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기사의 찬가 (10/16)

4. 기사의 찬가

남쪽에서 매가 날아왔다.

발트란의 상공을 몇 차례 선회하던 매는 훈련받은 목표물로 하강했다. 발목에 단단히 매단 원통은 매의 발목과 흡사한 색이다. 낯선 매의 활강을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더라도 쉽게 눈치채지는 못할 것이다.

30분 후, 마리안 부인은 예의 비밀통로를 통해 대공저로 잠입한 심복 파이렐 경으로부터 쪽지를 받았다.

암호문으로 작성된 쪽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준비 완료. 양측 제거.

마리안 부인은 쪽지를 잘게 잘라 벽난로에 넣었다. 쪽지는 금세 새까만 재가 되어 불꽃에 먹혔다.

빨갛게 불타오르는 벽난로의 불꽃을 응시하며 그녀는 입술을 움직였다. 뒤에서는 파이렐이 조용히 경청하고 있었다.

“우리도 준비를 시작하게. 곧 두 번째 길보가 도착하겠지.”

* * *

“대장.”

모처럼 추위가 풀린 날이었다.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사무엘이 로젤린의 부름에 시선을 내렸다.

뭘 그렇게 유심히 보고 있었나 궁금하여 로젤린도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솜을 찢어서 뭉친 것 같은 하얀 구름과 몇 마리의 새가 한가롭게 활공 중인 평범한 겨울하늘이었다.

“보좌관님이 전하라고 부탁한 서류입니다.”

유일한 정기사이자 제1기사대의 대장인 사무엘은 현재 대공저의 경비의 총책임을 맡고 있었다. 라울이 로젤린에게 부탁한 서류도 경비 관련 서류였다.

“자네가 어쩌다 심부름을 맡게 되었나?”

로젤린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녀와 사무엘이 있는 곳은 대공저를 경비하는 경비대의 건물 옆이다. 근처에 인기척은 없었지만 혹시 몰라 목소리를 낮추었다.

“대공저의 사용인들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하셔서요. 식당에서 부탁받았습니다. 저도 전하의 집무실로 돌아가려면 처소 근처를 지나가야 하니까요.”

레젠 대공저의 사용인들은 저택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하면 프레데릭이 상경할 때만 임시로 채용한다. 꼼꼼히 신상을 파악하기는 하지만 외부의 첩자가 들어올 확률을 무시할 수는 없다.

“알겠다. 수고했네.”

“아닙니다.”

로젤린은 사무엘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물러나왔다. 사무엘이 서류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돌아서기 직전에 보였다.

신년 축일의 대연회까지 무사히 끝났다. 이틀 전에는 황태자의 생일 축하연회도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때에는 호위기사로서 입궁하여 대기소에서 다른 호위기사들과 시간을 보냈다. 처음 대기소에 머물렀을 때와는 달리 인사도 나누고, 대화도 했다.

전부의 얼굴과 이름을 외우지는 못했지만 주요 인물은 머릿속에 잘 기억했다. 그녀와의 결투에서 월등한 실력차로 패하였던 포이터 경은 병을 핑계로 공적인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아멘텐 백작의 임시 호위기사장은 로젤린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포이터 경의 문제는 둘째쳐도, 로젤린 자신도 호위기사로서 자리를 굳혀가고 있는 것 같아서 기뻤다.

공식적인 입궁 외에도 프레데릭은 간간이 카를을 비롯한 몇몇 중신과 밀담을 나누었다. 참석하는 중신들이 모두 호위기사를 대동하지 않았으므로 로젤린도 밖에서 경비를 섰다.

대신 프레데릭은 회의가 끝나면 주요 안건을 로젤린에게 알려 주었다. 특히, 클레타트 후작 개인에 관한 사항이라면 매우 자세히 설명했다.

덕분에 로젤린은 경비대가 후작과 결탁한 것으로 의심되는 마법사 한 명을 체포했지만 취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과, 후작이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는 소식을 상세히 알 수 있었다.

‘후작님에게 제의를 받았다고 말씀을 드려야 할까.’

대연회 날에는 이상하게 술에 취하여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하느라 미처 프레데릭에게 말을 하지 못했다. 프레데릭도 후작과 무슨 대화를 하였는지 묻지 않았다.

한 번 타이밍을 놓치니 다시 화제를 끌어올리기가 애매해졌다.

게다가 로젤린은 후작의 제안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후작과 얘기하거나 과거를 떠올리면 어느 정도 감상이 들었지만, 그 정도였다. 감상은 감상일 뿐이다. 과거 후작과 그녀 가문의 악연은 그녀의 현재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지나가는 투로 말하는 게 낫겠다.’

굳이 비밀로 숨길 화제도 아니고, 굳이 일부러 꺼낼 화제도 아니다. 가볍게 결론을 내린 로젤린은 프레데릭의 집무실로 향했다. 큼직한 두 행사가 연달아 치러지고 끝나서 그런지, 왠지 한적하고 여유로운 느낌이 든다.

자신으로 인해 라울의 일거리가 쌓여 가고 있다는 건 몰랐다.

라울은 오늘도 쌓여 가는 초대장으로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로젤린의 후원자와 팬으로 짐작되는 귀부인 - 그리고 소수의 남자 - 로부터 하루에 열 통 이상 초대장이 도착했다.

프레데릭이 간다면 유일한 호위기사인 로젤린이 호위하기 위해 따라가는 건 당연하다. 진짜 노리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그나마도 차마 대공가에 초대장을 쉽게 보낼 수 없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제외된 게 이 분량이었다.

“오늘도 또 왔군…….”

라울은 초대장을 분류했다.

발트란에서도 사교 활동을 안 하는 프레데릭이 레젠에 머문다고 할 리가 없다. 공식적인 연회가 아니면 반드시 참석해야만 하는 가문의 초대에만 드물게 응할 뿐이었다.

그의 성향을 뻔히 알고 있어 형식상으로 초대장을 보내던 가문들이 갑자기 열을 올렸다. 프레데릭은 그 여느 때보다 많은 초대장을 받고 있었다.

일을 늘리고 있는 주범이 원망스러울 법도 하지만 라울은 인내했다. 로젤린이 받은 선물 덕에 그도 스토아 산 와인 한 병을 챙길 수 있었다. 그의 월급으로는 엄두도 못 낼 고급 와인이다.

잘 보관하여 발트란까지 가져가서 이사벨과 같이 마실 생각을 하니 벌써 흐뭇했다.

“스토아 와인 한 병 값에 비하면 추가 근무는 아주 싸지.”

초대장을 분류한다고 해 봤자 프레데릭은 어차피 대부분 참석하지 않는다. 정중한 거절의 편지는 라울이 썼다. 한꺼번에 가지고 가서 프레데릭이 서명하고 인장을 찍는 게 새로 생긴 하루의 일과 중 하나였다.

다섯 통째의 거절 편지를 쓰기 위해 인장을 뜯은 라울은 멈칫했다.

레젠에 도착하고 며칠 내내 쌓이기만 하던 흔한 초대장이 아니었다.

혼서였다.

프레데릭에게 혼서를 보낸 가문은 베스메틱 백작가였다. 베스메틱 백작령은 슈벤하임 대공령과 인접하여 제이드왈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영지가 밀접해 있으나 가문의 격차가 큰 탓에 과거부터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백작가였다.

프레데릭의 지지자들이 그의 결혼상대로 추천했던 가문이기도 했다.

“결혼하셔도 좋을 것 같은데요.”

심드렁하게 혼서를 읽고 있던 프레데릭이 책상 앞에 선 라울을 올려다보았다.

“진심이냐?”

“뭐, 조건만 따진다면요. 메이어 경은 별 가망성이 없어 보이시고.”

“아니거든.”

라울을 한 번 노려본 그는 혼서를 도로 접어 책상에 내려놓았다. 베스메틱 백작이 보낸 건 혼서만이 아니었다. 바로 답신을 주기보다는 누이를 한 번 만나 봐 달라는 정중한 초대장도 있었다.

“베스메틱 백작은 아들이 한 명뿐인데 많이 병약하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프레데릭 님이 백작의 누이와 결혼하시고 백작의 아들까지 요절한다면 백작령의 계승권까지 갖게 되시니 일석이조라고 보는데요.”

“대공가의 세력이 커지면 다른 대영주들이 경계할 거란 생각은 안 들고?”

“그럴 때는 프레데릭 님이 자주 하시는 말이 있잖습니까.”

“뭔데?”

“그때 가서 생각해 보지.”

자신의 목소리와 말투를 흉내 내는 라울을 프레데릭은 한 번 더 노려보았다. 그는 초대장의 모서리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베스메틱 백작의 누이와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으나 혼서까지 동봉한 정중한 초대를 거절하는 건 어렵다.

백작이 초대한 장소는 제도 레젠 내가 아니라 좀 떨어진 야산의 별장이었다. 별장까지 찾아갔다가 얼굴만 보고 돌아오지는 못할 테니 적어도 2, 3일은 레젠을 비워야 한다.

“다녀 와. 네가 이틀 정도 레젠을 비운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뭐가 있다고. 급한 연락은 파발마를 보내지.”

그에 대한 고민은 카를이 해결해 주었다.

“오히려 네게도 좋은 기회가 아닌가?”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메이어 경의 관심을 끌어올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데. 막상 눈앞에 혼담이 오가는 여자가 있으면 네가 신경 쓰이지 않을까?”

프레데릭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백작의 누이까지 이용하게 되는 거잖아.”

카를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까다롭게 굴지 말고. 말이 그렇다는 거니까. 너도 레젠에 오고 거의 쉬지를 못했으니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2, 3일 쉬다가 와. 베스메틱 백작의 별장이 있는 야산의 밤하늘이 유명한데 짬을 내어 메이어 경과 데이트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글쎄…… 지금은 상황이 곤란해.”

“아무튼 쉬고 와라. 황명이다.”

썩 내키는 건 아니었으나 그리하여 프레데릭의 별장행은 결정되었다.

베스메틱 백작과 서신을 주고받아 날짜를 정했다. 프레데릭 일행은 5일 후 레젠을 출발했다. 일행은 단출했다. 사이가 불편한 것도 아닌 귀족의 초대를 받아가며 과한 무장을 갖추면 오해를 살 수도 있다.

총책임을 맡은 사무엘은 기본적인 호위 병력 외에 로젤린을 비롯하여 아이기스 나이트에서 5명을 차출했다. 먼 길도 아닌 데다 레젠 인근이라 치안도 좋다. 짧은 여행길에 산적이나 노상강도를 마주칠 위험도 없으니 충분한 호위였다.

베스메틱 백작의 별장은 레젠에서 한나절 거리에 있는 야산의 중턱에 위치해 있었다. 레젠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으나 황제의 직할령은 아니다.

5대 전의 황제가 별장을 지은 후 정부에게 하사하여 황후 몰래 밀회를 즐기던 곳이었다. 정부가 사망한 후 귀족들에게 팔리다 현재는 베스메틱 백작가가 소유하게 되었다.

“어이, 로젤린.”

아벨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앞서 말을 타고 가는 프레데릭의 등을 멍하니 보고 있던 로젤린은 화들짝 놀랐다.

“왜?”

그녀에게 아벨이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아벨은 그녀의 옆에서 말을 타고 있었다.

“컨디션이 안 좋나? 안색이 나쁘다.”

무뚝뚝한 아벨의 걱정은 로젤린의 정곡을 찔렀다.

컨디션이 안 좋긴 하다. 정확히는 마음이 심란했다.

‘혼담이 있는 여성이라…….’

그에 대한 마음을 자각한 후에도 각오는 했다. 로젤린은 기사로서 의무를 다 하기 위해 프레데릭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아니, 받아들이지 못한다.

작위가 있는 프레데릭이 언제까지 미혼을 고집할 수는 없을 테니 언젠가 결혼은 하게 될 것이다.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이 옳고, 또한 정당한 길이다.

로젤린도 상상은 했다. 그가 우아하고 기품 있는 어느 여성과 결혼식을 하는 모습을.

각오는 하였으나 막상 혼담이 있는 여성을 만나기 위해 찾아가는 상황은 커다란 돌처럼 마음을 누른다.

- 전하는 이 혼담을 받지 않으실 겁니다. 혼서까지 보낸 초대장이니 거절할 수가 없어서 잠깐 다녀오시기만 하는 거예요.

라울이 그녀에게 말해 주었지만 무거운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로젤린은 라울의 설명을 듣고 순간 안도했다. 그 안도감에 가장 놀란 건 그녀 본인이었다. 주군이 좋은 소식을 거절할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안도하다니.

그녀가 완전히 버렸다고 여긴 가장 여리고 보드라운 부분은 여전히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에 남아 있다. 계기만 있으면 금세 수면으로 부상하여 그녀를 가득 채워 버릴 것처럼.

로젤린은 프레데릭의 등을 바라보고, 낮은 한숨을 삼켰다.

“걱정 끼쳐서 미안하다. 어젯밤에 잠을 설쳤더니 피곤해.”

“백작님의 별장에서 별일은 없을 테니 무리하지 말고.”

아벨이 조용히 격려했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 * *

황제가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대화실에는 오늘 한 명의 손님이 있었다.

“일은 잘 진행되고 있나?”

카를의 질문에 카트린은 먼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예정보다 일정이 빨라지게 된 탓에 초반에는 미숙한 점이 있겠지만 차차 나아지리라 판단합니다.”

그녀의 대답에 카를은 그럭저럭 만족한 표정이 되었다.

“프레데릭이 지금 자리를 비우다니 타이밍이 좋았어. 사전 작업은 끝났으니 이제 남은 건 자네와 자네가 지원하는 그들에게 달렸네.”

“심려치 마십시오. 반드시 폐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확신하는 어조로 대답한 그녀는 나지막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로젤린을 위한 일이기도 하니 소인도 금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참으로 인복이 많군.”

카를의 목소리에 희미한 웃음기가 어렸다. 카트린도 비로소 입가에 미소를 올렸다.

“이러한때 돈을 쓰지 않으면 소인이 무엇 때문에 돈을 벌었겠습니까? 로젤린을 위해서라면 천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 * *

오전에 출발한 일행은 해가 질 무렵에 베스메틱 백작의 별장에 도착했다. 별장의 집사가 야산 아래의 마을까지 마중을 나와 일행을 안내했다.

“먼 길에 쾌히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베스메틱 백작 또한 정문 밖에서 프레데릭을 맞았다. 시작부터 융숭한 대우다.

한때 황제의 정부가 사용하였던 별장이다. 정원이 넓은 것에 비하면 내부의 건물은 큰 규모가 아니었으나 섬세하고 화려했다.

“어서 오십시오.”

메인 홀에서 백작의 누이인 실비아가 프레데릭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로젤린은 무심코 주먹을 꾹 쥐었다.

삼십 대인 베스메틱과 나이 차가 많아 스무 살 남짓한 젊은 숙녀였다.

검은색 고수머리에 검은색 베일을 맵시 있게 늘어뜨린 실비아의 얼굴은 아주 희었다. 단순히 얼굴에 바른 백분 탓만이 아니었다. 분이 발리지 않은 목덜미와 손등도 핏줄이 비칠 만큼 희고 창백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긴장한 탓인지 입매가 굳어 있으나 그녀의 귀족적인 아름다움을 손상하지는 않았다.

‘……잘 어울리실 거야.’

주먹을 꾹꾹 쥐었다가 폈다. 앞에 서 있는 프레데릭의 표정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는 정중히 실비아의 손등에 키스했다.

“초행이라 약속 시각보다 늦었습니다.”

창백하였던 실비아의 뺨에 발그레한 열기가 돌았다.

“예까지 와 주신 것만으로도 소녀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누이가 오래전부터 전하를 흠모하여 왔답니다. 자, 안쪽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으니 우선 식사부터 하실까요? 부담 없이 편히 쉬시다 가십시오.”

웃으며 끼어든 베스메틱이 손수 프레데릭을 안내했다. 호위기사인 로젤린은 당연히 그의 뒤를 따라가다가 발을 멈췄다. 백작이 조금 곤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례지만, 전하. 이분은……?”

프레데릭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내 호위기사인 메이어 경이오.”

“신년 축일의 결투에서 훌륭한 승리를 거두셨다는 메이어 경입니까? 제가 레젠에 오는 것이 늦어 결투를 참관하지는 못하였으나 자자한 명성은 접하였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무척 젊군요.”

베스메틱이 로젤린을 칭찬했다. 로젤린은 까딱 고개를 숙였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전하를 호위하시는 분들을 위해 별채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별장의 경계는 여태 단 한 번도 돌파된 적이 없답니다.”

아무래도 누이를 소개하는 자리에 타인이 자리를 지키는 게 곤란한 눈치였다. 게다가 로젤린은 여자이기도 하니까.

잠시 생각하던 프레데릭도 베스메틱의 말에 동의했다.

“변변히 휴일도 주지 못했는데 오늘 밤이라도 쉬어라.”

“하지만…….”

대공저 밖에서 그를 호위하지 못하게 된다. 반사적으로 항의하려다 말을 삼켰다. 이것은 주군의 명령이기도 하다.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찾아뵙겠습니다.”

로젤린은 인사하고 물러났다.

“레젠에도 백작저가 있지만 굳이 별장으로 전하를 모신 건, 별장의 곳곳에 제법 오래된 명화와 조각상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별장의 주인이었던 황제 폐하께서 친히 수집하신…….”

별장을 설명하는 베스메틱의 목소리가 차츰 멀어졌다. 로젤린은 마지막으로 프레데릭의 모습을 한 번 돌아보고 사무엘을 비롯한 호위 일행의 곁으로 갔다.

레젠에서 가깝기도 하고 백작의 사병이 엄중히 경비하는 곳이다. 아벨이 말하였던 것처럼, 그리고 베스메틱이 말하였던 것처럼 큰일은 없으리라 믿었다.

마음이 못내 불안한 건, 단순히 실비아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기사 분들을 위해 준비된 만찬석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본채에서 멀지 않은 별채에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일행을 별장까지 안내하였던 집사가 사무엘에게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정원을 사이에 둔 본채와 별채는 집사의 설명과는 다르게 거리가 있었다. 그래도 창문으로 보면 바로 보이는 위치다. 가장 불이 밝게 켜진 곳이 프레데릭과 백작 남매가 만찬을 즐기는 장소일 것이다. 로젤린은 본능적으로 위치를 확인했다.

객관적으로 식사는 풍성하고 맛있었다. 하녀들이 쉼 없이 음식과 술을 날랐다. 대공저 밖이라 기사들은 술을 자제했지만 아예 안 마시는 건 아니었다. 반주로 적당히 마시는 건 괜찮다는 사무엘의 허락에 서로 잔을 부딪쳤다.

로젤린만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영 입맛이 없다. 와인을 부어 야채와 조린 닭고기를 두어 조각 씹고 양념이 잘 밴 감자를 한입 먹다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야, 식욕이 왜 이렇게 없냐? 생리 하냐?”

사무엘의 눈치를 살피며 술기운이 오른 기사 한 명이 히죽거리면서 묻다가, 다른 기사에게 뒤통수를 후려 맞았다.

“미친놈아, 너는 몽정했냐.”

“아니, 난. 그냥 기분이 안 좋은 것 갈길래…….”

“닥치고 술이나 깨.”

그는 후려 맞은 뒤통수를 문지르며 찬물을 마시기 위해 갔다. 로젤린은 무심코 피식거렸다.

“식욕이 없어도 식사는 해야 하지 않겠나. 체력과 건강을 유지하는 것도 전하를 호위하는 기사로서의 임무라네.”

어느새 로젤린의 옆자리에 앉은 사무엘이 넌지시 충고했다. 그의 말이 맞다. 로젤린은 억지로 감자를 썰어 기계적으로 씹었다. 고기를 먹었다가는 되레 소화불량이 될 것만 같다.

“긴장은 풀고.”

사무엘이 술을 권했다. 상사가 술을 권하는데 거절할 수가 없어 로젤린은 딱 한 잔만 마셨다. 그녀가 그럭저럭 감자 접시를 비우는 걸 확인한 사무엘은 어깨를 두드려 격려 해 주고는 자리를 비켰다.

똑같은 요리와 똑같은 조리법이라도 요리사에 따라 차이가 있다. 색다른 음식을 먹으면 색다른 맛이 있었다. 색다른 맛은 즐거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기사들은 레젠의 대공저에 있을 동료들을 가련히 여기며 오랜만의 만찬을 즐겼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본채의 불빛을 간간이 쳐다보며 로젤린도 식사를 마쳤다. 감자보다는 후식으로 들어온 꿀에 절인 말린 과일이 그나마 입에 맞았다.

그러다, 잠이 들었다.

만찬을 들던 모든 기사가.

끔찍한 적막이 식당을 점령했다.

머리가 무거웠다. 목구멍이 따가웠다. 피부가 화끈거렸다. 독한 냄새가 났다. 텁텁한 열기가 사방에서 조였다.

“으…….”

로젤린은 눈을 떴다. 언제 잠이 든 걸까. 술은 한 잔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그런 것치고는 머리가 몹시 아프다.

빡빡한 눈가를 문지르던 그녀는 곧 몸을 굳혔다. 등잔으로 사방을 환하게 밝히던 식당이 아니다. 컴컴한 식당을 밝히는 조명은 외부로부터 일렁거리는 불빛이었다.

로젤린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잠에서 깬 이유를 알았다. 기름 냄새다. 건물의 외벽부터 불이 났다.

“이게 무슨……!”

서둘러 밖으로 나가려던 로젤린의 발에 둔탁한 뭔가가 걸렸다. 바닥에 쓰러져 잠든 아벨이었다. 로젤린은 숨을 들이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황하여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였다.

식탁에 엎어지거나 바닥에 쓰러져서 잠든 사람들은 전부 기사였다.

“아벨! 일어나, 아벨!!”

“으음…….”

뺨을 몇 차례 후려갈기자 아벨이 신음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눈을 깜빡거리기는 했지만 쉽게 정신을 차리지는 못했다. 일단 하나씩 데리고 식당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아벨부터 둘러업고 밖으로 나가려던 로젤린은 본능적으로 허리를 굽혔다. 피부가 오싹오싹하고 소름이 확 돋았다. 그 이유는 즉시 알 수 있었다.

바로 열린 창문으로 날아든 살기와 불화살들로 인해.

창문 밖은 병사들로 포위되어 있었다.

“제기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함정이다. 로젤린은 순간 모든 걸 깨달았다. 프레데릭으로부터 호위 병력을 떨어트리고 술과 음식에는 수면제를 탔을 것이다.

절대 프레데릭의 곁에서 떨어져서는 안 되었다.

“일어나! 일어나라고!!”

바닥에 엎드린 로젤린은 무턱대고 아벨을 흔들었다. 한 차례 쏟아진 화살은 잠잠했다. 별채를 포위하고 있는 지휘관은 안쪽에서 탈출하려는 모습에 활을 쐈다. 안에서 타 죽거나, 밖에서 화살에 맞아 죽거나, 선택지는 두 개였다.

그나마 술을 적게 마셨던 아벨이 간신히 눈을 떴다. 그도 로젤린처럼 놀란 얼굴이었으나 곧 상황을 파악했다. 로젤린이 눈을 떴을 때보다 불길은 더 거세져 있었다.

“백작이 배신했다!”

로젤린의 으르렁거림에 아벨이 욕설을 씹었다.

두 사람은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동료들을 깨웠다. 그러나 로젤린과 아벨처럼 쉽게 깨어나는 사람이 없었다.

벽에 기대어 앉아 잠든 기사를 깨우던 로젤린은 백작의 사병이 별채로 진입하지 않는 이유를 하나 더 알았다.

구석에 쌓여 하나로 연결된 화약통의 심지에 불이 붙어 있었다.

“……!”

고민할 여유 따위는 없다. 로젤린은 반사적으로 심지의 불꽃을 손으로 꽉 쥐었다.

“크윽!”

손바닥에 뜨거운 고통을 남기며 심지가 꺼졌다. 아벨이 외쳤다.

“로젤린! 넌 본채로 가! 여긴 내가 맡겠다!”

“……알았어.”

로젤린은 상처의 아픔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외부의 병력을 뚫고 무사히 프레데릭을 찾아갈 자신은 없었다. 그렇지만 기사들이 깨어나지 못한다. 로젤린 혼자라도 프레데릭에게 가야 했다.

무기는 그들이 잠들었을 때 치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로젤린이 허리 뒤쪽에 고정해 두었던, 마수 청상아리의송곳니 뼈로 만든 단검은 무사했다.

우선 창에서 화살이 쏟아지는 궤적에 쓰러져 있는 동료들을 아벨과 합심하여 옆으로 옮겼다. 이 소란에 하나둘 깨어나는 사람이 있다는 게 한 줄기 위안이었다.

“무운을 비마.”

아벨과 주먹을 가볍게 맞부딪힌 로젤린은 화약통 몇 개를 챙기고 벌떡 일어났다. 불이 옮겨 붙을 가능성이 있는 망토는 벗어던졌다. 병사들의 주의가 그녀에게 쏠렸다.

“쏴라!”

지휘관의 외침이 이젠 또렷하게 들린다. 한달음에 달려간 로젤린은 식당의 문을 발로 쾅 밀어젖혔다.

복도 또한 식당처럼 불빛이 넘실거렸다. 내부까지 불길이 번지고 있었다. 기름까지 뿌려진 건물이다. 화마에 점령되는 건 한순간일 것이다. 그전에 무사히 별채를 탈출하여 프레데릭에게 가야 했다.

하녀들이 어느 방향에서 식당으로 들어왔는지 어렴풋한 기억이 있었다. 로젤린은 허리를 낮추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지나치는 창문마다 병사들의 포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목이 따끔거렸다. 매캐한 연기는 수면제로 인한 통증을 호소하는 머리를 더욱 욱신거리게 했다. 단검을 쥐고 있는 손바닥은 화상을 입었다. 그렇지만 로젤린은 발을 멈추지 않았다.

“헉, 헉……!”

다행히 사용인들이 머무르는 별채의 구조는 복잡하지 않았다. 로젤린은 가쁜 숨을 골랐다. 호흡이 어려운 탓에 쉽게 지친다. 벽에 기대어 몸을 숨긴 그녀는 창밖을 관찰했다. 역시 백작의 사병이 깔려 있다.

로젤린은 가지고 온 다섯 개의 화약통들을 내려다보았다. 일단 가지고 오긴 했지만 잘 모르는 그녀가 봐도 큰 위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통도 작고 안에 있는 화약의 양도 적다. 화약은 군대에서 관리하니 백작이 다량으로 밀반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폭발의 위력이 큰 화약통이었다면 백작이 무방비하게 식당에 놔두었을 리는 없다. 기사들이 반격할 수도 있으니까.

터지면 좋지만 불발해도 상관없을 화약통일 게 분명했다. 게다가 사병들이 쏘는 건 불화살이다. 최초는 불발한다고 해도 불화살이 화약통에 맞으면 반드시 터질 것이다. 약기운으로 몸을 가누기 어려운 기사들에게는 위협이 된다.

그런 점을 노린 화약통이었다.

‘다섯 개를 묶어서 한꺼번에 던지면 나을까.’

초조하게 생각을 곱씹었다. 화력은 충분하지 않겠지만 이 외의 방법이 없다. 무턱대고 맨몸으로 돌파하다가 큰 부상을 입어 프레데릭의 곁으로 가기도 전에 죽을 수는 없었다.

심지에 불을 붙이기 직전,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로젤린은 허겁지겁 허리를 뒤졌다. 있다. 그녀는 허리에 매단 주머니 하나를 풀었다. 거기엔 프레데릭이 그녀에게 선물하였던 마수의 이빨들을 엮어 만든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 아니면 지뢰도 나쁘지 않겠군.

- 화약을 넣어 쓴다는 그 지뢰요?

- 지뢰 안에 쇳조각 대신 이 이빨들을 넣어도 살상력이 훌륭하지 않을까 싶다. 화약만이 아니라 마수의 이빨까지 무기로 쓴다면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나가서 오히려 손해겠지만.

이것은 무기로 활용할 수 있다. 프레데릭은 정말 최적의 선물을 주었다.

서둘러 목걸이의 끈을 끊고 마수의 이빨들을 화약 사이에 꾹꾹 채워 넣었다. 다소 낙낙하게 들어 있던 화약통에 무게감이 생겼다.

심지에 붙일 불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어깨로 문을 밀어젖혔다. 병사들이 미처 활을 쏘기도 전에 화약통을 던지고는 도로 문을 닫았다.

쾅.

폭발음은 작았다.

“끄아아아악!!”

그러나 병사들의 비명 소리는 처참했다. 문 옆의 창으로 박살이 난 마수의 이빨의 잔해와 살점이 튀었다. 로젤린은 단검을 굳게 쥐고 다시 문을 열었다.

그녀는 반드시 프레데릭에게 가야 했다.

그곳이 그녀가 죽을 자리였다.

“……전하, 전하.”

나직하지만 다급한 부름이 프레데릭을 깨웠다.

“음…….”

깨어나야 한다는 건 인식하고 있었지만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몸이 무겁다. 그전에 자신은 어디에서 잠을 자고 있는 걸까.

몇 차례 부르던 목소리가 멀어졌다. 방해하는 음성이 사라지자 프레데릭의 의식은 차츰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갑자기 얼굴로 차가운 물이 뿌려졌다. 프레데릭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시야가 어둡고 흐렸다. 눈을 문지르려 했으나 팔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여기 남은 해독제가 있으니 드십시오.”

그를 깨운 목소리의 주인이 어깨 밑에 팔을 둘러 부축했다. 기대어 앉자 입술로 미지근한 물이 담긴 잔이 닿았다. 프레데릭은 물을 마셨다. 가루를 탄 듯 씁쓸한 입맛이 뒤에 남았다.

약을 먹인 여자가 팔다리를 주물렀다. 한참이 지나서야 사지에 감각이 돌아오고 무감각하였던 오감이 풀렸다. 제일 먼저 감지할 수 있었던 건 기름 냄새였다.

서둘러 일어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감각은 돌아왔으나 육신은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구할 수 있었던 해독제의 양이 적어 전하를 해독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실비아가 송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프레데릭의 마지막 기억은 식당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침실이다. 커튼을 단단히 쳐서 어둑함이 드리운 침실에 있는 건 프레데릭과 실비아, 단 두 사람뿐이었다. 하고 싶은 질문이 많았지만 굳은 혀가 덜 풀렸다.

그의 의문을 알고 있는 것처럼 실비아가 빠르게 말했다.

“등잔을 켤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십시오. 안의 기척이 밖으로 드러나게 되면 곤란하여 일부러 가렸습니다. ……현재 본채의 밖은 병사들로 포위되어 있습니다.”

프레데릭은 그 이상의 설명이 없어도 즉시 상황을 파악했다. 과도한 기름 냄새, 마비된 육신, 별장이 포위되었음에도 지나치게 침착한 실비아. 해답은 간단했다.

베스메틱 백작의 배신.

“오라버니가 전하의 술에 마비산과 수면제를 섞었습니다.”

마비산은 마수의 독을 정제한 마비약이다. 희귀한 만큼 가격도 비싸지만 그 효과는 아주 탁월하다. 현재의 프레데릭이 거의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조금이라도 마비가 빨리 풀리도록 실비아는 아예 침대 옆의 바닥에 앉아 프레데릭의 다리를 주물렀다.

“전하께서 저를 욕 보이셔서 분노와 모욕을 참지 못한 오라버니가 전하를 습격했다는 게 오라버니의 계획입니다. 전투 도중에 불이 나서 전하께서 돌아가시게 된다는 것까지요. 전하를 호위하는 기사들의 술에도 수면제를 탔습니다. 본채와 별채, 두 군데 모두 저희 가문의 사병들이 포위했고요. 전하의 검까지 몰래 챙기지는 못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제 곧 불을 지를 겁니다. 저로서는 전하께서 쓰러지신 곳에 숨어들어 해독제를 드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실비아는 거듭 사죄했다.

해독제의 약효가 서서히 돌고 그녀가 땀을 흘리며 마사지를 한 덕분에 어느 정도 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프레데릭이 벽을 짚으며 몇 걸음 옮기자마자 뜨거운 열기가 확 치밀었다. 커튼의 틈으로 일렁거리는 불길이 보였다. 실비아가 다급히 외쳤다.

“전하, 얼른 피하십시오!”

프레데릭은 굳은 혀를 겨우 움직였다.

“실비아 양은……?”

틈 사이로 들어온 불길이 비장한 표정을 굳힌 실비아의 얼굴을 쓸었다.

“오라버니는 이미 제 배신을 눈치챘을 겁니다.”

실비아가 나이프를 손에 쥐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프레데릭이 막을 수 없는 결의가 있었다.

“조카를 위해서라지만 오라버니는 무모한 선택을 했습니다. 저희 가문이 대공가와 전쟁하여 승리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제가 오라버니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갈 테니 훗날에 가문의 명맥과 한 움큼의 영지만은 부디 보존해 주시기를, 감히 청합니다.”

그러고는 프레데릭이 만류할 틈도 없이 양손으로 쥔 나이프를 턱 밑에 찔러 넣었다. 고깃덩어리가 꿰뚫리는 둔탁한 소리와 짤막한 비명, 붉게 흐르는 핏줄기. 그게 끝이었다. 실비아의 육신은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힘없이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젠장.”

프레데릭이 할 수 있는 건 채 눈을 감지도 못한 그녀의 눈을 감겨 주는 것 정도였다.

대강의 사정은 알았으나 의문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니었다.

베스메틱 백작이 자신을 배신한 이유가 무엇인지, 언제부터 계획한 건지, 배후에 누가 있는지, 어째서 베스메틱이 이런 무리한 수를 감행하였는지.

의문은 많았지만 지금은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불길이 거세지고 있다. 프레데릭은 뻣뻣한 다리를 움직여 침실을 벗어났다.

문턱을 넘으며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시야는 아직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사물의 윤곽이 희끄무레하게 뭉개지고 있었다.

“앗.”

비틀거리던 다리가 기어이 꼬였다. 프레데릭은 몸을 제대로 가눌 틈도 없이 바닥으로 넘어졌다. 한숨을 쉬며 벽에 등을 기대었다. 벽도 후끈후끈 뜨거워지고 있었으나 둔해진 감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탓인지 견딜 만했다.

불이 외벽으로부터 차츰 옮겨 붙고 있었다. 목조 건물만큼 빠르게 전소하지는 않겠으나 틀림없이 프레데릭이 있는 건물 안쪽까지 화마에 집어삼켜질 것이다.

불보다 빠르게 달려 들어온 연기가 목구멍을 아리고 눈가를 따끔하게 쑤셨다. 자꾸만 기침이 콜록콜록 나오고 눈물이 맺혔다.

“한심한데…….”

낮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떨구었다. 안쪽 복도에는 건물 밖으로 난 창이 없었다. 하지만 실비아의 설명으로 대강 짐작이 갔다. 건물에 불을 질렀으니 밖에서는 활과 쇠뇌를 들고 포위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나가지 않으면 타 죽고 나가면 화살비를 맞는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기억으로 복도마다 띄엄띄엄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지금 눈에 보이는 벽은 썰렁했다. 회복되지 않은 시야로도 벽에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림의 손상을 아까워하여 거둔 건 아닐 것이다. 만에 하나 프레데릭이 벽에 걸렸던 액자를 엄폐물이나 방패처럼 사용하여 저택을 탈출하는 걸 방지하려는 목적일 확률이 높았다.

그 외는 없다. 무거운 원목으로 된 테이블을 방패로 사용하는 건 무리다. 그가 눈을 떴던 침실에 테이블은 있었지만 의자는 없었다.

굳이 식당까지 가서 헤맬 필요 없이, 식당에도 의자가 없으리란 걸 프레데릭은 확신할 수 있었다. 베스메틱 백작이 그나마 테이블보다는 방패로 활용하기에 용이한 의자까지 모두 치우는 모습이 보였다.

프레데릭은 팔을 주물렀다. 손가락에는 아직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몸 상태라도 이상이 없었다면 도박을 걸어 볼 만도 했다. 하나 무기도 없고, 마비된 몸이 풀리지도 않은 현재는 무리였다.

결론은 간단했다.

“죽겠군.”

결론을 내리니 오히려 머리가 가벼워진다.

죽음을 쉽게 여긴 적은 없었으나 죽음 앞에 서게 되니 이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레데릭 체 슈벤하임이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는 간단하다. 프레데릭. 과거에 기사였던 자. 현재의 슈벤하임 대공.

슈벤하임 대공. 프레데릭은 자신을 정의하는 하나의 단어를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이게 올바른 길일지도 모른다. 본래 그의 것이 아니었던 자리다. 슈벤하임 대공은 사생아인 그가 아니라 적장자인 윌리엄의 것이어야 할 자리였다.

그가 죽고 윌리엄이 올바르게 작위를 계승하게 된다면 모든 게 해결된다. 두 이복형제간의 대립으로 혼란한 대공령의 정국도 완만히 해결되고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윌리엄은 무장으로서의 재능은 없으나 아둔하거나 흉포한 성정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것 이상으로 원만한 통치를 펼칠 것이다. 프레데릭은 아우를 믿었다.

“……뭐, 마리안 부인이 대공령을 말아먹게 놔두지도 않겠지만.”

자신이 말을 하고 자신이 우스워 실소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적인 마리안 부인이 훨씬 믿음직하다. 적어도 그녀는 십수 년을 대립하여 쟁취한 승리의 과실을 엉망으로 썩게 만들 사람이 아니니까.

“누가 됐든 나보다는 낫겠지.”

프레데릭은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원래 욕심도 의지도 의욕도 없던 대공의 자리이다.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 많은 사람을 상처 입히도록 이용당하였던 삶에 의미도 없었다.

이렇게 순리대로 이행되도록, 윌리엄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도록 놔두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게 여기니 죽음도 아쉽지 않았다.

언제나 텅 비어 있던 무기력한 공허가 비로소 그를 완전히 씹어 삼켰다.

다만 최후의 욕심이 있다면, 불에 타 죽는 것보다 덜 고통스러운 죽음이었으면 하는 진담 반, 농담 반의 바람과.

그리고 또 하나.

“……성추행을 한 번 더 당해 보고 싶다.”

우습기까지한 한마디가 멍하니 입속을 맴돈다. 마지막으로 남은 기억이, 호위하려 하는 그녀를 억지로 떨어트린 모습이라는 게 아쉽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좋은 말로 다독거려 줄 수 있었을 텐데. 결혼할 예정은 아니어도 다른 여자와 대화하는 모습을 네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고.

그러면 ‘예에. 근데 저는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할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프레데릭은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기왕 멋대로 상상하고 있으니 질투해 준다면 좋으련만.

로젤린과 기사들은 무사히 탈출할 것이다. 프레데릭은 그렇게 믿었다.

사무엘은 결코 호락호락한 사내가 아니었다. 부하들에게는 한두 잔의 반주를 허락해도 자신은 외부에서 술을 단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을 지휘관이다. 사무엘을 기사대장으로 발탁한 건 과거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그의 경험과 인품까지 충분히 고려한 인선이었다.

로젤린이 탈출할 수 있다면 되었다. 이제 미련은 없었다.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본채 내부까지 집어삼켜지는 건 시간문제다. 프레데릭은 불길 속에서 질식사하기 전에 자살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고민을 하며 눈을 감았다.

“……하! 전하!! 어디에 계십니까!!”

들릴 리 없는, 들려서는 안 되는 소리가 불길을 뚫고 울린다.

프레데릭은 눈을 부릅떴다. 말도 안 돼. 어째서.

“……로젤린, 로젤린!”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는 어떤 계산도 의식도 없었다. 단지 불렀을 뿐이다, 그녀를.

내뱉자마자 후회했다. 아니, 로젤린을 여기까지 끌어들여서는 안 되는데. 프레데릭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외쳤다.

“오지 마라! 위험해!! 당장 밖으로 나가!”

이성적인 판단이라면 당연히 더 늦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 프레데릭과 조우한다고 하여도 이 불길 속을 무사히 뚫고 나가리란 확신은 없다. 뿐만 아니라 백작의 사병까지 상대해야 한다. 내부에서 어떤 부상을 입었는지도 모르는 프레데릭을 구해서 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전하!”

그의 기사는 주저 없이 한달음에 달려와 그의 앞에 섰다.

눈앞까지 달려들었던 그의 죽음을 베어 버리며.

‘빌어먹을.’

프레데릭은 이를 악물었다. 티끌보다 가볍게 버렸던 삶의 미련이, 버렸다고 여긴 미련이, 무엇보다 강하게 그를 옥죄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로젤린을 본 순간, 그는 누구보다 생을 강하게 욕망하고 집착하는 사내가 되어 있었다.

결코 채워지지 않으리라 여겼던 그의 공허는, 이미 그녀의 존재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찾았다.

바닥에 앉은 프레데릭의 안색은 안 좋았지만 특별한 부상은 보이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로젤린은 가까스로 안도했다.

“전하! 불길이 거셉니다. 여기는 곧 무너질 겁니다.”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는 프레데릭의 팔을 붙잡고 일으켰다. 로젤린에게 이끌려 몇 걸음 걸어가던 프레데릭의 무릎이 꺾였다. 아슬아슬하게 그를 붙잡았다. 장신인 프레데릭의 상체가 로젤린에게 쏠렸다. 호흡이 뺨으로 느껴질 만큼 가깝다.

로젤린은 이런 상황에 뺨이 약간 붉어지는 자신의 한심함을 탓했다.

“다리를 다치셨습니까? 걷기가 힘드시다면 제가 업어…….”

“로젤린.”

일부러 딱딱하게 꾸민 목소리는 프레데릭의 부름에 끊겼다. 숨을 몰아쉬고 로젤린으로부터 몸을 뗀 프레데릭이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마비독을 먹었는데 해독이 완전히 되지 않았다. 거동이 자유롭지 않아. 나와 가면 너도 위험하니 혼자 도망쳐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프레데릭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졌다. 로젤린은 자신의 어깨를 움켜쥔 프레데릭의 손목을 붙잡았다.

“주군을 버려두고 혼자 도망치는 기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너까지 개죽음을 당할 셈이냐!”

“기사가……!”

기사가 주군을 위해 죽는 게 뭐가 개죽음이냐, 라는 말이 튀어 나갈 뻔했다. 로젤린은 아슬아슬하게 혀끝에 걸린 말을 삼켰다. 이건 프레데릭의 트라우마다. 건드리면 안 된다.

프레데릭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몇 걸음 걷지 않은 모습으로도 그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건 그녀도 파악했다. 들어올 때는 화약통으로 주의를 분산시켜 뛰어들 수 있었지만, 나갈 때는 들어올 때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거동이 제대로 되지 않는 프레데릭까지 보호하여 도망치는 건 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그를 남겨 두고 홀로 도망치는 건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로젤린은 완고한 프레데릭의 시선을 올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목도, 피부도, 눈도, 따갑고 쓰리지 않은 곳이 없다. 흉흉한 열기가 등 뒤까지 다가와 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말싸움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전하, 곧 다른 기사들이 합류할 겁니다.”

“합류할 때까지 이 불구덩이 안에 있자고? 그전에 타 죽겠지.”

프레데릭은 그답지 않게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살고 싶다.

로젤린을 본 순간 살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에 그는 사로잡혔다. 처음으로 가진 욕망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살고 싶어진 건 진심이다. 하나 로젤린의 희생을 제물로 하여 살고 싶지는 않았다.

로젤린이 죽을 바엔, 자신이 죽는 게 낫다. 그것은 로젤린을 만나기 직전까지 그를 휘감았던 자포자기의 죽음과 완전히 상반되는 죽음이었다.

“마비가 조금씩 풀리고 있지만 아직 한 사람의 몫을 한다고는 볼 수 없어. 무기도 없지. 하물며 밖에는 궁병이 있는데 방패로 쓸만한 것도 없…….”

설득하려던 프레데릭의 입술이 꾹 닫혔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로젤린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이제야 겨우 자신의 자리를 찾은 것처럼.

그녀가 그를 한 번 올려다보고, 부드럽게,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전하의 방패가 되겠습니다.”

은유적인 의미의 방패가 아니었다. 그녀가 말하는 건 ‘방패’라는 단어 그대로의 의미였다.

“다행히 저는 키가 큽니다. 전하의 겉옷을 입으면 잠시마나 백작의 사병들을 속일 수 있을 겁니다. 공격이 저에게 쏠렸을 때 전하께서는…….”

“로젤린!”

프레데릭은 거의 비명처럼 외쳤다.

“어떻게 널 죽이고 내가 살란 말이냐!!”

선대 대공을 지키려 하였던 아버지의 죽음.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죽겠다고 하는 로젤린. 과거의 잔상과 현재의 시간이 아찔하게 교차했다.

창백해진 그와는 대조적으로 로젤린의 얼굴은 평화로웠다. 그녀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예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제 이기심을 위해 전하를 이용할 것이라고요. 전하를 위해 선택한 방법이 아닙니다. 오직 절 위해 선택한 길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죽을 길을 고르는 게 어째서 널 위한 게 돼!!”

격양한 프레데릭은 로젤린의 어깨를 놓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노성을 들으면서도 로젤린의 시선은 고요했다. 이미 결심을 끝마친 것이다. 프레데릭은 그녀의 결심을 무너트리지 못했다.

울분이 치미는 대로 외쳐 봤자 시간만 낭비할 뿐이다. 프레데릭은 초조하게 입술을 씹었다. 있을까. 그녀를 속이게 된다 해도, 그녀만이라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 방법이. 무기는 로젤린의 손에 있는 단검 한 자루뿐. 적어도 방패가 될 만한 게 있었다면. 방패, 방패, 방패, 위장…….

“전하! 여기에 계셨군요!”

뭔가 떠오를 것 같았던 생각의 맥이 끊어졌다.

목소리의 주인은 로젤린이 아니었다.

“……사무엘?”

“대장!”

“너도 있었나! 얼른 전하를 모시고 나오지 않고 뭘 해!”

로젤린이 들어온 방향과는 다른 복도에서 사무엘이 달려왔다. 그가 달려온 복도가 상대적으로 불길이 덜했다.

“전하를 내가 부축할 테니 자네는 길을 열게!”

“알겠습니다!”

반사적으로 대답하였던 로젤린은 순간 멈칫했다.

‘어째서 전하가 부축을 받으셔야 하는 상태라는 걸 알고 있지?’

프레데릭은 마비독을 먹었을 뿐 겉으로 드러나는 육체적인 부상은 없다. 현재 그는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거동이 불편하다는 걸 첫눈에 알아보는 건 불가능하다.

그 이유에 생각이 미치기도 전에 로젤린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가까이 접근한 사무엘을 보았다. 정신없이 왔는지 롱 소드를 그대로 빼든 사무엘이 프레데릭에게 달려갔다.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프레데릭은 볼 수 없었던 것.

궁병을 돌파하고 본채로 뛰어들었을 사무엘의 칼날이 아주 깨끗했다.

검은 인영이 프레데릭과 사무엘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새하얀 칼날이 로젤린을 꿰뚫었다. 프레데릭의 바로 앞에서. 그의 방패가 된 그녀를.

“로젤린!!”

외마디 비명이 불길 사이에서 치솟았다.

눈앞이 새하얗게 뒤집혔다. 머리끝까지 치솟은 분노가 이성과 판단을 마비시켰다. 정신을 차렸을 때 프레데릭은 로젤린이 놓친 단검으로 사무엘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사무엘이 피를 한 움큼 토하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마비산으로 중독되신 몸으로도 그런 움직임이시라니…… 역시…….”

“왜 로젤린을!”

프레데릭은 아래에 깔린 사무엘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사무엘의 옷도 프레데릭의 손도 온통 피범벅이었다.

사무엘이 로젤린을 찌를 당시에 프레데릭은 보았다. 목표로 삼은 건 분명히 프레데릭인데 로젤린이 난입하여 칼을 맞았음에도 그는 전혀 당황한 눈치가 아니었다. 로젤린 또한 그의 목표 중 하나였다.

“대답해라!!”

“…….”

다그쳤지만 사무엘은 이제 두 번 다시 대답할 수 없는 상태였다. 허우적거리던 양손이 힘없이 늘어지고 동공의 초점이 사라졌다.

“젠장!”

프레데릭은 사무엘의 시체를 내팽개치듯이 내던지고 로젤린에게 달려갔다. 불길이 좀먹어가는 바닥에 누운 로젤린의 안색이 아주 창백했다. 호흡을 확인했다. 미약하지만 호흡이 있었다.

사무엘의 검은 정확히 로젤린의 복부를 관통했다. 서둘러 망토를 길게 찢어 로젤린의 복부에 감아 지혈했다.

응급처치를 마치고 로젤린을 안아 일으키려다 멈칫했다. 이대로 로젤린을 안고 나가도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로젤린이 중상을 입었으니 악화되었다.

천우신조로 궁병의 공격에 큰 부상을 입지 않는다고 가정해도 그 후의 전투가 문제였다. 마비가 덜 풀린 건 둘째쳐도, 의식이 없는 로젤린이 인질로 잡힌다면 그는 무조건 항복할 수밖에 없다. 그가 항복한다면 로젤린도 죽을 것이다.

‘생각해. 생각해. 생각해.’

로젤린을 끌어안은 채 입술을 짓씹었다. 이 불길 속에 있으면서도 그녀의 체온이 차츰 떨어지고 있었다. 출혈이 심하다. 일 초라도 빨리 의사에게 보여야 했다.

‘방패. 위장…… 아!’

프레데릭은 다급히 로젤린을 안고 일어났다. 끊어졌던 생각의 맥이 이어졌다. 방법이 있다.

별채에서 탈출한 슈벤하임 대공의 기사 한 명이 화약통을 터트리고 본채로 뛰어들었다. 포위에 구멍이 뚫린 지휘관은 별채를 포위한 병사의 일부를 충당해야 했다.

적절한때를 보던 사무엘이 본채로 들어가고도 한참이 지났다. 더 이상 사무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해가 뜨기 전에 슈벤하임 대공 일행을 처리해야 한다. 독살 같은 방법이 아니라, 전투의 흔적이 시체에 남도록.

“화시를 쏴라!”

불화살의 비가 본채에 명중했다. 불길이 더욱 날름거리며 화려하게 불타올랐다. 포위한 병사들의 얼굴에도 땀이 줄줄 흘렀다. 건물의 일부가 붕괴하기 시작했으나 지휘관은 방심하지 않았다. 절대 실수해서는 안 되는 전투였다.

그는 언제 열릴지 모르는 본채의 문을 응시했다.

마치 그에게 호응하는 것처럼 문이 열렸다. 지휘관은 눈을 빛내며 허공으로 치켜세웠던 오른손을 힘차게 내려 공격 명령을 준비했다.

나온 사람이 슈벤하임 대공이든 사무엘이든 일일이 확인할 필요는 없다. 슈벤하임 대공의 배신자인 사무엘이 실수로 죽어도 상관없었다.

“쏴……!”

그러나 공격 명령은 완전히 떨어지지 못했다. 문이 열리고 제일 먼저 보인 사람은 슈벤하임 대공도, 사무엘도 아니었다.

검은 베일을 쓰고 피에 젖은 드레스를 입은 흑발의 여인이었다.

정확히는 여인의 시체였다.

힘없이 아래로 늘어뜨린 여인의 팔다리가 흔들거렸다. 지휘관은 오늘밤 저 드레스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시, 실비아 아가씨!”

실비아의 목 뒤를 움켜잡아 마치 방패처럼 자신의 앞을 가린 프레데릭이 외쳤다.

“누이의 시신을 더럽혔다고 네 주인에게 고할 수 있겠느냐!”

“어찌 이리도 무도하시오!”

“그 말은 네 주인에게 그대로 돌려주지.”

프레데릭이 코웃음을 쳤다. 그는 왼손으로 실비아의 시신을 들고 오른손으로 사무엘의 롱 소드를 빼든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지휘관은 이를 으득 악물었다. 병사들은 주춤거리며 공격을 하지 못했다. 그가 고민하는 사이에도 프레데릭은 조금씩 거리를 확보하고 있었다.

어차피 시체다. 베스메틱 백작을 배신한 시체였다.

주인에게 사죄를 고하며 지휘관은 크게 외쳤다.

“상관없다! 쏴라!”

그 순간, 프레데릭은 실비아의 시체를 멀리 내던지며 옆으로 달렸다. 한 박자 늦게 궁병의 화살이 그가 있었던 자리에 쏟아졌다. 궁병이 화살을 메기는 사이에 석궁병이 쿼럴을 발사했다. 일부는 프레데릭의 검에 튕겨나갔으나 일부는 어깨와 다리에 박혔다.

지휘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실비아가 해독제까지 몰래 숨겨서 가지고 갔던 모양이지만 확실히 움직임이 둔하다.

사자심공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용맹한 무인이지만 현재 그는 마비산에 중독되어 있다. 갑옷도 입지 않은 홀몸이다. 승산은 있다. 지금 프레데릭을 공격하여 죽인다면 온전히 자신의 공적이 된다.

자신의 것이 될 영광에 희열을 느끼며 지휘관은 우렁차게 공격을 명령했다. 프레데릭과의 거리가 좁아졌다. 궁병과 석궁병이 뒤로 물러나고 창병이 프레데릭을 포위하며 공격했다.

짧은 희열에 젖었던 지휘관은 곧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프레데릭은 구르듯이 단숨에 거리를 좁혀 앞에서 돌진하던 병사들의 다리를 길게 베었다. 쓰러진 병사들의 뒷목에는 칼을 꽂고 휘청거리는 병사들의 턱을 징을 박은 부츠로 걷어차서 박살을 냈다.

앞에서 파르티잔(창의 한 종류)으로 찌르는 병사의 공격을 피해 창대를 옆구리와 팔뚝 사이로 붙잡았다. 힘 싸움에서 밀린 병사는 창을 놓쳤다. 프레데릭은 그대로 창대를 휘둘러 병사의 가슴을 가격하고 자신의 등 뒤로 내찔렀다. 뒤에서 공격하려던 다른 병사의 가슴에 창날이 꽂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 명의 병사들이 시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병사들의 공격이 주춤했다. 하지만 프레데릭도 멀쩡하지는 않다. 그의 몸도 곳곳에 상처가 생겼다. 평소라면 확실히 회피하였을 공격이 그의 체력을 조금씩 깎아 먹고 있었다.

지휘관은 더욱 크게 목소리를 높여 병사들을 독려했다.

“상대는 한 명이다! 겁먹지 마라!”

“우와아아아아!”

밀집 대형의 병사들이 파르티잔의 창날을 앞으로 향한 채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프레데릭은 몸을 빼내 도망치지도, 정면으로 맞서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빼앗은 파르티잔을 잔디바닥에 꽂아 장대처럼 써서 몸을 허공으로 튕겼다.

병사들이 앞으로 내지른 창날을 뛰어넘고 창대를 박차 한 번 더 도약한 그는 정면에서 달려오던 병사 두 명의 얼굴을 발로 찼다.

“끄악!”

코뼈가 가라앉고 이가 부러진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그들이 넘어지며 포위진의 진형과 뒤에 붙어 따라오던 두 번째 대열의 진형도 무너졌다.

프레데릭이 파르티잔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단말마의 비명이 치솟고 피분수가 허공에 튀었다. 창대가 부러지면 다른 병사의 창을 빼앗아 쓰고 방패가 필요하면 자신이 공격한 병사를 주저 없이 이용했다. 동료 병사를 찔러 버렸다는 것에 당황한 순간 프레데릭의 창날이 목을 꿰뚫었다.

화려하고 큰 움직임으로 분위기를 제압하고 단순하고 깔끔한 공격으로 병사들의 숨통을 끊는다. 동시에 병사들이 충분히 동요할 만한 잔인함까지 연출한다.

그는 일대다수의 전투에서 효과적으로 싸우는 방법을 잘 알았다. 시체가 한 구씩 생길 때마다 병사들의 사기도 꺾였다.

이 전투는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는 국가 간의 전투도 아니고, 고향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사기를 극도로 끌어올릴 수 있는 전투도 아니다.

한 명의 영주가 한 명의 영주를 배신하여 습격하는 전투일 뿐이었다. 프레데릭 단 한 사람의 무력에 밀린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하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유일하게 전의로 불타고 있는 건 지휘관뿐이었다. 기사 한 명이 화약통을 터트려 포위가 일부 무너진 탓에 별채를 포위하였던 병사들의 일부를 끌어왔다. 별채 쪽에서도 전투의 소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 시간을 오래 끌면 별채에서도 탈출하는 기사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병사들이 물러서자 프레데릭도 방어자세만 취한 채 서 있었다. 표정은 태연했지만 전신이 땀으로 흥건했다. 상처는 처음보다 훨씬 더 늘어나 있다. 지휘관은 프레데릭 또한 시간을 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기회는 지금이다. 지휘관은 얼마 남지 않은 화살과 쿼럴을 전부 소모하기로 결정했다.

“궁병대, 석궁병! 사격…….”

사격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하기도 전이었다.

별채 쪽의 소란이 커졌다.

“놓치지 마라! 잡아!!”

“전하! 무사하십니까!”

쫓는 자의 외침과 쫓기는 자의 외침이 어지럽게 섞였다. 온통 그슬리고 피범벅인 제복을 입은 세 명의 기사가 본채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야아아아!”

세 기사는 궁병대를 뒤에서 먼저 기습하며 돌파를 시도했다. 숨을 고르며 약간이나마 체력을 회복하던 프레데릭도 병사들을 공격했다. 전투는 삽시간에 난전이 되었다.

프레데릭은 창대를 옆으로 눕혀 한꺼번에 자신을 공격하는 세 병사의 창날을 아래에서 받아 내며 힘껏 밀쳤다. 숨을 돌리기도 전에 옆구리를 파고드는 공격을 피하며 창대로 병사의 투구를 세게 후려쳤다.

그러나 어깨를 찌르는 공격은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공격을 눈치채기는 하였으나 피할 여력이 없었다. 빌어먹을 마비산. 프레데릭은 상처의 아픔에 이를 악물며 창을 찔렀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답답했다.

별채에서 탈출한 세 기사 중 하나인 아벨이 프레데릭을 공격하려 하는 병사 한 명을 처리하며 그와 등을 맞대고 섰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하! 로젤린을 제외하고 세 명밖에 탈출하지 못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죽었다는 뜻이다. 탈출한 세 명도 곳곳에 부상과 화상을 입고 있었다.

다른 두 기사들도 프레데릭과 아벨이 서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네 명이 서로 등을 맞대어 둥글게 서고, 베스메틱 백작의 사병은 그들을 포위하는 형태로 공격했다.

“대장도 이미 놈들에게 당하신 것 같습니다!”

프레데릭은 병사에게 창을 찌르며 씁쓸하게 대답했다.

“배신했다.”

“예? 대장이요?!”

기사는 크게 당황하였으나 놀라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사병들의 지휘관은 무조건 공격을 명령했고, 전의는 꺾였다지만 수적으로 월등한 우세에 있는 병사들의 공격은 끊이지 않았다.

“루이! 이자는 어딜 간 거야! 반드시 처리할 수 있겠다며 호언장담하더니!!”

지휘관이 알 수 없는 이름을 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냉정을 잃은 지휘관은 부대를 통솔하지 못한다. 프레데릭은 지금이 돌파할 적절한 시기라는 걸 깨달았다.

“아벨, 네가 지휘를 맡아서 포위망을 뚫을 틈을 찾아라. 마비산에 당해서 아직 눈이 잘 보이지 않아. 동남쪽이면 된다.”

“알겠습니다.”

마비산이라는 말에 아벨은 놀란 기색이기는 했으나 침착하게 대꾸했다. 이런 돌발 상황에서는 가장 믿음직한 녀석이다.

아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황을 봐서 지시할 테니, 5시 방향으로 돌파하여 별장의 정문까지 직진한다.”

“에이, 산길을 맨다리로 달려서 내려가는 건 싫은데.”

기사 한 명이 히죽 웃으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기운 없는 짧은 웃음이 잠시 감돌았다.

우렁찬 함성을 외치면서 달려든 병사의 목젖을 크게 베던 기사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웬 말 울음소리가 갑자기……?”

“말 울음소리가 들리나?”

프레데릭이 반색하며 물었다.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착각인 줄 알았는데 희미하지만 분명히 말의 울음소리가 맞습니다. 전하도 들으신다면 알…… 아, 마비산에 중독되었다고 하셨죠.”

“언제부터 들렸지?”

“1, 2분 정도 되었습니다.”

프레데릭의 기억으로 마구간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마구간 안에 말들이 얌전히 있다면 말의 울음소리가 본채까지 들릴 리가 없다. 누군가 마구간의 문을 열고 말들을 풀어 준 것이다.

프레데릭은 지체 없이 오른손의 검지와 엄지를 입에 넣고 휘파람을 크게 불었다. 삐이이이이익! 새된 소리가 혼란한 전투의 소음을 찢으며 높이 울려 펴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휘파람에 호응하듯이 말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두두두두. 장애물을 돌파하며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는 지금 이 순간 가장 반가운 소리였다.

“우와아!”

기사가 함성을 질렀다.

주인의 부름을 알아들은 흑염룡과 봉피가 프레데릭 일행의 말들을 이끌며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었다.

훈련이 잘된 군마들은 특별한 명령이 없어도 진영을 휘저으며 돌진했다. 백작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피하거나, 징을 박은 말굽에 밟혔다.

“미친! 이 짜릿한 맛에 전하의 기사를 한다니까요!! 사랑합니다!”

기사가 환호성을 지르며 애마의 안장에 올라탔다. 흑염룡은 다른 말들처럼 주인이 올라탈 수 있도록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프레데릭은 직진하며 달려오는 흑염룡의 옆구리를 끌어안듯이 하며 바로 올라탔다.

“사내자식의 사랑은 필요 없어.”

프레데릭은 다소 지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모든 기사가 말에 올랐다. 주인을 잃은 말들은 사방을 뛰어다니며 휘젓고 있었다.

“진정해! 진정하란 말이다, 새끼들아!”

지휘관이 목청껏 외치며 발악하고 있지만 무너진 진형을 수습하기란 어려워 보였다. 프레데릭은 고삐를 휘어잡으며 말했다.

“포위망은 아까 말했던 것처럼 5시 방향으로 돌파한다. 이럇!”

“알겠습니다!”

아벨을 시작으로 세 기사들은 한 목소리처럼 외치며 프레데릭을 따랐다. 진형이 무너진 보병을 기병이 돌파하는 건 어렵지 않다. 주인이 없는 말들도 기사들의 뒤를 따라 달렸다.

“파르티잔의 창날을 위로 세워! 막아!”

지휘관이 발악했지만 기사들의 무기도 쉬지 않았다. 창날과 검날이 번뜩이며 병사들의 피로 물들었다.

포위망의 최후미가 뚫렸다.

“너희는 그대로 정문까지 직진해라!!”

프레데릭은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흑염룡의 방향을 틀었다. 흑염룡은 방금 돌파한 포위망 쪽으로 비스듬히 꺾어 달렸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에서 프레데릭은 고삐를 놓고 등자에 건 발만으로 체중을 지탱한 채 몸을 오른쪽 바닥으로 굽혔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행동이다.

우왕좌왕 흩어진 병사들에게 호령하는 와중에도 지휘관은 의아했다.

‘어째서 슈벤하임 대공이 돌아오는 거지? 공격을 하려는 낌새도 아닌데?’

의문이 가득한 시선이 프레데릭이 달려오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그도 방금 전까지 잊고 있던 한 명의 사람, 아니 시체가 있었다.

실비아의 시체가 전투 전 프레데릭이 내던진 그대로 잊힌 채 방치되어 있었다.

프레데릭이 가차 없이 내던졌기 때문에 그도 신경 쓰지 않았던 시체다.

지휘관이 그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프레데릭은 바닥으로 한껏 뻗은 양손으로 실비아의 시체를 낚아챘다. 그녀의 머리에 걸려 있던 검은색 베일이 벗겨져서 너울너울 아래로 떨어졌다.

베일 아래로 드러난 머리칼은 짧았다.

언뜻 흑발로 보이는 짧은 머리칼. 사무엘이 들어가기 이전에 본채로 진입하였으나 나오지 않은 한 명의 기사.

“화살을 쏴!!”

그 의미를 이해한 지휘관이 외쳤다. 잡아야 한다. 슈벤하임 대공을 놓치더라도 저 기사는 잡아야 한다.

그러나 이미 프레데릭은 실비아의 사체로 위장하였던 기사를 앞에 끌어안은 채 정문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궁병들이 쏜 화살은 주인 없이 달려가고 있던 한두 마리의 말을 맞췄을 뿐이었다.

프레데릭이 합류한 일행은 지체 없이 정문을 돌파하고 산길로 내달렸다. 말들이 달리는 소리가 차츰 멀어졌다. 지휘관은 절망적으로 칼을 바닥에 내던졌다.

* * *

새벽이 오기 전, 산 아래의 마을에서는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산길에서 달려오는 수 마리의 말 떼를 산적의 습격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프레데릭 일행은 한바탕 소동 후 신분을 증명하고 마을로 들어왔다.

부상이 그나마 경미한 기사 한 명이 레젠으로 소식을 알리기 위해 급히 떠났다. 프레데릭은 먼저 의사부터 찾아갔다. 흔히 있는 작은 진료소였다. 의사의 집은 진료소와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이고, 해도 안 떴는데 누구쇼?”

하품을 하며 어기적어기적 나온 의사는 문 앞에 피투성이 남자들이 서 있자 질겁했다. 이 작은 마을에서는 일 년에 한두 번 일어날까 말까한 큰 부상이었다.

“부상자가 있네. 상처가 위중한데 즉시 치료가 가능하겠나?”

프레데릭의 양팔에 안긴 로젤린을 본 의사는 잠이 확 달아나는 표정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응급처치는 하였으나 중상인 그녀는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화상도 넓었지만 무엇보다 복부의 검상이 제일 중상이었다. 의사는 즉시 수술 준비를 시작했다. 조수로 보이는 아내와 아들도 급히 안쪽에서 나와 의사를 거들었다.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프레데릭은 진료실 앞의 의자에 앉은 채 침묵했다. 기사들도 섣불리 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급한 수술이 끝났는지 진료실에서 딸이 나와 일행의 부상을 봐 주려 했다.

“나는 나중에 치료하지.”

프레데릭은 부상의 치료마저 거절했다. 주군이 치료를 받지 않고 있으니 기사들도 받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프레데릭이 명령했다.

“너희는 제대로 치료를 하도록 해.”

“전, 아니 프레데릭 님부터 받으셔야지요.”

“난 됐으니까!”

양손을 깍지 끼어 이마에 댄 프레데릭이 내뱉듯이 외쳤다. 그는 로젤린이 무사하다는 확실한 대답을 얻기 전에는 치료를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기사들이 먼저 치료를 받았다. 기사들의 치료가 끝나고, 해가 뜨고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진료실의 문이 열렸다.

“그녀는 어떻지?!”

벌떡 일어난 프레데릭이 외쳤다. 멱살을 잡기라도 할 기세에 의사가 당황하여 대답했다.

“다, 다행히 장기의 손상이 없어서 수술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화상도 처치를 했고요. 부족한 피를 보충하게 하면서 휴식하면 곧 깨어날 겁니다.”

장담하는 의사의 말을 듣고서야 프레데릭은 안도했다. 그는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목 뒤가 진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의 부상을 치료받았다.

맥스가 잔류한 기사 전원과 호위병의 절반을 이끌고 도착한 건 오후가 되어서였다. 자세한 사정을 듣고 왔던 맥스는 쓸데없는 질문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바로 출발하시겠습니까?”

프레데릭은 대답하기 전에 아벨을 비롯한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밤새 전투를 하고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해 상당히 지친 기색이다. 로젤린도 아직 의식이 없다.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으나 지금은 한 시가 급한 상황이다.

게다가 백작의 사병이 재차 습격할 가능성도 있다. 암살에 실패하여 프레데릭이 탈출하였으니 슈벤하임 대공가와 베스메틱 백작가 사이에 남은 길은 단 하나뿐이다.

“어제부터 무리를 해서 미안하지만 당장 출발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아벨과 기사들은 전혀 불만 없이 즉각 프레데릭의 명령에 따랐다. 의식이 없는 로젤린을 이송하기 위한 마차를 수배하는 짧은 틈에 맥스가 다가왔다.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침대에 누운 로젤린의 옆을 지키고 있던 프레데릭이 무거운 한숨을 쉬며 그를 돌아보았다.

“지금? 무슨 일이지?”

“로젤린과 관련된 일입니다.”

맥스의 시선이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로젤린에게 힐끔 향했다. 프레데릭의 얼굴이 굳었다. 로젤린이 의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맥스는 프레데릭에게 낮게 속삭였다.

“이상한 소문을 레젠에서 들었습니다. 어제부터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만…….”

맥스가 빠르게 설명했다. 프레데릭의 얼굴이 차츰 굳었다. 로젤린과 관련된 소문이 레젠에 떠돌고 있다.

‘……이제 와서?’

명백히 이상한 일이었다.

몇 마디 더 상황을 물은 프레데릭은 맥스에게 일렀다.

“로젤린이 깨어나도 당분간은 비밀로 해라.”

“알겠습니다, 한데 그 소문이 사실입니까?”

프레데릭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피곤한 데다 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지만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짐작이 된다.

꽉 주먹을 쥔 프레데릭의 손등에 퍼런 핏줄이 곤두섰다.

성문이 닫히기 직전, 프레데릭 일행은 아슬아슬하게 레젠에 도착했다. 무리하여 전속력으로 행진한 결과였다.

사정을 들은 옥스타인 공작이 대공저에 주치의를 보냈다. 프레데릭이 로젤린을 손수 안아 방으로 옮기자마자 주치의는 상처를 다시 살펴보았다. 공작의 주치의는 먼저 로젤린을 치료한 의사와 비슷한 대답을 했다.

곧 로젤린이 의식을 되찾을 것이란 장담이었다.

“복부의 검상도 검상이지만, 화상도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감염의 우려가 큽니다. 처방약은 받으셨습니까?”

“여기 있네.”

프레데릭은 의사에게 받은 처방약과 제조법을 건넸다.

“기본적인 처방이로군요. 제가 다시 약을 조제하여 드릴 테니 여기 이 기사분은 물론이고 전하와 다른 기사분들도 사용하십시오. 연기를 많이 들이켜셨을 테니 당분간은 목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더 알려 준 주치의는 우선 약을 제조하여 오겠다며 물러났다. 프레데릭은 무너지듯이 로젤린이 누운 침대 옆에 앉았다.

“…….”

로젤린은 여전히 고요히 잠들어 있는 채다. 그의 곁에 서 있지도 않고, 말을 걸지도 않으며, 바라보지도 않고 잠들어 있다.

곧 의식을 회복할 것이란 의사들의 장담은 두 번이나 들었다. 그런데도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프레데릭은 무겁게 신음하며 눈두덩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로젤린이 그의 앞에서 그의 방패가 되어 대신 칼을 맞던 순간이 망막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피를 쏟으며 그의 앞에서 그대로 허물어지던 그 순간이 망막에 강하게 새기기라도 한 것처럼 선명했다. 아주 잠깐이라도 마음의 틈이 있으면 다시금 되새겨지는 그 순간이 그를 단번에 점령했다.

아버지의 마지막이 그녀의 모습 위로 자꾸만 겹쳐져서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괜찮아. 로젤린은 무사히 일어날 테니까.’

그 한마디를 자신에게 거는 주문처럼 반복했다.

프레데릭은 로젤린이 대신 칼을 맞아 쓰러지는 장면의 선명함처럼, 그녀가 그에게 주었던 강렬한 삶의 욕구도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후 처음으로 강하게 느낀 것이나 다름없는 강렬한 욕망은 그의 안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로젤린이 그에게 준 것이다.

로젤린이 아니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발 무사히…….’

프레데릭은 그녀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쓰라리게 곱씹었다. 그녀가 준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하찮았다.

똑똑.

“……프레데릭 님.”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회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얼굴을 문지르며 눈을 떴다.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로젤린이 그에게 준 새로운 의미와 시간을 헛되게 보내어서는 안 된다.

로젤린의 뺨을 쓰다듬으려 하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허공에 뜬 채 잠시 방황하던 손가락은 그녀의 얼굴에 닿지 못하고 안으로 말렸다.

그는 그대로 숨을 삼키며 방을 나왔다.

밖에는 라울 외에도 로젤린을 갈아입힐 옷과 몸을 닦을 준비를 하고 있던 하녀도 있었다. 차마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던 하녀가 꾸벅 인사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프레데릭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없었다.

복도에 선 채 우두커니 문을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라울이 신중하게 물었다.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언짢은 마음으로 듣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뭐지?”

프레데릭의 목소리가 깔깔하게 쉬어 있었다.

“당시 현장에서 상황을 목격하지 못한 저의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어서요…… 프레데릭 님께서 판단하시기에 메이어 경의 실력은 어떠합니까?”

라울과 대화하며 기력을 소비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으면 괴로웠다. 프레데릭은 집무실로 먼저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상당히 뛰어나지.”

“아이기스 나이트에서는 어떤가요?”

“로젤린과 일대일로 대결하였을 때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

“그렇다면 죽은 기사대장보다 강합니까?”

뚜벅뚜벅 걸어가던 프레데릭은 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라울이 물으려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짐작이 갔다.

“……순수한 실력만이라면 로젤린이 위겠지. 아무래도 사무엘은 나이가 있고 한때 은퇴하였던 기사니까.”

라울은 프레데릭이 짐작한 한마디를 질문했다.

“메이어 경은 왜 몸으로 직접 검을 받아 냈을까요? 그녀의 실력이라면 다른 방법으로 제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

프레데릭은 미간을 찌푸렸다.

당시의 상황을 회상했다. 그때 그는 마비산이 완전히 해독되지 않아서 시야가 제대로 트이지 않았고, 팔다리가 무거웠다. 무기도 없었다. 반면에 사무엘은 무기가 있었으며 프레데릭과의 거리도 가까웠다.

로젤린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가까운 곳에 있지 않았다면 몸을 날려 프레데릭의 방패가 되지는 못했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면, 그녀의 칼로 사무엘을 공격하여 막아 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라울이 자극한 한 가지 의문이 새록새록 샘솟았다. 그러나 프레데릭은 고개를 저어 그 의문을 털어 냈다.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을 상황이 아니었지. 상당히 급박하였으니 로젤린으로서는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행동을 취했을 뿐이야.”

건물에 불이 붙어 당장 빠져나가야 하는 급한 상황에 상관마저 배신을 했다. 프레데릭이 로젤린의 입장이었어도 냉정하게 판단하여 무기를 들 수 있었을 거란 확신은 하지 못했다.

그렇게 믿었다.

“괜히 마음을 어지럽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라울도 깊이 파고들지 않고 순순히 사과했다.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집무실이 가까워졌다. 집무실에는 아벨과 맥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회의에 참석하는 인원은 단출했다. 배신하여 죽은 사무엘을 대신하여 아벨에게 임시로 기사대장직을 맡겼다. 아벨과 맥스뿐만이 아니라, 살아남은 기사단원들도 사무엘이 배신한 이유를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마수 떼의 습격으로 급히 기사대장을 보충하느라 신상을 확실하게 확인할 시간이 부족했다. 충직하지 못한 기사가 배신의 마음을 품었다면 그 무렵일 것이다. 현재 레젠에서 조사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프레데릭은 현재 레젠에 있고, 슈벤하임 대공령은 레젠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다. 회의에서 의논하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내용은 많지 않았다.

먼저 대공저의 경비와 프레데릭의 경호를 재정비했다.

사무엘의 배신과 기사단원의 죽음으로 경비에는 큰 구멍이 뚫렸다. 클레타트 후작의 암살단이 예의 독을 이용하여 침입할 가능성이 있다. 마법 협회와 거래하여 해독약을 구입하기로 했다. 목돈이 지출되겠지만 금전을 아낄 때가 아니었다.

자세한 상황을 기록하여 전서매로 발트란에 날려 보내기로 했다. 사무엘이 레젠에서 갑자기 배신할 마음을 먹었을 리는 없다. 적어도 베스메틱 백작과 거래한 흔적이 발트란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어째서 베스메틱 백작이 프레데릭 님을 공격한 걸까요?”

라울이 근본적인 질문을 했다. 프레데릭으로서도 딱히 짐작 가는 이유가 없었다.

슈벤하임 대공가와 베스메틱 백작가는 바로 이웃해 있지만 큰 마찰은 없었다. 필라헨 제국의 유일한 대공가인 슈벤하임과 일개 백작인 베스메틱은 세력의 격차가 크기 때문이다.

베스메틱 백작가가 슈벤하임 대공가를 공격한다면 득보다 실이 훨씬 더 컸다.

“굳이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베스메틱 백작령과 멀지 않은 지역이 아이든 백작가의 세력권이라는 건데…….”

아이든 백작가는 마리안 부인의 친가다.

두 가문이 손을 잡았을 가능성은 있지만, 역시 의문은 남았다. 손을 잡고 프레데릭을 치기에는 역시 베스메틱 백작가의 세력이 약하다.

만약 프레데릭의 암살을 성공했다면 상황이 다르겠지만.

“단순히 암살로 쓰고 버리려던 패였을 수도 있겠군.”

프레데릭은 가문의 존속을 애원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실비아를 떠올렸다. 그녀의 태도로 보아 베스메틱 백작가 내에서도 전부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었던 듯하다.

프레데릭의 암살은 위험한 도박이었다.

그 도박에서 베스메틱 백작은 실패했다.

“뭐, 어쨌든 베스메틱 백작가에 정식으로 항의 서한은 보내야겠지. 라울, 초안을 작성해라.”

프레데릭의 직속 기사단에 대기를 명령하는 전서매를 따로 보내는 것으로 회의는 끝났다. 베스메틱 백작가가 용서를 구하든 오히려 군대를 일으키든 프레데릭의 결정은 변함없었다.

그는 자신을 공격하고, 그로 인하여 로젤린까지 중상을 입게 한 베스메틱 백작가에 철저하고 합리적인 보복을 할 것이다.

‘로젤린이 그전에 회복해서 일어나야 할 텐데…….’

보복의 한 몫은 로젤린이 가져야 할 몫이다.

프레데릭은 그녀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도 그녀가 회복하길 바랐다.

그러나 로젤린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깨어나지 않았다.

* * *

“왜 로젤린이 깨어나지 못하는 건가?!”

“그, 그것이…….”

프레데릭의 성난 외침에 의사는 진땀을 연신 닦으며 허리를 숙였다.

“외상은 거의 치료가 되었습니다. 특별한 감염 증상도 나타나질 않고 있고요.”

“그렇다면 어째서……!”

벌컥 외치려던 프레데릭은 이를 꽉 악물었다. 의사에게 화를 낸다고 해서 로젤린이 깨어나는 건 아니다. 옥스타인 공작의 주치의는 지난 며칠 동안 최선을 다해서 로젤린을 치료했다. 그건 가까이에서 보았던 프레데릭이 잘 알았다.

프레데릭은 감정을 삭이려고 애를 썼다. 무턱대고 분노한들 상황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한참을 서성거리던 그가 조금 가라앉는 기색을 보이자 의사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했다.

“상처는 치료되었고 머리에 부상도 없었습니다. 외상이 나았는데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자네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어디까지나 경험에서 비롯된 제 추측에 불과하고 비슷한 사례에 대하여 명확하게 규정된 바는 없습니다만…….”

의사는 머뭇거리면서 쉽게 의견을 꺼내지 못했다. 프레데릭이 한 번 더 채근하자 겨우 말을 이었다.

“비슷한 경우가 드물지만 있었습니다. 환자 본인이 깨어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의식이 없는 환자에게 오트밀이나 스프 등의 식사를 투여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공작의 주치의는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된다면 최악의 경우 사망을 각오해야 한다는 소견을 남기고 갔다.

눈을 뜨더라도 그 시기가 늦다면 몸을 많이 상하게 된다. 기사로서의 복귀가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운신하기 위한 훈련만 몇 달이 걸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프레데릭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로젤린의 곁을 지켰다. 그가 이렇게 무력하게 앉아 있는 와중에도 상황은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다.

한시라도 쉬지 않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행동을 취하여야 한다고 이성으로는 알고 있다. 로젤린이 그에게 준 시간을 헛되이 보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무슨 의미가 있지?’

그녀가 없다면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의미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첫째 날은 로젤린이 깨어나지 않는 이유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둘째 날은 어떻게 하면 로젤린이 깨어날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민했다. 셋째 날부터는 그저 하염없이 로젤린의 곁에 있기만 했다.

프레데릭은 자신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날의 불구덩이 속에서 한 번 인생을 포기하였기 때문일까. 그 대가를 로젤린이 대신 받고 있는 것일까. 혹은 살아온 평생, 삶에서 도피하지 않고 인생을 올바르게 걸어왔다면 달랐을까.

언제나 삶에서 도피하기만 하였던 자신이다. 로젤린에게 감히 깨어나 달라고 바랄 자격이 있을까.

생각을 거듭할수록 프레데릭이라는 사내의 가치는 마모되어 갔다. 그는 평생 헛되이 버려 버린 삶의 시간에 로젤린이 쓸려 가라앉는 악몽을 꾸었다.

단지, 단 한 번만 더.

눈동자 속에 자신을 담으며 이름을 불러 준다면.

“……프레데릭 님, 입궁하시라는 서신이 황궁에서 또 왔습니다.”

“태워.”

프레데릭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라울이 주저하며 덧붙였다.

“그리고 손님이 한 분 오셨습니다.”

내보내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슈벤하임 대공이 베스메틱 백작에게 습격을 받고 간신히 대공저까지 귀환하였으나, 부상이 악화되어 죽었다는 소문이 있다는 건 알고 있나?”

양 손바닥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그제야 올렸다. 라울의 옆에는 카를이 있었다.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서 있던 카를이 어깨를 으쓱했다.

“워낙에 두문불출을 하셨어야지.”

“네가 무슨 낯짝으로 여길 들어와!”

사나운 노성이 쩌렁쩌렁했다. 단번에 몸을 일으킨 프레데릭의 손이 카를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프레데릭과 카를은 오랜 친구 사이이기도 하였으며 또한 군신 관계이기도 하다. 친히 문안을 온 그에게 화를 낼 이유가 없었다.

영문을 모르는 라울은 크게 놀랐지만 카를은 태연했다.

“여기서 소리를 지를 건가? 메이어 경이 누워 있는 곳에서?”

“……젠장!”

프레데릭은 거칠게 욕설을 씹으며 카를을 옆방으로 끌고 갔다. 쾅 닫힌 문 너머에서 홀로 남은 라울만이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요 근래 레젠에는 한 가지 소문이 떠돌고 있다. 프레데릭이 베스메틱 백작의 초대에 응하여 레젠을 비운 날과 절묘한 타이밍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유명한 검투사이자 뛰어난 기사로서 그 이름을 알린 로젤린 메이어. 그녀가 클레타트 후작에게 이용당하고 제거된 가문의 생존자라는 소문이었다.

그녀를 염려하여 로젤린의 후원자 중 일부만이 알고 쉬쉬하고 있던 그녀의 출신이다. 로젤린의 유명세와 더불어 소문이 사실인 만큼 번지는 속도도 빨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인기 높은 극단에서 로젤린의 사연을 각색하여 무대에 올렸다. 극적으로 각색된 무대에서 후작은 더없이 비열하고 잔혹한 악역으로, 로젤린은 고결한 이상을 가졌으나 안타깝게 희생된 기사로 치장되었다.

연극 무대에서는 그녀의 가문을 비열하게 몰락시킨 악역에게 가명을 붙였다. 그러나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 중 그 악역이 클레타트 후작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검투사로서 로젤린의 유명세는 귀족 계급에만 한정된 게 아니다.

콜로세움의 관객은 평민도 많다. 콜로세움에서 빛나는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관객들은 10년 만에 드러난 진실을 안타까워했다. 동시에 그녀를 비극의 구렁텅이로 몰아세운 후작을 비난했다.

이 소문의 뒤에 카를이 있다는 건 분명했다. 소문을 내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레데릭이 자리를 비운 타이밍에 무대에 올리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나에게 상의도 없이 멋대로 로젤린의 과거를 이용하는 거지?!”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로군.”

카를은 멱살이 잡혀 구겨진 옷깃을 다듬었다.

“어째서 로젤린 메이어가 메이어 남작가의 사람이라는 걸 나에게 숨겼나?”

“네가 이용하려고 할 게 뻔했으니까!”

“당연히 이용하지.”

화를 내는 프레데릭과는 반대로 카를은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로젤린을 이용하려고 결심하였을 때, 프레데릭의 반응까지 당연히 계산했다.

“후작은 내 자식을 죽였어. 아이를 잃은 아비가 이용하지 못할 게 뭐가 있겠나? 난 후작을 끌어내리기 위해서라면 모든 걸 이용할 거다. 그리고 로젤린의 패는 지금이 사용하기 제일 좋은 시기야.”

프레데릭도 알고 있었다.

로젤린에게 이목이 집중되었을 지금, 그녀가 최고의 전성기에 은퇴한 후 기사로서 돌아온 지금, 클레타트 후작이 과감한 행보를 옮기고 있는 지금.

귀족과 평민 양쪽에 고루 인지도가 두터운 로젤린의 안타까운 사연은 장작이 되고, 원흉인 클레타트 후작의 악행은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된다.

“……다음은 연쇄살인마냐?”

“물론이지.”

카를은 팔짱을 끼며 프레데릭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후작이 암살단을 구성한 건 얻을 수 있는 이익만큼 위험 요소도 큰 도박이었어. 이젠 내가 반격할 때지.”

“하지만 그래도 로젤린을 이용하는 건 납득할 수가 없어!”

“메이어 경이 이해할 거라는 생각은 나도 하지 않아. 그녀가 의식을 회복한다면 정식으로 사과도 할 것이고, 메이어 남작가의 명예를 되찾아 줄 거야.”

“넌 로젤린의 과거를 알고 이용하기 전에 먼저…….”

먼저 로젤린의 동의를 얻었어야 한다, 라는 말을 하려다 멈칫했다.

로젤린은 남작가의 진실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숨긴 건 프레데릭 자신이었다. 그는 왜 로젤린을 이용하였느냐고 카를을 탓할 자격이 없었다.

* * *

보좌관의 보고가 계속되었다.

“현재 공연을 상영 중인 극단의 뒤를 쫓아본 결과, 자금을 융통한 이가 카트린 포날이었습니다. 로젤린 메이어의 후원자이기도 하며 근래 황제파로 기운 상인입니다.”

“로젤린 메이어…….”

묵묵히 보고를 듣고 있던 클레타트 후작이 한 사람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로젤린 메이어, 로젤린 메이어. 10년 전에 이미 가치가 없다고 여겨, 버렸던 하찮은 이름이다. 마리안 부인에게 연락을 받기 전까지는 까맣게 잊고 있던 이름이기도 하다.

그것이 그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어 있었다.

“수고했네. 나가 보게.”

보좌관이 인사하고 물러난 후에도 후작은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레젠을 흉흉하게 만든 연쇄살인마의 배후에 클레타트 후작이 있다는 소문도 일각에서 번지고 있었다. 근거가 없는 소문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제 근거는 중요하지 않았다.

먼저 시작된 로젤린의 소문으로 인해 후작의 이미지는 나날이 추락하고 있었다. 거기에 연쇄살인마의 배후라는 소문이 추가된다. 사실이든 아니든 대중이 호기심을 갖고 비난하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그중에서는 과거 후작의 모후가 마녀였다는 소문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지간히도 선동에 능숙한 모자로군.”

클레타트 후작은 낮게 중얼거렸다.

과거에 그의 모후가 마녀라는 소문을 낸 건 카를 5세의 어머니인 선황제 마리아 2세다.

선선황제, 즉 카를 5세의 조부인 카를 4세는 장년의 나이에 딸뻘의 어린 새 아내를 맞았다. 오스완에서 시집온 왕녀는 카를 4세에게 3명의 자식을 낳아 주었다. 그중 첫째와 둘째는 일찍 죽고 막내인 클레타트 후작만이 무사히 성장했다.

필라헨 제국의 계승권은 장자에게 우선시된다. 당시 카를 4세의 후계자는 외동딸인 마리아였다.

어여쁜 어린 아내가 낳은 아들이 쑥쑥 자라자 카를 4세는 후계자를 교체하려 했다. 그러나 반대가 거셌다. 마리아 황녀가 비록 딸이지만 후계자로서 큰 실수를 한 적이 없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막내 황자가 너무 어리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당시에 마리아는 훌륭히 성장하여 결혼까지 한 성인이었다. 뒤늦게 어린 아들을 얻었다는 이유로 후계자를 교체하기엔 마리아가 그동안 쌓은 기반과 신뢰가 탄탄했다. 카를 4세 본인의 나이가 많아 아들이 성장하기 전에 붕어할 위험이 있다는 것도 불안 요소였다.

카를 4세가 고민하는 사이에도 마리아 황녀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를 지지하는 대영주와 제도 귀족을 움직여 안으로는 여론을 조성했다. 그리고 밖으로는 부정적인 소문을 퍼트렸다.

카를 4세의 두 번째 황후가 마녀라는 것부터 시작된 소문은 차츰 덩치를 키워 나갔다.

결국에는 아들을 낳기 위해 먼저 낳은 두 딸을 제물로 바쳤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이유도 없이 두 딸들이 차례대로 급사한 직후에 클레타트 후작을 임신한 건 사실이었다. 소문은 날개 돋친 듯 뻗어 나갔다.

귀족만이 아니라 평민들에게까지 나날이 악질적인 소문이 커져나가자 카를 4세는 후계자로 삼겠다는 발언을 철회했다. 아들을 후계자로 강행하면 귀족의 지지도 잃고, 민심도 어지러웠을 것이다. 때마침 마리아 황녀가 아들도 출산했다.

그녀에게는 평생의 한이 되었다.

- 폐하의 적법한 후계자는 너란다, 사랑하는 내 아들.

모후가 병사하기 전까지 클레타트 후작이 평생을 들어온 말이었다.

후계자로 올리는 건 단념하였으나 카를 4세의 총애까지 거두어진 건 아니었다. 카를 4세의 총애 속에 그녀는 조용히 세력을 키워 갔고, 그녀의 사후 클레타트 후작에게까지 이어졌다.

클레타트 후작과 카를 5세의 대립은 뿌리가 깊다. 언제고 부딪혀서 둘 중 하나가 완전히 사라져야만 하는 관계였다.

클레타트 후작은 그 시기를 지금으로 결정했다.

“제도 경비대에 체포된 마법사는 어떻게 되었나?”

“혐의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후작이 먼저 질문하기 전에는 항상 침묵을 지키는 가면의 사내, 루이가 거북한 쇳소리로 대답했다.

본래 말수가 적던 사내는 슈벤하임 대공의 배신자인 사무엘과 협력하여 대공을 처리하는 일에 실패한 후 더욱 말이 없어졌다.

‘체포된 마법사를 죽일까.’

후작은 고민했다.

연쇄살인마로 위장한 암살단은 이제 더 쓰지 못할 패다. 제도 귀족들이 경비 병력을 차출한 야경단도 문제였고, 마수의 독을 활용하는 수법이 발각되었다는 것도 문제였다.

이제 야밤에 외출하는 귀족들은 거금을 들여 구입한 해독제를 상비하고 다녔다. 이전처럼 빠르고 쉽게 정리하는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이것도 로젤린 메이어의 짓이로군.’

10년 전에 하찮게 버린 패가 자꾸만 그의 앞을 가로막는다.

‘슬슬 터트릴 때인가.’

문득 기침이 나왔다. 익숙하게 손수건으로 입을 막으며 기침과 동반되는 짧은 발작을 이겨 낸 후작에게 루이가 묵묵히 물과 약을 건넸다. 후작은 손수건을 벽난로의 불길 안으로 던져 태웠다.

그는 걸리적거리는 장애물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릴 방법을 생각했다.

* * *

로젤린이 눈을 뜬 건, 베스메틱 백작이 정중하지만 위협적인 슈벤하임 대공의 항의 서한에 대한 답으로 군대를 일으켰다는 소식이 도달한 직후였다.

“제가 어째서 살아 있습니까?”

그녀의 첫마디였다.

처음에 눈을 뜬 로젤린은 그녀는 마치 생존을 불신하는 것처럼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로젤린이 의식을 회복했다는 기쁨과 안도감에 젖어 있던 프레데릭은 미처 그녀의 표정을 읽지 못했다.

“제가 어째서 살아 있습니까?”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프레데릭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째서 내가 살아 있냐고 묻는 로젤린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로젤린, 너…….”

오랫동안 누워 있었으니 힘들 텐데 아픈 곳은 없는지, 이제 괜찮은지, 여러 마디의 말들이 마음 안에서 샘솟았다. 프레데릭은 그중 하나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크게 떨리는 로젤린의 눈동자가 그의 입을 꽉 막았다.

“전하.”

로젤린이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손가락 끝이 희게 질릴 정도로 세게 부여잡은 손톱이 옷감과 살을 파고들었다.

“제가 혹시 전하를 지키지 못했습니까? 그래서 살아남은 겁니까? 저는, 어째서……! 살아남아서는 안 되는데!”

프레데릭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두서없는 대화의 조각들이 흘러넘쳤다. 이렇게 동요하는 로젤린의 모습도 본 적이 없다.

언제나 그녀는 가야 할 길을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 특유의 확신으로 가슴을 펴고 있었으니까. 프레데릭 자신과 대조적이었기에 더욱 빛났던 그녀의 모습이 흔들렸다.

로젤린은 새까만 암흑 속에 갇혀 버린 사람처럼 갈팡질팡하며 움켜쥔 프레데릭의 팔뚝을 쥐어뜯었다.

“저는 죽었어야 했어요. 살아남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오빠가! 나만 남았는데! 모든 건 내가 짊어져야 했는데!”

“로젤린.”

“주인을 지키지도 못하고! 뻔뻔하게 살아남아서! 내가 해야 할 건 그것뿐이었는데!”

“로젤린!”

결국 프레데릭은 자신도 크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횡설수설하던 로젤린이 올려다보았다. 그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진정한 게 아니었다. 조건 반사적으로 입을 다문 것뿐이었다.

프레데릭도 몹시 혼란스러웠으나 이 말만은 꼭 해야 했다.

“넌 나를 지키지 못한 게 아니야. 네가 지키지 못했다면 내가 이곳에 멀쩡히 있을 것 같나? 여긴 레젠의 대공저다, 로젤린.”

로젤린이 허공을 더듬더듬 훑었다.

“……전하.”

팔뚝을 움켜잡고 있던 손이 프레데릭의 생사를 확인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얼굴로 올라왔다.

프레데릭은 얼굴 약간 위쪽의 허공에서 머뭇거리는 로젤린의 손을 꼭 쥐었다. 힘없이 벌어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얽어 뺨에 가져갔다. 가늘게 경련하는 로젤린의 손가락이 프레데릭의 뺨에 닿았다.

그녀는 우는 것도 아니고 웃는 것도 아닌 기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방패가 되고자 했습니다. 전하의 방패가 되어 전하를 대신하여 죽고자 했습니다. 제가 죽어 전하를 지킬 수 있었다면 제 의무는 완료된 겁니다. 그런데 왜 저는 살아 있습니까? 예?”

혼란스러운 대화는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프레데릭과 로젤린의 대화가 어긋나고 있는 이유는 결국 이것이다. 난 왜 살아 있느냐는 로젤린의 의문. 당연히 그녀의 생존을 바랐던 프레데릭의 대답.

프레데릭은 그녀가 살아 있음을 확신시키는 것처럼 로젤린의 양손을 꼭 쥐었다. 가늘게 잡힌 맥박이 파르락거리며 뛰었다.

“넌 나를 지켰다, 로젤린. 그때 네가 없었다면 나는 죽었을 거야. 부끄러운 말이지만 네가 오기 직전까지 살아나는 걸 포기하고 있었거든. 사무엘이 공격하였을 때도 마찬가지고.”

하나하나 처음부터 차분하게 반복했다. 로젤린에게 되새기듯이. 강박적으로 외치는 그녀의 중심을 붙잡듯이.

“네가 있어서 내가 이곳에 있게 되었다.”

네가 나를 지켰다.

반복되는 그 말 속에 거칠게 팔딱거리던 맥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들썩거리던 어깨도 진정되었다.

“그러니까.”

로젤린의 시선을 마주하며, 프레데릭은 낮게 속삭였다.

“네가 왜 살아남은 걸 부정하는지 나에게 말해 줄 수 있을까?”

“…….”

침묵만이 그에게 대답했다. 프레데릭은 참을성 있게 인내했다.

무겁게 깔린 정적 위로 두 사람의 숨소리가 내려앉았다.

타다닥탁탁. 장작불이 타며 불씨가 튀는 소리가 덧씌워졌다. 바람 소리가 단단히 닫힌 창문을 후려치며 덜컹거렸다. 로젤린이 깨어났다는 전갈을 듣고 간단한 요깃거리를 가지고 온 하녀가 열리지 않는 문밖에서 기다리다 돌아가는 발소리가 어렴풋하게 울렸다. 문밖에서 왔다 갔다 서성거리는 동료 기사들의 발소리도 있었다.

침묵, 침묵, 침묵. 입술이 한 차례 달싹거렸다. 힘겹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가, 되삼켜졌다. 침묵이 이어졌다. 로젤린의 숨소리가 커졌다. 쿵쿵쿵. 그녀의 심장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로젤린이 입을 열었다.

“돌아가신 제 아버지는 카를 4세 폐하의 두 번째 황후와 클레타트 후작님을 모시던 기사였습니다…….”

겹겹이 쌓여 가던 침묵 사이로 그녀가 홀로 품어 온 10년의 망집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프레데릭은 깊이 탄식했다. 자신은 얼마나 오만하고 그릇된 판단을 하였단 말인가. 그녀가 품은 마음과 그녀의 긴 고통을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감히, 그녀의 감정을 멋대로 단정했다.

클레타트 후작에 관한 진실을 알려 주면 로젤린이 힘겨워 하리라 판단했다. 당장 성취하지 못하는 복수로 인해 괴로우리라 판단했다. 로젤린을 지켜 주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틀렸다.

오만한 생각이었다. 그녀를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녀를 지키겠다며 오만한 생각을 했다. 그녀를 진정으로 위했다면, 그녀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 진실로부터 격리시켜서는 안 되었다.

로젤린은 그가 품에 안아 아끼며 풍파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화초가 아니었다. 진실을 알고 분노하고 원망하고 애통해하는 건 그의 판단이 아니라 로젤린의 몫으로 넘겨주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가 진작 말했다면. 로젤린이 진실을 알았다면. 그녀는. 그 불구덩이 속에서.

“……로젤린.”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무턱대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10년 동안 홀로 속으로 삭여 왔던 시간을 힘겹게 풀어낸 그녀는 몹시 지친 기색이었다.

“네가 메이어 남작가의 생존자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말해 주었어야 하는 일이었는데, 미안하다. 지금 사실을 알게 되면 네가…… 아니, 변명은 하지 않으마. 말하지 않은 내 탓이야.”

“……사실이라니요?”

또다시 로젤린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프레데릭은 감히 그녀의 손을 잡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는 손을 풀고 주먹을 세게 쥐었다. 손톱 끝이 손바닥 살을 파고들었다. 이 정도의 아픔은, 그녀의 고통에 비하면 참으로 하찮다.

“메이어 남작은, 네 아버지는 후작을 배신한 게 아니야.”

차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프레데릭은 깊이 고개를 숙여 시선을 떨구었다.

“날 신뢰하지 않을 거라 여기지만 이 말만은 믿어다오.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을 몰래 목격한 사람이 있었어. 메이어 남작은 그릇된 주인을 섬기었을지언정 끝까지 충성스러운 기사였다.”

10년 전의 그날 밤. 메이어 남작의 큰아들인 마틴을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이혼한 전처인 케이트였다.

약속하지 않은 만남은 클레타트 후작의 은밀한 방문과 시간이 겹쳤다.

메이어 남작이었다면 다른 핑계를 대고 손님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마틴은 달랐다. 마틴은 불길한 무엇을 예감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케이트를 후작을 맞은 응접실 안쪽의 비밀 공간에 숨겼다. 그곳에서 그녀는 목격했다.

- 자네에게 부탁하는 내 마음도 찢어질 것처럼 고통스럽네. 하지만 일을 수습할 방도가 없어. 황제가 너무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으니…….

클레타트 후작은 무척이나 괴롭게 탄식했다. 마틴의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메이어 남작의 얼굴을 보고 조용히 침묵했다. 메이어 남작의 표정은 고요했다.

마치 후작이 어떤 말을 할지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케이트는 후에 회상했다.

- 날 위해 죽어 주게.

마틴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메이어 남작은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 알겠습니다.

- 자네가 날 속이고 자금을 횡령했다고 위장하면 나와 연결될 고리가 끊어질 테니까.

- 알겠습니다.

날 위해서 죽으라고, 불명예와 누명을 뒤집어쓰고 자살하라는 명령에도 메이어 남작은 담담했다. 마틴은 크게 당황하였으나 두 사람의 대화를 막지 못했다. 케이트는 비명이 새어 나가지 않게 입을 꽉 틀어막아야 했다.

- 자네와 같은 충직한 기사를 이렇게 보내야 하다니…….

후작은 남작의 손을 그러모으며 애통해했다. 반발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마틴은 울분을 참았다. 마틴도, 케이트도, 메이어 남작의 성격을 잘 알았다. 그는 자신의 주군을 위해서라면 오욕의 길을 거부할 기사가 아니었다.

- 저 하나의 목숨으로 위험에서 벗어나실 수 있다면 싼 값이 아닙니까.

상황이 변한 건 그때였다.

후작이 부드럽게 미소하며 남작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 하나의 목숨이 아니지. 자네의 장남이 사업에 가장 깊게 개입해 있었는데 그가 사업을 몰랐다면 말이 되는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던 케이트는 후작의 말뜻을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마틴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즉시 그의 말을 이해한 사람은 남작이었다.

- 마틴까지 죽이시려는 겁니까!

- 아니지. 내가 어찌 나에게 충성하는 이들을 죽이겠는가. 자네 부자는 빚을 갚지 못해 자살을 한 걸세.

후작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기에 더욱 끔찍했다. 목숨과 명예를 아까워하지 않고 후작에게 충성하는 남작이었으나 아들의 생명은 달랐다.

- 마틴! 당장 밖으로 도망쳐!!

다급히 외쳤으나 이미 늦었다. 후작의 부하들은 문과 창을 봉쇄하고, 도망치려는 마틴을 제압했다. 남작은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 제 목숨을 요구하신다면 기꺼이 바칠 것입니다! 지금 당장에라도 증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틴은 안 됩니다, 제발!

- 무엇이 안 되는가.

후작이 더욱 은근하게 속닥거렸다.

- 나는 그저 모든 위험요소를 완벽하게 제거하고 싶을 뿐이네.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자네 아들을 남겨 둔다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약을 안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자네가 진정 나에게 충성하는 기사라면 당연히 이해해 주리라 믿네.

절망적인 한마디가 떨어졌다. 후작의 작은 웃음소리가 섞였다.

- 자네는 나의 기사가 아닌가.

그 후의 일을 케이트는 명확히 바라보지 못했다. 비밀 공간에 한껏 웅크리고 입을 틀어막은 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응접실과 비밀 공간을 가로막은 나무 벽 너머에서 몇 마디의 외침과 비명이 들렸다. 후작의 앞에서 기어이 칼을 뽑은 남작이 제압당하고, 마틴은 긴 끈으로 목이 졸려 죽었다. 애통하게 절규하는 남작의 목에 끈이 걸렸다.

부하들이 끈을 조이기 직전, 후작이 관대하게 말했다.

- 자네가 그동안 나에게 바친 충성을 생각하여 막내딸은 살려 주겠네.

둘째 아들마저 죽이겠다는 선언에 남작은 마지막으로 힘을 쥐어짰으나 끈은 사정없이 조여들었다.

최후의 발버둥과 비명이 잦아들자 후작의 부하는 두 사람의 시체를 천장에 걸어 자살로 위장했다. 미리 위조하여 가지고 왔던 남작의 유언장이 시체의 밑에 떨어졌다.

케이트는 기절했다.

그것이 그날의 진실이었다.

프레데릭은 10년 전, 이것으로 판세를 뒤집기란 무리라고 판단하여 카를과 묻어 두었던 케이트의 증언을 모두 밝혔다.

“증거가 없었으니 후작이 위증했다고 주장하면 오히려 상황이 악화될 거라 여겼다. 후일을 기약하여 일단은 묻어 두었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해도 하찮은 변명이 될 것 같았다. 프레데릭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로젤린이 어떠한 비난을 해도 좋았다. 아니, 그녀가 비난해 주기를 바랐다. 차라리 자신에게 모든 원망을 쏟아부어 주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오빠는…….”

로젤린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배신한 게 아니라, 명예를 더럽힌 게 아니라…… 그런데 나는, 하나도 모르고, 오히려…… 오히려……!”

아연실색하여 더듬거리던 중얼거림이 차츰 커지며 기어이 울부짖음이 되었다. 그녀가 홀로 10년 동안 삭여 왔던 족쇄와 의무와 망집이 오열이 되어 터졌다.

“죄송해요, 아버지. 죄송해요, 오빠…….”

창자를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듯한 그녀의 오열은 절규와도 같았다.

긴긴 시간 그녀를 구속하였던 거짓의 껍질이 깨어지고, 비로소 드러나게 된 진실에 로젤린은 오열했다. 불명예로 더럽혀진 채 죽음 속에서 고독하였을 아버지와 오빠의 슬픔을, 그들을 믿지 못하고 때로 원망하였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로젤린은 오열했다.

끝내 그녀가 다시 의식을 잃고 쓰러질 때까지, 프레데릭은 그녀의 오열을 받아 삼키며 묵묵히 옆에 지켜 주었다.

* * *

아주 옛날의 꿈을 꾸었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무렵의 꿈이었다.

먼 외국에서 왕녀를 섬기기 위해 온 어머니는 필라헨어에 서툴렀다. 의사소통은 그럭저럭 가능하였지만 흥분하면 고향인 오스완어가 튀어나왔다. 오스완어는 거의 모르는 로젤린은 어머니가 빠르게 오스완어를 내뱉을 때면 멀뚱멀뚱 바라보곤 했다.

어머니가 필라헨어에 서툰 이유 중의 하나는 아버지와 큰오빠가 오스완어를 배운 탓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가끔 들었다.

그날도 어린 로젤린은 흥분하여 오스완어로 떠드는 어머니를 진정시키는 아버지의 오스완어와 한마디씩 거드는 큰오빠의 오스완어를 들었다. 듣기만 했지 이해하는 건 아니었다. 오스완어를 모르는 건 작은오빠도 마찬가지였다.

- 작은오빠는 왜 오스완어를 안 배웠어?

- 머리가 나빠서. 그러는 너는?

- 물어보면 큰오빠가 다 통역해 주잖아.

공부에 영 자신이 없는 건 로젤린도 마찬가지였다. 오스완어 교재를 펼치면 까만 건 글씨이고 흰 건 종이란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나마 오스완어는 알파벳과 어순이 필라헨어와 비슷하여 배우기 쉬운 언어라던데 다른 외국어는 얼마나 어려운 건지.

- 그래도 역시 오스완어는 배워야 할 것 같아.

- 오, 의욕이 넘치는데? 이 오빠도 응원해 주지.

본인은 일찌감치 공부를 포기한 크리스토퍼가 히죽거리며 로젤린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 씨이, 머리 헝클어져.

로젤린이 얼굴을 찌푸리며 크리스토퍼의 팔을 툭 쳐 냈다.

잠깐 한담을 나누는 사이에 어머니는 좀 진정했는지 의자에 앉았다. 다혈질인 로젤린의 성격은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 아버지가 낮은 목소리로 달래며 달콤한 과일주스를 따라 주었다.

어머니의 모국어로 어머니와 대화하는 아버지는 왠지 로맨틱하다. 로젤린은 볼을 살짝 붉히며 과일주스를 마셨다.

- 내일부터는 꼭 오스완어를 배워야지. 그리고 어머니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줄 거야.

오늘도 로젤린은 결심했다. 내일부터 배우고 어머니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거란 결심만 몇 달째 계속되고 있다는 건 모른 척했다.

사랑한다는 말이야 필라헨어로 해도 당연히 어머니가 알아듣지만, 늘 쓰고 있는 모국어로 하는 건 왠지 쑥스럽다. 낯선 언어인 외국어로 하면 덜 쑥스럽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이유를 들은 크리스토퍼는 신나게 웃다가 로젤린에게 옆구리를 퍽 맞았다.

끝내 결심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원히 가족의 곁을 떠났다. 로젤린은 사랑한다는 그 쉬운 한 마디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이건 꿈이야.

온 가족이 화목하게 모여 있으므로 더욱 확실한 꿈.

꿈이라는 걸 자각한 꿈속의 로젤린은 마시던 과일 주스를 놓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 엄마, 사랑해!

난데없이 던져진 딸의 오스완어에 놀란 표정을 짓던 어머니는 곧 빙그레 웃었다.

- 엄마도 로젤린을 사랑해.

아버지는 흐뭇하게 미소했고 큰오빠는 언제 오스완어를 배웠냐며 기특해했다. 작은오빠는 영문을 모르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이 우스워 꿈속의 로젤린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다섯 명의 가족이 마지막으로 행복하였던 꿈.

어쩌면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꿈을 되새기며 로젤린은 눈을 떴다. 밤새 흘린 눈물로 베개가 축축하고 눈가가 따가웠다.

밤이 깊었다.

프레데릭은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서류를 치웠다. 한숨을 쉬며 일어나 창문을 바라보았다. 로젤린이 머무르고 있는 숙소의 건물이 보이지만 그녀의 방까지 구분이 되지는 않는다.

로젤린은 한 번 의식을 되찾았다가 다시 쓰러졌다. 급히 달려온 의사가 기력을 잃고 지쳐서 잠이 든 것뿐이니 안심하라고 진단했다. 깨어날 때까지 옆에 있어 주고 싶었지만 조용히 잘 수 있도록 놔두는 게 좋다는 말에 물러나왔다.

그 후로 몇 시간이 지났지만 로젤린으로부터는 소식이 없었다. 자고 있는 걸까. 아님 깨어났는데도 피하고 있는 걸까.

‘어쩔 수 없지.’

사실을 알면서도 숨긴 건 자신이다. 로젤린이 화를 낸다고 해도 변명할 말은 없다. 프레데릭은 어둠에 젖은 숙소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노크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해가 뜰 때까지 서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전하, 메이어입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하지만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드, 들어와.”

한심하게도 목소리가 떨렸다. 프레데릭은 서둘러 창문에서 떨어지고 커튼을 쳤다. 불이 꺼지지 않은 집무실로 로젤린이 조용히 들어왔다.

며칠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느라 얼굴이 수척해졌다. 눈가도 약간 발긋했다.

접객용의 둥근 테이블에 그녀가 앉도록 한 프레데릭은 옆을 서성거렸다.

“배, 배고프지? 하녀를 불러서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가져오게, 아니 내가 주방에 내려갔다 오마.”

“괜찮습니다. 씻을 물을 가지고 온 하녀에게 요기할 음식도 받았습니다.”

씻고 식사까지 마친 후 온 모양이다. 로젤린의 앞머리칼이 조금 젖어 있는 게 그제야 프레데릭의 눈에도 보였다.

프레데릭은 어색하게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의자의 다리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기이하리만큼 컸다.

“몸은 괜찮나? 한동안 누워 있어서 근력을 회복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의사에게 들었다.”

“검투사로 있을 때에는 큰 부상으로 앓던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더 오래 침대에서 꼼짝 못하고 있었던 적도 있으니 재활 훈련을 어떻게 하면 되는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다행이야.”

나오는 대로 얘기하던 프레데릭은 뒤늦게 실수를 깨달았다.

“네가 다친 적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뜻은 아니었어. 그러니까, 나는 네가 재활 훈련을 알고 있는 게, 아니 애초에 재활 훈련도 네가 다치지 않았다면 몰랐을 내용이긴 한데, 그래도…….”

말을 하면 할수록 꼬였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풉.”

당황하여 더듬거리는 프레데릭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로젤린이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프레데릭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귓불이 붉어진 게 느껴진다.

“어떤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로젤린의 표정은 차분했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가 끝내 오열하였던 몇 시간 전의 모습을 프레데릭은 기억했다. 마음의 정리를 할 수 있었던 걸까. 그는 로젤린의 차분한 표정을 오래 바라보지 못했다.

‘넌 역시 강하구나.’

무너져 내렸던 게 거짓으로 여겨질 만큼 마음을 단단히 갈무리한 그녀의 강인함에 감탄했다. 진정으로 빛나는 그녀의 가치는 바로 이 곧고 단단한 마음일 것이다. 프레데릭은 평생 도피만 하였던 자신의 무력한 과거를 돌아보았다.

자신과는 대조적인 로젤린의 빛남. 주군과 기사라는 관계가 아니었어도, 결국 로젤린에게 반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로젤린.”

“전하.”

동시에 두 마디의 부름이 들렸다. 하나로 겹쳐진 목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한 바퀴 돌았다.

“먼저 얘기해라.”

“아닙니다. 전하께서 먼저 하십시오.”

사양하는 말이 몇 마디 오가고, 프레데릭이 먼저 입술을 열었다.

“내가 널 속였다. 클레타트 후작이 네 가문에 어떤 짓을 했는지 말하지 않고 속였어. 너에게 힐난과 원망을 받는 게 당연해.”

“…….”

로젤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린 손을 가만히 깍지 꼈을 뿐이었다. 굳은살이 단단하고 잔흉터가 많은 투박한 손이다. 동시에 단련된 검사의 손이기도 하다.

거기에 로젤린의 과거가 있었다. 행복하고 풍요롭게 살던 귀족 소녀가 검투사를 거쳐 기사가 되기까지의 시간이 각인되어 있다.

잠시 홀린 듯이 로젤린의 손을 바라보았던 프레데릭은 곧 낮은 한숨을 흘렸다.

“그러니 이런 부탁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널 한 번 기만한 날 믿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

“로젤린.”

침묵을 이어 가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오래 보지 못하고 그녀의 손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내 곁에 있어다오.”

너를 좋아한다든가, 사랑한다든가, 마음을 받아 달라든가 따위의 말은 하지 못했다. 그녀를 속인 자신에게 그럴 염치가 없다는 건 누구보다 프레데릭이 잘 알았다.

감히 요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곁에 남아 주기를 원했다.

프레데릭은 평생을 마지못하여 살았다. 죽을 때까지도 그러할 것이라 여겼다. 죽음 앞에서도 쉽게 포기하였던 삶이다.

13살의 그날 이후, 그의 삶에 자의란 존재하지 않았다.

- 내 아들아, 너만이 나의 유일한 후계자다.

- 프레데릭, 너는 대공 전하의 아들로 살거라.

그 두 마디가 그의 남은 평생을 지배했다. 온전히 따르지도 못하고, 온전히 거부하지도 못했다.

적당히 살자고 생각했다. 대공으로서 최소한의 관심만 보이며 적당히, 하찮게 시간을 죽이면서 적당히. 원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 있으니 마리안 부인에게 섣불리 당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애착도 없고 애정도 없고 무의미한 하루하루를 죽여 가고 있던 공허한 삶이었다.

그곳에 로젤린이 들어왔다.

‘전하.’

그에게 말하고, 그를 보며 웃고, 그를 위해 검을 드는 그의 기사.

이미 완전히 사라졌으리라 여겼던 삶의 욕구와 집착이 그녀로 인해 일깨워졌을 때, 프레데릭은 절실히 깨달았다.

그녀에게 애정을 품었던 마음만을 자각했을 때와는 현저히 다른 전율이 그를 관통했다. 이것은 단순한 애정이 아니다. 남녀 간의 연정이라는 말로는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 한 번 일깨워진 삶은 두 번 다시 과거의 허무함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녀가 곧 그의 삶이고, 그가 살아갈 이유였다.

그러니 프레데릭은 감히 원했다.

그 형태가 무엇이든 좋으니 자신의 곁에 있어 주기를. 비난과 원망도 그녀가 주는 것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깍지를 끼고 있던 로젤린의 손가락이 풀렸다. 손가락 끝을 서로 맞대기도 하고,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기도 하던 손가락이 다시 깍지를 꼈다.

“전하.”

한참 뒤 로젤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오직 기사로서 주인을 위해 죽기를 바라며 전하의 기사가 되었습니다. 전하가 경멸하시는 기사의 모습임을 알고서도 제 이기심을 위해 전하를 이용했습니다. 아버지와 작은오빠가 기사로서 더없이 불명예스럽게 이름을 더럽혔으니 그 죄의 대가는 모두 제가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 로젤린 메이어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기사 로젤린 메이어로 죽기를 바랐습니다.”

“넌…….”

프레데릭은 달싹거리던 입술을 다물었다. 진실을 숨기지 않고 말해 주었어야 했다. 그녀가 괴로움을 한시라도 일찍 덜게 해 주었어야 했다. 후회는 언제나 늦다. 쓰디쓴 후회의 맛이 목구멍 안쪽으로 꿀꺽 넘어갔다.

로젤린의 목소리는 흥분에 차지도 않았고 절망에 젖지도 않았다. 담담히 사실을 구술하듯이 그녀는 감정을 싣지 않고 말했다. 마치 타인의 인생을 얘기하는 것처럼.

“전하, 저는…….”

그러다 한숨이 섞였다. 타인처럼 얘기하던 목소리에 처음으로 감정이 실렸다. 로젤린이 자조적으로 말했다.

“전하의 기사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아니야.”

대답은 반사적이었다. 프레데릭은 비로소 로젤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주인을 지키는 게 기사의 임무이자 명예라면 넌 이미 훌륭한 기사야. 네가 나를 살아가게 한다, 로젤린.”

“저는 전하를 이용했습니다.”

“알아. 마음껏 이용하라고 했잖아.”

“전하께서 경멸하신다는 걸 알고도요.”

로젤린의 목소리에 차츰 감정이 뚜렷해졌다. 반대로 프레데릭의 목소리는 차츰 차분해졌다. 오히려 이것이 좋았다. 그녀가 처음으로 진솔하게 자신의 감정을 부딪치는 이 순간이.

“그러니 더욱 마음껏 이용해도 좋아. 그때도 말했지만, 너에게 이용당한다는 건 환영이야.”

과거에 하였던 대답과 같지만 이제는 다른 의미를 담은 대답을 반복했다.

“앞으로도 이용해.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은 나를 신뢰하지 못하겠지만 후작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용해 다오. 너 개인이 후작에게 복수하는 방법보다 날 이용하는 방법이 좀 더 가능성이 클 테니까.”

오직 복수를 위해 자신의 곁에 머무른다 해도 좋았다. 그것이 그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이라면.

허공에서 로젤린과 시선이 얽혔다. 프레데릭은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흔들리던 눈동자는 곧 로젤린의 손바닥 아래로 사라졌다.

손바닥에 얼굴을 깊게 파묻은 로젤린이 한탄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당신이라는 분은 정말이지…….”

손바닥에 눌린 목소리가 웅얼웅얼 울렸다. 프레데릭은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복수이든 무엇이든 자신의 곁에 있어 달라는 부탁을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이다. 신뢰는 쌓기 어렵지만 한 번 무너진 신뢰를 쌓기는 더 어렵다.

“기사가 될 자격을 상실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얼굴을 여전히 가린 채로 로젤린이 속삭이듯이 말했다.

“제가 당신을 좋아하고 있거든요.”

프레데릭의 사고가 정지했다.

침묵이 흘렀다.

프레데릭이 가까스로 입술을 연 건 집무실 안에 숨소리만이 가득 찰 때였다. 그는 의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오히려 반문했다.

“……왜?”

“예?”

로젤린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뺨이 발그레한 건 벽난로의 열기 때문일 거라고 프레데릭은 믿었다.

“그러니까, 왜?”

“예?”

영문 모를 질문에, 영문 모를 대답만이 이어졌다. 이래서는 제대로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프레데릭은 나름대로 대화를 이어 가려 애썼다.

“네가 날 좋아하는 이유가 뭐지?”

불신에 차 있는 프레데릭의 질문은 오히려 따지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약간 붉어졌던 로젤린의 얼굴이 침착함을 찾았다. 정확한 표현으로는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구체적인 이유를 말해야 합니까?”

“그건 아니지만.”

뒤늦게 실언을 깨달은 프레데릭은 뒷머리를 문질렀다.

“나를 좋아할 이유가 없잖아. 아하, 그러니까 이런 뜻이었군. 맥주를 좋아하고 안주로는 훈제된 오리고기가 좋다고 할 때와 같은 의미의 ‘좋다.’라는 의미. 이해했다.”

혼자 납득한 프레데릭과는 달리 로젤린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제가 어린앱니까?”

“……아냐?”

“당연히 아닙니다.”

딱 부러지는 로젤린의 말에 프레데릭은 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좋아하는 건 맞고, 단순한 사물을 좋아한다는 의미도 아니라면, 남은 건 하나뿐인데.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즉 보편적으로 남자와 여자 사이의 불꽃이 튀고 뜨거운 눈빛이 오가며 전생부터 이어진 운명을 전율적으로 느낀다는 의미의 ‘좋다.’인가?”

“그렇게 거창하지는 않습니다.”

프레데릭이 장황해지니 로젤린은 단호해졌다.

그녀는 불신으로 가득한 프레데릭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왠지 피곤하다.

“제가 당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말씀을 드린 겁니다.”

두 번이나 연이어 ‘좋아한다.’라는 고백을 들었다. 프레데릭은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는 충격을 맛보았다.

그는 무겁게 중얼거렸다.

“……꿈인가?”

“꿈이길 바라십니까?”

“당연히 아니지만 너무 현실성이 없잖아.”

심각한 표정으로 프레데릭이 말했다.

“로젤린, 꿈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게 내 뺨을 한 대 때려다오.”

로젤린은 잠자코 그의 뺨을 톡 건드렸다. 프레데릭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맞으면 꿈에서 깰 정도로 세게 때려야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뻐억, 하는 소리와 “억!”하는 비명이 났다. 로젤린은 프레데릭의 왼쪽 뺨을 후려갈겨 벌겋게 된 손등을 문질렀다.

“이제 믿으시겠어요?”

뺨까지 맞았음에도 프레데릭이 멍한 표정으로 피가 나오는 입술을 닦았다.

“……아프잖아. 피맛도 나고.”

“현실이니까요.”

“현실인가…….”

입술에서 터진 피가 묻은 손등을 한 번 내려다본 프레데릭이 로젤린에게 다시 말했다.

“로젤린, 한 번만 더 말해 줘.”

로젤린의 검은 눈동자가 프레데릭을 보았다. 여전히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프레데릭의 모습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쳤다.

이번에는 왠지 웃음이 나와서 로젤린은 짧게 실소했다. 처음에는 발긋하게 붉어졌다가, 그다음에는 어이없어졌다가, 이제는 웃음이 나온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하나의 진실을 로젤린은 알고 있었다.

“제가 당신을 좋아합니다.”

세 번의 고백. 하나의 마음.

여러 가지 상상을 했다. 기사가 주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에 트라우마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목적만을 내세웠다. 프레데릭에게 경멸을 받아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용서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화를 내며 그녀를 내칠지도 모른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받아들여야 한다고 다짐했다.

입을 다물고 그를 속이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자신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프레데릭은 알지 못한다.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태연히 곁에 남을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 그의 마음에 대한 보답이었다. 또한 로젤린의 마음이었다.

로젤린은 다시 한 번 그에게 속삭였다.

“아주 예전부터요.”

통증과 혼란으로 찡그리고 있던 프레데릭의 표정이 창백하게 희어졌다가, 이내 붉어졌다. 그러고는 아래로 떨구어졌다.

“……로젤린.”

그 한마디만이 숙인 고개에서 억눌렸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얼굴도 붉어졌을 게 분명하니까. 많은 상상을 하였지만 프레데릭이 그녀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 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역시 꿈이 아닐까. 믿을 수가 없어…….”

로젤린은 희미하게 미소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득한 한숨을 뱉는 프레데릭의 무릎이 서서히 굽혀졌다. 의자에 앉은 로젤린의 무릎에 기대듯이 몸을 낮추어 앉은 그가 천천히 로젤린의 손을 맞잡았다. 느린 호흡이 그녀의 손끝에 조심스럽게 머물렀다.

간질간질하고, 따뜻한 감각이 손가락 끝부터 적셔든다. 손끝이 긴장했다. 긴장된 떨림이 심장까지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손가락 끝에서, 손가락으로, 그리고 손등으로 느린 입맞춤이 떨어졌다. 붉은빛을 머금은 프레데릭의 눈동자가 서서히 올라왔다.

“네가 날 성추행해 줬으면 좋겠어.”

희미하게 떨리던 로젤린의 눈매가 동그랗게 되었다. 그리고 웃음이 터졌다. 그윽하게 낮게 내리깐 목소리로 속삭이는 게 이런 대사라니.

몹시 프레데릭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실례가 되는 걸까.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던 긴장감과 설렘은 깨졌지만 몹시 즐겁고 웃음이 나온다. 또한 기뻤다. 그와 자신의 관계가 변함없이 이어지게 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로젤린은 아래에 있는 프레데릭의 뺨을 살짝 눌렀다.

“성추행이 아니라 키스지요.”

“키스?”

프레데릭이 ‘키스’라는 단어를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키스가 되는 건가?”

“연인 사이에는 키스가 되는 게 아닙니까?”

“연…… 잠깐만. 한꺼번에 너무 많은 변화가 들어오니 정신이 없어. 이건 역시 꿈이로군.”

대단히 진지한 시선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난 꿈이라도 좋으니까 네가 성추행을 해 주길 바라.”

“키스할 겁니다.”

로젤린은 믿을 수 없는 달콤한 상황 앞에서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한 프레데릭의 양 뺨을 꼭 안고 허리를 숙였다.

두 번째 키스는 짧았다. 그의 입술과 숨결을 핥듯이 가볍게 머무른 입술이 떨어졌다. 멍하니 입술만 벌리고 있는 프레데릭을 내려다보며 짧은 실소를 터트린 로젤린은 다시 입술을 겹쳤다. 세 번째 키스였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조심히 혀를 넣었다. 굳어 있는 프레데릭을 달래듯이 혀끝으로 톡톡 두드리고 간질였다. 프레데릭이 급격히 숨을 들이켜는 기척이 났다.

굳어 있었던 게 거짓말처럼 프레데릭이 로젤린의 허리와 뺨을 와락 끌어당겼다. 서툴고 조심스러웠던 로젤린의 입맞춤과 상반되는 조급한 입맞춤이 밀려왔다. 키스, 키스, 키스.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겹쳐지고, 하나로 섞이고, 짧고 거친 숨을 뱉으며 떨어졌다가, 겹쳤다.

“젠장.”

프레데릭이 로젤린의 허리를 안은 채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지금 죽어도 좋아.”

“당신이 죽는 건 제가 싫습니다.”

그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속닥거리니 얼른 고개를 저었다.

“취소, 취소하마. 오래오래 살아야지. 너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갈 거야.”

“일도 열심히 하시고요?”

“당연하지. 제국에서 가장 유능한 영주가 되어 주겠어.”

“보좌관님이 제일 좋아하시겠는데요.”

별 뜻 없이 라울을 언급하자, 프레데릭이 고개를 올렸다.

“이 상황에 다른 남자 이야기는 하지 마라.”

빠르게 내뱉어지는 말은 왠지 부루퉁한 느낌이다. 그녀보다 몇 살이나 연상인데, 묘하게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을 참으려 로젤린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키스해 줘.”

이어지는 프레데릭의 말은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을 보다 강하게 만들었다. 반면에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눈매와 그녀의 허리에 매달리듯이 강하게 끌어안은 손은 원숙한 남자의 느낌이다.

‘뭐, 어때. 어느 쪽이든 좋은걸.’

어느 쪽이든 프레데릭이고, 어느 쪽이든 그의 진심이다.

로젤린은 그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얽으며 몇 번째일지 모르는 키스를 떨어트렸다.

“하아.”

몽롱한 한숨을 흘리며 프레데릭은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어젯밤, 정확히는 몇 시간 전에 바로 이곳에서 로젤린과 키스를 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 저 때문에 심려가 크셨을 텐데 쉬십시오.

밤새도록 로젤린을 안으며 키스하고 싶었는데, 그녀는 배려가 있는 건지 매정한 건지 알 수가 없는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붙잡고 싶었지만 참았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건강을 회복해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 로젤린이었으니.

허전한 마음은 다잡았지만 잠을 잘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프레데릭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로젤린의 키스와 향기와 고백을 하던 목소리가 그를 달콤하게 휘감았다. 결국 해가 떴다.

‘꿈인가.’

그녀가 변함없이 자신의 곁에 머무는 것으로도 모자라, 연인의 키스까지 하다니.

멍하게 앉아 있던 프레데릭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집무실을 나왔다. 대강 로젤린이 아침 식사도 하고 옷을 갈아입었을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메이어 기사님은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한달음에 로젤린의 방까지 갔지만 방을 정돈하는 하녀만 만났다.

“그녀가 식사는 하였나?”

“예. 아직 속이 회복되지 않으셨을 것 같아서 유동식을 드렸는데 깨끗이 비우시고, 따로 샌드위치까지 들고 나가셨습니다.”

좋은 소식이었다. 하녀는 로젤린이 어디로 갔는지 말하려 했지만 사양하고 등을 돌렸다. 어젯밤의 여운을 간직한 채, 로젤린이 있을 곳을 직접 찾아가는 게 설레고 즐거울 거란 느낌이었다. 어디에 있을지 짐작도 갔다.

짐작은 맞았다. 프레데릭은 기사 훈련장에서 로젤린을 찾았다.

기사단 본부의 연무장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훈련장이다. 바로 입구에서도 한 곳에 몰려선 기사들의 대화가 들렸다.

“이제 진짜 괜찮냐?”

“하마터면 죽는 줄 알았다, 자식아.”

동료 기사들이 로젤린을 둘러싼 채 저마다 걱정과 축하를 건넸다. 로젤린이 쑥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끼쳐서 미안하다.”

맥스가 그녀의 어깨를 탁 쳤다.

“미안할 게 뭐가 있냐. 무사히 깨어나서 정말 잘됐다. 나보다 잘생긴 녀석이 나보다 일찍 죽는 건 용서 못한다고. 죽으려면 내가 더 잘생겼다는 걸 인정하고 죽어.”

“넌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

다른 기사가 맥스를 구박했다. 왁자지껄한 대화와 웃음이 기사들 사이에 넘쳤다. 대장이었던 사무엘이 배신하고 동료의 반수가 죽은 후 처음으로 갖는 활기찬 분위기였다. 로젤린도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상당히 좋은 분위기를 깨는 건 미안하지만 프레데릭도 급했다. 헛기침을 한 차례 하자 웅성거리던 기사들이 돌아보았다.

“앗, 전하! 좋은 아침입니다. 근데 아침부터 여기는 웬일이신가요?”

“안녕하십니까!”

프레데릭은 기사들의 인사를 받아 주며 로젤린에게 손짓했다.

“내 호위기사를 잠시 빌려 가마.”

‘내’라는 말을 강하게 강조했지만 예리하게 알아들은 기사들은 없었다. 로젤린만 알아들었지만 웃음을 삼키고 모르는 척 프레데릭을 따라 훈련장을 나갔다.

건물 뒤편으로 오자마자 프레데릭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바람에 헝클어진 뒷머리카락과 며칠간 의식 없이 앓아누워 있느라 약간 축난 듯한 어깨와 등허리를 더듬어 그녀가 자신의 품에 있다는 걸 확인했다. 로젤린이 맞았다. 현실도 맞았다.

“진짜로군…….”

야릇한 한숨을 쉬면서 이마에 키스하는 프레데릭에게 가만히 안긴 로젤린이 미소했다.

“편하게 더 쉬지 않고?”

“누워 있으면 근력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전하의 기사로서 한시라도 빨리 회복해야지요. 무리하게 움직이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로젤린은 문득 깨달은 것처럼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앞으로도 전하의 기사로서 남는 걸 허락해 주신다면요.”

“이번에야말로 남녀 관계는 병행되는 거겠지?”

매우 진지한 프레데릭의 물음에 로젤린은 가벼운 입맞춤으로 대답해 주었다. 프레데릭은 당장에 그녀를 격하게 끌어안고 뜨거운 키스를 퍼붓고 싶었지만 그녀가 몸이 안 좋다는 걸 되새기며 간신히 참았다.

“대신 정정해야 할 부분이 있다.”

“뭔가요?”

“자기야.”

“……?”

영문을 몰라 하는 그녀에게 프레데릭이 심각한 어조로 반복했다.

“비슷한 의미로 나의 햇살이라든가 나의 천사라든가 나의 사랑이라는 단어도 있지.”

눈썹을 깜빡거리며 프레데릭의 말을 곱씹어 보던 로젤린은 한 박자 늦게 이해했다. 즉, ‘전하’라는 존칭어로 부르지 말라는 뜻인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은 이해했는데, 어째서 예시가 이런 걸까.

로젤린은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프레데릭도 진지하게 내려다보았다.

“닭살 돋아서 싫은데요. 다른 지칭어는 없습니까?”

“나의 사랑스러운 하나뿐인 프레데릭.”

왠지 더 길어졌다.

로젤린은 단호하게 말했다.

“프레데릭.”

아쉬운 표정이 되긴 했지만 프레데릭은 금방 회복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입술을 열었다.

“나의 사…….”

“나의 사랑스러운 하나뿐인 로젤린이라고는 부르지 말아 주세요.”

“자…….”

“자기야도 사양하고 싶습니다.”

“……로젤린.”

결국 프레데릭은 변한 게 없었다. 단숨에 의욕이 꺾였다. 그렇게 부끄럽고 남세스러운 단어인걸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센스를 돌이켜 보고 있는 그의 귓가에 로젤린이 “프레데릭.”하고 속닥였다. 의욕이 부활했다. 육성으로 못 부르게 하면 마음속으로 부르면 되지 않겠는가.

프레데릭은 로젤린이 듣는다면 팔뚝을 문지를 만큼 닭살 돋는 멘트를 속으로 불렀다. 로젤린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둘이 있을 때만요. 적어도 돌아가신 아버지와 오빠의 원수를 갚을 때까지는 온전히 전하의 기사로 있고자 합니다.”

낮게 깔리는 한마디는 그녀가 가진 또 하나의 진심이었다. 프레데릭은 로젤린을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당연히. 네 의사를 존중하마.”

로젤린은 이것 또한 자신의 이기적인 부탁이라는 걸 알았다.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복수의 그날까지 명확한 관계를 감추고 미루겠다는 부탁을 프레데릭은 선선히 받아들였다.

그가 주는 것이 너무나 많다.

대답에 섣부른 감사의 말은 필요 없었다. 로젤린은 다만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안 그래도 네가 회복하면 설명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너로서는 무척 언짢은 일이 될 테니 나에게 화를 내도 돼.”

프레데릭이 조심스럽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녀의 출신을 알게 된 카를과, 그가 퍼트린 소문과 연극이 하나씩 전해졌다. 로젤린은 입을 다물고 잠자코 그의 설명을 듣기만 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선동이다. 단숨에 후작을 무너트릴 추문은 되지 못하지만 그의 명성에 흠집을 내기엔 충분하지. 하나의 의혹이 생기면 다음 의혹으로 이어지기는 쉬워. 연쇄살인범이 후작과 관련이 있다는 의혹까지 불거지게 된다면 좋은 빌미가 된다.”

로젤린의 인지도와 인기에 기반을 둔 명확한 사실 하나를 먼저 터트린다. 그리고 이어 추측뿐인 소문을 덧붙인다.

의혹이 커지면 공개적으로 후작의 결백을 요구하며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갈 수 있는 빌미로 삼을 수 있었다. 제도 경비대에 체포되고도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마법사도 후작의 위치가 흔들린다면 실토하게 될 것이다.

설혹 실패하여 결정적인 수가 되지 못한다 하여도 황제에게 해가 되는 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건 널 이용한 거나 마찬가지야. 폐하가 일부러 네 조사를 하지 않을 거라 믿었던 내가 너무 안일했다. 내 잘못이야.”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을 마친 로젤린이 고개를 들었다. 차분히 가라앉은 시선에서 동요하는 기색은 없었다.

“많이 놀라긴 했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저희 가문의 일이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저 역시 바라는 바입니다.”

말을 이으며 그녀는 약간의 쓴웃음을 흘렸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오빠는 당신들의 사연이 연극 무대에까지 오른 걸 어떻게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깨끗하고 아름다운 복수는 없지 않습니까.”

스스로 더럽혀지는 걸 감수하겠다는 로젤린의 손을 프레데릭이 쥐었다.

“필요하다면 너도 얼마든지 날 이용해라.”

“그럼 당장 하나를 부탁해도 될까요?”

로젤린이 표정을 풀며 웃었다.

“기초 훈련을 도와주십시오. 그동안 몸이 많이 굳어서 몸부터 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 훈련, 그래. 훈련. 물론이지! 하루 종일 도와주마.”

“한두 시간만 도와주셔도 됩니다. 일하셔야지요.”

“레젠이 대공령과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사실 급히 할 일은 없어.”

잠도 못 자고 아침도 굶었지만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프레데릭은 즐겁게 그녀의 훈련에 동참했다.

기념비적인 첫 데이트는 건물 뒤에서의 재활 훈련이었다.

칼을 뽑은 무대 위의 배우가 격정적으로 외쳤다.

“나의 칼은 아버지의 피로 벼려졌고, 나의 심장은 어머니의 눈물로 채워졌으니! 오늘의 이 원한이 그대를 꿰뚫는 창이 되리라!”

관객석에서 탄식이 쏟아졌다. 배우는 더욱 열정적으로 복수를 다짐하였고 비극적인 과거사가 읊어질 때마다 관객들은 몰입했다.

오늘도 연극은 만원이었다. 주로 귀족이 이용하는 1층과, 평민이 이용하는 2층 전부 관객들로 빽빽하게 차 있었다.

프레데릭은 옆을 바라보았다. 후드를 깊이 눌러 써서 얼굴을 가린 로젤린의 시선이 무대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지인을 만날 가능성이 있는 1층 대신 2층의 좌석을 예매했다. 무대와 거리는 멀지만 연극을 관람하지 못할 위치는 아니다.

웅성거리며 모여 앉은 관객들이 숙덕거렸다.

“쯧, 자네도 아이리나 막델라히의 경기를 자주 보지 않았나?”

“빚 때문에 검투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런 사연이리라곤 전혀 몰랐지.”

연극의 내용은 상당히 각색되었다.

배경은 수백 년 전의 가상 왕국이고, 배우들이 맡은 역할은 전부 가명이었다. 표면적인 눈속임이나 다름없었다. 명칭과 이름만이 다를 뿐 로젤린의 외형적인 특색이나 사연은 그대로였다. 오히려 극적으로 치장되었다.

연극은 급히 계획되었다. 무대에 오른 초반에는 준비가 완벽히 갖춰지지 않아 평이 좋지 않았다. 하나 로젤린의 후원자인 카트린의 상단에서 풍족한 자금 지원을 받는 유명 극단의 배우들은 곧 명성을 회복했다. 근래 레젠을 가장 떠들썩하게 만드는 소식은 바로 이 연극이었다.

무대 위의 주역 배우가 교체되었다. 주인공 역할을 맡은 배우가 내려가고 악역을 맡은 배우가 올라왔다. 공작이라는 신분이었으나 그가 클레타트 후작을 모티브로 한 역할이라는 건 당연했다.

“쳐 죽여도 부족한 놈!”

연극에 몰입한 관객들이 야유를 보냈다. 악역이 무대로 올라오면 열정적인 관객이 이물질을 던지며 욕설을 퍼붓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로젤린의 사연을 각색한 이번 연극도 마찬가지였다. 며칠 전에는 흥분한 관객이 돌을 던져 배우가 큰 부상을 입을 뻔한 일도 있었다.

‘그만큼 호응이 좋다는 뜻이지만.’

프레데릭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원래 이 연극을 로젤린과 보러 올 계획은 아니었다. 자신의 과거가 허락도 없이 멋대로 각색되어 무대에 공연되고 있는 걸 보는 마음이 어디 즐겁겠는가. 그녀가 알지도 못하고 있던 사이에 그녀의 상처를 칼로 찢고 대중에게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는 것과 같았다.

각색의 내용이 어떠한지 카를에게서 대본을 받아 읽은 프레데릭은 로젤린이 보면 좋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먼저 관람을 제의한 건 로젤린이었다.

- 당사자이면서도 저는 진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제 눈으로 보고 확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괜찮겠나?

- 당신이 함께 가 주신다면 괜찮습니다.

그녀는 담담히 말했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연극을 보는 내내 로젤린은 침묵했다. 주인공의 행복한 과거가 묘사될 때는 웃음이, 비통한 과거가 전개될 때는 탄식이, 악역의 기세가 오를 때는 욕설이 사방에서 넘실거렸다.

이제 무대의 악역은 어리석게 죽은 자신의 기사를 비웃었다. 로젤린의 아버지다. 관객들의 야유와 아우성이 높아졌다. 가장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프레데릭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후드로 가려진 로젤린의 표정은 살필 수 없었다. 그러나 무릎 위에 단정히 놓여 있던 로젤린의 양 주먹이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말없이 그녀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힘을 주어 단단히 붙잡았다. 부들부들 떨리던 경련이 차츰 잦아들었다. 로젤린이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숨을 뱉었다.

연극이 끝날 때까지 로젤린이 동요하는 일은 없었다.

“마지막은 속이 시원했어! 공작이 비참하게 죽을 때는 함성이 저절로 나오더라니까.”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왕족 나리는 여전히 잘 먹고 잘 살겠지?”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난 건데 신년 축일 때 아이리나 막델라히가 결투를 한 적이 있었대. 그 결투에서 죽이려고 꾸민 수작이라고 하나 봐.”

“지금도 위험한 거 아닐까?”

“걱정이네. 소문으로는 연쇄살인마를 레젠에 푼 사람도 그 후작이라던데 연쇄살인마가 죽이러 가면 어쩌니.”

“쉿, 누가 들을지 몰라.”

관객들이 감상을 숙덕거리며 프레데릭과 로젤린을 지나쳤다. 로젤린은 관객석이 텅 비고 극단의 단원들이 무대를 정리하기 위해 나올 때까지 앉아 있었다.

“거기 손님! 다음 상영을 위해 준비해야 하니까 얼른 나가주십쇼!”

아래층에서 단원 한 명이 크게 외쳤다. 로젤린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레데릭도 그녀를 따라 극장을 나왔다.

연극은 연일 매진이었다. 다음 연극이 시작되기까지는 두어 시간의 공백이 있었지만 극장 밖에는 표를 사기 위해 대기하는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약간 멍하니 걷던 로젤린이 인파에 쓸려 비틀거렸다. 프레데릭은 잠자코 그녀의 어깨를 안은 채 인파를 헤쳐 나왔다.

극장 앞을 한참 지나자 거리의 인파는 그럭저럭 줄었다.

“바로 돌아갈까?”

여전히 후드를 눌러 쓰고 있는 로젤린이 고개를 저었다.

“머리를 식히고 싶습니다.”

낮게 잠겨 있긴 했지만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프레데릭은 로젤린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거리를 걸었다. 어젯밤에 눈이 내린 흔적이 거리의 곳곳에 남아 있었다.

이윽고 광장으로 나왔다. 한낮의 광장은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냄새가 물씬 풍겼다. 연극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의 틈으로 나오자 로젤린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담담하긴 했으나 어느 정도 긴장은 되었던 모양이다.

마침 근처의 벤치가 비어 있었다. 자리에 앉은 로젤린이 후드를 벗었다. 드러난 머리칼이 땀에 조금 젖어 있었다. 괜찮다고는 하였으나 역시 부담은 된 모양이다. 손수건을 건네주니 잠시 의아하게 보다가, 뒤늦게야 깨달은 얼굴로 받았다.

“한심한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로젤린이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프레데릭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네 입장이었으면 더 한심한 모습을 보였을걸. 화를 내면서 무대에 난입하는 바람에 두고두고 놀림감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짐짓 과장된 한탄에 로젤린이 겨우 얼굴을 풀며 짧게 미소했다.

광장은 시끌시끌했다. 사람들은 바쁘게 거리를 걷기도 했고, 노점상에서 흥정을 하기도 했으며, 공고가 붙은 게시판을 읽기도 했다.

엄마와 떨어진 어린아이 한 명이 벤치까지 쪼르르 다가와 로젤린의 다리를 잡고 방실거렸다.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데리러 와 웃으며 사과했다. 로젤린도 웃으면서 모녀에게 인사했다.

프레데릭이 실없이 중얼거렸다.

“귀엽군.”

“저 나이라면 엄청나게 사고도 치고 다니겠지만요.”

로젤린의 목소리도 한결 가벼웠다. 앉아서 숨을 돌리는 사이에 동요가 가라앉았다. 그녀는 손수건을 접어 품에 넣었다.

“참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는데 막상 연극을 보니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왜 10년 동안 진실을 모르고 까맣게 속고만 있었는지 너무 한심하기도 했고요……. 그날 숨어서 지켜봤던 사람이 케이트 언니라고 하셨지요?”

“맞아. 사건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전말을 알게 되었다.”

로젤린의 큰오빠 마틴은 아내 케이트와 이혼했다. 그녀의 친정이 황제파로 기울게 되면서 후작파인 메이어 남작가와 인연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 탓이었다. 애정이 남은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이혼한 두 사람은 이혼한 후에도 가끔 만났다.

그날 응접실에 숨어서 사건의 전말을 목격하였던 케이트는 충격에 시름시름 앓다가 부친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케이트의 아버지는 즉시 딸의 이야기를 황제에게 전했다.

“케이트 언니가 갑작스럽게 레젠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은 제가 검투사였을 때 들었습니다. 폐가 될까 봐 일부러 언니를 찾지 않았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언니를 만날 걸 그랬어요. 그렇다면 적어도…… 아버지와 오빠를 10년이나 오해한 채 원망하지 않았을 텐데…….”

마지막 목소리는 깊은 탄식에 젖어 있었다.

로젤린의 시선이 광장으로 향했다. 프레데릭도 시선을 옮겼다. 광장은 여전히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연극에서 공작은 광장으로 끌려나와 공개 처형을 당했다. 복수를 끝마친 주인공은 그녀를 믿으며 복수를 도와준 국왕과 결혼식을 올렸다. 프레데릭이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었다.

“사실은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지난 연회장에서 만났을 때도 그분은 과거를 안타까워하며 저를 대해 주셨거든요. 그게 전부 연기였다니……. 아버지와 오빠를 죽인 것과 같은 목소리로 저를 동정하였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자신에게 대화를 건네며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는 것 같았기에 프레데릭은 말없이 경청했다.

“복수라는 걸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는 건지도요.”

로젤린이 뭔가를 원하기라도 하는 듯한 얼굴로 프레데릭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진실이 그녀를 혼란하게 하는 것 같았다.

복수. 그 하나의 단어를 프레데릭은 입속으로 굴려 보았다. 혼란스러워하는 로젤린에게 어떤 말을 하면 좋을까.

“지금은 네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면 되지 않을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요?”

멍한 목소리로 로젤린이 프레데릭의 말을 받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후작과 부딪치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너도 후작의 파멸이라는 같은 결론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조급하게 마음먹지는 마라. 섣부른 판단은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해.”

“그런가요…….”

“뭐, 마지막까지 정리를 하지 못하더라도 후작을 결박시켜 앞에 꿇어앉히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 수도 있지.”

프레데릭은 짐짓 가벼운 어조로 마무리했다.

“결정권은 네가 가질 수 있도록 반드시 폐하와 담판을 지을 테니까. 네게 빚진 게 있으니 폐하도 세게는 못 나올 거다.”

무겁게 가라앉았던 표정을 거두며 로젤린도 미소했다.

“제가 사사로이 처단하는 것보다는 법의 공정한 처벌을 받아 아버지와 오빠의 명예를 정당하게 회복할 수 있는 게 좋습니다.”

“바로 그거야. 지금처럼 차근차근 생각을 하는 거라고. 키스해도 될까?”

뜬금없이 던진 말에 그만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프레데릭이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러 안으며 뺨에 입을 맞췄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연쇄살인마 건도 그렇고, 후작의 행보가 작년부터 무리하게 커진 감이 있어.”

연쇄살인마는 클레타트 후작에게 있어서도 양날의 검이었다. 공포와 위협으로 다진 기반이 안정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나마도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본인은 자식이 없는데 황태자는 쑥쑥 잘 자라고 있으니 조급해진 걸까?”

“혼인하신 지 무척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저도 어렴풋이 기억에 있습니다만.”

“후작 부인이 몸이 약해서 아이를 갖기 힘들다고 하더군. ……이라는 연막을 치고 몰래 자식들을 낳아 기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보다, 로젤린.”

프레데릭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그의 어깨에 기대어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로젤린도 허리를 바로 펴며 안색을 가다듬었다.

“난 딸이 좋아.”

“…….”

“너와 날 반반씩 닮은 딸이라면 무척 잘생기지 않을까?”

“…….”

“수십 명의 예비 며느리들이 너와 나의 딸을 둘러싸고 마음을 얻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훤하군.”

“……어째서 며느리입니까?”

“사내놈에게 내 딸을 어떻게 줘?!”

로젤린은 있지도 않은 딸을 떠올리며 정색하는 프레데릭에게 더 이상 대꾸하지 않기로 했다.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프레데릭의 미래는 어느덧 딸이 결혼식 전날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아버지라면서 훌쩍거리는 광경이 되어 있었다.

반쯤 흘려듣던 로젤린은 문득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죽고자 하는 것이 아닌, 살아 있는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게 되는 건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다. 프레데릭은 그녀가 미래를 상상하게 했다.

‘일부러 날 웃게 하려고 말씀하시는 상상 같지만 말이야.’

그래서 로젤린은 그냥 웃었다. 프레데릭의 목소리가 더욱 신이 났다.

* * *

항의 서한에 대한 답으로 베스메틱 백작은 군대를 일으켰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프레데릭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베스메틱 백작과 전쟁이 발발해도 이길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직속 기사단인 브류나크 나이트는 언제라도 출병할 수 있도록 대기시켜 놓았다. 그의 명령이 없어도 베스메틱 백작이 출병했다는 소식이 발트란에 오면 기사단장의 판단하에 기사단을 움직이게끔 했다.

만약 베스메틱 백작이 마리안 부인의 친정인 아이든 백작가와 연합하여도 큰 문제는 없었다. 프레데릭은 자신의 기사단을 신뢰했다.

프레데렉이 직접 군대를 지휘할 필요도 없는 사안이었다.

가볍게 여기고 있던 전황에 차질이 생겼다는 급전을 받은 건, 로젤린과 연극을 보고 귀가한 날이었다.

전서매가 가지고 온 보고문을 읽은 프레데릭의 표정이 안 좋았다. 로젤린이 걱정했다.

“전황에 문제가 생겼습니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인데.”

한숨을 한 번 쉰 프레데릭이 로젤린에게 보고문을 건네주었다. 라울이 로젤린의 옆에서 함께 읽었다.

암호로 적힌 문서를 더듬거리며 읽은 로젤린의 안색도 창백해졌다.

발트란에 반란이 일어났다.

시작은 마수 떼의 습격이었다. 과거에 있었던 썩은 재규어 떼의 습격이 반복되었다. 아이기스 나이트가 마수를 토벌하기 위해 출병한 사이에 마리안 부인의 사병이 경비대를 제압하며 발트란을 장악했다. 마리안 부인의 사병은 상인으로 가장하여 성내에 진입하였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발트란을 장악한 마리안 부인은 성문을 닫아걸고 농성을 시작했고, 아이기스 나이트는 성내로 귀환하지 못했다.

국경에 위치한 발트란은 전투를 대비하여 쌓아 올린 성이다. 외부에서 공략하기에는 매우 어렵다.

“발트란 인근 요새의 브류나크 나이트를 베스메틱 백작령으로 돌린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프레데릭이 골치 아픈 표정으로 서성거렸다.

“내부에 반란군이 있는데 요새의 기사단을 옮길 수는 없다.”

국경선에 주둔 중인 브류나크 나이트의 부대를 차출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인접국인 제이드왈의 정황이 혼란스럽다지만 국경을 방어하는 기사단을 뒤로 빼는 건 무모한 도박이다.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안 남았군요.”

라울의 중얼거림에 로젤린이 혼잣말처럼 대꾸했다.

“샤렌의 기사단…….”

프레데릭은 레젠으로 오기 전 브류나크 나이트의 예비 병력이 그의 직할령인 샤렌으로 집결 가능하도록 이동시켰다.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후작의 반란군을 공격하기 위한 병력이었다.

발트란 인근 요새의 병력을 차출하지 못하니 프레데릭이 현재 움직일 수 있는 기사단은 샤렌의 브류나크 나이트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로젤린이 마음에 걸리는 건 다른 문제였다.

“제기랄.”

프레데릭의 주먹이 벽을 쾅 쳤다.

“지난번의 습격도 마리안 부인의 짓이었겠군!”

로젤린이 마음에 걸려 하는 것과 동일한 문제에 프레데릭도 도착해 있었다.

마리안 부인의 사병이 잠입한 시기와 비슷한 타이밍에 발생한 마수 떼의 습격이 결코 우연일리는 없다. 균열이 인위적으로 조작되었다는 마법사 협회의 판단까지 얻었다.

최초의 습격도, 두 번째의 습격도 마리안 부인이 관련되어 있었다.

로젤린은 이를 악물었다. 최초의 습격에 얼마나 많은 동료가 죽었던가. 기사대장이었던 다니엘마저 전사하여 배신자인 사무엘이 부임했다. 사무엘의 배신으로 인해 또 동료가 죽고 프레데릭마저 죽을 뻔했다.

그 모든 게 마리안 부인의 소행이었다니.

“발트란의 일부는 윌리엄이 통치하는 곳이기도 하고 대공령의 중심이야! 발트란이 무너지면 어떤 사태가 발생할지 알면서도!”

마리안 부인을 질책하는 프레데릭의 노성은 동시에 자기 자신을 탓하는 것이기도 했다. 발트란이 외부의 침공으로 무너지면 대공령을 비롯한 제국의 북부는 큰 혼란에 빠진다.

외부인인 클레타트 후작과는 다르게 마리안 부인은 내부인이다. 발트란에서 반평생을 살아왔으며 대공령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그녀가 발트란을 공격했다. 그로 인하여 수많은 기사가 사망하였으며 또한 큰 위험에 처하였었다.

오직 그녀의 욕망 하나를 위해서.

‘나 때문인가? 내가 내 자리를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모든 게 자신의 과오인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의 임무에서 도피하여서, 그가 분명하게 대공령 내부의 상황을 정리하지 못해서, 그가 마리안 부인이 세력을 키우도록 방치해서, 이 모든 일들이 발생한 것 같았다.

도피하지 않았다면, 성실하게 의무를 이행했다면, 마리안 부인이 세력을 넓히는 걸 방지했다면,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면, 그랬다면.

“전하.”

나지막한 음성이 다가왔다. 머릿속을 혼란하게 어지럽히는 자책감을 위로하려는 것처럼 조용히 스며들었다. 세게 움켜쥔 주먹 위에 로젤린의 손이 겹쳐졌다. 보드라운 온기가 그를 감싼다.

프레데릭은 얼굴을 문지르며 긴 숨을 토해 냈다. 그래, 지금은 자책하며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손에 가만히 얹은 로젤린의 손을 쥐었다. 그녀가 지켜 준 그의 삶이다.

라울이 못 본 척하며 헛기침을 했다.

“대부인이 혼자 계획한 건 아니지 않을까요.”

“절묘한 타이밍이 우연일리는 없겠지.”

흥분을 가라앉힌 후에도 프레데릭은 로젤린의 손을 놓지 않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베스메틱 백작의 출병과 동시에 마리안 부인이 반란을 일으켰다. 발트란 요새의 기사단은 발이 묶였으며, 베스메틱 백작의 군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샤렌의 기사단을 동원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클레타트 후작의 군대는 후방이 안전해진다.

겹겹이 이어진 사건들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클레타트 후작과 마리안 부인과 베스메틱 백작의 연합이다.

“……마수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방법도 후작님으로부터 받았을까요.”

로젤린이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프레데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이미 레젠에서 마수를 이용한 후작이다. 마리안 부인과 언제 손을 잡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수를 이용하는 방법을 전해 주었을 가능성은 아주 컸다.

“프레데릭 님, 어떻게 하실 겁니까?”

“레젠에 있으니 소식이 전해지는 것도, 대응하는 것도 늦군.”

만약 그가 발트란에 있었다면 마리안 부인은 절대 내부에서 반란군을 일으킬 계획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레젠은 발트란과 너무 멀었다.

프레데릭은 라울을 돌아보았다.

“입궁 준비를 해 다오. 폐하를 알현해야겠다.”

겨울의 짧은 해가 떨어진 후였다. 늦은 시간이었으나 카를은 지체 없이 프레데릭의 알현 요청에 응했다. 프레데릭과 로젤린, 카를 세 사람만이 대화실에 모였다.

로젤린의 과거를 연극으로 각색한 일로 서로 언성을 높인 후 처음으로 갖는 만남이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날의 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베스메틱 백작과 발트란의 사정을 다 들은 카를은 선선히 말했다.

“샤렌의 기사단을 네가 직접 지휘해야겠군.”

“만약 후작이 군대를 움직인다면 후방이 비게 돼. 괜찮겠나?”

“그야 물론 안 괜찮지.”

카를이 쓴웃음을 지었다.

똑같은 내전이라도 필라헨 제국과 슈벤하임 대공령의 상황은 다르다. 프레데릭은 인망이 두텁고 명성이 높은 지배자다.

게다가 마리안 부인과의 대립은 프레데릭 개인의 일이 아니었다. 휘하의 봉신들도 양대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다. 만약 아이든 백작가가 그들의 세력을 이끌고 공식적으로 반란군을 일으킨다면 프레데릭을 지지하는 봉신들도 출병하게 된다.

카를은 달랐다. 필라헨 제국의 황권은 강하지 않으며 황제의 직속 친위기사단인 골든 나이트는 제국의 전역에 분포되어 있다. 레젠에 주둔 중인 골든 나이트만으로 후작의 군대를 막는 건 어려웠다.

골든 나이트가 집결하는 시간을 벌며, 황제와 황궁을 지켜야 하는 근위대인 로열 가드마저 후작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다.

클레타트 후작의 군대와 대적할 만한 대영주들은 쉽게 군대를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황권이 어지러워 황제의 세력이 약해지는 건 대영주들이 바라는 바다.

대대로 제국의 대영주들은 황권의 다툼이 있을 때 소극적인 지지는 하여도 적극적인 참여는 거의 하지 않았다. 현재 황제를 지지하는 대영주들도 상황의 전개를 지켜보며 굼뜨게 기다릴 게 분명했다.

“다투지 말라고 베스메틱 백작에게 편지라도 보낼까?”

짐짓 가벼운 어투로 카를이 실없는 농담을 했다.

“그게 가능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거다.”

프레데릭도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봉신과 봉신 간의 분쟁이다. 황제가 참견할 여지는 없었다. 애초에 사건의 시작인 프레데릭의 암습조차 황제의 직할령이 아니라 베스메틱 백작의 사유지에서 발생했다. 처음부터 황제의 개입을 철저히 막은 것이다.

물론 황제가 봉신 간의 분쟁을 조정할 수는 있다. 다만 황제가 개입하기 위해서는 분쟁 중인 봉신들로부터 황제가 조정해 달라는 공식적인 요청이 필요했다.

먼저 군사를 일으킨 베스메틱 백작도, 프레데릭도 절대 요청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긴 하지. 일개 백작 때문에 네가 먼저 개입을 요청한다면 제후들에게 아주 우습게 여겨질 테니까.”

프레데릭이 대화실로 왔을 때 시녀가 마련한 차는 완전히 식은 지 오래였다. 카를은 입에도 대지 않던 찻물을 한 번에 목구멍으로 넘겨 마셨다.

“슈벤하임 대공령과 발트란은 네 고향이야. 네가 살아온 터전이 어지럽혀지는데도 날 위해 기사단을 움직이지 말라는 부탁은 하지 못해. 내가 내 자리를 지키는 것처럼, 너 역시 네 자리를 지켜야지.”

카를은 빙그레 웃으며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나도 날 지킬 마지막 수단 하나쯤은 생각해 두고 있으니까.”

“무슨……?”

“옛날에 어머니가 했던 일.”

“아하.”

짤막한 한마디만으로도 프레데릭은 금방 알아들었다. 이십여 년 전, 카를의 어머니 마리아 2세의 계획은 어린 아들의 목숨을 살렸다.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카를과 프레데릭은 친구이자 동맹이 되었다.

카를은 프레데릭의 뒤에 잠자코 서 있는 로젤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메이어 경, 경도 연극을 보았나?”

로젤린은 그녀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과거를 각색하여 대중에게 알린 카를을 내려다보다가 무거운 입술을 움직였다.

“……보았습니다.”

사사로운 감정은 일절 덧붙이지 않은 짤막한 한마디였다. 무례하다고 할 수 있을 그녀의 대답에도 카를은 언짢아하지 않았다.

“사전에 상의도 없이 경에게 미안한 일을 하였네. 하지만 미리 상의하였어도 나는 경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연극을 진행하였을 걸세. 이런 짐을 용서하지 못하여도 괜찮아.”

“…….”

“다만 이것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하지. 경의 가족이 입은 불명예는 반드시 복권하고 영예로운 자리를 약속하겠다고. 그때는 경도 당당히 메이어 남작의 작위를 갖게 되겠군.”

로젤린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아버지와 큰오빠가 죽고 작은오빠가 실종되었으니 계승법에 따라 남작위를 계승하는 건 그녀가 맞았다. 그러나 로젤린은 자신의 작위를 정식으로 받게 될 거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영지도, 실권도, 명예도 없는 작위다. 로젤린도 수잔나도 엠마에게 계승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메이어 남작의 작위는 그녀가 죽음에 따라 자연히 소멸될 거라 여겼다.

잊고 있던 작위가 언급되어 놀란 로젤린에게 카를이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가 대화실에서 나눈 대화 중 가장 진심이 깃들어 있는 한마디였다.

“그전에 경은 프레데릭과 함께 전장에 있게 되겠군. 프레데릭을 잘 부탁하네.”

프레데릭도 겨우 표정을 풀었다.

“무사히 돌아와서 로젤린의 공식적인 작위와 영지까지 뜯어내고 말 테니까.”

“제발 부탁이니까 얼마든지 가져가. 메이어 경에게 준다면 아내도 불만을 안 가질걸.”

카를이 어깨를 으쓱했다. 잔잔한 웃음이 대화실 안을 감돌았다.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작위의 계승을 곱씹어 보던 로젤린도 작은 미소를 지었다. 예상하지 못하였던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는데도, 이 두 사람을 보니 잘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다.

다음 날 프레데릭은 레젠을 출발했다.

체포된 마법사의 자백을 받은 카를은 연쇄살인마가 클레타트 후작이라는 의혹에 대한 조사를 공식적으로 명령했다. 클레타트 후작은 소환에 불응하며 황제가 누명을 씌우는 것이라 주장했다.

암살자가 후작저를 습격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후작은 암살의 배후가 황제라고 공표했다. ‘생명의 위협’을 피해 후작령으로 급히 도피한 후작은 이를 명분으로 군대를 일으켰다.

카를 5세와 클레타트 후작의 내전이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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