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내기와 내기 (6/16)

5. 내기와 내기

달빛이 흐르고 별빛이 쏟아진다.

그곳에 프레데릭이 있다.

로젤린은 프레데릭을 본다.

만약에 평범하게 한 명의 소녀이자 여자로 성장했다면, 만약에 가문이 몰락하지 않았다면, 만약에 몰락하였어도 명예를 더럽히지 않았다면, 만약에 가문의 업을 짊어지지 않았다면, 만약에 기사가 되지 않았다면.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숱한 가정들이 밤하늘에 산산이 부서졌다.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반복하는 가정은 헛되이 바스라지기만 했다.

‘이 고독은 당신이 아니라 내가 마시고 죽을 독입니다.’

로젤린은 허망한 가정을 고독에 파묻었다. 그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켰다. 이것만은 온전히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 한다. 누구와 나눌 수도, 누구의 이해를 구할 수도 없다. 프레데릭은 절대 안 된다.

일부러 다른 상상을 했다. 일상에 밀접한 한가로운 상상을.

언젠가 엠마가 그녀에게 말했었다.

- 고모, 날 괴롭히는 애가 있거든. 소꿉놀이하고 있으면 흙을 뿌리고 스커트를 훌렁 젖히거나 머리끈을 억지로 잡아 빼.

- 어떤 새, 놈이야? 고모가 그 자식 반 죽여줄까?

- 근데 걔가 날 좋아한대.

- 넌 걔를 어떻게 생각하는데?

- 맨날 괴롭혀서 싫어. 그치만 날 좋아한다고 하니까……. 모르겠어.

- 엠마, 좋아하는 마음을 괴롭히는 것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놈 같은 게 인생에 도움이 될 리가 없어. 엄마를 좋아한다고 하는 아저씨들이 엄마를 괴롭혀?

- 아니.

- 그렇지? 엄청 잘해 주잖아. 네게도 선물을 많이 사 주고.

- 응.

- 좋아한다는 건 그런 거야. 쑥스럽다는 핑계로 괴롭히는 놈은 싹수부터 아작을 내 버려야 해.

- 그럼 어떻게 하면 돼?

- 두 번 다시 껄떡거리지 못하게 죽여 놔야지. 싸움은 기선 제압이 제일 중요해. 먼저 주먹으로 콧등을 세게 후려갈기고…….

그렇게 엠마에게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 이야기를 프레데릭에게 해 주면 어떻게 될까. 원하지 않는 희롱을 하는 건 절대 호감의 표시가 아니라고. 그럼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겠지. 로젤린은 그 모습도 상상할 수 있었다.

능글능글 말주변이 좋은 프레데릭이지만 허를 찔리면 몹시 당황한다. 절대 정치가는 되지 못할 사람이다.

그를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하나씩 그를 알아가고 있었다.

“이 말을 어떻게 하면 될지 많이 고민을 했는데…….”

프레데릭이 머뭇머뭇하지만 사뭇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모욕감을 느끼고 나에게 실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너에게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변명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만, 그동안 내가 서, 성희롱 같은 발언을 한 건…… 여태 네가 남자인 줄 알고 있어서 남자처럼 편하게 말하느라 그만…….”

이건 상상 못했다.

너무나 의외의 고백을 들어서 반응도 못하는 침묵이 길어졌다. 그녀의 침묵에 프레데릭은 바로 무릎을 꿇었다.

“미안. 할 말이 없다. 정말 미안. 내 눈이 쓸모없는 병신이지. 오늘은 무례한 데다 정신 나간 소리까지 해 버렸으니 얼마나 화가 났을지 상상도 못하겠다. 지금이니까 고백하는 거지만 예쁘다고 생각한 건 드레스가 아니라 너였어. 화가 풀릴 때까지 패도 돼. 차라리 죽여 다오.”

횡설수설하는 프레데릭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머릿속으로 그동안의 성희롱과 성추행 사건들이 재현되었다.

그러니까, 그 일들이 전부 자신을 남자로 착각했기 때문이라고?

겨우 이해된다. 자신의 경험과 상반되었던 프레데릭의 평가가. 전부 프레데릭의 착각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풉! 하하하!!”

웃음이 터졌다. 로젤린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어둠이 깔린 황야를 흔들었다.

빤히 남자에게 남자들의 대화를 하면서 억울한 누명을 썼던 프레데릭이. 누명을 썼으면서도 로젤린에게는 변변찮은 대응도 못하던 프레데릭이. 대공저에서부터 오늘 밤 내내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살피던 프레데릭이.

하나의 사소한 착각으로 인해 커다랗게 부푼 오해를 생각하니 웃음이 터졌다.

그녀의 웃음에 더욱 혼란한 표정이 된 프레데릭에게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목소리는 편안하게 돌아가 있었다.

결국 그녀에게 일상을 준 사람도 프레데릭이었다. 무의미한 가정으로 던진 사람도 프레데릭. 일상으로 끌어당긴 사람도 프레데릭. 어느새 그의 존재가 이렇게 커졌다.

“전하, 제가 여자라는 걸 알자마자 좋아하시게 된 겁니까?”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부터.”

“역시 전하는 게이가 아닐까요? 남자에게 끌리셨잖습니까. 저는 여자입니다.”

“아냐!!”

프레데릭이 기겁하여 부정했다.

“솔직히 나도 내가 자각하지 못했던 게이인 줄 알았어. 하지만 진짜 게이라면 네가 여자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마음이 식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난 지금도 너에게 반해 있다, 로젤린. 네가 남자라고 착각했을 때도 좋아했으니 너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좋, 아니 소는 안 되니까 빼고 남녀노를 불문하고…….”

다시금 횡설수설하기 시작하는 프레데릭의 변명을 흘려들으며 그를 보았다.

자신과 프레데릭의 마음은 같지만 다르다. 그를 위해 죽음을 결심한 자신이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한없이 이기적인 자신이지만 그를 위한 도리는 지킬 것이다.

최후까지 기사로서 그의 곁에서 죽어야 한다.

남자와 여자로서 그의 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처음이자 마지막 추억으로 간직해도 될까.

“즉, 요약하자면 너니까 좋은 거야. 그렇지, 바로 이……!”

횡설수설하던 변명이 한순간에 끊어졌다. 잠시 그의 숨결을 머금은 로젤린은 곧 입술을 뗐지만, 이번에는 프레데릭이 그녀를 강하게 붙들었다.

그녀를 지탱하던 단단하고 강인한 팔이 그녀를 안았다. 입술을 더듬는 호흡이 다급하다. 로젤린은 입술을 열었다. 뜨거운 열기가 단번에 그녀의 입안을 파고들었다. 한순간에 힘이 풀리면 그녀가 도망가 버리는 것처럼, 격렬하고 절박한 열기.

“하아.”

가쁜 호흡이 뒤섞였다. 쌀쌀하게 시린 밤공기마저 뜨겁다. 프레데릭의 커다란 손이 로젤린의 양 뺨을 안으며 이마를 맞댔다.

“……로젤린, 널 사랑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아니요.”

로젤린은 가볍게 프레데릭을 밀어냈다. 그리고 그에게 모든 본심을 밝히지 못하는 사죄를 하며 대답했다.

“저는 처음부터 전하의 기사였고, 마지막까지 전하의 기사로 남고 싶습니다.”

“로젤린, 하지만…….”

“전하께서 기사를 싫어하시는 이유를 이제 압니다. 말씀해 주셔서 몹시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도 반드시 기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전하의 마음을 받게 된다면 제가 어찌 전하의 기사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

프레데릭은 입을 다물었다. 금방이라도 혀끝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질문을 억지로 되삼킨 얼굴이었다. 그는 로젤린이 무엇 때문에 그리도 절박하게 기사가 되어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로젤린이 그에게 기사를 싫어하는 이유를 캐묻지 않았던 것처럼.

“그럼…… 아까의 키스는 뭐지?”

로젤린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는 이미 일상에 발을 딛고 서 있다. 프레데릭과 시시한 한담을 주고받던 일상으로.

“성희롱한 건데요.”

“……뭐?”

“성희롱입니다. 의도하셨든 아니든 전하는 저에게 몇 차례나 성희롱을 하셨잖습니까. 그 복수를 했습니다.”

“…….”

어슬렁어슬렁 근방을 걷고 있는 말 두 마리의 고삐를 로젤린이 끌고 올 동안 침묵하던 프레데릭이 다시 물었다. 무척이나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이었다.

“성희롱을 또 해 주면 안 되나? 성추행도 좋아. 절대 반항 안 하마.”

“피해자가 좋아하면 성희롱이 아니죠.”

“아! 말실수야, 실수. 당연히 성희롱을 당하면 엄청엄청엄청 싫지. 최악이고말고.”

“제 키스가 최악이었다고요?”

“……아니, 아닌데. 내 말은…….”

“아무튼 흑염룡에 타십시오. 늦었으니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슬슬 춥기도 하고요.”

“으음.”

프레데릭이 무겁게 신음하며 흑염룡에 올랐다. 한참 멀어지긴 하였으나 성벽은 보이는 위치다. 로젤린은 앞장서서 길을 인도했다.

“좋아. 우리 돌아가면 기사 관계와 남녀 관계를 병행하는 방법을 고민해 보자고.”

“싫습니다.”

“내키지 않으면 나 혼자라도 고민해 볼 테니까.”

“싫어요.”

“자랑은 아니지만 나만 한 남자는 찾기 힘들다.”

“25년 인생에 남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잘생긴 남자가 이상형이라며?”

“기분이 좋아지는 눈요기와 관상용이죠.”

“계속 나로 눈요기하면 되겠군. 발트란에서 내가 제일 잘생겼거든.”

“그건 부정할 수가 없군요…….”

“솔직히 얼굴은 취향이지?”

“얼굴은요.”

눈요기라는 정의가 마음에 드는지 프레데릭이 상쾌하게 웃었다. 로젤린은 앞만 바라보며 그를 외면했다.

그녀는 이미 결심했다. 그가 자극하여 개화시킨 마음도 버리기로 했다.

그럼에도, 후에 그녀의 죽음으로 진실을 알게 될 그의 경멸이 두려웠다.

* * *

수확제가 끝나면서 하루 종일 행사에 참석한 로젤린은 특별히 3일의 휴가를 받았다.

적절한 시기에 받은 적절한 휴식이었다. 프레데릭을 만나지 않으면서 마음을 정리하고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다. 프레데릭도 휴가를 받은 로젤린을 명령으로 강요하여 억지로 옆에 붙들고 있을 사람은 아니다.

로젤린은 기사단에 입단한 후 최초로 개인 훈련도 하지 않고 내도록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어젯밤 결심했다.

프레데릭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의 곁에 머무르기로. 죽음을 바치는 기사의 충성에 오래된 상처가 있는 그를 위해 죽기로.

도리가 아니다. 도리가 아님을 알면서도, 그의 경멸을 받게 되리란 걸 알면서도 선택한 이기심이다.

기사로서 그를 섬기고 싶다는 이기심. 그가 가장 위험한때에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그를 지키고야 말겠다는 이기심. 그녀가 알지 못하던 때에 어린 꽃처럼 피어난 감정의 잔해로 인한 이기심.

“최악의 인간이네…….”

내가 이렇게까지 이기적인 인간이었나, 하는 자각에 한숨이 나왔다.

아예 그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으면 가책이 덜했을까. 속 시원하게 손을 털고 기사단을 나와 다른 주인을 찾기 위해 떠났을까.

또다시 무의미한 가정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어느 것 하나도 확신을 내릴 수 없다. 복잡하게 꼬여가는 속이 답답하기만 하다. 로젤린은 한심한 해결책을 선택했다.

“퐁” 코르크가 시원한 소리를 내며 뽑혔다.

로젤린은 안주도 없이 병째로 술을 마시며 늘어졌다. 대낮이지만 벌써 3병째다.

수잔나와 도망 다닐 적에 가문의 빚과 명예를 모두 자신이 짊어지고 죽겠다는 결심을 하는 건 차라리 쉬웠다. 한 사람의 곁에 살아가고자 하는 결심은 매우 어렵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살아가는 것도 아니지. 유예 기간을 누리는 정도잖아.’

되도록 오래 그의 곁에 머물고 싶은 마음과, 10년 전에 버린 자신의 마음이 돌아오기 전에 모든 게 끝나길 바라는 마음. 상반된 두 가지의 마음에 갇혀 한없이 바닥으로 추락해 가는 느낌이다.

‘지금의 내 고민은 내가 죽은 후 전하의 경멸과 분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

자조적으로 씁쓸하게 웃으며 창을 열었다. 수확제가 끝나기를 기다린 것처럼 기온이 뚝 떨어졌다. 겨울의 찬 공기가 후욱 밀려왔다. 화덕으로 인해 탁하게 데워진 방안의 공기가 투명해졌다.

멀리 탁 트인 훈련장이 보였다.

‘머릿속이 텅 비어 하얗게 될 때까지 달려 볼까. 잡념도 함께 사라질 거야.’

문을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메이어 기사님, 안에 계시지요?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알파관에 소속된 하녀 - 주로 창고 정리를 하는 - 의 목소리였다.

“손님?”

로젤린은 갸웃했다. 기숙사는 기사단 본부 내에서 융통성 있게 외부인의 출입이 허가되는 곳이다. 식재료를 배달하는 외부인 때문에 생긴 융통성은 차츰 조금씩 범위를 넓혔다. 현재는 기사단원의 손님이 방문하는 것까지 허용되고 있다.

발트란에는 아는 사람도 없는데 찾아올 손님이 누가 있을까.

혹시 이사벨이 아닌가 하며 문을 열었다. 어제는 프레데릭 때문에 너무 화가 나서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었다.

“로젤린, 이게 얼마만이니?”

예상 밖의 손님이었다. 로젤린의 눈동자가 반가움을 담아 커졌다.

“카트린 씨!”

고향과 먼 타 지역에서 오랜 지인을 만나니 더욱 반가웠다. 로젤린은 얼른 그녀를 방 안으로 안내했다.

“발트란에 또 오신 거예요? 언제요? 언제까지 계시는데요?”

“하나씩 물어, 얘.”

카트린이 쿡쿡 웃으며 로젤린의 뺨에 키스했다.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정말 제 집처럼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야.”

기숙사의 좁은 방을 한 바퀴 둘러본 카트린이 장난스러운 핀잔을 주었다. 그제야 자신의 방을 둘러본 로젤린은 민망해졌다.

기본 2인 1실의 기숙사이나 현재는 여자 기사가 그녀 혼자뿐이기에 2인실을 혼자 쓰고 있었다. 대상인인 카트린이 보기에는 형편없이 좁은 방이겠지만 로젤린에게는 적당히 넓은 방이었다.

문제는 방이 조금, 그러니까 아주 조금 지저분하다는 점이었다.

“하, 하하…… 수확제 준비이니 뭐니 바빠서 청소까지 신경을 못 썼어요. 카트린 씨가 오시는 걸 알았으면 대청소를 할 걸 그랬네요.”

로젤린은 어설프게 변명하며 엉망으로 흐트러진 침대 시트를 정리하고 가구와 의자 이곳저곳에 널브러진 옷을 대충 옷장에 던져 넣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빈 술병들은 침대 밑의 공간에 발로 슬쩍 밀어 넣었다.

사실 레젠에 있을 때도 부지런히 청소를 했던 건 아니었다.

보기에 너저분하지 않을 정도로 대강 정리한 로젤린은 의자에 폭신폭신한 방석을 깔았다. 하녀에게 선물 받았지만 방 안에서는 보통 침대를 의자 대용으로 써서 통 쓸 일이 없던 방석이었다.

카트린은 그럭저럭 사람이 살고 있다는 생활감이 묻어나는 방과, 깔끔하게 발린 벽을 구경했다.

“금방 차를 가져올게요.”

로젤린은 문을 닫고 화덕에 숯을 넉넉히 넣은 다음 주방으로 내려갔다. 주방의 하녀에게 부탁하여 간단한 다과를 가지고 돌아왔다. 카트린이 로젤린이 마시다 만 술병을 살펴보다 한탄했다.

“라벨도 붙어 있지 않은 이런 싸구려 술은 뭐니?”

“그래 봬도 맛은 괜찮습니다. 발트란 사람들이 술을 잘 마시다 보니 양조법이 발달해서 어지간한 술집의 술도 좋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스토아 산 와인 한 박스를 가지고 올걸 그랬어.”

그해에 제일 수확이 잘된 최고 품질의 포도로 일정 수량만을 생산하여 가격이 하늘 꼭대기에 붙어 있는 스토아 와인이다. 당연히 맛도 끝내준다. 평론가들의 거창한 수식어를 제외해도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었다.

로젤린도 후원자들 덕분에 마신 적이 더러 있었다. 무심코 상상한 맛에 군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 모습을 카트린이 예리하게 캐치했다.

“좋아, 기숙사에서 배달은 받아 주니?”

“괘, 괜찮아요! 스토아 와인이 배달되었다가는 기숙사가 뒤집어질걸요.”

“창고가 뒤집어져 봤자 얼마나 뒤집히겠어.”

신랄한 말에 반박할 말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로젤린의 옆방도, 아랫방도, 윗방도 전부 창고였으니까.

“잘 지내고 있긴 하니? 설마 여자라고 차별받아서 창고 방으로 내쫓긴 건 아니니?”

“그 반대라고 할까요. 제가 쓰라고 일부러 창고를 비워 줬어요.”

몇 년 동안 여자 기사가 없어서 창고 대용으로 쓰던 여자 기숙사 알파관이다. 맞는 설명이긴 한데 자신이 말하고도 좀 이상했다. 로젤린은 머리를 긁적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전투도 잦고 훈련도 엄해서 검투사로 있을 때보다 육체적으로는 힘들긴 한데 마음은 훨씬 편합니다. 여기는 어쭙잖게 시비 거는 병신들이 없거든요. 있어도 제 앞에서 대놓고 티는 안 낸다는 게 이렇게 편한지 몰랐어요.”

“명색이 기사이니 정신 상태는 제대로 박혀 있나 봐.”

“동료들도 다들 좋은 녀석들입니다.”

기숙사 복도까지 물건들이 즐비하게 쌓여 있으니 영락없이 창고 같은 몰골이긴 하다. 아래층에서 올라올 때부터 창고에 로젤린이 살고 있다는 걸 언짢아하였던 카트린은 겨우 마음을 풀었다.

그녀는 양손으로 찻잔을 쥐고 어느 정도 식은 차를 호로록 마셨다.

“찻잎은 질이 낮지만 찻물을 맑게 우려냈네. 네가 끓인 건 아니지?”

“물론 주방에서 일하는 분께 부탁을 했죠.”

로젤린도 차를 마셨다. 술을 마시느라 뜨끈하게 데워진 배 속으로 따뜻한 찻물이 들어갔다. 술이 깨는 건지 안 깨는 건지 모르겠다.

어느 정도 몸을 녹인 카트린이 로젤린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탄식했다. 기는 대로 적당히 자른 짧은 머리칼과, 행동이 불편하지 않고 따뜻하기만 하면 아무거나 주워 입은 차림새다.

“널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급으로 물들여 주는 게 내 낙이었는데.”

검투사였을 때도 셔츠와 바지라는 간편한 차림이었으나 지금과는 큰 차이점이 있다. 당시의 평상복은 후원자들이 고급 원단으로 최고 실력의 재봉사에게 맡긴 디자인이었으니까.

로젤린도 발트란까지 평상복은 가지고 왔다. 문제는 발트란의 추위였다. 가지고 온 평상복들로 겨울을 나기는 무리라서 새 옷을 맞췄다. 평기사의 월급 수준에 맞춘 옷이니 카트린의 눈에 차지 않는 건 당연하다.

이러다가 기사단의 험담까지 나올 것 같아서 말문을 돌렸다.

“상행으로 오신 건가요? 발트란에 재방문하시더라도 내년쯤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직접 발트란까지 오는 건 내년이나 내후년으로 계획하고 있었어. 엔네까지 왔지만 발트란을 들를 예정은 없었지.”

엔네는 발트란의 남서쪽에 있는 도시다.

“그런데 엔네에서 소문을 들었어. 여기 썩은 재규어 떼 수백 마리가 습격을 했었다면서?”

“예에.”

로젤린은 어두워지려는 안색을 펴며 끄덕였다.

“마수가 수백 마리나 되니 전리품도 어마어마하지 않겠니. 매물을 확보하려고 일정을 변경하고 바로 발트란까지 왔어.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 겨우 마무리를 짓고 보니 벌써 수확제까지 지났지 뭐니.”

“사업은 잘되셨고요?”

“후후. 수확제를 촌구석에서 보낸 보람은 있었지.”

카트린은 만족한 얼굴이었다.

“마수 떼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서 기사단도 많이 고생했다던데 넌 다친 곳 없니?”

“몇 군데 긁힌 것 정도니까 금방 나았어요. 살아남았으니 그걸로 됐고요.”

로젤린은 평소와 다름없이 대답했다. 검투사 시절에도 종종 나누었던 대화다. 이번 싸움에서도 저는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카트린은 부드럽게 부정했다.

“로젤린, 너 변했구나.”

“……제가요?”

“내가 느낀 분위기이니 정확한 설명은 어렵지만, 예전의 너는 굉장히 절박하고 위태로웠거든. 항상 앞으로만 달려가는 느낌이었다고 해야 하나. 지금은 달라. 똑같이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말을 하는데 한결 안정된 느낌이 들어.”

그녀의 손끝이 로젤린의 눈가를 느리게 어루만졌다.

“눈매도 아주 부드러워졌는걸.”

“…….”

“누가 우리 로젤린을 변하게 했을까?”

변하게 된 원인이라면 몇 가지 예상할 수 있다. 믿음직한 동료, 신뢰 가는 단장, 타인을 수호한다는 자부심, 편안해진 일상생활 등등.

그렇지만 로젤린이 카트린의 말을 들은 순간 떠올린 건 단 한 명의 이름이었다.

“사랑에 빠졌니?”

카트린이 짓궂게 질문했다. 로젤린은 가슴에 그려진 이름을 지우며 태연히 미소했다.

“술맛이 좋으니까요.”

“수잔나 씨에게 네 동생이 맨날 술만 퍼마시고 있으니까 잔소리를 해 달라고 해야겠어.”

손을 거둔 카트린은 로젤린이 가장 듣고 싶어 할 화제를 꺼냈다.

“네가 기사가 되었다는 소식과 네 편지를 받고 수잔나 씨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

“언니랑 엠마는 어때요?”

“똑같아.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전혀 없어. 빵집도 여전히 장사가 잘 되고, 엠마도 여전히 장난꾸러기고, 수잔나 씨도 여전히 열렬한 구애를 받고 있으시지. 발트란까지 올 줄 알았다면 수잔나 씨의 편지를 받아 올걸 그랬지.”

그녀가 검투사를 은퇴한 후에도 그녀의 가족에게 계속 신경을 써 주는 카트린이 고마웠다.

“저, 죄송하지만 한 가지…….”

“좋아.”

“예? 저 아직 말을 안 꺼냈는데요?”

“수잔나 씨랑 엠마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는 말을 하려던 것 아니었어?”

로젤린은 멋쩍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큰 수고를 하는 일도 아니니 고마워할 건 없어. 네가 나에게 부탁하고 의지하면 할수록 난 즐겁단다.”

“그래도요.”

이유가 무엇이든 여전히 자신에게 호의를 갖고 친분을 이어 준다는 건 충분히 고맙고 기쁜 일이다.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편지는 금방 쓰겠습니다.”

“나도 슬슬 가 봐야 하니까 천천히 써. 편지 말고 선물도 좀 사고. 발트란에 며칠 더 체류 예정이니까 떠나기 전에 다시 들를게.”

“벌써 가시려고요? 오늘은 저도 휴일이니까 이따가 저녁 식사는 같이 어때요? 제가 살게요.”

“미안, 거래처와 선약이 있어.”

카트린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로젤린은 아쉬움을 삼켰다. 한가하게 유람을 나온 게 아니라 바쁘게 일하는 와중에 짬을 내어 들러준 것이다.

“저녁 식사 대신 요 쿠키를 가져갈게.”

“제가 담겠습니다.”

손수건을 꺼내 남은 쿠키를 담고 매듭을 묶었다. 묵직해진 손수건을 받은 카트린이 로젤린의 뺨에 작별 키스를 했다.

“감기 걸리면 안 돼.”

“카트린 씨도 몸조심하세요.”

“감기 안 걸리려고 날이 궂고 눈이 쏟아지기 전에 서둘러 레젠으로 돌아가려는 거야. 당장 눈앞의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건강이 제일 큰 재산이지.”

마지막까지 그녀다운 인사를 하는 카트린을 본부 밖까지 배웅했다.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마차가 왠지 아쉬워 오랫동안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온 지 몇 달이나 되었다고 벌써 향수병인걸까.

로젤린은 괜히 땅바닥을 발끝으로 툭툭 찼다.

기를 죽여 놓은 보람이 있었다. 프레데릭이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집무실을 나가지 않았다. 몇 달 만에 성취한 쾌거다. 라울은 즐겁게 서류를 가지고 왔다. 수확제로 인해 미루어졌던 보고들이 많았다.

“수확제 행사와 연회는 기존과 변함없이 진행되었습니다. 시내에서도 몇 건의 사소한 경범죄를 제외하면 큰 사고가 없었고요. 작년에 취객이 난동을 부려서 상해 사건이 있었던 것에 비하면 평화롭게 지나갔습니다.”

책상에 턱을 괴고 비스듬히 앉아 있는 프레데릭이 대답했다.

“응.”

“새벽녘에 마수가 출몰했던 건 아시죠?”

“응.”

“신입 기사를 임의로 편성하여 출병하였는데 피해는 경미하지만, 본격적인 전력이 되기엔 시기상조인 것 같습니다. 신입 기사를 한꺼번에 발탁한 것도 드문 데다 단원도 충분하지 않아서 여러모로 고비가 있었다고 합니다.”

“응.”

“발트란 내가 아니라 슈벤하임 대공령 전체에 공식적으로 신입 기사단을 발탁하는 공고를 내 주셨으면 하는 던 경의 제안서입니다.”

기사단의 부정기적인 충원을 위해 대대적인 공고를 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군사적인 약점이 타국에 노출되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이기스 나이트는 사람이 아닌 오직 마수만을 상대하는 기사단이다. 아이기스 나이트의 약점은 슈벤하임 군대의 약점과 직결되지 않는다. 게다가 발트란에 마수 떼가 출몰하여 아이기스 나이트에 큰 피해가 있었다는 정도는 첩보로 알려졌을 것이다.

알렉산더도 알고 있고, 라울도 알고 있고, 프레데릭도 알고 있다. 프레데릭은 선선히 허락했다.

“응.”

“던 경에게 허락하셨다고 전하겠습니다. 정식 서류는 다시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썩은 재규어 떼의 전리품은 사흘 전의 경매에서 전부 낙찰되었습니다. 수익 보고서입니다.”

마수를 사냥한 가죽과 뼈 등은 발트란의 주된 수익 중 하나이다. 발트란에서는 특정 상단과 계약을 맺어 전리품을 판매하지 않고 경매에 올렸다. 마수를 사냥한 전리품은 없어서 팔지 못하는 고급 소재이기 때문에 - 심지어는 피와 내장도 – 완판되지 않는 일은 없었다.

제국 최북단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상인들의 상행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응.”

라울은 차근차근 보고를 이어 갔다.

“다음은 예전에 프레데릭 님이 감사를 명령하셨던 성벽 개축 건입니다. 연루되어 횡령한 사람들을 더듬어 올라가다 보니 모멘 자작까지 선이 닿았습니다.”

“응.”

“오늘 아침에 체포하여 심문 중인데 한두 건을 횡령한 게 아닌 듯하니 탈탈 털어 봐야겠습니다. 전 최소 5년 이내의 모든 시공 건을 뒤집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프레데릭 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프레데릭은 감사관들을 갈아 버리는 결정을 간단히 했다.

“응.”

“……? 5년에 찬성하신다는 뜻입니까?”

“응.”

“…….”

그제야 라울도 프레데릭의 대답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프레데릭이 결정하거나 명령할 사안이 아니라 사후 보고만 줄줄 이어져서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보니 프레데릭의 표정도 좀 이상하다. 일하기 싫어서 죽겠다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이긴 하지만, 이렇게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적은 없었다.

“프레데릭 님.”

“응.”

“제가 프레데릭 님보다 더 잘생겼다는 걸 인정하십니까?”

“응.”

“월급 세 배로 올려 주세요.”

“응.”

“제 얘기 안 듣고 계시죠?”

“응.”

“…….”

라울은 잠시 전의 표현을 정정했다. 멍한 표정이 아니라 영혼이 빠져나가 있는 표정이다. 튀지 말라고 육체를 붙잡아다 앉혀 놨더니 이젠 영혼을 이탈시킨다.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려다가 생각을 바꾸고 - 호두나무 원목 책상은 단단했다 - 서가의 책을 가져왔다.

“프레데릭 님!”

쿵!

두꺼운 책을 양손으로 책상에 쿵 내려쳤다. 턱을 괴고 있던 프레데릭의 팔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헉! 깜짝이야. 애 떨어지는 줄 알았네. 너 언제 들어왔냐?”

하마터면 그대로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한 그는 대단히 놀란 얼굴로 라울을 바라보았다. 노크하였을 때 분명히 “응.”하는 대답을 듣고 들어왔던 라울은 책으로 책상이 아닌 프레데릭의 얼굴을 후려치고 싶었다.

“가장 최근의 기억이 뭔가요?”

“로젤린이 예뻤어.”

“…….”

진짜 한 대 때렸으면 소원이 없겠다.

이제까지 하나도 안 듣고 있었다는 것도 짜증이 나고, 긴 보고를 처음부터 반복해야 한다는 것도 짜증이 난다.

“연회 막바지에 또 사라지셨다면서요? 메이어 경과 나가셨다고 하던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속마음 그대로 말하면 ‘어젯밤에 무슨 짓을 했길래 지금까지 넋이 나가 있고 자빠졌냐’ 정도 될 것이다.

프레데릭이 싱글싱글 웃었다.

“로젤린에게 고백을 했지.”

“뭡니까. 프레데릭 님은 게이였던 게 아니었나요? 계속 메이어 경을 남자로 알고 계셨잖습니까. 여자라는 걸 알고 식었을 줄 알았는데요.”

“……그 얘기는 제발 하지 말아 줘.”

싱글거리던 것도 잠시, 라울이 아픈 상처를 쑤시자 프레데릭은 목덜미까지 벌게졌다. 멀쩡한 여자를 남자로 착각하고 있었으니 평생 갈 쪽팔림이다.

보고하는 내내 전혀 듣지도 않았던 건 짜증이 나고, 평생 우려먹을 건수가 생긴 건 고소하다. 그렇긴 해도 프레데릭은 그의 젖형제였고 주인이었다.

숱한 여자들에게 청혼을 거절당하면서도 귀찮아하기만 할 뿐 전혀 타격이 없던 프레데릭이다. 애초에 마음이 없었으니 타격도 없었다. 그런 프레데릭이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여자가 나타났다.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다.

또 차였을까 봐.

“좋은 분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만.”

차이지 않고 로맨틱한 무드가 형성되고, 앞으로도 로맨틱한 관계가 잘 지속된다면 프레데릭은 결혼을 하려 할 것이다. 그는 정부를 용납하지 않으니까. 여기에서 로젤린이 평민이라는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본래 귀족의 결혼은 연애감정만으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으나, 프레데릭은 예외였다. 적절한 혼처를 찾지 못하고 나이 서른이 넘었다. 대공의 배우자는 대공령 내에서 선택한다는 오랜 규범을 깨고 외부까지 눈을 돌리고 있는 상황이다.

측근들은 프레데릭이 원하는 배우자가 ‘인간’이고 ‘여자’이기만 한다면 평민이든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이든 뭐든 절대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평민이라고 문제시하는 것보다 프레데릭의 결혼과 후계자 문제가 더 급했다.

결혼할 여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쌍수를 치켜들고 대환영할 일이다.

하루가 지나서까지 정신이 팔려 있는 데다 웃는 표정이니 차였으리란 건 괜한 걱정이 아니었을까. 내년쯤에는 결혼 준비를 하게 되나. 라울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과연 현실은 냉정했다.

“차였는데.”

차인 횟수 기록 갱신이었다.

“……근데 왜 그렇게 신나셨습니까.”

“한 번 차였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거든. 내 얼굴은 취향이랬으니 아예 가망이 없는 건 아냐.”

차인 주제에 지나치게 쌩쌩한 그에게 라울은 한숨을 쉬었다.

“여자들은 거절한 남자가 구질구질하게 들러붙는 거 질색합니다.”

그런 고로 호감도 더 깎아 먹지 말고 냉수나 마시고 속이나 차리라는 친절한 조언이었다. 프레데릭은 부하의 조언에 코웃음을 쳤다.

“이사벨에게 다섯 번이나 프러포즈한 남자가 어디의 누굴까.”

“…….”

그 남자가 앞에 있는 라울이라는 건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이사벨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보다 그녀의 일을 더 중요시했다. 일을 포기할 생각은 절대 없으니 연애는 해도 결혼은 하지 않겠다는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라울은 갖은 맹세를 했다.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이사벨은 현재도 취미인 요리를 하는 것 외에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다. 요리의 밑준비와 설거지도 전부 하녀의 몫이었다. 4인 가족의 단층집에 고용된 하녀가 4명이나 된다.

라울이 프레데릭 밑에서 온갖 스트레스를 받아도 절대 보좌관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였다. 평민이 가질 수 있는 직업에서 영주 보좌관만큼 월급이 센 건 없으니까.

연애 당시에 결혼 문제로 몇 번이나 헤어지고 만나고를 반복했던 쓰라린 과거를 건드린 프레데릭을 노려보았다.

“프레데릭 님, 에밀리아의 첫사랑이 프레데릭 님이었잖습니까.”

라울과 이사벨의 딸들을 프레데릭은 무척 귀여워한다. 그에게도 딸뻘인 데다 젖형제의 아이니 조카나 다름없었다.

큰딸인 에밀리아에게 프레데릭은 아빠 다음으로 멋진 사람이었다. 훤칠하고, 인물 좋고, 선물도 수시로 잔뜩 사 주니 어린 소녀의 환상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물론 프레데릭도 알고 있다.

“왜 과거형이냐. 지금도 첫사랑 아냐?”

이번에는 라울이 코웃음을 쳤다.

“프레데릭 님에게 실망했다고 합니다.”

“……나한테?”

“어제 메이어 경이 드레스를 입을 때 에밀리아도 이사벨을 도와주고 있었거든요. 그 애가 기사가 되고 싶어 해서 메이어 경의 소문을 듣고 많이 동경했습니다. 그런데 프레데릭 님이 메이어 경에게 하신 말을 모두 들었으니…….”

“…….”

라울은 과장되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프레데릭은 무겁게 침묵했다. 아무리 남자인 줄 알고 예쁘다는 말을 지워 버리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헛소리를 했지만, 그 내용이라는 게 참으로.

“엄마가 종종 말하는 상종해서는 안 될 저질이 어떤 표현인지 확실하게 알았다던데요.”

“……그건 내가 로젤린을 남자로 알아서…… 로젤린에게는 사과를 했고…….”

우물우물 변명했으나 라울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에밀리아의 첫사랑은 이미 아름답지 못하게 끝나 버렸습니다. 애초에 서류를 제대로 보셨으면 이런 일은 없잖습니까. 여기 서류 놓고 갈 테니까 이번에는 꼭 제대로 보십시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는 프레데릭은 얌전히 서류를 펼쳤다.

유치한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었으나 라울은 그대로 집무실을 나왔다. 어차피 똑같은 병신이라면 승리한 병신이 되라고 했던가.

‘참, 신년 축일로 레젠으로 가는 건에 대해서 여쭤볼 게 있었는데.’

문을 닫은 뒤에 잊었던 게 퍼뜩 생각이 났다. 다시 들어가서 물어볼까, 하던 라울은 그냥 등을 돌렸다.

프레데릭이 레젠까지 누구를 데려가겠다고 할지는 뻔하다.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라울은 예상하지 못한 손님을 맞았다. 방금까지 그의 주군의 넋을 빼놓고 있던 주범, 로젤린이었다.

카트린을 배웅하고 돌아온 로젤린은 짐을 뒤졌다. 수잔나와 엠마에게 편지를 쓰려면 카트린이 발트란에 머무르고 있을 때가 좋다.

필라헨 제국뿐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에 우편 배달업은 없는 것과 다름없는 사업이었다.

귀족은 자택의 사용인에게 편지 배달을 맡긴다. 평민이라면 같은 도시 내라면 소정의 대가를 받고 편지나 작은 물품을 전달하는 배달부를 쓸 수 있었다. 그나마 이런 배달부도 레젠이나 발트란 같은 대도시에만 있다.

도시와 도시 사이를 배달하려면 해당 도시를 지나가는 상인에게 수고비를 지불하고 부탁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물며 통상적인 상행의 속도로 한 달 넘게 걸리는 제도 레젠과 발트란이다. 소홀히 취급하여 분실될 가능성도 컸다. 발트란에서 인맥이 없는 로젤린은 편지를 부탁할 상인도 찾지 못했다.

카트린이 기꺼이 배달을 맡아 준다니 좋은 기회였다.

기사단에 입단한 직후에 카트린을 통하여 수잔나에게 편지를 보낸 이후, 잉크이니 종이이니 하는 필기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 로젤린은 글을 쓰거나 읽는 것에 그다지 취미가 없었다.

되는 대로 쌓아 구석으로 밀어 두기만 하였던 몇 달치의 일용품을 뒤졌다.

‘잡동사니가 왜 이렇게 많아?’

방에서 특별히 한 일도 없는데 언제 이렇게 쓸모없는 잡동사니가 쌓였는지 모를 일이다. 먼지를 풀풀 풍기던 방을 환기하며 뒤졌다. 넓은 방도 아닌데 찾기도 힘들다.

“아! 찾았다.”

먼지를 뒤집어쓴 종이와 잉크통을 겨우 옷장 구석에서 발견했다. 잉크가 굳어 있는 건 아닐지 걱정하며 뚜껑을 열었다. 다행히 잉크는 무사했다. 옷장 안에 처박혀 있어서 그런지 종이도 변색되지 않았다.

여기저기 널린 물건들을 또 대충 밀어 두고 바로 편지를 쓰려다, 멈칫했다.

‘오랜만에 쓰는 편지고, 언제 또 편지를 쓸지 기약도 없는데 싸구려 종이는 좀 그렇지?’

일전에는 급하게 편지를 쓰느라 기사단 본부 근처의 잡화점에서 싸구려 종이와 잉크를 샀었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시간적 여유가 있다. 기왕이면 고급스럽고 예쁜 편지지가 좋지 않을까.

‘어차피 선물 사러 나가야 했으니까 편지지도 같이 사는 게 낫겠다.’

마음을 굳힌 로젤린은 옷장 아래의 서랍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한 손으로 주머니를 들고 흔들었다.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소리, 금화가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특별히 물건을 사 모으는 취미는 없었다. 기사단 입단 후 기껏 쓴 돈이라고 해 봤자 동료들과 술을 마시거나, 평상복을 산 정도다. 덕분에 월급은 차곡차곡 쌓여서 돈 주머니는 제법 묵직했다.

‘발트란의 물가는 잘 모르지만 이 정도 돈이면 언니랑 엠마에게 좋은 선물을 살 수 있을 거야. 선물용 물건을 살 가게는 어디가 좋은지 녀석들에게 물어봐야겠다.’

로젤린은 여기에서 판단을 잘못했다.

선물용으로도 훌륭한 좋은 물품을 파는 잡화점이 어디인지 기억하고 있을 만큼 섬세한 녀석은 그녀의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결국 이번에도 그녀가 비빌 대상은 한 명뿐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보좌관님.”

“……메이어 경, 안녕하세요.”

라울은 좀 놀랍기도 하고 어이없어하는 것 같기도 하는 표정으로 인사했다.

“어제 늦게까지 프레데릭 님께 시달리셨다면서요? 오늘은 잘 쉬셨습니까?”

“시달……? 아, 정말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로젤린은 프레데릭이 말을 태워 준 광경을 떠올렸고, 라울은 프레데릭이 치근대면서 고백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평생 잊지 못할 거야.’

‘……메이어 경은 이상한 취향이 있군.’

동상이몽 속에 라울은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하인을 불러 차를 가져오게 하려는 그를 로젤린이 얼른 만류했다.

“아닙니다. 보좌관님의 시간을 많이 빼앗지는 않겠습니다. 많이 바쁘실 텐데 업무가 아닌 용건으로 찾아와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사적인 일이십니까?”

“사적인 부탁을 드릴 만큼 제가 보좌관님과 교분이 깊지도 않은데 면목이 없습니다.”

“……예에.”

라울은 그냥 끄덕거렸다. 본인 입으로 안 친한데 부탁할 게 있어서 미안하다, 라는 건 도대체 얼마나 심각한 용건인걸까.

‘설마 또 프레데릭 님이 사고를 치셔서?’

불과 몇 분 전에 만나고 온 프레데릭의 얼굴을 반사적으로 떠올리고 있는데, 로젤린이 멋쩍어하며 용건을 꺼냈다.

“보좌관님은 발트란이 고향이시니 시내도 잘 아시겠지요?”

“대충 그렇습니다만?”

“고향의 친지에게 선물을 보내려고 하거든요. 선물을 살 좋은 가게가 있으면 추천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동료들에게 물어봤는데 그 자식들은 술집밖에 모르더라고요.”

약간 긴장하였던 게 무색할 만큼 라울은 맥이 탁 풀렸다.

염려한 만큼 큰일은 절대 아니었다. 동시에 업무 시간에 찾아와서 물어볼 만큼 중요한 용건도 아니었다. 안 그래도 바쁜데.

로젤린도 그건 알았다. 그녀는 한 번 더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제가 필요하신 일은 없으십니까? 뭐든 도와드리겠습니다.”

“일부러 그러실 것까지는…….”

별거 아닌 일로 방해를 받아서 조금 짜증이 나긴했지만 들어주지 못할 부탁도 아니다. 거절하려던 라울의 머릿속에 문득 다른 일이 떠올랐다. 그는 말을 바꾸었다.

“자택 근처에 좋은 상점 몇 곳을 알고 있습니다. 가시는 길에 저희 집에 들러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겸사겸사 부탁을 받자 로젤린은 오히려 안도했다. 라울은 책상 서랍에서 빈 바구니를 꺼냈다.

“이사벨에게 바구니를 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늘은 퇴근하지 못하고 휴게실에서 잘 예정이라 바구니를 집에 바로 가져가지 못하게 되었거든요.”

이사벨이 싸 준 간식 바구니를 꼭 오늘 집으로 가지고 가야 할 필요는 없었다. 로젤린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한 부탁이었다.

얼른 바구니를 받아 챙기는 로젤린에게 라울은 주소를 알려 주었다. 거리의 이름과 상점의 위치 등을 듣는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영 애매모호한 표정이었다.

“어디인지 잘 모르시겠죠? 그냥 약도로 그려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로젤린은 면목없어했다. 라울도 순수한 선의로 로젤린의 부탁을 들어주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아주 만에 하나 어쩌면 주군의 아내가 될 가능성이 만분의 일 정도는 있는 사람이니까. 프레데릭이 차이지 않는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참, 메이어 경.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라울이 약도를 그리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신년 축일 무렵에 프레데릭 님을 모시고 레젠에 가시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확실히 결정이 된 건 아닙니다만 메이어 경께서는 프레데릭 님의 유일한 호위기사이시니까요.”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살짝 들떴다. 레젠까지 가면 수잔나와 엠마도 짬을 내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편지를 보낼 수 있게 된 것과 별개로 몇 달 후 만날 수 있게 된다는 것 또한 기쁜 일이었다.

상점과 라울의 자택 약도를 받아 들고 나온 로젤린은 물어물어 길을 찾았다. 기사단 본부 근처에는 기사나 기사단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게가 많다. 동료들과 술을 마시거나 외부에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항상 본부 근처에서 해결했다.

이렇게 멀리 나오는 건 지난번의 휴가 이후 두 번째다. 되는 대로 걷다가 길을 잃어 빈민가로 잘못 갔을 그때와는 달리 이번엔 제대로 번화가까지 걸었다.

레젠만큼 사람에 치인다는 느낌은 아니었으나 번화가로 나오니 확실히 인파는 배 이상 늘었다. 거친 북부의 말씨로 인해 주변은 한결 소란스럽다.

“어디 보자…… 여기가 카논 거리니까, 다음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약도를 유심히 보면서 걷다 마침내 라울이 추천해 주었던 가게 한 곳을 찾았다. 고급 물품을 파는 잡화점이었다. 당연히 평민 기준의 고급품이다.

“뭘 찾으시우?”

가게에는 두어 명의 손님이 있었다. 일반 잡화점에 비하면 진열되어 있는 물품이 적다.

“편지지를 사려고 왔습니다.”

“종이요, 양피지요?”

“종이로 주십시오.”

“잠시만 기다려 보시구랴.”

주인은 안쪽의 문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커다란 상자를 하나 들고 왔다. 진열되어 있는 건 극히 일부이고 대부분의 물품은 주인이 직접 가지고 오는 듯하다.

‘고가품이 많아서 그런가.’

로젤린은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편지지 뭉치들을 살펴보았다. 개중 가장자리에 아기자기한 당초무늬가 그려진 편지지를 골랐다가 가격을 듣고 기겁했다. 레젠보다 비쌀 거란 짐작은 했지만 비싸도 너무 비싸다.

제국 최북단의 발트란은 유통경로가 길다. 대공령 내에서 생산되는 물품이라면 가격이 비슷하지만 대공령 외부에서 생산되어 유통되는 물품은 무척 비쌌다. 오히려 수입품이 더 저렴할 지경이었다.

겨우 무늬가 그려진 편지지가 억 소리가 날 정도로 비싸다. 향을 입히거나 금가루나 금박 등으로 장식하는 고급 편지지는 얼마나 비쌀지 상상도 안 됐다.

‘편지보다 중요한 건 선물이니까……. 편지지는 글씨만 지워지지 않으면 돼. 종이 질은 좋으니까 괜찮아. 갖자.’

로젤린은 애써 정신승리를 했다. 그냥 밋밋한 편지지 한 뭉치를 사 들고 나왔을 뿐인데 기운이 쭉 빠졌다.

‘선물까지 터무니없이 비싸면 어떻게 한담.’

고민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수잔나와 엠마의 선물로는 마수의 털이나 가죽 등을 소재로 한 물건을 살 작정이었다. 레젠에서도 고급품은 살 수 있다. 그러나 마수를 소재로 한 물건은 발트란에서만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다.

그렇게 판단했지만 막상 비싼 물건과 마주치고 나니 걱정되었다.

“어서 오세요!”

마수를 소재로 한 물건을 판매하는 상점은 잡화점과 대조적이었다.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진열된 내부도 넓고, 곳곳에 점원들도 많았다. 한결 활기찬 분위기다.

입구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녀에게 금세 점원이 다가왔다.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없으셔도 편하게 둘러보세요! 보시는 건 얼마든지! 공짜니까요!! 마수만으로 제작할 수 있는 신기한 물품들이 아주 많답니다.”

‘아하.’

로젤린은 대조적인 상업 방침의 이유를 눈치챘다. 충동구매를 장려하는 모양이다.

‘장사 잘하네.’

과연 충동구매를 장려 하는 상점답게 물품들은 새롭고 신선했다. 흔하디흔한 일반적인 재료가 아니라, 마수를 재료로 한 물품이라는 선입견도 한몫했다.

로젤린이 주변을 구경하며 걷는 동안 점원도 따라붙었다. 몰래 훔치는 건 아닌지 감시하면서도 충동구매를 부추기는 역할인 듯하다.

“이건 마수의 피를 정제한 환약인데 남자 분들의 건강, 특히 정력에 아주 그만이랍니다. 결혼은 하셨지요? 이거 하나면 다음 날 마누라가 차려 주는 아침 밥상이 확 바뀌…….”

“전 여잔데요.”

“헉,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긴가민가했는데 키가 너무 크셔서 제가 그만 큰 실례를…….”

로젤린보다 키가 작은 점원은 어쩔 줄 모르고 사과했다. 특별히 가슴 보호대 따위는 하지 않았지만 날씨가 추워서 망토를 두르고 있으니 착각한 모양이다.

남자로 착각하든 말든 별로 신경은 안 쓰지만 점원이 조용해진 건 좋았다. 수다스럽게 충동구매를 부채질하던 점원은 합죽이가 되어서 얌전히 로젤린의 뒤만 따라왔다. 로젤린은 부담 없이 편하게 주변을 구경할 수 있었다.

수잔나와 엠마가 좋아할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며 걷던 로젤린은 무구 진열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무구로 분류되어 있긴 하였으나 예장용이나 호신용으로 장식된 나이프가 대부분이었다.

로젤린이 관심을 보이자 점원은 다시 촉새가 되었다.

“아! 역시 늠름하신 모습으로 볼 때 전사님이시라고 제가 딱! 직감을 했지 뭡니까. 여기의 이 나이프들은 청상아리의송곳니라는 마수의 뼈를 갈아서 만든 칼입니다. 철검에 비하면 아주 가벼워서 휴대하기에 좋습지요.”

“너무 가벼운 검은 오히려 더 쓰기가 까다롭지만 뭐……. 나이프니 상관은 없나.”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개중 그나마 장식이 덜한 칼을 뽑아보았다. 나이프라기엔 길고, 숏 소드라기에는 짧다. 칼날은 물론이거니와 칼자루까지 뼈로 만든 칼은 거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웠다. 칼집도 청상아리의송곳니 가죽이다.

칼을 빼내어 허공에 이리저리 그어 보는 로젤린의 옆에서 점원은 “검술이 훌륭하시다, 칼이 마치 전사님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따위의 추임새를 넣었다. 그냥 대충 주절거리는 말이었다. 가끔 무인처럼 보이는 손님을 부추기는 립서비스 중 하나다.

‘말투를 보니까 남쪽에서 온 것 같은데, 상행을 호위하는 용병 중 하나겠지.’

뜨내기라는 건 즉 바가지를 씌우기 좋다는 것이다. 바가지를 씌우면 그중의 절반은 그의 주머니로 떨어진다. 점원은 손바닥을 비비면서 어떻게 이 뜨내기 용병을 털어먹을지 궁리했다.

점원이 뭐라고 알랑방귀를 뀌든 듣지 않고 칼을 몇 번 만져 보던 로젤린이 갑자기 팔을 일직선으로 휙 뻗었다. 어깨와 칼끝이 완벽한 직선을 이룬다. 일순간 분위기가 변했다.

정체된 공기를 예리한 칼날이 지극히 절도 있게 잘랐다. 바람이 쪼개지는 것 같기도 하고, 허공이 찢어지는 것 같기도 한 싸늘한 파공음이 뒤를 따랐다.

‘헉. 뭐, 뭐지?’

검술을 전혀 모르는 점원마저 한순간에 변해 버린 로젤린의 기에 놀라 굳었다. 로젤린이 그를 겁박하거나 위협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칼을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도 예리하게 정제된 무인의 기가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로젤린은 이내 칼을 내리면서 싱긋 웃었다. 칼끝에는 천장에 거미줄을 달고 내려오던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거미의 몸통이 꿰어 있었다.

“정말 좋은 칼이군요.”

“하, 하하하! 조, 좋은 칼이지요!”

“하나 사겠습니다.”

“예, 옙!”

“참, 가게에서 칼날을 닦을 수는 없을까요?”

칼날을 정면으로 찌른다는 지극히 단순하고 기본적인 행동 하나에 압도된 점원은 그녀를 등쳐먹을 작정이 싹 사라졌다. 마치 바가지를 씌우려던 속셈이 간파되기라도 한 것 같아 몹시 찔렸다. 급속도로 친절해진 그는 얼른 칼을 받았다.

“계, 계산은 가게에서 나가실 때 한꺼번에 하시면 됩니다요. 제가 그전에 깨끗하게 닦아 놓겠습니다. 네, 네네.”

점원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합죽이가 되었다.

로젤린은 칼의 가격과 주머니에 남은 돈을 계산했다. 가볍고 예리한 나이프가 무척 마음에 들어 예상하지 못한 지출이 생겼다. 하지만 선물을 살 돈이 모자라면 그냥 포기해야겠다.

완전히 조용해진 점원을 데리고 다니던 그녀는 이윽고 적당한 선물을 찾았다. 빠른 곰의 모피로 만든 모자와 장갑이었다. 한 번 써 보니 무척 가벼웠다. 일반적인 모피로 만든 모자처럼 묵직하고 갑갑하다는 느낌이 덜했다.

마침 아이용과 어른용 둘 다 있다. 수잔나와 엠마의 몫으로 한 쌍씩 구매하고도 여윳돈이 남았다. 로젤린은 수잔나의 망토까지 한 벌 더 샀다.

“금방 계산하고 포장해 드리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해진 점원이 카운터에서 계산을 시작했다. 널찍한 카운터에는 그녀 외에도 물품을 계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로젤린은 몰랐지만 마수로 만든 용품을 취급하는 이 가게는 발트란에서 유명했다.

돈은 동화 몇 닢을 남기고 알맞게 딱 떨어졌다.

“짐은 들고 가시겠습니까? 묵고 계시는 여관을 말씀해 주시면 오늘 저녁까지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칼은 허리에 찼지만 남은 짐은 두툼한 겨울용의 옷가지다. 천으로 포장한 짐은 부피가 제법 컸다. 가게에서 나가면 라울의 집에 들렀다가 돌아가야 하는데 계속 들고 다니기엔 번거롭다.

“공짜인가요? 돈이 얼마 안 남아서요.”

당연히 공짜는 아니다. 로젤린도 그냥 물어본 거였다.

그렇지만 상당히 위축되어 있는 점원의 귀에는 ‘공짜로 해’라는 협박처럼 들렸다.

“무, 물론 공짜입니다! 하, 하하…….”

“좋은 가게군요. 배달하는 김에 이 편지지도 같이 싸 주실 수 있습니까?”

“다, 당연히 해 드려야죠…….”

로젤린은 순수하게 감탄했고 점원은 쓰디쓴 눈물을 삼켰다. 아이기스 기사단 본부의 기숙사로 배달을 부탁하여 다시 한 번 점원의 눈을 튀어나오게 만든 로젤린은 등을 돌렸다.

‘보좌관님의 집은 이 가게를 나가서 바로 왼쪽으로 꺾고 사거리가 나올 때까지 직진하다, 오른쪽으로 두 번을 더 돌…….’

머릿속으로 약도를 되새기는 그녀의 맞은편에서 다른 손님 한 명도 막 계산을 끝내고 있었다. 로젤린도 장신이지만, 그 손님도 눈에 띄는 장신이다. 비슷하게 등을 돌린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딱 마주쳤다.

로젤린은 순간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의심의 시선이 기다란 남자의 아래위를 훑었다. 남자도 기절초풍한 표정이었다.

자신이 제대로 본 게 맞는지 남자를 한 번 더 확인한 로젤린은, 의심을 숨기지도 않고 떨떠름하게 내뱉었다.

“……스토커?”

“아니야!!”

프레데릭이 억울한 목소리로 외쳤다.

프레데릭과 라울의 행동반경이 교차하는 건 당연하다.

프레데릭은 13살까지 평민으로 살면서 라울과 어울려 지냈다. 지금도 라울의 집을 왕래하면서 근처의 상점을 둘러보는 일이 잦다. 라울과 이사벨과 에밀리아가 증인이다.

라울이 잘 아는 가게를 프레데릭도 잘 아는 건 당연하다. 그런 고로 라울에게 가게를 소개 받은 로젤린의 행동반경과도 교차한다.

…… 라는 변명을 프레데릭은 입이 마르도록 설명했다.

“예에.”

듣고 있는 로젤린은 어쩐지 시큰둥한 표정이었지만.

“그러니까 내가 몰래 널 따라다닌 건 아니라고.”

“예에.”

“몰래 따라다녔다면 그렇게 멍청한 방식으로 들켰겠냐?”

“예에.”

“들켰더라도 모르는 척 도망치지 않았을까?”

“예에.”

로젤린은 프레데릭의 변명보다 손에 들고 있는 맥주에 더 관심을 더 주었다.

두 사람은 상점을 나와 다음 골목의 식당을 찾아 들어온 참이었다. 가게 앞에 서서 실랑이하기엔 추웠기 때문이다.

점심, 저녁의 끼니때는 식사를 팔고 그 외의 시간에는 차와 술을 파는 식당이다. 슬슬 저녁 시간은 가까워졌지만 식사하기에는 일렀다. 로젤린과 프레데릭은 물론 차가 아닌 술을 시켰다.

낮술을 애매하게 마셨던 로젤린은 또 술을 마시면서 입맛을 다셨다.

‘지난번에 전하와 마셨던 그 맥주가 참 맛있었는데……. 그걸 마시고 나니 다른 맥주는 입이 좀 심심하네.’

그녀가 “예에. 예에.”하면서 딴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프레데릭은 착실히 변명을 이어 갔다.

이야기는 이제 프레데릭이 집무실을 나온 시각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라울이 오늘도 일거리를 넘겨주고 갔지만 대부분이 사후 보고였다. 내가 결정해야 할 문건은 거의 없었다는 뜻이지. 그래서 일찍 일을 끝내서 나올 수 있었던 거고…….”

가만히 놔뒀다가는 오늘 아침 메뉴가 무엇인지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 같다. 이러다가는 프레데릭의 맥주에서 김이 다 빠지게 생겼다.

로젤린은 프레데릭의 변명을 들으며 다 마신 맥주조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해했습니다, 전하.”

“스토커가 아니라는 걸 알겠냐?”

프레데릭이 반색했다.

“말씀을 다 하셨으니 저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보좌관님 댁에 들러야 하기도 하고요.”

반색하였던 얼굴은 다시 다급해졌다.

“잠깐만.”

프레데릭이 막 일어나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저녁이라도 먹고 가지? 라울 집은 내가 알고 있으니까 데려다 주마. 그 녀석 집이 골목 안쪽에 있어서 초행자는 헷갈려.”

“맥주 한 잔 마실 돈밖에 없습니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로젤린은 돈 주머니를 거꾸로 들었다. 동화 몇 닢이 테이블 위를 데구르륵 굴러 갔다. 프레데릭이 가장자리로 떨어지려는 동화를 얼른 받았다.

“저녁이야 내가 당연히 사 주지. 부하랑 같이 식사를 하는데 지갑을 열게 할 사람으로 보이나?”

프레데릭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부하’가 아니라 ‘여자’였지만 참았다. 로젤린이 고민하는 눈치이자 그는 뒷말을 덧붙였다.

“식사를 같이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 상사와 부하의 원활한 교류를 위한 자리라고 생각해 주면 되겠군. 아, 물론 내 지위로 널 억지로 붙잡아 앉히겠다는 뜻은 아니니까 내키지 않으면 돌아가도 돼.”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는 이유를 거듭 강조하자 마침내 로젤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니까 술이나 한잔 더 시켜도 됩니까?”

“오, 물론이지. 내 것도 한잔 더.”

프레데릭은 식어가는 맥주를 얼른 꿀꺽꿀꺽 비웠다. 곧 새 술이 나왔다. 두 사람은 안주도 없이 술을 꼴깍꼴깍 잘도 마셨다.

“라울의 부탁으로 가던 중에 상점에 들렀었나?”

“반댑니다. 선물을 살만 한 상점의 추천을 보좌관님께 부탁을 드려서 겸사겸사 심부름도 하게 되었습니다. 물건도 괜찮고 점원도 친절하고 배송도 무료인 좋은 상점이더군요.”

‘……거기가 배송이 공짜였던가?’

한 가닥 의심이 들었지만 중요한 건 아니니 넘겼다.

“선물? 누구 생일인가?”

선물을 받을 사람이 남자라면 몹시 큰일이다. 철벽을 넘어가기도 전에 장애물이 있는 형국이 아닌가.

긴장한 프레데릭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젤린은 선선히 대꾸했다.

“레젠에 있는 가족입니다. 마침 배달을 해 주시겠다는 고마운 분이 계셔서 올케랑 조카에게 선물을 보내려고요.”

“그렇군. 레젠에 가족이 있었구나.”

고향이 레젠이니 고향에 가족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프레데릭은 안도하는 한편 그녀의 가족관계나 과거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 질문은 해도 되는 영역일까, 아닐까?

프레데릭은 로젤린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로젤린이 탐색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보고 미소 비슷한 것을 입가에 띄우는가 싶더니, 먼저 이야기를 했다.

“작은오빠의 아내와 딸입니다. 큰오빠는 자식 없이 이혼해서 제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에요. 새언니가 오빠 때문에 참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저라도 틈이 나는 대로 도와주고 싶은데 먼 곳으로 오게 되어서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합니다.”

“조카? 몇 살인데?”

“에밀리아와 비슷한 또래입니다.”

“귀엽겠군.”

“아주 사랑스럽죠.”

조카 이야기가 나오자 로젤린의 표정은 느슨해졌다. 가족을 이야기하면서 즐겁게 반짝거리는 로젤린의 눈동자가 무척 생소했다. 프레데릭은 홀린 듯이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새까맣고 깊은 눈동자에 감도는 생기가 아름답다.

“……예쁘네.”

“네?”

“아! 조카가 예쁘겠다고.”

허둥지둥 말을 돌리면서 신관장의 충고를 되새겼다. 입조심, 입조심

“널 많이 닮았을까?”

“고모인 저는 별로 안 닮았지요. 작은오빠를 많이 닮았습니다. 온 동네 사고 치면서 남자애들을 울리고 다니는 말썽꾸러기거든요.”

프레데릭은 남자애들을 울리고 다니는 어린 로젤린을 공상했다. 귀엽겠군…….

그리고 그의 상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로젤린이 한마디 덧붙였다.

“전 남자애들을 울린 게 아니라 기절시켰습니다. 계집애한테 맞았다고 쨍쨍거리고 우는 게 너무 시끄러웠어요.”

“……오.”

공상을 말하지 않길 잘했다. 프레데릭은 남자애들을 기절시키는 어린 로젤린으로 공상을 수정했다. 귀엽겠어…….

“그 애도 사고를 많이 치긴 하지만 어렸을 때의 저보다는 덜 싸우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엠마, 아 제 조카 이름입니다. 제가 엠마의 고모라는 사실이 동네에는 알려져 있어서 쉽게 건드리는 애들은 없거든요. 애들이 보기엔 괴물과 싸우는 검투사라는 사실이 무서운 모양입니다.”

검투사라는 그녀의 출신이 프레데릭에게는 그녀에 대한 호오를 결정할 만큼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가끔씩 그녀가 검투사였다는 걸 까먹기까지 했다.

“참, 그랬지.”

프레데릭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안주로 나온 절인 은어를 씹었다.

“검투사 일은 오래 했었나?”

“15살부터 시작했습니다. 딱 10년하고 그만두었습니다.”

“15살……?”

일러도 스무 살 전후에 시작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프레데릭은 크게 놀라서 은어를 씹는 것도 잊었다.

대다수의 평민은 집안 대대로 같은 직업을 이어 간다. 부모의 직업을 자식이 물려받는 경우라면 철이 들기도 전에 일을 배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대대로 내려오는 직업일 리가 없는 검투사를 로젤린은 너무나 이른 나이에 시작했다.

게다가 로젤린은 여자다. 여자 검투사가 그리 좋지 못한 위치라는 건 프레데릭도 알았다. 어느 부모가 창부와 비슷한 대우를 받는 여자 검투사가 되라고 등을 떠밀겠는가.

‘집안 사정인가…….’

집안에 문제가 있지 않았다면 1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어른도 위험한 검투사가 될 리가 없다. 15살의 소녀가 취직할 수 있는 일자리는 검투사 외에도 많았다.

궁금했다. 이것을 알게 되면 그를 거절하는 단호한 벽을 두르고 있는 로젤린의 안을 조금은 엿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묻지 못했다.

자신의 목적만으로 그녀의 내면과 과거를 쉽게 건드려도 될지, 확신이 없었다. 프레데릭은 입안에 남은 은어를 맥주로 삼키면서 한숨도 함께 삼켰다.

한 번의 거절로 그녀를 쉽게 포기할 마음은 없음에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모르는 게 많다. 로젤린의 새로운 면모를 하나 알게 되면 낯선 영역이 둘 펼쳐지는 느낌이다.

‘묻고, 묻고, 묻고, 그래서 알게 된다면 좋을 텐데.’

로젤린 메이어라는 사람을.

시간은 제법 흘러 있었다. 술집에 들어올 때 아슬아슬하게 서쪽 산마루에 걸려 있던 해는 완전히 떨어졌다. 테이블에도 사람들이 하나둘 씩 채워지고 있었다. 요리를 주문하고, 술을 마시며, 거친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흘러넘친다.

프레데릭은 고상하고 엄격한 귀족의 만찬보다, 소탈하고 시끄러운 평민의 식탁이 좋았다.

‘로젤린은 어떨까.’

궁금한 게 또 생겼다. 대연회에서 예의 바르게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이던 그녀의 모습이 꼴깍꼴깍 맥주를 마시는 지금의 모습 위로 겹쳐졌다.

“엄청난 빚더미만 남기고 집안이 몰락했습니다.”

대화와 대화의 간격이 꽤 길었기 때문에, 프레데릭은 로젤린의 말이 대화의 연장선이라는 걸 조금 늦게 깨달았다.

로젤린은 거의 다 마신 맥주잔을 내려다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남은 건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새언니에게까지 넘길 수는 없었어요. 15살짜리가 짊어지기엔 너무나 무거웠고, 특별한 기술도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자신 있는 게 칼 쓰는 일이었으니 쉽게 돈을 벌기 위해 검투사가 된 거고요.”

말의 끝을, 그녀는 엷은 미소로 마무리했다.

“특별한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담담히 구술된 사실뿐인 설명이었다.

빚을 갚기 위해 유일한 특기인 검술을 살려 검투사가 되었다는, 단지 그뿐인 이야기.

그렇지만 프레데릭은 요약하자면 한 줄밖에 되지 않는 그녀의 말에 감춰진 이면을 보았다. 15살의 아이가 세상에 홀로 내던져져 얼마나 힘들었을지, 어른도 감당하기에 무거울 짐을 홀로 짊어지며 얼마나 괴로워하였을지, 스스로 목숨을 저당 잡히는 검투사의 세계에 투신하게 되기까지의 힘겨운 결심을.

프레데릭은 목깃 사이의 흉터와 맥주조끼를 쥔 손에 남은 자잘한 상흔을 보았다. 무인으로 단련된 빈틈없이 단단한 육체와 철저히 실용적인 그녀의 검술을 기억했다. 15살의 어린 소녀가 세상과 부딪치며 승리했다는 자랑스러운 증명이었다.

“빚은 다 갚았나?”

“더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10년 만에 갚을 수 있었습니다. 저 혼자 다 갚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굉장하군. 프레데릭은 감히 그녀를 평가하지 않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리고 탄식했다.

15살의 그는 이것도 저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무작정 도피하기만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가 세차게 부딪힌 현실의 장벽 앞에서 슬퍼하고, 분노하고, 괴로워하면서도 두 아버지 가운데 누구도 온전히 저버리거나 온전히 선택하지 못하였을 때, 로젤린은 이미 홀로 서 있었다.

끊임없이 싸우고 투쟁하고 피 흘리며 괴로워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승리하여, 이제 그의 앞에 있다. 운명에서 도피하였던 그의 앞에 운명과 맞서 승리한 그녀가 있었다.

“……어떡하지.”

프레데릭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더 반한 것 같아.”

“어째서요?”

막 새 맥주를 마시던 로젤린이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다.

“너는 내 승리의 여신이거든.”

중간 과정을 무척 건너뛴 프레데릭의 고백 아닌 고백에 로젤린은 조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건 곤란한데요. 여신과 비슷한 말은 많이 들었는데 들을 때마다 민망해서 죽을 것 같습니다.”

프레데릭은 그냥 실없이 웃었다. 모르는 게 많아도 역시 포기하지는 못하겠다.

“참, 아까 상점에서 좋은 걸 발견했지.”

호감도를 차근차근 쌓아가는 방법은 선물이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호감도를 아예 0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 아니다. 얼굴은 취향이라니 호감도가 10정도는 쌓여 있지 않을까.

멋대로 판단하며 로젤린과 마주쳤던 상점에서 샀던 선물을 꺼냈다. 부담 없는 선물을 주고받으며 호감도를 키우겠다는 목적이 나쁜 건 아니다. 하나 그는 자신의 괴멸적인 센스를 간과했다.

“…….”

“어때? 멋지지 않냐?”

“…….”

“이걸 보자마자 네가 딱 떠오르더라고.”

“…….”

로젤린은 묵묵히 프레데릭의 ‘선물’을 내려다보았다. 보자마자 자신이 떠올랐다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면 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선물이라는 건, 마수의 이빨을 줄줄이 꿰어 실로 엮은 목걸이였다. 이빨을 꽃으로 바꾼다면 멋진 화환이 되겠으나, 줄줄이 엮인 건 이빨이다. 이빨. 마수의 이빨. 길고 날카롭고 허옇게 번들거리는 이빨.

‘아무리 봐도 목에 걸고 다니는 목적은 아닌데…….’

목걸이를 만든 장인이 프레데릭과 버금가는 센스의 소유자라도 날카롭게 번들거리는 이빨들을 목에 걸고 다니라고 만들지는 않았을 것 같다. 잘해 봐야 벽에 걸 장식용이 아닐까.

내가 사냥한 마수의 이빨이라고 허풍을 치기 위한 허세. 혹은 협박하기 전에 분위기를 깐다거나, 위압감을 조성한다거나, 그런 목적의.

의도를 알 수 없는 목걸이를 진지하게 고찰하는 로젤린의 안색을 프레데릭이 조심스럽게 살폈다.

“……별론가?”

남자가 여자에게 호감을 사기 위한 선물이라면 상당히 별로다. 아마 여자들에게 줄기차게 차인 이유 중에 프레데릭의 남다른 센스도 있지 않았을까. 로젤린은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예, 뭐…… 무기로 활용도가 높지 않을까 생각 중이었습니다. 이빨들을 옆으로 길게 연결하는 게 아니라, 한 뭉치로 묶어서 슬링(돌을 던지는 무기)처럼 쓰면 효용성이 좋을 것 같군요. 이건 쥐고 단검처럼 써도 좋겠고요.”

개중 유달리 긴 이빨을 톡톡 건드렸다. 아마도 송곳니였던 듯하다.

“듣고 보니 그렇군.”

공통 화제를 찾은 프레데릭이 신나게 말했다.

“아니면 실 말고 철사를 써서 십자 모양으로 연결해서 마름쇠로 써도 되겠어. 아니면 지뢰도 나쁘지 않겠군.”

“화약을 넣어 쓴다는 그 지뢰요?”

직접 본 건 아니지만 로젤린도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군대에서 제작법을 엄중히 관리하는 화약을 이용한 무기는 전쟁터에서나 목격할 수 있다.

살상력이 높은 무기임에도 아이기스 나이트가 쓰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마수의 출몰은 불규칙하므로 지뢰의 효용성이 떨어졌다. 오래 방치된 지뢰는 공기 중의 수분이나 기후의 변화로 인해 무용지물이 된다. 뿐만 아니라 제작비도 무척 비쌌다.

“지뢰 안에 쇳조각 대신 이 이빨들을 넣어도 살상력이 훌륭하지 않을까 싶다. 화약만이 아니라 마수의 이빨까지 무기로 쓴다면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나가서 오히려 손해겠지만.”

“아하, 그런 방법도 괜찮겠군요.”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여겼는데 군대 방면은 무지했다. 겪어 보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기사이긴 해도 앞으로 군대를 경험할 일은 없지 않을까.’

군부대를 지휘하는 장교는 기사로 구성되지만 아이기스 나이트는 장교 교육을 받지 않는다. 아이기스 나이트에 필요한 건 병사를 지휘하는 기사가 아니라 개별적인 무용으로 마수를 사냥하는 기사였다.

“재미있는 - 차마 좋다는 거짓말은 못했다 - 선물입니다만 제가 전하께 선물을 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경 써 주신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로젤린은 정확히 선을 그었다. 그녀의 마음과는 별개로 받아서는 안 되는 선물이다. 그녀는 자신을 충분히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고 환멸까지 느끼고 있으나, 그의 마음까지 이용하고 농락해서는 안 되었다.

까마득히 높은 상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강제로 선물을 안기면 명령에 불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프레데릭은 난감한 표정만을 지었다.

“주고 싶은데…….”

“마음만이라도 충분합니다.”

“세상은 마음보다 물질이 중요하다고.”

“물질적으로는 이미 월급을 주고 계시니까요.”

“참, 네 월급이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이었지.”

한 번도 대공령 소속 관리와 기사들의 월급을 신경 쓴 적이 없던 프레데릭은 혀를 찼다.

고민되었다. 그는 꼭 로젤린에게 이 선물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로젤린은 선물을 사양한다. 명령이라며 억지로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주는 사람도 기쁘고 받는 사람도 기쁜 게 선물인데.

“주문하신 맥주 나왔습니다!”

점원이 뒤 테이블에서 외쳤다. 귀가 솔깃했다. 여긴 술집이다. 술집에서 뭘 하겠는가.

“로젤린, 나랑 내기 하나 할까?”

“무슨 내기요?”

“술집에서 내기할 게 뭐가 있겠냐. 이 목걸이를 걸고 내기하는 건 어때?”

프레데릭이 목걸이를 가리켰다.

“내가 이기면 네가 선물을 받고, 네가 이기면 선물은 없던 걸로.”

잠시 고민하던 로젤린은 내기에 응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의 직속 상사이자 주군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마냥 안 된다고 하기가 어려웠다. 강권하는 것도 아니고 공정한 내기이다.

“알겠습니다. 근데 본격적으로 마시기 전에 저녁부터 먹으면 안 될까요?”

“오, 좋아. 좋지. 저녁 식사부터 주문하자고. 빈속에 마시면 속 쓰려.”

프레데릭은 금방 표정을 풀며 웃었다. 로젤린도 그냥 피식 웃었다.

그는 모를 테지만 그녀는 살아오면서 술 내기에서 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리고 그건 프레데릭도 마찬가지였다.

‘이기는 건 나야.’

‘당연히 내가 이기지.’

동상이몽 속에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저녁 메뉴라는 행복한 고민을 시작했다.

양초와 기름을 마음껏 쓸 수 있는 부유한 계층을 제외한 평민의 하루는 길지 않다. 대개 해가 뜨면서 시작되어 해가 지면서 끝난다.

겨울이 일찍 오고 늦게 물러가는 발트란의 하루는 더 짧았다. 평민들은 적적한 저녁 시간을 술집이나 음식점에서 보내었다.

오늘도 발트란의 수많은 술집은 붐볐다. 개중 유별나게 소란스러운 곳이 하나 있었다.

“어이! 벌써 나가떨어지지는 않겠지?”

“난 멋진 누님에게 걸겠어.”

“내 돈을 생각해서 이겨보라고, 형씨!!”

“엄마 배 속에서부터 둘 다 술만 마시고 나온 거 아뇨?”

킬킬거리는 웃음소리와 요란한 응원소리로 술집 안은 시끌벅적했다. 그 소란의 중심에 있는 사람은 술 내기를 하는 두 명의 훤칠한 남녀였다.

가볍게 시작하였던 술 내기는 어느덧 술집 손님들의 내기 돈까지 확대되었다. 두 사람이 몇 시간 동안 끊임없이 술잔을 비우는 모습에 호기심을 느낀 손님들이 몰려들면서 서로서로 누가 이길지 내기를 걸게 된 것이다. 주인장까지 카운터를 점원에게 맡겨 놓고 구경 중이었다.

로젤린과 프레데릭이 동시에 술잔을 벌컥벌컥 마시자 환호성이 터졌다. 삐익, 삐익- 하는 경박한 휘파람 소리가 곳곳에서 솟았다.

테이블은 마시다가 흘리거나 쏟은 술로 엉망이었다. 두 사람의 목깃도 술로 흠뻑 젖어 있었다.

“푸핫!”

먼저 술잔을 비우고 테이블에 탕 내려놓은 프레데릭은 소맷자락으로 턱을 닦았다. 그도 엄청나게 취했다.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턱으로 흘러내리는지 분간도 안 갔다. 둘 다인 것 같기는 했지만.

거의 동시에 로젤린도 잔을 내려놓았다.

“오오오!”

둘러싸고 있던 누군가가 박수를 쳤다.

“이번이 몇 잔째야?”

“몰라! 헤아리지도 못했어!”

“오늘 여기 술통을 다 비우는 거 아닌지 모르겠구만.”

“그건 걱정 마시우. 얼마든지 옆집에서 빌려오면 되니까.”

의자를 거꾸로 놓고 등받이에 턱을 괸 채 구경 중이던 주인이 호탕하게 외쳤다. 손님들이 신나게 웃으며 프레데릭의 등짝을 퍽 쳤다.

“형씨! 까짓것 술집을 거덜 내 보자고!”

딴에는 응원으로 쳤겠지만 술이 머리꼭지까지 오른 프레데릭은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

“……그전에 내가 죽을 것 같은데…….”

웅얼웅얼 중얼거리는 목소리마저 혀가 꼬여 있다.

프레데릭은 신음하며 눈두덩을 눌렀다. 이렇게 취해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아니, 취한 적은 있겠지만 멈출 수가 없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생각도 제대로 안 돌아갔다.

힐끔 눈을 올렸다. 끔뻑거리는 시야에 보이는 로젤린의 얼굴도 벌겠다. 자신의 얼굴도 만만치 않게 붉을 것이다. 도대체 이게 뭘 위한 승부였더라. 호흡마저 숨이 아니라 술 냄새를 뱉는 기분이다.

머리를 한두 차례 휘저은 로젤린이 등받이에 길게 기대었다. 고개까지 뒤로 꺾여 있는 게 영락없는 시체 같다. 승부도 승부지만 그녀가 걱정되었다.

“저어기, 로젤린. 우리 그으, 만 마시지 않겠냐? 무승부로 하고오…….”

혀가 비비 꼬여갔지만 최대한 또박또박 발음하려 애썼다. 말을 하는 사이에 점원이 새 술잔을 가지고 와서 두 사람 앞에 놓았다. 술잔이 놓이며 몇 방울의 술이 두 사람의 옷에 튀었다.

“에이, 여기까지 와서 시시하게 무승부는 안 되지!”

“무승부로 해! 사람이 중요하지, 승부가 중요한가?”

“그건 자네가 무승부에 돈을 걸어서 그렇잖아.”

장본인인 로젤린보다 주변에서 더 난리가 났다. 시끄럽다고 외치고 싶었는데 외칠 기운마저 없었다.

‘죽겠다아아아…….’

프레데릭은 비스듬히 세운 팔목에 머리를 기대었다. 코앞에서 찰랑거리는 술잔이 독처럼 보인다.

“로젤리이인…… 아니면 내가 진 걸로 하자…….”

웅얼웅얼 중얼거리며 손끝으로 로젤린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그 와중에도 이건 성희롱이 아닐 거야, 라는 생각을 했다.

“닥쳐.”

늘어져 있던 로젤린이 갑자기 싸늘하게 일갈했다. 순간 프레데릭은 자신이 뭘 들었는지 귀를 의심했다.

“……응?”

“닥치라고.”

로젤린이 의자에 바로 앉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얌전하게 마시던 그녀가 살벌하게 나오자 관중들은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물론 제일 놀라고 있는 건 프레데릭의 심장이었다.

“내가 너보다 몇 살 어리다고 만만해 보이지? 맨날 져 주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녀 역시 혀가 꼬여가고 있지만 이 와중에도 표준어는 또박또박 선명한 발음이었다.

‘누,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거야?’

한 번도 그녀에게 지는 척한 적이 없는 프레데릭은 당황했다. 흐리멍덩한 시야를 가까스로 모아 자세히 보니 로젤린의 눈동자가 풀려 있다. 프레데릭 쪽으로 말은 하고 있는데 초점이 안 잡혔다.

이건 분명히 의식이 나가서 다른 사람과 착각 중인 거다.

“형씨가 잘못했네! 그러게 왜 일부러 져 주는 거요?”

“맞소. 여자는 자존심이 없는 줄 아오?”

프레데릭이 혼란해하거나 말거나 새로운 국면에 관중들은 신이 났다.

“마셔! 마셔서 승부를 내자고!”

이 시끄러운 참새들을 죄다 쓸어버리고 싶다는 충동 속에 로젤린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다른 사람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나는…….”

“닥치라고 했다.”

“넵.”

반사적으로 존댓말이 튀어 나갔다. 기세에 눌린 프레데릭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뻣뻣하게 굳히며 바로 앉았다.

“마셔.”

“더 마시면 위험…….”

“마시라고!”

“넵.”

마셔야 한다. 이건 술잔이 아니라 독이라도 마셔야 한다.

알 수 없는 위압감 속에 프레데릭은 쓰디쓴 술을 겨우겨우 마셨다. 이번에는 로젤린이 빨랐다. 테이블에 내려놓으려다 미끄러진 그녀의 술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러 갔다.

로젤린은 술잔 대신 테이블을 탕 쳤다. 지은 죄가 없음에도 프레데릭은 찔끔했다.

“오빠는 언제나 그렇잖아. 실실 쪼개면서 맨날 봐주기만 하고! 난 정정당당하게 오빠를 이기고 싶단 말이야. 내가 언제까지나 어린애인 줄 알아? 그러니까 닥치고 마시라고, 크리스토퍼.”

“오오오! 남매간의 대결이었나?”

“애인인 줄 알았더니!”

로젤린이 무슨 말을 하든 관중들은 신났다. 신나하면서 술을 주문하고 또 마셨기에 점원은 무척 바빴고 주인은 술 내기가 길어지길 바랐다.

마지막 착각은 고맙지만 프레데릭도 오해는 풀어야 했다.

“로젤린 님, 제 이름은 크리스토퍼가 아니라 프레데릭인데요. 발트란에서 제일 잘생긴 프레데릭.”

꼬여가는 발음으로 열심히 해명했다. 그러나 로젤린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술 가져와!”

“두 잔 더 나갑니다!”

점원이 냉큼 새 술을 가져왔다. 죽을 것 같다. 하지만 안 마시면 로젤린이 죽일 것 같다. 프레데릭은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쥐었다.

“새언니가 불쌍해 죽겠어. 어쩌다 오빠 같은 놈이랑 결혼을 해서…….”

술잔을 비운 로젤린은 이번에는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우울해졌다. 프레데릭도 울고 싶었다.

“뭐든지 제가 죄송합니다. 근데 저는 진짜 크리스토퍼라는 분이 아니고요. 취향이라고 했던 이 얼굴 안 보이시나요?”

“오빠 때문에 언니가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알아? 언니가 활짝 웃을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오빠가 아냐고. 도망은 치더라도 자기 처자식은 버리지 말았어야지! 어디 계속 도망쳐 봐! 잡히면 내가 오빠를 죽여 버릴 거야!”

미치겠다. 다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술 취한 사람의 심리 상태를 종잡기가 너무 힘들었다.

‘내가 취했을 때 라울도 이렇게 고생했을까.’

때에 맞지 않은 씁쓸한 자기반성 속에 프레데릭은 진땀을 흘리며 로젤린을 달랬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관객들은 아우성이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자기 마누라를 버려두고 도망을 쳐?”

언제부터 봤는지 모르겠지만 프레데릭을 매도하는 사내와,

“죽여야지! 그런 놈은 찢어 죽여야지!!”

비슷한 경험이 있는지 울분을 토하는 여인과,

“이런 나쁜 놈에게 돈을 걸 수는 없지! 난 누님으로 바꿀래!”

내기 대상을 바꾸는 약삭빠른 사람들로 난리였다. 모든 비난의 화살을 받고 있는 프레데릭은 씁쓸하게 변명했다.

“아니, 난…… 결혼도 안 했고…….”

“엠마가 울면서 난 왜 아빠가 없냐고 물으면 가슴이 찢어져! 오빠가 도망만 안 쳤어도!”

“애도 없고…….”

“술!”

아무도 듣지 않는 쓸쓸한 프레데릭의 목소리는 술잔 속으로 사라졌다. 로젤린은 이제 술 내기라는 것도 잊었는지 프레데릭 몫으로 나온 술까지 마셨다.

프레데릭은 그녀를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저러다가 훅 갈 거 같다.

불길한 예감은 맞았다. 로젤린이 3분의 1가량 남은 술잔을 놓치며 휘청거리다 테이블로 고꾸라진 것이다.

“크리스토퍼…… 개자식…….”

마지막까지 크리스토퍼인지 오빠인지 하는 사람을 향한 원망을 거두지 않으며.

“잠깐만, 그럼 누가 이긴 거야?”

“누님이 먼저 쓰러졌으니까 여기 형씨가 이긴 거지.”

“그렇지만 술을 한 잔 더 마신 사람은 누님이잖아.”

“형씨! 딱 술 두 잔만 더 마셔! 내 지갑을 위해서!!”

주변에서 뭐라고 떠들거나 말거나 프레데릭은 간신히 안도했다. 더 마셨다가는 자신까지 완전히 정신을 놓쳐 버릴 뻔했다. 이런 곳에서 둘 다 의식을 잃고 고꾸라졌다가는 어떻게 되겠는가.

‘두 번 다시 로젤린과 술 내기를 하면 안 되겠어.’

정신과 몸은 당장 너도 쓰러지라고 외치고 있었으나 프레데릭은 가까스로 다잡았다. 뺨을 몇 차례 찰싹찰싹 때렸지만 둔하게 아프기만 할 뿐 정신이 잘 돌아오지 않았다.

“찬물 좀…….”

중얼거리는 말을 용케 알아들은 점원이 차갑게 식은 물을 가져왔다. 꿀꺽꿀꺽 물을 마시던 프레데릭은 결국 찬물을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어깨가 절로 부르르 떨렸다. 젖은 채로 밖에 나가면 상당히 춥겠지만 어쨌든 당장 정신은 조금 돌아왔다.

“후우.”

프레데릭은 술 냄새가 태반인 한숨을 길게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가 꺾이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사이에 관객들은 프레데릭이 이겼다고 결론을 내렸는지 신나게 내기 돈을 분배하고 있었다.

‘나가자.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계산부터 해야 하나.’

조금 깨어나긴 했지만 머리는 여전히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프레데릭은 “계산…… 계산…….”하고 중얼거리며 제일 번쩍거리는 돈, 즉 금화를 한 닢 꺼냈다.

“잔돈은 됐어.”

도저히 잔돈을 받아 챙길 정신머리가 아니었다. 술집 매상 한 달치를 올려 주었음에도 주인장은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동전 하나 건네주고 잔돈은 됐다니 뭔 소리요? 술 취해서 맛이 갔소?”

“뭐야?”

프레데릭도 눈을 깜빡거리면서 두툼한 주인장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생각만큼 번쩍거리지는 않는 게 동화 같기도 하다.

“아닌가…….”

프레데릭은 고개를 휘휘 저으면서 덜 반짝거리는 동전 두 닢을 새로 꺼냈다.

“이번에는 은화 맞지?”

주인은 냉큼 동전을 받아 챙겼다.

적당히 계산을 끝내고 테이블에 고꾸라진 로젤린을 비틀비틀 업었다. 점원이 도와주려는 걸 거절하고 끙끙거리며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업는데 성공했다.

‘로젤린의 몸에 다른 남자가 손대게 할 수는 없어.’

취했으면서도 이상한 오기를 부리며 로젤린을 추슬러 업었다. 사실 어떻게 업고 있는지도 몰랐다. 허리는 푹 꺾이고 발은 제멋대로 춤을 췄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천장과 바닥이 뒤집혔고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시야가 비비 꼬였다.

“젠장.”

이대로 대공저까지 가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가는 중에 자빠져서 기절하거나 치안 경비대에 발견되지 않는다면 사이좋게 얼어 죽을 것이다.

“손님, 여관으로 가지 그러시오?”

주인마저 염려하며 물었다. 프레데릭은 멍하니 ‘여관…….’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으로 느릿느릿 떠올려 보다가 물었다.

“마차는?”

“이 시간에 마차가 있수?”

“그런가…….”

머리가 너무 멍했다. 마차가 운행하는지 안 하는지도 제대로 생각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쓰러져서 잠이 들고 싶다. 로젤린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지만으로 프레데릭은 술기운에 굴복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그럼 여관으로 좀…… 부탁하지.”

“좋소, 이건 서비스니까.”

주인장이 점원에게 손짓했다. 점원의 안내를 받아 술집 밖으로 나가는 프레데릭의 뒤로 주인과 손님들이 외쳤다.

“오늘 매상 고맙수!”

“형씨 덕분에 짭짤하게 벌었어!”

“다음에는 누님 말고 마누라랑 자식도 데리고 와!”

“마누라 앞에 나 죽었소, 하고 싹싹 비는 것도 잊지 말고!”

“그러니까 나는 마누라가 없다고…….”

프레데릭의 씁쓸한 중얼거림은 역시 아무도 듣지 않았다.

점원은 두 블록 옆의 여관까지 그를 안내하고 돌아갔다. 몇 분 안 되는 짧은 길을 가면서도 프레데릭은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점원이 부축해 주지 않았으면 분명히 자빠져서 코를 깼을 것이다.

“방 두 개.”

머리 꼭대기까지 취해서 여자를 업고 들어온 프레데릭을 떨떠름하게 보던 여관의 주인이 고개를 저었다.

“방은 하나밖에 없어요.”

프레데릭도 제정신이었다면 방이 없는 이유를 금방 알았을 것이다. 며칠 전에 있었던 마수 전리품의 경매로 발트란에는 많은 상인들이 방문했다. 상인 일행이 곳곳의 여관을 빌렸으니 방이 부족한 건 당연했다.

다만, 술 취해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프레데릭은 방이 없다는 사실에만 절망했다. 로젤린을 업고 있는 팔이 점점 무거워졌다.

‘……몰캉해. 미치겠다.’

그 와중에도 등을 누르는 로젤린의 특정 부위가 느껴졌다. 그런 자신이 너무나 한심해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왜 로젤린은 오늘따라 가슴 보호대를 입지 않았단 말인가.

“그럼 방 하나.”

“안 돼요.”

주인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술 취한 여자와 함께 온 남자를 같은 방에 둘 수는 없어요. 바로 지난달에도 몹쓸 짓을 당한 아가씨가 다음 날 아침에 방에서 자해를 해서 난리가 났어요.”

윤리 의식인지 영업 방해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인은 태도를 꺾을 것 같지 않았다. 여길 나가서 다른 여관까지 갈 기력도 없었다.

근처에 라울의 집이 있으나 거기까지 절대 못 간다. 프레데릭은 분명히 길 가다가 쓰러져서 잠들 거라고 확신했다. 가만히 업고 있는 지금도 5분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그는 마지막 기력을 끌어모았다.

“이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야.”

“남자라면 왜 처음부터 방을 두 개 달라고 했습니까?”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술 취한 머리로는 더 이상 생각도 안 난다.

“그럼 방 하나만. 얘만 재우고 난 복도에서 잘 테니까.”

“……알겠어요.”

주인은 영 미심쩍은 얼굴이긴 했으나 여자만 재운다는 말에 끄덕였다. 등 뒤의 걸린 열쇠걸이에서 열쇠를 하나 빼든 주인은 카운터를 나와 앞장섰다.

‘조금만, 조금만…….’

프레데릭은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거의 기듯이 계단을 올라 복도를 걸었다. 주인이 들고 있는 촛대의 둥그런 불빛이 어룽거렸다.

손님이 들지 않은 방은 어둡고 캄캄했다. 주인이 촛대를 내려놓고 화덕에 불을 지피는 사이에 프레데릭은 로젤린을 침대에 눕혔다. 로젤린은 고른 숨소리까지 내면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이불까지 덮어 주고 나니 기절하기 딱 좋은 정신 상태가 되었다.

빨리 자빠져서 자자고 유혹하는 본능을 억누르며 가까스로 문밖까지 나왔다.

“술 취한 양반을 밖에 내버려 두는 것도 미안한데 1층의 홀에서 주무시렵니까? 가끔 한밤중에 음식이나 술을 요구하는 손님이 있어서 밤새도록 불을 밝혀 두니 복도에서 자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프레데릭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술 취해서 의식이 엉망이지만 이건 확실했다. 로젤린을 방에 혼자 내버려 두고 다른 곳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주인도 억지로 권유하지는 않았다.

“그럼 이불과 탕파는 가져오지요. 언제라도 마음이 바뀌면 내려오십쇼.”

점원과 이불과 탕파를 안고 돌아왔을 때 프레데릭은 문 앞에 기대어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기절하다 못해 죽은 것처럼 보여서 주인이 코밑에 손을 대어 숨 쉬는지 확인해 보았을 정도다.

주인은 프레데릭의 다리 사이에 탕파를 놓고 어깨부터 이불을 둘러 주었다.

‘둘 다 무슨 사이인지, 참.’

“손님들이 이 정도로 취했다면 그냥 같은 방을 주어도 되지 않았을까요?”

점원이 뒤늦게 지적했다.

“그렇게 보이긴 한데…… 이미 늦었으니 어쩔 수 없지.”

방 앞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깊이 잠든 프레데릭을 돌아보았다. 슈벤하임의 대공과 그의 호위기사라는 사실은 절대 추측하지 못했다.

주인과 점원이 사라진 고요한 복도에 프레데릭의 죽은 듯한 숨소리와 술 냄새만이 진하게 남았다.

* * *

- 오늘 대련에서 크리스토퍼를 이겼다지? 녀석이 아주 으쓱해하던걸.

- 이긴 거 아니야.

로젤린은 큰오빠 마틴을 짐짓 노려보았다.

- 작은오빠가 져 준 거라고. 일부러 져 주면서 ‘우리 동생이 이렇게 컸네.’라는 훈훈한 눈으로 보면 내가 마냥 기뻐할 줄 알아?

대련에서 이기고도 썩 기분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탕 소리가 나도록 의자에 칼을 내려놓고 하녀가 막 가지고 온 밀크티를 전투적으로 마시는 막냇동생을 마틴이 정겹게 응시했다.

- 네가 그만큼 성장한 게 기쁜 거란다.

- 오빠에게 억지로 이겨 봤자 난 안 기뻐.

- 크리스토퍼가 흐뭇해하던 얼굴을 네가 봤어야 하는 건데.’

밀크티를 홀짝홀짝 마시며 괜히 로젤린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삐죽거리는 입술에 알듯 말듯한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 우리 막내의 재능이 아깝다던걸. 작은오빠처럼 기사가 되어 볼 생각은 없니? 꼭 골든 나이트가 아니어도 좋으니까 네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길로 갈 수 있길 바라더구나.

- ……큰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로젤린은 이제 15살이 되었다. 슬슬 미래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때다.

크리스토퍼는 검사로서 어엿한 실력을 갖추었다며 칭찬했지만 마틴에게 로젤린은 언제나 귀여운 막냇동생이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어 더욱 애틋하기만 한 사랑스러운 여동생.

- 네가 원하는 길이라면 오빠는 무엇이든 응원한단다.

잔잔한 응원의 말을 들은 로젤린의 뺨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 기사가 되고 싶지는 않아. 취미를 직업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걸 작은오빠에게 배웠거든.

마틴이 야무진 누이의 말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 그럼 우리 로젤린은 뭐가 되고 싶은 걸까? 좋은 남자와 결혼하여 내조를 하고 싶다면 모든 일을 다 젖히고 알아볼게.

- 벌써 결혼이라니 이르잖아.

메이어 남작의 사업은 번창 중이나 지방의 작은 영지를 가진 귀족에 불과하다. 로젤린의 아버지는 자식들의 결혼을 정략에 묶지 않았다.

장남인 마틴은 아버지의 강요가 없어도 사업에 도움이 될 가문의 여식과 스스로 결혼했다. 그에 비하여 차남 크리스토퍼는 평민 여성과 연애결혼을 했다.

아버지도, 두 오빠들도 로젤린을 억지로 정략 결혼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귀족가의 자식이라면 이미 약혼하였을 나이인 로젤린이 자유로운 것도 그 탓이었다.

그래도 한창 이성에게 관심이 많이 생길 나이이긴 했다. 오빠가 결혼 이야기를 꺼내자 로젤린은 조금 쑥스러워하며 말을 돌렸다.

-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집안의 일을 돕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해. 내가 기사가 되지 않아도 아버지와 작은오빠는 변함없이 나의 긍지이자 자랑이니까.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기사를 동경하는 로젤린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기사였던 아버지와 기사인 크리스토퍼는 영원한 우상이었다.

로젤린은 기사의 명예를 가지고 있는 아버지와 작은오빠를 정말 좋아했다.

마틴이 일부러 섭섭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 그럼 나는? 나도 우리 막내를 위해서 기사가 되었어야 했나 보다.

- 큰오빠는 장래에 나의 사장님이시지!

로젤린이 오른손을 들어 마틴에게 경례했다. 막냇동생의 귀여운 애교에 마틴도 섭섭한 척했던 기색을 풀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소소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행복이 흘러갔다.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 나버리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던 무렵의 자그마한 편린이었다.

‘……오랜만에 꿈을 꿨네.’

이제 25살이 된 로젤린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10년 전에는 행복하였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면 몰래 눈물지었는데, 이젠 눈물이 나지 않는다.

메마른 감정이 있던 곳에 자리 잡은 것은 그녀가 이행해야 할 의무뿐이다.

눈가를 한 번 문지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로젤린은 곧 신음하며 미간을 눌렀다. 속도 쑤시고 머리도 아프다. 지독한 술 냄새로 안 그래도 쑤시는 배 속이 뒤틀렸다. 어떻게 이런 지독한 술 냄새 속에도 깨지 않고 쿨쿨 잠들어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다.

‘으아, 죽겠다.’

로젤린은 토하고 싶은 걸 꾹 눌러 참고 비틀비틀 창문의 덧창을 열었다. 오늘은 비번이고 술까지 잔뜩 마셨는데도 몸에 익은 습관이 해가 뜨자마자 그녀를 깨운 모양이다. 겨울의 늦은 해가 움튼 지 얼마 안 된 시리고 춥고, 춥고, 춥고, 춥고, 추운 아침이었다.

‘춥다.’

로젤린은 열었던 것만큼 빠르게 문을 닫았다. 방 안은 화로로 따뜻하게 덥혀져 있어서 깜빡했다.

‘그보다 여긴 어디야. 어제 갔던 술집에 여관이 딸려 있었던가?’

로젤린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다시 침대에 널브러졌다. 따끈따끈해서 잠이 다시 솔솔 쏟아졌다. 술을 퍼부은 위장과 술에 녹아 버린 머리는 여전히 아팠지만.

‘오후에 카트린 씨를 만났다가 시내에 편지지와 선물을 사러 나왔고, 상점에서 전하를 만났고, 술을 마셨고, 술 내기를 했고, 그 뒤엔…….’

기억이 없었다.

열심히 마시고, 마시고 마시긴 했는데 그 뒤엔 깜깜했다.

술을 마시다가 기억이 끊어진 모양이다. 로젤린은 자괴감에 얼굴을 감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군 앞에서 술을 마시다가 기억이 날아가다니. 아무리 내기가 걸려 있었어도 너무나 한심하지 않은가.

심지어 프레데릭은 술 마시다 의식이 날아간 부하를 직접 여관방까지 옮겨다 준 듯하다. 입이 열 개가 있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다시 잠을 잘 게 아니라 전하를 찾아야지.’

찾아서 사죄를 해야 한다. 로젤린은 끙끙거리며 다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두 번 다시 술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 라고 자신도 그리 확신할 수 없는 다짐을 하면서.

아마도 여관인 듯한 낯선 방에는 그녀의 망토와 칼도 정돈되어 있었다. 로젤린은 추위를 무릅쓰고 창을 열었다. 밤새도록 고여 있던 술 냄새에 코가 비뚤어질 것만 같다.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프레데릭을 찾는 게 먼저다. 로젤린은 망토를 걸쳤다. 눌리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대강 손으로 빗으면서 문을 열었다.

숙취로 머리가 아파서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실제로 죽지는 않았으니 어떻게든 버티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주인에게 물어보면 어느 방에 묵으셨는지 알 수 있겠지.’

그러나 막상 문이 열리지 않았다.

문 앞에 무언가 무겁고 커다란 물체로 막혀 있는 것처럼 제대로 밀리지 않는다. 복도가 어두컴컴하여 문틈으로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숙취로 짜증 나는데 방해물까지 있다.

로젤린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문을 세게 밀어젖혔다. 쿵, 하고 문을 가로막고 있던 방해물이 널브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도대체가 사람이 오고가는 문 앞에 뭘 놔둔…… 전하!!”

거의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망토와 담요로 싸인 채 바닥에 쓰러진 방해물, 아니 방해인은 프레데릭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전하가 계신 줄 몰랐습니다!”

어쩌다 이 양반이 방도 아닌 복도에서 자고 있는지 고민할 여유도 없었다. 쓰러진 프레데릭을 황망히 부축하여 일으키려던 로젤린은 또 한 번 크게 놀랐다.

프레데릭의 얼굴이 열로 펄펄 끓었다.

잔업이 많이 밀리거나 바쁠 시기의 라울은 퇴근하지 않고 사무실에서 잠을 잘 때가 종종 있었다. 그의 사무실에 딸린 곁방에는 이불과 갈아입을 속옷과 옷까지 준비되어 있다.

항상 라울과 침대를 같이 쓰는 이사벨이었으나 라울이 없는 밤에는 달랐다. 아직 어린 둘째딸은 어머니의 옆자리를 독차지했다.

- 난 어린애가 아니라구.

제법 어른인 척하는 에밀리아도 어느 틈인지 꾸물꾸물 그녀의 침대로 올라오곤 했다.

어제도 이자벨은 오랜만에 두 딸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한밤중에 둘째딸이 깨서 칭얼거리느라 잠을 설친 그녀는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란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평소라면 어떤 일인지 살폈을 테지만 오늘은 피로했다.

그렇지만 휴식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마님,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하녀가 이사벨의 귀에 속닥거렸다. 이사벨은 눈도 뜨지 않고 잠결에 물었다.

“이 시간에……? 누구예요?”

“아마 여자분이 아니신가 하는데…… 성함을 메이어라고 밝히셨어요.”

“메이어?”

따뜻한 이불 속에서 웅얼웅얼 ‘메이어…… 메이어…….’하고 중얼거리던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잠이 확 깼다. 그녀가 아는 메이어라면 한 명 뿐이고, 이른 아침에 이유 없이 찾아올 관계는 아니었다.

“혼자인가요?”

“웬 남자분을 업고 오셨어요. 굉장히 급한 용건인 것 같아요.”

“알았어요. 나도 금방 나갈 테니까 거실로 안내해 주세요.”

하녀를 내보낸 이사벨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묶었다. 그 소란에 잠을 깬 에밀리아가 하품하며 불렀다.

“엄마…… 어디 가?”

이사벨은 에밀리아의 뺨에 키스하며 속삭였다.

“손님이 오셨어. 넌 자고 있으렴.”

“응…….”

로젤린이 왔다는 걸 알았다면 당장 따라서 일어났을 에밀리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어린 소녀가 꿈나라로 재차 쿨쿨 여행을 떠날 무렵에 이사벨도 침실을 나갔다.

“메이어 경, 이렇게 이른 시각에 무슨…… 설마, 등에 업으신 분이?”

거실 한가운데에 프레데릭을 업고 어정쩡하게 서 있던 로젤린이 반색했다.

“죄송합니다. 전하께서 쓰러지셨는데 의사는 일을 하기 전이고 전하가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보좌관님 댁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여관에서는 전하를 간호하기도 쉽지 않아서요.”

두서없이 말하는 로젤린도 몹시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업고 있는 장정이 프레데릭이라는 걸 알게 된 하녀들도 당황했다.

그가 가끔 라울의 집을 찾아와서 얼굴은 알고 있다. 하나 여자의 등에 가뿐히 업혀 있는 사람이 프레데릭이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주변이 전부 당황하고 있으니 오히려 이사벨이 침착해졌다.

그녀는 집주인답게 상황을 수습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들을게요. 우선 전하는 라울의 방으로 모셔야겠어요. 많이 아프신가요?”

“예, 예. 열이 심하십니다.”

“근처에 아는 의사 선생님이 있으니까 바로 모셔올 수 있는지 알아볼게요. 따뜻한 물도 준비해요.”

이사벨은 하녀들에게 일을 분배했다. 로젤린도 안내를 받아 라울의 침대에 프레데릭을 눕혔다. 그의 체열도 몹시 뜨거웠고 그녀도 몹시 당황하였기에 등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하녀들은 체격 좋은 프레데릭을 업고 온 로젤린에게 두 번째로 놀라면서도 탕파와 화로를 준비했다.

어쩔 줄 모르고 프레데릭이 누운 침대 옆을 서성거리는 로젤린에게 이사벨이 부드럽게 권유했다.

“의사 선생님께 사람을 보냈으니 곧 와 주실 거예요. 메이어 경도 많이 놀라신 것 같은데 쉬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씻으실 준비도 되었어요.”

“아…….”

로젤린도 그제야 흠칫하며 옷소매에 코를 박았다. 민망함으로 얼굴이 빨개졌다. 정신이 없어서 깜빡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몸에도 술 냄새가 독하게 배여 있다.

“죄송합니다.”

면목 없어하는 로젤린에게 이사벨은 부드럽게 웃었다.

“자꾸 사과하지 마시고요. 의사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전하는 제가 지키고 있을 테니 다녀오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로젤린은 자신이 이곳에서 프레데릭을 도울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걱정이 되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니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녀는 끙끙 앓고 있는 프레데릭을 한 번 바라보고는 안내하는 하녀의 뒤를 따라 욕실로 갔다.

따뜻한 물로 씻고 술기운을 어느 정도 빼고 나오니 새 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마님께서 일전에 기사님의 드레스를 만드실 때 연습 삼아 간단히 만들어 본 옷이니 편하게 갈아입어도 된다고 하셨어요.”

하녀가 딱 맞는 새 옷을 보고 놀라는 로젤린에게 설명했다.

연습 삼아 만들었다는 말처럼 디자인이랄 것도 없는 투박한 모양새와 거친 천이었으나 그녀의 몸에 꼭 맞았다. 일전의 드레스를 제외하면 무척 오랜만에 입는 스커트다.

어색하게 스커트를 쥐고 밖으로 나오니 의사는 진료를 끝낸 후였다.

이사벨이 이미 돌아간 의사를 대신해서 설명해 주었다.

“어젯밤에 만취한 채로 바깥에서 주무신 탓에 감기와 술병이 겹쳤다고 해요. 당장 열이 심하긴 하지만 약을 먹고 푹 쉬시면 곧 나을 거라고 하였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렇군요…….”

로젤린은 가까스로 안도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프레데릭이 업혀 와서 많이 놀랐던 이사벨도 안심한 얼굴이었다.

“식사 전이시죠? 금방 준비하게 할 테니 드시겠어요?”

“저, 그전에 전하가 땀을 많이 흘리셨는데 닦아드리고 나가도 될까요?”

그렇지 않아도 하녀가 온수를 담은 대야와 깨끗한 수건을 가지고 들어오던 참이었다. 이사벨은 그렇게 하라고 끄덕이곤 침실을 나갔다. 주위를 정돈하던 하녀들도 그녀를 따라 나가자 침실에는 로젤린과 프레데릭 두 사람만이 남았다.

로젤린은 잠시 주변을 서성이다 침대 머리맡에 섰다. 프레데릭은 기절한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일부러 제가 묵은 방의 앞에서 주무셨습니까?”

“…….”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조용하고 낮은 숨소리만이 잔잔히 내려왔다. 지난 밤 내내, 이렇게 조용히 자신의 곁을 지켜 주고 있었을 프레데릭의 모습처럼.

가슴 안쪽의 깊은 곳이 울컥 치밀었다. 로젤린은 깍지를 끼어 꾹 쥔 양손을 이마에 맞대었다. 이 사람을, 이 남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단호히 거절하여도 말없이 그녀의 곁을 지키는 이 남자를.

“바보 같은 사람…… 당신은 당신의 혼자 몸이 아니잖아요.”

“…….”

여전히 프레데릭의 대답은 없다.

로젤린은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크게 숨을 들이켠 그녀는 수건을 따스한 물에 적셔 땀을 닦기 시작했다. 아주 느리고 꼼꼼하게.

이사벨은 먼저 아침을 들자고 권했다.

“메이어 경도 이른 새벽부터 경황이 없으셨죠? 일단 뭐라도 드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해요.”

많이 궁금할 텐데도 이사벨은 로젤린을 배려해 주었다. 덕분에 로젤린은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식사를 끝낼 수 있었다.

이른 아침의 소란으로 잠에서 깬 에밀리아도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로젤린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한다는 걸 믿지 못하는 소녀의 눈이 반짝거리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왔다.

식사를 끝내고 차를 마실 때까지 이사벨은 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오늘의 요리는 하녀에게 부탁했지만 나중에는 직접 대접하고 싶다든가, 갑자기 추워진 날씨라든가, 어떤 요리가 좋은지 등등 사소한 일상의 잡담들만 오갔다.

계속 말을 걸고 싶어 하는 눈치였던 에밀리아가 하녀의 손을 잡고 나갈 무렵에는 로젤린도 생각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었다.

“수확제 때 좋은 드레스를 만들어 주셨는데 제대로 입지를 못해서 죄송합니다.”

“뭘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때는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럴 만한 상황’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며 이사벨은 어색하게 미소했다.

“그보다 저희 집은 어떻게 오시게 되었나요?”

사과를 해야 할 일이 또 생겼다. 로젤린은 두 번 다시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실은 어제 보좌관님께…….”

라울에게 상점을 물어보는 대신 빈 바구니를 집에 전해 주라는 부탁을 받고, 상점에서 프레데릭을 만나, 술을 마시고, 술 내기가 과하여 이렇게 되었다는 경위를 설명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으로 로젤린이 새벽부터 집을 찾아왔나, 고민하던 이사벨은 겨우 의문을 풀었다.

“후후. 결국은 두 분 모두 술 때문이라는 거네요.”

“면목이 없습니다.”

설명을 하면 할수록 민망해졌다. 남남이나 다름없는 사이인데 아침부터 이런 민폐라니.

“괜찮아요. 어차피 오늘은 쉬려던 날이고, 조금 놀랐을 뿐이니까요. 전하도 크게 건강을 해치신 건 아니라고 하였으니 다행이고요.”

이사벨은 염려 말라는 표정으로 웃었다.

대화의 끝에 잠시의 침묵이 찾아왔다. 로젤린은 이사벨과 어색하게 마주 앉아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이 와중에도 배 속이 숙취로 쓰라려서 곤혹스러웠다.

‘어제는 무슨 생각으로 술을 끊임없이 마신 거람…… 도중에 작은오빠가 생각나서 욕을 한 것 같기도 한데.’

설마 프레데릭의 앞에서 작은오빠의 욕은 하지 않았겠지.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데 이사벨이 신중히 운을 뗐다.

“메이어 경,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무엇인지요?”

“사적인 일이라 무례한 질문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네요. 언짢으시면 대답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조심스러워하는 이사벨의 태도에서 어떤 질문이 나올지 대강 짐작은 되었다. 그녀와 로젤린의 접점은 몇 가지 없다.

개중 사적인 영역에 걸쳐져 있는 건 프레데릭뿐이었다.

“연회 당일에 전하께 많이 불쾌하셨던 것 같아서 걱정을 했거든요. 오늘 이렇게 두 분이 같이 오시고, 술까지 드셨다고 하니…… 그날의 일은 잘 해결되었나 해서요.”

말을 하며 이사벨을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지나친 오지랖이라면 용서해 주세요. 제 남편과 저는 전하의 아래에서 일을 하는 일개 관리일 뿐이지만, 스스럼이 없는 분이시다 보니 가끔 전하가 염려되기도 해요. 참 주제 넘은 이야기지요?”

확실히 이사벨의 말은 친분이 없는 로젤린의 사적인 부분을 건드렸다. 그러나 먼저 프레데릭을 업고 이사벨을 찾아온 것도 로젤린이었다. 내 프라이버시이니 말하지 않겠다는 대답은 할 수 없었다.

로젤린은 신중히 대답을 골랐다.

“음…… 그동안 전하께서도 절 오해하셨고, 저도 전하를 오해했던 점이 있다는 걸 그날 알았습니다. 한마디씩 서로에게 물었다면 금방 풀렸을 오해가 굳어져서 쌓이다 보니 걷잡을 수 없게 되더군요.”

사람의 선입견이란 확실히 무섭다.

로젤린은 자신을 남자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착각해도 대부분은 오래지 않아 여자라는 걸 눈치채는데, 프레데릭처럼 한참이나 남자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사람은 전무했다.

‘이건 선입견이기 전에 눈치 문제인가.’

문득 그런 생각까지 하니, 웃음이 약간 나왔다.

이야기를 하며 풀어진 그녀의 모습에 조마조마하던 이사벨도 안도했다.

“다행이에요. 저는 전하를 10년 넘게 뵈었지만 그분이 특별하게 여기던 여자분은 메이어 경이 처음이었거든요. ……아! 뒤에서 메이어 경의 이야기를 한 건 아니에요. 라울이 지나가는 투로 몇 번 이야기하는 걸 들었던 정도이니까요.”

혹시 뒷담화로 들리는 건 아닐지 우려한 이사벨이 얼른 설명했다. 로젤린이 신경 쓰이는 건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했다는 것보다, 프레데릭의 상황이었다.

“……거듭 청혼을 거절당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래도 가볍게 연애를 하신 적은 많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머, 그렇지 않아요.”

이사벨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게 굉장히 조심스럽지만 뭐라고 할까…… 전하께서는 연애에 매우 신중하신 편이어서요.”

대화가 길어지면서 어느새 찻잔은 식어 있었다. 이사벨은 남은 차를 비우고 로젤린과 그녀의 빈 잔에 새 찻물을 따랐다.

“결혼을 의무감에 가깝게 여기시기도 했고요. 음…… 실제로 의무가 맞지요. 전하 정도의 위치라면.”

그녀는 ‘모 귀족가의 영양에게 청혼할 예정이야.’라고 가볍게 말했다가 며칠 후 다시 ‘그 아가씨에게 차였어.’라고 또 가볍게 말하였던 프레데릭의 모습을 이야기했다.

“처음부터 마음이 없으셨으니까 가볍게 청혼하고 거절당한 것도 가볍게 받아들이셨다고 생각해요. 청혼하실 때에도 신중하게 고민하신 적은 없다고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메이어 경을 대하실 때의 전하는 무척 고민이 많으신 듯했다고 남편에게 들었어요.”

“그러셨습니까…….”

그저 애매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잔잔하게 고인 투명한 찻물에 그녀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비쳤다.

로젤린은 자신이 어떠한 표정을 하고 있는지도 읽을 수 없었다.

이사벨도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메이어 기사님이랑 엄마가 언제까지 얘기하시는지 들은 적 있어요?”

응접실 밖에서 에밀리아가 하녀를 재촉하는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그 정도로 응접실 안은 조용했다.

이사벨은 자신이 말실수를 한 건 아닐지 걱정하며 침묵했고, 로젤린은 어떠한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침묵했다.

“전하는 좋은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조도 없이 로젤린의 입술에서 툭 튀어 나간 한마디는 그녀로서도 알 수 없던 말이었다.

무작정 튀어 나간 그 말이 한 바퀴 허공을 휘돈 다음에야, 뒤늦게 로젤린은 혀끝을 깨물었다. 눈을 동그랗게 떴던 이사벨이 이윽고 말을 이었다.

“좋으신 분이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충동적인 한마디는 진심과 밀접해 있었다. 로젤린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침묵하는 로젤린을 바라보던 이사벨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저도 결혼하기 전에는 그랬어요. 라울은 분명히 좋은 남자지만 그와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기엔 망설여지는 점이 많았는걸요. 저는 결혼 대신 하고 싶었던 일도 아주 많았고요. 여자는 직업을 가지는 것도 쉽지 않지만 결혼 후에 직업을 유지하는 건 더 어렵잖아요. 메이어 경도 잘 아시겠지만.”

제도 레젠이 있는 중심부는 그나마 상황이 낫지만 지방으로 갈수록 여성의 사회적 입지는 좁아진다.

“……이사벨 씨는 어떻게 하셨나요?”

“라울과 터놓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고 함께 고민하고 선택을 했지요. 지금도 제 선택이 올바른 것인지, 평생 후회하지 않을 것인지 자신은 없어요. 아마 라울과 결혼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전하도 도움을 주셨어요.”

슈벤하임 대공령은 아이기스 나이트에서 성별 상관없이 기사를 모집하여 다른 지방보다 인식이 조금은 나은 편이다. 그러다 프레데릭이 대공이 되었다.

이사벨은 프레데릭이 대공위에 오른 후에 하였던 말을 로젤린에게도 들려주었다.

- 인구도 적은 대공령에서 인구의 반인 여자들을 집이나 지키게 하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일이 어디 있나. 여자들도 전부 훌륭한 인적자원일세.

당연히 고루한 신하들은 반대하였지만 프레데릭은 다음 말로 입을 다물게 했다.

- 어렸을 때부터 날 가르쳐 준 사람도 여자였네. 그리고 대부인께도 여자의 몸이시지만 대공령의 통치에 훌륭한 조력을 하고 계시질 않나.

마리안 부인을 끌어들이니 마리안 부인을 지지하는 측에서도 반박할 말을 쉽게 찾지 못했다.

오랜 세월 고착되어 있던 인식과 사회적인 입지가 프레데릭의 한마디에 쉽게 바뀌지는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관공서에서는 여성 관리의 비중이 과거보다 증가하고 있었다.

이사벨도 정식으로 대공가에 고용된 재봉사 중 한 명이었다. 신체에 밀착하는 경우가 잦으니만큼 여성의 의복을 제작하는 재봉사는 여자인 경우가 많다. 로젤린은 이사벨도 그런 경우라고 지레짐작했다. 대공가에 정식으로 고용된 재봉사라고는 생각 못했다.

아이기스 나이트가 되고도 본부 밖으로 거의 나간 적이 없었던 로젤린은 잘 알지 못했던 면이었다. 로젤린은 그녀가 몰랐던 프레데릭의 면모를 오늘 하나 더 알았다.

그는 때때로 다른 귀족들이 미치지 못하는 넓은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단순히 생각만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직접 행동으로 옮긴다. 죽은 부하들을 진심으로 위문하였던 것처럼.

로젤린이 검술을 배울 때에는 또래의 소년들로부터 여자가 무슨 검술을 배우냐는 비난을 숱하게 들었다. 검투사가 된 후에도 여자라는 조롱을 받았다. 그녀가 그 남자들을 전부 굴복시킬 만큼 강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조롱 속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과거를 떠올리니 쓴웃음이 나왔다. 대공령에서 태어났다면 자신의 과거도 조금 달랐을까.

이사벨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오래도록 결혼을 고민할 때에 프레데릭이 한마디 했다.

- 결혼 후에도 네 일은 계속 하면서 라울을 부려 먹으면 되잖아? 일 그만두라고는 아무도 안 해.

그 이야기를 전하며 이사벨은 작게 웃었다.

“제가 대공령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정식으로 고용되지도 못했을 텐데 전하께서 그런 말씀까지 하시니 저도 어쩔 수 없더라고요.”

그녀는 곤란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쑥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 되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지나고 아이도 둘이나 있는데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참 부끄럽네요. 그래도 제가 라울과 함께 선택한 길이니 후회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로젤린은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하는 고민과 이사벨이 하였던 고민은 같지 않다. 그렇지만 이사벨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옳은지 가닥이 잡히는 것 같았다.

“아침부터 이런 이야기는 조금 무거운가요?”

분위기를 환기하는 것처럼 이사벨이 웃었다.

“아닙니다. 좋은 말씀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남은 차를 함께 마셨다.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이사벨은 문을 열었다. 내내 응접실 앞에서 왔다 갔다 하던 에밀리아가 고개를 쏙 들이밀었다.

“메이어 기사님! 저, 저어…… 좋은 아침입니다!”

식사까지 같이하였는데도 뒤늦게 나온 인사말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 꼬마 아가씨가 어지간히도 긴장한 모양이다.

아직 프레데릭은 잠들어 있다. 로젤린은 고민을 잠시 뒤로 미루었다.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추자 에밀리아의 뺨이 발그레하게 붉어졌다.

“에밀리아는 기사가 되고 싶다고 했지?”

“예!”

“언니랑 같이 놀까?”

“예! 예!”

환한 미소가 금세 아이의 얼굴에 피어났다.

“목검은 여러 자루나 있어요!”

“에밀리아, 아침부터 메이어 경을 번거롭게 하면 못 써요.”

이사벨이 걱정하며 넌지시 에밀리아를 말렸으나 로젤린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고향에 있는 조카가 생각나서 저도 즐거워요.”

그렇게까지 말하자 이사벨도 더는 만류하지 않았다. 예의상 딸을 만류하긴 하였으나 에밀리아가 동경하는 로젤린과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게 은근히 기쁜 눈치였다.

“검술은 체계적으로 배우고 있니?”

“아빠랑 친한 기사님이 기본은 가르쳐 주셨구요, 전하도 가끔씩 자세 같은 걸 봐 주세요!”

“그럼 내가 가르쳐 줄 건 없겠는걸.”

로젤린은 에밀리아와 조곤조곤 수다하면서 뒤뜰로 걸어갔다. 간만에 보내는 푸근한 시간이었다.

점심 무렵에 잠깐 깨어 약을 먹은 프레데릭은 그 후에도 몇 시간을 더 잤다. 아침에 의사가 주고 간 약이 효과가 있어 열이 많이 내리고 안색도 한결 나았다. 로젤린은 오후부터 계속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이사벨에게 부탁하여 손에 잡히는 책을 아무거나 한 권 빌려왔는데 하필이면 달달한 로맨스 소설이었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사랑을 이야기할 때마다 뺨이 간질간질했다.

기나긴 밀당 끝에 남자 주인공이 고백하는 부분을 읽고 있을 때 프레데릭이 두 번째로 눈을 떴다.

“……?”

기침을 쿨럭쿨럭하며 주변을 돌아보던 프레데릭의 눈동자가 로젤린과 마주쳤다. 로젤린은 책을 덮으면서 인사했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프레데릭은 잠기운이 덜 가신 눈을 깜빡거렸다. 머릿속이 묘하게 몽롱했다. 그는 이마를 누르며 비틀비틀 상체를 일으켰다. 로젤린이 부축해 침대에 앉혀 주었다.

잠든 사이에 어렴풋하게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한 느낌은 들었다. 쓴 약도 먹었고 진찰도 받은 것 같다. 그전에는 뭘 했지. 지금은 왜 또 라울의 집에 있는 거고.

찬찬히 간밤의 기억을 돌이키던 프레데릭이 신음하며 얼굴을 감쌌다. 기억났다.

로젤린에게 업혀서 여기까지 온 게.

‘……미치겠네.’

아무리 열 때문에 의식이 반쯤 날아갔다고 해도 여자 등에 업혀 오다니. 심지어 그냥 여자도 아닌 좋아하는 여자다. 남자의 체면 문제 이전에 쪽팔려서 죽을 것 같았다.

‘남자로 착각했다는 것보다 더 쪽팔릴 일이 남아 있었나.’

프레데릭이 정신적인 충격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로젤린이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아직 몸이 안 좋으십니까? 의사는 약을 먹으면 괜찮을 거라고 하였는데…….”

“……저, 로젤린.”

프레데릭은 잔기침을 하며 그녀를 불렀다. 약을 먹어 호전되었긴 해도 술병과 감기가 겹친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목소리까지 잔뜩 쉬었다.

정말이지 멋진 모습이라고는 로젤린에게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오늘 아침에 나를…… 업어서 데려온 게 맞나?”

혹시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로젤린을 한 번 업었던 것에서 비롯된 잠재적인 욕망을 반영한 꿈일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프레데릭의 눈빛이 절실하게 일렁거렸다.

그의 간곡한 바람을 로젤린은 단칼에 부정했다.

“부축해도 제대로 걸으실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어서요.”

결국 로젤린의 입으로도 듣고 말았다. 확인 사살까지 당하고 나니 도저히 로젤린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프레데릭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잠시 그 모습을 보던 로젤린이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뭐 하십니까?”

“쪽팔려서.”

아담한 아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으면 귀엽기라도 할 텐데, 덩치는 산만한 사내가 그러고 있으니 궁상맞기 짝이 없다.

“쪽팔, 아니 창피한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 다시 전하의 앞에서 술을 마시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아, 그건 내가 좋았거든.”

서로 서로 쪽팔림을 하나씩 주고받은 후에야 프레데릭은 슬그머니 이불을 내렸다. 하루 종일 자다가 깨서 부스스한 머리칼과 독한 감기 기운이 남은 불그레한 뺨. 역시, 다시 봐도 궁상맞다.

“저 때문에 괜한 감기에 걸리셔서…….”

그녀가 막 ‘면목이 없다. 죄송하다.’라는 말을 하려던 찰나에 프레데릭이 입을 막았다.

“미안하다든가, 잘못했다든가, 앞으로 내 앞에서는 하지 말아줬으면 한다만. 널 위해서 하는 일은 모두 내가 원해서 하는 거니까 넌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고 마음을 쓸 필요도 없어.”

평소처럼 가벼운 어투지만 로젤린에게는 가볍게 들리지 않는 말이었다. 말문이 막힌 그녀는 잠시 프레데릭을 바라보았다.

“……명령이십니까?”

“아니, 부탁.”

“…….”

로젤린은 ‘알겠습니다.’라는 긍정도 ‘따르지 않겠습니다.’라는 부정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숨을 한 번 삼키고는 말문을 돌렸다.

“여관에 방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었다는 말을 주인에게 들었습니다. 들어오셔서 주무셨으면 되었을 텐데요.”

“그건 안 되지.”

프레데릭이 뒷목을 긁적였다. 목덜미가 슬쩍 붉어지고 있었다.

“또 널 성희롱했다는 오해를 사기 싫어.”

어지간히도 트라우마로 남은 모양이다. 술병과 감기로 하루 종일 앓는 것보다 로젤린에게 성희롱범이라는 오해를 받는 게 더 싫다는 궁상맞은 모양새의 남자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풉.”

입술 사이로 터진 실소는 이내 웃음소리가 되었다.

소리 내어 웃는 로젤린의 앞에서 프레데릭은 침통하게 “난 심각하거든.”라고 중얼거렸다. 그야말로 평생 갈 쪽팔림이었다.

웃음소리는 점차 잦아들었다.

“전하.”

웃음의 끝머리에 로젤린은 그를 불렀다. 프레데릭이 여전히 민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막 앓다가 일어난 사람이니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늦지 않게 말해야 하는 것이 있다.

혼자 끌어안으며 고민해서는 안 되는 것.

자신에게 마음을 주는 사람을 대등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

로젤린은 프레데릭에게 말했다.

“저에게 남녀 관계도 병행하고 싶다고 하셨지요.”

“그때 넌 기사로서 남을 것이라고 대답했지.”

“전하와 제가 남자와 여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하나 더 있습니다.”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저는 전하께서 마음에 두실 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가 아닙니다. 제 진심을 아시게 되면 분명히 경멸하시게 될 겁니다.”

잔잔한 어투였으나 그곳에는 황야에서 보낸 밤에도 숨겼던 그녀의 진심이 숨어 있었다. 프레데릭도 민망한 기색을 거두고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어째서 내 마음을 확신하는 건가?”

“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저니까요.”

“날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지.”

“그러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프레데릭이 잠들어 있을 때 로젤린은 어떻게 말을 하면 될지 많은 생각을 거듭했다. 생각 끝의 결론은 단순했다. 있는 그대로 말할 것.

“전하는 저를 잘 모르십니다. 제가 전하를 모시는 건 전하를 이용하기 위해서입니다. 굉장히 이기적인 이유이죠.”

“……이유를 물으면 설명해 줄 수 있나?”

로젤린은 고개를 저었다.

“말씀드렸듯이 저는 이기적이니까요. 말하지 않고 전하를 이용하면서 섬길 겁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도 저를 기사로서만 이용해 주십시오. 그 이상의 마음을 받을 가치는 저에게 없습니다.”

품고 있던 말은 전부 했다.

로젤린은 프레데릭을 주군으로서 존경하고 그의 기사라는 긍지를 갖고 있었다. 설사 프레데릭이 계속 본의 아닌 성희롱을 했다고 한들, 주군을 섬기는 그녀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죄를 짓고 처분을 기다리는 것처럼 프레데릭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는 로젤린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프레데릭이 한 차례 마른기침을 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풀어지긴 하였으나 목소리는 여전히 거칠었다.

“날 이용하겠다는 게 문제가 되나?”

특별할 것도 없다는 태연한 목소리였다.

“뭐, 별로 상관없어. 이용 가치가 있다면 얼마든지 이용해도 돼. 죽은 아버지도 어떤 의미로는 나를 끊임없이 당신의 욕망을 위해 이용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지금도 죽은 아버지의 망령에 이용당하고 있지. 네가 이용해 준다면 오히려 환영이야. ……솔직히 말하면 네게 이용당한다니 좀 짜릿하군.”

되는 대로 솔직히 얘기하던 프레데릭이 얼른 한마디를 덧붙였다.

“짜릿하다는 게 변태 같은 의미는 아니고. 마음적으로 짜릿하다고 할까.”

그다지 설명은 되지 않는 한마디였으나 프레데릭은 진지했다.

“기왕이면 내가 이용당하는 첫 경험을 네가 가져갔다면 좋았을 거야. 네게 이용당한다니 상당히 좋은데 혹시 나 M인가? M은 싫어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도 안 되는 말이었다. 멍하니 듣던 로젤린은 고개를 한 번 세차게 휘젓고는 반문했다. 황망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전하, 제가 드린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은데, 일개 기사에 지나지 않는 제가 전하를 이용하려 한다는 뜻입니다.”

“이해했어. 그리고 넌 일개 기사가 아니지.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로젤린 메이어라고.”

프레데릭이 유쾌하게 웃었다.

“뭐가 걱정이냐? 난 튼튼하고, 강하고, 세지. 알다시피 정신적인 도피도 아주 잘해서 아버지들 때문에 억지로 20년 가까이 대공위에 묶여 있으면서도 여기가 망가지지는 않았어.”

‘여기’라고 말하며 프레데릭은 둘째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한마디로 육체도 정신도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쉽게 무너지거나 다칠 염려는 하지 않아도 돼. 이용당하기에 최적의 조건이 아닌가?”

“하지만……!”

반박하려는 로젤린의 말허리를 프레데릭이 끊었다.

“정 마음에 걸린다면 나도 널 이용하기로 하지. 네가 기사로서 날 이용할 동안 나는 너에게 남자로서 접근할 거야. 이 정도면 공평한 거래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절 알게 되면 전하는 경멸하시게 될 테니까요.”

“네가 뭘 마음에 걸려 하는지 모르겠지만, 좋아.”

그는 여전히 싱글싱글 웃는 낯이었다.

“내기를 한 가지 할까? 네가 숨기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되고도 내가 널 경멸하지 않고, 내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너도 날 남자로 봐 줄 수 있겠나?”

당장 마음을 허락하라는 조건도 아닌, 단지 남자와 여자로서 시작해 보자는 조건이다. 터무니없을 만큼 그가 손해 보는 내기다.

가볍게 웃으며 가볍게 말하고 있으나 그녀의 진심까지 가볍게 여기는 건 아니었다. 로젤린은 그의 말에 숨은 무거운 진심을 실감했다. 그 무거움이 그녀를 감쌌다. 로젤린은 자신이 이처럼 무거운 마음을 받아도 될 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은 그녀가 버린 나약한 것을 끊임없이 일깨우며 싹을 틔우려한다.

로젤린은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또 한 번 외면하고, 모르는 척 지우고, 그럼에도 끊임없이 자라나는 그것을 가장 깊숙한 상자에 넣어 가장 단단한 자물쇠를 잠그고 봉인했다. 봉인하고자 노력했다.

“……나중에 후회하시고 저에게 화를 내시게 될 겁니다.”

“널 좋아하는 남자를 손톱만큼이라도 믿어 주면 좋겠군. 어쨌든 우리의 거래와 내기는 성립한 건가?”

“전하께서 원하신다면요.”

“좋아.”

프레데릭은 이번에야말로 멋진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갑자기 기침이 터졌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한참을 쿨럭거렸다. 로젤린이 하녀에게 새로 받아 온 따뜻한 물을 마신 그는 완전히 탈력하여 침대로 쓰러졌다.

“쪽팔려서 미치겠군. 이만큼 독한 감기가 걸린 적은 태어나서 한 번도 없었는데 하필이면 최초의 경험이 네 앞에서라니.”

“아까는 저에게 첫 경험을 주고 싶으셨다면서요.”

“……그거랑은 다르지. 혹시 M 좋아하냐?”

“안 좋아합니다.”

프레데릭은 아무리 그녀에게 이용당하는 게 짜릿해도 M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술 내기에서 이긴 건 난가?”

이번에는 로젤린이 민망해할 차례였다. 잊고 싶었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을 붉히는 그녀에게 프레데릭은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의 망토와 소지품 등이 정돈되어 있는 테이블이었다.

“이겼으니 내 선물을 받아 줘야겠다. 술집에서 목걸이는 꼭꼭 챙겼으니 거기에 있을 거야. 후후, 감기도 걸릴 만하구만.”

로젤린은 분실도 되지 않고 그녀의 눈앞에 흉흉한 모습을 드러낸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두 번째로 봐도 목걸이로 쓰는 건 무리였다.

“목에 걸지 않고 유사시에 무기로 활용해도 됩니까?”

“받아 주기만 한다면야 얼마든지.”

술병과 감기를 얻은 끝에 목적을 쟁취한 남자는 상당히 복잡한 표정으로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는 로젤린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다음엔 어떤 선물을 줄까.’

로젤린이 듣는다면 생각이 더욱 복잡해졌을 것이다.

* * *

프레데릭은 저녁시간이 되기 전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사벨이 라울에게 연락하여 두 시간 전부터 대공저의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프레데릭은 라울보다 키도 크고 체격도 좋다. 감기에 걸려서 몹시 추웠지만 라울의 옷은 안 맞았다. 그는 이불을 둘둘 싸매는 걸로 겉옷을 대신했다.

“나중에 새 침구를 보내 주마.”

“그건 괜찮습니다만 더 쉬시다 가시질 않고요.”

저녁 식사를 준비 중이던 이사벨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따라 나왔다.

“부부 침대를 언제까지 점령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나. 오늘은 고마워.”

기침이 또 터졌다. 그는 연신 기침을 쿨럭거리며 배웅을 나오려는 이사벨과 에밀리아를 손짓으로 만류했다. 오해에서 비롯된 충격적인 모습을 목격하고 첫사랑이 산산조각 나긴 했으나 여전히 프레데릭을 좋아하는 에밀리아가 외쳤다.

“전하! 얼른 나으세요! 또 감기 걸리시면 안 돼요!”

로젤린도 이사벨에게 인사했다.

“아무래도 보좌관님이 맡기셨던 바구니를 술집에서 잃어버린 듯합니다. 이번 달 월급이 나오면 꼭 변상하겠습니다.”

“전하도 메이어 경도 배상하겠다는 말씀만 하고 가시네요.”

이사벨이 에밀리아의 어깨를 안으며 웃었다.

“말씀하신 술집이라면 저도 단골이니 주인에게 손님들의 분실물이 있는지 물어볼게요. 쓴 지 오래돼서 새로 장만하려던 참이기도 하고요.”

신경 쓸 것 없다는 이사벨에게 밀려 로젤린도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하루 종일 그녀의 신세만 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마차와 따로 온 말에 로젤린이 올라타자 곧 마차는 출발했다. 대공가의 문장이 장식된 고급마차가 아닌 평범한 마차였다. 라울의 집은 주로 평민들이 머무는 거주지에 있었다. 불필요한 시선을 사지 않도록 하기 위한 집사의 배려였다.

마차는 덜그럭거리며 대공저로 돌아갔다. 로젤린의 말도 마차의 옆을 나란히 걸어갔다.

해가 질 무렵이 되니 꽤 쌀쌀했다. 로젤린은 어깨를 한 번 떨며 망토를 더 꼼꼼히 여몄다. 이대로 대공저까지 프레데릭을 호위한 후 기사단 본부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오늘 하루는 무척 빠르게 지나간 것 같다.

“로젤린, 로젤린.”

마차의 창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갑자기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자 이불로 싸매고 있던 프레데릭이 잔기침을 콜록콜록했다.

“감기약 드릴까요?”

“감기약은 대공저로 돌아간 후에나 받기로 하고. 네 휴가도 아직 안 끝났으니 바로 돌아가지 말고 시내에 들렀다가 가는 건 어떠냐? 남자로서 네게 접근하는 첫 걸음으로 데이트를 제안하고 싶다만.”

“감기 더 심해지십니다.”

말하면서도 기침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이 데이트 욕심은 컸다.

로젤린은 단호하게 물리치며 창문을 탁 닫았다.

“억!”

미처 빼내지 못한 손끝이 조금 찧었는지 마차 안에서 짤막한 비명이 들렸다. 그 비명마저 곧 요란한 기침 소리에 묻혔다.

저러다 감기가 낫기는 할지. 로젤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감기라는 건 합법적인 땡땡이 구실이 아닐까?’

동시에 프레데릭이나 할 법한 생각도 했다.

그녀가 묻고, 지우고, 외면하여도 결코 온전히 사라지지 않는 진심의 조각이었다.

* * *

휴가의 마지막 날 오후에 카트린을 만나기로 했다. 여유 있게 아침을 시작한 로젤린은 기숙사까지 배달 받은 편지지를 꺼냈다.

「수잔나 언니에게.」

일전에 편지를 쓸 때는 발트란에 무사히 도착하였으며 기사가 되었다는 사실만을 적기에도 빠듯했다. 이번에는 그때보다 시간이 넉넉하지만 막상 펜을 드니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가족에게 편지를 쓰는 건 상상하였던 것보다 많이 쑥스러웠다.

편지지에 받는 사람의 이름만 한 줄 쓰고 한참 머뭇거리다 두 번째 줄을 썼다.

「잘 지내고 있나요? 이 편지를 받으실 즈음에는 레젠도 많이 춥겠습니다. 이곳 발트란은 벌써 겨울이에요. 겨울이 일찍 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수확제를 시작하기도 전에 눈이 오는 걸 목격하여서 많이 놀랐습니다.」

일단 가벼운 날씨 얘기로 시작하자 내용은 술술 나아갔다.

「감기는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엠마도 밖에 너무 놀러 다니지는 말고 추울 때는 집 안에 얌전히 있어야 할 텐데요. 작년보다 올해의 감기가 더 독한 것 같으니 우리 꼬마 아가씨가 또 콧물을 훌쩍거리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단단히 감기가 걸려서 대공저로 돌아가는 내내 기침하던 프레데릭이 떠올랐다. 무심코 입가에 웃음을 매달고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며 펜을 움직였다.

「겨울을 보내시기에 도움이 되도록 언니와 엠마의 모자와 망토를 보냅니다. 조만간 레젠으로 다시 올라갈 예정이지만 – 신년 축일에 대공 전하를 호위하게 될 것 같아요 - 하루라도 빨리 언니에게 도착하길 바라 카트린 씨에게 부탁하였어요. 마수의 가죽과 털로 만든 모자이지만 레젠에 비해서는 아주 쌉니다. 어쩌면 이 마수의 가죽도 제가 사냥한 마수의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단숨에 여기까지 쓴 로젤린은 잠시 머뭇거렸다.

콜로세움에서도 마수를 사냥하는 걸 언제나 걱정하였던 수잔나다. 마수를 사냥하기 위하여 발트란에 있다는 걸 알아도 마수의 이야기를 꺼내면 걱정할 것이다.

로젤린은 마수의 사냥에 대한 부분은 생략하고 기사단의 생활에 대해서만 적었다.

「아이기스 나이트는 아주 좋은 곳입니다. 콜로세움에 있을 때보다 훨씬 충만하고 즐거운 나날이에요. 오직 제 목적만을 위해서 휘둘렀던 검이 사람과 땅과 터전을 지키게 된다는 건 무척 기쁩니다.

동료들도 괜찮은 녀석들이에요. 현재 평기사 중 여자는 저 혼자이지만 여자라는 것에 큰 차별도 없고 대놓고 시비를 거는 녀석도 없습니다.」

기사단의 생활에 대해서 하나씩 썼다. 오랫동안 여자 기사가 없어서 여자 기숙사는 그동안 창고 대용으로 쓰고 있었다는 것. 단체전과 훈련이 낯설었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다는 것. 말을 꽤 잘 탈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대공의 유일한 호위기사가 되었다는 것.

「언니도 슈벤하임 대공 전하에 대한 소문은 들으신 적이 있지요? 소문으로 전해지는 것만큼 용맹하고 카리스마가 있는 분이에요. 이곳의 기사들은 모두 대공 전하를 존경하고 있습니다. 저도 존경하고 있어요. ……전장에 서셨을 때만요.」

편지를 쓰는 게 아니라 수잔나와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면 분명히 소리 내어 웃었을 것이다.

‘전하를 직접 뵈면 소문과의 차이 때문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을걸.’

「소문만으로는 알 수 없는 점도 있어요. 아마 언니는 상상도 못하실 거예요. 저도 전하를 우연히 처음 뵈었을 때는 웬 주정뱅이라고 생각을 했다니까요?」

로젤린은 한 차례 씨익 웃고 다음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무척 좋으신 분입니다.」

편지지는 어느덧 7장이 넘어가고 있었다. 팔목과 손가락도 슬슬 아팠다. 못 다한 이야기는 레젠에서 나눌 수 있길 바라며 마지막 문단을 썼다.

「언니가 혼자 있는걸 알게 된 놈팡이들이 또 수작을 거는 건 아닌가요? 한스에게 부탁해 두었으니까 필요하면 얼마든지 그 녀석을 부려 먹어 주세요. 제게 떼먹은 돈을 생각하면 몇 년 동안 언니에게 무료 봉사를 하여도 부족하니까요.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이만 줄입니다. 엠마에게도 안부를 전해 주세요. 우리 꼬마 아가씨는 철이 들었을까요? 곧 레젠에서 다시 만나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잠시 펜을 멈추었다. 오랜만에 책상에 오래 앉아 있어 뻐근한 허리를 통통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발트란에서 보낸 시간들 그리고 앞으로도 보내게 될 시간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담은 마지막 인사를 썼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평화롭고 즐겁습니다. 다음에 뵙게 될 때까지 언니도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길 바라요.

언제나 언니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애정과 우정을 담아, 로젤린이.」

로젤린 메이어, 라는 서명을 끝으로 펜을 놓았다.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리며 창밖을 보았다. 오늘도 북쪽의 하늘은 맑았다.

그녀가 쉬고 있던 아침에도 한 차례 마수 토벌이 있었다. 큰 부상을 입은 사람 없이 무사히 끝냈다고 들었다. 충분히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레젠에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수잔나도 평화로운 나날을 만끽하고 있을 것이다.

로젤린은 때로는 나른하고, 때로는 따분하기까지 한 이 평화가 지속되기를 바랐다.

어제 로젤린의 호위 속에 대공저로 귀택한 프레데릭은 제일 먼저 저녁을 먹었다. 입맛은 전혀 없었지만 텅텅 빈 배 속은 굶주렸다. 약도 먹어야 했다.

‘약을 먹기 위해서 먼저 식사를 해야 한다니 전후의 과정이 잘못되어 있는 게 아닐까.’

쓸데없는 불만을 구시렁거리며 약까지 먹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정오까지 쓰러져 잠들었다.

로젤린의 앞에서는 비교적 태연한 척, 아프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술병은 결코 무시할 게 못되었다. 감기보다 오히려 술병 쪽이 더 심했다.

속도 쓰라리고 토하고 싶고 머리는 쑤시고 기운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아픈 기색은 전혀 드러낼 수가 없었다. 여러모로 진퇴양난이었다.

그래도 로젤린과 데이트할 수 있었다면 기꺼이 했을 테지만.

해가 중천에 떴을 때 느지막이 일어난 프레데릭은 제일 먼저 거울을 보았다. 얼굴이 아주 엉망이었다. 어제 어렴풋하게 생겼던 다크 서클이 더 진해진 것 같다. 그는 어제와 오늘 면도를 하지 못하여 다소 깔끄러운 턱을 쓸었다.

‘얼굴이 회복될 때까지 당분간 로젤린은 만나면 안 되겠다.’

로젤린이 그나마 마음에 들어 하는 부분이 얼굴인데, 얼굴마저 취향에서 벗어나면 큰일이다.

어쨌든 하루를 더 쉬고 나니 어제보다는 몸 상태가 나았다. 그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잔기침을 콜록콜록하며 호출줄을 당겼다.

식사에 앞서 세숫물을 가지고 온 사람은 집사였다.

“자네가 직접? 무슨 일이지?”

세숫물이나 식사를 가져오는 등의 가까운 신변 시중을 드는 건 집사의 몫이 아니라 하녀의 일이었다. 원칙적인 집사가 일을 바꾸었다는 건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왠지 골치 아플 일이 있을 거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두통도 아직 덜 나았는데.’

다소 좌절적인 프레데릭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집사는 두툼한 서류를 세숫물 옆에 내려놓았다.

“주인님께서 급히 확인하셔야 하는 일인 듯하여 부득이하게 실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과한 참견이었으면 부디 벌하여 주십시오.”

프레데릭은 일단 서류를 들었다. 작게 하품마저 하며 서류 봉투를 보던 시선은 서류를 봉한 인장을 확인하자 굳었다.

“수고했네.”

집사가 물러나자 프레데릭은 즉시 인장을 뜯었다. 평범하게 보이는 이 인장은 마법사 학회의 위장용 인장 중 하나이다.

예상하였던 대로 썩은 재규어 떼의 비정상적인 출몰에 대한 조사 결과였다.

균열과 마수는 마법사들의 대표적인 연구 소재였다. 그렇지 않아도 기이하게 여기던 출몰은 프레데릭의 비공식적인 의뢰까지 받고 치밀하게 조사되었다.

프레데릭은 전문 용어까지 사용하여 상세하게 기술된 서류를 신중하게 읽었다. 평소와 같은 여유 있는 장난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설마, 설마 했었는데…….”

긴 시간 꼼꼼히 읽은 서류를 침대에 내던지며 그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무거운 탄식이 아래로 떨어졌다.

조사 서류의 결론적인 한마디가 뇌리에 달라붙었다.

「썩은 재규어 떼의 습격에는 인위적인 조작이 있었음.」

“젠장.”

프레데릭의 주먹이 침대 기둥을 후려갈겼다.

균열에 인위적인 조작을 가했다는 건, 그 수많은 희생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 또한 숱한 인명을 서슴없이 제물로 바칠 만큼 잔학무도한 자가 발트란을 노리고 있다는 뜻이다.

생각을 정리한 그는 즉시 몸을 일으켰다. 측근을 소집하여 이 사안을 놓고 긴급히 회의를 해야 했다.

그는 게으른 통치자였으나 지금은 의무로부터 도피할 때가 아니었다. 그의 선택에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바빠지겠군.”

나직한 혼잣말은 평화로운 나날의 끝을 고하듯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삼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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