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신년 축일 (9/16)
  • 3. 신년 축일

    “눈이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새해가 되었으니 올해 보는 첫눈인 셈이다.

    새해 첫날부터 내리는 눈은 길조일까 흉조일까. 신전에도 거의 가지 않는 불성실한 신도인 로젤린은 그런 고민을 했다.

    팔짱을 끼고 10분쯤 고민한 끝에 인정했다.

    ‘이건 좀 현실도피적인 고민인데.’

    그녀는 힐긋 시선을 올렸다.

    모서리 구석자리에 앉은 로젤린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한 명의 중년 기사가 있었다. 프레데릭이 보았다면 근육질 거구라며 질색했을 듯한 건장한 체격의 사내다.

    로젤린은 현재 황궁에 있었다.

    신년을 맞아 황궁에서는 황제와 주신 대신전의 신관이 주축이 되어 제례를 올리는 중이었다. 제도 귀족을 포함하여 상경한 대영주들까지 참석하는 대제례다. 황성의 본 궁까지 무장하고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황제 본인을 제외하면 황성 근위대인 로열 가드의 정기사뿐이다.

    귀족들의 호위기사는 대기소에서 머무는 중이었다. 귀찮은 걸 싫어하고 본인의 실력에도 자신이 있는 프레데릭은 호위기사가 언제나 1명뿐이었으나 다른 귀족들은 다르다. 적어도 10명 이상의 호위기사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 호위기사 중에서 수장 격의 기사인 호위기사장이 한 명 있다.

    황궁의 예법에 따라 대기소까지 주군을 모시며 입궁 가능한 호위기사는 한 명뿐이다. 통상적으로 호위기사장이 입궁한다.

    그런 고로 대기소에서 로젤린은 새파랗게 젊은, 오히려 어리다고 할 수 있는 나이였다. 호위기사장은 반드시 실력으로 정해지는 자리가 아니다. 그녀를 제외한 모든 호위기사가 최소 서른 살 이상의 연륜 있는 연배였다.

    게다가 드문 여자 기사다. 현재 대기소에서 여자 기사는 로젤린을 포함하여 셋뿐이었다.

    로젤린은 슈벤하임 대공의 호위기사, 여자 기사, 새파란 애송이, 라는 세 가지 이유로 알게 모르게 주목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 자신은 다른 쪽으로 신경을 쓰느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날 기억하고 있으실까?’

    힐끗힐끗 신경을 쓰고 있는 기사는 다름 아닌 클레타트 후작의 호위기사 록허 경이다. 10년 전에도 록허는 후작을 섬겼다. 로젤린도 그를 만난 적이 있다.

    과거에 면식이 있던 사람이니 그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나이가 어린 로젤린이 먼저 예의를 갖추는 게 옳았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아는 척을 하기엔 신경이 쓰인다.

    프레데릭의 정적이나 다름없는 후작가의 가신이라는 것과 10년 전의 사건 탓이다. 록허에게 로젤린은 주군을 배신한 자의 자식이 아닌가.

    ‘아예 까먹으신 게 낫나.’

    로젤린은 그런 고민을 하며 체스의 말을 옮겼다. 사실 로젤린은 체스를 잘 둘 줄 몰랐다. 취미도 아니었고.

    대기소에 모인 기사들은 거의 대부분 서로 안면이 있다. 삼삼오오 앉아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거나 인사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로젤린은 예외였다. 아는 사람도 없고 알고 싶은 사람도 없다. 체스를 연구하는 척하고 있는 건 혼자 있기에도 좋고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기에도 좋았다. 그녀는 자신이 은근슬쩍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건 전혀 몰랐다.

    “큼큼.”

    머리 위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연배가 있는 중년의 사내다. 시선을 올렸던 로젤린은 곧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곳에서 그녀가 면식이 있는 두 번째 사람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브래넌 경.”

    “잘 지내고 있었는가?”

    옥스타인 공작의 호위기사인 브래넌 경이다. 멜리나가 납치를 당할 뻔하였던 밤에 공작을 호위하여 온 기사였다. 당시에는 사정도 사정이었고 서로 경황이 없어서 간단히 인사만 나누었다.

    “체스를 연구하는 중이었군?”

    브래넌이 맞은편에 앉았다. 로젤린은 아무렇게나 옮기고 있던 체스말을 얼른 정리했다.

    “미숙합니다.”

    “나도 내세우기에는 부끄러운 솜씨라네.”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며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로젤린은 브래넌과 체스를 두게 되었다. 결론을 내기 힘든 고민을 하고 있던 참이니 잘 되었다.

    호위기사는 수석 보좌관만큼이나 주인과 가까운 지위다. 항상 옆에서 경호하고 있으니 내밀한 사정을 알기도 쉽고 주인의 의향을 파악하기도 쉽다.

    중립을 지키던 옥스타인 공작의 호위기사가 황제파인 슈벤하임 대공의 호위기사에게 먼저 다가갔다. 옥스타인 공작이 황제파로 기울었다는 은밀한 소문이 재확인되고 있는 셈이다. 호위기사의 대기소는 사석이지만 동시에 정치의 동향을 반영하는 곳이기도 하다. 공기가 낮게 술렁였다.

    체스말을 쥐고 수를 고민하던 로젤린까지 눈치챌 정도였다.

    “그냥 두게.”

    브래넌이 낮게 말했다. 로젤린은 얼떨결에 체스보드에 비숍을 놓았다. 실수로 잘못 놓은 것이어서 바로 룩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날 밤 아가씨를 구해 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지 못하였군.”

    브래넌의 목소리는 로젤린에게만 간신히 들릴 만큼 낮았다.

    “충격이 많이 크셨는데 아가씨는 괜찮으십니까?”

    로젤린도 목소리를 낮추었다. 탁, 탁. 체스말이 체스보드에 놓이는 소리가 유독 컸다.

    “며칠 쉬시면서 지금은 많이 회복하셨네. 조용한 별장에서 편히 요양하시는 게 아가씨께도 좋겠으나 별장이 호위하기에 공작저보다 용이하지 않으니.”

    한 번 납치 위험은 넘겼으나 안심하기에는 이를 것이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이곤 시종을 불렀다. 시종에게 음료를 부탁하는 척하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혼자 고민에 빠져 있을 때와는 다른 것들이 이제야 눈에 보인다.

    로젤린의 고향은 레젠이지만 원래 귀족사회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기껏 해 봐야 후원자들 중 큰손인 당시르 후작가나 올람파 백작가 등의 문장만 알아볼 정도였다.

    요 며칠 시간이 날 때마다 공부를 하여 황제파, 후작파, 중도파로 나뉜 각각의 세력 중 중요 가문의 문장은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호위기사들의 망토와 제복에는 가문의 문장이 수놓아져 있다.

    대기소 안의 기사들은 각각 주인이 속한 세력에 따라 앉아 있었다. 중도파인 옥스타인 공작의 호위기사인 브래넌이 로젤린에게 다가왔으니 동요가 있을 만하다.

    옥스타인 공작이 완전히 황제파로 넘어갈 의향이라는 걸 직감했다. 30년 간 중립을 지키던 귀족원의 옥스타인 공작이 움직였으니 큰 반향이 있을 것이다.

    “체스는 영 서툴구먼.”

    체크메이트였다. 3전 3패다. 머쓱하여 뒷머리를 긁었다.

    “어렸을 때 교양으로 약간 배운 정도입니다.”

    “체스와 전술은 매우 흡사하지. 경도 대공 전하를 섬기려면 기본적인 전술 공부는 해 두는 게 좋을 걸세. 전하께서는 친히 전선에서 전군을 지휘하시는 분이 아닌가. 호위기사가 군대를 지휘할 가능성은 거의 없겠으나 최측근의 기사이니 전술을 배워 나쁠 건 없을 게야.”

    넌지시 조언하는 브래넌의 목소리는 평소의 높이로 돌아와 있었다. 은연중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다른 기사들의 귀에도 충분히 들릴 크기이다.

    로젤린은 그의 조언에 감사했다. 공부할 게 또 생기긴 하였으나 프레데릭을 섬기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난다는 건 즐겁다.

    체스보드 위에 체스말들을 배열하며 브래넌과 한가롭게 잡담했다.

    “어느 분의 종기사 출신이었는지 물어도 되나?”

    호위기사는 정기사로 구성되는 게 보편적이며 정기사는 귀족 출신이다. 작위를 이을 수 없는 차남 이하의 자식이 주로 기사가 된다.

    귀족이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보통 정기사인 가문 어른의 종기사로 수행을 시작한다. 아이기스 나이트의 기사단장인 알렉산더의 종기사도 그의 조카였다.

    종기사는 정기사의 시중을 들며 검술을 사사한다. 어느 기사의 종기사였는지 묻는 건 곧 어느 가문이며 어느 계파인지 묻는 것과 비슷한 의미였다.

    “이전에 섬겼던 분은 없습니다. 저는 평기사입니다.”

    물론 로젤린은 해당되지 않는다. 만약 남작가가 존속하였고 그녀가 기사가 되길 원했다면 작은오빠의 종기사가 되었을 것이다.

    “오, 그렇군. 이례적인 경우이나 대공 전하답다면 대공 전하다운 인사였구먼. 그분께서는 능력을 중요시하시니까.”

    담담한 로젤린의 대답에 브래넌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프레데릭이 딱히 실력을 보고 로젤린을 선택한 건 아니지만 사정을 모르는 그는 매우 좋은 방향으로 해석했다.

    적어도 실력 때문에 호위기사가 된 게 아니라는 건 아는 로젤린은 괜히 민망해졌다. 안 그래도 며칠 전 암살자에게 지는 것과 다름없는 무승부를 하고 기운이 없던 참이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브래넌은 속편하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지나친 겸양은 경을 발탁한 대공 전하의 혜안에도 누가 된다네.”

    진짜 아닌데.

    더 민망해졌다. 로젤린은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체스말을 쥐었다. 하필이면 쥔 게 나이트다. 그녀의 나이트가 또 비숍에게 잡히기 직전이었다.

    “헛, 참. 카헬 경, 혹시 트롭 남작의 사정을 기억하시오? 호위기사 전체를 여자로 구성하여 날마다 침대에서 갈아치웠다는 그 방탕아 말이오.”

    “호위기사가 임신을 하면 몰래 죽여 버렸다는 파렴치한을 어찌 모르겠소.”

    느닷없는 대화 한 토막이 커졌다. 로젤린의 눈이 대화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후작파의 호위기사들이 모인 곳이다. 테이블에 앉은 두 명의 기사가 보란 듯이 대화를 이어 갔다.

    “처음에는 준남작이나 기사 가문 출신의 정기사로 구성하다가 뒷수습이 번거로우니 평기사도 마구 호위기사로 뽑았다질 않소. 후에 정부가 되게 해 주겠다는 꿀 발린 소리로 속살거려서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정부로 들이면 되었을 것을.”

    “글쎄요. 기사 취향이었던 게 아닐까 하오. 세상에는 별별 변태들이 많으니 갑옷과 칼을 든 여자가 아니면 불능이었던 자였을 수도 있질 않겠소.”

    뻔한 야유와 저열한 모욕이다.

    지나치게 노골적인 조롱에 브래넌은 당황하기에 앞서 의아했다. 시정잡배도 아니고 이처럼 속 보이는 시비를 걸 이유가 없었다.

    그것에 주인의 뜻이 깃들어 있지 않는 이상.

    ‘설마.’

    브래넌은 굵게 신음했다. 저 두 명의 기사 중 아멘텐 백작의 호위기사인 포이터 경은 레젠의 마상 시합에서 4년 연속 우승을 차지할 만큼 뛰어난 실력의 기사다. 나이도 서른 초반으로 젊어 지금이 전성기다. 다른 한 명인 카헬 경의 실력도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일부러 모욕을 주어 결투를 유도하는 건가.’

    추측은 되었으나 의문이 남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시선을 맞은편으로 되돌렸다. 로젤린은 손에 쥐고 있는 나이트를 굴리면서 포이터 경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으락푸르락 화를 낼 줄 알았더니 예상외로 담담한 표정이다.

    “메이어 경.”

    로젤린은 포이터 쪽을 바라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다혈질입니다만 너무 뻔한 수작이라서 화도 안 나는군요. 말려들어야 할지 무시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다짜고짜 흥분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불렀으나 기우였던 듯하다. 브래넌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뭐든 물어보게.”

    “제가 이 상황에서 결투를 신청해도 대공 전하께 누가 되지 않을까요? 저자들은 제가 장갑을 던지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브래넌은 무심코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내가 공증인이 되어줌세.”

    대답을 듣자마자 로젤린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포이터와 카헬의 대화는 대기소 안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있었다. 그들이 저격한 장본인이 움직이자 모든 기사들의 시선이 같이 움직였다.

    많은 기사와 많은 시종이 있음에도 대기소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로젤린의 부츠 소리만이 뚜벅뚜벅 울렸다. 뚜벅뚜벅, 탁. 부츠가 그들이 앉은 테이블 앞에서 멈추었다.

    포이터가 과장된 표정으로 인사했다.

    “이게 누구십니까. 슈벤하임 대공 전하의 평기사이자 여자 기사인 메이어 경이 아니오?”

    “당신 이름은?”

    “전하를 바로 곁에서 섬기느라 나 같은 일개 정기사는 눈에 차지도 않을 사내일 텐데 왜 묻소?”

    끝까지 이죽거렸다. 로젤린은 이런 뻔한 수작에 휘말려들어야 하는 게 한심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짜증이 나긴 한다. 포이터가 실실 쪼개는 것도 짜증 나고, 생긴 것도 짜증 나고, 숨 쉬는 것도 짜증 나고, 의도를 뻔히 내비치는 것도 짜증 난다.

    프레데릭까지 말려들어 야유를 당하게 한 자신도 짜증이 났다. 이런 곳에서 하찮은 모욕을 받을 사람이 아니다.

    “내가 모가지를 딸 사람의 이름은 알아 두는 게 최소한의 예의인 것 같아서.”

    “…….”

    저열하게 시비를 건 주제에 로젤린이 일직선으로 받아칠 줄은 몰랐는지 포이터가 입을 다물었다.

    그가 결투를 하고 시비를 건다고 해 봤자 같은 귀족인 정기사다. 로젤린처럼 대놓고 막말을 하는 사람은 겪어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험하게 구른 로젤린의 기준에서 이건 막말도 아니었지만.

    “……과연 허울 좋은 기사의 신분을 뒤집어써도 출신이 천하다는 건 역한 냄새가 풍기는 입에서 증명되는군.”

    “고마워.”

    욕은 먹었지만 로젤린은 오히려 고마웠다. 결투를 신청할 작정은 했으나 직접적인 동기가 마땅치 않던 터다.

    나와 주군을 모욕했느냐고 하면, 자신은 트롭 남작의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혹시 켕기는 게 있냐고 히죽거렸을 게 뻔하다. 욕으로 싸우는 건 잘해도 우아한 말다툼에는 자신이 없다. 받아칠 말이 곤란했는데 면전에서 우아하게 욕해 주니 고마운 일이다.

    “뭐?”

    포이터가 어이없어했다. 어이없어하거나 말거나 로젤린은 이미 장갑을 벗고 있었다.

    “방금 네가 한 발언으로 난 엄청난 모욕감을 받았다.”

    결투를 신청하는 절차가 이게 맞던가. 로젤린은 소설에서 보거나 옛날에 오빠들에게 들은 장면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결투를 신청하지.”

    휙 날아간 장갑이 어이없어하는 포이터의 뺨에 적중했다. 어이없음은 곧 비웃음이 되었다. 포이터는 자신의 뺨에 맞고 떨어진 장갑을 움켜쥐었다.

    “그 말을 죽도록 후회하게 될 거다.”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그의 얼굴을 로젤린은 가만히 노려보았다. 진짜 짜증 난다.

    새해의 첫 날, 호위기사들이 대기소에서 발생한 자그마한 소동은 곧 일파만파 번졌다.

    이 일은 수년 동안 물밑에서 암약하던 황제파와 후작파의 대립이 겉으로 드러난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발트란에서 치르는 제례는 영주인 프레데릭이 주관한다. 레젠에서 치르는 제례는 당연히 황제인 카를이 주관한다. 즉, 발트란의 제례와는 다르게 프레데릭이 다른 생각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며칠 내내 프레데릭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로젤린 메이어. 클레타트 후작. 메이어 남작가.

    제식을 건성으로 따라 하며 생각을 거듭했다.

    ‘로젤린의 반응을 보면 모르는 게 분명해…….’

    그녀는 클레타트 후작이 10년 전에 메이어 남작가를 어떻게 팽하였는지 모른다.

    세간에는 메이어 남작이 클레타트 후작의 재산까지 몰래 빼돌렸다가 큰 빚을 지게 되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젤린이 알고 있는 것도 그것일 것이다.

    틀렸다.

    ‘메이어 남작은 철저히 피해자야.’

    메이어 남작은 클레타트 후작을 위해 무리하게 자금을 용통하고 후작의 자금까지 세탁했다. 불법적인 일에도 손을 대었다.

    10년 전 카를은 후작의 자금줄인 메이어 남작을 추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연관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는 것보다 후작이 눈치채는 게 빨랐다.

    클레타트 후작은 즉시 메이어 남작이라는 꼬리를 잘랐다. 그가 후작을 위하여 벌인 일들은 전부 사리사욕을 위해서 횡령했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무리한 자금 융통은 막대한 사업상의 빚으로 돌아왔다.

    후작은 충직한 가신이나 다름없던 남작을 무자비하게 잘라 냈다.

    메이어 남작이 자살한 건 그 직후다.

    프레데릭이 알고 있는 내용은 거기까지였다. 메이어 남작의 사후 가문이 어떻게 되었는지, 생존이 확인된 유일한 딸이 어떻게 살았는지 전혀 몰랐다. 관심도 두지 않았다.

    ‘내가 그때 알았다면…….’

    주먹이 꾹 쥐였다. 메이어 남작가의 비극은 단순히 서류상의 이름이었을 뿐이다.

    프레데릭은 ‘메이어 남작이 자살하여 빚이 남은 가족에게 상속되었음.’이라는 문장의 의미를 가벼이 넘겼다. 그 문장의 뒤에 살아 있는 사람의 고통과 삶이 있다는 건 생각하지도 않았다.

    로젤린은 그때에 고작 15살이었다. 평범한 귀족가에서 자라나고 있던 소녀가 한순간에 잔혹한 현실로 내동댕이쳐졌다.

    만약 로젤린이 메이어 남작처럼 포기했다면.

    만약 로젤린이 자살했다면.

    만약 로젤린이 콜로세움에서 죽었다면.

    수많은 가정들이 프레데릭의 가슴을 까맣게 태웠다. 로젤린이 강한 심지를 가지지 않았다면 충분히 있었을 미래다. 로젤린이었으므로 버텨내고 극복하고 딛고 서서, 지금의 로젤린이 된 것이다.

    ‘증거가 없어.’

    말해 주고 싶었다. 네 아버지는 결코 그릇된 자가 아니었으며 부당한 누명을 썼다고. 메이어 남작가의 불명예는 실로 충성스러운 것이다고.

    로젤린을 볼 때마다 몇 번이고 입술이 달싹거렸다. 한 번은 거의 말할 뻔했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다.

    배신한 사람이 남작이 아니라 후작이라는 증거가, 확증이 있었다면 10년 전에 이미 카를이 활용하여 역공하였을 것이다. 한 명의 증인은 있으나 실효성은 없었다. 후작이 부정하면 끝이다.

    심증뿐인 이야기이다.

    자신의 말을 믿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믿는다고 하여도 문제는 또 있었다.

    로젤린이 과연 집안의 원수나 다름없는 클레타트 후작의 앞에서 평정을 지킬 수 있을까.

    클레타트 후작의 세력은 강대하다. 황제인 카를조차 자신의 자식을 후작이 해했다는 심증이 있어도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정도다.

    무거운 한숨이 나왔다.

    로젤린의 복수는 지당하다. 그가 클레타트 후작을 반드시 끌어내려야 하는 이유도 생겼다. 하나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시기는 반드시 무르익는다. 후작이 행동에 나서고 있으니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로젤린의 복수를 위해 손에 칼을 쥐여 주고 싶었다. 동시에 섣부른 복수심으로 로젤린이 고통스러워하는 건 바라지 않았다. 당장 복수를 하지 못하는 고통의 시간은 짧을수록 좋지 않을까.

    일찍 알려 주지 않았다는 로젤린의 원망은 자신이 감당할 것이다. 그 정도는 짊어지는 게 당연했다. 오히려 그녀에게 진실을 함구하는 것에 비하면 가볍다.

    ‘알려야 하는 때라면 후작을 확실히 처단할 수 있을 때.’

    프레데릭은 그렇게, 당분간 로젤린에게 숨기기로 결심했다.

    훗날의 후회를 알지 못하고.

    제례 의식 사이의 휴식 시간. 네 명의 시종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사방으로 뛰어갔다. 목적지는 각각 황제, 슈벤하임 대공, 클레타트 후작, 아멘텐 백작의 보좌관이었다. 보좌관들은 다시 자신의 주인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프레데릭도 라울에게 보고를 받았다.

    “……로젤린이 아멘텐 백작의 호위기사와 결투를 하게 되었다고?”

    “마상 시합이 끝난 후에 결투를 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결투를 대비하기 위해 포이터 경은 마상 시합 참가 신청을 취소하였고요.”

    새해 첫날부터 결투 소식을 전하는 라울의 얼굴이 어두웠다. 로젤린을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다.

    프레데릭은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그도 로젤린이 걱정되었다. 다만 그가 걱정하는 건 라울과 다른 부분이었다.

    신년 축일의 공식적인 일정은 5일 동안 진행된다.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 제례를 올리고, 넷째 날에 마상 경기 및 축제가 열리며 다섯째 날이 대연회다.

    주목도가 몰리는 건 마상 경기였다.

    기사도의 꽃이며 기사가 영광되게 얻을 수 있는 자리. 그 영예를 얻기 위하여 수많은 기사가 마상 시합에 참가한다. 포이터 경은 지난 4년 동안 연속하여 승리를 거머쥐었다. 올해에 승리하게 된다면 5년 연속 승리다.

    포이터는 공공연하게 말해 왔다. 자신의 목표는 17살부터 23살까지 단 한 번도 승리를 놓치지 않은 전(前) 골든 나이트 크리스토퍼 메이어의 기록이라고.

    천재적인 재능으로 이름 높았으나 끝내 배신자로서 기사의 명예를 더럽힌 크리스토퍼의 연승 기록을 지우겠다고.

    ‘젠장.’

    뒤늦게 욕설을 씹었다.

    로젤린의 둘째 오빠가 크리스토퍼라는 걸 들었으면서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로젤린 메이어는 동명이인이 있을 수 있지만, 크리스토퍼 메이어와 로젤린 메이어라는 남매끼리 동명이인일 확률은 극히 희박한데.

    “결투의 이유는?”

    휴식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라울은 빠르게 설명했다.

    먼저 모욕한 사람은 포이터, 모호하였던 모욕의 대상을 자신에게 쏠리게 만들어서 결투를 신청한 사람은 로젤린. 공증인은 브래넌. 증인은 대기소의 호위기사들. 사흘 후 마상 시합 이후로 결투 날짜를 정한 사람은 포이터.

    ‘이상하군…….’

    결투를 신청 받은 사람이 날짜를 지정하는 건 관례에 맞다. 하나 제국의 가장 큰 축제 중 하나인 신년 축일 기간이다. 경사스러워야 할 이 축제의 기간에 기사 간의 결투로 피를 보는 건 부자연스럽다.

    “왜 하필이면 마상 시합 후로 날짜를 지정했는지 이유도 말했나?”

    “제례 기간 중에 피를 보는 건 부정하니 마상 시합이 열리는 날로 정했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축일이 지나자마자 메이어 경이 슈벤하임 대공령으로 꽁무니를 빼고 도주할 수도 있다는 빈정거림도 붙였고요.”

    말을 하면서 라울은 꽤 화가 난 듯하기도 했다. 로젤린이 마지막까지 모욕을 당한 상황이니 화가 날 만도 했다.

    로젤린이 그 직후에 ‘슈벤하임으로 돌아가는 건 네 모가지를 전리품으로 챙긴 후지. 내가 네 모가지를 아껴 줄 걱정은 하지 마. 방에 장식하기엔 지저분하니까 돌아가는 길에 마수 주둥이에 던져 주마. 만족하냐? 참, 그때 넌 이미 뒈졌을 테니까 돼지 먹이로 줘도 불만을 말하지는 못하겠네.’ 라고 대답했다는 걸 알면 속이 좀 풀렸을 것이다. 시종은 차마 전달하지 못한 말이었지만 말이다.

    검투사는 콜로세움에서 본격적으로 경기하기 전에 험한 욕설로 분위기를 돋우거나 상대방을 약 올리곤 한다. 막말 싸움에는 단련되어 있다.

    교양 있는 귀족인 포이터는 로젤린의 교양 없는 막말에 붉으락푸르락할 뿐 제대로 받아치지 못했다.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건 프레데릭도 마찬가지다. 로젤린이 당한 모욕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 내면에 숨은 의도가 더욱 마음에 걸렸다.

    포이터는 올해의 마상 시합에서 유력한 우승 후보자다. 그런 그가 로젤린과의 결투를 위해 마상 시합에 불참한다. 수년간 목표로 삼았던 자신의 뜻까지 꺾었다.

    주군인 아멘텐 백작의 뜻이 있을 게 분명했다. 아멘텐 백작의 뒤에 클레타트 후작이 있으리라는 건 두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면 후작의 목표가 설마…….’

    추측은 차츰 불길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마상 시합 직후라는, 극도로 주목도가 높고 흥분된 관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로젤린을 죽이겠다는 뜻일까.

    후작의 목표가 로젤린의 제거라면 두 번째 의문이 생긴다.

    ‘무엇 때문에.’

    프레데릭은 두 가지 이유를 추측했다.

    하나는 황제파의 거두인 프레데릭의 사람을 모욕하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죽이는 것.

    다른 하나는 메이어 남작가의 완전한 제거.

    여기에는 한 가지 틈이 있었다. 로젤린은 지난 10년 동안 레젠에서 살았으나 특별한 살해 위협을 받지는 않았다. 클레타트 후작이 남작가의 몰락 이후 로젤린의 행적을 추적하지 못하였을 리가 없다.

    한데 10년이 지난 이제 와서 로젤린을 노리는 이유라면.

    ‘……나 때문이야.’

    깍지 낀 프레데릭의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 로젤린이 로젤린 메이어라는 일개 검투사라면 후작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하나 슈벤하임 대공의 최측근 호위기사인 로젤린 메이어라면 상황이 다르다.

    그녀가 10년 전의 사건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알고’ 프레데릭과 결탁했다는 추론을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메이어 남작가를 제거한 사건은 클레타트 후작의 결정적인 약점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고귀하게 치장한 그의 명성을 흔들기엔 충분했다. 지우지 못할 추문이 될 것이다.

    휴식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으나 프레데릭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한심함을 뼈저리게 통감했다.

    로젤린이 ‘그’ 메이어 남작가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 위험한 레젠까지 동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로젤린이 메이어 남작가임을 알 수 있었던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무시했다.

    전부 그의 방심이었고, 실수였으며, 잘못이었다.

    현재 로젤린은 약간 정서 불안 상태였다.

    짜증이 치밀어서 포이터의 뻔한 수작을 무시하지 못했다. 호기롭게 결투는 신청하였으나 머리가 식으니 덜컥 걱정이 되었다.

    이 결투에 임하는 게 프레데릭에게 해가 되는 건 아닐까.

    프레데릭의 허락도 없이 결투를 신청했다. 제례가 끝난 후 그를 볼 면목이 없었다. 프레데릭은 다만 그녀의 어깨를 격려하듯이 한두 번 두드려 주었을 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 며칠 사이 프레데릭은 말수가 줄어 있었다. 뭔가를 깊이 생각하며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결투 소식을 듣고도 프레데릭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말 많은 그답지 않은 태도라 로젤린은 더 불안해졌다.

    - 걱정할 것 없다.

    오히려 그녀를 다독여 준 건 아이기스 나이트의 상관인 사무엘이었다.

    - 당시 현장에 브래넌 경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나야 변방의 일개 기사에 불과하니 중앙의 정세가 돌아가는 형국이나 정치적인 입장을 잘 모른다만, 브래넌 경은 다르지. 그분은 평생 옥스타인 공작님을 모신 분이야. 식견이 매우 뛰어나시지. 그분이 결투를 해도 괜찮다고 하였으면 괜찮은 거다.

    라울도 긍정했다.

    - 잘하셨습니다. 거기서 참았다면 포이터 경의 더러운 이야기는 단순한 대화에서 그치지 않고 소문이 되어서 퍼졌을 겁니다. 메이어 경이 실력으로 인정받은 기사라는 걸 당당히 보여 주세요.

    그제야 조금 안도되었다. 다만 프레데릭이 여전히 그녀에게 결투 관련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 때문에 완전히 안심하지는 못했다. 자신이 먼저 ‘제가 결투를 하게 되었는데 괜찮습니까?’라고 묻기에도 적절하지 않았다.

    로젤린은 제례가 열리는 기간 내내 약간의 정서 불안 상태였다.

    프레데릭이 무거운 입을 연 건 제례가 끝나고 대공저로 귀택한 날, 즉 결투 전날이었다.

    “로젤린, 내일 결투로 준비할 게 많겠지만 쉬기 전에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가 먼저 결투를 언급하는 건 처음이다. 로젤린은 잔뜩 긴장하여 프레데릭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프레데릭은 그녀를 꾸짖지도 노여워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물었을 뿐이었다.

    “네 검은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철검이었지?”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은 로젤린은 무심코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기사단의 대장간에서 받은 흔한 바스타드 소드다.

    “발트란으로 떠나기 전에 새 검으로 받긴 했습니다.”

    로젤린은 무기에 애착이 없었다. 콜로세움에서 다양한 무기들을 일회성으로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기사단에 입단하며 검을 손질하게 되긴 하였으나 마수를 베는 검은 무뎌지기 쉽다. 칼날이 무뎌지거나 부러지면 미련 없이 새 검을 받았다.

    프레데릭이 동의하는 듯한 한숨을 쉬었다.

    “명검을 갖고 있었다면 내일 결투를 위해 네게 줬을 텐데 나도 무기는 적당히 다루다 보니……. 발트란의 대공저를 뒤져 보면 명검이 10자루는 나올 테지만 말이야.”

    무기에 애착이 없는 건 프레데릭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때그때 손에 잡히는 무기나 상황에 어울리는 무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었다.

    애석해하는 프레데릭과는 달리 로젤린은 비로소 안도했다. 적어도 그는 결투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역시 이걸 강탈해 오길 잘했군.”

    소파에서 일어난 프레데릭은 책상 위에 있는 기다란 상자를 가져왔다. 1미터는 넘고 2미터는 되지 않는 길이의 원목 상자다.

    “……?”

    로젤린도 눈에 익었다. 프레데릭이 오늘 황성에서부터 들고 있었던 상자다. 하인에게 넘기지도 않고 손수 들고 있어서 귀한 물건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프레데릭이 가볍게 턱짓했다.

    “열어 봐.”

    이 상황에 주는 기다란 상자라면 무엇인지 뻔하다. 로젤린은 설마하며 상자를 봉한 끈을 풀고 뚜껑을 열었다. 벨벳으로 안을 대어 고정한 상자 안에는 예상했던 대로 바스타드 소드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뽑아 봐도 됩니까?”

    “당연하지. 칼집째로 휘두를 작정인가?”

    프레데릭이 희미하게 미소했다.

    칼집은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을 뿐 평범하다. 칼자루와 폼멜에도 불필요한 장식은 전혀 없었다. 로젤린은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스르릉. 맑은 소리를 내며 은백색의 칼날이 드러났다.

    “우와.”

    감탄을 숨길 수가 없었다. 손바닥에 칼자루가 착 감기고 칼날이 예리하게 빛을 반사했다.

    이 검은 명검이다. 검사의 본능이 그녀에게 외쳤다.

    “굉장한데요…….”

    목소리까지 조금 황홀해졌다. 늘씬하게 뻗은 칼날의 예리한 아름다움에 홀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프레데릭은 그녀의 황홀함을 부추기듯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로젤린은 더 두근두근해졌다. 모험 소설에 많이 나오는 장면이다.

    그녀는 프레데릭의 손수건을 받아 옆으로 세운 칼날의 위에 얹었다. 손수건 자체의 무게만으로 손수건이 칼날에 잘렸다. 칼날이 더할 나위 없이 예리하다는 증거다.

    두 조각으로 깔끔하게 잘린 손수건이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은 소설에서 읽던 것보다 더 짜릿했다.

    “마음에 드나?”

    “칼에 홀려 버릴 것만 같습니다.”

    “다행이군. 앞으로 그건 네 검이다.”

    “예?”

    로젤린은 크게 놀랐다. 내일 결투 때 빌려 주는 게 아니라 아예 그녀에게 주는 것이라고?

    칼을 칼집에 되돌리고 상자 안에 넣었다.

    “송구하지만 제가 받을 수 없는 귀품입니다.”

    “네 호감을 사려고 주는 선물이 아니라 주군이 모욕감을 대신하여 결투하는 기사에게 주는 선물이니까 받아 둬.”

    프레데릭이 평소답지 않게 그녀에게 단호했다. 남녀 관계가 아니라 주종 관계로 대하는 태도였으므로 로젤린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뭐, 남의 물건으로 생색을 내는 거지만.”

    어깨를 으쓱하며 그가 실소했다.

    “사실은 그 검, 몇 년 전 폐하께 진상된 예물이거든.”

    또 놀랄 차례였다. 황제에게 바쳐진 검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경실색한 그녀와는 달리 프레데릭은 태연했다.

    “어차피 폐하는 검술에 재능도 없고, 칼을 쓸 일도 없고, 장식용으로 적절한 검도 아니고, 여러 가지 이유로 먼지만 쌓이던 검이야. 네 손에서 쓰임이 있다면 그것이 곧 검의 가치가 아니겠나?”

    “……아까는 강탈해 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응, 가위바위보에서 이겨서.”

    “…….”

    “삼세판.”

    진지하게 손가락 세 개를 펼치는 프레데릭의 얼굴을 보니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긴장이 풀려 풋 웃음 지은 그녀는 방금 자신의 소유물이 된 명검을 내려다보았다.

    불안했다가, 긴장했다가, 들떴다가, 하는 심정의 변화가 컸다. 그렇기에 로젤린은 프레데릭이 평소처럼 그녀에게 실없는 농담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그가 그녀의 앞에서 크게 웃음을 짓고 있지 않다는 것도.

    “로젤린.”

    “예, 전하.”

    “반드시 승리해라.”

    로젤린은 대답 대신 칼자루를 힘 있게 쥐었다.

    * * *

    마상 시합은 본선 경기는 레젠 밖의 대경기장에서 시행된다. 신년 축일 기간 중의 마상 시합은 단체 경기인 토너먼트가 아니라 일대일 경기인 주스트만 치른다.

    오전부터 시작된 마상 시합은 어느덧 결승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최후까지 남은 두 명의 기사가 말을 탄 채 각자의 위치에 섰다. 은색의 풀 플레이트 아머(금속으로 된 전신 갑옷)와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서 코트(갑옷 위에 입는 긴 옷)는 경기로 인해 지저분하다. 거칠게 콧김을 뿜어내는 말도 지친 기색이다.

    관중석은 조용했다. 사람들은 누가 승리자가 될지 예상하며 긴장된 시선을 경기장에 던졌다. 이윽고 결승전의 개시를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렸다.

    랜스(기병용 창)와 방패를 든 두 명의 기사들이 말을 날렸다. 말이 교차하고 창과 창이 서로를 겨룬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승부가 났다. 최후의 승자에게 사람들은 아낌없는 찬사를 던졌다.

    의전관에게 메달을 수여받은 우승자는 약혼녀 앞에 무릎을 꿇고 메달을 바쳤다. 이 젊은 연인을 부러워하며 축하하는 함성 소리가 요란했다.

    그러나 어딘가 맥이 빠져 있는 함성 소리였다. 마상 경기가 진행되는 중에도, 수여식이 진행되는 중에도, 귀족들은 다른 이야기를 숙덕거렸다.

    마상 경기 후의 결투.

    누구나 그것을 기다렸다.

    프레데릭의 뒤에 선 라울은 마상 시합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따분한 눈길로 경기장을 내려다보고 있던 프레데릭이 물었을 정도였다.

    “화장실 가고 싶냐? 갔다 와.”

    “……아니거든요!”

    나이 서른이 넘은 남자를 동물이나 어린애와 비슷한 수준으로 취급하는 것에 라울은 울컥했다. 울컥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절대 프레데릭의 귓전을 넘지 않았다.

    주변에 귀족들이 포진한 장소라면 라울은 시시한 잡담이라도 절대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오직 프레데릭에게만 들리도록 말한다. 유능한 보좌관이었다.

    “이후에 메이어 경의 결투가 있잖아요.”

    “응.”

    불안한 라울과는 다르게 프레데릭의 목소리는 잔잔했다.

    “메이어 경이 공개적으로 결투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불안해 죽겠습니다.”

    로젤린이 결투를 해도 되는 건지 걱정할 때 잘했다고 객관적인 칭찬은 했다. 그렇지만 로젤린이 결투를 신청해야 했던 상황과 불안함은 별개였다.

    상대는 4년 연속 마상 시합에서 승리한 뛰어난 기사다. 반면 로젤린은 기사로서의 단독 이력이 없다. 라울의 걱정도 무리는 아니었다.

    로젤린 앞에서는 숨겼지만 결투가 차츰차츰 다가오니 초조함이 커졌다.

    수여식이 끝난 경기장은 곧 있을 결투를 위해 장내를 정리하는 시종과 병사들로 분주했다. 여느 때라면 수여식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자리를 떴을 귀족들도 여전히 관람석에 앉아 있었다.

    “……올해의 첫 결투가 이렇게 일찍…….”

    “……마상 시합의 우승마저 포기하고…….”

    “……포이터 경의 마상 시합을 보지 못한 건 아쉽지만 결투도 기대가…….”

    수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초조함을 부채질했다. 로젤린이 패한다면 황제파와 후작파의 정치적인 문제에 앞서 프레데릭의 체면도 크게 손상이 된다.

    그러나 프레데릭은 여전히 태연했다. 그는 의자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어루만지며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요 며칠 잠잠하게 침묵하던 그의 눈동자가 오랜만에 활기를 띠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어. 로젤린이 이긴다.”

    “저도 당연히 메이어 경이 이기기를 바랍니다만 포이터 경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질 않나요.”

    “만만한 상대지.”

    프레데릭이 그의 걱정을 지우듯이 단호하게 단정 지었다.

    “로젤린은 강해.”

    “후우.”

    로젤린은 크게 심호흡했다. 가문이 몰락하지 않았을 때에는 마상 시합 구경을 하러 관람석에 앉았었다. 자신이 직접 경기장에 서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것도 마상 시합의 참가자가 아니라 결투의 당사자로서.

    ‘이길 수 있을까.’

    호기롭게 결투는 신청했다. 그렇지만 암살단의 우두머리와 싸운 이후 로젤린은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그 사내의 목적은 로젤린과 승패를 겨루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만약 진심으로 로젤린과 검을 겨루었다면 그녀는 반드시 큰 부상을 입으며 패하였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만큼 사내는 강했다.

    로젤린은 강하지 못했기에 사내를 놓쳤다.

    ‘콜로세움에서는 진 적이 없지만 검투사와 기사의 싸움은 다르지 않을까? 어마어마한 수준 격차가 나지 않을까?’

    동료 기사들과 대련은 자주 하지만 진검 승부를 한 건 아벨이 유일했다. 입단 당시의 테스트에서 로젤린은 아벨에게 이기긴 했다. 그렇지만 압도적인 실력의 차이로 이겼다고 볼 수는 없었다.

    포이터는 명색이 귀족의 호위기사장이며 마상 시합의 연속 우승자다. 아벨보다 강하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마상 시합의 우승자였던 크리스토퍼도 강했다.

    걱정은 더욱 커졌다.

    만약 로젤린이 패한다면 후폭풍은 로젤린의 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두 번 다시 프레데릭을 볼 면목이 없을 것이다.

    ‘아니,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자. 이겨야 해. 이길 거고.’

    양뺨을 찰싹찰싹 때려 머리를 가다듬었다. 우울하고 복잡한 생각이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 된다.

    “입장하실 시간입니다.”

    대기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로젤린은 프레데릭에게 선물 받은 칼자루를 꾹 쥐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짧은 시간에 경기장은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로젤린과 거의 비슷하게 맞은편의 대기실에서 포이터도 나왔다. 기사단의 대기소에서 한껏 약을 올려 주었으므로 로젤린을 보는 시선은 더욱 사나웠다.

    두 기사가 마주 보고 서자 의전관이 크게 외쳤다.

    “아멘텐 백작의 호위기사장 길 포이터 경입니다.”

    먼저 포이터를 호명하며 소개했다. 관람석에서 큰 함성이 울렸다. 포이터는 그에게 익숙한 함성과 찬사를 들으며 씨익 웃었다. 로젤린을 보는 시선에 비웃음이 가득하다.

    이어 의전관이 로젤린을 소개했다.

    “슈벤하임 대공의 호위기사 로젤린 메이…….”

    “꺄아아아아아!!”

    “로젤린!! 로젤린!!”

    포이터를 소개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커다란 함성이 터졌다. 의전관은 미처 로젤린의 소개를 끝내지도 못했다.

    “기다렸어! 로젤린!!”

    “반드시 이겨!!”

    지축이 뒤흔들리는 것만 같은 함성에 귀가 아플 정도다.

    함성의 주인은 제도 귀족이었다. 로젤린의 오랜 팬인 귀부인들은 또 로젤린의 경기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여 어쩔 줄 몰라했다. 그녀들의 남편이나 형제, 혹은 아들은 그녀들의 눈치를 살피며 로젤린에게 호응했다.

    지방의 영주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로젤린 메이어라는 무명의 기사에게 향하는 찬사가 너무나 과하다.

    황제 일가가 앉은 상석의 상황을 알았다면 더 놀랐을 것이다. 잠행하여 종종 콜로세움의 경기를 보러 가곤 하는 황후다. 황후 또한 실룩거리는 입가를 근엄하게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로젤린의 뺨이 붉어졌다. 민망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를 잊지 않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이만큼 있다는 건 무척 기쁘다.

    관람석으로 꾸벅 인사를 하자 함성은 미칠 듯이 커졌다.

    몇 분이 지나서야 의전관은 겨우 상황을 수습하고 소개를 마칠 수 있었다.

    “로젤린 메이어 경입니다.”

    황망하게 로젤린을 보던 포이터의 눈매에 차츰 노여움이 어렸다.

    로젤린이 레젠의 유명한 검투사 출신이라는 건 아멘텐 백작에게 듣긴 했다. 그녀의 출신은 그녀를 얕잡아보기에 아주 충분했다.

    저질적인 유흥을 위해 제 실력을 파는 검투사가 창부와 다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천박하기 짝이 없는 출신이었다. 검투사 따위가 아무리 실력이 좋아 봐야 천한 출신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로젤린 메이어는 크리스토퍼 메이어의 누이다. 크리스토퍼의 연승 기록을 깨지 못한 건 애석하지만 그의 누이를 처참하게 짓밟아주는 건 꽤 짜릿할 것이다.

    포이터는 그렇게 생각하고 오늘의 결투 또한 승리를 확신했다. 그렇기에 로젤린에게 쏟아지는 과도한 열기는 그를 더욱 분노하게 했다. 이 경기장에서 그가 다른 기사에게 밀린 적은 지금이 처음이다.

    “주신과 황제 폐하의 어전에서 명예로운 경기가 되길 기원합니다.”

    로젤린과 포이터는 의전관의 손짓에 따라 왼팔을 가슴 앞에 수평으로 세워 인사했다.

    삐이이이이.

    인사가 끝나자 병사가 길게 나팔을 불었다. 결투의 시작이다.

    로젤린이 검을 빼내기가 무섭게 포이터가 단숨에 간격을 좁혔다. 챙! 검과 검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쇳소리에 어느 귀부인이 오싹거리는 팔뚝을 문질렀다. 무섭도록 침묵한 관중석 위로 어지러운 검명이 연이어 흩어졌다.

    로젤린은 철저히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녀의 머리로, 가슴으로, 배로, 팔로, 검격이 사납게 쏟아졌다.

    ‘이상하다…….’

    사방에서 매서운 기세로 그녀를 노리는 포이터의 검을 방어하며 로젤린은 갸웃했다. 그녀가 처음부터 소극적인 방어를 고수한 이유는 간단했다. 실력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포이터와 그녀의 실력 차이를 확인하는 게 먼저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렇게 딴생각을 할 여유가 자신에게 있다는 게 이상했다.

    ‘약하잖아?’

    객관적으로 포이터는 뛰어난 실력을 지닌 기사이다. 내려치는 검격에는 묵직한 힘이 실려 있고, 찌르는 검 끝에서는 날카로운 기가 빛난다. 그런데도 약했다. 아니, 로젤린보다 약했다.

    포이터의 검은 지극히 용맹하였지만 매우 교본적이었다. 검격의 하나를 보면 이어지는 검로가 예측이 될 만큼 정석적인 검술이다. 허점도 자꾸 보였다. 일부러 허점을 유도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여 무시했지만 검을 자꾸 계속 보니 알겠다. 진짜 허점이다.

    역시 이상하다.

    까앙! 포이터의 검이 튕겨나가지 않고 맞부딪친 로젤린의 검과 힘겨루기를 했다. 두 사람의 얼굴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대화를 할 틈이 생겼다.

    “포이터 경, 내가 댁보다 실력이 뒤진다고 해도 대놓고 살살 상대하면 약 올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빠. 우리 둘 다 기사니까 최선을 다한 공명정대한 승부를 해 주면 안 될까? 원망하지는 않겠다.”

    로젤린은 진지했다. 이렇게 약할 리가 없으니 분명히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막말로 한껏 그의 부아를 돋우긴 했으니 조롱당해도 항의할 말은 없다. 정중하게 부탁했지만 포이터의 얼굴이 왠지 이상했다.

    로젤린이 막말을 할 때보다 얼굴이 더 시뻘게졌다. 눈이 부릅떠지고 이마에 굵은 핏대가 선다.

    “이 쌍년이!!”

    불 같은 성난 외침을 뱉으며 포이터가 검을 휘둘렀다.

    결국 귀족의 입에서 천박한 욕을 끌어낸 로젤린은 어리둥절하여 이리저리 검을 부딪쳤다.

    ‘왜 화를 내는 거야? 부탁은 안 들어 주면 되지.’

    이 시각, 제일 조마조마한 라울을 비롯한 관중석의 초조한 시간이 두 기사의 결투를 응시했다. 언뜻 보기에 불리한 건 로젤린이었다. 화려한 검술로 몰아쳐 가는 포이터와는 다르게 로젤린은 소극적으로 방어만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검술을 아는 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대공의 호위기사가 이기겠군.’

    ‘아무리 그래도 실력차가 너무 심하지 않나.’

    ‘금방 승부가 날 텐데 왜 방어만 하고 있는 걸까?’

    얼핏 궁지에 몰리는 것 같은 로젤린이지만 그녀는 결투를 시작하고 단 한 발자국도 밀리지 않았다. 방어 또한 포이터의 공격에 허겁지겁 대비하는 게 아니었다. 포이터가 공격할 곳을 미리 읽어 먼저 방어하고 있는 중이었다.

    ‘역시 이상해.’

    로젤린도 슬슬 눈치를 챘다. 포이터가 힘을 빼고 실력을 감춘 채 싸우는 게 아니라 진짜 그녀보다 약하다는 것을.

    ‘어째서? 무려 제도 귀족의 호위기사장인데? 마상 시합 연속 우승자인데?’

    로젤린은 알지 못했다. 제도 귀족의 호위기사단을 비롯한 황성 근위대 로열 가드의 치명적인 단점이 바로 실전 부족이다.

    제도 귀족은 제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벗어난다고 해도 산적들은 으리으리한 귀족들의 행차는 건드리지 않는다. 이 고질적인 단점을 조금이라도 해결하기 위해 마상 시합이 장려된다. 문제는 마상 시합 또한 철저한 규정이 존재했다.

    즉 정석적인 교본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대결만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기스 나이트, 특히 로젤린은 달랐다. 그녀는 15살까지 체계적인 검술을 배웠고 즉시 실전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로젤린의 검술은 10년 동안 모든 허례허식을 전부 제거하고 철저하게 실용적으로 다듬어졌다. 아예 처음부터 실전으로 검술을 익혔다면 기본을 닦지 못하여 나쁜 습관이 생겼을 것이다.

    로젤린은 천부적인 재능도 있었고, 체계적인 검술을 배워 튼튼한 기반을 닦았다. 그 실력이 실전으로 단련된 것이다.

    아이기스 나이트는 항상 실전과 마주하고 있는 전투적인 기사단이다. 아이기스 나이트의 평균적인 수준은 제도 귀족의 호위기사단을 훨씬 웃돌았다.

    로젤린은 그 아이기스 나이트에서도 최상위로 손꼽히고 있는 기사다. 알렉산더가 그녀의 실력을 속으로만 평가하고 말하지 않았으니 로젤린 자신은 모르고 있지만.

    또한 프레데릭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로젤린은 자각하지 못했으나 그녀의 실력은 검투사로 있을 때보다 발전했다.

    로젤린은 더 이상의 시간 낭비를 끝내기로 했다.

    채앵!!

    승부는 한순간이었다. 로젤린의 검이 위로 높이 솟구친 순간 모든 게 끝났다.

    관중들이 숨을 삼켰다. 허공으로 날아간 포이터의 검이 저 멀리 풀썩 떨어지는 광경을 그들은 목격했다.

    단 한 번의 일격으로 포이터는 무장해제가 되었다. 기사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로젤린의 일격을 받은 충격으로 한쪽 무릎을 꿇어 버린 포이터의 목에 그녀가 오른손의 검을 겨누었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거칠게 헐떡거리는 포이터와는 다르게 로젤린은 호흡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검술에 문외한인 귀족들도 한눈에 알 수 있는 실력 차다.

    “……스, 승자는 로젤린 메이어입니다.”

    의전관이 뒤늦게 승리를 선언했다. 잠시의 침묵 후, 다시금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제도 귀족이든 지방 영주이든 한결같이 이 압도적으로 뛰어난 실력을 자랑한 기사를 찬양했다. 관중석에서 그녀에게 쏟아지는 꽃송이의 비를 맞으며 로젤린은 왼손을 주먹 쥐었다.

    ‘나, 강했구나.’

    담담한 미소가 입가에 어렸다.

    * * *

    최초의 결투에서 승리했다.

    그 승리가 로젤린의 인생을 극적으로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변한 건 있다.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자신의 실력을 확신하게 된 로젤린은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사소하다면 사소하다고 할 수 있을 변화다. 그렇지만 자신감을 회복하고 마음에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 건 긍정적인 변화였다.

    “기사님, 팔을 올려 주시겠어요?”

    로젤린은 얼른 양팔을 수평으로 올렸다. 재봉사가 줄자로 그녀의 치수를 재고 기록했다.

    결투가 끝나고 동료 기사들의 떠들썩한 축하 인사 속에 대공저로 돌아왔다. 몸을 씻고 저녁을 먹자마자 재봉사가 줄자를 들고 다가왔다. 로젤린은 내일의 대연회에 결투의 우승자로 초대되었다.

    프레데릭의 호위기사로서가 아니라 결투의 우승자로서 참석하는 연회다. 기사단의 제복을 입는 건 예의에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드레스를 입을 수도 없었다. 예정에 없던 갑작스러운 초대였으므로 로젤린의 예복은 전혀 준비되지 않았다. 프레데릭이 미혼인 데다 여자 형제가 없어 대공저에는 여분의 여자 의상도 없었다.

    여자 의상이 있었다고 한들 고쳐 입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로젤린의 신장은 일반적인 여성의 평균 신장을 상회한다. 기장이 짧은 드레스를 길게 수선하기는 어렵다.

    로젤린과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라울은 결국 프레데릭의 예복 한 벌을 갖고 왔다. 차라리 이 예복을 줄여서 입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곧 로젤린의 신체 사이즈를 전부 기록한 재봉사는 밤새 수선하여 내일 오전 중에 가지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내일 연회까지 시간을 맞추기 위한 재봉사의 고생은 프레데릭이 넉넉한 대금으로 대신해 줄 것이다.

    재봉사가 돌아가면 기사단의 동료들과 축하 파티를 하기로 했다. 파티라고 해 봤자 식당에서 술을 마시며 노는 게 전부지만 재미있을 것이다. 제 일처럼 기뻐해 주는 동료들을 떠올렸다. 자신이 다른 복 - 특히 돈복 - 은 없어도 인복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식당으로 내려가기 전에 침대에 잠시 누웠다. 로젤린은 천장으로 양팔을 올렸다. 승리의 짜릿한 쾌감이 양손에 남아 있었다.

    콜로세움에서 이겼을 때와도, 마수를 사냥하였을 때와도 다른 쾌감이다.

    ‘암살단의 우두머리가 정말 강한 거였네.’

    자신감을 꺾어 놓는데 큰 공을 세운 암살자의 우두머리를 떠올렸다. 로젤린은 눈을 감고 그때의 싸움을 회상했다. 머릿속으로 암살자와의 싸움을 재현하며 최선의 공격을 해 보았지만, 역시 사내에게 이겼을 거란 확신은 들지 않는다.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 어둠 속에서 일개 암살자로 부려지고 있다니…… 후작님의 뜻이었을까, 아니면 그 사내가 스스로 맡았을까?’

    어느 기사단에 가도 실력을 인정받아 번듯한 자리에 오를 사내다. 야음을 틈타 연쇄살인마의 가면을 쓰고 사람을 살해하는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실력이었다.

    ‘다음에 만나면 적어도 부상은 입혀야지.’

    로젤린은 사내의 검술을 떠올리며 공격하고, 방어하고, 공격했다.

    그러다 문득 하나의 생각이 들었다.

    만약 프레데릭이 클레타트 후작처럼 로젤린에게 무자비하게 암살하라는 명령을 한다면.

    그야 물론 로젤린은 따를 것이다. 그녀는 그의 기사였고 기사에게 불복종은 허용되지 않는 단어니까.

    하지만 다르다.

    ‘전하가 그런 비열한 수법을 쓰실 리는 없어.’

    그것은 확고한 자신이었다. 그녀의 자신감보다 더욱 확고한 믿음. 프레데릭을 믿는 그녀의 마음.

    주군이니 기사이니 하는 주종 관계로 만나지 않았어도 그녀는 결국 프레데릭을 믿게 되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프레데릭이 알게 된다면 매우 기뻐하며 이제 남녀 관계를 시작해 보자고 할 게 뻔하니 말하지는 않겠지만.

    눈을 감고 누운 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깜빡 잠이 들었다. 로젤린은 맥스가 식당으로 오라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못 듣고 다음 날 아침까지 푹 잠을 잤다.

    다음 날, 수선한 예복은 무사히 오전에 도착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프레데릭의 옷을 입자니 기분이 좀 묘하긴 했지만 옷은 잘 맞았다.

    프레데릭과 로젤린은 함께 마차에 탔다. 처음에는 말을 타고 가려고 했지만 정식으로 연회에 초대받은 것이니 마차로 가는 게 옳다는 라울의 조언이었다.

    로젤린은 남작가에서 성장할 때에도 황성의 연회에 참석한 적이 없었다. 사교계 데뷔를 하기 전이었던 데다 메이어 남작가의 지체도 높지 않았다.

    귀족으로 지낼 때에도 정식으로 참석하지 못하였던 황성의 연회를 기사의 신분으로 참석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전하.”

    맞은편에 앉은 프레데릭을 불렀다. 창턱에 팔을 괴고 창밖을 보고 있던 프레데릭이 고개를 돌렸다.

    요즘 이상하다.

    로젤린은 갸웃했다. 정확히 언제부터라고 날짜를 확정하지는 못하겠으나, 며칠 전부터 프레데릭이 이상했다. 느긋하고 여유 있게 그녀를 대하던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다. 거리를 두고, 조심스럽고, 뭔가를 삼가는 조용한 모습이다.

    지금도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니 슬쩍 속눈썹을 내렸다.

    친구가 이처럼 태도를 달리하면 물을 내용은 간단하다. 나한테 죄를 지은 거라도 있냐, 켕기는 거라도 있냐, 라고 장난스럽게 물을 수 있다. 하지만 프레데릭은 그녀의 친구가 아니었다.

    로젤린은 결국 오늘도 이유를 묻지 못했다.

    “제가 연회에서 주의해야 할 내용이 뭐가 있습니까?”

    대신 당장 눈앞에 닥친 상황에 대한 조언을 부탁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라울과 집사가 정리해 준 중요 귀족들의 명단과 그들의 파벌을 외웠다.

    일개 기사인 그녀의 발언이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겠으나 적어도 분위기를 읽을 눈치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후작파 귀족의 앞에서 후작의 험담이라도 했다가는 큰 실수다.

    프레데릭이 조금 표정을 풀었다. 창턱에 팔을 괸 여전히 비딱한 자세였다.

    “귀족들 명단은 공부했다며? 그럼 평소처럼 적당히 예의만 지키면 되지.”

    구체적인 설명은 아니었으나 대수로울 것 없다는 반응에 왠지 마음이 놓였다. 평소처럼 예의 있게. 로젤린은 당연한 그 대답을 마음속으로 반복했다.

    “긴장되는 건 오히려 난데.”

    프레데릭이 가볍게 말을 이었다.

    “수십 명의 연적들이 있을 공간으로 끌려가는 기분이라고.”

    “연적들이라니요?”

    “네 후원자들.”

    로젤린은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연적이라니. 그런 게 아닙니다.”

    “적어도 시어머니나 시누이는 될 거 아니냐. 네게 실수라도 했다가는 잡아먹히고도 남을 듯한 분위기던데?”

    “음…….”

    차마 단호하게 부정하지 못하는 로젤린의 앞에서 프레데릭은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마차 안에 감돌던 어색한 분위기는 사라졌다. 로젤린은 웃음을 머금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덕분에 프레데릭의 표정이 다시 가라앉은 건 보지 못했다.

    마차는 오래지 않아 황궁에 도착했다. 대연회가 열리는 홀로 입실한 로젤린과 프레데릭은 사람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특히 인상적으로 각인한 새로운 인사인 로젤린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젊은 나이인데도 실력이 아주 훌륭하군.”

    “여자 기사라고 하길래 포이터 경의 승리를 확신했는데 내 판단이 몹시 옹졸했네.”

    “인재를 발탁하시는 대공 전하의 혜안에 감탄했어.”

    주로 실력에 대한 칭찬을 하는 건 검술을 익히고 있는 자들이었고,

    “로젤린! 네가 싸우는 모습을 그렇게 근사한 곳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어.”

    “내년엔 마상 시합에 참가해 보는 건 어떠니? 평기사라도 원칙적으로는 규정에 어긋나지 않아.”

    “네가 검투사를 은퇴한다고 했을 때는 많이 아쉬웠는데 멋진 기사가 된 널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대공 전하를 모시고 자주자주 레젠으로 오렴.”

    로젤린의 과거 후원자들도 변함없이 찬사를 보냈다.

    로젤린은 검투사였을 때 번듯한 연회나 파티에 참석하였던 적이 없다. 기껏해야 후원자들이 저택에서 여는 티파티나 가든파티 등의 소규모 파티에만 응했다. 후원자들은 대연회에서 거리낄 것 없이 로젤린과 만나게 된다는 색다른 경험을 굉장히 즐겼다.

    황제 부처가 입실하며 연회의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었다.

    카를이 소파 옆자리에 앉은 프레데릭에게 속닥거렸다.

    “내 마누라 눈동자에 하트가 띄워진 건 신혼 때도 보지 못한 모습인데, 어쩌지?”

    말없이 앉아 있기만 하던 프레데릭도 무심코 황후를 살펴보았다. 황후는 아쉬운 눈길로 로젤린을 쫓고 있었다.

    로젤린을 둘러싸서 담소를 나누는 귀부인의 무리에 끼이고 싶은데 그녀의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영 망설이고 있는 눈치였다.

    프레데릭은 실소했다.

    “어쩌냐고 되묻고 싶은 건 난데.”

    “역시 연적이 많아서 그런가?”

    태연한 어조로 카를이 정곡을 찔렀다. 프레데릭이 말없이 바라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넘겨짚었다면 사과하지. 네가 호위기사를 여자로 발탁한 건 없던 일인 데다 일전에 황궁에서 그녀를 대하는 태도도 심상치 않아보였거든.”

    “……뭐, 부정은 하지 않겠는데.”

    프레데릭은 짧은 한숨을 쉬며 시선을 거두었다. 클레타트 후작과의 일이 정리되기 전까지는 로젤린에게 예전처럼 편히 접근할 수가 없다. 후작을 제거하고, 그 뒤에 진실을 알았음에도 그녀에게 비밀로 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할 작정이었다. 몇 년이 걸리더라도.

    “표정이 안 좋은 걸 보니 문제가 있는 모양이지? 도와줄까?”

    카를이 손 안에 쥔 와인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멀리에서 보기에 두 사람은 사사로운 한담을 나누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실제로도 사담을 나누는 건 맞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최근의 정세와 전혀 무관한 내용은 아니다. 로젤린 메이어라는 그녀의 신분이 있으므로.

    ‘카를에게 말할 수는 없어.’

    프레데릭은 라울 같은 최측근에게도 숨긴 비밀을 카를에게도 숨겼다. 카를이 알게 된다면 로젤린은 동정을 받을 것이다. 동시에 정치적으로도 이용당하게 될 것이다. 그녀의 과거는 정치적으로 포장하기에 아주 충분했고, 카를은 그것을 놓칠 사람이 아니다.

    카를이 마음만 먹는다면 로젤린의 과거를 알아내는 건 30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프레데릭을 배려하여 로젤린에 대한 정보를 일부러 받지 않고 있는 카를에게 몰래 사죄의 말을 했다.

    결과적으로 오랜 친구이자 주군인 카를까지 속이는 일이라 마음이 불편했다. 프레데릭은 화제를 돌렸다.

    “마법 협회를 조사하는 일의 진척은 어떤가?”

    “워낙에 국가 권력에 적대적인 자들이라 추적하고 정보를 캐내는 일이 쉽지 않더군. 그 후에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잠잠하니 새로운 단서도 없다. 조용한 건 다행이긴 하다만…… 뒤에서 뭘 꾸미고 있을지 알 수가 없으니.”

    카를이 혀를 찼다.

    로젤린이 절묘한 타이밍에 암살을 막았으며 절묘한 인물을 구했다. 손녀가 납치당할 뻔하였던 옥스타인 공작을 비롯한 황제파가 주축이 되어 각 귀족들의 사병으로 야경단을 꾸렸다.

    후작파의 귀족들은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으나 제도를 흉흉하게 하는 암살자들을 찾는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끝까지 반대하지는 못했다.

    제도 경비대를 비롯한 야경단이 순찰을 강화하고 신년 축일의 고조된 분위기가 겹쳐 레젠의 민심은 차츰 안정되어가고 있었다.

    “안쪽은 괜찮고?”

    프레데릭이 말하는 ‘안쪽’은 황제 일가의 궁이 있는 내궁을 뜻한다. 조심스러운 그의 질문에 카를의 안색은 찌푸려졌지만, 곧 회복했다.

    “문제없어. 이제 두 번 다시 경비가 뚫리지 않을 거야.”

    그 짧은 한마디에는 자식을 먼저 보내야 했던 아버지의 후회와 고통이 있었다.

    황후는 황제와 결혼하고 2년 만에 황자를 출산했다. 후계자의 탄생에 기뻐한 것도 잠시였다. 황자는 반년 만에 사망했다. 유아의 사망이 흔하였으므로 묻힐 뻔한 비극을 프레데릭이 충고했다.

    - 사망 원인을 제대로 확인해 봐.

    카를은 검시를 반대하는 황후를 설득하여 사망 원인을 조사했다. 미미한 독극물의 흔적이 검출되었다. 어른에게 투여했다면 가벼운 컨디션 난조로 끝났을 미량의 독극물이었다. 그렇지만 면역이 전혀 없는 아기에게 투여하면 호흡 곤란으로 죽을 수 있는 양이었다.

    배후에서 사주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뻔하다. 황후궁 시녀들과 근위대의 절반이 경질되었다. 주범으로 체포된 시녀는 감옥 안에서 자살로 위장한 살해를 당했다.

    대로한 카를은 시녀와 근위대를 경질하는 게 아니라 모두 죽이려 했다. 그러나 프레데릭이 끝까지 말렸다.

    - 내성의 시녀와 근위대의 정기사는 귀족 출신이야. 그들을 전부 죽이면 그들의 가문에서는 황제를 어떻게 생각할까?

    카를은 황후의 통곡에도 불구하고 경질에서 그쳐야 했다.

    그 후 황후가 둘째를 임신하면서 시녀들은 측근부터 허드렛일을 하는 직위가 낮은 시녀들까지 전부 황제파에 속한 가문 출신으로 바꾸었다. 또한 해당 가문 기사단의 여자 기사들을 시녀로 위장하여 입궁시켰다. 그들은 로열 가드를 대신해 은밀히 황후와 황태자를 경호했다.

    황성 근위대인 로열 가드의 단장 멕켈 백작은 클레타트 후작의 처남이다. 황제는 아이러니하게도 근위대를 신뢰하지 못했다.

    프레데릭은 멀리 로젤린의 모습을 좇으며 중얼거렸다.

    “완고하게 중립을 지키던 옥스타인 공작이 넘어왔으니 후작의 일에도 차질이 빚어지겠지. 황태자 전하가 무사히 후계자로 성장하고, 밖의 일도 어렵고, 안의 일도 어렵다면 최악의 방법을 고를 가능성이 커지겠군.”

    내전이다.

    카를이 잔에 남은 와인을 한입에 비웠다.

    “안 그래도 후작령의 군대가 겨울 훈련을 빌미로 연대를 재편성했다는 보고가 오늘 아침에 올라왔어.”

    농한기인 겨울은 군대를 재편성하고 훈련하기에 최적의 시기이긴 하다. 그러나 현재 황제는 후작령의 동향을 상식선에서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말 반란을 일으킨다면 미친 짓이야.”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길 바라야…… 어라.”

    중얼거리던 황제의 목소리에 이채가 어렸다. 그와 같은 것을 보고 있던 프레데릭은 무심코 신음하며 머리를 눌렀다.

    클레타트 후작이 로젤린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로젤린은 연회, 즉 춤을 추는 파티에 참석하는 게 처음이었다. 후원자들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곳곳에서 춤 신청이 쏟아졌으나 그녀는 ‘부군과 먼저 춤을…….’ ‘약혼자께서 보고…….’ ‘저기 애인 분이…….’라는 핑계를 대며 슬쩍 빠져나갔다.

    오래 댈 수는 없는 핑계였다.

    “난 문제가 없겠지?”

    당시르 후작 부인이 눈웃음을 치며 넌지시 로젤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녀는 남편과 사별한 후 어린 자식들을 키우면서 가문을 이끌고 있는 여걸이다. 남편도 없고 정혼자도 없고 애인도 없었다.

    결국 로젤린은 실토했다.

    “남자 포지션에서 춤을 추는 건 너무 부끄러워요…….”

    안 그래도 주목을 받고 있는데 남자처럼 여자를 안고 춤을 춘다면 더 쳐다볼 것이다. 상상만 해도 민망하다.

    “남자 쪽의 스텝은 전혀 모르기도 하고요.”

    “문제 될 게 뭐가 있니?”

    솔직한 고백을 들은 당시르 후작 부인은 더 즐거워했다.

    “내가 잘 리드해 줄 테니까 걱정 마.”

    “창피하다는 게 더 큰 문제인데요…….”

    후작 부인으로부터 도망칠 틈을 찾고 있는 로젤린의 구원자는 의외의 사람이었다. 시종이 들고 있는 접시에서 술잔을 양손에 든 삼십대 중반의 남자였다.

    “메이어 경이 맞나?”

    남자는 왼손의 술잔을 로젤린에게 건네면서 물었다. 얼떨결에 술잔을 받은 로젤린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멈칫했다. 클레타트 후작이다.

    “……마, 맞습니다.”

    설마 그가 먼저 자신에게 다가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클레타트 후작이 당시르 후작 부인에게 양해를 구했다.

    “방해해서 미안하오. 메이어 경과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괜찮겠소?”

    “편히 이야기를 나누십시오.”

    당시르 후작 부인은 드레스의 스커트를 양손으로 올리며 후작에게 인사하고는 자리를 물러났다. 손에 든 술잔을 마시지도 내려놓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로젤린에게 후작이 눈짓했다.

    “자리를 이동해도 되겠나?”

    로젤린은 얼떨떨한 마음으로 후작의 뒤를 따라갔다. 근처의 테라스였다. 해가 기울기 전이다. 다소 쌀쌀한 추위였으나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커튼을 쳐서 사람이 있다는 걸 알린 후작이 난간에 팔을 기대며 섰다. 편한 태도였다.

    “어렸을 때 모습이 많이 남아 있군.”

    “……절 기억하고 계십니까?”

    “물론이지. 메이어 남작의 자제들을 어찌 잊겠는가.”

    약간 어이없는 감상이기도 하고, 상황에 맞지도 않는 감상이지만, 후작의 한마디에 로젤린은 살짝 감동했다.

    “옛일은 미안하게 되었네. 내가 있었다면 일이 그렇게 크게 번지지 않았을 테지만 하필이면 지방에 내려가 있을 때였던지라…….”

    후작이 길게 탄식했다.

    “변명같이 들리겠지만 메이어 남작과 그 가문의 불행은 내게도 큰 아픔이었다네.”

    다른 사람도 아닌 배신당한 당사자인 후작의 위로였다.

    가슴 안쪽이 울컥했다. 목까지 깔깔하게 아리고 눈가가 따가워졌다.

    “……아버지와 큰 오라버니의 죄는 제가 평생 갚겠습니다.”

    “잘못이라…….”

    후작이 잔을 비우며 로젤린의 말을 받아 중얼거렸다.

    “그건 잘못이 아닐세. 잘못이 있다면 남작이 나와 모후, 2대에 걸쳐 충성을 바쳤는데 그릇된 선택을 할 때까지 미처 사정을 헤아리지도 못한 나에게 잘못이 있겠지.”

    혼잣말처럼 낮게 속닥거린 후작이 고개를 올렸다.

    “경은 어떻게 지냈나? 경의 둘째 오라비가 행적을 감췄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남작가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네. 빚이 남아 있다면 내가 청산해 주고 싶다만.”

    검투사가 된 이후 로젤린은 자신의 행적과 가문을 감추지 않았다. 후작이 마음만 먹는다면 금방 검투사 로젤린 메이어와 빵집의 주인 수잔나 메이어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작과 대화하며 깊은 감상에 젖은 로젤린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검투사가 되어 빚을 갚았습니다. 빚은 전부 갚았으니 후작님의 말씀만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빚이 남아 있었다고 하여도 제가 사람이라면 어찌 후작님의 은덕을 염치없이 받을 수 있겠습니까.”

    “검투사? 고생이 많았겠군. 얼굴의 상처는 그때에 다친 건가?”

    “예, 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로젤린은 담담히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후작의 눈빛이 서늘해졌다가, 곧 돌아왔다.

    “현재는 슈벤하임 대공의 휘하에 있지 않던가?”

    “몇 개월 전부터 평기사로서 대공 전하를 섬기고 있습니다.”

    “어쩌다 먼 슈벤하임까지 갔는가. 기사가 되고 싶었다면 제도의 기사단에 입단하여도 되었을 텐데. 경의 실력이라면 비록 여자라는 핸디캡이 있어도 어느 기사단에 가도 환영받지 않겠나.”

    “……부끄러운 얘기입니다만, 처음 로열 가드에 입단 신청서를 냈다가 탈락했습니다.”

    “처음으로 입단 신청서를 낸 곳이 로열 가드인가? 탈락한 후에 바로 슈벤하임 대공령으로 갔고?”

    “말씀하신 내용이 맞습니다.”

    과거를 캐묻는 불필요한 질문이었으나 로젤린은 의심하지 않고 대답했다. 후작의 탐색하는 시선이 로젤린을 훑었다.

    “술은 마시지 못하는가?”

    뜬금없는 질문이 날아왔다. “예?”하고 되묻는 로젤린에게 후작이 그녀가 여전히 들고만 있는 술잔을 가리켰다.

    “경이 술을 마시지 못하는데 내가 억지로 권한 게 아닌가 해서 말일세.”

    “아, 아닙니다. 술은 좋아합니다.”

    로젤린은 급히 대꾸하며 술을 마셨다. 예상외로 도수가 무척 높은 술이었다. 술이 넘어간 목이 금방 따가워지고 속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연회에 내놓는 술은 도수가 낮거나 과일 음료에 가까운 술이 대부분인데 이상한 일이다.

    급히 마셨더니 취기가 더 빨리 도는 것 같기도 하다. 로젤린은 약간 화끈거리는 뺨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이 술을 마시고도 멀쩡한 걸 보니 후작은 주량이 무척 센 모양이었다.

    후작이 그녀의 손에서 손수 술잔을 빼내어 테라스의 난간에 올렸다. 나란히 비어 있는 두 술잔이 난간 위에 놓여 있다. 같은 모양의 술잔에 같은 용량, 같은 투명도와 같은 색의 술이 따라졌다.

    직접 마셔서 확인하지 않는 이상 두 잔에 담겼던 술이 다른 술이었다는 걸 눈치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두 비워졌으니 이제 확인할 방도도 없었다.

    “메이어 남작과 그의 가족들에게는 언제나 부채를 지고 있는 기분이었다네. 이렇게 경의 소식을 듣고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어서 무척 기쁘군.”

    이상하다.

    그녀도 주량이 무척 센 편인데 취기가 너무 빨리 올랐다. 머리가 몽롱하게 흐렸다. 로젤린은 실수하기 전에 후작과 대화를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테라스에서 바람을 쐬며 잠시 있다 보면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올 것이다.

    당황한 표정을 숨기려고 애쓰는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며, 후작이 말했다.

    “다시 한 번 경의 가문이 날 섬기지 않겠는가?”

    로젤린에게 자신의 기사가 될 것을 넌지시 제안하는 말이다. 한 번 자신을 배신한 기사의 가문에서 또 기사를 발탁하겠다는 건 쉽게 내리지 못할 결단이다. 로젤린이 반년 전에 후작의 제안을 들었다면 크게 황송하였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었다.

    로젤린은 프레데릭의 기사였다.

    만약 그녀가 정치적인 면모에 밝거나 경험이 많았다면 원만하고 능숙한 대답을 하였을 것이다. 제안을 생각해 보겠다거나, 시간을 달라거나, 와 같은 대답을.

    그러나 로젤린은 기사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후작이 일부러 독한 술을 마시게 하여 방심하도록 하지 않았어도 그녀의 대답은 똑같았을 것이다.

    “제 검과 충성과 목숨을 바친 주인은 평생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10년 전 둘째 오빠 크리스토퍼가 클레타트 후작에게 하였던 대답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크리스토퍼 메이어와 로젤린 메이어는 기사였다.

    * * *

    연회장에서 이어진 전용 휴게실로 들어온 클레타트 후작은 문을 닫자마자 허리를 꺾으며 입을 막았다.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격한 기침이 입을 막은 손수건 안쪽으로 흩어졌다.

    간신히 기침을 진정시킨 그는 약을 꺼내 물을 마시지도 않고 씹어 삼켰다. 소파에 털썩 앉아 눈을 감고 등받이에 목을 기대었다. 적막한 휴게실에 후작의 기척만이 울렸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메이어 가문의 작자들은 융통성이라는 게 없어.”

    방안을 둘러보지도 않고, 대화할 사람을 찾지도 않고 던진 말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휴게실에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으나 후작은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

    “루이, 처리해라. 대공과 함께.”

    “존명.”

    소파 뒤쪽의 벽에서 묵직한 대답이 울렸다. 검은색 가면을 쓴 남자가 허리를 숙였다.

    철판을 손톱으로 긁는 것처럼 소름 끼치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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