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레젠의 밤 (8/16)

2. 레젠의 밤

이틀 전부터 제도 레젠의 북문 밖에는 기이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통행량도 많고, 통행량이 많은 만큼 사고도 잦은 레젠의 성문 밖에는 인가가 없다. 성문 근처에 오래도록 머무는 사람은 통행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노점이 전부였다.

그런 성문 밖에 변화가 생겼다.

귀족가에서 늦은 조찬을 끝내고 오전 일정을 시작할 무렵이 되면 온갖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마차들이 성문을 나왔다.

“어머, 부인께서도 오셨어요? 오늘은 날이 풀려서 좋지요?”

마차에서 내린 귀부인이 살갑게 인사했다. 인사를 받은 귀부인도 웃으며 답했다.

“면목이 없네요. 제가 며칠 별장에 내려가 있느라 소식이 늦어 어젯밤에야 알았지 뭐예요.”

“더 늦지 않으셔서 다행이에요. 늦어도 오늘 내일 중으로는 도착하지 않을까, 하더군요.”

모피 망토에 모피 장갑에 모피 모자에 모피 목도리에 모피 팔토시까지 중무장을 한 귀부인들이 다정히 담소하며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십여 개의 천막이 성문 밖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커다란 화로로 훈훈하게 불을 지핀 천막은 성문이 열리자마자 하인들이 서둘러 준비한 아늑한 공간이었다. 귀부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다과와 수다를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좀 더 허름한 천막에서는 하녀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점심 식사를 준비했다. 점심을 먹고 오후의 나른한 낮잠까지 즐긴 후에야 귀부인들은 하나둘씩 자택으로 돌아갔다.

이틀 사이에 북문 밖의 천막 무리는 작은 사교계가 되어 있었다.

귀부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 * *

높이 솟은 레젠의 성벽이 멀리 보였다. 전날, 인근 도시의 여관에서 푹 쉬며 원기를 회복한 프레데릭 일행은 통행객의 끄트머리에서 느긋하게 말을 몰았다. 평화로운 여정의 끝이 보였다.

제국의 중심부답게 성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프레데릭의 신분을 증명하면 일반 평민들이 드나드는 쪽문이 아니라 정문이 개방될 것이다. 그러나 프레데릭은 그냥 쪽문으로 들어가는 걸 택했다.

“신분 증명하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나 그냥 들어가는 시간이나 비슷비슷해.”

번거로운 일은 피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전에 레젠으로 올 때에도 프레데릭은 편하게 평민의 틈에 섞여 - 그의 복장이 절대 평민의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 쪽문으로 드나들었다.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로젤린의 신경은 다른 쪽에 쏠려 있었다. 오늘 아침에 프레데릭이 기어이 예의 털 망토를 꺼내어 입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시선을 강탈하는 강렬함이다.

‘저 털은 뭐로 만든 거야, 도대체. 재료를 조달해 준 사람은 누구고.’

그녀는 아이기스 나이트로서 최초로 사냥하였던 큰닭과, 프레데릭의 털 망토를 전혀 연관시키지 못하며 한가한 고민을 했다.

“근데 오늘은 조금 밀리긴 하는군.”

프레데릭이 따분하게 하품했다. 곁에서 말을 몰던 라울이 돌아보았다.

“제가 알아보고 올까요?”

“됐어. 살인마 때문에 경계 검문이 강화되어서 그런 거겠지.”

원칙대로라면 성문으로 드나드는 사람을 일일이 검문하지 않는다. 몇 달 전부터 제도를 뒤숭숭하게 만들어 놓고 있는 연쇄살인마가 치안을 엄격하게 만들어 버린 모양이다.

로젤린은 익숙한 고향의 하늘과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평생을 살아온 곳이라 역시 설렌다. 레젠에서 머무는 동안 잠깐 짬을 내어 가족을 만나러 갈 시간은 될 것이다.

‘잘 지내고 있겠지.’

흐뭇한 미소가 나왔다. 로젤린은 어깨를 약간 움츠리며 웃었다.

약간 뒤에서 말을 타고 있던 맥스가 가까이로 와서 속닥거렸다.

“너 그거 아냐?”

“뭘?”

“네가 웃을 때마다 전하가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시거든.”

묘한 눈빛이라니.

로젤린은 고개를 돌렸다. 아예 반쯤 등을 돌리고 그녀를 보고 있던 프레데릭이 시선이 마주치자 싱긋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새삼스러운 저 인사는 뭘까.

맥스가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하와 무슨 관계가 된 거냐? 여행을 오면서 느낀 건데 아무래도 너랑 전하가 좀 이상하다고.”

“아무 관계도 아닌데.”

프레데릭이 들었다면 매우 섭섭해할 만할 대답을 단호히 한 로젤린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기는 한 가지 했군.”

“무슨 내긴데?”

“별거 아니야. 어차피 내가 이길 거니까.”

맥스가 의심하며 더 캐물으려다 입을 다물며 시선을 움직였다. 로젤린도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프레데릭과 라울과 기사들과 병사들의 시선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스무 명은 넘어 보이는 귀부인들의 무리가 그들 쪽으로 오고 있었다.

“대공 전하!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일 먼저 다가온 귀부인이 스커트를 살짝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제도 귀족의 실세 중 하나인 당시르 후작 부인이다.

큰 교분이 있던 사람도 아닌데 반갑게 인사를 하자 프레데릭은 얼떨떨했다. 일단 말에서 내렸다.

“강녕하셨습니까.”

“어머머! 대공 전하 아니십니까?”

“건강하신 모습을 뵙게 되어 기쁩니다.”

당시르 후작 부인에게 인사를 하기가 무섭게 다른 귀부인들도 다가와서 한마디씩 인사를 했다. 갑자기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프레데릭은 답인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레젠까지 오는 길에 한 번도 맡을 일이 없었던 향수 냄새와 분 냄새가 순식간에 그를 점령했다.

‘……이 여자들이 갑자기 왜 이러지.’

하루아침에 프레데릭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도의 대 스타가 되었을 리는 없다. 이 많은 귀부인들이 굳이 성문 밖까지 나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모인 귀부인들의 면면도 공통점이 없었다. 황제파, 후작파, 중도파를 모두 아우르는 무리였다.

그렇지만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라고 직접적으로 묻는 건 귀족의 화법이 아니다. 프레데릭이 점잖게 말을 돌려 ‘근방에 모임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려던 때에 올람파 백작이 부채를 펼치며 눈웃음을 쳤다.

“여장을 풀지도 않으신 전하께 황송한 부탁이오나 일행 분께 잠깐 인사를 해도 될까요? 구면인 분이 있는지라.”

“물론입니다. 편히 회포를 나누십시오.”

여전히 정신없는 프레데릭이 허락을 하자마자 귀부인들은 뒤로 우르르 몰려갔다.

목표물은 로젤린이었다.

“아아, 로젤린! 이게 얼마만이니!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가 버리면 어떻게 해!”

“카트린 포날 그 여자가 네가 있는 곳을 감쪽같이 숨겼지 뭐니! 술 취해서 깜빡 입이 가벼워지지 않았다면 네가 온다는 것도 몰랐을 거야.”

“어쩜 좋아. 내 로젤린의 얼굴이 반쪽이 되었잖아. 이 추레한 장갑은 뭐니, 대체.”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야? 기사단이라면 기숙사에서 사는 거니? 콜로세움 숙소보다는 형편이 나아?”

“네가 없는 콜로세움 따위 태양이 없는 밤이나 다름없어!”

수십 마디의 대화들이 순식간에 다다다닥 쏟아졌다. 모두 로젤린, 로젤린, 로젤린이었다. 프레데릭을 비롯한 일행은 대경실색했다. 로젤린이 대체 뭐길래? 아니, 그전에 로젤린의 정체가……?

방금 전까지 분명히 그들의 동료였던 로젤린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 프레데릭은 분통이 터졌다.

‘내 로젤린이라니?! 나도 아직 로젤린에게 소유격을 붙인 적이 없는데!’

끊임없이 쏟아지는 대화의 홍수 속에서 로젤린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겸연쩍은 표정으로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때 마음이 급하고 경황이 없어서 미처 행선지를 말씀 드리지 못했어요.”

“어머, 얘! 사과를 받자는 게 아니야.”

“그럼. 넌 사과 같은 거 필요 없어. 나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입술만 있으면 돼.”

“스턴 부인, 넌지시 이상한 수작은 부리지 마세요! 그보다 로젤린, 어쩌자고 편지 한 통 보내기도 힘든 그따위 북쪽 촌구석으로 가 버렸니!! 기사가 되고 싶었으면 내게 말하면 되었잖니. 내 영지의 기사단이 널 위해 준비되어 있단다.”

흥분한 귀부인이 대공령이 고향인 사람들 앞에서 ‘그따위 북쪽 촌구석’이라는 실언을 해 버렸다. 다행히 얼이 빠진 프레데릭 일행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용케 알아들은 로젤린만 힐끔 프레데릭의 눈치를 살폈다.

“슈벤하임은 좋은 곳이에요. 그리고 제가 언제까지 신세만 질 수는 없었습니다.”

“맞아, 넌 절벽 위의 꽃이란 게 매력이지.”

“별로 그렇지는 않지만요.”

그녀들에게 둘러싸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로젤린도 조금 정신이 없었다. 약간 반응이 어눌해진 그녀를 둘러싼 귀부인들은 이 어설픈 모습도 몇 년 만에 처음이라며 즐거워했다.

“아이기스 나이트의 제복이니? 촌 동네라도 제복은 멋지구나! 대공 전하, 로젤린을 위해 멋진 제복을 준비해 주셔서 감사해요.”

거의 존재가 무시되고 있던 프레데릭은 난데없는 감사를 받았다. 그는 얼이 빠졌던 표정을 수습하며 애매하게 웃었다. 특별히 로젤린을 위해 준비한 게 아니라 원래 아이기스 나이트의 제복이 그것이다, 라는 대답을 해 봤자 듣지도 않을 것 같았다.

“검은색 제복은 피가 튀어도 흔적이 잘 드러나지 않겠지? 그 점이 더욱 좋아…… 언제라도 날 죽이러 오렴, 로젤린.”

황홀하게 로젤린을 올려다보는 귀부인의 입에서 위험한 대사가 나왔다. 경황없이 있던 일행들까지 깜작 놀란 대사였지만 놀란 사람은 그들뿐이었다. 로젤린도 다른 귀부인들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래오래 건강히 사셔야죠.”

“널 위해서?”

“예에.”

“응, 널 위해서 잘 살아가고 있을게.”

귀부인들은 눈빛이 몽롱하게 젖어 다른 세상을 걷고 있는 그녀를 익숙하게 무시했다.

“참, 레젠의 대공저에 조촐한 선물을 보내었단다.”

“네가 레젠에 온다는 소식을 너무 늦게 들어서 준비도 제대로 못했어.”

“옛날 신체 사이즈로 맞췄는데 못 본 사이에 키가 더 컸으면 어쩐담.”

“일찍 들었다면 널 위해 근사한 선물을 준비했을 텐데…… 카트린 그 여자가!”

귀부인들은 한참이나 로젤린을 둘러싸고 대화의 홍수를 넘실거렸다. 프레데릭 일행이 성문을 통과할 즈음에야 겨우 그녀들은 로젤린을 해방시켰다.

“가급적 레젠에 오래도록 머물러 주면 좋겠어.”

“또 보자꾸나.”

“사랑해!”

귀부인들은 연신 뒤를 돌아보며 하나둘씩 마차로 사라졌다. 그녀들에게 일일이 눈을 맞추며 인사한 로젤린이 겨우 말에 다시 올랐다.

프레데릭이 몹시 낯선 눈으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군지 물어도 되나?”

일행의 모두가 궁금해하던 내용이었다. 아닌 척하고 있어도 모두 귀가 쫑긋 섰다. 로젤린 멋쩍어하며 대답했다.

“제가 검투사였을 때 후원해 주셨던 분들입니다.”

후원자들의 공세는 끝나지 않았다.

레젠 남쪽의 고급 저택 지구에 있는 대공저를 몇 달 만에 찾아온 프레데릭을 제일 먼저 맞은 건 산더미 같이 쌓인 선물들이었다.

“……저게 전부 로젤린에게 온 선물이라고?”

“이틀 전부터 메이어 경에게 오는 선물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아, 저기에 있는 건 메이어 경에게 선물을 보낸 분들이 전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한마디로 로젤린에게 선물을 보내면서, 그녀의 주군인 프레데릭에게는 입을 싹 닦는 게 민망하니 덤으로 주는 선물이었다.

방 하나를 꽉 채우고도 남는 선물들에 익숙해졌는지 집사는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집사가 종이에 하나씩 정리한 품목 목록도 1미터가 넘었다.

“허허.”

프레데릭은 그냥 웃었다.

선물 더미를 바라보는 로젤린의 뺨이 조금 붉었다.

이 정도의 선물 공세를 받은 적은 없었다. 부담이 되는 선물은 그녀가 정중히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소식이 끊어졌던 그녀가 오랜만에 레젠으로 오니 후원자들이 흥분하여 로젤린이 사양하던 선을 넘었다.

프레데릭의 앞이라서 참고 있었지만 아벨이나 맥스처럼 그녀와 친한 기사들은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입이 근질거렸다. 로젤린을 ‘평범한 부하1’처럼 대하던 기사대장 사무엘마저도 영 궁금한 눈치였다.

프레데릭만 좌절 중이었다.

‘……내가 감히 선물로 호감도를 쌓아 보겠다는 얄팍한 생각을 했다니…….’

후원자라는 귀부인들이 그녀에게 주는 선물이 저렇게 어마어마하다. 프레데릭의 조촐한 선물이 눈에 차기야 하겠는가.

‘……저걸 이기려면 뭘 줘야 하지? 영지라도 팔아야 하나?’

“휴우.”

한숨을 쉰 프레데릭이 상황을 정리했다.

“기사단 숙소에는 전부 옮기지는 못할 테니 일단 저택 내의 빈방에 두지. 로젤린은 편하게 드나들면서 선물을 정리해도 된다. ……긴 여정에 수고가 많았으니 오늘은 다들 쉬도록. 식사 준비가 되었을 거다.”

로젤린과 레젠에서 데이트할 계획을 신나게 짰는데 왠지 기운이 다 빠졌다. 기사단을 물린 프레데릭은 지그시 자신의 보좌관을 응시했다.

“라울.”

“싫은데요.”

라울이 질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명령하실 내용이 뻔하니까요.”

그러거나 말거나 프레데릭은 자못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명령했다.

“로젤린이 어떤 검투사였는지 조사해 다오.”

숙소에 여장을 풀고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동료들이 벌 떼처럼 몰려들었다. 저 많은 귀부인들과 어떻게 알게 된 거냐, 무슨 사이냐, 도대체 레젠에서 뭘 하고 살았냐 등등 온갖 질문들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로젤린이 할 말이야 성문 밖과 똑같았다.

“검투사였던 건 다들 알잖아. 그 무렵에 날 후원해 주셨던 분들.”

“평범한 후원자가 이른 아침부터 네가 오는 걸 기다리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산더미 같은 선물을 보낸다고?!”

맥스가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듯이 외쳤다. 기사대장 사무엘마저도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동료들만이 아니라 상관까지 궁금해하니 민망했다. 게다가 로젤린은 더욱 민망한 대답을 자기 입으로 해야 했다.

“그분들이 내…… 팬이셔서…….”

자기 입으로 ‘내 팬들이 날 좋아하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의 말을 하려니 몹시 부끄러웠다.

“팬? 그냥 팬?”

아예 로젤린의 맞은편 식탁에 앉은 아벨이 되물었다. 말수도 없고 진지한 녀석이 그렇게 물으니 마치 취조당하는 느낌이었다. 로젤린은 한술도 뜨지 못하고 하염없이 식어 가고만 있는 스튜를 안타깝게 내려다보았다. 배고픈데.

“몇 년씩 날 후원해 주시고 응원해 주셨던 분들이라서 그래.”

발트란은 레젠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번화한 데다 최신 유행을 앞서 가는 레젠의 문화나 오락거리는 아주 늦게 발트란까지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콜로세움은 마수를 유희로서 사냥한다는 특성 때문에 발트란에 전해지지 못했다. 프레데릭을 호위하여 레젠까지 자주 드나든 기사들도 한가하게 레젠의 유행에 눈을 돌릴 여유는 없었다.

동료들은 검투사가 이만큼 큰 인기를 누릴 수 있다는 걸 도무지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너 되게 유명인이었구나…….”

“하녀들에게만 인기가 좋은 게 아니었냐.”

놀라워하기도 하고, 신기해하기도 하는 시선들이 로젤린을 콕콕 찔렀다. 바로 옆에서 빤히 쳐다보는 시선들을 무시하면서 식사를 할 만큼 로젤린의 낯은 두껍지 않았다.

침만 삼키면서 힐끔힐끔 스튜 그릇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사무엘이 눈치 빠르게 동료들을 흩어지게 했다.

“자, 궁금한 건 다 해결되었으니 로젤린은 그만 괴롭히고 자네들도 식사를 하지 그러나. 늦으면 못 먹는다.”

“예에.”

“로젤린, 나중에 여자들한테 인기 얻는 방법 좀 가르쳐 줘, 제발.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게.”

무척 절박하게 들리는 부탁을 마지막으로 동료들은 듬성듬성 흩어졌다. 겨우 식당에 식당다운 활기가 찾아왔다. 로젤린도 간신히 스튜를 먹기 시작할 수 있었다.

맞은편에서 여전히 신기한 눈으로 보는 아벨은 좀 부담스러웠지만.

식사를 끝내고 선물을 정리했다. 가득 쌓여 있는 물건들을 보니 예전 생각도 나고, 또 고맙기도 했다. 검투사를 은퇴하고 제대로 인사도 못한 채 사라진 지 몇 달이 지났다. 그래도 후원자들은 그녀를 기억하고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 험한 콜로세움에서 10년을 버텼다.

시작은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험하게 구르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 자신의 독한 결심 덕분이겠지만, 이처럼 그녀를 믿으며 응원하는 후원인들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 와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검투사로서 일할 때는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전혀 없었어.’

만약에 자신이 죽거나 심하게 다쳐 콜로세움에 설 수 없게 되면 남은 빚이 수잔나와 엠마에게 넘어간다.

로젤린은 필사적이었다. 동료들과 시간을 나누며 노닥거려도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강박 관념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조금 다른 걸까.’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진심 속에 아주 작은 여유가 생긴 걸까. 그렇기에 그곳에 프레데릭이 들어올 수 있었던 걸까.

감상에 젖었던 로젤린은 곧 머리를 털며 일어났다.

우선 선물 중 음식을 따로 분류했다. 그녀가 오늘 도착했다는 걸 알게 된 귀부인들은 갓 만든 따끈따끈한 과자며 케이크 등도 한가득 보냈다. 당연히 로젤린이 전부 다 혼자 먹기는 무리다. 로젤린은 예전부터 음식 선물 등은 동료들과 나누어 먹었다. 귀부인들도 알고 있으므로 항상 넉넉하게 보내 주었다.

‘우와, 스토아 와인이잖아.’

유명한 최고급 와인이다. 올해는 일조량이 안 좋아 생산이 적은 탓에 가격이 더욱 천정부지로 치솟은 스토아 와인이 한 궤짝이나 있었다.

‘내 연봉보다 훨씬 비싼 궤짝이라서 손이 떨리네. 이건 전하께도 드리는 게 좋겠다. 이건 수입산 차네.’

그런 식으로 차근차근 분류했다. 사용인들에게 부탁하여 대공저 내에 나누어 주었다. 때 아닌 고급 간식과 술을 받게 된 기사들은 환호했다. 한편으로 그들은 검투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에 빠졌다.

음식만 분류했는데도 시간이 훌쩍 지났다. 아직도 의복이나 사치품에 속하는 선물이 많이 남았다. 로젤린은 뻐근한 어깨를 통통 두드렸다.

‘감사 편지는 내일부터 짬짬이 쓰기로 하고…….’

선물을 받으면 항상 편지로 감사 인사를 보냈던 로젤린이다. 답장 쓰기 쉽도록 고급 편지지와 펄이 들어간 고급 잉크, 깃펜 등 필기구 일체를 선물한 귀부인도 있다.

오늘은 프레데릭도 내도록 대공저에 있을 예정이다. 기사들은 여독을 풀고 쉬라는 휴식을 허락받았다.

내일부터는 일정이 빡빡하게 짜인 채 돌아갈 것이다. 조금 피로하긴 했지만 로젤린은 오늘 얻은 휴식 시간을 알뜰하게 사용하기로 했다.

“프레데릭 님, 메이어 경을 잡으십시오.”

로젤린의 검투사 이력을 알아오라고 했더니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다. 돌아오더니 대뜸 던진 말이 이것이다.

긴 소파에 드러누워서 오늘의 일을 곱씹고 있던 프레데릭은 고개를 들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

그를 응원하기는커녕 차이는 게 아니냐고 비웃던 녀석의 입에서 나왔으니 더 뜬금없다.

성큼성큼 다가온 라울이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수십 명의 이름이 기록된 명단이었다. 명단 중 귀족의 필두는 당시르 후작 부인, 평민의 필두는 포날 상회의 주인인 카트린이다.

프레데릭은 말없이 명단을 죽 읽었다. 상위에 있는 대부분은 오늘 성문 밖에서 만난 이들이었다.

“한 번이라도 메이어 경을 후원했다고 알려진 사람들입니다. 성문에 없었던 사람들은 소위 ‘급’이 딸려서 오지 못했을 정도고요. 메이어 경이 무명이던 시절부터 거의 10년간 꾸준히 뒷받침이 되어 주었던 사람도 있습니다.”

프레데릭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 정도 말했으면 금방 알아들었을 그의 반응이 신통치 않다. 의아해하면서도 라울은 말을 이었다.

“메이어 경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 후원자들이 곧 그녀의 인맥입니다. 파벌과 계층을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분포된 인맥을 가지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만약 전하가 메이어 경과 결혼하신다면 그녀의 인맥이 전하의 인맥도 됩니다. 그러잖아도 대공가가 중앙의 귀족들과 교류가 없는 게 약점이었는데…….”

프레데릭이 손을 올려 라울의 말을 막았다. 소파에서 일어나 앉는 그의 표정을 보고 라울은 깨달았다. 자신이 말한 내용에 그가 이미 한참 전에 생각이 닿아 있었다는 것을.

“어린아이 같은 유치한 감상이라고 여겨도 할 말은 없다만, 로젤린을 내 이익과 수단을 위해 이용하기는 싫어.”

“……하지만 좋아하시는 게 아닙니까.”

“좋지, 좋아서 문제야. 내가 그럴 마음이 없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로젤린의 인맥을 이용하기 위해서라고 보일 가능성이 크니까.”

답지 않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이유인 모양이다. 라울은 잠시 말문을 닫았다가 가볍게 분위기를 환기했다.

“뭐, 일단은 메이어 경과 좋은 관계가 되신 후에 고민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진척이 전혀 없는 지금 고민하시기에는 좀 웃깁니다.”

“그건 그렇지.”

프레데릭도 표정을 풀며 실소했다. 아닌 게 아니라, 장본인인 로젤린이 프레데릭에게 마음이 없는 상황이 아닌가. 혼자 앞서 나가서 고민하는 모습이 자신이 생각해도 우습긴 우스웠다.

프레데릭은 좀 더 건실한 고민을 하기로 했다.

“이 명단에 유부녀가 많나?”

“결혼 유무까지 조사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왜 궁금하시나요?”

“로젤린이 설마 불륜은 하지 않을 거 아니냐.”

“예?”

질문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라울에게 프레데릭이 차근차근 말했다.

“이 수십 명이 전부 다 내 연적이라는 뜻이잖아. 한 명씩 조사해서 나도 미리 대비를 해야 오늘처럼 급습을 당하는 일이 없겠지. 먼저 유부녀부터 솎아 내려고.”

“…….”

라울은 참으로 한가해 보이는 프레데릭을 한 번 노려보았다.

“명단 중 20퍼센트는 남자입니다.”

“제기랄, 여자로도 부족해서 남자까지 연적이 되다니.”

명단을 쥔 프레데릭은 아예 책상으로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명단 중에서 그가 성별을 알고 있는 남자의 이름에 특별히 붉은 잉크로 강조 표시를 했다. 다음으로는 유부녀라는 게 확실한 여자의 이름에 줄을 그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심각한 작업이었다.

평소에 일을 이렇게 했으면 라울이 수명까지 단축되는 기분으로 그를 찾아다닐 리가 없었을 것이다.

‘한 대만 패고 싶다.’

10년 넘게 빌고 있는 소원을 오늘도 라울은 속으로 빌었다.

“꼭 연적이 아닐 수도 있잖습니까.”

“단순히 팬심으로 로젤린을 좋아하는 거라면 나도 다행이지.”

“팬심보다는 깊겠죠.”

“연적보다 심각하냐?”

“프레데릭 님께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디도 자작의 둘째 딸이 결혼을 했던가 안 했던가, 고민하던 프레데릭의 시선이 라울에게 향했다. 왠지 그의 눈에 비치는 라울의 표정이 오묘했다.

익숙한 오묘함이다. 프레데릭은 저 오묘한 표정의 뜻을 알았다. 자신을 때리고 싶은 얼굴이다. 주먹 대신 입으로.

“……뭔데?”

듣기 싫다고 안 들을 수도 없었다. 라울에게도 스트레스 해소는 필요하고, 스트레스의 주범이 바로 자신이니까.

“만약에,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극히 희박한 확률을 뚫은 만약에 프레데릭 님이 메이어 경과 결혼을 하신다면요.”

“그 정도로 희박하지는 않을 텐데.”

“근거도 없는 자신감은 접으시고요, 아무튼 메이어 경과 결혼을 하게 되면 저 후원자분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와 로젤린의 결혼을 축복하지 않을까?”

“당연히 축복은 하겠지요. 후원까지 할 만큼 좋아하는 검투사의 결혼이니까요. 문제는 그 후입니다.”

프레데릭은 무심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라울의 표정은 점점 더 오묘해지고 있었다.

“후원자들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애지중지 아끼고 좋아하던 메이어 경이 아니겠습니까. 근데 난데없이 나타난 북쪽 촌놈이 홀라당 그녀를 낚아채 갔다 이거예요.”

“잠깐만, 너도 그 북쪽 촌놈인…….”

소심하게 항의하였지만 라울은 무시했다.

“그냥 촌놈도 아니죠. 메이어 경보다 나이도 많고 아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촌놈입니다. 쉽게 왕래하지도 못할 아주 먼 곳으로, 메이어 경이 촌놈 잘못 만나서 영영 가게 되었다 이 말이에요. 후원자들이 프레데릭 님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

“눈엣가시겠죠. 프레데릭 님이 메이어 경의 눈에 눈물 한 방울이라도 맺히게 하면 아작이 날 겁니다.”

“…….”

후원자들이 인맥이니 결혼하라고 부추길 때와 상반된 말이었으나 묘하게 현실감이 강했다.

프레데릭은 왠지 암담한 심정이 되어 묵묵히 명단을 보았다.

수십 명의 깐깐한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생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연적이 낫지 않을까.

* * *

신년 축일이 가까워 오면서 엠마에게는 한 가지 습관이 생겼다. 가게로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기대했다가 금방 실망하는 일이다.

얼마 전 카트린이 로젤린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편지에는 로젤린이 신년 축일 전에 레젠으로 올 예정이라는 말이 있었다.

- 레젠에 와도 바로 집에 들르지는 못할 거야. 고모는 이제 개인 시간을 마음대로 낼 수 없는 호위기사가 되었잖니.

호위기사. 멋진 고모에게 어울리는 멋진 일이다. 그렇지만 당장 만날 수 없다는 건 아쉬웠다. 아쉬워하면서도 엠마는 로젤린을 기다리는 습관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오늘도 가게의 문이 열릴 때마다 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났다. 해가 많이 기울었다. 저녁 식사 전에 빵을 사러 들르는 손님들이 많아질 때마다 지쳐가던 엠마는 아예 가게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에 호호 손을 불어가며 행인들을 둘러보던 엠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북적북적한 골목 저편에서 다가오는 훤칠한 인영을 목격한 눈동자에 놀라움이 가득 찼다가 이내 환호성이 되었다.

“고모!!”

로젤린은 한달음에 달려와 안기는 엠마를 덥석 끌어안았다.

“고모! 우와, 고모다!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고모도 우리 엠마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갑자기 달려와서 놀라긴 했으나 이내 웃으면서 엠마의 이마에 키스했다.

“고모가 오는 줄 어떻게 알고 기다리고 있었어? 안 추워?”

“안 추워! 맨날맨날 기다리고 있었는걸!”

로젤린을 만난 게 실감나지 않는지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는 엠마를 다독여서 가게로 갔다. 수잔나도 놀랍고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했다.

가게는 일찍 문을 닫았다.

몇 달 만에 집으로 돌아온 로젤린은 가족들과 회포를 나누었다. 편지로는 전하지 못한 말과 마음이 너무나 많았다. 로젤린의 곁에 찰싹 붙은 엠마는 저녁 식사를 할 때까지 잠시도 떨어지지를 않았다.

식사를 하기 전에 봉피에 싣고 온 짐을 풀었다. 음식들을 나눠 주면서 따로 엠마가 좋아하는 키라임파이와 스펀지케이크는 따로 한 상자씩 챙겼다. 수잔나의 몫은 스토아 산 와인이었다.

이 외에도 수잔나와 엠마의 선물까지 보내 준 후원자들이 있었다.

기쁨과 설렘으로 풍성하였던 작은 집은 저녁 식사까지 풍족해졌다.

“언니도 별고 없으시죠?”

낯설기만 한 북방의 이야기를 즐겁게 듣던 수잔나가 고개를 저었다.

“나야 별다를 게 있겠니. 예전이랑 똑같이 일하고, 가게를 보고, 일하고…….”

갑자기 수잔나가 말을 삼켰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러고 보니 왠지 날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수확제 날 새벽에 정성스러운 음식 바구니를 하나 받았는데 결국 누가 줬는지 찾을 수가 없었지 뭐니. 밖에 나가면 왠지 시선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고.”

로젤린의 표정도 안 좋아졌다. 어린 딸과 단둘이 살고 있는 수잔나다. 위험에 방어할 수단이 전혀 없었다.

“그 외는요?”

“그냥…… 그뿐이야. 다른 일은 없었어.”

수잔나가 표정을 풀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웃었다.

“시선도 내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지. 요즘에는 연쇄살인마 덕분에 경비대가 순찰도 자주 돌아서 더 이상한 건 없었어. 연쇄살인마는 뭐, 우리 같은 평민은 안 건드린다고 하니까 오히려 안심이야.”

“그래도요.”

“괜찮아. 한스 씨에게도 부탁을 해서 가끔 사람들이 주변을 봐 주고 있으니까. 마수와도 싸우는 검투사들이 보호해 주는 곳을 누가 넘보겠니?”

뺨에 빵가루를 잔뜩 묻혀가며 두툼한 샌드위치를 먹던 엠마도 덩달아 말했다.

“맞아. 한스 아저씨가 얼마나 신경을 써 주시는데. 아무래도 아저씨도 엄마를 좋아하나 봐.”

“얘는, 어린애가 못하는 말이 없어.”

수잔나가 엠마의 이마를 톡 때렸다. 엠마가 헤헤 웃으며 남은 샌드위치를 입으로 옮겼다.

지나치게 예민한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로젤린은 역시 걱정되었다. 그녀는 종이에 대공저의 위치를 적었다.

“언니,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대공저로 알려 주세요. 제가 당장 달려올게요.”

“일하는 곳에 가족 때문에 폐를 끼치면 쓰니.”

“언니랑 엠마보다 제게 중요한 건 없어요.”

로젤린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머뭇거리면서 덧붙였다.

“……그리고 대공 전하께서도 이해해 주시리라 믿고요.”

약간 볼을 붉히는 그녀에게 수잔나가 웃으며 물었다.

“좋은 분이시니?”

“예, 좋은 분이세요.”

“다행이야.”

“응! 다행이야!”

무슨 말을 나누는지 정확히 알아듣지도 못한 엠마가 무작정 엄마의 말을 받아 외쳤다. 잔잔한 웃음소리가 식탁 위에 번졌다.

로젤린이 집을 나온 건 야심한 한밤중이 되어서였다.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자고 가면 안 되니?”

“내일은 아침부터 바쁠 테니 잠은 대공저에 돌아가서 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발트란으로 돌아가기 전에 짬을 낼 수 있다면 다시 찾아올게요.”

“무리해서 억지로 짬을 내지는 말고. 이렇게 네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기뻐. 그보다 요즘은 밤에 흉흉해서 걱정이야.”

“연쇄살인마는 돈 없는 사람 안 건드린다면서요.”

로젤린은 짐짓 빈 돈 주머니를 흔들었다. 수잔나에게는 밝힐 수 없는 일이지만 연쇄살인마는 후작 측의 암살자일 가능성이 크다. 일개 호위기사인 로젤린을 습격할 우려는 없었다.

가지 말라고 칭얼거리며 붙잡던 엠마는 늦은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었다. 엠마의 뺨에 마지막으로 키스한 로젤린은 수잔나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떠났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잘 지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돌아가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뺨을 문지르는 바람 소리까지 들려올 정도로 고요한 밤이다. 이전에는 한밤중이어도 드문드문 인적이 이어지던 골목이 거짓말처럼 조용하다.

로젤린이 탄 봉피의 말발굽이 잘 닦인 도로 위를 걷는 소리가 적적했다.

수잔나에게 듣기론 해가 지기만 해도 사람들이 바깥으로 왕래를 자제한다고 했다. 치안도 흉흉한 데다 밤 이후의 상업 활동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정도다. 이래서야 레젠의 경제도 타격이 클 것이다.

‘클레타트 후작님이 그러신다고…….’

멀리 발트란에서 들었을 때는 다소의 씁쓸함만을 느꼈다. 막상 레젠까지 와서 변한 분위기를 실감하니 감상은 좀 더 깊어졌다.

좋지 못한 결말이 되었다지만 한때 아버지의 주군이었던 사람이다. 그 사람이 현재는 권력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도시 하나의 경제를 흔들고 있다고 한다.

‘후작님을 직접 알현하였던 건 어렸을 때지만 좋은 인상으로 기억하는데.’

로젤린은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지워진 큰오빠 또래의 젊은 청년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후작이 자신의 야욕을 위해 타인을 희생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섬긴 걸까. 아니면 아버지에게 배신당한 후에 후작이 변한 걸까.

어느 쪽이든 로젤린을 울적하게 만들기에 좋은 생각이었다.

자신을 위해 타인을 희생하는 클레타트 후작.

타인에게 이용당하여 자신을 버린 프레데릭.

생각의 끝은 기어이 프레데릭에게 닿았다. 로젤린은 무거운 한숨을 쉬면서 그에게 선물받은 흑마의 갈기를 어루만졌다.

- 이용 가치가 있다면 얼마든지 이용해도 돼. 죽은 아버지도 어떤 의미로는 나를 끊임없이 당신의 욕망을 위해 이용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지금도 죽은 아버지의 망령에 이용당하고 있지.

마음대로 이용하라는 그의 말은 가슴이 아프다. 그는 변할 수 없는 걸까. 자기 자신이 결심한 인생을 자신의 뜻대로 살아갈 희망은 없는 걸까.

‘전하의 곁에서 전하를 이용하는 것과 다름없는 내가 할 말은 아니네.’

인적 없는 고요한 어둠 속을 홀로 걷다 보니 상념만이 깊어졌다.

“어이! 거기, 누군가!”

상념을 끊은 건 일대를 순찰하는 제도 경비대와의 조우였다. 좋은 건지, 아닌 건지. 로젤린은 한숨을 삼키며 경비대 쪽을 보았다.

한밤중에 혼자 거리를 걷는 그녀를 수상히 여기는 듯했다. 용건이 무엇인가, 어디에 사는가, 신분이 무엇인가, 꼬치꼬치 묻는 말에 대답하고 나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대공의 기사라고 대답하면 오히려 더 의심만 살 것 같았다. 로젤린은 기사가 되기 전의 과거와 적당히 섞어서 대답을 했다.

경비대들의 심문에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한참 시간이 지났다. 더 늦기 전에 서둘러 대공저로 말을 몰았다.

경비대들이 몰고 온 횃불의 빛과 소란이 사라진 밤은 왠지 더 침침하게 젖은 듯하다. 어둡고 적막한 밤거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기이하게 일렁이는 생물처럼 여겨졌다. 그렇기 때문에 로젤린은 날카로운 쇳소리도 자신의 착각이라고 여겼다.

챙! 채앵!!

그러나 착각이 아니었다.

흐릿하게 삼켜지는 쇳소리는 몹시 작았으나, 분명히 실재했다.

쇳소리의 의미는 명확하다.

밤거리를 배회하는 연쇄살인마. 후작이 보낸 암살단.

말을 몰아 접근하는 건 위험하다. 연쇄살인마, 정확히는 암살단들이 그녀의 존재를 쉽게 알아챌 것이다. 로젤린은 말에서 훌쩍 내려 걸리적거리는 망토를 벗어 안장에 얹었다. 길이 잘 든 흑마는 주인이 고삐를 따로 묶지 않아도 제자리에 섰다.

오늘은 가족을 만나러 가느라 장검을 소지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로젤린은 허리 뒤쪽에 예비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단검을 손에 쥐었다. 지난번에 발트란의 상점에서 샀던 마수의 뼈로 만든 나이프였다.

발소리를 죽이며 소리의 근원으로 달려갔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쇳소리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모퉁이를 두 번 꺾어 로젤린은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후각이 먼저 확인했다. 피 냄새, 땀 냄새, 쇠 냄새 그리고 익숙하지만 쉽게 생각이 나지 않는 냄새.

로젤린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모퉁이 안쪽을 훔쳐보았다. 묘한 연기가 골목 안쪽을 휘돌고 있다.

마차가 멈추어져 있고 마차를 몰던 말이 쓰러져 있다. 마차는 가문의 문장이 없는 흔한 영업용 마차다. 마부와 호위병들은 시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버티고 있는 건 호위기사 한 명이었다.

목소리를 높여서 경비대를 부르면 될 텐데, 그는 비명도 못 지르고 비틀거리며 간신히 칼을 받아 내고 있었다. 부상이 심각했다. 칼을 휘두를 때마다 핏물이 흘렀다.

분전하고 있었으나 이미 그의 주인은 지키지 못한 듯하다. 마차 옆에는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쓰러져 있었다.

‘……늦었어.’

입술을 깨물었다.

늦었지만 돌아갈 수는 없다.

추측대로 암살단은 5명이었다. 로젤린은 놈들의 위치를 확인한 후 담벼락 위로 살그머니 올라갔다. 허리를 웅크리고 몸을 낮추어 빠르게 담 위를 걸으며 접근하는 그녀의 모습을 암살자 한 명이 눈치챘다. 담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자다.

그러나 늦었다. 로젤린은 이미 암살자 무리에 접근해 있었다.

“하아앗!”

또 하나의 이점은, 암살자들은 소란을 피우거나 직접 동료를 불러 위험을 알릴 수 없지만 로젤린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곳의 소란이 커지면 커질수록 경비대가 달려올 가능성도 커진다.

그녀를 목격한 암살자가 멈칫했다. 동료를 부르는 게 아니라 직접 처리하려는 듯 달려왔으나 로젤린은 행동을 취했다. 그녀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암살자의 몸 위로 점프했다.

“크헉!”

예상하지 못한 충격을 받은 암살자가 쿵! 하는 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머리가 깨졌는지 금세 돌바닥에 붉은 피가 번졌다. 떨어지는 충격으로 잠깐 휘청했지만 로젤린은 곧 단단한 바닥에 발을 딛고 섰다.

급습에 놀라 미처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있는 다른 암살자의 품으로 파고들 듯이 접근하여 나이프로 목젖을 베었다. 단말마의 비명이 피분수와 함께 흘렀다.

‘됐다.’

이 높은 비명 소리는 먼 곳에서도 알아들을 것이다. 일차적인 목적은 이루었다. 그다음은 경비대가 도착할 때까지 놈들을 잡아 두는 일이다.

로젤린은 호위기사와 호위병들을 대동하고 다니는 귀족들을 소리 없이 죽인 암살단의 실력을 간과하지 않았다.

혼자 놈들을 상대하여 공을 세우겠다는 과욕은 전혀 없었다. 자신의 실력을 맹신하고 상대의 실력을 경시하여 맞는 죽음은 그녀가 원하는 죽음이 아니었다.

챙챙챙!

두 명의 암살자들은 거의 죽어 가는 기사를 내버려 두고 로젤린에게 칼끝을 돌렸다. 단숨에 검격이 교환되었다. 희미한 달빛에 검광이 사납게 번뜩였다.

놈들이 쓰는 건 로젤린의 단검과 길이가 비슷한 숏 소드였다. 확실하게 훈련된 자들이라는 뜻이다. 두 사람은 서로 호흡이 맞아야 하는 합격에도 능숙했다.

경비대들이 도착할 때까지 놈들의 발목을 잡고 버티기로 마음먹은 로젤린은 방어에 몰두했다. 전부 복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시간을 끌려는 그녀의 속셈을 눈치챘는지 암살자들의 공격이 주춤했다. 뒤로 몸을 빼어 도주하려는 낌새가 보이자 이번에는 로젤린이 공격을 취했다.

도망치려는 자와 공격하려는 자의 싸움이다. 암살자들의 검이 흔들렸다. 이 기세라면 부상을 입혀 놈들을 포박할 수 있다. 로젤린은 눈을 빛내며 검에 더욱 힘을 실었다.

“비켜라.”

싸움에서 비껴난 곳에서 관망하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접근을 제일 먼저 눈치챘던 사내다. 공격에 열중하던 중에도 로젤린은 흠칫했다. 사내의 음성은 철판을 손톱으로 긁는 것처럼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

사내는 말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로젤린의 사각지대인 왼편으로부터 일격이 왔다. 사내는 순식간에 그녀에게 접근하여 허리를 걷어찼다. 바닥에 납판을 댄 부츠는 그 자체만으로도 살인 흉기다. 반사적으로 왼쪽 팔꿈치를 내려 허리를 방어했다.

“큭!!”

다행히 사내의 발길질은 그녀의 허리를 직격하지 않고 살짝 빗겼다. 방어한 팔뚝이 뼈가 얼얼할 정도로 아렸으나 적어도 부러지거나 금이 가지는 않았다. 비틀거리며 주저앉으려는 다리에 힘을 주고 수중의 검을 휘둘렀다.

사내는 가볍게 그녀의 공격을 방어했다. 방어에 이어 공세에 접어드는 검격이 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럽다. 로젤린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사람이 암살단의 우두머리다.

이 사람만은 포박해야 한다.

로젤린은 방어를 모두 버리고 맹렬하게 공격했다.

숨을 한 번 몰아쉴 동안 십여 합 이상의 공세를 주고받았다.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공격하는 그녀와는 달리 복면 위로 언뜻 보이는 사내의 눈동자는 침착했다.

‘전하와 비슷한 실력일까.’

일개 암살자로 머무르기에는 실력이 출중하다. 필시 후작의 심복일 가능성이 크다. 사로잡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일부러 허점을 노출하였으나 사내는 걸려 들지 않았다. 사내가 시간을 끄는 사이에 두 암살자는 부상자와 시체를 각각 어깨에 둘러메고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멀리 경비대원들이 달려오는 소리도 들렸다.

“제기랄! 북쪽으로 도망칩니다!!”

로젤린은 자신의 말뜻을 경비대원들이 바로 알아듣기를 바라며 크게 외쳤다. 동시에 사내의 검을 옆으로 크게 밀쳐 내며 성큼 간격을 좁혔다. 이마로 세게 박치기를 하려던 때, 오른쪽에서 오싹한 감각이 그녀를 찔렀다.

본능적으로 허리를 뒤로 젖혔다. 그녀의 복부 언저리에 사내가 왼쪽 소매 안에 숨기고 있던 나이프가 스쳤다.

팔락.

옷자락이 길게 베였다.

등골에 식은땀이 주욱 흘렀다. 본능이 경고하지 않았다면 저 칼날에 베인 건 옷자락이 아니라 그녀의 복부였을 것이다.

무리하게 등을 젖히느라 균형이 흐트러진 사이에 사내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거기 서! 야 이 새끼야!!”

타이밍 늦게 사내를 뒤쫓았으나 이미 늦었다. 로젤린은 몇 미터 쫓다가 허탈하게 돌아왔다. 어느새 달려오는 경비대들이 육안으로 보였다.

숫자가 적은 걸 보니 반으로 나누어 한 무리는 북쪽으로 쫓고, 다른 한 무리는 현장으로 오고 있는 모양이다.

안타까움을 담아 경비대원들을 흘끔 보았다.

‘조금만 일찍 도착해 줬으면 잡았을 텐데.’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경비대원들 탓이 아니다. 그녀의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몇 년 만에 느끼는 진한 패배감이었다.

“마차가…… 아가씨가…….”

바닥에 쓰러져 있던 기사가 쿨럭 피를 토했다. 로젤린은 서둘러 허리를 굽혔다. 기사의 안색은 이미 시커멓게 죽어 가고 있었다.

“아가씨를…….”

그 한 마디만 남기고 기사는 절명했다. 최후까지 감지 못하고 부릅뜬 기사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가 지키던 아가씨의 시체도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혹시 살아 있는 건 아닌지 소녀의 시체를 살펴보려 했던 로젤린은 경악을 삼켰다. 소녀의 얼굴은 처참하게 난도질되어 있었다.

시체에 익숙한 그녀도 순간 구역질이 올라올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다. 로젤린은 입을 막으면서 한 걸음 물러섰다.

“2조는 반대편으로 돌아가서 쫓아라!”

분대장의 호령소리가 가까워졌다.

결국 로젤린은 아무도 지키지 못했다. 기사와 소녀는 죽었고, 암살자들은 도망쳤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무력감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씁쓸한 탄식을 씹으며 소녀의 시체로부터 멀어졌다. 최소한 경비대에 그녀의 추측을 진술해야 한다.

마차 쪽에서 미미한 인기척을 느낀 건 그때였다.

“……!”

한달음에 달려가 마차의 문을 세게 젖혔다.

“사, 사, 사, 살려 주세요…….”

시체와 똑같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구석에 웅크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유일한 생존자인 소녀의 이름은 멜리나 옥스타인이었다. 옥스타인 공작의 하나뿐인 손녀다.

현장의 조사와 추적을 경비대에 일임한 로젤린은 제도 경비대 본부의 사무실에 멜리나와 함께 왔다. 경비대장 모첼 백작이 두 사람에게 직접 상황을 물었다.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녀는 따뜻한 코코아 잔을 쥐고도 연신 벌벌 떨고 있었다. 경비대장은 우선 로젤린에게 물었다.

“슈벤하임 대공가 소속의 기사라고 하였나?”

“평기사입니다. 대공 전하의 호위를 위해 오늘 레젠에 도착했습니다. 원래 고향이 레젠이라서 가족을 만나고 대공저로 복귀하던 중이었습니다.”

로젤린은 한두 시간 전 경비대의 검문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먼저 자신의 사정을 말했다.

“경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대공저에 확인차 병사를 보냈네. 상황이 상황인지라 양해를 부탁함세.”

“괜찮습니다.”

모첼이 눈에 초점도 잡히지 않고 떨고만 있는 멜리나를 보곤 한숨을 쉬었다. 사무실 안은 따뜻했지만 멜리나는 전혀 온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부끄럽지만 그자들의 모습을 확인이나마 할 수 있었던 사람은 경이 유일하네. 이상하지만 그자들의 실력이 단순한 암살자라기엔 지나치게 민첩하고 뛰어난 듯해. 경비대가 샅샅이 순찰을 하는데도 그 짧은 시간에 소리도 기척도 없이 사람을 죽여서 언제나 현장만 한 발 늦게 발견했을 뿐이야. 변명하는 것 같지만 사실일세.”

“제 생각으로 그 이유는 아마…….”

로젤린이 자신의 추측을 말하려던 때였다.

사무실의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하, 할아버지!! 할아버지!!”

덜덜 떨기만 하던 멜리나가 벌떡 일어나 노인에게 달려가 안겼다. 멜리나가 엉엉 울고 옥스타인 공작도 우는 손녀를 얼싸안고 달래느라 부산스러워졌다. 사무실 안은 차분히 대화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인석아! 그 얼빠진 놈이 그리 좋아서 이 사달을 일으키느냐!”

달래기도 하고 꾸중하기도 하는 조손의 대화에서 대강 정황이 짐작되었다. 멜리나는 집안의 어른들이 반대하는 연애를 하는 중인 모양이다. 오늘도 연인과 밀애를 갖기 위해 몰래 집을 나왔다.

그녀로서는 조심하겠다고 호위기사와 호위병도 반쯤 협박하여 데려오고 영업용 마차를 불러 탔지만 암살단의 덫에 걸렸다.

왠지 집안 사정까지 본의 아니게 엿듣는 꼴이 되었다. 민망해진 로젤린은 사무실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모첼에게 양해를 구했다. 공작이 진정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모첼이 허락해 주었다.

“휴우.”

사무실의 문을 닫고 나오자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연쇄살인마의 17번째 습격으로 인해 경비대 본부는 한낮처럼 밝았다. 여기저기에서 인기척이 끊이질 않았다.

문 옆에 기대어 선 로젤린은 아직도 얼얼하게 아리는 왼팔을 주물렀다.

프레데릭에 버금가는 실력자와 진검 승부를 했다. 이 정도는 부상당한 축에도 못 들었다.

‘한 명이라도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인가…….’

마냥 속 편하게 여기기에는 죽은 사람들이 많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만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 검이 사람을 지키고 구할 수 있다는 걸 실감한 게 겨우 몇 달 전이다. 눈앞에서 놓쳐 버리고 만 생명의 무게는 언제나 그녀를 고민하게 했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후회가 못내 쓰리다.

“로젤린!”

때마침 그녀를 부르는 외침이 없었다면, 로젤린은 오래도록 자책과 후회의 늪에 가라앉았을 것이다.

“로젤린.”

그녀를 부른 외침이,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켜고 차분하게 다시 불렀다. 로젤린은 고개를 돌렸다.

“……전하.”

프레데릭이 헉헉 숨을 몰아쉬며 앞에 있었다. 단숨에 뛰어 올라왔는지 이 추운 날씨에 얼굴이 벌겠다. 대공저에서 옷을 갈아입을 틈도 없이 바로 나왔는지 실내복에 망토만 두른 허술한 차림이다.

프레데릭의 시선이 로젤린의 아래위를 훑었다. 심각한 눈빛이라서 로젤린은 왜 그러냐고 묻지도 못했다.

“잠시만.”

세심하게 그녀를 훑어본 프레데릭이 벽에 기댄 등을 떼게 했다. 뒷모습까지 훑어보고 나서야 프레데릭은 안도한 표정이 되어 한 걸음 물러났다.

“……왜 그러십니까?”

프레데릭이 뒤늦게 겸연쩍은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네 실력을 무시하거나 얕보는 건 절대 아니라는 걸 먼저 믿어다오. 단지 그놈들과 혼자 싸웠다고 들어서 다친 게 아닌지 걱정되어서 둘러본 것뿐이야.”

“안 다쳤는지 그냥 물어보셔도 되잖습니까?”

“괜찮다고 거짓말할 거 아니냐.”

맞는 말이긴 했다. 로젤린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부상은 없다. 프레데릭은 안심하는 한편으로 완전히 염려를 떨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안 보이는 부위에 다쳤냐고 물으면 성희롱이 되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무척이나 진지하게 묻는다.

로젤린은 침묵하며 그를 바라보았다가 왼팔을 올렸다.

“발길질을 팔로 막아 내서 좀 저린 것 외에는 괜찮습니다. 거짓말 아닙니다.”

“발길질!”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냐는 호들갑 때문에 사무실 밖은 사무실 안처럼 부산스러워졌다. 정작 로젤린은 자신의 부상보다 프레데릭의 옷이 더 신경이 쓰였지만.

‘어째서 바지는 올리브색인데 상의가 핑크색인 거지…… 편하게 입는 실내복이니까 아마 전하가 직접 고른 옷이겠지? 전하의 센스가 문제일까, 이 옷을 한 벌로 맞춰 준 전하의 재봉사가 문제일까.’

적어도 깔 맞춤은 해 주면 좋겠다.

* * *

멜리나가 진정하기를 기다리며 프레데릭과 대화를 할 때까지만 해도 로젤린은 몰랐다. 자신이 한 시간도 안 되어서 황궁에 있게 되리라고는.

레젠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연쇄살인마는 제국의 정세에 직접 관련이 있는 자다.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무조건 황제에게 직통 보고가 올라간다. 모첼은 이번 일 역시 황제에게 보고를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야심한 시각임에도 입궁은 즉시 이루어졌다.

입궁한 사람은 중요한 증인인 로젤린을 비롯하여 프레데릭과 모첼 백작, 옥스타인 공작이었다. 멜리나는 도저히 진술할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경비대의 엄중한 경호 속에 공작저로 귀가했다.

“수고가 많았네.”

황성의 많고 많은 문을 넘어 들어온 황제궁의 담화실에 황제 카를 5세가 있었다.

“오랜만이야, 프레데릭.”

“원래 오늘 입궁하려는 예정은 없었는데 말이지.”

프레데릭과 카를은 가볍게 포옹을 나누는 것으로 인사와 회포를 대신했다.

번거로운 예의를 생략하고 보고가 즉시 이어졌다. 로젤린은 탁자에 앉은 프레데릭의 뒤에 시립했다.

첫 번째 보고는 로젤린이 했다. 보고는 길지 않았다. 우연히 암살 현장을 눈치채고 찾아가 싸웠던 것이 전부다. 암살단과 직접 싸웠던 로젤린에 이어 모첼이 경비대의 조사를 보고했다.

“메이어 경의 말에 따라 현장의 북쪽을 수색하였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사망자는 멜리나 양의 호위기사 1인, 호위병 10인, 마부 1인, 그리고 신원을 알 수 없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성입니다. 시신에 남은 상처로 미루어 보아 이전까지 살해당한 자들과 동일한 검술을 쓰는 자들로 추측됩니다. 모방범은 확실히 아닙니다.”

“신원을 알 수가 없다고?”

카를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이전까지의 암살에서는 없던 패턴이다. 옥스타인 공작이 무거운 표정으로 대신 대답했다.

“소신의 추측으로는 손녀아이를 죽인 것으로 가장하고 유괴하려던 게 아닌가 합니다. 손녀와 똑같은 드레스에 똑같은 머리색을 가진 여성의 시체였습니다.”

옥스타인 공작은 전 재상이었다.

현재 관직에서는 은퇴하였으나 지금도 귀족원에 큰 영향력이 있다. 본인은 황제도 후작도 아닌 중도적인 입장이지만 후계자인 차남이 황제파에 속했다.

멜리나는 사고를 당해 공작보다 일찍 세상을 뜬 장남 부부가 남긴 외동딸이었다. 죽은 자식의 딸인 그녀를 제외하면, 차남은 아들만 줄줄이 넷이다. 옥스타인은 하나뿐인 손녀를 끔찍이 아꼈다.

“바꿔치기 시도를 한 거로군…….”

카를이 중얼거렸다.

세간에는 멜리나가 연쇄살인마에게 살해당했다고 가장하고 은밀히 그녀를 납치한다. 그리고 옥스타인에게만 긴히 소식을 알리고 협박한다는 게 그들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손녀의 생명이 볼모로 잡히면 옥스타인도 결국 클레타트 후작의 아래에 들어가게 된다. 차남도 아버지의 뜻을 오래 거스르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이번 일은 옥스타인 공작 일가를 포섭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사용인 중에 정보를 유출시키거나 스파이가 있는 듯합니다.”

옥스타인의 표정은 침통했다. 집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여 손녀가 위험에 처했다는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섣부른 위로나 위안을 건네는 사람은 없었다. 옥스타인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카를이 화제를 바꾸었다.

“알아낸 건 그것뿐인가?”

“송구합니다. 이전의 사건들과 똑같이 암살자들은 큰 저항 없이 빠르게 공작가의 호위기사와 호위병들을 정리했습니다.”

“그건 이상하군요.”

모첼의 설명에 이어 옥스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노회한 정치인인 그는 개인의 죄책감을 잠시 밀어 두고 현재의 상황에 집중했다.

“손녀의 호위기사는 공작가의 기사단 중 특별히 엄선한 기사입니다. 단신으로 암살자들을 상대한 것도 아니고 호위병이 10명이나 되었는데 암살자들에게 부상조차 입히지 못했다는 건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 문제는 제가 설명할 수 있습니다.”

카를을 비롯한 세 명의 시선이 동시에 프레데릭의 등 뒤에 서 있는 로젤린에게 향했다. 프레데릭만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앉은 채 엷게 미소했다.

진술을 끝낸 후 한마디도 하지 않고 호위기사로서의 위치에만 있던 그녀다. 또한 황제를 비롯하여 쟁쟁한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일개 기사인 그녀에게 발언권은 없었다.

그러나 카를은 로젤린에게 발언을 허락했다.

“메이어 경이라고 하였던가? 이유를 말해 보게.”

“저는, 아니 소인이 진술하였던 것처럼 현장에 도착한 건 암살자들이 습격하던 도중이었습니다.”

황실 예법에 어두운 로젤린은 말실수를 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설명했다.

“현장에는 독 연기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경비대가 도착한 건 독 연기가 모두 흩어진 후였습니다. 공작가의 호위기사와 호위병들은 그 독 연기에 중독되었으리라 판단됩니다. 수법이 같다면 이전까지의 범행에서도 독 연기가 사용되었을 겁니다.”

“독? 독이라니!”

순간 황제의 앞이라는 것마저 잊은 모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있을 수 없는 일이네! 여태 수십 명의 시체를 검시하였으나 중독 증상이 나타난 시체는 한 구도 없었다.”

흥분한 모첼과는 대조적으로 로젤린은 침착했다. 그녀는 이 독 연기를 추측하였을 때부터 자신이 어떻게 설명하면 될지 머릿속으로 계속 곱씹고 있었다.

“일반적인 검시 과정으로는 검출되지 않는 독이니까요.”

“경이 어떻게 그 사실을 확신하는가? 게다가 경은 왜 중독되지 않는 거지?”

연이어 묻는 모첼의 얼굴에는 의혹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것도 예상하였던 내용이다. 로젤린은 마른침을 한 번 꼴깍 삼켰다.

“소인은 그 독에 내성이 있습니다. 추측이 맞다면 마수로부터 추출한 독인데, 그 마수의 이름은…….”

아차. 마수의 이름을 깜빡하고 있었다.

로젤린은 무심코 혀끝을 깨물었다. 발트란에서야 썩은 재규어이니 청상아리의송곳니이니 하고 기억하기 쉽게 지칭하지만 공식적인 학칭은 아니다. 발트란의 외부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별명이다.

길고도 어려운 마수의 학칭이 무엇이었던가 고민을 시작하자마자 대답이 나왔다.

“케브나트세움바.”

내내 잠자코 있던 프레데릭이 마치 그녀의 고민을 읽은 것처럼 답을 내놓은 것이다. 덕분에 로젤린은 아주 잠깐의 공백만 두고 설명을 이어 갈 수 있었다.

“마수의 이름은 케브나트세움바입니다.”

그녀가 발트란에서 최초로 사냥한 마수인 소위 큰닭이다.

두 차례나 큰닭과 싸움을 겪고 독에 내성까지 있는 로젤린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암살단들이 사용하는 독은 큰닭의 독이었다.

“허…… 마수라니…….”

모첼이 충격적인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메이어 경의 신원은 내가 보증하겠소. 내 호위기사는 전직 검투사였기에 케브나트세움바의 독에 내성을 갖게 되었다오. 또한 개인적으로 클레타트 후작의 아래에 마수에 정통한 이가 있으리란 추측도 하고 있소.”

로젤린의 설명을 프레데릭이 보충했다.

무거운 탄식이 모첼의 입술 사이로 흘렀다.

“폐하, 소신의 실책입니다. 한 번도 본사건과 마수의 연결고리는 추측하지 못하였습니다.”

자책하지 말라는 듯 카를이 손을 휘저었다.

“온전히 사람의 손으로만 자행되었던 살인이니 누구라도 추측하지 못하였을 걸세. 그렇다면 후작은 제도 경비대 내부의 정보로 순찰 경로와 시간을 파악하고, 틈이 비는 짧은 시간에 암습하기 위해 마수의 독을 사용했다는 뜻이로군.”

17건의 사건 만에 발견된 실마리다. 초반은 흔한 살인범이라 여겼기에 중요도가 낮았다. 후반은 암살에 익숙해진 암살단이 흔적을 남기지 않아 꼬리를 잡기 어려웠다.

모첼의 시선이 잠깐 로젤린에게 머물렀다.

그녀가 우연히 현장 근처를 지나가지 않았다면 실마리를 찾기는커녕 멜리나는 납치되고 사건도 오리무중으로 남았을 것이다. 모첼은 흉흉한 레젠의 밤거리를 걸어가던 목격자가 있었다는 행운에, 또한 그 목격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로젤린이라는 행운에 깊이 감사했다.

돌파구가 생기자 모첼은 고양되었다. 제국 소속이 아닌 마법사 협회를 조사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하나 아예 조사할 실마리조차 없던 것보다는 훨씬 고무적인 상황이다.

보고를 겸한 회의는 그로부터 한 시간 남짓 이어진 후에 파했다.

무거운 표정을 못내 지우지 못하던 옥스타인은 담화실을 나가기 전에 로젤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와 옥스타인 공작가는 경의 은덕을 결코 잊지 않을 걸세.”

손녀를 구해 주어 고맙다는 흔한 감사의 말보다 더욱 절절한 진심이다. 로젤린은 자신에게 남김없이 향하는 그 진심에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옥스타인과 모첼이 나가자 담화실에는 황제와 프레데릭이 남았다. 사적인 친분도 있고, 공적으로도 정치적 동반자인 두 사람이다. 부하를 대동하지 않은 밀담을 나누려는 것 같아 로젤린은 물러나려 했다.

“저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간다고? 왜?”

오히려 프레데릭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 자리에서 제가 방해되는 게 아닙니까?”

“너한테 하지 못할 얘기는 없다.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야.”

“하하.”

카를이 문득 웃음을 터트렸다. 회의를 할 때와는 다르게 그의 얼굴은 황제라기보다는 평범한 젊은 남자처럼 보였다. 그는 격의 없이 말했다.

“여자 기사도 드문데 프레데릭의 호위기사라니 더욱 놀랍군.”

“……바로 여자라는 걸 알겠던가?”

“여자를 여자로 아는 게 당연하지 않나?”

“……그렇군.”

프레데릭은 울적하게 중얼거렸고, 로젤린은 실소를 삼켰다.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 속에서 프레데릭은 슈벤하임 대공령의 사정을 알렸다. 대공령에서도 마수를 인위적으로 이용했다는 정황이 있다. 클레타트 후작과 대공령의 연결고리가 하나 생긴 것이다.

“마수까지 이용하다니. 아주 대단한 양반이야, 내 숙부는.”

“그 양반이 이용하지 못할 게 뭐가 있겠나. 필요하다면 사망한 제 모후의 관도 가져올 양반인데.”

“할아버님의 관도 도굴당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겠군.”

그간의 근황을 묻고 이야기하는 한담은 몇 마디 계속되었지만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

“발트란에서 레젠까지 오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군. 이만 풀어 줄 테니 따뜻한 침대에서 푹 자도록. 황명이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짐짓 굽실거리며 대답한 프레데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품을 삼키고 있던 로젤린도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카를이 로젤린을 올려다보았다.

“경은 검투사였다고 했었나?”

“그렇습니다. 레젠이 고향입니다.”

“어쩌다가 발트란까지 가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처음 갔을 때는 고생을 많이 했겠군.”

그는 검투사를 경시하는 발트란의 분위기를 꿰뚫고 있는 듯했다.

“검투사를 그만둔 건 언제인가?”

“얼마 안 됐습니다. 올해입니다.”

“그렇다면 내 아내도 경의 경기를 보았을 가능성이 있겠군. 이건 비밀이지만 내 아내가 종종 신분을 속이고 콜로세움에 구경을 가거든. 나는 영 취미에 안 맞아서 검투사 경기만큼은 어울리지 못하였네.”

로젤린의 경기.

대화를 듣던 프레데릭은 몰래 한숨을 쉬었다. 자신은 레젠에 드나들면서 검투사의 경기 한 번을 안 보고 대체 뭘 했단 말인가.

“그리고 프레데릭.”

카를도 프레데릭을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전속 재봉사를 자를 생각이 없다면, 외출할 때이든 저택 내에 있을 때이든 옷을 전담하여 골라 주는 하인을 한 명 고용하는 걸 추천하지.”

“내 옷이 왜?”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프레데릭을 사이에 둔 로젤린과 카를은 공감의 시선을 교환했다.

대공저로 귀택하는 마차에 탔을 때는 새벽하늘이 새파랗게 밝아 오고 있었다. 결국 하룻밤을 완전히 지새운 것이다. 프레데릭과 로젤린은 같은 마차에 탔다. 봉피는 알아서 마차 옆을 나란히 따라오고 있었다.

프레데릭이 앓는 소리를 냈다.

“서른 넘어서 밤샘이라니 끔찍하구만. 로젤린, 너도 서른이 넘어가면 하루하루 체력이 깎여 나가는 게 느껴질 거다.”

맨손으로 사자도 때려잡을 사람이 엄살이 심했다.

“저는 새파란 청춘이니까요.”

“사실이지만 왠지 열 받는군.”

내용과는 다르게 그다지 열 받지 않은 어조로 프레데릭이 싱긋 웃었다.

“농담을 하는 걸 보니 기분은 나아졌나? 공을 세우고도 시무룩한 표정이더니.”

“……제가 그랬습니까?”

로젤린은 뺨을 문질렀다. 자신의 심리가 드러난 걸까. 프레데릭이 읽은 걸까.

망설이다가 그녀가 안고 있던 고민을 털어놓았다. 왜 말을 하게 되는 건지는 로젤린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단지 프레데릭에게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이기스 나이트가 되면서 이제 제 검으로 사람을 지킬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아니었어요. 저는 암습이 일어난 현장에 도착을 하고도 공작가의 호위기사를 지키지 못했고 놈들을 놓치기까지 했습니다. 시체라도 남겼다면 신원 파악이 가능했을 텐데 저는 모두 놓쳤습니다.”

가슴 안에 담아 둘 수 있다고 여겼는데, 뚜렷한 형상이 되어 한 번 입 밖으로 나오니 주체하지 못하고 흘러넘쳤다. 로젤린의 목소리가 차츰 높아졌다. 밀폐된 마차 안에 격양된 목소리가 울렸다.

“제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프레데릭의 손이 로젤린의 입술 앞에서 멈췄다. 흠칫 놀란 로젤린은 입을 다물었다. 격양된 목소리가 녹아들어 고조되던 마차 안의 공기가 급격히 정체되었다.

프레데릭이 손을 거두었다.

“넌 네가 왜 기사가 되어야 하는지, 네 목적이 무엇이기에 날 이용하는지 말하지 않았지. 오해는 하지 마라. 나도 캐물을 생각은 없으니까. 다만…… 나는 몰라. 네가 안에 무엇을 품고 있으며 너에게 기사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렇지만 이것 하나는 말할 수 있다.”

어슴푸레한 여명이 스며드는 마차 안은 어두컴컴했다. 로젤린의 앞에 있는 프레데릭의 얼굴에는 검은 음영이 드리웠다. 어둠 속에서 희게 빛나는 눈동자만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로젤린은 프레데릭의 표정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평소처럼 가벼운 미소를 띤 채, 그러나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네가 모든 걸 짊어질 필요는 없어. 너는 충분히 훌륭하였으니까.”

“…….”

로젤린은 생각했다.

네 책임이 아니야. 네가 모두 짊어지지 않아도 돼. 너는 잘했어. 너는 지금까지 한 것만으로도 충분해.

프레데릭의 이 말을 과거에 들었다면 어땠을까.

홀로 아득바득 피로 얼룩진 콜로세움의 흙바닥을 구르지 않았을까?

반드시 기사로서 죽겠다는 아집과 강박 관념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을까?

눈앞의 이 남자를,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

로젤린은 어둠에 감사했다. 그의 진심 어린 위안을 듣고도 온전히 마음을 풀지 못하고 씁쓸하게 젖은 자신의 얼굴을 들키지 않아도 되니.

자신은 이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또 한 번 확신했다. 그의 진정이 가슴에 닿았으나 스미어 들지는 못했다. 뒤틀리고 비틀린 채 흉측한 모양으로 굳은 마음의 장벽은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의 진심 어린 위안에도 녹지 않았다.

‘난 늦었어.’

어둠의 힘을 빌려 진심을 감추고, 감정을 가장했다.

“감사합니다.”

“……그래.”

그러나 로젤린은 자신이 프레데릭을 속이지 못하였음을 알았다. 한 박자 늦게 나온 그의 대답은 약간의 씁쓸함에 젖어 있었다. 그녀의 인사가 진심이 아니었음을 그는 알아챈 것이다.

프레데릭은 억지로 그녀의 마음을 캐묻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견고하게 세운 마음의 장벽 너머로 한 걸음 물러나, 평소처럼 바라보고 섰다. 이윽고 입을 열었을 때 그는 평소의 프레데릭이 되어 있었다.

“멜리나 양을 구하고 큰닭이라는 실마리도 찾아냈으니 큰 공이야. 원하는 상은 없나?”

“상이요?”

“그렇지, 상. 예를 들어 ‘프레데릭을 성희롱할 수 있는 티켓 10장’ 같은 것?”

“그건 필요 없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대화에 그녀도 맞추었다. 짐짓 단호하게 대답하자 프레데릭은 상처 입은 목소리로 항의했다.

“부족하다면 10장 더 추가하마.”

“됐습니다. 그런 것 말고, 음…… 발트란으로 귀환하기 전에 반나절 휴가를 주실 수 있으십니까? 언니와 조카를 만나고 싶습니다.”

“오, 좋지.”

프레데릭이 검지와 엄지를 딱 튕기며 소리를 냈다.

“나도 같이 가자. 네 가족에게 인사를 하고 싶어.”

“……사양해도 됩니까?”

“왜!”

프레데릭이 억울하게 외쳤다. 한가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해가 제법 높이 떴다. 마차의 작은 창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아까보다 한결 밝았다.

“언니가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부담스럽나…….”

“부담스럽지요. 시누이의 상관이 자택까지 찾아오면요.”

시누이의 상관이라니, 정의하자면 참으로 간단한 단어다. 프레데릭은 시누이의 상관이라는 단어를 쓸쓸하게 곱씹었다. 가족에게 먼저 점수를 따놓으려고 했는데.

차츰 해가 밝아 오며 맞은편에 앉은 로젤린의 얼굴도 선명하게 보였다. 전투와 긴장과 회의로 밤을 꼬박 지새웠으니 상당히 피로할 것이다. 그러나 피로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단정한 옆얼굴로 햇살이 흘러내렸다.

살짝 삐친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 머리카락을 쓰다듬지 않기 위해 프레데릭은 손가락에 힘을 꼭 주어야 했다. 청색이 어린 머리칼이 새파랗게 움트는 여명을 받아 더욱 푸르렀다.

창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던 로젤린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씁쓸하였던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프레데릭은 마차의 좌석에 기댄 채 지그시 로젤린의 얼굴을 응시했다.

“과거에 클레타트 후작님과 가느다란 인연이 있어서 그분을 직접 뵌 적이 있습니다. 후작님은 아마 저를 기억하지 못하실 테지만 한때마나 인연이 있던 분입니다. 그랬던 분이 권력욕을 위해 인명을 상하는 일도 서슴지 않으시니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어쩌다가 후작을 만났나?”

그때까지만 해도 프레데릭은 가볍게 생각했다. 몰락하기 전에는 꽤 부유한 가문이었다고 하니 사교계에 잠시 초대되지 않았을까, 그 정도의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과거에 섬기셨던 분이었습니다.”

가볍게 던진 프레데릭의 질문에 로젤린 또한 가볍게 대답했다. 그녀에게 과거는 반드시 숨겨야 하는 비밀이나 치부가 아니었다.

“후작님의 기사이셨던 적이 있습니다. 큰아버지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시면서 본가를 이으시느라 기사로서의 임무에서는 물러나셨습니다만, 그 후에도 꾸준히 후작님의 일을 도우셨고요. 그 무렵에 저도 후작님을 뵈었습니다. ……전하?”

큰 뜻 없이 아버지의 일을 이야기하던 로젤린은 갸웃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느긋하게 앉아 있던 프레데릭의 안색이 몹시 창백했다.

안색을 살피느라 로젤린은 팔짱을 낀 그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는 건 미처 보지 못했다.

“……가문이라면?”

간신히 나온 프레데릭의 한마디는 지극히 평범한 물음이었다. 로젤린은 의아해하면서도 충실하게 대답했다.

“일부러 전하께 숨긴 건 아니었습니다만, 제 본가는 남작가입니다. 지금은 팔아치웠지만 영지도 아주 작은 시골이었던 한미한 가문이라 큰 의미는 없습니다.”

프레데릭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메이어 남작가…….”

“귀족 연감에서도 끄트머리에나 걸려 있던 가문인 데다 현재는 몰락해서 전하께서도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

“전하, 괜찮으십니까?”

“…….”

“전하.”

로젤린이 거듭 불러서야 프레데릭이 흠칫 고개를 올렸다.

그의 얼굴에 혼란함이 가득했다. 모든 것에서 도망은 칠지언정 자신의 주관은 흔들리지 않던 프레데릭이다. 그런 그의 동요에 로젤린은 몹시 놀랐다.

“……아니야, 아무것도.”

간신히 무거운 한마디를 내뱉은 프레데릭은 눈을 감았다. 로젤린도 더는 그에게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부자연스러운 정적 속에 마차가 새벽의 거리를 가로질렀다.

길었던 밤이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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