 사례를 원하시는 거라면…….”
그러나 남자는 수잔나의 말을 듣지도 않고 침실로 성큼성큼 걸었다. 수잔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침실에는 엠마가 숨어 있다.
“자, 잠시만요! 이봐요!”
급히 달려갔지만 남자는 이미 침실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들어가자마자 바로 나온 남자의 팔에는 엠마가 안겨 있었다.
“엄마아!”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놔줘요!”
발버둥 치는 엠마를 안은 남자의 팔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반대편 손으로 그의 팔을 풀어내려 하는 수잔나의 팔목을 꽉 쥐었다.
“윽!”
상상 이상의 힘이었다. 남자는 수잔나의 팔을 움켜쥔 채 무작정 밖으로 끌고 나가려 했다.
“놔요! 이거 놔!!”
“엄마를 괴롭히지 마!”
자신의 팔목을 움켜쥔 손을 할퀴면서 안간힘을 쓰는 수잔나에 이어 엠마까지 울먹거리며 고사리 손으로 남자를 퍽퍽 때렸다. 결국 남자는 손을 풀었다. 겨우 풀려난 엠마가 단숨에 달려가 수잔나에게 안겼다.
딸을 보호하며 한껏 경계하는 수잔나의 앞에 잠시 서 있던 남자는 주변을 뒤적거렸다. 수잔나는 제발 저 남자가 돈이나 갖고 집을 도로 나가기를 빌었다. 하나 등을 돌리고 선 채 무엇인가를 뒤적이던 남자는 곧 돌아왔다.
남자의 손에 들린 건 급히 휘갈긴 쪽지였다. 왼손으로 쓴 것처럼 엉망인 필체였다.
「여기는 위험합니다. 몸을 숨길 수 있는 장소를 안내하겠습니다.」
“안전한 곳? 어디죠?”
수잔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남자는 대답 대신 손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벙어리인가?’
아니, 지금 중요한 건 남자가 벙어리인지 아닌지가 아니었다. 수잔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집이 위험한 건 사실이었다. 이번에는 남자가 적절한때에 나타나서 무사할 수 있었지만 언제 또 다른 병사가 들이닥칠지 모른다. 밖은 여전히 아수라장이었다.
남자는 수잔나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서 있었다. 그를 올려다보던 수잔나는 엠마의 손을 꼭 쥐며 일어났다. 이 남자가 뭘 원하고 그녀를 도와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차피 집에 있어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설사 남자가 대가로 그녀의 몸을 요구한다 해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나는 무슨 짓을 당하더라도 엠마는 지켜야 해.’
수잔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아, 알겠어요. 당신을 따라갈게요.”
고개를 한 번 끄덕거리는 남자는 허리를 숙이며 엠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까처럼 안고 가겠다는 뜻인 듯하다. 머뭇거리며 수잔나를 바라보는 엠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엄마랑 아저씨가 빨리 뛰면 엠마는 쫓아가기 힘들 테니까 아저씨가 안아 주신다는 거야.”
그제야 엠마는 주저하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엠마를 가볍게 안고 일어난 남자는 반대편 손에 검을 쥐고 문밖으로 나갔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수잔나는 정신없이 남자의 뒤를 따라 달리기만 했다. 남자는 혼란스러운 성내를 거침없이 질주했다.
앞을 가로막는 병사들은 당연히 있었다. 아이와 함께 있는 남녀 한 쌍은 병사들을 피해 도망치는 피난민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남자는 엠마를 잠시 수잔나에게 맡기고는 길을 뚫었다. 남자가 칼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병사의 시체가 한 명씩 생겼다. 검술에 대해서 잘 모르는 수잔나가 보기에도 남자는 굉장한 실력자였다.
‘이런 사람이 왜 나를 도와주는 거지?’
의문만이 더욱 커졌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남자의 뒤를 쫓아 달리던 수잔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앞장선 남자가 인도하는 길이 낯이 익었다.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는 장소다.
‘설마 거기로 가려는 거야? 말도 안 돼.’
커다랗게 자리 잡아가는 수잔나의 의문과는 상관없이 달리던 남자가 발을 멈춘 곳은 어느 저택 앞이었다. 수잔나는 낮게 신음했다.
10년 전 메이어 남작가의 본가다.
수잔나와 결혼한 크리스토퍼는 분가하여 신혼집을 따로 마련했지만 그녀가 메이어 남작가의 본가를 알지 못할 리가 없었다. 크리스토퍼를 만난 곳도, 크리스토퍼의 가족들에게 그의 약혼녀로서 정식으로 인사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왜 이곳으로 왔나요?”
남자가 벙어리라는 것도 잊고 수잔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잔나의 후들거리는 다리가 저택의 정문을 넘었다.
현재 이 저택은 다른 상인이 매입하여 살고 있다고 들었다. 집주인은 레젠이 포위되기 전에 재빠르게 피난하였는지 저택 내에는 약탈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곳곳에는 병사들의 시체도 있었다.
“미리 이 저택에 들렀던 건가요?”
남자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시체만이 나뒹굴고 있는 저택은 외부와는 대조적으로 스산했다. 수잔나는 홀린 듯한 기분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남자를 뒤따랐다.
남자가 도착한 곳은 응접실이었다. 그가 벽의 장식장 뒤를 조작하자 반대편 벽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밀렸다. 벽 너머는 크게 뚫려 있었다.
남자는 엠마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벽 너머를 손짓했다. 수잔나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렸다.
- 우리 집도 명색이 귀족 가문이라 그런지 그럴듯한 비밀 장소가 숨겨져 있어. 꽤 재미있는 장치야. 로젤린이 어렸을 때 혼자 들어가서 삼일 동안 놀고 나오는 바람에 애가 실종된 줄 알고 집이 발칵 뒤집혀졌던 적도 있다니까. 사실 비밀 장소를 그 녀석에게 알려 준 건 나였지만.
엠마를 데리고 수잔나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나무로 보강이 된 내부는 통풍구가 있는지 공기도 선선했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 남자도 따라 들어왔다. 안쪽의 벽에도 문을 조작할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 남자는 수잔나의 앞에서 두어 번 문을 조작했다. 조작법이 어렵지 않아서 그녀도 곧 익혔다.
조작법을 알려 준 남자는 곧 등을 돌렸다.
“저기! 당신은 혹시…….”
닫히는 문 안쪽에서 수잔나는 충동적으로 외쳤다.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는 문이 닫히는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남자가 질문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엄마! 이것 봐. 화로랑 이불도 있어!”
언제 램프의 불을 켰는지 엠마가 조잘거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마른 식량과 물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피난을 대비해 놓은 모양새다.
“다행이구나.”
수잔나는 애써 엠마에게 웃었다. 그러지 않으면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의 안에 생겨나기 시작한 의혹은 이제 명확한 실체를 이루고 있었다.
클레타트 후작은 황궁으로 향했다.
황제를 지키는 근위대 로열 가드의 기사단장 멕켈 백작은 후작의 사람이다. 그렇지만 근위대를 완전히 손에 넣지는 못했다. 일부는 기사단장의 설득에 넘어가 후작을 따랐지만 일부는 황제에게 충성했다.
근위대는 둘로 분열되었다. 레젠이 일찍 함락된 건 근위대 내부의 분열도 한몫했다. 레젠이 점령되자마자 근위대에는 본격적인 내분이 발생했다. 승리한 건 후작을 따르는 근위기사였다. 황궁은 아주 쉽게 후작에게 문을 활짝 열었다.
황궁 내에는 이미 근위기사끼리의 전투가 한 차례 지나갔다. 제국 필라헨에서 가장 화려하고 가장 엄숙해야 할 황궁이 피와 시체와 배신으로 더렵혀졌다.
클레타트 후작은 근위대의 시체를 넘으며 안으로 걸어갔다. 황제가 황궁을 비우고 도주하지 않았다는 건 멕켈 백작에게도 확인을 받았다.
“송구합니다! 황제를 포박하기 전에 저희의 앞에서 자살했습니다.”
황제를 배신한 근위기사 하나가 생존한 황제 대신 죽은 황제의 시체를 가져왔다.
“자살해? 카를이?”
후작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조카는 고작 성이 함락당했다고 해서 쉽게 자살할 위인이 아니었다.
근위기사가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황제의 자살을 막지 못했다고 책망을 받는 걸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성이 포위되기 전부터 황제의 태도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늘 쫓기듯이 한시도 제대로 안정하지 못하고 난동을 피워 시종들도 거의 접근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마터면 거의 죽일 뻔하기도 했고요. 그때부터 이미 패전을 예감하고 공포에 젖었던 것 같습니다.”
그 역시 황제답지 않은 태도였다.
후작은 “감히 전쟁에서 이기겠다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던 게 아니겠습니까.”라는 근위기사의 아첨은 무시하며 시체를 살펴보았다.
찌푸리고 있던 얼굴이 이윽고 사납게 굳었다.
얼핏 보면 황제라고 알아볼 법하다. 그만큼 황제와 비슷한 체격에 많이 닮은 용모였다.
그러나 이 시체는 가짜였다.
* * *
“레젠을 꼭 방어할 필요는 없지.”
프레데릭은 레젠 북쪽에 말을 내려놓았다.
“폐하는 이미 레젠에서 피난했다. 전쟁에는 어두운 분이지만 내부의 배신자를 안고 농성할 만큼 바보는 아니거든.”
그의 손가락이 말을 톡톡 쳤다.
“정확한 위치는 나중에 알 수 있겠지만, 북쪽 어딘가로 폐하가 피난하셨을 거다. 우리는 후작이 폐하를 찾기 전에 후작군을 친다.”
* * *
황제 일가는 행방불명이었다.
레젠을 장악한 클레타트 후작은 황제가 바꿔치기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자 당장 황제의 수색을 명령했다. 황제의 측근 시종과 시녀도 심문했다. 그러나 후작은 황제의 그림자도 찾지 못했다.
황제의 행방을 알 법한 최측근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자신의 입을 영원히 막았다. 황제가 어디로 갔는지는 고사하고 언제 황궁을 나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멕켈 백작은 로열 가드의 기사단장이자 후작의 처남이다. 그는 오늘도 황제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는 보고를 하기 위해 무거운 마음으로 집무실을 찾았다.
“들어오게.”
후작은 평소처럼 냉랭한 목소리로 멕켈의 방문을 맞았다. 뒤쪽에는 그림자처럼 심복인 루이가 서 있었다. 멕켈은 무심코 인상을 찌푸렸다.
루이는 몇 년 전부터 후작의 심복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사내다. 후작의 명령이라면 어둠 속에서 갖은 더러운 일을 하는 루이를 그는 탐탁지 않게 여겼다.
죄 없는 소녀를 납치하고 죽여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짓뭉개는 짓도 하다니. 기사인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더러운 일이었다.
명령을 따르기만 하는 일개 부하가 자신보다 더 신뢰 받고 있으니 자존심도 상했다. 아무리 과거에 큰 화상을 입었다지만 항상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도 그렇고, 목소리마저 소름이 돋을 정도라 영 호감이 가지 않았다.
멕켈은 과장되게 헛기침을 큼큼 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내가 동석한 자리에서 황제의 수색을 실패했다는 말을 하자니 더욱 체면이 서지 않는다.
“황제가 소유한 별장들을 조사하였으나 최근에 사람이 드나든 흔적은 없었습니다. 황후의 친정 가문도 조사하고 있으나 레젠과 거리가 먼 지방이라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한심하군.”
후작이 쌀쌀맞게 대답했다.
“제대로 일을 하는 놈이 하나도 없어.”
“……죄송합니다.”
황제의 바로 근처에 있으면서도 황제가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였던 멕켈이다. 후작의 질책에는 변명할 말이 하나도 없었다.
창문을 등지고 앉은 클레타트 후작은 오늘따라 안색이 더 안 좋았다. 멕켈은 후작이 병이 있는 건 아닌지 종종 의심했다. 누이에게 넌지시 물어보아도 ‘평소와 다름없으시다.’라는 뻔한 대답만을 들었다.
“아직도 할 말이 남았나?”
멕켈의 귀에는 무능한 보고가 끝났으면 꺼지라는 빈정거림으로 들렸다. 왠지 더 자신이 한심해 지는 기분이었지만 오늘의 용건은 한 가지가 아니었다.
“레젠을 이대로 방치하실 겁니까?”
후작이 제도 레젠을 점령하고도 시일이 지났다. 신체 건장한 남자의 대부분이 민병으로 징집되고, 민병의 대부분이 전사했다. 게다가 후작은 약탈까지 허락했다. 현재 레젠에는 과부와 고아의 통곡이 넘쳐흐를 지경이었다.
황제는 고작해야 며칠의 시간을 벌기 위해 민병을 징집하여 화살 받이로 내몰았다.
‘냉혹하게 타인을 이용하는 모습이야말로 이분과 황제가 한 핏줄이라는 증명이 아닌가.’
치안과 민심은 당연히 최악이었다. 행정도 거의 정비가 되지 않았고 황궁에서 일하던 관료의 대부분은 후작의 아래에서 일하기를 거부했다. 신전 측에서도 약탈을 허락한 후작에게 언짢은 기색이었다.
성을 점령하는 것으로 모든 일이 끝나는 건 아니다. 전쟁으로 피폐하였을 점령지를 어떻게 복구하고 통치하는지가 더 중요한 과제였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후작의 행동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레젠은 수도로서의 기능 이전에 도시로서의 기능 자체가 완전히 마비되었다. 언제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곳곳에서 후작을 원망하는 절규가 들렸다.
그는 마치 레젠이 철저히 파멸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렇군. 아직 약탈을 금지하는 명령을 안 내렸던가.”
후작이 턱을 쓸며 가늘게 미소했다.
“아예 불태워 버릴까.”
멕켈의 등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하하하. 농담이 심하십니다.”
애써 웃으며 농담이라고 치부하였으나 후작은 전혀 농담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멕켈은 마른침을 삼켰다. 하마터면 자신이 레젠에 방화 명령을 내리는 최초이자 마지막 근위기사단장으로 역사에 기록될지도 모른다.
‘폭군이 되시려는 건가.’
그렇다면 클레타트 후작은 아주 훌륭히 폭군의 절차를 밟아가고 있었다.
멕켈이 역사에서 두고두고 비난당할 운명에서 구한 건 막 도착한 다른 기사의 보고였다.
“슈벤하임 대공군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슈벤하임 대공은 예상보다 빠르게 슈벤하임 대공령을 임시방편으로나마 장악했다. 베스메틱 백작의 본성을 출발한 대공군은 레젠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쯧.”
클레타트 후작이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그때 확실히 죽였어야 했는데.”
베스메틱 백작과 마리안 부인의 사람인 사무엘에게 슈벤하임 대공의 일행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했다. 슈벤하임 대공과 사사건건 눈을 거슬리게 하는 메이어 남작가의 마지막 생존자도 함께.
처리하는 걸 돕도록 루이까지 보냈는데 실패했다. 루이가 실패한 최초의 임무였다. 최소한 로젤린 메이어는 죽일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다른 기사들은 전투 중에 싸우다가 죽은 것으로 꾸미기 위해 수면제만 먹였지만 로젤린 메이어에게는 다른 명령을 내렸다.
시신 한 구가 전투 전에 죽은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대공 일행의 유일한 여자 기사는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미리 죽여 놓으라고.
‘그 쉬운 일마저 실패하다니 베스메틱 백작이란 작자는 대체.’
한 번 더 혀를 찼다. 사방에 무능한 놈들뿐이다.
“우리도 대공군을 맞이할 준비를 해라.”
후작은 짤막하게 명령했다.
슈벤하임 대공군은 베스메틱 백작령부터 기동성을 최우선시한 무리한 강행군을 하여 낙오병이 많이 발생했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레젠 근처에서 황제의 친위대 골든 나이트와 연합함으로써 해결되었다.
후작군과 연합군의 병력은 비슷하게 유지되었다.
연전연승하여 사기가 치솟은 후작군에게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슈벤하임 대공은 최초의 패전을 선물해 주었다.
* * *
지루한 대치가 이어졌다. 후작군과 연합군의 전선은 최초의 큰 접전 이후 며칠 동안 변함이 없었다. 나아가지도 않고, 물러나지도 않았다. 가끔 탐색전처럼 소규모 병력의 부딪힘만이 있을 뿐이었다.
대패를 당했음에도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클레타트 후작이 어젯밤 기습을 명령했다. 기습 병력은 오히려 연합군의 함정에 역으로 걸려 크게 패배했다.
“이런 따분한 전술은 대공의 취향이 아닌데.”
루이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막사에 남은 후작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속전속결. 영지에서 먼 곳까지 원정대를 지휘하는 슈벤하임 대공이 좋아하는 전술이다.
지금처럼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장기전을 펼치는 건 절대 대공이 선택할 법한 전술이 아니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혹시 대공도 황제처럼 바꿔치기 당했다던가?”
따분한 전선처럼 따분한 농담이었다. 루이는 충실하게 대답했다.
“첫 전투로 미루어 보아 가짜 대공이 지휘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대공의 지휘에 속절없이 말려들어가긴 했…….”
말을 다 마무리하기도 전에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래된 병이 치솟았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연신 기침한 후작은 약을 털어 넣었다. 조금 진정이 된 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늘어졌다.
“대공도 황제의 행방을 찾지 못한 거겠지.”
현재 레젠에는 황제가 없다. 슈벤하임 대공이 레젠을 탈환하게 된다고 해도 황제를 내세우지 않는 이상 대영주의 또 다른 제도 점령이 될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내전으로 뒤숭숭한 제국이다. 대공이 제도를 점령한 것을 핑계 삼아 자신도 군대를 일으키려 하는 대영주가 없으리란 장담은 못한다.
후작이 바라는 건 그쪽이었지만.
“쥐새끼처럼 잘도 도망쳐 다니는군.”
양손가락을 깍지 낀 후작은 다소 기력 없이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루이가 말없이 무릎 담요를 가져와 덮어 주었다.
황제가 바꿔치기하여 레젠에서 도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십여 년 전, 선대 황제인 마리아 2세는 아들을 바꿔치기했다. 그녀는 황궁에서 가짜 아들을 키우는 한편으로 진짜 아들은 당시의 슈벤하임 대공에게 부탁했다.
후작의 모후는 보기 좋게 속아 가짜 황태자를 암살했다. 가짜였다는 걸 뒤늦게 알고 진짜 황태자를 찾으려 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대대로 황실에 중립적인 입장이었던 슈벤하임 대공이 맡고 있으리란 추측은 전혀 못했다.
결과적으로 마리아 2세는 암살의 위협으로부터 아들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차대 슈벤하임 대공까지 아들의 세력으로 끌어들였다. 당시에는 설마 대공이 사생아를 후계자로 삼을 거란 예상은 못하였으니 단순히 운이 좋은 결과였지만.
어머니에 이어 후작도 똑같이 당한 상황이었다.
“지옥에서 어머니가 한심하다고 화를 내시겠어.”
후작은 낮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황제의 행방이 포착된 건 그날 오후였다.
* * *
레젠은 나날이 뒤숭숭했으나, 레젠 북부의 소도시 시드에는 큰 영향이 없었다. 물론 도시를 다스리는 관리와 레젠으로 납품하는 상인들은 죽상이었다. 시드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평민들은 황제와 황제의 숙부가 싸운다더라, 정도로만 이해했다.
막 레젠이 점령당했을 때에는 여기까지 후작군이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며 분주하게 피난짐을 꾸렸다. 그 후 후작군은 레젠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두 번째로 벌어진 전투도 시드에서 멀리 떨어진 평야다.
언제라도 도망칠 수 있게 피난짐은 여전히 꾸려 놓은 불안한 상태지만 평민들은 비교적 평화롭게 일상을 이어 갔다.
도시 외곽의 작은 집에 새로운 주인이 찾아온 걸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몇 년째 비었던 집을 누가 샀네.’라고만 생각했다. 그 집이 몇 년 전부터 준비되어 있던 도피처라는 건 당연히 짐작도 하지 못했다.
“대공군은 여전히 후작군과 대치 상태입니다.”
표면적인 집 주인으로 알려진 중년의 기사가 카를에게 보고했다. 밤중에 몰래 집으로 들어온 후 한 번도 집 밖으로 나간 적이 없는 카를의 안색은 부쩍 창백했다. 그는 피곤한 기색으로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는 카를에게 기사는 망설이다가 질문했다.
“언제까지 슈벤하임 대공에게도 숨기실 예정이십니까? 하루라도 빨리 대공군에 합류하셔야 레젠의 탈환이 가능합니다, 폐하.”
충성 어린 기사의 질문에 카를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두 가지 이유, 아니 두 가지 가능성 때문일세. 첫 번째는 혼란스러운 레젠이 또 한 번 공성전에 휩쓸리게 될 가능성. 두 번째는 레젠의 탈환에 성공해도 후작이 도망칠 가능성. 두 번째 가능성이 가장 큰 이유지.”
클레타트 후작이 도망치게 되면 내전은 더 길어진다. 만약 외가인 오스완 왕국으로 도주한다면 오스완과 전쟁을 벌이지 않는 이상 체포하지 못한다. 기사도 카를의 뜻을 이해했다.
“하나 계속 숨기고 있으셔도 전쟁이 길어지는 건 똑같습니다.”
“안 그래도 조만간에 슬슬 꼬리를 내밀 예정이긴 했네.”
기사는 반색했다.
“그렇다면 즉시 대공에게 알려서 폐하를 맞이하는 병력을 보내도록…….”
“아니.”
카를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막았다.
“물론 프레데릭에게는 알려 줄 걸세. 그러나 동시에 후작의 첩보원들에게도 포착될 수 있도록 하게.”
하마터면 황제의 앞이라는 것도 잊은 기사가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일부러 발각되시려 합니까?!”
“정확히는 미끼를 던지는 거지. 후작을 물 미끼. 짐은 후작의 성격을 잘 알아. 짐이 숨어 있는 곳을 알면 한 번 속은 후작은 이번에야말로 짐이 죽는 걸 눈앞에서 보기 위해 직접 나설 걸세. 생쥐를 잡으려면 쥐구멍 밖으로 끌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폐하! 너무나도 위험합니다!”
“대어를 낚으려면 미끼도 커야겠지.”
대경실색한 기사와는 대조적으로 카를은 어린아이처럼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곧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후작을 제거하기 위해 내가 감수해야 할 위험은 항상 각오하고 있네. 그러기 위해 황후, 황태자와는 다른 곳으로 도망친 것이고.”
기사는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클레타트 후작이 황제의 행방을 포착하기 이틀 전, 시드에서 있었던 대화였다.
* * *
황제로부터의 연락이 이제야 왔다.
“망할. 진짜 까다롭게 구는구만. 왜 숨어서 안 나오나 했더니.”
프레데릭은 한숨에 불만을 섞었다. 그가 내던진 암호문을 해석한 쪽지를 로젤린이 읽었다.
쪽지에 적힌 글은 간단했다. 짧고 간단하였으나 내용은 놀라웠다. 황제 자신이 후작의 미끼가 되겠다는 내용이다. 로젤린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쪽지를 한 번 더 읽었다. 프레데릭이 불평하는 것도 당연했다.
“……너무 위험한 도박이 아닙니까? 폐하가 스스로 미끼가 되시겠다니요?”
“내 말이 그 말이다.”
골치가 아프다는 얼굴로 프레데릭이 미간을 눌렀다.
“도대체가 무슨 생각인 건지 알 수가 없군. 앞에 있다면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야.”
정말 치가 떨린다는 어투였다.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이지만 로젤린은 그만 풋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말은 저렇게 해도 결국은 하고 말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프레데릭을 달래듯이 손등을 토닥거렸다.
“그래도 하실 거잖습니까.”
“……일개 신하의 서러움이지.”
한숨을 푹 쉰 프레데릭이 옆에 앉은 로젤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남자가 이렇게 기댈 때마다 로젤린은 묘한 감상이 들었다. 싫거나 불쾌한 건 절대 아니지만 정확히 표현하는 건 어려웠다.
‘전쟁터에서 이런 감상에 젖어도 되는지 몰라.’
다른 사람의 일이었다면 참 팔자 좋다는 생각이 들었겠지만 자신의 일이 되니 머쓱하다. 막사 밖에서는 그녀가 익숙해지고 있는 전쟁터의 공기가 자욱하게 깔려 있는데, 프레데릭과 있는 막사 안은 부드럽고 포근포근하다.
“사랑의 공기가 감돌고 있군.”
프레데릭이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중얼거렸다. 더 민망해진 로젤린은 짐짓 정색했다.
“아닙니다.”
“그럼 뭘까? 여기에 둥둥 떠다니는 핑크빛 공기는?”
“폐하의 쪽지를 읽고 핑크빛 공기를 느끼셨다는 겁니까?”
정색한 로젤린의 반문에 프레데릭이 억울한 표정으로 반박하기 직전, 막사의 휘장이 펄럭이며 라울이 들어왔다. 로젤린은 재빨리 기대고 있던 프레데릭을 밀어냈고 무방비하게 있던 프레데릭은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
못 본 척하려고 해도 못 본 척할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라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전쟁터에서 팔자가 좋으시군요.”
“……면목이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더한 걸 하신 것도 아니고.”
바닥에 부딪힌 뒷머리를 문지르며 프레데릭이 일어났다.
“알면 들어오지 말든가.”
“일은 하셔야죠. 포스터지 경이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지 빠른 결정을 내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본인이 직접 오지 않고?”
“막사에 메이어 경과 둘이 계시다는 걸 알았거든요.”
“…….”
로젤린은 침묵했고 프레데릭은 머리를 긁적이며 화제를 돌렸다.
“시키는 대로 해야지, 어쩌겠냐. 일단 후작의 진영에서 시드로 가는 길목에 척후병을 은밀히 배치하고 동향을 살펴라.”
황제의 목적은 클레타트 후작이 함정에 걸려 드는 것이다. 후작이 함정이라는 걸 눈치 못 채려면 대공군도 은밀히 움직여야 했다.
먼저 후작이 직접 시드로 향하는지 확인하고, 발각되지 않을 거리에서 뒤따라야 할 것이다.
사흘 후의 첫 새벽.
대공군의 진영에서 수십 기의 기병이 조용히 출발했다. 목적지는 시드였다.
카를의 피난처는 시드 성 밖의 농지 근처에 있었다. 원래 인적이 드물고 집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카를이 오기 전까지 몇 년 동안 집이 비어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다.
즉 외부로부터의 공격도 쉬운 장소였다. 카를은 만약의 경우에 자신을 미끼로 던질 작정을 하고 이 은신처를 찾았다.
은신처의 식사는 결코 훌륭하다고 할 수 없었다. 기사와 부부로 위장하고 있는 시녀가 정성껏 요리하였지만 식사는 거칠고 조잡했다. 카를은 불편한 잠자리나 거친 식사로 한 번도 시녀를 꾸중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카를은 아침부터 거의 식사를 들지 못했다. 새삼스럽게 식사가 입에 맞지 않아서 먹지 못한 건 아니었다.
‘아마 오늘쯤 후작이 찾아오겠지.’
그의 평생을 괴롭힌 숙적과 오늘 결판이 나게 될 수도 있다. 그것을 생각하면 심장이 꽉 조이듯이 긴장된다.
건넛방에 모여 있는 기사들도 긴장한 건 마찬가지였다. 은밀히 근처를 호위 중이던 기사들은 후작의 습격을 대비하여 집으로 모여들었다. 방이 꽉 찰 만큼 기사들이 모여 있는데도 그 흔한 잡담이나 소란스러움이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무거운 긴장이 집 전체를 누르고 있었다.
농한기에도 농부들이 아예 일감을 손에서 놓고 있는 건 아니다. 찾아올 봄의 농사를 준비하거나 일 년 내내 쓰느라 망가진 가구며 식기를 수리하고 장작을 캐러 가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창밖으로 보였다. 카를은 팔짱을 끼고 평화로운 일상이 반복되는 창밖을 응시했다.
이제 저들의 일상은 곧 자신으로 인해 깨질 것이다.
‘저들이 평화롭기 바라는 것도 참 염치없는 생각이군.’
카를은 창의 덧문을 닫고 돌아섰다.
해가 중천으로 서서히 올라갈 무렵, 후작군이 도착했다.
흙먼지를 뿌옇게 일으키는 기병들을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쳐다보았다. 평생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 판단력을 잃은 것이다.
“비켜라!”
기병대의 선두는 단 한 번의 경고만 했다. 달리는 속도도 늦추지 않은 기병대는 미처 비키지 못한 사람을 짓밟아 죽이며 진군했다.
열을 갖춰 몰려오는 말발굽에 짓밟힌 시체는 형체도 찾아볼 수 없는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꺄악!”
“으아아아!”
사람들은 그제야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그 소란은 곧 카를의 은신처까지 전해졌다.
“폐하, 부디 옥체를 보존하십시오.”
중년의 기사가 대표로 찾아와 마지막 인사를 했다. 카를은 말없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함정을 교묘하게 꾸미려면 사실과 가까워야 한다. 기사들은 그를 지키기기 위해 목숨을 걸고 진심으로 후작군과 싸울 것이다. 죽음으로서 기사도와 충성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죽음으로 번 시간은 대공군이 도착할 기회가 된다.
묵직한 걸음이 방을 돌아나갔다. 카를은 손바닥에 얼굴을 눌렀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너무나 많은 시체를 만들었다. 그는 부디 이번이 그가 강요하는 마지막 죽음이 되기를 바랐다.
“황제를 찾아라!”
“도주하지 못하게 포위해!”
“반역자들을 처단하라!”
황제의 기사와 후작의 기사의 함성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카를은 이를 악물며 그 모든 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기세와 충성심은 드높으나 황제의 기사는 턱없이 열세였다. 격렬하게 시작된 전투의 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멀리에서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최후까지 남아 황제를 보필하던 시녀의 단말마가 들렸다.
카를은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문짝이 쾅 걷어차이며 한 사내가 들어왔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날을 그에게 향했다.
끈질기게 무의미한 저항을 하던 마지막 기사가 쓰러졌다. 승리의 함성이 일어나는 가운데 클레타트 후작은 기사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는 따라오겠다는 부하들을 밖에서 대기시키고 초라한 집으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마주친 건 문설주 근처에 나뒹구는 중년 여인의 시체였다. 이번에는 아는 얼굴이었다. 오랫동안 황제를 섬긴 시녀다. 여인은 채 감지도 못한 두 눈을 원통하게 부릅뜨고 있었다.
“흥.”
후작은 짧게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의미는 없다.
그가 다시 고개를 올렸을 때 안쪽에서 루이가 걸어 나왔다. 황제와 함께다.
“오랜만에 보는군, 조카님.”
붉은 핏물을 머금은 칼날이 목에 닿아 있는 카를은 굳은 표정이었다. 태연하게 유지하려고는 하고 있으나 늘어뜨린 오른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왼손은 등 뒤로 꺾여서 루이에게 결박되어 있다. 꽤 굴욕적인 자세다.
“풀어 줘라.”
후작의 지시에 루이는 결박하고 있던 손을 풀었다. 칼날은 여전히 황제의 목을 겨냥하고 있는 채였다. 후작이 단 한 마디의 명령만 내리면 칼날은 지체 없이 황제의 목으로 파고들 것이다.
“고마워.”
카를은 침착한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죽음의 위협이 바로 앞에 도사리고 있으니 저절로 긴장되었다.
“직접 먼 길을 찾아올 줄은 몰랐어. 숙부는 나를 무척 좋아하고 있었군.”
슈벤하임 대공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카를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후작이 작게 웃었다.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조카님은 죽음까지 직접 배웅해야 도리가 아니겠나.”
“이제 숙부가 내 대신 황제가 되겠군. 그래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마지막 소원은 들어주지.”
비스듬히 팔짱을 낀 후작을 바라보며 카를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어색하지 않도록 대화를 이어 가야 한다.
“레젠을 왜 파괴했지? 앞으로도 숙부가 다스려야 하는 곳이잖아. 만약 수도를 옮길 예정이라고 해도 레젠에 약탈을 허락하는 건 너무 위험 요소가 큰 결정이었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가지 않아. 설마 대대손손 욕을 먹는 게 취미인 건 아닐 거 아냐.”
“그다지. 애초부터 다스릴 생각은 없었다만.”
“……무슨 뜻이야?”
후작은 다소 따분한 표정이 되었다.
“그동안은 숨겼지만 이젠 상관없겠지. 난 앞으로 오래 못 산다. 병이 깊어져서 길어야 3, 4년일 거라더군.”
“자, 잠깐!”
대화를 계속 이어 가야 한다는 것마저 잊은 카를이 외쳤다.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이마를 눌렀다.
“죽는다고? 숙부가?”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나.”
“그렇다면 왜 반란을 일으킨 건데!! 죽기 전에 옥좌에 앉아보겠다는 알량한 욕심 때문인가?!”
“내 아내는 그렇게 알고 있지.”
“고작 그런 이유로 제국을 내전으로 찢어 놓고 레젠을 짓밟은 건가!!”
흥분한 카를이 발악하듯이 외치자 따분하게 풀려 있던 후작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아왔다.
“날 황제로 만들려고 한 건 모후였지 내가 아니다.”
“뭐야?!!”
화를 참지 못하고 후작에게 덤벼들려던 카를은 루이에게 다시 붙잡혔다. 팔뚝이 꺾이고 시뻘건 손자국이 남도록 붙잡혔음에도 그는 거의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맹렬하게 치솟는 분노가 아픔마저 지웠다.
후작이 즐겁게 웃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모후에게 거의 세뇌를 당하듯이 그녀의 탄식을 들었다.
- 폐하의 적법한 후계자는 너란다, 사랑하는 내 아들.
모후가 사망한 후에도 후작은 평생 그 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권력을 탐하고 황제위를 노린 건 모후의 의지였지, 그의 의지는 아니었다. 그는 모후가 깔아 놓은 그의 발판을 따라 착실히 황제위로 가는 길을 나아갔다.
자신의 삶에 그다지 불만은 없었다.
한 번의 실수가 곧 파멸인 권력 투쟁은 재미있었다. 지루한 시간을 달래기에는 아주 좋았다. 그의 목적은 모후의 바람대로 황제가 되는 것에 있었지, 그 후의 전망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평생 카를과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며 살아도 충분히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너무 일찍 찾아왔다. 그는 마흔도 되기 전에 불치병 진단을 받았다. 그에게 허락된 삶이 불과 몇 년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작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았다.
평생 모후의 염원에 갇혀 살았던 인생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고 인생을 설계한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식도 없었다. 이대로 죽는다면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 남는 것은 그가 아니라 죽은 모후의 망령이 아닌가.
그는 불현듯 허망함을 느꼈다. 죽음을 진단 받았을 때에도 느끼지 못하였던 허망함이었다.
자신은 곧 죽는다. 황제가 되어도 죽고 황제가 되지 못해도 죽는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마지막으로 모후가 아닌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도 좋지 않을까.
후작은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였고, 그것이 실패하자 쉽게 반란군을 일으켰다.
- 내 아들, 네가 황제가 된다면 필시 마리아 그 계집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성군이 될 거야.’
모후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그렇다면 폭군이 될까. 후작이 레젠에 약탈을 허락한 건 겨우 그 정도의 이유였다.
그의 손으로 필라헨 제국이 멸망한다면 역사는 결코 그의 이름을 잊지 못할 것이다.
카를과 줄다리기를 할 때보다 즐거운 상상이었다.
“그냥 이편이 더 재미있으니까.”
“클레타트 후작!!”
“그러니 황후와 황태자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말해 줘야겠다. 네가 죽고, 네 유일한 후계자마저 사라져야 제국은 더 혼란에 빠지지 않겠나. 독립을 선언하는 대영주도 나오지 않을까. 제국이 내 손으로 분열하고 무너지는 광경을 보는 건 얼마나 큰 쾌락일까.”
다가올 미래를 기다리는 후작의 목소리가 희열에 젖어 갔다.
“널 제압하고 있는 내 부하는 고문에도 아주 능통하지. 가급적 편안하게 죽고 싶으면 순순히 황태자의 위치를 말해라. 물론 말하지 않고 고문당하다 죽어도 상관없어. 제국의 후계자가 강보에 싸인 애새끼라는 걸 알게 되면 황족 중의 누군가는 황위를 욕심내겠지. 그것도 재미있겠군.”
카를이 뿌드득 이를 악물었다.
“내 아이를 죽인 것도 재미를 위해서였나? 숙부의 즐거움 때문에 말문도 떼지 못한 아이를 죽인 거냐고!”
“그렇지는 않다. 모후의 유언이었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당신의 모후가 죽었을 때 내 아이는 태어나지도 않았어!”
클레타트 후작의 멱살을 쥐려는 듯 달려들려는 카를을 루이가 단단히 붙잡았다. 후작은 발버둥 치는 카를을 감상하며 느긋하게 말했다.
“내 위로 두 명의 누이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겠지? 모후는 두 딸들을 죽인 사람이 의붓딸이라고 평생 믿으셨다. 그래서 그 복수를 나에게 유언으로 부탁하셨다.”
카를이 멈칫했다. 반문하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어머니가 어린 동생들을 살해하셨다고? 거짓말이야!”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이제 알 수 없지. 다만 모후가 그렇게 믿으셨던 건 사실이다.”
루이에게 붙잡힌 카를의 손이 한 차례 경련하다 힘없이 늘어졌다.
“도대체…… 누가 먼저 시작하고 누가 먼저 불을 붙인…….”
“그것도 알 수 없어. 안다고 해서 되돌릴 수도 없고. 내 인생이나 네 인생이나 황실에서 태어났다는 시작부터 잘못되었을지도 모르지.”
후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과거의 한탄은 이만하면 되었다. 이제는 현재를 즐겨야 할 때다.
“자, 그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
먼 곳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함성 소리가 후작의 말을 지웠다. 은신처를 포위한 후작군의 함성은 아니다. 후작의 당황한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화살이 하늘을 메우며 날아왔다. 그 뒤에 수십 기의 기마병이 뒤따르고 있었다.
“……슈벤하임 대공.”
낮은 신음 소리가 후작의 잇새에서 씹혔다. 창백한 안색을 회복하지 못한 카를의 시선도 후작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았다.
곧 은신처 밖에서 슈벤하임 대공군과 클레타트 후작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최초의 기습 공격으로 동요하였으나 후작군도 잘 훈련된 군대였다. 병사들의 동요를 수습하며 본격적인 공격에 나섰다. 수적으로는 후작군이 우세하다. 카를의 예상 이상으로 병력의 차이가 컸다.
단일 병종의 소규모 백병전이다. 전투는 금세 난전으로 치달았다. 단연 눈에 띄는 건 선두에 있는 프레데릭이었다. 그는 착실하게 후작군을 공격하면서도 냉정한 눈으로 전황을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 명의 기사.
카를의 시선이 프레데릭의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그곳에는 흑마를 탄 한 명의 기사가 종횡무진하며 후작군을 죽이고 있었다. 아니, 단순히 죽인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카를의 시선이 기사에게 고정되었다.
전투에도 감정의 색이 있다면 프레데릭의 색은 냉정함이고, 저 기사의 색은 고양감일 것이다. 칼을 휘두르고 적군을 죽인다는 점은 동일하다. 분명 동일한데도 뚜렷한 차이가 느껴졌다.
앞을 가로막으며 창을 찌르는 병사의 공격을 피하며 목을 베어 날리고, 쓰러진 병사의 머리를 투구째 말발굽으로 짓밟는다. 말에서 내린 후에는 공격이 더욱 매서워졌다. 몸을 크게 움직일 때마다 피보라가 허공을 물들였다.
거리가 멀어 얼굴이 정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카를은 저 기사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 당신도 콜로세움의 경기를 구경하러 가면 얼마나 좋아요.
몇 년 전, 황후가 넌지시 그를 조른 적이 있었다.
- 저와 데이트하는 기분이 나지 않겠어요?
- 죽고 죽이는 장소에서 데이트라니 내 마누라는 무척 살벌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군.
가급적 황후에게 맞춰 주는 카를이었지만 콜로세움은 영 내키지 않았다. 자욱한 피비린내도, 잔혹한 광경을 보며 흥분하는 관중의 마음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황후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 좋아하는 걸 공유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모르다니.
- 당신이 좋아하는 검투사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어. 웬 여신의 별명을 가진 놈이었던가?
- 놈이 아니에요. 여자라고요. 남자였으면 지금과 같은 인기는 아니었을 거예요. 이름은 로젤린.
로젤린, 이라며 황후는 또박또박 발음했다.
- 아무래도 별명이 여신의 이명이다 보니 공개적인 자리에서 부르는 건 신관들의 눈치가 보이죠. 콜로세움에서는 눈치를 덜 보는 편이지만.
- 그래서 어느 여신이었던가?
- 아이리나 막델라히.
참 살벌한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문득 황후가 웃었다.
- 전투나 승리를 주관하는 신은 아이리나 막델라히 외에도 있잖아요. 왜 하필이면 살육과 승리의 여신인지 알아요?
- 글쎄.
- 당신도 그녀의 경기를 본다면 이해할 거예요.
알 듯 모를 듯한 소리를 하며 황후는 기어이 다음에는 같이 콜로세움에 가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비록 며칠 후에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되어 태교를 위해 콜로세움으로 가는 건 중단하게 되었지만.
황태자를 출산하고 양육에 정신이 없는 동안 로젤린은 은퇴하였고, 카를은 그녀의 경기를 보지 못했다.
“……왜 그 별명인지 알겠군.”
카를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황후가 하였던 말처럼, 그녀가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보니 이해하겠다. 아이리나 막델라히. 그야말로 살육 속에서 언제나 승리하는 여신이 아닌가.
전투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에 익숙해진 건 아니다. 무뎌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검을 쥐면 머리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자신을 지배하는 명확한 목적의식이 있기 때문일까.
검투사로서 살아갈 때에는 하루라도 빨리 빚을 갚겠다는 목적.
아이기스 나이트가 되었을 때에는 발트란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과 기사로서 죽을 자리를 찾겠다는 목적.
그리고 새롭게 기사가 된 지금은 살아갈 수 있는 곳에서 살아가기 위한 목적.
그것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얼마든지 검을 쥐고 전장에 설 수 있었다.
“휴우.”
로젤린은 잠시 숨을 돌리며 허리를 폈다. 주변은 그럭저럭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오늘은 중요한 전투다. 최대한 좋은 컨디션으로 전투를 하기 위해 익숙한 경갑을 착용했다. 투구를 쓰지 않았더니 얼굴까지 핏물이 튀어 시야가 조금 안 좋았다.
핏물이 흐르는 머리칼을 쓸어 넘긴 후 손등으로 눈가를 슥슥 닦았다. 손등도 온통 피범벅이지만 안 닦은 것보다는 나았다.
바스타드 소드는 방금 전 후작군 병사를 꿰뚫은 후 바로 회수하지 못했다. 로젤린은 죽은 후작군 병사의 복부에 발을 얹고 칼자루를 쥐었다. 힘주어 뽑아내자 시체가 한 번 들썩거리며 칼날이 뽑혔다.
그녀는 칼날을 이리저리 비추어 보았다. 칼날이 상해 있지만 이번 전투까지는 사용할 수 있을 듯하다. 베스메틱 백작의 별장에서 회수하지 못한 보검의 존재가 약간 아쉬웠다.
로젤린은 프레데릭 쪽을 바라보았다. 마침 눈을 마주친 프레데릭이 수신호를 보냈다. 미리 계획한 대로 집에 돌입하라는 신호다. 로젤린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거리가 멀어 그에게 제대로 보이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따라 와라.”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십여 명의 부하들이 그녀의 뒤를 따라 황제의 은신처까지 달렸다.
후작군이 로젤린 일행을 막으려 했다. 은신처를 포위하고 있던 수도 많이 줄었다. 로젤린은 거침없이 베어 넘겼다.
이윽고 로젤린은 은신처 안으로 들어왔다. 부하들이 밖에서 후작군을 상대하는 동안 후작이든 황제이든 그녀가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
클레타트 후작과 카를은 집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몹시 분노한 기색의 후작이 으르렁거리듯이 로젤린의 이름을 씹었다.
“로젤린 메이어…….”
“당신을 반역죄로 체포합니다.”
로젤린은 후작에게 검을 겨누는 한편 주변을 살폈다. 카를은 후작의 부하로 보이는 사람에게 붙잡혀 있었다.
‘저 사람은…….’
눈가가 미미하게 떨렸다. 큰 망토를 입고 복면을 쓴 사내는 한때 레젠을 악몽으로 몰아넣었던 암살단의 두목이다.
그날의 패배 이후 로젤린은 머릿속으로 저 사내와 겨루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이번에야말로 저 사내와 싸워서 이기고 싶다는 호승심이 치솟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다시 후작에게 눈을 돌렸다. 눈앞에 가족의 원수가 있다. 후작에게 겨눈 검을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이대로 당장 검을 휘둘러 후작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는 안 돼.’
로젤린은 떨리는 손을 꾹 쥐었다.
후작을 죽이는 건 쉽다. 그러나 그렇게 죽여서는 안 되는 자다. 법정에 세워서 정당한 심판을 받고 죄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것이 옳은 절차였고, 그녀가 바라는 복수였다.
“항복하십시오. 이곳의 반란군은 거의 진압되었으며 당신이 도주할 방법은 없습니다. 모든 건 끝났습니다.”
“……끝났다고?
후작이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로젤린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분노로 일렁거렸다.
“황제는 아직 내 손아귀에 있다!”
그가 카를을 인질로 이용할 거라는 건 짐작했다. 밖에는 후작군과의 전투에도 참여하지 않은 궁병이 은밀하게 매복하고 있다. 후작이 집 밖으로 나오면 즉시 공격할 예정이었다.
체포 과정에서 카를이 입을 수도 있는 부상도 감수했다. 이 계획은 카를이 직접 제안했다. 로젤린은 카를과 살며시 눈짓을 교환했다. 카를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아주 미미하게 끄덕였다.
“루이! 황제를 끌어와서 내 앞에 세…….”
울컥.
부하에게 외치던 후작의 입에서 핏물이 치솟았다. 등 뒤에서 그의 가슴팍을 뚫고 나온 칼날이 피에 젖어 번들거렸다.
로젤린도 크게 당황했다. 놀란 시선이 후작의 뒤로 움직였다. 방금까지 카를을 결박하고 있던 복면의 사내가 후작의 몸통을 관통한 칼을 빼냈다.
“크헉!”
후작은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가슴이 들썩거릴 때마다 핏물이 입 밖으로 주르륵 흐르며 갈라지는 소리가 쌕쌕 새어 나왔다.
당황한 와중에도 어디를 다쳤는지 바로 짐작했다. 폐를 찔렸다. 후작은 현재 끔찍한 상처의 고통과 더불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이 맞을 수 있는 고통스러운 죽음 중 하나였다.
‘배신자? 아니야. 단순한 배신자라면 일부러 폐를 찌를 리는 없어.’
일부러 고통스럽게 죽게 한다는 건 그만한 원한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로젤린은 피를 쏟으며 경련하는 후작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사내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사내는 로젤린이 아니라 후작을 보고 있었다.
“클레타트 후작, 그냥 죽이는 건 쉬우니까 시시하죠. 원래는 당신이 목적을 성취하고 인생의 절정기에 올랐을 때 죽이려 하였습니다만 지금 상황도 나쁘지는 않군요.”
쇳소리에 가까운 거칠고 거북한 목소리가 복면 안쪽에서 그르렁거렸다.
“10년 전 당신이 하였던 질문에 다시 대답하겠습니다. 당신의 기사도 부하도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전 기사가 될 수 없는 한낱 복수귀니까요.”
부들부들 경련하던 후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제야 뭔가 깨달은 표정이었다.
‘10년 전? 설마?’
그 하나의 단어가 로젤린의 귀에 크게 들렸다. 공통점은 겨우 10년 전이라는 시기와 복수라는 두 가지뿐이다. 지나치게 과장된 추측일 것이다. 그러나 설마설마하면서도 로젤린의 시선은 사내에게 못 박혔다.
“로젤린.”
사내가 바라보았다. 로젤린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많이 힘들었지? 무사히 잘 자라 주어서 정말 다행이야.”
눈시울이 시큰거리고 눈앞이 뿌예졌다. 알고 있다. 얼굴을 보지 못하여도, 목소리가 바뀌어도, 가문의 검술이 흔적조차 남지 않아도, 로젤린은 저 남자를 알고 있었다. 어째서 이제까지 몰랐을까. 처음 보았던 그때에 알아보았어야 하는데.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가 간신히 입술 밖으로 흘러나갔다.
“……오, 오빠.”
사내는, 크리스토퍼는 웃었다. 복면 안쪽으로 웃는 듯이 보였다.
“나는 네가 자랑스러워.”
그리고 크리스토퍼는 후작을 베었던 칼로 자신의 목을 그었다. 부릅뜬 로젤린의 시야로 붉은 핏줄기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오빠! 오빠아!!”
로젤린은 칼을 내던지며 쓰러지는 크리스토퍼에게 달려갔다. 피가 솟구치는 목의 상처를 손으로 누르며 지혈하려 애썼지만 콸콸 쏟아지는 피는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빠!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눈물이 양 뺨을 흥건히 적시는 것도 모른 채 로젤린은 크리스토퍼를 끌어안았다. 복면 안쪽에서 그르륵거리는 쇳소리가 났다.
로젤린은 정신없이 울면서 크리스토퍼의 복면을 벗겼다. 참혹한 화상의 흉터로 과거의 모습은 전혀 알아볼 수 없는 끔찍한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오빠였다. 크리스토퍼였다.
“오빠, 어떡해. 피가 안 멈춰, 오빠.”
크리스토퍼가 덜덜 경련하는 팔을 가까스로 움직였다.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 우는 로젤린의 뺨에 간신히 크리스토퍼의 손끝이 닿았다. 로젤린은 크리스토퍼의 손을 움켜쥐고 울음을 터트렸다.
“수잔…… 엠…… 부탁…….”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로젤린은 가냘프게 붙어 있던 손끝의 힘이 사라지고 그녀의 무릎에 올려 안고 있던 얼굴이 힘없이 떨구어지는 걸 보았다. 갈라진 목의 상처에서 거칠게 새어 나오던 숨소리가 완전히 멎고 감지 못한 눈동자의 동공이 초점 없이 열렸다.
“아아악! 오빠!!”
절규나 다름없는 비통한 외침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크리스토퍼의 시체에 얼굴을 파묻은 로젤린으로부터 끔찍한 오열이 터졌다.
“크리스토퍼 메이어…….”
카를이 신음처럼 크리스토퍼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이마를 감쌌다. 한참을 오열하던 로젤린이 불현듯 크리스토퍼의 시체를 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클레타트 후자악!!”
단번에 떨어진 검을 주워 든 그녀는 아직까지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있는 후작에게 달려갔다. 후작의 앞에서 애써 유지하고 있던 냉정과 평정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어째서! 우리 가족이야!! 어째서 아버지였어!! 왜 아버지를 죽였어!!”
배신감과 분노와 고통과 절망으로 일그러져 있던 후작의 얼굴에 허탈함이 더해졌다.
“어,째서…… 였을…… 까…….”
호흡조차 힘겨운 후작이 쌕쌕거리는 쇳소리를 중얼거렸다.
“내 명령에…… 누명을 쓰고, 그대로 죽을…… 유일한 기사였어서……?”
“네놈은 끝까지!!”
로젤린이 증오스러운 외침을 지르며 칼을 치켜들었다. 높이 올라간 칼날이 그대로 아래로 내리꽂혔다
“아, 잠깐……!”
카를은 무심코 손을 내밀었으나 그녀를 막지는 못했다.
그러나 칼날은 후작의 목이 아니라 바로 옆의 바닥에 쿵 내리꽂혔다. 당장에라도 그를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누르며 칼자루를 쥔 로젤린의 양손이 부들부들 경련했다.
“당신을 쉽게 죽게 하지 않아.”
로젤린은 이를 빠드득 악물며 중얼거렸다.
“아버지와 오빠들과 내 가족의 몫까지, 당신이 최후까지 고통스러워하면서 죽는 걸 지켜봐 주겠어.”
고통으로 한껏 일그러진 후작의 얼굴이 뒤틀렸다. 그는 피를 쿨럭쿨럭 토해 내며 간신히 시선을 움직였다. 크리스토퍼의 시신이 눕혀져 있는 곳이었다.
“정말…… 무, 능한 부하…… 뿐이야…….”
꺽꺽 숨을 몰아쉬는 후작의 등 아래로 피 웅덩이가 차츰 커졌다.
카를이 낮은 한숨을 쉬고는 크리스토퍼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는 조용히 집 밖으로 나가 후작의 죽음을 그녀에게 양보했다.
클레타트 후작은 로젤린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랜 시간 끔찍한 고통 속에 죽어 갔다.
하늘이 자주색으로 물들었다.
로젤린은 이미 싸늘하게 식은 후작의 시체 옆에 고개를 숙인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많이 춥다.”
두꺼운 망토가 어깨에 둘러졌다.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몇 시간 전부터 그녀의 곁을 말없이 지키고 있던 프레데릭이 그곳에 있었다.
“……프레데릭.”
분노와 증오로 인해 멎었던 눈물이 눈가에 다시 고였다. 그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로젤린을 프레데릭은 말없이 안아 주었다.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났다.
로젤린은 그의 가슴에 안겨 섧게 울었다.
* * *
수잔나는 엠마와 비밀 장소에 숨은 후 한 번도 저택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며칠에 한 번씩 남자가 몰래 갖다 놓는 음식과 물을 가지러 비밀 장소의 문을 열 뿐이었다. 저택 내에 널브러져 있던 병사의 시체들도 남자가 모두 치웠다.
두어 번 병사들이 약탈하러 저택을 찾아온 적은 있었다. 밖이 소란스러워질 때마다 수잔나는 엠마를 꼭 끌어안고 들키지 않기만을 신에게 빌었다.
며칠이나 지났는지 날짜를 계산하는 감각도 무디어졌다.
그러던 차에 식량이 떨어졌다. 남자도 저택을 찾아오지 않았다. 수잔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엠마를 남겨 두고 조용히 비밀 장소를 빠져 나왔다.
저택 밖의 거리는 병사와 사람들로 분주했다. 병사를 보고 반사적으로 흠칫했지만 병사가 입은 제복은 끔찍하기만 했던 후작군의 복장이 아니었다.
수잔나는 지나가는 중년의 부인을 조심스럽게 붙들었다.
“말씀 좀 물을게요. 전쟁은 어떻게 되었나요?”
여자는 호들갑스럽게 설명했다.
“어디 밀실에라도 피난해 있었어요? 엊그제 황제 폐하의 군대가 후작군을 물리치고 입성했답니다! 그 악마 같은 후작놈의 목도 광장에 걸려 있어요! 이제 전쟁은 끝났어요!”
전쟁이 끝났다는 한마디에 수잔나는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녀는 겨우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엠마를 데리러 뛰어갔다.
수잔나와 엠마는 집으로 돌아갔다. 거리는 여전히 파괴되어 있었고 전쟁의 상처가 깊게 남아 있었지만 사람들의 얼굴에는 활력이 조금씩 감돌았다.
황제가 국고는 물론이고 사유 재산까지 동원하여 구호물자를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지방에서는 여태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전하지 않고 눈치만 살피던 영주들도 구호물자를 지원할 예정이라고 했다. 후작령의 점령이 완전히 끝나면 몰수한 후작의 재산도 피난민들에게 풀 것이라고 했다.
많은 정보가 거리에 흘러넘치고 있었다. 민심을 조금이라도 안정시키기 위해 황제측에서 빨리 퍼트린 소문이라는 걸 짐작하기엔 수잔나는 많이 피곤했다. 머릿속이 복잡하기도 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제일 먼저 알려 줄 것 같았던 남자가 감감무소식이었다.
‘싸우다가 혹시……. 아니야, 얼마나 실력이 뛰어난 사람인데 쉽게 죽지는 않을 거야.’
복잡한 수잔나와는 다르게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엠마는 신이 났다.
“엄마, 우리 집은 무사히 있을까? 다시 빵집은 할 수 있는 거야? 난 엄마가 만들어 주는 빵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수잔나는 애써 웃었다.
“엄마도 다시 빵집을 열 수 있게 되면 좋겠다.”
“다른 애들도 잘 지내고 있을까? 제인도 아빠랑 오빠들이 전부 군대로 끌려가서 엄마랑 둘이 남았대. 전쟁 같은 거 없어지면 좋을 텐데. 그치?”
어느덧 집이 가까웠다. 이것저것 이야기하며 걷던 엠마가 갑자기 수잔나의 손을 놓으며 달려갔다.
“고모! 로젤린 고모!!”
수잔나도 뒤늦게야 집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키가 큰 사람을 알아보았다.
“엠마! 무사했구나!”
냉큼 달려들어 안긴 엠마를 로젤린이 꼭 끌어안았다. 그녀는 마치 엠마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처럼 정신없이 얼굴을 더듬고 키스를 퍼부었다.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니? 그동안 안 보여서 고모는 큰일이 난 줄 알고…….”
두서없이 묻는 목소리에 물기가 스몄다. 엠마가 헤죽 웃으며 로젤린의 뺨에 키스했다.
“아이, 참. 고모, 나도 안 우는데 고모가 울면 어떻게 해. 어떤 아저씨가 구해 줘서 방금까지 엄마랑 숨어 있다가 왔어! 무서웠지만 엄마랑 같이 있어서 안 무서웠어. 나 한 번도 안 울었다?”
“엠마의 말이 맞아. 전쟁이 끝난 줄도 모르고 오늘에야 겨우 나왔지 뭐니.”
가까이 다가온 수잔나가 로젤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로젤린이 그제야 안도하여 울음이 나올 것 같은 흐린 미소를 머금었다.
비워져 있던 집은 엉망이었다. 세간살이는 엉망으로 부서지거나 바닥에 널브러졌으며 돈이 될 만한 것과 현금은 동화 한 닢도 남기지 않고 싹 쓸어 갔다. 그래도 수잔나는 가족이 무사함을 신에게 감사했다.
식료품도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수잔나와 엠마를 잠시 기다리게 한 로젤린은 집을 비웠다. 한참 후에 로젤린은 그녀의 부하로 보이는 병사들 몇 명과 함께 커다란 짐들을 가지고 왔다.
“당장 먹을 식료품과 생필품을 받아 왔어요. 이불도 하나도 안 남았죠?”
“우와, 빵이다!”
어제 저녁부터 제대로 된 식사를 먹지 못한 엠마는 환호하며 빵으로 덤벼들었다. 수잔나도 함께 식사하는 사이 로젤린은 병사들과 집을 정돈했다. 화로에 불을 지피고 뜯어져 나간 창문에 가림막을 치니 쌀쌀하던 실내는 서서히 따뜻해졌다.
배를 채운 엠마는 친구들이 무사한지 알아보러 나갔다. 따뜻한 방 안에서 로젤린은 수잔나와 긴 이야기를 했다.
“그랬구나…….”
그동안의 진실과 크리스토퍼의 최후를 들은 수잔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랬던 거였어.”
한참을 침묵하던 그녀는 여전히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로젤린은 침착하려고 애썼지만 크리스토퍼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니 목소리는 저절로 커졌다.
“제가 그때…… 오빠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요? 오빠가 왜 죽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사실은 크리스토퍼가 살아 있었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어.”
수잔나는 시선을 허공으로 올렸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허공을 올려다보며 그녀와 엠마를 구해 준 낯선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 사람은 끝까지 자기가 크리스토퍼라는 걸 직접 밝히지 않았어. 난 그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도, 해야 하는 말도 무척 많았는데 그는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지. 무슨 이유였을까. 어째서 비밀로 감추려는 걸까 궁금했는데 이제야 알 것 같아.”
“어째서였을까요?!”
성급하게 물어 오는 로젤린을 달래듯이 수잔나가 그녀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크리스토퍼가 후작의 부하였다고 했지? 연쇄살인마도 바로 크리스토퍼였다면서? 그 외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일을 하며 손을 더럽혔을 거야. 그렇지 않니?”
“……그럴 거예요. 클레타트 후작이 결코 청렴결백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로젤린은 침울하게 대꾸했다. 클레타트 후작의 부하로 있던 ‘루이’에 대한 정보는 거의 얻지 못했다. 하나 그가 연쇄살인마로서 레젠의 밤을 뒤숭숭하게 만든 점만으로도 후작의 부하로서 어떠한 일들을 하였을지는 짐작되었다.
수잔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세게 움켜쥔 로젤린의 손등을 보듬으며 한동안 숨을 골랐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들려온 수잔나의 목소리는 탁하게 갈라져 있었다.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거야, 크리스토퍼는…….”
그 말 한마디에, 로젤린도 알 수 있었다.
크리스토퍼는 복수를 하기 위하여 후작의 부하가 되었다. 그리고 후작의 명령을 받아 수년 동안 많은 사람을 죽이며 손을 더럽혔다. 개중에는 옥스타인 공작의 손녀와 바꿔치기 당할 예정이었던 소녀처럼 죄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로젤린이 기억하는 크리스토퍼는 약자를 보호하고 주군에게 충성한다는 기사도를 결코 굽히지 않았던 고결한 기사였다.
그랬던 크리스토퍼는, 복수라는 명목이 있더라도 스스로 타락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명치가 세게 치받히는 것 같았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였을 크리스토퍼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슬픔이 로젤린을 흐느끼게 했다.
“하지만, 전 그래도 크리스토퍼 오빠가 살아 있기를 바랐어요. 살아서 오빠와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와 큰오빠를 슬퍼하고, 추억을 회상하고, 오빠가 살아 있다는 걸 기뻐하고…… 그렇게 오빠가 살아 있었으면 했어요. 후작이 죽지 않더라도 오빠가 살아 있었으면 됐는데…….”
“나도.”
수잔나가 서글픈 미소를 흘렸다.
“과거에 무슨 짓을 했어도 상관없으니까 크리스토퍼가 내 남편으로, 엠마의 아버지로 돌아와 주기를 바랐어. 10년 동안 이 집에서 계속 그를 기다렸어.”
길고긴 그녀의 기다림은 끝났다. 로젤린은 자신과 과거를 공유하는 유일한 사람의 손을 꼭 쥐었다. 겹쳐진 손등으로 눈물방울이 가늘게 뚝뚝 떨어졌다.
엠마가 돌아오기 전까지, 두 사람은 오래도록 크리스토퍼의 추억을 나누었다.
클레타트 후작은 사망을 확인하여도 후작군은 항복하지 않았다. 후작의 처남인 멕켈 백작이 중심이 된 후작군은 연합군에게 저항했다. 그러나 승패는 확실히 기울었다.
황제라는 명분이 있는 연합군은 일주일 만에 레젠을 탈환했다. 후작령으로 후퇴한 후작군을 완전히 토벌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지만 카를 5세가 레젠으로 귀환한 이상 승리나 마찬가지였다.
저항하는 동생과는 대조적으로 클레타트 후작 부인은 후작저에서 조용히 체포에 응했다. 미처 도주하지 못한 후작파의 주요 귀족들도 반역 혐의로 속속 체포되었다.
클레타트 후작의 목은 광장에 효수되었다. 완전히 바닥을 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황제는 후작을 철저히 악역으로 내세우는 공작을 시도하였고 원망의 대상이 필요하였던 사람들은 후작의 시체에 돌을 던졌다.
‘아버지, 오빠…….’
로젤린은 후작의 목이 걸린 광장에 섰다. 언젠가 프레데릭과 나란히 앉아 복수를 이야기하였던 광장에 이제 복수의 결과물이 있었다.
후작의 목이 걸려 있는 장대 밑에는 쓰레기와 돌멩이가 쌓여 있다. 지금도 간간이 지나가는 사람들이 침을 뱉거나 욕설을 퍼부었다. 말라비틀어지고 썩어가는 후작의 목에서는 생전의 얼굴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는데 참 많은 길을 돌아왔구나. 아버지와 오빠는 복수에 만족하실까.’
생각해 보았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다만 이제 로젤린은 아버지와 오빠들의 웃는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꿈에서만 만날 수 있었던 그리운 모습이 아니었다. 가족들의 행복하였던 과거는 이제 그녀의 옆에 있었다.
“…….”
등 뒤에서 뚜벅뚜벅 걸어온 인기척이 불현듯 어깨를 안았다. 후작의 목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내리며 로젤린은 그녀의 목을 안은 팔뚝을 쓰다듬었다.
“웬일이십니까?”
“다행이군.”
프레데릭이 장난스럽게 미소했다.
“하마터면 치한으로 오해받아서 베이는 게 아닌가 했거든.”
“당신의 발소리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더욱 감동이잖아.”
킥킥 웃은 그가 로젤린의 귓가와 뺨에 키스하며 뒤에서 안았다.
“수잔나 언니랑 엠마를 만났어요.”
낮은 중얼거림에 프레데릭이 반색했다. 수잔나와 엠마의 행방을 알 수가 없어서 그도 많이 걱정했다.
“정말 다행이군. 도시 밖으로 피난했었나? 다친 데는 없고?”
“크리스토퍼 오빠가 대피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귓가에서 프레데릭이 짧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가 왜 자살했는지도 언니는 바로 알아챘어요. 오빠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거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어째서 오빠만 혼자 짊어져야 했던 걸까요. 저는 어리고 미숙해서 복수하기는커녕 오히려 짐이 될 거라고만 여겼을까요?”
대답을 요구하는 의문형이었지만 오히려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수잔나로부터 의문을 해결한 후 새로운 궁금증이 생겼다.
깨끗한 복수는 없다. 어차피 손을 더럽히고 짐을 짊어질 것이라면 왜 자신을 찾지 않았을까. 혼자 하는 복수보다는 두 남매가 함께하면 좀 더 쉽고, 어쩌면 크리스토퍼가 자살하지 않을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크리스토퍼는 모든 걸 비밀에 부치고 혼자 짊어진 채 혼자 살다가 혼자 죽었다. 로젤린은 그것이 너무 섭섭했다. 10년 동안 도주했다고 여기고 오빠를 원망하였던 과거가 부끄러웠다.
‘10년 전의 나는 어렸지만, 5년 전의, 4년 전의, 그리고 지금의 나는 절대 어리지 않잖아. 오빠가 말해 주었다면 난 모든 걸 버리고 기꺼이 복수를 선택하였을 거야.’
믿음직하지 못한 어리광쟁이 동생으로만 남았던 걸까.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토퍼는 혼자 모든 걸 짊어지고 죽은 걸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크리스토퍼에게 더욱 미안했다.
“내가 크리스토퍼의 입장이었어도 하나밖에 없는 동생에게는 절대 말하지 않았을걸.”
프레데릭이 그녀의 귓가에 탄식처럼 속삭였다.
“역시 어린 동생은 믿음직스럽지 못한 거죠?”
“그렇지 않아. 널 사랑하니까 오히려 말할 수 없었던 거지.”
자조하는 로젤린의 대답을 그는 강하게 부정했다.
“자신의 인생을 걷고 있는 사랑하는 동생에게 가시밭길을 함께 가자고 기꺼이 끌어들일 오빠가 어디에 있을까. 복수는 그 자신의 인생까지 망치는 길이야.”
“프레데릭, 하지만…….”
“똑같이 동생이 있는 입장에서 크리스토퍼의 마음을 짐작해 볼까. 피비린내 나는 복수의 결과물은 모두 내가 짊어질 테니 하나밖에 없는 동생만은 밝은 곳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랐을 거다, 로젤린. 나는 어두운 과거 속에 정체되어 있어도 너만은 밝은 미래를 걷길 바라. 믿음직스럽지 않아서 말하지 못한 게 아니라, 사랑했기 때문에 말하지 못한 거야.”
믿지 못한 게 아니라, 사랑하였기 때문에.
로젤린은 프레데릭의 한마디를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크리스토퍼가 죽은 지금, 이제 그의 진심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영원히 없다. 그러나 프레데릭의 한마디가 심란하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내가 오빠였어도 그랬을까? 크리스토퍼에게는 비밀로 하고 나 혼자 복수하려 했을까?’
대답은 ‘그렇다’였다.
씁쓸하게 미소하며 로젤린은 프레데릭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당신을 남겨 두고 혼자 미래를 걸어가는 건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발트란으로 돌아가요.”
프레데릭은 말하지 않았지만 로젤린은 짐작하고 있었다. 가장 발트란의 안정을 원하는 프레데릭이 레젠을 점령하고 군사들이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에도 귀환하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
그는 눈앞에서 크리스토퍼를 잃은 로젤린이 충격에서 벗어나고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조용히 기다려 주고 있었다.
“그곳은 이제 제 고향이기도 하니까요.”
“……로젤린.”
프레데릭이 그녀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속닥거렸다.
“나 지금 굉장히 감동했는데 키스해도 될까?”
“안 됩니다.”
대낮의 광장에서 키스하겠다는 프레데릭을 단호히 밀어낸 로젤린은 대공저 방향으로 앞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프레데릭이 얼른 쫓아 와서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 정도는 괜찮지?”
로젤린은 미소로 대답했다. 함께 걸어가는 길에 석양빛이 부서졌다.
* * *
“후작이 졌어?! 이럴 수는 없다!”
남쪽에서 전서매가 발트란으로 올라왔다. 보고를 받은 마리안 부인은 크게 화를 내며 문서를 구겼다.
슈벤하임 대공령의 심장에서 반란을 일으킨다는 그녀의 계획은 클레타트 후작과의 협력 하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후작이 패했다는 건 곧 그녀의 패배를 뜻한다.
“클레타트 후작의 반란이 실패했습니까?”
함께 있던 윌리엄도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마리안이 구겨 버린 문서를 주워 내용을 읽었다.
보고문에는 후작이 사망하고 황제가 레젠을 탈환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프레데릭의 군대가 발트란 방향으로 진군하고 있으며, 후작군은 황제군의 추적을 받아 후작령으로 밀려났다는 것, 대공군의 예상 도착 시간 등도 있었다.
마리안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주변을 서성거렸다.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하였던 그녀는 협력자의 패전에 완전히 평정심을 잃었다.
눈에 띄게 동요하는 어머니를 윌리엄이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의 얼굴은 프레데릭이 레젠으로 떠나기 전에 비하여 무척 수척해져 있었다. 얼마 동안 망설이던 윌리엄은 결심을 굳혔다.
“어머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마리안은 동요한 와중에도 윌리엄에게 주의를 돌렸다.
“무엇이지요?”
아들을 바라보는 마리안의 시선에는 어렴풋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어쩌면 그녀의 하나뿐인 아들이 이 어려운 상황을 함께 헤쳐 나갈 수 있는 좋은 방안을 의논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시선을 피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여태까지 윌리엄은 소극적인 방관자로 있었다. 프레데릭을 형으로서 사랑하지만 마리안 또한 사랑했다. 어머니가 형에게 반기를 드는 걸 말리지도 못하고 동참하지도 못했다.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불안해하고 초조해했다. 프레데릭이 빨리 상황을 수습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프레데릭이 영영 돌아오지 못하길 바랐다. 프레데릭도, 마리안도 그에게는 모두 소중한 사람이었다.
윌리엄은 두 사람 중 한 명도 선택하지 못했다.
명목상의 통치자로 윌리엄을 앉혀 두었으나 그는 완전히 허수아비가 되었다. 형이 앉았던 영주의 의자가 가시방석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윌리엄에게 마리안은 실망감을 숨기지 않았다.
이제 기대하는 마리안의 얼굴을 보니 결심이 흔들렸다.
‘더 늦어서는 안 돼.’
윌리엄은 힘겹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형에게 항복해요, 어머니.”
마리안이 눈을 치떴다.
“……뭐라고 했나요?”
눈매가 매서워지고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더 이상 말하면 어머니와의 관계도 깨져 버릴 것이란 직감이 왔다. 그렇지만 지금 말해야 했다. 마리안의 운명이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가기 전에.
“아직까지 발트란에 큰 피해는 직접적으로 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성문을 열고 항복하면 프레데릭 형도 어머니를 처형하지 않을 겁니다. 용서를 구한다면 반드시 관대하게 대우해 줄 사람이니까요.”
“…….”
사나워지는 표정과는 다르게 마리안 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뺨을 맞는 것도 각오하고 있었던 윌리엄은 오히려 침묵이 불안했다.
“어머니, 이건 잘못된 일입니다. 저는 영주가 될 그릇도 아니고 욕심도 없어요. 하물며 피를 나눈 형을 적대하고 죽여가면서까지 영주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머니께서 권력을 지향하시는 걸 제가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만 옳지 않은 방법이에요.”
“하하.”
불현듯 마리안이 날카로운 웃음을 터트렸다.
“권력? 그대는 내가 반평생 몰두하였고 그 결과로 맞이한 지금이, 그저 권력욕으로 보이나요?”
“……그렇습니다.”
이 대답은 여태까지 하였던 그 어떤 말보다 윌리엄을 힘들게 했다.
“어머니께서 대공가에서 태어나신 분이었다면 어머니를 지지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외부에서 결혼으로 대공가에 소속된 분이시고, 대공의 권력을 탐하여 스스로 손에 넣으실 자격은 없으십니다. 어머니의 아들인 저도 원하지 않습…….”
“맞아. 넌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이지!”
윌리엄의 말을 끊으며 마리안이 외쳤다. 윌리엄은 무심코 흠칫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섰다. 목소리도 어조도 표정도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아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분노와 증오로 만든 불길이 넘실거렸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그 아들이!! 어미를 그렇게 모르느냐? 내가, 이 마리안이 고작해야 권력욕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어, 어머…….”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네 아비라는 작자가 내 인생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가장 옆에서 날 보아 왔을 네가!! 네가 날 그렇게 말해!! 권력? 고작해야 그따위 것에 반평생을 바쳤을 것 같으냐!!”
무시무시한 노성이 방 안에 가득 찼다. 윌리엄은 제대로 된 대꾸 한마디 못하고 아연히 서 있었다. 뒤늦게야 자신이 그동안 어머니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만이 아니라 큰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내 눈앞에서 썩 꺼지거라!”
윌리엄은 아주 간신히 “……죄송합니다.”란 한마디를 우물거리고는 도망치듯이 방을 나갔다.
나가는 모습을 보지도 않고 마리안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마를 짚은 손이 연신 부들부들 떨렸다. 아들이 나약하기 짝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식이었다. 유일한 자식이었다.
제 배 속을 가르고 낳은 자식이 자신을 어리석은 권력욕을 탐하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었다는 건 예상 밖의 충격이었다.
‘그 아비의 핏줄은 어쩔 수 없는 게야.’
다만 한 가지 도움이 된 건 있었다.
- 아직까지 발트란에 큰 피해는 직접적으로 나지 않았어요.
마리안은 윌리엄이 그녀를 설득하려 했던 말을 떠올렸다. 큰 피해, 큰 피해, 큰 피해. 그 한마디를 입속으로 중얼거리던 마리안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곳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곳이다.
후작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프레데릭은 곧 발트란으로 귀환한다. 승리한 영주의 무사 귀환은 그녀의 동조자들도 동요하게 하기에 아주 충분했다.
마리안이 내부에서 반기를 드는 데 성공하였던 건 자리를 비운 프레데릭을 공격하는 외부의 협조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프레데릭이 직접 그녀의 앞에서 군대를 지휘한다면 모든 변수가 뒤틀린다.
현재 브류나크 나이트는 발트란을 포위만 하고 있다. 발트란은 겉으로는 농성 중인 상황이지만 브류나크 나이트와의 전투로 인한 사상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반란이 일어났음에도 발트란의 성벽은 흠집 하나 없이 건재했다.
‘어차피 이대로 모든 게 끝난다면.’
마리안은 결심했다.
“모든 걸 불태우자.”
목소리로 만들어내고 보니 더욱 마음에 들었다. 발트란을 불태우자. 발트란을 파괴하자. 그가 평생 아끼고 지켰던 발트란을, 그가 태어나고 자라 죽은 발트란을 잿더미로 만들고 시체의 산을 쌓자.
가늘게 뜬 눈동자가 광기로 빛났다.
‘기왕이면 빈민가부터 시작할까.’
빈민가의 지원은 프레데릭 어머니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마리안은 자신이 권력을 쥐게 되었을 때부터 꾸준히 빈민가의 철폐를 주장했다.
그동안은 프레데릭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하였으나 좋은 기회가 왔다.
이것 또한 하나의 복수가 될 것이다.
마리안 부인은 발트란을 방화하고 파괴할 결심을 했다.
이유 없는 학살이나 다를 바 없다. 마리안 부인은 프레데릭이 귀환하기 전에 그의 지지자들에게 경고하고자 하는 의미라는 핑계를 붙였다.
그녀에게 동조하는 귀족들 중에서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을 설득하고 회유하거나, 혹은 암살하여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마리안 부인은 며칠의 시간을 낭비했다. 최종적인 준비를 하기 위해서도 며칠의 시간을 낭비했다.
이렇게 낭비된 시간을 프레데릭은 유용하게 사용했다.
늦은 밤.
화살 하나 소모되지 않았지만 발트란은 현재 전쟁 중이다.
발트란의 사람들은 해가 지기도 전에 문을 걸어 잠그고 틀어박혔다. 아주 드물게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도 활기를 잃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영주가 하루라도 빨리 귀환하고 이 전쟁이 끝나기만을 바랐다.
성내를 순찰하는 경비대들도 의욕은 없었다. 마리안 부인은 경비대의 대장들을 끌어들이거나 죽여서 교체시켰을 뿐이었다. 수많은 경비대원들 전부를 지지자로 만들지는 못했다.
진심으로 마리안 부인을 따르는 경비대원은 거의 없다. 하지만 섣불리 조직을 이루거나 반항하는 건 어려웠다. 마리안 부인의 사병들은 요직 곳곳에서 경비대원을 감시했다. 일정 인원 이상의 모임을 갖는 것도 철저히 금지되었다.
경비대원들은 희박한 의무감만으로 성내를 순찰했다. 건성으로 밤거리를 걸어가기만 하는 경비대원들이 며칠 동안 어둠 속에 몰래 스며든 그림자들을 발견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발트란의 밤거리를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은밀히 움직였다. 앞을 밝히는 건 달빛뿐인 밤거리를 검은 망토들은 익숙하게 찾아갔다. 그들이 발을 멈춘 건 전쟁이 시작되며 영업 정지 상태나 다름없는 술집의 뒷문이었다.
똑. 똑똑. 똑. 똑.
짧게 한 번. 길게 한 번. 짧게 두 번.
약속한 방법으로 노크했다. 문 안쪽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물었다.
“필라헨 제국에서 제일 멋지고 제일 훌륭한 남자는?”
“…….”
가장 앞에 서 있던 검은 망토는 잠시 침묵했다.
“……세계 최강 프레데릭 님.”
“좋아.”
문이 열렸다.
검은 망토의 일행은 술집으로 들어왔다. 뒷문은 주방으로 연결되어 있다. 로젤린은 후드를 벗으며 투덜거렸다.
“그 쪽팔린 암호문은 제발 안 하면 안 됩니까?”
바바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지. 맥스가 정한 암호문이니까 맥스에게 따져.”
빙긋 웃은 바바라는 로젤린의 뒤를 따라온 일행들에게 인사했다. 정기사인 그녀에 비하면 한참 직급이 아래인 일반 병사들은 차렷 자세로 굳었다.
“오늘이 마지막이지? 그동안 수고 많았다.”
“밤중에 왔다 갔다 몇 번 한 것뿐입니다.”
병사들을 위층으로 올려 보낸 로젤린은 물을 찾아 마셨다.
샤렌의 브류나크 나이트는 발트란으로 지금도 북상 중이지만 그 일행에 로젤린과 프레데릭은 없었다. 두 사람을 비롯하여 프레데릭을 호위하였던 제1기사대는 말을 타고 정신없이 지름길을 달려 먼저 도착했다.
포위군과 합류하고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고 있을 때 마리안 부인을 배신한 자가 나타났다. 성을 불태우겠다는 마리안 부인의 계획에 도저히 동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대놓고 반대했다가는 그녀에게 살해당할 위험이 있었다.
그자는 딸을 몰래 성 밖으로 내보냈다. 포위군을 찾아온 딸은 모든 자초지종을 털어놓으며 아버지의 항복을 대신 전달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프레데릭은 결론을 내렸다.
‘불을 지르겠다면 우리도 이용해 주지.’
그리하여 총책임을 맡은 로젤린을 비롯한 아이기스 나이트들을 몰래 성으로 잠입했다. 성벽을 지키는 경비대의 기강이 해이해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성내에는 로젤린과 함께 잠입한 제1기사대 외에도 다른 아이기스 나이트의 생존자들이 숨어 있었다. 아이기스 나이트는 마리안 부인의 계략에 의해 마수 떼와 큰 전투를 벌였다. 전투가 끝나고 귀환하기도 전에 마리안 부인은 반란군을 일으켜 성문을 폐쇄했다.
기사대장 알렉산더는 부상당한 부하들을 데리고 서둘러 도주했다. 그 후 브류나크 나이트의 요새에 머무르던 알렉산더는 전투가 가능한 부하들을 하나둘씩 성으로 잠입시켰다. 프레데릭이 귀환하기 전에는 섣부른 행동을 할 수 없지만 성내에 잠입해 있는 게 도움이 될 거란 계산이었다.
알렉산더의 계산은 틀리지 않았다. 덕분에 프레데릭은 많은 시일을 소모하지 않고도 성내에서 충분한 인원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로젤린이 지난 며칠 동안 성벽과 은신처를 왕래하며 데리고 온 병사들은 부족한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여긴 은신처 중에서 그나마 사람이 적었는데 다시 바글바글해졌군.”
바바라가 로젤린에게 술을 권했다. 수면제를 탄 술을 마셨던 안 좋은 기억이 남은 로젤린은 멈칫했지만 순순히 술잔을 받았다. 여기에는 프레데릭을 배신할 사람이 없다.
“생각보다 은신처가 많아서 놀랐습니다. 전 기사단 본부로 숨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전하가 인덕이 많으신 덕분이지.”
자신도 술을 마시며 바바라가 싱긋 웃었다.
그동안 프레데릭은 끊임없이 도피하였지만 발트란만큼은 확실히 지켰다. 일반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프레데릭을 좋은 영주, 좋은 통치자로 신뢰했다.
발트란 내부에는 마리안 부인에게 반발하며 프레데릭에게 은밀히 협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덕분에 아이기스 나이트도 은신처를 구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지금 로젤린이 있는 이 은신처도 예전 프레데릭과 술을 마시러 왔던 술집이었다.
“작전 시작은 내일이니까 조금만 마시겠습니다.”
“그렇지. 나도 작전이 있는 아침에 술 취해서 꼴불견인 모습을 보이기는 싫으니까.”
로젤린과 바바라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잔을 부딪치며 건배했다.
그동안 병사들을 지휘하며 자잘한 임무는 맡았지만 본격적으로 총책임을 지는 작전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뻣뻣하게 긴장되지는 않는다.
‘조금은 성장한 걸까.’
그리고 언제나 믿을 수 있는 든든한 동료들과 함께하는 작전이다.
‘문제없어. 잘할 수 있을 거야.’
로젤린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술잔을 비웠다. 앞으로 살아갈 자신의 고향을 지키는 것뿐만이 아니라, 프레데릭에게도 그의 고향을 돌려주고 싶었다.
떨어진 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프레데릭이 그리웠다.
* * *
결행 시각까지 3시간 남았다. 방화는 발트란의 빈민지역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다. 귀족들에게는 비밀로 하였지만 화약까지 동원한 방화였다. 불은 건조한 겨울 공기를 태우면서 발트란 전역으로 번질 것이다.
불이 내성까지 번지기 전에 마리안은 탈출할 예정이었다. 예상보다 더 큰 화재로 번질 수 있으니 미리 탈출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충고를 들었지만 거절했다.
‘내 눈으로 발트란이 파괴되는 걸 보고 가겠어.’
영주의 의자, 과거에는 제이슨이 사용하였던 의자에 앉은 마리안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후대의 역사에서는 영주에게 반기를 드는 것으로도 모자라, 발트란을 불태우고 파괴한 마리안을 권력욕에 눈이 먼 악녀로 서술할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것은 이제 명분도 의미도 없는, 단지 복수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홀에 혼자 있던 마리안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사람을 부르러 나가기도 전에 복도와 연결된 문이 벌컥 열렸다. 허겁지겁 뛰어들어온 하녀가 다급히 외쳤다.
“대부인! 큰일 났습니다! 내성에 방화가 발생했습니다!”
“뭣이?!”
크게 당황한 마리안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중앙 통로에서 보니 불길이 제법 세게 치솟고 있었다. 이건 절대 자연적인 불이 아니다. 마리안은 하인들에게 진화를 명령했지만 불길은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현재 내성에는 평소보다 상주하는 인원이 훨씬 적었다.
발트란을 장악하며 마리안은 내성을 경비하는 경비대를 성벽으로 쫓아냈다. 그녀는 경비대를 신뢰하지 않았다. 내성은 발트란의 중심부이자 그녀의 주된 거처였다. 신뢰하지도 못하는 병사에게 그녀의 안전을 맡길 수는 없었다.
이후 내성은 마리안 부인의 사병이 경비를 섰다.
그 사병들은 현재 방화 준비를 위해 대부분이 내성을 비웠다. 얼마 남지 않은 하인들만으로 불길을 제압하는 건 무리였다.
‘프레데릭인가? 하지만 프레데릭이 발트란까지 도착하려면 일주일 이상 남았는데!’
급보는 멈추지 않았다.
빈민가 근처에 대기 중이던 사병들은 정체불명의 무리들에게 습격을 받았다. 공격은 곧 내성에도 시작되었다. 먼 곳에서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본격적인 전투를 처음으로 겪는 마리안의 팔뚝에 오싹오싹 소름이 돋았다.
마리안은 정치적인 식견은 밝지만 전략은 어두웠다. 어느 쪽에 어떤 대처를 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공격은 거세졌다. 불길도 물론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때에 결정적인 일이 터졌다.
“대부인! 남쪽 성문이 열렸습니다! 경비대들이 반란을 일으켜 장교들을 살해하고 항복했습니다!”
“도망치십시오!”
“늦기 전에 성을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부하들이 분분히 외쳤다. 마리안의 의식이 아득해졌다.
‘……도망쳐? 내가? 그 남자의 아들에게 져서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개가 되라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까지 와서 등을 돌리고 도망칠 수는 없어! 남은 병력을 모두 끌어모아라!”
마리안은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그녀의 호위기사 파이렐 경이 침통하게 고개를 저었다.
“송구합니다만 현재 소집하여 전투가 가능한 인원이 매우 적습니다. 지휘 체계는 물론이고 병사들을 소집할 수 있는 전달 체계도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아이든 백작령에는 아직 대부인과 아이든 백작을 따르는 병사들이 많습니다! 부디 이 자리는 피하시고 후일을 기약하십시오!”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으나 파이렐이 한 말의 뜻은 명확했다. 상황을 뒤집어 승리할 가능성은 전혀 없고 마리안은 당장 꼴사납게 도망쳐야 한다.
“백작령……? 그곳으로 간들…….”
멍하니 중얼거리던 마리안은 이를 악물었다. 아이든 백작가의 군대와 그녀를 지지하는 모든 귀족들의 군대를 끌어들여 대공군과 정면으로 부딪혀서 과연 승리할 수 있을까. 다시 발트란으로 귀환하여 복수를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생각을 거듭하여도 긍정적인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잡힐 수는 없어!’
여기서 잡히면 정말 모든 게 끝나게 된다. 추하게 도망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하여도, 지금은 살아남아야 한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복수였다.
이를 악물고 생각을 고쳐먹은 마리안은 파이렐에게 끄덕였다.
“도주할 경로는 있는가?”
“불이 남쪽부터 시작되어 북문 방향은 비교적 안전합니다. 공격도 약하니 그곳을 돌파하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알겠네. 경에게 모든 지휘를 맡기지.”
파이렐은 남은 기사와 병사는 물론이고, 하인들 중에서도 부상이 없는 자에게는 검과 갑옷을 입혀 합류시켰다. 지금은 마리안을 지키기 위한 인간 방패가 한 명이라도 더 많아야 할 때였다.
마리안에게 협력하였던 귀족들도 내성에 방화가 일어나고 공격이 시작되자 뿔뿔이 도망친 지 오래였다.
‘나약하고 약아빠진 자들! 고작해야 이 정도였나……!’
분통이 터졌지만 지금은 화를 낼 시간마저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말에 탄 마리안은 호위대의 보호를 받으며 정신없이 말을 달렸다.
내성은 완전히 혼란 상태였다. 도망치는 마리안 일행의 말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밟혀 죽은 하녀의 비명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렸다. 도주하는 마리안 일행을 보자 주변의 혼란은 더 커졌다.
파이렐이 말하였던 것처럼 북쪽에서 공격하는 적병은 수가 적었다. 호위 병력은 무사히 포위망을 뚫고 시내를 질주했다.
“성문을 열어라! 대부인의 행차이시다!”
남문과 동문을 지키는 경비대는 항복하였지만 북문은 건재했다. 북쪽을 포위하였던 대공군은 병력을 남쪽과 동쪽으로 돌려 성내로 진입 중이었다.
안전한 북문을 돌파하여 아이든 백작령으로 향하면 마리안의 안전은 보장된다. 그것이 파이렐의 계획이었다.
만약 파이렐이 조금만 더 침착했다면 북문 근처에 이상하게 사람이 적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성문을 열라고 외쳤으나 성벽 위는 잠잠했다. 파이렐은 초조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다시 한 번 더 외쳤다.
“들리지 않는가!”
그 외침에 호응하기라도 하듯이 성벽 위로 수십 명의 병사들이 불쑥 몸을 일으켰다. 일행을 확인하고 성문을 열기 위한 병력이라고 보기에는 수가 너무 많다.
의심이 생겼다. 파이렐은 마리안을 보호하며 서둘러 호위 병력을 후퇴시키려 했지만 늦었다. 머리 위에서 화살이 쏟아졌다. 이어 양옆의 골목에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나타났다.
“대부인을 생포해라!”
“반역자는 모두 죽여!!”
고요하였던 주변은 삽시간에 병사들의 함성으로 꽉 찼다. 파이렐도 방패를 올려 마리안의 머리 위로 날아오는 화살을 막으며 외쳤다.
“침착해! 병력은 우리가 더 많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마리안의 인생은 남편으로 인해 큰 굴곡을 겪었으나 그녀는 태생이 귀족이다.
백작의 딸로 자라나 대공의 부인으로 살아온 귀족 여인이었다. 단 한 번도 전란이나 전쟁과 얼굴을 가까이 맞댄 적이 없었다.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그녀는 안전한 곳에서 명령만 했다.
그런 마리안에게 이 상황은 몹시 낯설었다.
익숙하지 않은 피비린내. 익숙하지 않은 비명과 함성. 익숙하지 않은 쇳소리. 익숙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살인. 그 모든 것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히이잉!”
날아오는 화살들에 목을 맞은 말이 길게 울부짖으며 앞다리를 들었다. 마리안은 고삐를 놓치고 비명을 지르며 낙마했다. 그녀는 전투를 알지도 못하고 몹시 혼란스러웠으나 이것 하나만은 알았다.
전투 중에 낙마하는 건 말이나 병사들에게 짓밟혀 죽을 가능성이 아주 커진다.
예상대로였다.
낙마한 충격으로 바닥에 나뒹구는 마리안의 앞에서 제어를 잃은 말이 날뛰었다. 곳곳에 상처를 입어 흥분할 대로 흥분한 말은 무작정 날뛰며 앞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대부인!!”
멀리에서 파이렐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두 명의 기사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이런 곳에서 죽는 건가? 고작해야 이렇게 죽기 위해서, 난!’
시야를 까맣게 채우는 말발굽을 보며 마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진 건 포악한 말발굽이 아니라 후끈거리는 김이 오를 정도로 뜨거운 피 분수였다.
“……?”
마리안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앞을 가로막고 선 한 명의 기사가 날뛰는 말의 목을 베어 그녀를 안전하게 지키고 있었다.
“고, 고맙…….”
간신히 고맙다는 치하의 말을 하려던 마리안의 입술이 아연히 벌어졌다. 그녀를 지킨 기사는, 짧은 머리칼의 장신의 여자 기사였다.
“……로젤린 메이어!”
신음 같은 이름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갔다. 로젤린이 검을 거두며 정중히 그녀의 앞에 허리를 숙였다.
“대부인을 강압적으로 대우할 생각은 없습니다. 순순히 체포에 응해 주시겠습니까.”
로젤린이 허리를 숙이는 것과 비슷한 타이밍에, 파이렐의 단말마가 들렸다. 끝났다. 그녀의 인생은 이 시점에서 철저히 파멸되었다. 마리안은 참담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대공군이 본격적으로 진화에 나서자 내성의 불길은 곧 진정되었다. 남쪽 성문을 통과하여 곧바로 발트란으로 진입한 프레데릭은 거멓게 탄 외벽을 보며 중얼거렸다.
“보수 공사를 할 때는 화재에 취약한 약점을 개선해야겠어.”
“또 불 지를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도대체가 자기 집 안방에 불을 지르겠다는 계획은 어떻게 내시는 겁니까? 큰 불은 아닐 거라고 호언장담하시더니 결국 민가까지 불이 났잖습니까.”
옆에서 라울이 투덜거렸다.
그의 투덜거림과는 다르게 큰 피해는 없었다. 사전에 잠입하였던 로젤린 일행이 내성 근처의 사람들을 은밀히 대피시켜 인명 피해는 나지 않았다. 돈으로 해결될 보상 문제만이 남았고, 그 보상 문제를 해결해야 할 라울은 골치가 아팠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문제는 돈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지. 파이팅!”
오른손 주먹을 불끈 쥐며 얄밉게 파이팅 포즈까지 취한 프레데릭은 라울이 화를 내기 전에 얼른 말을 몰았다.
예상은 했지만 곳곳이 불에 타고 허물어진 내성 안쪽에 시체까지 널려 있는 광경은 몹시 씁쓸했다. 시체를 수습하고 핏물을 지우고 새롭게 건물을 건축해도 이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을 것이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도록 하겠어. 나는 슈벤하임의 영주이고 발트란의 주인이다.’
프레데릭은 그 다짐을 새로이 마음에 새겼다.
내성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대공저는 불길도 전투의 흔적도 닿지 않았다. 언젠가 로젤린과 나란히 낮잠을 잤던 나무도 멀쩡했다. 무척 오랜만에 보는 듯한 대공저의 앞에서 프레데릭은 말에서 내렸다.
“오셨습니까.”
나이 지긋한 집사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프레데릭을 맞이했다. 이 노집사만은 전혀 변하지 않고 묵묵히 그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프레데릭은 가볍게 미소하며 집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했네.”
“별 말씀을.”
무뚝뚝한 대답이었으나 눈가에는 희미한 기쁨이 어려 있었다.
집사의 앞을 지나친 프레데릭은 항상 걸어가던 동편이 아닌, 서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공저의 동편은 프레데릭의 거처, 서편은 마리안 부인의 거처다.
마리안 부인의 방 앞에는 로젤린이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문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로젤린이 고개를 돌렸다.
“프레데릭, 전투는 끝났습니까?”
프레데릭은 대답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안았다. 전투 직후의 그녀에게서는 씻지 못한 피 냄새와 쇠 냄새가 난다. 익숙한 냄새다.
“다친 곳은 없나?”
기사로서의 그녀를 전투에 세울 때에는 거침없이 작전을 세우지만, 전투가 끝나면 항상 이렇게 가장 먼저 그녀를 염려한다. 그런 프레데릭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로젤린이 가늘게 웃었다.
“제 실력을 무시하십니까?”
“너라면 마수 떼의 한가운데에 떨어져도 다 죽여 버리고 날 만나러 와 줄 거라고 믿고 있지.”
상처 입은 곳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고 안심한 프레데릭도 우스갯소리를 하며 이마에 키스했다. 더 오래 그녀를 끌어안고 승전의 기쁨과 온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가 반드시 해야 하는, 더 이상은 피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긴장되는데.”
로젤린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은 프레데릭이 한숨을 쉬었다. 로젤린은 피식 웃고는 그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같이 들어가 드릴까요?”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나도 한 번쯤은 네게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군.”
이것은 그가 마무리 지어야 하는 일이다. 프레데릭은 로젤린의 이마에 한 번 더 키스하고 포옹을 풀었다.
로젤린이 걱정 말라는 듯이 미소하며 문을 열었다. 열린 문 안으로 프레데릭은 걸음을 옮겼다. 방 안에는 마리안 부인이 앉아 있었다.
등 뒤에서 조용히 문이 닫혔다. 프레데릭과 마리안 부인만이 남았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리안은 과거 프레데릭이 도피하였던 영주로서의 의무를 상징하는 존재다. 그가 도피하지 않고 성실하게 자신의 위치를 지켰다면 마리안 부인은 세력을 키우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의 결과도 없었을 것이다.
프레데릭은 심호흡을 한 차례 했다. 그리고 쓰라린 과거의 상처이자 후회로 남은 마리안을 바라보았다.
“대부인께서는 냉정하고 현명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발트란을 통째로 태우려고 했다니 제정신입니까?”
여전히 냉담한 표정이긴 했으나 마리안의 눈매에는 싸늘한 독기가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제정신이었으면 반란을 일으키지도 않았지요.”
“클레타트 후작과 결탁을 하셨더군요. 후작은 대부인과의 내통을 실토하지 않고 죽었으나 대부인과 교류한 증거들을 후작저에서 입수했습니다. 후작이 반란에 실패하고 죽어서 아주 큰 유감이었겠습니다.”
“…….”
마리안은 묵묵히 침묵했다.
조금 빈정거리던 프레데릭은 입을 다물었다. 이런 건 역시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 그는 다소 거칠게 앞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최초의 피해자는 당신입니다.”
아까와는 달라진 어조였다. 마리안이 어두컴컴한 시선을 움직여 프레데릭을 응시했다.
“당신을 먼저 배신한 건 아버지였고, 가해자는 제 친부모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밀통하지 않았다면, 절 낳지 않았다면, 절 후계자로 삼으려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테지요. 당신은 철저한 피해자였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요.”
“…….”
대답하지 않는 마리안 부인에게 프레데릭은 계속 말을 이었다.
“저는 당신에게 유감이 없습니다. 당신은 당연히 마음에 칼을 품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저를 증오할 자격이 있으니까요. 절 직접 죽이려 하였어도 전 모든 일을 묻어 두고 당신을 용서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습니다.”
“…….”
“당신은 제가 묻어 둘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을 저질렀습니다. 후작과 내통하여 발트란을 공격했습니다. 마수 떼도 동원하였고, 직접 반란군을 일으켜 점령했습니다. 미수에 그쳤다지만 발트란을 불태워 파괴하려 했고요. 게다가…….”
프레데릭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답지 않게 마리안은 내내 침묵하고 있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힘든 마리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프레데릭은 마지막 말을 했다.
“로젤린까지 위험에 빠트렸습니다. 그녀의 정보를 후작에게 넘겨준 최초의 사람이 당신이더군요. 저는 발트란의 통치자로서도, 한 명의 남자로서도 당신을 이제 용서할 수 없습니다.”
마리안이 그제야 무거운 입술을 움직였다. 아주 간단한 한마디였다.
“그래서요?”
품에 손을 넣은 프레데릭은 손가락 하나만 한 크기의 작은 약병 하나를 그녀 앞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고통이 한순간에 짧게 끝나는 극독입니다. 반란에 동조하고 저에게 칼을 겨눈 아이든 백작령은 철저히 토벌하고 아이든 백작가도 멸문시키겠지만 당신의 시체는 온전히 고향 땅에 묻어 주겠습니다.”
마리안은 용서할 수 없지만 그녀는 선대 대공의 부인이었으며 대공령의 안주인이었던 사람이다. 공개적인 처형을 하거나 시체를 훼손하는 모욕을 하지 않음으로서 프레데릭은 마지막 도리를 지켰다.
“할 말은 전부인가요?”
“네.”
“알겠어요.”
프레데릭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둔 마리안은 눈을 내리깔았다. 프레데릭은 그대로 방을 나오려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윌리엄의 처분은 묻지 않습니까?”
“영주님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프레데릭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마리안이 그를 영주라고 부른 건 처음이었다. 그녀의 고개는 여전히 아래로 떨구어져 있었다. 볼 수 있었던 건 숙인 이마뿐이었다. 프레데릭은 방을 나와 문을 닫았다.
탕.
문이 닫히는 소리에도 마리안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기이한 회한이 그녀의 가슴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녀를 온전히 이해한 사람은 몸을 섞으며 살았던 남편도 아니었고, 그녀가 배를 찢고 낳은 아들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증오하고 죽이려 하였던 프레데릭이었다.
그녀가 파멸시키려 하였고, 그녀를 파멸시킨 프레데릭만이 그녀를 이해했다.
“하하하…….”
이 지독한 아이러니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깨를 떨며 힘없이 웃음을 흘리던 마리안은 불현듯 약병의 뚜껑을 열고 한입에 마셨다.
프레데릭의 말처럼 고통은 아주 짧았다.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 쿵, 하고 묵직한 무엇이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짧은 목례로 조의를 끝낸 프레데릭은 집사에게 방을 치우라고 말했다. 대강의 일을 짐작하고 있는 집사는 별다른 반문 없이 마리안 부인의 시체를 수습할 사용인들을 불렀다.
프레데릭은 저택 밖으로 나왔다. 쌀쌀한 겨울바람을 맞으며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이윽고 걸음을 옮겼다. 언젠가, 그때의 나무 밑에 로젤린이 서 있었다.
한 번 떨어질 뻔하기도 하였던 나무를 올려다보며 로젤린이 나뭇결을 쓰다듬었다.
“무척 오래전의 일인 것 같습니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프레데릭은 미소하며 자신도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난 방금 전의 일처럼 느껴지는데?”
“잠자고 있던 절 아주 가까운 곳에서 훔쳐보셨던 일이요?”
“……그렇게 들으니까 무척 파렴치하게 느껴지잖아.”
“잠자는 사람을 훔쳐보는 건 파렴치한 일이 맞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녀를 남자로 오해하고 있던 시절이 나오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대번에 얌전해지자 로젤린이 빙그레 미소했다.
“여기까지 다시 돌아오는데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린 느낌입니다. 신년 제례를 위해 레젠으로 떠날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건 몰랐거든요. 많은 것이 변하리란 예상도 못했고요.”
“변하지 않은 건 우리의 사랑뿐이군.”
왠지 얼굴이 간질간질해진 프레데릭이 실없는 소리를 했다. 분명히 로젤린에게 타박을 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빤히 올려다보기만 했다.
“웬일로 맞는 말을 하시네요.”
“……지, 진짜?”
맞는 말을 했다고 칭찬을 들으니 왠지 기분이 더 묘해진다. 괜히 민망해진 프레데릭은 붉어진 뺨을 긁적였다. 여기에서는 멋진 대사를 해야 한다는 그런 본능적인 확신이 섰다.
“많은 일들이 끝났으니 이제 우리의 운명도, 사랑도 새롭게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닐까. 바로 이 나무 밑에서 시작된다면 좋은 의미가 되겠어.”
말을 하면서도 프레데릭은 자신이 좀 한심했다. 멋진 대사가 아니라 의미를 알 수 없는 횡설수설한 대사다.
“새로운 시작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를 올려다보는 로젤린의 눈매에 장난기가 어렸다. 자기 자신이 몹시 부끄럽게 느껴지고 있는 프레데릭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한심함을 지우기 위해 애썼다.
“이번에야말로 편하게 이름을 부른다든가?”
“프레데릭.”
“애칭도 좋고.”
“나의 프레데릭.”
“……고백은 어때?”
“당신을 사랑합니다.”
“…….”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프레데릭은 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심장이 멎어서 꿈이나 환각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몰라.
“네가 모든 걸 다 해 주는데, 난 너에게 뭘 해 줘야 하지?”
“쉽잖아요.”
로젤린이 빙긋 웃었다.
“당신을 저에게 주세요.”
젠장. 프레데릭은 무심코 욕설을 삼켰다. 꿈일 리가 없다. 미소 짓는 로젤린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꿈일 리는 절대 없었다.
“평생 너의 노예로 살겠어.”
진심을 담은 절실한 소원을 빌었는데, 로젤린의 반응이 어딘가 이상했다. 그녀는 미소마저 거두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노예는 부담스러우니 됐습니다. 필요도 없어요.”
“그럼 뭐? 뭐가 필요하지?”
다급히 물었지만 로젤린은 고개만 내저을 뿐이었다.
“스스로 생각해 주세요.”
“모르겠어!”
“전 단장님도 만나야 하니까 이만 가보겠습니다. 당신도 씻고 일이나 하러 가세요. 바쁘잖습니까.”
“잠깐만! 힌트라도!”
간절히 외쳤지만 로젤린은 이미 봉피를 세워둔 곳으로 가고 있었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만 흔들었다.
“힌트 없습니다.”
“로젤리이이인!”
애절한 외침만이 뒤에 남았다. 그는 앞으로도 로젤린이 봉피를 몰며 ‘하여튼 눈치가 없어…….’라고 속으로 중얼거린 건 절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피비린내와 매캐한 탄내와 꿉꿉한 열기가 섞인 전장의 공기가 허공에 남았다. 그리고 전장의 잔해를 씻어 내듯이 상쾌한 시작의 바람이 불었다.
‘그래도 귀엽긴 하지.’
무심코 픽 웃어 버린 달콤한 미소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