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Lady in Knight
햇밀을 반죽하여 만든 빵, 가장 먼저 짠 우유, 암탉이 처음으로 낳은 달걀, 이른 새벽에 갓 따온 과일, 첫물에 잡은 생선 등등.
수확제가 열리는 날에는 그해, 또는 그날의 첫 생산물로 간단한 요리를 만들어 가까운 이웃과 친지와 나누는 풍습이 있다. 또한 해가 떠 있는 시간엔 금식한다. 해가 서쪽 하늘로 넘어간 후에 서로 나눈 음식을 먹으면서 한 해의 수확을 즐기는 축제가 열린다.
수잔나도 햇밀을 사서 꼭두새벽부터 반죽하느라 바빴다. 새벽녘에 단골손님과 이웃들에게 나누려면 일찍 끝내야 했다.
‘작년 수확제까지는 늘 로젤린이 있었는데……. 그 애는 잘 지내고 있을까.’
반죽이 발효되는 시간에 잠시 쉬었다. 뻐근한 팔을 주무르고 있자니 절로 로젤린의 생각이 났다. 로젤린도 수확제 같은 명절에는 콜로세움의 경기에 서지 않고 항상 집에서 같이 시간을 보냈다.
작년 수확제에도 빵을 굽는 걸 도와주거나, 수잔나의 어깨를 마사지해 주었다.
‘카트린 씨를 통해서 기사가 되었다는 편지는 받았지만, 직접 얘기를 못 들으니 아쉽네.’
제도 레젠에서 슈벤하임 대공령까지는 아주 먼 길이다. 그 편지도 카트린이 상행에서 돌아온 후, 즉 로젤린이 레젠을 떠나고 두 달이 넘게 지나서야 겨우 받았다.
지금은 기사단에서도 잘 지내고 있을 거라 믿는다. 이제는 친누이나 다름없는 로젤린을 믿으면서도 언니로서 걱정은 끊이질 않았다.
로젤린이 경기에 서는 것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고 늘 가슴을 졸였다. 슈벤하임 대공령에서는 본격적으로 마수를 사냥한다고 하니 더 걱정이었다.
‘그 애는 한번 몰두하면 돌아볼 줄을 모르니까…….’
검투사가 되겠다고 하였을 때도 그랬다. 상처가 끊이지 않았다. 훈련으로만 생긴 부상은 아니었다. 남편이 기사였던 수잔나는 훈련과 폭행으로 생기는 부상의 차이점을 알았다.
로젤린의 상처는 대부분이 폭행이었다.
- 언니, 전 괜찮아요. 제가 맞은 것보다 두 배는 더 두들겨 주고 있으니까요. 지금은 소위 기선 제압 중이니까 저 새끼들도 발광하는 거예요. 제가 이길 거니까 염려 마세요.
걱정하는 그녀에게 로젤린은 멍이 들고 부은 얼굴로 오히려 웃음을 지었다.
로젤린의 장담은 맞았다. 콜로세움에서 대놓고 로젤린을 건드리는 검투사는 없어졌다.
자리를 잡은 후에도 로젤린은 속된 말로 악바리처럼 살았다.
- 우리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는 저니까요. 아버지와 오빠들이 갚지 못한 빚과 명예를 제가 보상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어요?
로젤린은 그 장담도 이루어 내었다.
15살의 어린 소녀가 맨몸으로 부딪힌 지 겨우 10년 만에 막대한 빚을 갚았다. 수잔나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제일 굉장한 사람은 로젤린이었다.
발효되는 반죽 앞에 앉아서 로젤린을 회상하던 수잔나의 머릿속에 문득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로젤린은 가문의 빚은 갚았다.
이제 남은 건 추락한 명예였다. 기사로서 더없이 불명예스러웠던 아버지와 작은오빠가 실추시킨 명예.
그 명예는, 어떻게 갚겠다는 걸까.
“엄마!”
엠마가 호들갑스럽게 뛰어들었다. 수잔나는 깊어가던 상념에서 깨어났다.
“해가 뜨기 전에 뭘 좀 먹으면서 쉬질 않구. 벌써부터 뛰어다니다가는 저녁까지 못 버텨.”
“알아, 알아. 근데 우리 집에 누가 벌써 바구니를 갖다 주고 갔어.”
양손으로 끙끙거리며 가지고 온 바구니를 엠마가 내밀었다. 해도 안 뜬 시각에 누가 이렇게 일찍 음식을 주고 갔을까. 수잔나도 궁금해하며 바구니를 열었다.
버드나무로 짠 소박한 바구니 안에 든 건 몰랑몰랑한 흰 빵과 우유, 달걀과 잼이었다. 수잔나는 더 의아해졌다. 다른 음식들은 수확제에 교환하는 흔한 것들이지만 잼처럼 손이 많이 가는 걸 누가 만들어서 줬을까.
바구니에는 음식을 놓고 간 사람의 이름이 없었다. 알아볼 수 있는 표식도 없었다.
“누가 놓고 갔는지 혹시 봤니?”
“아니이. 똑똑 노크하는 소리에 나가 봤는데 아무도 없었어. 밖도 깜깜했구.”
“누굴까…….”
수잔나는 궁금해하면서도 일단 바구니의 음식을 정리했다.
올해에는 통 크게 잼을 많이 만들어서 나눠 주기로 한 이웃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녀에게 구애하는 남자 중 하나일 수도 있고.
수잔나는 아이까지 있는 과부였으나 젊다. 번듯한 제 가게도 있고 외모도 눈에 띄었다. 그녀에게 구애하는 남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누구든 간에 나중에 자기라고 말해 주겠지.’
고민을 접은 수잔나는 다시 빵을 구울 준비를 했다.
* * *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덧 겨울이었다.
레젠에서는 늦가을 날씨에 치러지는 수확제가 발트란에서 겨울 날씨에 치러졌다. 그사이에 눈도 두어 번 내렸다.
수확제가 열리는 오늘은, 로젤린이 프레데릭의 파트너로 참석하는 날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의 규모가 있는 도시에는 대개 대지와 풍요의 여신 신전이 있다. 여신의 신전에서 영주는 새벽하늘이 밝아옴과 동시에 제를 시작했다.
태어난 지 한 달 이내의 어린 양과 그 해의 가장 풍성한 수확물을 제물로 바치는 게 긴 의식의 시작이었다. 사람들은 올해도 무사히 수확하였음을 기뻐하고 내년의 수확을 축원했다.
로젤린은 신전에서 열리는 제례까지 참여할 필요는 없었다. 신의 앞에서 맺어진 아내도 아닌 임시 파트너를 대동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본래 해가 떠 있을 시각에는 금식하는 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예외는 있는 법이고, 올해의 로젤린은 이 예외에 포함되었다.
“식사는 하셨나요?”
“먹고 왔습니다.”
치장을 도와주기 위해 온 이사벨에게 인사했다.
저녁의 대연회를 위해서는 오후부터 치장을 해야 한다. 하루 종일 굶은 빈속으로는 힘들다. 덕분에 이른 시간에 간단하게나마 끼니를 때웠다. 로젤린은 오전 중에 아이기스 나이트로서의 행사를 끝내고 바로 대공저로 와서 씻었다.
현재 그녀는 대공저에 있었다. 기숙사의 방은 분주한 치장을 하기에도 좁고, 식사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
로젤린이 임시로 머무르고 있는 손님방으로 이사벨 일행이 들어왔다. 치수를 잴 때도 보았던 조수들 외에 낯선 어린 소녀도 함께 대동했다.
“이 애는 제 큰딸인 에밀리아예요. 메이어 경의 옷을 만든다고 하니 꼭 데려가 달라고 하질 뭐예요.”
“안녕하세요! 아버지랑 어머니께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긴장으로 얼굴을 붉힌 에밀리아가 씩씩하게 인사했다. 엠마 또래의 소녀였다. 로젤린도 웃으며 에밀리아에게 인사했다.
“안녕.”
“저도 나중에 메이어 기사님처럼 여자 기사가 될 수 있을까요!”
“얘, 에밀리아. 갑자기 웬 말이니.”
불쑥 튀어 나간 소녀의 말에 이사벨이 낮게 타일렀다. 로젤린은 무례하다고 할 수도 있을 에밀리아의 태도에 개의치 않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습니다. 제 조카가 딱 에밀리아 또래라서 더 귀여워 보여요.”
“어머, 조카 분이 있으셨어요?”
“레젠에 있습니다.”
로젤린은 허리를 굽혀 에밀리아와 시선을 맞추었다. 동그랗게 뜬 눈동자는 라울과 같은 색깔이었다.
“네가 할 수 있다고 믿고 최선을 다 한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잔잔히 격려하는 말에 에밀리아의 볼이 붉어졌다. 우렁차게 외치는 감사 인사에 로젤린도 웃음으로 대답해 주었다.
대공저에 들어오는 순간까지 영 내키지 않던 마음이 에밀리아와 대화하며 풀어졌다. 이 어린 소녀에게 열심히 하라는 격려를 한 주제에 마냥 언짢아할 수는 없지 않은가.
프레데릭의 파트너로 동행하는 것 또한 자신의 임무다. 로젤린은 스스로를 타일렀다. 여자이기 때문에 발탁된 임무이지만, 동시에 기사가 아니었다면 발탁되지 않았을 임무이기도 하다.
그러니 자신의 일을 해야 할 때였다.
“자, 그럼 드레스부터 입어 볼까요.”
이사벨이 가볍게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조수들이 가져온 짐 가방 중 가장 큰 것을 열었다. 구겨지지 않도록 드레스의 사이즈에 맞추어서 특별히 제작한 옷가방이었다.
드레스는 로젤린이 골랐던 은빛이 감도는 잿빛 드레스였다.
먼저 속옷 위에 속치마를 입었다. 위에 입을 내의는 드레스보다 짙은 재색이었다. 몸에 밀착하는 내의는 손등까지 감쌌다. 중지에 거는 고리와 손등을 감싸는 천이 연결되는 구조였다.
“보통은 이 고리까지 장식을 하지만요. 너무 끼이거나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로젤린이 수수한 걸 원했기에 고리도 작은 무늬만 넣은 밋밋한 검은색이었다. 로젤린은 팔을 돌리면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이사벨이 치수를 정확히 재어 불편한 곳은 없었다.
이제 드레스를 입었다.
레젠에서는 목과 어깨 언저리, 혹은 팔목의 맨살을 드러내는 드레스가 유행 중이었다. 그에 비하면 발트란은 확실히 유행에 뒤처졌다. 이사벨이 가지고 온 드레스도 목 끝까지 꼼꼼히 감싸는 디자인이었다. 덕분에 목과 가슴에 남은 흉터도 완전히 가려졌다.
드레스의 선은 로젤린의 아름다운 몸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며 허리까지 흘렀다. 허리부터 부채꼴로 퍼지며 바닥까지 끌리는 치맛자락의 주름을 이사벨과 조수들이 섬세히 가다듬었다.
소매는 팔꿈치까지였고, 팔꿈치부터 긴 소맷자락이 허벅지까지 늘어졌다. 하나로 묶은 소맷자락의 끝은 진주로 장식했다.
“허리가 날씬하셔서 끈을 많이 조일 필요가 없으니 다행이에요. 드레스에 익숙하지 않은 분이 허리를 너무 조였다가는 호흡 곤란으로 기절하시는 경우도 많거든요.”
이사벨은 허리끈을 직접 묶으면서 설명했다. 로젤린이 10년 전까지 평범한 귀족 아가씨처럼 드레스를 입는 생활을 했다는 건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는 듯했다. 굳이 정정할 이유는 없었다. 로젤린은 “그렇군요.”라는 대답만 했다.
허리에 둥근 고리로 이어진 허리띠를 둘렀다. 목에도 얇은 프릴들이 촘촘히 엮인 러플을 덧대고 한 줄로 된 목걸이를 걸었다.
엷은 색상의 드레스에 사파이어라는 포인트가 잡혔다.
“어머나.”
우선 드레스만 입은 로젤린의 전신을 한 발자국 물러서서 본 이사벨이 감탄했다.
“우와, 정말 예뻐요!”
에밀리아도 손뼉을 쳤다. 조수들도 감탄의 말을 한 마디씩 던졌다.
“소화하기 힘든 색깔이라 자칫 밋밋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너무 잘 어울리세요!”
호들갑스럽기까지 한 이사벨의 칭찬에 로젤린도 전신 거울을 보았다. 짧은 머리칼에 성장(盛粧)한 드레스라는 묘한 조합의 여자가 거기에 있었다.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가 대답했다.
“이사벨 씨가 좋은 드레스를 만들어 주신 덕분입니다.”
로젤린은 잘 실감하지 못했지만 이사벨 일행의 감탄은 거짓이 아니었다. 로젤린의 육체는 훈련으로 잘 단련되어 있는 균형적인 체형이다. 불필요한 근육도, 지방도 일절 없었다. 탄력 있고 늘씬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몸의 라인은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항상 갑옷을 입고 다녔기에 드러나지 않았던 그녀의 매력이었다.
이사벨은 더욱 신이 난 얼굴로 화장 도구를 꺼냈다. 로젤린이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사이에 붓이 얼굴 위를 바쁘게 오갔다.
“에밀리아, 3번 분통을 가지고 오렴.”
에밀리아도 부지런히 잔심부름을 하면서 그녀와 조수들을 도왔다.
화장을 끝내자 조수가 가발을 가져왔다.
“메이어 경의 본래 모발과 동일한 가발은 찾지 못했어요. 직접 염색을 해도 색이 통 나오질 않더군요. 너무 파랗게 되거나 너무 검게 되거나……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어차피 오늘 몇 시간만 쓰게 될 가발이다. 신경 쓰지 말라고 대답하려던 로젤린은 멈칫했다. 프레데릭의 파트너로 옆에 서는 것처럼, 그녀를 치장시키는 건 이사벨의 임무다. 다른 사람의 임무를 생각 없이 폄하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머리색이 묘하다는 말은 옛날부터 종종 들었습니다.”
“이렇게 깊은 색의 머리카락인데 가발로 가리게 되다니 많이 아쉬워요.”
이사벨은 안타까워하며 로젤린의 머리에 망을 씌웠다. 가발을 고정하고 부드러운 컬을 넣었다. 로젤린은 미혼이기에 머리를 완전히 틀어 올리지 않았다. 절반만 틀어 올린 머리칼에 머리꽂이를 꽂고, 베일을 걸었다. 등허리까지 길게 흐르는 머리카락 위를 나비의 날개처럼 얇은 베일이 감쌌다.
머리단장이 끝나자 담비의 털로 장식한 망토를 어깨에 둘렀다. 향수는 색조가 옅은 드레스와는 정반대로 진한 레드로즈 향을 뿌렸다.
“구두는 단화와 굽이 있는 것, 2켤레를 준비했습니다. 대공 전하께서도 무척 장신이시니 굽이 있는 구두를 신으셔도 두 분이 잘 어울리실 거예요. 굽이 불편하시면 편하게 단화를 신으셔도 되고요.”
“그럼 단화를…….”
반사적으로 편한 단화를 달라고 하려던 로젤린은 생각을 바꿨다.
이사벨은 드레스를 처음으로 입는다고 여긴 로젤린을 배려하기 위해 단화를 가져왔다. 로젤린도 단화가 편했다. 그렇지만 드레스에는 당연히 굽이 있는 구두를 신어야 한다.
기왕 임무에 충실하자고 결심을 굳혔으니 구두까지 제대로 된 성장을 갖춰 주는 게 옳다.
“구두로 주십시오. 넘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구두를 신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완벽히 성장한 로젤린을 보는 이사벨의 얼굴은 또다시 황홀해졌다. 그녀의 작품을 뿌듯해하기도 하고 로젤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기도 하는 얼굴이었다.
“메이어 경이 오늘 하루만 드레스를 입으신다는 게 너무나 아까워요.”
로젤린도 거울을 보았다. 색조가 옅은 화장과 드레스는 그녀의 짙은 머리칼과 드문드문 포인트를 준 유색 보석에 아주 잘 어울렸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무심코 숨을 들이켰다.
10년의 세월을 껑충 뛰어넘은 귀족 아가씨가 그곳에 있었다. 아버지가 빚을 지지 않았다면 여전히 드레스를 입고 치장한 채 행복하게 웃고 있었을 귀족 아가씨가.
가슴 안쪽이 울컥 치밀었다. 눈가가 뜨겁게 욱신거렸다.
그녀가 잃어버렸던, 그리고 버려야 했던 미래의 모습을 강제로 발견했다.
“메이어 경? 몸이 안 좋으신가요?”
침묵이 길어졌다. 이사벨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로젤린은 눈을 한 번 꾹 감고 갑작스럽게 치민 격한 감정을 삭이려 노력했다. 여기에서 눈물을 흘리기라도 했다가는 이사벨이 공들여 해 준 화장을 망치게 된다.
‘눈물 같은 건 10년 전에 다 말랐으니까.’
천천히 심호흡을 몇 차례 하자 마음이 완전히 가라앉았다. 로젤린은 가볍게 웃었다.
“제가 아닌 것 같아서 많이 놀랐습니다. 예쁘게 꾸며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사벨 씨.”
“무슨 말씀이세요. 갑옷을 입으신 것도, 드레스를 입으신 것도 모두 메이어 경의 모습인걸요.”
이사벨도 곧 굳었던 표정을 풀며 미소로 대답했다.
“슬슬 대공 전하께서 도착하실 시간이 되었네요. 나가서 기다릴까요?”
“예? 전하께서 직접 오십니까?”
“물론이죠. 가엔라인 경은 자택에서 출발하셨으니 연회장 밖에서 만났지만 오늘은 대공저까지 직접 오셔서 에스코트하겠다고 몇 번이나 말씀을 하셨는걸요.”
치장하는 중에는 미처 떠올리지 못했지만, 자신은 곧 드레스를 입고 프레데릭을 만나야 한다.
가슴 안에, 방금 전과는 다른 색의 감정이 퍼졌다.
‘……뭐지.’
로젤린은 무심코 심장 위에 손을 그러모았다. 두근두근두근. 조금씩 뛰기 시작하는 심장의 박동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메이어 경과 비슷한 색으로 전하의 예복도 새로 맞췄어요. 아, 전하의 재봉사는 제가 아닙니다.”
가슴 위에서 손을 뗐다. 심장의 박동이 이제 손끝이 아니라 가슴으로 직접 느껴졌다. 로젤린은 숨을 들이켜며 태연한 척 가장했다.
“설마 상당히 독특한 재질로 만든 털 망토가 그 재봉사 분의 작품입니까?”
“보셨군요, 닭 털 망토!”
이사벨이 웃음 지었다.
“전하가 아닌 다른 사람이 걸쳤다면 더 괴상한 모양새가 되었을 거예요. 그럭저럭 소화가 가능한 것도 전하쯤 되는 분이니까 가능하지 않을까요.”
“저도 봤어요! 막, 전하께서 이만큼 두 배로 커지신 것 같았어요!”
에밀리아가 대화에 끼어들며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그 망토는 확실히 웃기다. 우스운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조금 진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잡담은 나중에 하고 이제 정말 나가요. 전하께서 기다리시겠어요.”
어느덧 창밖은 어둑어둑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로젤린은 이사벨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로젤린은.
“……전하.”
진정되었다는 느낌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손님방 밖의 복도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프레데릭의 뒷모습만으로도 드레스 안에 꽁꽁 감싸인 심장에 기이한 색상의 감정이 번졌다. 로젤린은 그 감정의 색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프레데릭이 등을 돌렸다.
프레데릭은 십수 년 동안 수확제의 제례를 올렸다.
선대 슈벤하임 대공이 죽기 전에는 후계자로서 보좌했고, 현재는 영주로서 제례를 진행한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례가 지겨워서 몸부림이 쳐질 정도인 건 올해가 처음이었다.
‘로젤린의 드레스…….’
그 단어 하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집중이 한순간에 풀어진다. 몇 차례 실수할 뻔도 했지만 다행히 몸에 익은 습관이 불상사를 방지했다.
한나절 동안 지속된 제례의 마지막은 어린 양의 피를 대지에 뿌리는 것이다. 그전에는 신관의 길고도 긴 축원이 이어진다. 제례에 처음으로 참석하였던 때에는 졸음을 참느라 죽을 지경이었다.
금식 시간 동안 평민은 몰래몰래 간식을 먹는다. 오히려 내내 굶주리는 건 제례에 얼굴도장을 찍고 있어야 하는 귀족이었다.
가끔씩 들려오는 꼬르륵 소리를 배경으로 한 긴 제례가 마침내 종료되었다.
“올해도 노고가 크셨습니다, 영주님.”
신관장이 양손을 가슴 앞에 교차하는 신관의 인사를 프레데릭에게 했다. 정식으로 한 해의 업무가 끝나려면 두어 달 남았으나 신관장과 공적인 업무로 만나는 건 수확제가 마지막이다.
신관장의 방은 십수 년 전 처음 보았을 때와 똑같이 소박했다. 앞으로도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프데데릭도 신관장에게 적당히 인사했다.
“올 여름에 비가 많이 와서 걱정이었는데 그럭저럭 평년 수준의 수확이라 다행입니다. 여신의 은총에 감사합니다.”
백발이 성성한 신관장이 주름진 입술을 오물거리며 웃었다.
과거에는 신전의 위세가 왕과 황제의 권위를 능가하던 적이 있다. 현재는 신전의 권위가 많이 축소되었으나 일반 서민에게는 여전히 경배의 대상이다. 영주도 쉽게 대할 수 없는 위치였다.
게다가 현 발트란의 신관장은 나이도 무척 많았다. 거의 조모뻘인 신관장의 앞에 설 때마다 프레데릭은 자신이 어린아이로 되돌아간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오늘도 신관장이 앞에서 호호 웃고 있으니, 괜히 켕겼다.
‘이 할머니가 또 왜 이러신담.’
이유 없이 불안한 마음을 아는 것처럼 신관장이 정곡을 찔렀다.
“오늘 제례 때 실수를 하셨지요? 총 8번이었습니다.”
“……보셨습니까.”
“늙은이가 눈이 어둡지만 평생을 바쳐 온 의식입니다. 아주 약간 삐걱거리는 것도 금세 알아볼 수 있답니다.”
“송구합니다.”
실수는 실수였다. 이런저런 변명을 붙일 것도 없이 프레데릭은 깔끔하게 사과했다.
신관장의 눈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저는 정치는 모릅니다. 신관이 정치를 알아서도 안 되지요. 하나 영주님은 자신의 과실을 사과할 줄 아는 분이시기에, 영주님이 큰 자리에 오르신 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과오를 똑바로 보기는 어렵다. 그것을 인정하고 사과하기는 더 어렵다.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의 위에 있는 계층인 귀족이 갖추기 어려운 미덕 중 하나였다.
프레데릭은 그것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얼굴에 금칠을 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전의 재정 확충이 필요한가요?”
짐짓 능청스럽게 대꾸하자 신관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신전에 기부하시는 건 언제나 환영이지요.”
“신관장님의 취향에 맞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농담을 주고받는 와중에도 프레데릭의 마음은 대공저로 날아가고 있었다. 드레스. 로젤린의 드레스.
오랜 세월의 연륜이 쌓인 노인은 예리하게 그 마음도 알아챘다.
“어딘가에 꿀단지라도 숨겨 두신 듯한 얼굴이군요.”
프레데릭은 뜨끔했다.
“오늘의 실수가 꿀단지 때문일지도 모르니, 영주님을 오래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마침 어젯밤에 점을 쳐서 영주님을 붙잡았답니다.”
“제 점을요?”
“제례를 준비하던 중에 문득 길하지 못한 예감이 들었지요.”
신관, 특히 신관장의 예감은 단순한 예감이 아니다. 신관의 영혼은 마계를 연구하는 마법사처럼 신계의 끝자락에 닿아 있다.
신관에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는 건 높은 확률로 위험이 닥치리란 뜻이다. 긴장하게 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그 긴장은 자기 자신을 방어하거나 지킬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해당된다.
프레데릭은 긴장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듣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다. 들어도 위험을 피할 의지가 없었다. 그는 단지 신관장에 대한 예우로서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뜨거운 것.”
“뜨거운 것이요?”
“예, 뜨거운 것을 조심하십시오.”
신관의 점은 대개 애매모호하다. 미리 들어도 완벽히 해석하는 경우는 드물고, 겪고 나서야 뜻을 이해하게 된다. 그에 비하면 오늘 신관장의 점은 비교적 명확한 축에 속했다.
“시기는 언제입니까.”
“글쎄요. 미래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니 영주님이 어떻게 행동하시느냐에 따라 시기 또한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모호한 대답이다. 프레데릭은 피식 웃었다.
“당장 가까운 날에 겪을 일의 조언은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대연회에서 제가 과식한 나머지 배탈이 난다던가, 하는 내용이요.”
“흐음.”
신관장이 잠시 프레데릭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천천히 들어 올린 그녀의 손이 한참 위에 있는 그의 입가에 머물렀다.
“입조심을 하셔야 할 것 같군요.”
“역시 배탈을 조심해야 하는 거군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조용한 미소가 신관장의 얼굴에 어렸다. 딱 ‘손자를 보고 웃는 할머니’라는 느낌이라 왠지 프레데릭은 얼굴이 간질간질해졌다.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하직 인사를 했다.
“귀한 조언도 들었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잊지 않고 잘 새겨 두겠습니다.”
번드레한 거짓말이다. 경험과 연륜이 풍부한 신관장은 그의 거짓말을 알고 있을까. 예감도 없고 점을 칠 수도 없는 프레데릭으로서는 사람의 속마음을 알 수 없었다.
신관장도 웃으면서 그를 배웅했다.
“부디 평온한 하루가 되실 수 있기를.”
대지와 풍요의 여신 신전에서 내성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대공저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옷 한 벌을 갈아입기 위해 들렀다가 대연회가 열리는 홀까지 돌아가기엔 번거로운 길이다.
이제까지 수확제에서 프레데릭은 신전에서 백색 제의를 갈아입고 바로 홀로 직행했다. 오늘도 따로 마련된 방에서 단장을 끝냈으나 마차의 말머리가 향하는 곳은 대공저였다.
“내 예복을 로젤린의 드레스와 맞췄다고 했지? 예쁘겠지?”
마차 안에서 다섯 번째로 반복되는 질문이다. 라울은 지겹다는 표정도 숨기지 않고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이사벨의 말로는 기본 색상은 잿빛이지만 훨씬 옅어서 은색에 가깝다고 합니다.”
“하하.”
프레데릭이 기대감 어린 얼굴로 턱을 쓸었다.
라울은 그 점이 좀 이상했다.
‘특별히 신경 쓰시는 사람이 메이어 경도 아니질 않나. 왜 드레스를 기대하시는 건지.’
풀리지 않는 오해 속에 마차는 대공저로 죽죽 나아갔다.
프레데릭은 본래 재색이 잘 받지 않는다. 재색을 기본으로 예복을 맞추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프레데릭에게 잘 어울릴 재색을 뽑기 위해 그의 재봉사는 자신의 영혼까지 탈곡시켰다.
성과는 훌륭했다. 로젤린과 비슷하나 대조적으로 검은색에 가까운 재색은 프레데릭과도 조화가 좋았다. 가끔씩 괴악한 방면으로 재능을 발휘하긴 하나, 프레데릭의 재봉사는 훌륭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프레데릭은 낯선 색깔의 예복을 내려다보고, 포마드로 넘긴 머리칼을 괜히 쓸어 넘기기도 하면서 로젤린의 드레스를 상상했다.
‘나란히 서면 잘 어울릴까.’
한편으로는 남자가 여장을 했다는 구설수에 오르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런 소리를 하는 놈은 내버려 두지도 않을 테지만.’
로젤린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처리하면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자기 자신을 지키지 않는 남자는, 처음으로 지키고 싶은 여자 - 남자라고 착각 중이지만 - 가 생겼음을 자각하지 못했다.
마차는 이윽고 대공저에 도착했다. 빠르게 지는 겨울 해가 서쪽 하늘로 넘어간 직후였다.
“로젤린의 차비는 다 끝났나?”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로젤린이 있을 손님방으로 향했다. 집사가 종종 걸음으로 따라오며 대답했다.
“아직 메이어 경은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아니,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지.”
바로 앞에서 직접 기다리겠다는 말에 집사는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곧 하녀가 하루 종일 굶은 배를 달래 줄 초콜릿 음료를 가지고 왔다. 길게 이어지는 제례에 좀 피곤하기도 했던 프레데릭은 달게 초콜릿을 마셨다.
초콜릿을 다 마시고 한참 복도를 서성거리다가 창밖의 구경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두런두런 대화 소리가 넘어왔다. 그사이에서 그가 가장 듣고 싶어 하던 목소리가 있었다.
“……전하.”
프레데릭은 급히 등을 돌렸다.
그리고 말을 잃었다.
로젤린이 그의 앞에 있었다.
“전하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
“아름다우십니다 메이…….”
“출발 준비를 바로 할…….”
주변의 대화들은 한마디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저 의미 없는 소음이 되어 귓가에서 웅웅거릴 뿐이었다.
“전하?”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는 로젤린의 목소리만이 닿았다.
드레스를 입고 화장까지 한 로젤린의 모습을 수없이 상상했다. 중성적인 얼굴이라고 해도 골격이 남자일 테니 어울리지 않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체구가 늘씬한 로젤린이니 남자라는 걸 모를 정도로 잘 어울릴 거란 생각도 했다.
어느 쪽이든 자신의 눈에는 좋을 것이다. 그런 기대감이었다.
모두 틀렸다.
로젤린은, 아름다웠다. 프레데릭은 이 단순한 한마디의 감상 이외의 것을 떠올리지 못했다.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열이 있으십니까?”
이마 근처로 다가오는 손의 기척에 프레데릭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로젤린의 손은 여전히 거칠게 단련된 무인의 손이었다.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로젤린이 맞다는 걸 새삼스럽게 인식했다.
정말 로젤린이었다.
“아…… 그게 음…….”
언제나 매끄럽게 굴러 가던 혀가 몹시도 둔했다. 겨우 트인 말문은 말을 갓 배우는 아기처럼 중심을 못 잡고 버벅거렸다.
“그러니까…….”
로젤린은 조용히 선 채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는 검은색 눈동자를 홀린 것처럼 바라보며 간신히 목소리를 밀어냈다.
“……예쁘군.”
말을 하면서도 고작 예쁘다는 말 한마디밖에 못하는 자신의 어휘 능력이 저주스러웠다. 정말이지, 예쁘다는 그 한마디 이외에는 생각이 나지도 않았다. 어떠한 찬사를 붙여도 부족할 것만 같다.
잠깐 그를 올려다보던 로젤린은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감사합니다.”
프레데릭의 심장이 덜컹했다.
생각을 해 보면 남자에게 예쁘다는 말은 결코 칭찬이 아니다. 더욱이 검투사로 있을 때에도 외모나 체구 때문에 고생이 많았던 로젤린이다. 듣기만 해도 짜증 나는 표현일 수도 있다.
로젤린에게 예쁘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 욕일 수도 있다.
이런 결론을 내리자 이번에는 당황해서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로젤린도 좋아서 여장을 한 건 아니지 않겠는가.
내뱉은 말을 쓸어 담을 수는 없겠지만 수습은 해야 한다. 프레데릭은 어색하게 웃었다.
“드, 드레스가 예쁘다고.”
“예.”
말투는 변함이 없었지만 가지런히 앞으로 모으고 있는 로젤린의 손끝이 움찔했다. 프레데릭은 더 당황했다. 아예 예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나?
옆에서 듣던 라울과 이사벨은 황망한 얼굴이 되었지만 거기까지는 못 봤다.
“네가 예쁘다는 게 아니라, 예쁜 드레스에 잘 어울린다는 뭐, 그런 뜻이라고 할까. 너는 예쁜 게 아니라 잘생겼고, 그래. 잘생긴 거지 예쁜 게 아니야. 예쁜 건 드레스야. 드레스.”
정말이지 프레데릭은 최선을 다 했다. 예쁘다는 말의 여파를 지우기 위해서 횡설수설 내뱉을지언정 최선을 다 했다. 그러면서도 생각했다.
‘예뻐. 진짜 예쁘다…… 초상화로 남겨 두고 싶은데 몰래 그려도 될까? 또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려면 몇 달을 더 기다려야 하지? 매일매일 대연회가 열리면 좋겠는데.’
라울이 등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속닥거렸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응?”
“닥치고 얼른 마차에나 타세요! 더 이상 헛소리는 하지 마시고!”
이렇게 최선을 다 하고 있는데 웬 헛소리라는 건지.
라울에게 할 말은 많았으나 일단 이 횡설수설 되는 대로 뱉어 버린 말의 마무리는 해야 했다. 로젤린은 한숨을 한 번 쉬더니 프레데릭이 무슨 말을 하든 그냥 듣기만 하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마무리를 고민하던 프레데릭의 시선이 문득 로젤린의 흉부에 닿았다. 자연스러운 곡선이 진짜 여자의 흉부 같다. 그 아래로 이어지는 잘록한 허리의 선도, 부채꼴로 퍼지는 드레스 안으로 감추어졌을 풍만한 엉덩…….
‘거기까지.’
더 이상 상상하다간 위험하다. 프레데릭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드레스가 예쁘다고. 가슴도 딱 젖가슴이라는 느낌이 드는 게 훌륭하군. 풍만한 라인이 아주 괜찮아. 평소에는 납작하다고만 생각을 했었거든. 안에 뭘 넣은…….”
“전하!!”
기겁한 라울이 외쳤으나 이미 주변에 있는 모두의 귀에 접수된 후였다. 당연히 로젤린에게도 귀가 있다.
로젤린이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대공 전하.”
표정은 웃고 있는데 목소리가 살벌하다.
“왜, 왜 부르나?”
왠지 등골이 오싹했다. 프레데릭은 반사적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가 물러선 만큼 로젤린이 가까이 다가왔다.
“참는 것도 한두 번입니다.”
“그, 그래. 뭔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면 병나지.”
“가슴을 만지셨을 때 한 번, 키스를 하셨을 때 한 번, 목욕하고 가라고 하셨을 때 한 번. 굵직한 것만 총 세 번입니다. 기분이 언짢았던 자잘한 건은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예, 뭐. 사소한 것들이니 참고 넘겨도 됩니다. 그런데 저는 정말 못 참거든요. 워낙에 좆같은 놈들이 덤벼들었던 세월이 길어서요. 강간 미수까지 겪고 보니 무조건 세게 나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가, 강간 미수라니?! 내, 내가? 뭘?”
로젤린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반사적인 대꾸만 하던 프레데릭은 기겁했다. 아니, 그전에 강간 미수라니? 어떤 쳐 죽일 놈이 감히!
“그러니까 이건 정당한 보복입니다.”
프레데릭이 ‘보복’이라는 말뜻을 미처 이해하기도 전이었다.
“컥!”
순간 로젤린이 성큼 그의 품으로 뛰어드는가 싶더니 복부에 막대한 충격이 치달았다. 단숨에 무릎으로 프레데릭의 배를 찍어 올린 로젤린은 비틀거리며 허리를 굽히는 그의 등에 재차 타격을 주었다. 펄럭거리는 소맷자락이 그의 옆얼굴을 후려갈긴 건 부가적인 효과였다.
“억!”
팔꿈치로 등뼈를 쾅 내려찍힌 프레데릭은 비명도 제대로 못 지르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이유도 모르고 처맞은 아픔보다 의문이 더 컸다. 왜? 왜? 왜?
고통으로 경련하는 그의 머리 위로 로젤린의 외침이 떨어졌다.
“잘라! 자르라고! 자기 부하 성희롱이나 하는 추잡한 새끼야!!”
쾅!!
로젤린이 씩씩거리며 도로 들어간 손님방의 문이 요란하게 닫혔다. 이사벨도 허둥지둥 그녀의 뒤를 따라 손님방으로 들어갔다.
프레데릭은 억울해서 죽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 로젤린이 자신의 말을 또 성희롱으로 받아들인 건 알겠다. 하지만 예쁘다는 발언을 수습하기 위한 거였는데. 이번만큼은 너무 억울했다.
무작정 라울의 바지 자락을 붙잡았다.
“……라울, 남자끼리 여장하면서 가슴에 뭘 넣었는지 물어보는 게 성희롱이냐? 성희롱인가? 진짜 성희롱이었나?”
“남자끼리라니요? 바닥에 쓰러지면서 머리까지 박으셨습니까?”
너 돌았냐는 신랄한 말에 프레데릭은 서러워졌다.
“아니, 그렇잖아. 내가 옷을 벗기고 맨가슴을 보면서 뭐라고 한 것도 아니고, 여장하느라 넣은 솜뭉치 같은 걸 얘기한 건데. 이렇게까지 매도당할 발언이었나? 같은 남자잖아. 게다가 어떤 의미로는 이사벨의 기술을 칭찬한 거라고.”
그제야 라울도 프레데릭의 말을 이해했다.
배를 감싸 안고 끙끙거리며 엎드린 채 얼굴만 들고 있던 프레데릭은 기분이 조금 나빠졌다. 라울이 천하에 둘도 없는 머저리 병신을 보는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남자에게, 라울은 친절히 자비를 베풀어 주었다.
“여자입니다.”
“뭐가?”
“메이어 경은 여자란 말입니다.”
“……?”
로젤린 메이어는 여자.
프레데릭이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분의 시간이 필요했고.
“말도 안 돼애애애애애!!”
처절한 비명이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 * *
손님방으로 돌아온 로젤린은 망토의 고리부터 끌렀다. 화가 치미는 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치려다 이사벨이 정성스럽게 만든 망토라는 걸 겨우 떠올렸다. 망토는 죄가 없다. 죄가 있는 건 밖에 있는 성희롱범이지.
망토를 소파에 걸쳐 놓고 등 뒤로 손을 뻗었다. 허리를 묶은 끈을 풀려 하였으나 잘 풀리지 않고 꼬이기만 했다. 나이프로 잘라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에 이사벨이 들어왔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끈을 풀어 주십시오.”
이사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이어 놀랄 일만 당해서 지금도 매우 당황한 얼굴이었다.
“드레스를 벗으시려고요?”
“예.”
로젤린은 단호하게 말했다.
원하지 않았던 드레스를 입고 프레데릭을 만났다. 무척 놀란 얼굴로 바라보던 프레데릭이 짤막하게나마 ‘예쁘다.’라고 칭찬하였을 때 마음 안에 이상한 울림이 일었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다. 너무나 오랜만에 그녀의 가슴을 물들이는 감정이라 깨달음은 한 발자국 늦었다.
10년 전까지는 일상이었던 그것.
아름답게 치장한 드레스를 입고, 프레데릭의 앞에 서서 그의 눈길을 받고, 그의 찬사를 들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그녀 안의 가장 여린 부분이 반응했다.
모든 걸 버렸다고 여겼는데 자신의 안에는 아직도 그 시절의 약한 마음이 남아 있었다.
어째서 프레데릭이어야 했을까.
이사벨 일행의 앞에서 드레스를 입고 칭찬을 들었을 때에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씁쓸한 과거의 편린을 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프레데릭의 앞에서는…….
로젤린이 그 의미를 깊이 고민하기도 전에 프레데릭이 말했다.
‘예쁜 건 네가 아니라 드레스야.’
맥이 탁 풀렸다. 머리가 냉정하게 식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또 한 번 자신의 나약함을 버리면 된다. 10년 전에 그렇게 하였던 것처럼.
그러한 결론으로 끝낼 수 있는, 로젤린 개인의 작은 해프닝이었다. 프레데릭이 뒷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한 대 더 후려갈기고 올걸 그랬어! 빌어먹을!’
로젤린은 이를 악물었다.
좋은 주군과 좋은 인간 - 또는 남자 - 가 반드시 동일하지 않다는 걸 그녀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드레스를 벗고 돌아가시려 하나요?”
이사벨이 당황하여 물었다. 로젤린은 끈과 씨름하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마음 같아서는 대연회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기숙사로 돌아가고 싶다.
다만 프레데릭은 남자로서는 최악이지만 주군으로서는 훌륭하다. 아직까지 그녀는 프레데릭의 기사이기도 했다. 대연회에 파트너로서 참석하는 건 그녀의 임무였다.
로젤린은 괜히 이사벨에게 화내는 말투가 되지 않도록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니요, 기사단의 제복으로 갈아입고 대연회에 가겠습니다. 기사로서 제 정장은 제복이기도 하니까요.”
“제복으로요? 하지만…….”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이사벨은 쉽게 부정할 수 없었다. 오전 행사를 끝내고 바로 대공저로 왔으니 제복은 준비되어 있었다. 기사로서 모임에 참석한다면 제복을 갖춰 입는 게 흠이 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는 맞지만 그녀는 프레데릭의 파트너이기도 하다.
로젤린이 다시 끈을 쥐면서 덧붙였다.
“아까 전하가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이사벨 씨도 들으셨지요? 저는 제 가슴을 희롱하는 새, 남자 옆에서 가슴에 밀착되는 드레스는 못 입습니다!”
백 번 지당한 말이었다. 이사벨의 조수 중에서도 고개를 끄덕거리는 사람이 있었다.
이번 사태에 당혹하긴 하였으나 프레데릭을 향한 신뢰가 깊은 이사벨만 머뭇거렸다.
“전하께서 원래 그런 분이 아니신데…….”
피해자에게 제일 짜증 나는 말 중 하나가 ‘원래 가해자가 그런 사람이 아니다.’란 변호다. 참고 있던 로젤린의 눈이 세모꼴로 뾰족하게 솟았다.
말실수를 깨달은 이사벨이 허둥지둥 말문을 돌렸다.
“드레스를 벗는 건 도와드리겠습니다. 다만 제복으로 갈아입으신 후에 약간의 치장은 도와드릴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일개 개인이 아니라 프레데릭의 파트너이니 최소한 그의 얼굴에 먹칠은 하지 말아야 한다. 로젤린은 짜증을 꾹 눌러 참았다.
“자, 자. 그럼 우선 다리미부터 준비해. 에밀리아, 넌 나가서 집사님을 곁방으로 모시고 오렴.”
이사벨은 능숙하게 주변을 정리했다.
급하게 다림질한 아이기스 나이트의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본래 옅은 재색과 맞춘 망토였기에 검은색 제복 위에 걸쳐도 어색하지는 않았다. 망토의 가장자리에 덧댄 담비의 털이 짙은 고동색인 것도 어울림에 한몫했다.
이사벨은 집사에게 프레데릭의 액세서리를 부탁했다. 집사도 상황이 급하다는 건 알고 있다. 금방 장신구함을 가져왔다. 이사벨은 눈알에 루비가 박힌 사자 머리 모양 망토 브로치를 골랐다.
“전하의 액세서리가 잘 어울리네요. 다행입니다.”
기사단의 제복이 바지인 데다 로젤린이 꽤 장신이다. 남성용 액세서리를 착용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았다.
화장은 지우지 않고 틀어 올린 가발만 풀었다. 가발을 왼쪽 어깨 어림에서 느슨하게 묶어 가슴 앞으로 흘러내리게 했다. 부드러운 컬로 말린 머리칼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겨우 두 번째 단장이 끝났다.
그때까지 로젤린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너무 화가 난다. 후려갈겼으면 적어도 시원한 맛은 있어야 할 텐데 짜증만 더 쌓일 뿐이었다.
한편 프레데릭은 넋이 나가 있었다.
메이어 경은 여자란 말입니다. 메이어 경은 여자란 말입니다. 메이어 경은 여자란 말입니다. 메이어 경은 여자란 말입니다. 메이어 경은 여자란 말입니다. 메이어 경은 여자란 말입니다. 메이어 경은 여자란 말입니다…….
그 한마디가 머릿속에 쌓이고 쌓이고 쌓여 갔다. 꾸역꾸역 쌓이다 못해 폭발해 버릴 것 같다.
‘……차라리 폭발해 버리면 좋을 텐데.’
로젤린이 여자라는 진실이 폭로 - 숨긴 적도 없었지만 - 되었고, 로젤린이 여자라는 뜻을 간신히 이해했다.
이해하자마자 로젤린과 만난 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 뭐가 이렇게 단단하냐? 아, 가슴 보호대 같은 걸 착용했나?
- 본부로 귀환하기 전에 대공저의 내 욕실에서 씻고 가지?
- 가슴도 딱 젖가슴이라는 느낌이 드는 게 아주 훌륭하군.
“으아아아악!”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발버둥을 치는 프레데릭을 라울이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도 속이지 않은 걸 어쩌다 자기 혼자 착각해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했단 말인가. 그러게 서류는 제대로 볼 것이지.
한심하다 못해 동정심까지 생기고 있는 마음과는 별개로 일은 해야 한다.
“프레데릭 님을 드레스룸으로 모시게.”
대공저의 하인들은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는 프레데릭을 질질 끌고 갔다. 키 크고 등빨 좋으니 체중도 많이 나가는 게 이럴 때는 문제다.
재봉사가 공들여 맞춘 새 예복이 아쉽긴 하였으나 바닥에 주저앉으면서 많이 더러워졌다. 세탁할 시간도 없으니 다른 예복을 골라야 했다.
라울은 적당한 예복을 골랐다. 하인들이 옷을 갈아입혀 주는 와중에도 프레데릭은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눈앞에서 세상이 멸망하는 걸 목격한 사람이라도 지금의 프레데릭보다는 생기가 있을 것이다.
“……라울, 넌 로젤린이 여자라는 걸 알았나?”
“당연합니다. 메이어 경은 이름부터 여자 이름인데요.”
사실 연무장에서 언뜻 봤을 때는 몰랐지만 뻔뻔해지기로 했다.
프레데릭의 어깨가 쳐졌다.
“난 여자 같은 이름의 남자인 줄 알았지…….”
“딱 보기만 해도 여자가 아닙니까. 메이어 경을 남자로 착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딱 보는 게 아니라 주의 깊게 봐야 여자라는 눈치를 채지만 라울은 또 뻔뻔해졌다.
프레데릭의 어깨는 더 쳐졌다.
‘죽고 싶다……. 로젤린의 얼굴을 어떻게 보지…….’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으로 대공저를 나오니 로젤린은 벌써 마차에 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드레스를 제복으로 갈아입은 게 아쉬워지는 자신의 뺨을 후려갈기고 싶었다.
프레데릭이 착석하자 마차는 바로 출발했다.
“…….”
“…….”
바퀴가 굴러 가는 소리도 나지 않는 고급 사두마차다. 그게 더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바퀴 소리로 시끄럽기라도 했으면 이 침묵이 깨졌을 텐데.
그가 안절부절못하거나 말거나 로젤린은 창밖만 보고 있었다.
가슴 보호대는 착용하지 않았는지 봉긋한 가슴이 제복 위로 도드라진다. 꼭 가슴이 아니어도 요모조모 살펴보니 여자였다. 딱 봐도 여자였다. 돌이켜 보면 목소리도 변성기 전의 소년 아니, 진짜 여자처럼 가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동안 내내 남자라고 착각하고 있었으니.
‘어쩌지…….’
단언컨대 프레데릭의 인생에서 이렇게 혼란스럽고 말문을 잃었던 적은 없었다.
‘사과를 해야 할 텐데…….’
지금 필요한 건 무조건 자신이 잘못했다고 비는 것이다. 하나 그 ‘잘못’의 방향이 문제였다.
성희롱을 사과하여 성희롱범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느냐, 남자라고 착각했다는 걸 밝혀서 그녀를 모욕하느냐.
남자인 줄 알았다는 얘기를 듣고 좋아할 여자가 있겠는가. 분명히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자칫하면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려 한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프레데릭은 변명할 말이 없다.
진퇴양난이었다.
성희롱범이라는 이미지로 낙인찍히느냐, 로젤린을 더 화나게 하느냐.
어느 쪽이든 지옥 같은 선택지다.
“……저, 로젤린.”
“예.”
비딱하게 창밖을 보고 있던 로젤린이 자세를 바로 했다. 격식 있고 단정한 태도였으나 냉랭함이 뚝뚝 떨어진다. 우리 사이에 남은 건 공적인 관계뿐이니 쓸데없이 친한 척 말 걸지 마라, 라고 하는 듯한 싸늘한 눈빛이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살벌한 기운에 쫄아 버린 프레데릭은 어물어물 얼버무렸다. 쫄아서 존댓말을 해 버렸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가 주눅이 들어 있거나 말거나 마차는 열심히 굴러 갔다.
“전하, 도착했습니다.”
마부석의 옆에 타고 있던 시종이 문을 열었다.
프레데릭은 얼른 일어났다. 이 무거운 침묵에서 탈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로젤린을 에스코트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파트너이고 여자가 아닌가. 여자, 여자, 여자…….
그렇지만 로젤린이 먼저 그의 앞을 지나 마차에서 내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프레데릭을 부축하기 위해 팔을 내밀기까지 했다.
“내리십시오.”
“…….”
로젤린은 호위기사다. 호위기사가 주군과 마차에 동석하였을 때 먼저 마차에서 내려 주변에 위험이 없음을 확인한 후, 부축까지 하는 건 도리에 맞다. 당연한 일이긴 한데.
프레데릭은 더욱 죽고 싶은 심정으로 로젤린의 손을 잡고 내렸다.
손을 잡았다.
“앗……!”
화들짝 놀라 얼른 손을 뗐다.
“이상한 의도가 아니라, 난 그저……. 부축하는 거니까, 얼떨결에……!”
“예.”
이번에도 로젤린은 대답만 했다. 로젤린은 절대 말수가 적은 편이 아니다. 프레데릭은 그런 그녀의 지극히 사무적인 언행에 심장이 쫄릴 지경이었다.
수확제는 하루 종일 굶주리기에 대연회 전반은 우선 식사로 시작된다. 프레데릭과 로젤린은 대연회장이 열리는 홀의 통로를 걸었다.
뚜벅뚜벅.
“…….”
뚜벅뚜벅.
“…….”
한 쌍의 발소리에 또다시 침묵이 깔렸다. 로젤린은 호위기사로서 그의 몇 걸음 뒤에서 걷고 있었다. 프레데릭의 신경은 온통 뒤쪽으로 쏠렸다.
다행히 이번의 침묵은 곧 깨졌다. 프레데릭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의전관이 얼른 마중을 나왔다.
“전하, 대부인까지 납시었으니 즉시 입실하셔도 됩니다.”
두 번씩 옷을 갈아입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마리안 부인까지 참석했다는 건 초청된 모든 귀족이 다 도착했다는 뜻과 동일했다.
“아니면 휴게실에 들르시겠습니까?”
“아니, 됐다. 바로 들어가도록 하지.”
프레데릭은 대답하며 힐끔 뒤를 보았다. 입실할 때부터는 그녀를 에스코트해야 하는데 팔에 닿는 것까지 질색하면 어쩐담.
돌아보는 프레데릭과 이상한 침묵에 의아해하는 의전관을 한 번씩 바라본 로젤린은 곧 눈치를 챘다. 그녀는 말없이 프레데릭의 옆으로 다가와서 그의 팔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
프레데릭은 하마터면 묵직한 신음을 할 뻔했다. 마차 안에서부터 은은하게 감돌던 로젤린의 향수 냄새가 확 가까워지며 그를 자극했다. 이제까지 여자의 향수 같은 걸 신경 써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 이래서 라울이 이사벨에게 향수를 사다가 바치는 거구나.’
심지어 분 특유의 독특한 향까지도 감미롭다.
프레데릭이 자신의 새로운 취향을 깨닫고 고뇌하는 사이에 금방 문 앞에 다다랐다.
“대공 전하 드십니다!”
높게 외치는 시종의 목소리에 이어 정교하게 세공된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연회석을 가득 메운 귀족들의 시선이 프레데릭과 그의 파트너인 로젤린에게 일제히 꽂혔다.
귀족인 바바라마저도 그의 파트너로 연회에 처음 참석하였을 때는 엄청나게 긴장했다. 긴장한 나머지 손을 올리고 있던 그의 팔뚝을 꽉 움켜잡았었는데, 로젤린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평온한 기색을 유지하며 프레데릭과 나란히 단 위를 걸었다.
오히려 긴장한 건 프레데릭이었다. 그는 걸음을 내디디면서도 연신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 로젤린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더 늦기 전에 사과를 해야 하는데…….’
대연회장에는 수십 개의 테이블들이 놓여 있었다. 신분과 지위에 따라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던 귀족들은 프레데릭의 입실과 동시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 위의 상석에 앉아 있던 대공 일가도 마찬가지였다. 시종이 밖으로 빼낸 의자에 프레데릭이 먼저 앉고 로젤린이 나란히 옆에 앉았다. 이어 세 명의 대공 일가가 앉았다.
귀족들은 대공 일가가 모두 앉은 후에 착석했다.
단상에서는 연회장 안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프레데릭은 늘 그랬듯이 성의 없이 축사를 했다.
“오늘 하루 고생이 많았소. 시장할 테니 다들 식사부터 하십시다.”
하루 내내 굶은 사람들에게는 적절한 축사이기도 했다.
축사가 끝나자 바로 시종들이 요리를 들고 입실했다. 테이블마다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대화 소리가 들렸다.
프레데릭도 가족들에게 이번의 파트너인 로젤린을 소개했다.
“큰닭을 토벌한 공로로 아이기스 나이트를 치하하였을 때 윌리엄은 본 적이 있지? 제수인 엘자와 어머니 마리안 부인이시다.”
바바라에게 미리 들었던 구성원과 동일했다. 로젤린은 세 사람에게 차례대로 인사했다.
“아이기스 나이트의 로젤린 메이어입니다.”
직사각형의 테이블 중간이 프레데릭, 그의 양쪽이 로젤린과 윌리엄이었다. 모서리로 꺾이는 윌리엄의 옆자리는 마리안, 로젤린의 옆자리는 엘자였다. 프레데릭의 맞은편은 비어 있었다.
이 자리의 배치만으로도 현재 대공가의 권력 구도가 어떠한지 대강 짐작되었다. 프레데릭과 권력을 양분하는 윌리엄의 옆자리엔 윌리엄의 아내 엘자가 아닌 어머니 마리안 부인이다.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꼼꼼히 머리를 틀어 올린 마리안은 서른 살이 넘은 아들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젊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냉정해 보이는 인상 그대로 고개만 한 차례 까딱했다.
- 마리안 부인께는 어차피 가짜에 불과한 전하의 파트너 따위가 아니겠나. 아예 없는 것으로 무시하실 테니 그분 앞에서는 큰 실수만 안 하면 돼.
바바라의 조언은 맞았다. 마리안은 인사를 한 번 받아 주는 것으로 그녀를 향하는 모든 관심을 끊은 듯했다.
“아이기스 나이트이시라고요.”
윌리엄의 아내 엘자가 가볍게 탄성했다.
그녀는 마리안과 대조적으로 유순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소녀처럼 커다란 눈동자가 깜빡거리는 게 마치 토끼 같았다.
물정 모르는 숙녀 같은 인상이지만 엘자는 마리안 부인의 조카로 역시 아이든 백작가 출신이다. 윌리엄과 결혼한 지 8년째이지만 여태 자식이 없어 고민 중이라 했다. 로젤린은 바바라에게 들은 대공 일가의 정보를 하나씩 떠올렸다.
“그럼 일전에 있었던 마수 떼의 습격에도 출전을 하셨나요?”
“그렇습니다.”
“어쩜…….”
엘자가 입을 가리며 감탄했다. 사소한 손짓 하나마저도 그린 듯이 단정했다.
“메이어 경에게 감사드려요. 저 같은 이들이 발트란의 성벽 안에서 안온하게 지낼 수 있는 건 모두 메이어 경과 아이기스 나이트의 기사 분들 덕분이에요.”
그녀는 순수하게 감탄하고, 또 고마워했다. 바바라에게 들은 것처럼 ‘온실 속의 우아한 귀부인’이었다.
그래도 지켜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들으면 기분은 좋다. 무뚝뚝하게 앉아 있던 로젤린은 엷게 미소했다.
“저희의 임무일 뿐입니다.”
문득 옆에서 낮은 한숨이 들렸다. 로젤린은 모른 척하고 전채 요리로 나온 포타주를 스푼으로 떴다. 종일 굶은 사람들의 배 속을 부드럽게 달래 줄 수 있게끔 볶은 옥수수를 고명으로 띄운 진한 크림 수프였다.
바바라는 귀족의 식사 에티켓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지만 사양했다. 기억을 떠올리기만 하면 되니까.
처음에는 오랜만이라 다소 헷갈리긴 하였으나 곧 익숙하게 적절한 포크와 나이프를 골랐다. 당황하거나 긴장한 기색도 없이 자연스러운 에티켓으로 식사하는 그녀의 모습은 프레데릭에게 또 다른 착각을 주었다.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을까.’
훈련하기에도 바쁜 시간을 쪼개서 에티켓을 익히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고생하였는데 자신은 드레스로 갈아입은 모습을 보고 했던 말이 고작……. 또다시 죽고 싶어졌다.
문득 윌리엄이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닥거렸다.
“프레데릭 형, 이제 메이어 경이 여자라는 걸 알고 있어?”
“……잠깐만. 넌 로젤린이 여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내가 그녀를 남자라고 착각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 거냐?”
“당연하지.”
프레데릭은 미간을 꾹 누르면서 신음했다. 라울은 착각하고 있다는 걸 몰랐으니 알려 주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 자식은 알면서도.
그는 손바닥으로 입술을 가리며 윽박지르듯이 동생에게 속삭였다.
“알고 있었으면 얘기를 좀 해 주든가……!”
“안 물어봤잖아. 물어봤으면 속이지는 않았을 거라고.”
“……너, 진짜.”
형제는 서로에게만 들리게 속닥속닥 살벌하고도 우스운 대화를 이어 갔다.
“언제 알게 된 건데?”
“오늘.”
“옷 갈아입은 걸 보고?”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갈아입은 걸 보고 바로 눈치를 챘다면 적어도 말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입조심, 입조심. 프레데릭은 자신의 입을 후려갈기고 싶었다.
윌리엄이 킥킥 웃었다.
“옷 갈아입고도 몰랐다면, 대체 언제?”
“…….”
죽고 싶은 그 해프닝을 이야기해 주면 분명히 놀림감이 될 것이다. 프레데릭이 잠시 윌리엄을 노려볼 때, 마리안이 점잖은 목소리로 참견했다.
“윌리엄, 프레데릭. 이 어미가 장성한 그대들을 7살 아이들처럼 훈육해야 하나요?”
식사 중에 둘이서만 속닥거려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었다. 지당한 지적이었으므로 프레데릭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나머지는 나중에 들을게.”
“……됐어.”
프레데릭은 툴툴거리며 스테이크를 입으로 옮겼다.
엘자가 로젤린을 보며 자그마한 웃음을 지었다.
“언제 보아도 참 우애 깊은 형제분들이에요.”
“그렇군요…….”
두 형제가 정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 로젤린은 평범한 형제나 다름없는 모습이 다소 놀라웠다. 물론 대귀족인 만큼 천박하게 악의를 표출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아우와 장난스럽게 대화하는 프레데릭의 모습은 로젤린이 알지 못하던 그의 모습이었다.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으로서의 프레데릭, 대공령을 다스리는 통치자로서의 프레데릭, 여자를 대하는 남자로서의 프레데릭은 안다. 가족과 함께 있는 프레데릭은 이제 알게 되었다.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아. 왜 기사를 싫어하시는지도 모르고.’
화가 전부 풀린 건 아니다. 공적으로 남은 관계를 이행하고자 억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곁에 있으면 그가 궁금해졌다.
그를 알고 싶었다.
나무 위에서 처음으로 그를 인식하였던 것처럼.
두 시간 넘게 느긋하게 이어지는 통상의 만찬과는 달리 식사는 일찍 끝났다. 귀족들은 분분히 옆의 연회장으로 건너갔다. 본격적인 사교활동이 시작되는 ‘진짜’ 연회다.
로젤린은 단상의 프레데릭 옆자리에 앉았다. 한 단 아래의 오른편에는 마리안 부인이, 왼편에는 윌리엄 부부의 자리가 있었다.
이곳저곳 모여 서 있거나, 커튼 안쪽의 소파에 앉은 귀족들은 분주해 보였다. 어느 곳에서는 흥미 위주의 가십이, 어느 곳에서는 묵직한 의논이 오가고 있을 것이다. 윌리엄과 엘자는 의자를 비우고 단상 아래에 섞여 있을 때가 더 많았다.
심지어 프레데릭마저도 그에게 인사를 하러 오는 귀족들을 상대하느라 바빴다. 로젤린만 한가했다.
바바라의 말처럼, 정말 할 게 없었다. 옆에 앉아서 자리를 채우고 있다가 프레데릭과 대화하는 귀족이 흥미를 보이면 인사를 했다.
“아이기스 나이트의 로젤린 메이어입니다.”
이 한마디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그녀가 정말 프레데릭의 약혼녀나 연인이었다면 더욱 많은 인파에 둘러싸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가벼운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었다.
호기심의 대부분도 왜 드레스로 성장하지 않고 굳이 기사단 제복을 입고 왔느냐는 것이다. 그 질문이 던져질 때마다 프레데릭은 움찔움찔했다.
“저는 전하의 기사이기도 하니까요.”
로젤린은 또 앵무새가 되었다.
‘여기가 지난번 윌리엄 님을 뵈었던 홀이 맞나…….’
깃발들이 걸린 높은 홀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가한 고민을 했다. 홀은 대부분 모양새가 비슷비슷한 데다 들어왔던 길과 입구가 달라서 확신이 서질 않는다.
그런 쓸데없는 고민으로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 악단의 연주가 바뀌었다.
로젤린도 아는 춤곡이었다. 레젠 사교계에서 댄스 타임의 시작을 여는 춤곡이다. 발트란의 사교계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언제 돌아왔는지 윌리엄이 프레데릭에게 권했다.
“제일 먼저 영주님이 춤을 추셔야지. 안 나갈 거야?”
“……춤?”
프레데릭도 놀랐고, 로젤린도 놀랐다.
바바라에게 듣기로 프레데릭이 연회에서 마지막으로 춤을 춘 건 몇 년 전이었다. 사교계에서 첫 춤곡은 주최자가 이끈다. 영주의 내성에서 열리는 연회라면 당연히 영주의 몫이었다.
지금까지 프레데릭을 대신하여 늘 윌리엄과 엘자가 춤을 추었다. 로젤린도 바바라에게 그렇게 들어 춤은 전혀 준비하지도 않았고, 예상하지도 못했다.
프레데릭은 옆에 앉은 로젤린을 곁눈으로 살피며 고개를 저었다.
“됐다. 새삼스럽게 뭘. 네가 추지 않고?”
“어제 발목을 좀 삐끗했더니 아파. 원래 형이 시작하는 게 맞잖아.”
“춤을 안 춘 지 오래돼서 다 까먹었다.”
“그래도 왕년의 솜씨가 사라질 리가 있나. 메이어 경, 경의 의향은 어떤가?”
윌리엄의 화살은 로젤린에게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춤은 추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하려다가 되삼켰다.
“알고 있는 춤곡입니다. 저도 마지막으로 춘 지 오래되어서 보시기에 흉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만.”
“서툰 건 형이 커버해 줄 수 있으리라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해, 프레데릭?”
“로젤린이 괜찮다면…….”
겨우 프레데릭도 로젤린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에서 일어났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얼른 허리를 굽혀 망토를 정돈했다.
프레데릭이 마른침을 한 번 삼키며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출까?”
“예.”
로젤린은 그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이번에도 단답형으로 대답해서 본의 아니게 그를 또 긴장시켰다는 건 몰랐다.
두 사람이 단상 아래로 내려오자 조금씩 웅성거림이 번졌다. 프레데릭이 공개적으로 춤을 추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바바라와는 단 한 번도 춤을 추지 않았던 프레데릭이었다. 여태 새로운 파트너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귀족들도 로젤린을 돌아보았다.
윌리엄과 대화를 하느라 곡은 한참 진행이 되었다. 악단의 연주는 곡의 처음으로 매끄럽게 돌아갔다.
프레데릭이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로젤린도 어깨에 팔을 느슨히 얹었다. 몸과 몸이 밀착되고 체온이 섞였다. 서로의 속닥거림도 무리 없이 닿는 위치다.
“아까 말씀을 드렸지만 10년 만에 추는 춤입니다. 전하의 발을 밟게 되더라도 용서해 주십시오.”
“나도 네 발을 밟는 게 아닐지 걱정되니까 서로 모르는 척해 주기로 하지.”
무척 진지한 속닥거림이 오가고 두 사람은 첫 걸음을 옮겼다.
처음은 느릿하게. 서로의 시선을 마주 보고 미소하며.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유연하게 허리를 젖히며 뒷머리까지 완만한 곡선이 되도록.
당겨 안는 파트너의 팔에 몸을 실어 부드럽게 턴.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파트너와 시선을 교차하여 고개를 왼쪽으로.
한때 몸에 익었던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잘 추잖아?”
프레데릭이 겨우 그녀의 앞에서 웃으며 말했다. 로젤린은 들어 올린 그의 팔을 잡고 세 번 연이어 빙그르르 돈 뒤 다시 그에게 안겼다.
“오랜만에 도니까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프레데릭의 발을 밟거나 스텝이 꼬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분명히 딱딱하고 어색할 게 뻔했다.
로젤린은 괜히 춤을 추겠다고 한 건 아닐까, 하는 후회를 하면서도 조금씩 빨라지는 곡의 흐름을 따라갔다.
그녀는 두 사람이 춤을 출 수 있도록 멀찍이 둘러선 귀족들의 속삭임은 알지 못했다.
“훌륭하군요…….”
“남장이나 다름없는 제복을 입은 채 춤을 춘다고 해서 이상히 여겼지만 아주 잘 어울리는구려.”
“전하께서도 훤칠하시니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가엔라인 자작을 대신한 새 파트너가 누구라 하였죠?”
아이기스 나이트.
로젤린 메이어.
두 마디의 단어가 속삭임에 섞여 연회장 안을 두둥실 떠다녔다.
곡이 절정에 다다랐다.
프레데릭과 로젤린은 가까이 안고, 연이어 크게 턴했다. 두 사람이 빙그르르 몸을 돌릴 때마다 넓게 펼쳐진 망토가 허공을 수놓았다. 로젤린의 검은색 망토를 장식한 금색 자수와, 프레데릭의 푸른색 망토를 장식한 은색 자수가 섞여 흘렀다.
기사단의 제복이 검은색이라 머리칼부터 검은색 일색인 로젤린의 색이 묵직하게 시선을 모았다.
숨죽인 탄성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끝이 가까웠다.
“아……!”
한 걸음 옆으로 내디디려던 로젤린과, 앞으로 옮기려던 프레데릭의 스텝이 꼬였다. 로젤린의 실수였다. 자칫 발이 얽혀 넘어질 뻔한 순간에, 프레데릭이 그녀의 허리를 꽉 당겨 안으며 굽혔다. 반사적으로 로젤린의 허리가 길게 뒤로 젖혀지는 것과 동시에 곡이 끝났다.
하마터면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일 뻔했다. 로젤린이 감사 인사를 하기도 전에 팔심만으로 그녀의 허리를 일으킨 프레데릭이 싱긋 웃었다.
“한 곡 더 출까?”
춤곡은 경쾌하게 바뀌어 있었다. 누구든 상관없이 출 수 있는 군무다. 두 사람의 주변에도 쌍쌍이 춤을 추기 시작하는 사람들로 메워지고 있었다.
로젤린은 이번에도 단답형으로 대꾸했다. 의식하지 못한 미소가 매달린 대답이었다.
“예.”
연이어 세 곡을 추고 난 후에 물러났다.
프레데릭과 로젤린은 사람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펀치가 든 잔을 건배했다.
“얼마 먹지도 않은 식사가 소화 다 됐겠군.”
“어차피 돌아가서 야식을 또 드실 거 아닙니까?”
“정곡을 찔렸구만. 요리사의 솜씨가 너무 훌륭해서 토실토실 살찐 돼지가 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야.”
과장되게 말했다. 살찐 프레데릭을 상상해 버린 로젤린이 킥킥 웃었다.
“오늘처럼 춤을 추시면 살이 찔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잘 추시는데 왜 그동안 춤을 안 추셨나요?”
“뭐, 구애하려고 춘 거니까.”
“구애요?”
로젤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되물었지만, 프레데릭은 제 풀에 놀랐다.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의 앞에서 무심코 실수를 해 버렸다. 과거의 연애를 화제로 올린 걸 불편해하면 어쩌지.
걱정하면서 로젤린을 살펴보았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신경 쓰지 않는 것도 조금 서글프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말에 프레데릭은 더 서글퍼졌다.
“혹시 남자 분이었습니까?”
“……아니야. 난 남자 관심 없어.”
이번에야말로 당당하게 부정했다.
“여자였다, 여자, 여자. 구애한 대상은 여자였어.”
프레데릭은 여자를 거듭 강조하며 말했다.
“슬슬 혼기가 차니까 결혼은 해야겠고, 여자를 잘 꼬드길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춤이니까. 전부 과거형이다. 몇 년 전의 과거.”
과거라는 단어도 강조하였으나 로젤린은 이번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남자 분에게 구애하신 것도 아닌데 아직까지 미혼이십니까?”
“전부 다 차였으니까.”
“전부요?”
객관적으로 프레데릭만 한 조건의 신랑감이라면 제국만이 아니라 대륙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다. 가문이면 가문, 얼굴이면 얼굴, 몸매면 몸매, 빠지는 게 없다. 성격…… 은 선호의 차이가 있겠지만.
로젤린의 궁금증을 프레데릭이 곧 풀어 주었다.
“내 상황이 조금 복잡하다 보니까.”
그의 시선이 단상에 앉아 있는 마리안 부인을 가리켰다. 로젤린도 대강 이유를 깨달았다.
“대부인을 두려워하는 분들이 많았나 보군요.”
“내가 믿음직스럽지 않아 보이기도 했을 테지.”
스스로 게으르고 무방비한 모습을 보였으니 변명할 말은 없었다. 자조적으로 대꾸하는 프레데릭을 로젤린이 올려다보았다.
“아니요, 저는 전하께서 남편으로서는 훌륭하고 신뢰가 가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과 그런 일들을 겪고도 신뢰한다는 말에 프레데릭은 크게 감동했다. 그러나 감동은 좀 빨랐다.
로젤린이 중요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좋은 남편과 좋은 남자는 동의어가 아니거든요.”
“…….”
역시 변명할 말은 없었다.
프레데릭의 기분은 단숨에 꺾였으나 한편으로는 사과하기에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로젤린의 분위기도 홀에 입실할 때보다 말랑말랑 부드러워졌다.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고 빌기 위해 입술을 열었다.
“로젤…….”
“전하, 이곳에 계셨군요.”
몇몇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빌어먹을 타이밍. 프레데릭은 어색하게 담았던 말을 도로 삼키며 돌아보았다.
나이 지긋한 반백의 남자가 앞장서 있었다. 호크만 백작이다. 다가오는 사람들은 호크만 백작을 비롯하여 프레데릭을 지지하는 귀족들의 중추다. 소홀히 대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가서 쉬어도 돼.”
프레데릭은 다 비운 펀치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낮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방금 프레데릭이 그녀를 부르려다 멈칫한 건 듣지 못한 모양이다. 로젤린은 프레데릭과 대화하기 위해 오는 이들을 잠시 바라보고는 등을 돌렸다.
“오늘은 참 놀랐습니다.”
“전하께서 공식적인 행사에서 의욕을 보이시는 건 몇 년 만이군요.”
호크만 백작에 이어 루산 경이 말을 받았다. 대공 직속의 기사단 중 하나인 브류나크 나이트의 기사대장 중 한 명이다.
약간의 뼈가 서려 있는 말투다.
프레데릭은 자기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대공위에도 크게 의욕적이지 않다. 측근이라면 대강 눈치채고 있었다.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루산 경은 후자였다.
막 대공이 되었을 무렵에는 나이도 어렸고, 지지 기반도 약했던 프레데릭이다. 마리안 부인이 세력을 키우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슈벤하임의 땅과 슈벤하임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강함을 숭상한다.
프레데릭은 제국 전체에 용맹을 떨치는 장군이었다. 발트란의 위기 앞에서는 직접 칼을 뽑고 최전방에 서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지휘관으로서는 무모한 행동이나 발트란의 영주민들에게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 주시는 영주님’으로 각인되기에 충분했다.
칼을 뽑고 전선에 나서면 달라지는 사람이 정치적인 면은 한없이 무르다. 측근들은 그렇게 해석했다. 반이나마 피가 섞인 이복 아우를 숙청하는 걸 내켜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해 주니 좋은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결국 아직도 도피하고 있을 뿐이다. 자기 자신의 인생으로부터.
그를 대공위라는 끔찍한 자리에 얽어매고 있는 건 가냘픈 끈이었다. 선대 대공의 아들로 살라는 ‘아버지’의 유언과, 서로의 칼과 방패가 되어 주기로 다짐하였던 옛 친구의 약속.
전자가 없었다면 애초에 후계자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후자가 없었다면 군권을 장악하지 않아 일찌감치 마리안 부인에게 제거당했을 것이다.
‘나를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면목이 없군.’
호크만 백작과 루산 경을 선두로 하여 이 자리에 있는 귀족만이 아니라, 그를 대공으로서 지지하는 모두에게.
모든 문제는 자신이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본심이다. 단지 가슴 안에 크게 뚫린 무의미라는 허무를 외면하고 하루하루 시간을 죽일 수밖에.
프레데릭은 오늘도 자기혐오를 눌러 삼키고 게으른 통치자의 모습으로 웃었다.
“그동안 내 춤을 거절하는 아가씨들이 워낙 많아서 마음에 상처를 입었소. 오늘은 내 새로운 파트너가 춤을 받아들여 주었으니 다행이지. 춤으로 입은 마음의 상처는 역시 춤으로 치료해야 되는가 보오.”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루산 경도 표정을 풀며 실소했다.
“말씀은 그렇게 하시면서 사실은 오늘 댄스 타임을 기다리신 건 아니었습니까? 시선이 절로 꽂힐 만큼 아주 멋있었습니다.”
프레데릭과 로젤린의 춤에서 시작된 대화는 한담으로 이어졌다. 프레데릭은 둥글게 모인 사람들의 중간에 서서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하며 대꾸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호크만 백작이 넌지시 말을 붙였다.
“한데 전하, 이제 곧 한 해가 마무리됩니다. 내년에도 좋은 소식은 들려주지 않으실 겁니까?”
좋은 소식의 종류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이다. 개중 호크만 백작이 언급한 좋은 소식은 현재의 프레데릭에게 썩 내키는 화제가 아니었다.
말을 돌리고 싶었지만 주변 사람들이 먼저 동의했다.
“백작의 말이 지당합니다. 전하도 나이가 있으신데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하셔서 후계자를 보셔야지요.”
“자고로 사내는 가정이 든든해야 바깥일도 잘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마다 한마디씩 결혼 얘기를 꺼내며 부추겼다. 슬슬 결혼 문제는 포기한 줄 알았더니 연말이 다가오자 또 재촉이 시작되었다.
로젤린에 대한 마음을 깨닫기 전에는 프레데릭도 잠시 진지하게 고민하던 사안이긴 했다. 지금은 결혼이고 뭐고 로젤린에게 사과부터 하는 게 먼저지만.
프레데릭이 애매하게 침묵하는 사이 대화는 쑥쑥 진척되어 갔다. 결혼 이야기인데 당사자가 소외되어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전하의 사정도 있으시니 폐하께서 허용해 주신다면 제도 귀족가와 혼인하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과거에 프레데릭이 생각했던 것과 비슷한 내용을 벤터스 경이 언급했다. 그녀 또한 프레데릭을 지지하는 귀족이다.
“이제 곧 신년 축일과 황태자 전하의 탄신일이 비슷하게 겹치질 않습니까.”
내내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프레데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차피 그 즈음에 레젠으로 갈 예정이긴 하오.”
영아의 사망률은 높다. 아기가 무탈하게 성장하는 게 어려우니, 태어나는 것만큼 축하를 받는 게 첫 번째 생일이었다. 황제 카를 5세가 귀하게 얻은 황태자의 첫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가 곧 있었다. 신년 축일과 비슷한 시기인지라 제도에는 예년보다 큰 행사가 열릴 예정이었다.
프레데릭과 같은 지방의 대영주가 직접 제도로 상경하기에 좋은 때이기도 하다.
“상경하셨을 때 천천히 좋은 가문을 알아보시면 되겠습니다.”
그 말은 혼처를 알아보기에 좋은 때라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제각각 적당한 귀족가와 미혼 아가씨들을 후보에 올렸다.
프레데릭은 그냥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이 화제가 빨리 끝나기만을 빌며.
프레데릭이 고통스러워하는 동안 로젤린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지겹다.’
정말 할 일이 없다. 인형처럼 오도카니 의자에 앉아 있으니 시간은 미치도록 느리게 갔다. 하품을 참는 게 고역이었다.
발목을 삐었다던 윌리엄은 어느 틈인지 엘자와 춤을 추고 있었다. 두 사람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궤적을 따라 의미 없이 눈을 돌리다가 프레데릭에게로 향했다.
소파에 앉은 프레데릭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늘어나 있었다. 평소라면 일개 평기사인 그녀가 이렇게 앉아서 쳐다보고 있지도 못할 군부의 간부들과 고위 귀족들일 것이다.
쟁쟁한 인물들 사이의 프레데릭은 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워낙에 스스럼이 없는 남자였으니, 이렇듯 그의 지위를 인식시키는 모습이 낯설다.
‘지나치게 스스럼이 없으시지……. 가슴 얘기나 대놓고 하시고 말이야.’
불과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성희롱 사건을 떠올리니 다시 화가 치민다. 더 세게 후려갈길 걸 그랬다.
분노로 잠기운을 쫓고 있을 무렵에 나직한 부름이 들려왔다.
“메이어 경이라 하였나?”
로젤린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펴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비스듬히 아래에 앉은 마리안이었다.
그녀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던 마리안이 말을 거니 갑자기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 경은 꽤 반반하게 생긴 얼굴이니까 호위기사가 아니라 정부를 데리고 다니는 게 아니냐는 말을 할지도?
망할 성희롱. 어쨌거나 마리안에게 어떤 말을 들어도 화를 참을 마음의 준비는 해야겠다.
“부르셨습니까?”
공손함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마리안의 시선이 천천히 얼굴로 올라왔다.
“내 가까이에 있어 본의 아니게 경의 말을 몇 마디 들었네만, 고향이 슈벤하임은 아닌 듯한데 맞는가?”
단정한 어조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도 억센 북부 특유의 억양이 강하다. 로젤린의 나긋나긋한 제도 말씨는 발트란에서 무척 튀었다. 로젤린을 아예 지우고 있던 마리안의 귀에도 독특하게 남은 모양이다.
“레젠입니다.”
“역시……. 하면 내 한 가지만 더 묻지. 연회석에서 보니 하루 이틀 공부하여 익힐 수 있는 자연스러운 행동이 아니더군. 아이기스 나이트라고 소개 받지 않았다면 쉬이 믿지 않았을 게야.”
마리안 앞에서는 공손히 있으려던 로젤린은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바로 정곡을 찌르지 않고 넌지시 우회하며 의도한 대답을 이끌어 내는 귀족들의 화법이다. 마리안은 그녀에게 뭔가 묻고 싶은 게 틀림없었다.
로젤린도 귀족이었지만 성격상 이런 화술을 맞지 않았다. 기본 소양이니 화술도 억지로 배우긴 하였으나 10년 동안 깔끔하게 지워 버렸다.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뱉었다. 마리안이 먼저 꺼낸 화제이니 이 정도는 무례하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
“송구합니다만, 대부인. 저에게 묻고 싶은 게 있으십니까? 제가 무지하여 대부인의 말씀을 깊이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마리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군. 경은 아이기스 나이트였지.”
‘아이기스 나이트’의 자리에 천박한 평민이라거나 천한 출신이라거나 교양이 없다, 라는 단어가 들어가도 어색하지 않을 말투였다.
“경의 출신이 궁금하였을 뿐이네. 평범하게 살아온 평민으로는 여겨지지 않았으니.”
이건 로젤린도 알아들었다. 귀족이냐, 소귀족에 버금가는 부를 지니었던 귀족이냐, 라는 질문이었다.
사실대로 말해도 될지 고민했다. 자신의 출생을 특별히 비밀로 감추고 있던 건 아니다. 귀족이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으니 일부러 밝히지는 않았을 뿐이다. 빚 때문에 영지도 팔고 허울뿐인 작위만 남은 몰락 귀족이라는 게 자랑도 아니었다.
다만 상대가 프레데릭의 정적인 마리안 부인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렇지만 내가 몰락 귀족이라는 게 전하의 약점이 될 수는 없는 거겠지.’
기껏해야 호위기사가 과거에 귀족이었다, 라는 아주 가벼운 가십이 될 뿐이다. 로젤린은 짧았던 고민을 접었다.
“한때는 귀족 연감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가느다란 마리안의 눈빛이 순간 이채로 빛났다. 순식간에 사라진 그 묘한 시선을 로젤린은 알아채지 못했다.
“메이어 남작의 여식이었나?”
“……어떻게 아셨습니까?”
메이어 가는 흔하디흔한 일개 남작가에 불과하다. 레젠과 멀리 떨어진 슈벤하임에서 평생을 살아온 마리안이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가문은 절대 아니었다.
미미한 의혹이 커지려는 찰나, 마리안이 말을 이었다. 자연스러운 어조였다.
“몇 년 전, 내 하녀 중 한 명이 레젠 출신이었는데 메이어 남작가에서 일하였던 적이 있다고 하여 떠올랐을 뿐이네.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귀중품을 갖고 있었지. 듣자니 남작가가 몰락하는 와중에 그녀도 자산을 훔쳐 도망을 쳤다더군.”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메이어 남작가는 남작이 쌓은 부만큼 수많은 사용인을 고용했다. 로젤린도 하녀들을 전부 아는 건 아니었다. 아버지가 자살하여 혼란스러운 와중에 귀중품을 훔쳐 도망친 하녀도 있을 법했다.
“그 하녀는 지금도 대부인을 섬기고 있습니까?”
이제 와서 해코지를 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그냥 순수하게 궁금했다.
마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주인의 부를 탐한 하녀를 어찌 계속 고용할 수 있겠는가.”
이미 해고된 모양이다. 당연한 대응이었다.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안과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다시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기 시작한 로젤린은 따분하게 홀을 훑었다. 그녀는 이제 어떤 색깔의 드레스가 제일 많은지 헤아려 보기로 했다. 시간 죽이기에는 쏠쏠한 재미였다.
로젤린이 드레스를 눈으로 쫓고 있을 무렵에 마리안이 의자에서 일어나 홀로 내려가는 기척이 났다. 단상에 혼자 남게 되니 더 심심해졌다.
멀거니 하는 일 없이 앉아 있긴 했지만 그녀는 프레데릭의 호위기사라는 자각을 잊지 않았다. 간간이 한눈을 팔거나 다른 생각을 해도 프레데릭의 모습은 항상 확인했다.
‘다섯 벌째 노란색 드레스, 두 벌째 보라색 드레스, 네 벌째 분홍색…… 붉은색에 더 가깝나?’
어느 귀족 아가씨가 입은 드레스가 분홍색인지 붉은색인지 고민하다 소파 부근을 보았다. 방금까지 저기에 앉아 있던 프레데릭이 없었다.
‘어디로 자리를 옮기신 거지.’
드레스를 색깔별로 나누던 걸 멈추고 그를 찾았다. 분명히 그의 주변에는 또다시 사람들의 무리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어이, 로젤린.”
찾던 이의 목소리는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손짓과 함께 들려왔다. 깜짝 놀란 로젤린은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무슨 생각을 깊이 하길래 내가 오는 기척도 몰랐나?”
여기에서 널 찾고 있었다는 대답을 하는 건 좀 머쓱했다. 시야에서 놓쳤다는 걸 인정했다는 꼴이 되니까.
“지겨워 죽겠지?”
“……차라리 춤이라도 추면 시간이 잘 갈 것 같습니다.”
진심어린 대답에 프레데릭이 개구진 소년처럼 웃었다.
“그럼 안 심심하게 나쁜 짓을 하러 갈까?”
프레데릭이 말한 ‘나쁜 짓’은 밤 산책이었다. 그냥 산책이 아니라 연회장을 몰래 빠져나가는 밤 산책.
두 사람은 시종들이 드나드는 작은 쪽문을 통해 홀을 나왔다. 마주치는 시종들은 크게 놀라는 기색 없이 길을 비켜 주었다. 연회가 파장하기 전에 종종 도망친 전적이 있다고 프레데릭이 말했다.
내성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용인들이 대연회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 홀을 벗어나니 오히려 마주치는 사람이 적어졌다.
“도중에 빠져나와도 괜찮습니까?”
홀 밖은 완전히 밤이었다. 로젤린은 느슨해졌던 망토를 여몄다.
“안 되겠지만 이미 나온 걸 어쩌겠냐.”
프레데릭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간신히 화제를 내 결혼에서 돌렸나 싶더니 도돌이표처럼 또 돌아왔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결혼 얘기를 듣느니 나중에 라울에게 잔소리를 듣는 게 낫지. 기왕 관심을 가져 줄 거라면 결혼 외에도 소재가 많을 텐데.”
“전하의 친척 분도 있으셨나요?”
결혼하라는 화제는 가문의 어른이 먼저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로젤린도 그렇게 생각하며 별 뜻 없이 물었으나 프레데릭은 고개를 저었다.
“작은 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숙청당해서 죽었고, 고모 두 분은 남편과 영지에서 죽은 듯이 지내셔서 발트란까지 거의 올라오지 않아. 고모와 사촌들은 언제 봤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군. 결혼하라고 제일 많이 눈치를 주는 건 호크만 백작.”
모르는 이름이었다. 프레데릭의 호위기사로 있으니 발트란의 정세와 주요 귀족에 대한 공부도 하는 게 좋을까.
“전하의 기반을 위해서도 결혼을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로젤린도 마리안 부인의 위세 때문에 결혼하지 못한다는 건 들었다. 그래도 프레데릭이 결혼을 하고자 확고하게 결심했다면 여태 결혼하지 못하였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귀족의 결혼은 개인과 개인의 결합이 아니다.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다. 결혼할 당사자가 아니라 당사자의 부모와 혼담을 마무리 짓는다면 당사자의 의향은 중요하지 않다.
뿐만 아니다. 로젤린은 프레데릭이 제 아내 한 명도 지키지 못할 만큼 무능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몇 차례의 성희롱 사건으로 남자로서의 신뢰는 퍽퍽 깎였으나, 가장이자 남편으로서의 프레데릭은 별개의 문제다.
“결혼이라…….”
프레데릭이 낮게 중얼거리며 뺨을 문질렀다. 인적이 없는 외벽에 대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렸다.
“글쎄다. 윌리엄이 아이를 낳으면 내 양자이자 후계자로 키우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는 중이라 결혼도 쉽게 포기한 건지도 몰라. 그 녀석은 불임이라고 말하지만 농담이겠지, 설마.”
“그러시군요…….”
로젤린은 말꼬리를 흐렸다.
프레데릭의 이야기를 들으니 궁금한 건 더욱 많아졌다. 왜 자신이 직접 결혼해 후계자를 낳을 생각을 하지 않는지. 왜 윌리엄의 아이를 은연중에 기다리고 있는지.
그의 신변에 대한 의문은 곧 프레데릭이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의문과도 닿아 있다. 그러나 일개 호위기사는 물을 수 없는 예민한 내용이다.
그녀를 잠시 내려다본 프레데릭이 마치 그녀의 의문을 아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원래 내 자리는 윌리엄의 자리니까. 나 같은 죄인이 앉아도 되는 자리인지, 가끔 본질적인 의문이 들지.”
죄인. 그 단어를 로젤린이 곱씹기도 전에 프레데릭이 먼저 걸음을 뗐다. 로젤린은 상념을 접고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흙바닥이 부츠 아래에서 자박거리는 소리를 내며 밟혔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밝히지 않고 프레데릭은 성큼성큼 걸음만 옮겼다.
밖으로 나왔으니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 건지. 밤 산책이라고 하였으니 근처의 정원을 한 바퀴 돌지 않을까. 로젤린은 그 정도의 상상만 했다.
아직 프레데릭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았기에 떠오른 상상이었다.
“유목 민족의 기마술을 보여 줄까?”
프레데릭이 문득 등을 돌렸다. 건물 외벽을 밝히는 불이 더 밝았다면 로젤린은 그의 등에 어린 긴장감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요?”
“당연히 나가서지.”
“어디를 가시려고요?”
“북문 밖이 어떨까.”
북문 밖은 마수들이 출몰하는 검은 황야가 펼쳐져 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멀리 나가지는 않을 거다. 너랑 내가 있으니 한두 마리가 나타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말을 타고 갈 거니 여차하면 튀어도 되고.”
프레데릭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두 사람의 실력에다 말까지 타고 간다면 몸을 빼내서 도망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호위기사라는 입장을 고려하면 주군이 위험한 걸 알면서도 순순히 따라갈 수는 없었다.
“위험합니다. 산책을 하시려면 북문 외에 다른 성문으로 나가셔도 되지 않습니까.”
“북문을 제외한 동, 서, 남문은 성문 밖에도 인가가 있어서 제대로 달리려면 한참을 가야 한다고. 너도 동문 밖으로 달린 적이 있어서 알잖아. 성벽 근처로만 달릴 거니까 걱정하지 말래도.”
나만 믿으라는 듯이 말하며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 시간에 북문 밖으로 나간 게 한두 번도 아니야.”
로젤린도 겨우 그의 제안을 응했다. 내켜서 따라가는 게 아니었다. 말리면 혼자서라도 말을 몰고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두 번도 아니라니 이미 전적은 충분하지 않은가.
프레데릭의 개인 훈련장에 들러 흑염룡과 로젤린이 탈 말을 몰고 나왔다. 기사단 본부의 마구간에 들러 봉피까지 가져오기엔 멀었다.
늦은 시간에 북문 밖을 나온 적이 더러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북문의 경비병은 놀라지도 않고 쪽문을 열어 주었다.
새까만 털을 가진 흑염룡과 얼룩덜룩한 갈색 말이 해자를 건너 황야로 뚜걱뚜걱 나아갔다. 왠지 성벽을 나오니 좀 불안한 기분도 들어 로젤린은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까지는 성벽 위에서 보초를 서는 병사들이 보이는 거리다.
“이게 나쁜 짓입니까?”
“그럼, 나쁜 짓이지. 우리는 지금 야간에 성문을 나가서는 안 된다는 야간 통행 금지법을 어겼다고.”
말은 여전히 번드레하다.
검은 황야는 야간에 마수가 출몰하였을 시 유인하기 위해서 드문드문 횃불을 밝힌다. 역설적으로 어두컴컴한 곳이 마수와 마주칠 확률이 낮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어둑어둑해지니 불안하긴 하다. 로젤린은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말을 몰았다.
프레데릭이 그녀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며 물었다.
“유목 민족의 기마술은 알고 있지?”
“기예나 곡예로 보일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전력 질주하는 말을 갈아타거나, 말의 안장에 옆으로 매달려서 위장하다던가 하는 내용이요.”
“다른 건 궁금하지 않고?”
대답하기에 앞서 그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만월이다. 상대적으로 횃불보다는 광도가 낮지만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표정은 알아볼 수 있는 빛이었다.
어스레한 달빛이 쓰다듬는 프레데릭의 얼굴이 로젤린의 시야에 찼다.
‘……설마 긴장하셨나? 왜지?’
이상했다. 프레데릭이 자신의 앞에서 긴장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궁금, 합니다.”
어쨌든 궁금하다고 대답은 해야 할 것 같다.
프레데릭이 그제야 씨익 웃었다.
“좋아. 참, 그전에 허리를 안아도 되나? 아! 이상한 의도가 있는 건 아니고 떨어지지 않도록 잡으려는 거니까. 진짜 그것뿐이야.”
접촉을 하겠다는 말에 로젤린은 반사적으로 경계했다가 곧 풀었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또 희롱을 하지는 않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쐐기는 박았다.
“이상한 짓을 하시지 않는다면요.”
“……신에게 맹세코 안 해. 위험하니까 잡아 주는 거야.”
“저에게 위험한 짓을 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짐짓 정색하여 대꾸하니 프레데릭이 당황했다.
“아, 아니. 일부러 널 위험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다른 의미의 위험한 것도 아니고. 내 말뜻은…….”
말주변 좋은 그가 버벅거리며 어설픈 변명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다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장난이었다는 걸 프레데릭도 그제야 눈치챘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뒷목을 문질렀다.
“어지간히도 네게 신뢰를 사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
“겪은 게 있으니 남자로서 믿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희롱할 거면 날 자르라는 말까지 한 로젤린은 이제 할 말을 참지 않았다. 참지 않고 할 말 하면서 살다가 잘리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
“남자로서 못 믿는다는 게 더 슬픈데…….”
어깨를 늘어뜨린 프레데릭이 로젤린의 말고삐를 쥐었다. 말을 멈추게 하고 등자에 발을 건 채 몸을 일으켰다.
“잡아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안장에서 일어서 봐.”
“……전하처럼요?”
로젤린은 덜컥 불안해졌다. 이제 기마술도 익숙해졌지만 프레데릭의, 등 수준을 따라가려면 멀었다. 프레데릭이야 손쉽게 해냈지만 등자에만 체중을 싣고 일어서서 균형을 유지하는 게 어디 쉽겠는가.
망설였으나 그녀의 선택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좋아. 마보 자세를 유지하는 것처럼 천천히 엉덩이를 떼.”
흔들거리기는 했으나 프레데릭의 부축을 받고 간신히 섰다. 훈련이 잘된 말은 얌전히 있었다. 일단 균형을 잡는 요령을 파악하니 서 있는 건 그럭저럭 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말을 달리거나 무기를 휘두르라고 하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로젤린은 훤히 트인 앞을 바라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시야가 정말 높아졌습니다.”
단지 지상으로부터 반미터가량 높아진 것만으로도 보이는 풍경이 다르다. 숲도 없고 나무도 없는 검은 황야의 드넓은 지평선이 눈앞에 펼쳐졌다. 멀어진 지평선은 밤하늘과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검다. 심연으로 떨어지는 입구 같은 느낌이다.
풍경에 감탄하면서도 소름이 돋았다. 프레데릭이 보여 주고 싶었던 건 이것일까.
“그 상태로 안장 위로 옮겨 설 수 있겠나?”
“안장 위로요?”
무심코 그의 말을 반복하며 되물었다.
“응, 잡아준다니까.”
이번에는 더욱 망설여졌다. 프레데릭이 말은 쉽게 하지만 말처럼 쉽다면 곡예사는 다 굶어 죽을 것이다.
머뭇거리는 그녀에게 프레데릭이 한 번 더 권유했다.
“정 그러면 내가 아예 허리를 안고 일으켜 세울 테니까 힘 빼고 나에게 기대라. 참, 왼쪽발로는 흑염룡의 안장 위에 서면 돼.”
“부탁드립니다.”
차라리 프레데릭에게 완전히 의지하는 게 나을 거 같다.
프레데릭이 두 마리의 말을 밀착시켰다. 이윽고 단단한 팔뚝이 그녀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봉인된 피의 계약이 있었으면 더 편했겠지만 어쩔 수 없지. 발로 말을 걷어차지 않도록 조심하고. 괜찮으니까, 날 믿어라.”
날 믿어라.
프레데릭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그래, 믿는다. 이 사람을.
로젤린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천천히 프레데릭이 이끄는 대로 따랐다. 약간 떨리는 발이 두 말의 안장 위를 차례대로 버티고 섰다. 뒤에서 안은 강인한 팔이 그녀를 지탱했다.
“고개를 들어 봐.”
불안하게 말의 갈기를 노려보고 있던 시선을 올렸다. 아까도 말 위에 서서 보았는데 뭐가 다를 게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오산이었다.
“와아…….”
어린아이 같은 감탄성이 나왔다.
수치적으로 높아진 시야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달랐다. 지상에 비하면 턱없이 불안정한 바닥. 안장에 앉았을 때보다 한결 예민하게 닿는 말의 존재감. 피부를 차갑게 식히는 겨울밤의 청량한 공기. 둘러 안은 강인한 팔. 가장 신뢰하는 이가 있다는 안도감. 머릿결로 바짝 느껴지는 프레데릭의 숨결. 그녀를 완전히 감싸 안는 등 뒤의 존재감.
그 모든 것이 현재의 로젤린을 구성했다.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던 지평선이 더 이상 오싹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검고, 검고, 검을 뿐인, 달려갈 수 있는 대지였다.
프레데릭도 안장에 두 발을 올리고 그녀의 뒤에 섰다. 좁은 안장 위에서 두 사람의 육체가 밀착했다.
“말을 달려도 될까?”
대답은 망설임 없었다.
“예.”
이럇! 오른손으로 로젤린을 안고 왼손으로 두 마리 말의 고삐를 쥔 프레데릭이 호령했다.
다그닥 다그닥. 평보로 시작하였던 걸음이 구보가 된다. 점차 빨라진다. 말 등이 아래위로 흔들거리며 그 위에 버티고 선 다리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러나 두렵지 않았다. 그녀의 뒤에는 프레데릭이 있었다.
두 마리의 말이 지평선으로 질주했다. 영원히 달려도 닿지 못할 아득한 지평선으로 질주했다. 주변의 풍경이 시시각각 변한다. 따가운 바람이 볼을 사납게 할퀴었다. 로젤린과 프레데릭의 몸 사이에 눌린 로젤린의 망토 자락이 연신 펄럭거렸다. 이대로 날아갈 것만 같은 짜릿한 부유감의 다른 이름은 쾌감이었다.
“아하하, 하하!”
왠지 웃음이 나왔다. 찰나의 실수가 낙마와 큰 부상, 자칫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순간이다. 두려움과 공포가 그녀를 잠식하기 위해 쏜살같이 접근했다. 하찮아. 로젤린은 웃음을 터트렸다. 프레데릭도 웃었다.
이 순간만큼은 죽음도, 두려움도, 나타날지 모르는 마수의 존재도 그녀를 범접하지 못했다. 그녀는 프레데릭과 더불어 오롯한 존재였다.
웃음은 이윽고 환호성이 되어 드넓은 지평선을 쩌렁쩌렁 울렸다.
하나가 된 두 마리의 말과 두 명의 사람이 영원을 향해 질주했다.
“굉장해요! 정말 멋집니다!!”
양팔을 벌리고 흙바닥에 드러누운 로젤린의 상체가 연신 들썩거렸다. 흥분으로 꽉 찬 호흡이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사나운 바람을 맞아 발긋해진 뺨이 따가웠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인생에서 최고로 멋진 경험이었다.
옆에 앉아 있던 프레데릭의 얼굴에도 편한 미소가 감돌았다.
“나쁘지는 않았지?”
“최고예요!!”
아직도 전속력으로 질주하며 하늘을 달리는 기분이다. 황홀한 기분 속에 눈을 감았다. 폐 안으로 가득 들이닥쳤던 시린 공기가 가슴 안을 시원하게 훑고 지나갔다. 그 여운이 가시는 게 아쉬워 숨을 삼켰다.
지그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프레데릭이 지평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친구 녀석, 지금은 황제가 된 카를이지. 카를의 보모에게 이 승마술을 배울 때 내심 다짐했던 게 있어. 내가 언젠가 아버지보다 키가 더 크고 더 넓은 등을 갖게 된다면, 꼭 아버지와 이 풍경을 보고 싶다고…….”
로젤린은 눈을 떴다. 두 말은 근처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으며 쉬고 있었다. 황야는 적막하다. 그녀의 곁에는 오직 프레데릭만이 존재했다.
“내 이야기를 들어 주지 않겠나? 재미는 없을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데릭은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프레데릭의 어머니 넬라는 평민이었다. 제이슨이 신분의 차이를 무릅쓰고 결혼하여도 이익이 전혀 없는 신분이었다. 달콤한 사랑에 젖어 있으면서도 냉정하게 실리를 계산한 제이슨은 아이든 백작의 누이와 결혼했다. 넬라는 크게 비통하였으나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제이슨의 정부로 남았다.
그녀는 평생을 조용히 살고자 했다. 제이슨도 그녀를 겉으로 내세울 예정이 전혀 없었다.
넬라의 임신을 알기 전까지만.
제이슨은 자식을 아비도 모르는 사생아로 만들 수 없었다. 넬라는 임신한 채 제이슨의 가장 충직한 기사와 결혼했다.
7개월 후 프레데릭이 태어났다.
“표면적으로는 칠삭둥이지. 근데 난 칠삭둥이치고는 우량아였거든.”
프레데릭이 가늘게 조소했다.
“어머니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몸으로 결혼했다는 걸, 아버지가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아버지는 나를 진짜 아들로 여겼고, 나도 아버지의 자식이었지.”
로젤린은 말없이 프레데릭의 이야기를 들었다. 똑같은 ‘아버지’라는 단어임에도 선대 슈벤하임 대공을 지칭할 때와 츠바덴 경을 지칭할 때의 목소리가 다르다.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프레데릭의 진짜 아버지는 츠바덴 경이었다.
마리안 부인은 당시에 이미 넬라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제이슨은 정부가 아이를 낳자 츠바덴 경에게 큰 선물과 금전을 하사하고 유모까지 수배하여 붙였다.
츠바덴 경은 전도유망하고 유능한 기사였으나 일개 기사다. 일개 기사의 아들에게 베푸는 은덕이 과했다. 눈치를 채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녀를 분노하게 한 건 단순히 정부의 존재만이 아니었다.
넬라가 출산하였을 때, 마리안도 임신 중이었다.
“윌리엄의 생일은 나보다 3달이 늦지.”
“최악이네요…….”
일어나 앉아 프레데릭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로젤린도 무심코 동의했다. 아내가 임신 초기라 부부 관계를 가질 수 없을 때 정부를 임신시켰어도 진노할 것이다. 한데 그 반대라니.
로젤린은 개만도 못한 새끼가 아니냐는 욕을 겨우 삼켰다. 당시 마리안 부인의 심정이 뼈저리게 공감되었다.
그럼에도 마리안은 인내하며 묵인했다. 어차피 사랑으로 결혼한 관계도 아니다.
남편이 정부를 거느리며 사생아를 보는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사생아는 백 명이 있어도 적자에 감히 견줄 수 없다. 마리안은 무사히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언젠가 그녀의 자식이 대공이 될 것이다. 승리하는 건 한낱 평민 정부가 아닌 그녀였다.
제이슨도 굳이 위험을 무릅쓰며 사생아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 없었다. 훗날 프레데릭의 아내를 적당한 귀족가에서 고르겠다는 것 정도만 생각했다.
모든 것은 프레데릭의 재능이 개화하며 뒤틀렸다.
겨우 11살의 나이에 아이기스 나이트에 입단한 프레데릭이 제 몸의 세 배나 되는 마수를 사냥하는 걸 제이슨이 목격하였을 때, 순조롭게 나아가던 운명이 뒤틀렸다.
“나는 단지 아버지가 기뻐해 주셨으면 했을 뿐이야. 검술도, 기사로서의 마음가짐도, 전부 아버지에게 배웠으니까.”
씁쓸한 목소리가 내리깔렸다.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고 싶었을 뿐인 소년의 재능은 너무나도 위험했다. 제이슨이 냉정과 이성의 가면을 송두리째 버릴 만큼.
“아버지는…….”
무거운 한숨이 프레데릭의 입가에 매달렸다. 달빛이 내린 얼굴의 음영이 어둡다. 충동적으로 그 얼굴을 향해 손을 들었던 로젤린은 헛숨을 삼키며 거두었다.
“내가 죽인 거나 다름없다.”
프레데릭으로부터 츠바덴 경을 지우고 온전히 제 아들로 만들기 위해 제이슨은 츠바덴 경을 죽였다.
증거는 없었다.
츠바덴 경은 제이슨의 영지 시찰을 호위하라는 갑작스러운 임무를 따랐을 뿐이었다. 치안이 훌륭한 도시 인근의 숲에서 나타난 한 무리의 강도가 지나치게 전투에 능숙하였을 뿐이었다. 제이슨이 탄 마차가 아니라 오직 츠바덴 경이 지휘하는 호위 부대만 공격하였을 뿐이었다. 강도떼는 아주 늦게 지원군이 도착하자 바로 도주하였을 뿐이었다.
급히 이송된 츠바덴 경은 간신히 프레데릭을 만나고, 절명했다.
프레데릭은 그렇게 아버지를 죽이고 새로운 아버지를 얻었다.
애초에 프레데릭을 자식으로 인지하고 츠바덴 경에게 의탁하였노라고, 제이슨은 뻔한 거짓말까지 대며 츠바덴 경의 존재를 프레데릭의 인생에서 완전히 지웠다.
“지난번 구빈원에서 어머니의 초상화를 보았을 때 어머니가 정부라는 소문이 나서 구빈원을 설립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내가 대공가로 들어간 후였어. 마리안 부인에게 아들을 빼앗겼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죽었는데도 끝까지 본인만 생각했던 분이셨지……. 새로 생긴 그 새 아버지도, 결과적으로는 내가 죽였을 거야. 평생 감기 한 번 안 걸렸던 양반이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건강했으니.”
제이슨은 하룻밤 만에 급사했다. 아마도 마리안 부인이 손을 썼으리라고 프레데릭은 짐작했다. 프레데릭이 장성하여 후계자로서 기반을 완전히 다지기 전에 제이슨을 처리하기 위해.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다. 겨우 10대에 불과한 사생아는 정실부인의 적자와 권력을 양분했다.
“그러니까 나는 죄인이란 거다. 두 아버지를 모두 죽인 죄인.”
로젤린은 침묵했다. 감히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섣부른 위로를 할 수가 없었다. 십수 년 동안 서리서리 맺힌 죄책감을 그녀의 말 한마디로 씻어 내릴 수가 있을까.
‘난 몰랐어…….’
무의식중에 꽉 쥐인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 아픔마저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로젤린은 그저 프레데릭이 사생아라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을 알았다. 그 하나의 단어 뒤에 오랜 세월 켜켜이 쌓여 온 고통이 숨어 있다는 것도 몰랐다.
프레데릭을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알고 싶었던 마음마저 그의 고통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가볍다.
로젤린은 프레데릭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하. 뭐, 옛날이야기야. 10년 넘게 묵은 케케묵은 옛날이야기.”
로젤린의 침묵과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려는 것처럼 프레데릭이 웃었다. 자그맣게 새어 나간 웃음은 침묵을 완전히 깨지 못하고 흐물흐물 허공에 흩어졌다.
“난 기사가 싫다.”
츠바덴 경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렇기에 최후까지 기사로 남아 스스로 죽을 자리로 들어간 그의 선택과 충성을 거부한다.
소년은 단지 아버지가 곁에 있어 주기만을 바랐으니까.
죽어서까지 자신을 주군에게 바치는 충성으로 옭아매고 가기를 바라지 않았으니까.
“주군이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음을 알면서도 우직하게 충성하는 기사가 싫어. 주군을 위해서라면 하찮게 목숨을 버리겠다는 기사의 열정은 광신이나 다름없다고 경멸한다. 죽음은 온전히 그 자신의 것이어야지, 타인에게 바쳐야 할 것이 아니야. 스스로 버린 순간, 그것은 숭고한 희생이 아닌 개죽음에 불과하지. ……그래서 나는 나의 기사가 죽기를 바라지 않아.”
츠바덴 경의 죽음 이후, 평생 지워지지 않는 멍에가 되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맺혀 있던 진심이 비로소 하나의 언어가 되었다.
프레데릭의 말이 점차 빨라졌다. 십수 년 만에 토해 낸 감정은 그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격류처럼 휘몰아쳤다.
프레데릭은 그를 섬기는 기사들이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기사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 최선의 전략을 고심하고, 전장에서는 항상 선두에서 지휘했다.
아버지를 둘이나 죽인 죄인의 생명은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것이다. 그 죄인의 생명으로 기사들과 맞바꿀 수 있다면 아주 큰 이득이 아닌가. 그는 가장 위험한 전투에 몸을 던졌고, 가장 최악의 때에 앞장섰다.
전쟁이 끝나고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기사들은 그에게 죽음도 서슴지 않는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아이러니해. 진짜 아이러니해……. 난 언제나 도망치고 있었을 뿐인데.”
격류처럼 쏟아지는 말끝에는 지친 남자가 있었다. 삶에 지치고 무엇에도 의미를 갖지 못하는 공허한 한 명의 남자.
로젤린이 알고 싶었던, 프레데릭.
‘그래, 그렇구나……. 그런 거였어.’
프레데릭의 본심과 처음으로 마지막으로 마주한 로젤린은 자신의 본심도 바라볼 수 있었다.
그의 짓궂은 희롱에 유달리 화가 나고, 그럼에도 그를 더욱 알고 싶고, 어떠한 순간에도 신뢰할 수 있는, 그가 자극하는 그녀의 가장 연약한 부분.
그녀가 버렸다고 여긴 애틋한 감정의 울림.
‘난 이분을 좋아해.’
서글프다. 버렸던 것이 온전히 그녀의 안에서 개화하였음을 알자마자, 다시 버려야 하는 것이 서글프다.
프레데릭은 자신의 상처를 칼로 째고 썩어가는 고름까지 로젤린에게 보였다. 로젤린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로젤린은 프레데릭의 기사로서 죽을 작정이니까.
기사였던 아버지는 과거의 주군을 배신했다. 기사였던 작은오빠는 맹약을 버리고 도주했다. 남은 건 흙발로 더럽혀지고 짓뭉개진 기사의 명예였다.
약자를 수호하고 주군에게 충성한다.
맹약으로 바친 충성의 검은 필시 삶보다 무거운 기사의 명예. 더없이 평이하고 무난하지만 그녀에게는 무엇보다 절박한 것.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로서 그녀가 되갚아야 하는 명예.
로젤린은 주군에게 충성하고 그 충성의 증명으로 죽기를 기원했다. 10년 동안 다지고, 다지고 다져진 그것은 순수한 염원이 아닌 강박관념이자 망집이자 원념이었다.
그렇기에 로젤린은 주군이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그녀를 여자가 아니라 기사로서 인정해 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섬길 수 있었다.
신하의 충성과 기사의 충성은 다르다. 주군이 그릇된 길을 걸으면 그 길을 바로잡아주는 이가 신하이고, 그릇된 길을 따라가는 이가 기사이다. 기사는 검이자 방패이자 도구이다. 기사에게는 옳고 그름을 신중히 판별하는 이성이 아니라 주군의 결행을 즉각 실행에 옮기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아이기스 나이트에 입단할 때에도 같은 마음이었다. 슈벤하임 대공이라는 사람의 인품이 어떠한지는 전혀 관계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내가 전하의 기사가 될 수 있어서 다행이야.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이분을 섬긴다는 긍지를 주시는 분이라서 다행이야.’
언젠가 반드시 이분을 지키고 죽을 것이다.
로젤린은 기사의 죽음을 거부하는 남자의 옆에서 비로소 자신이 죽을 자리를 찾았다. 지독한 이기심이 아닌가. 그러니 로젤린은 그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일 수 없었다.
그가 보게 되면, 기사가 아닌 로젤린 메이어를 경멸하게 될 테니까.
“로젤린.”
사위는 여전히 고즈넉하다. 아주 먼 곳에서 짐승의 울음도 들리지 않는다. 새까만 지평선은 밤하늘까지 먹어치울 기세로 맞닿아 있고, 서글픈 달빛만이 시리게 쏟아진다.
오롯한 하나가 되었던 존재가 둘이 되어 외로운 밤이었다.
“예.”
로젤린은 홀로 잠식되는 고독 속에 대답했다. 평소처럼 흔들리지 않도록. 이기심으로 꽉꽉 메워진 진심의 조각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널 사랑해도 될까.”
프레데릭이 그녀의 고독을 삼켰다.
* * *
프레데릭의 의자가 비어 있었다.
“이런.”
윌리엄이 혀를 쯧쯧 찼다.
“언제 또 사라진 거람……. 어디로 가신다는 전언은 없었나?”
“파트너로 참석하신 아가씨와 나가셨을 뿐, 행선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자신의 죄라도 되는 것처럼 시종이 송구해했다.
“메이어 경과 동행했다면 문제는 없겠지만. 하여튼 바람처럼 사라진다니까.”
엘자가 소리를 낮춰 조그맣게 웃었다.
“정말 신출귀몰한 분이셔요.”
“누구 형인지는 모르겠지만 못 말리는 사람이죠.”
짐짓 과장되게 말하는 윌리엄의 목소리가 우스운지 엘자가 또 웃음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유순한 눈매가 웃음을 담으니 더욱 동글동글 사랑스러웠다.
마리안은 다정한 아들 부부의 정경을 마치 한 편의 촌극이라도 구경하는 것처럼 보았다.
‘한심한 녀석.’
영주인 프레데릭이 또 연회의 막바지에 몰래 사라졌다. 이 일이 어디 아내와 한마디 대화로 소모될 화제이던가. 평소에도 행사에는 불량한 태도를 보이는 프레데릭이다. 오늘의 일 또한 얼마든지 그에게 흠이 될 수 있는 사안이다.
마리안이 윌리엄이었다면 교묘하게 밑밥을 흘려 놓았을 것이다.
그 정도만 해 두어도 정치 놀음에 닳고 닳은 귀족들은 그녀가 원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당장의 치명적인 큰 흠은 아니더라도 조금씩 끈질기게 쌓아 올리다 결정적인 순간에 역전한다. 그것이 승리의 비법이다.
윌리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가 아들을 잘못 키운 걸까.’
새삼스러운 눈으로 마리안은 엘자와 담소하는 윌리엄을 바라보았다.
부친의 생전에 후계자가 되지 못한 윌리엄이 ‘여기까지’ 온 건 프레데릭의 의욕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여기까지밖에’ 못 온 건 윌리엄이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생 무인인 프레데릭과 반대로 윌리엄은 천생 학자였다. 그는 칼보다는 책을, 갑옷보다는 서류를 보는 걸 더 좋아한다. 프레데릭이 친히 전군을 지휘하며 혁혁한 전공을 쌓아가고 있을 때, 윌리엄은 간단한 승마를 하다가 낙마했다.
슈벤하임의 사람들은 강한 자를 숭상한다. 그 격차를 메우려면 프레데릭이 매우 약한 정치적인 측면을 노려야 한다. 마리안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오는 윌리엄이었으나 자신이 의도적으로 나서는 일은 없었다.
‘너무 오냐오냐 키웠을지도 모르겠군.’
마리안은 윌리엄 아래로 두 명의 아이를 출산했다. 둘째인 딸은 생후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고, 셋째인 아들은 다섯 살 때 사망했다.
마리안에게는 자식이 하나뿐이었다. 그 하나뿐인 자식과 함께 승리의 자리에 올라야 한다. 애지중지 품에 안고 키웠으나 결과는 밋밋했다.
제 어미의 속도 모르고 형 앞에서 사람 좋게 웃는 저 한심한 녀석을 어쩌면 좋을지. 제이슨도 닮지 않고, 마리안도 닮지 않은 아들을 그녀는 낯설게 응시했다.
이 싸움은 프레데릭과 윌리엄의 싸움이 아니다. 프레데릭과 마리안의 싸움이다.
‘아니지, 제자리에서 도망치기만 할 뿐인 그 얼간이가? 천만에.’
마리안은 비어 있는 영주의 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텅 비어 있는 그곳에 죽은 제이슨의 환영이 보였다. 더없이 잔혹하고 냉랭한 망자의 시선이 그녀를 마주한다. 살점과 장기는 썩어 문드러지고 백골만이 남았을 시체의 망령은 아직도 두 아들과 그녀를 옥죄고 있다. 마리안은 한때 그녀의 지배자였던 남자의 환영을 싸늘하게 일별했다.
이 싸움은, 죽은 제이슨과 마리안의 싸움이다.
“윌리엄, 오늘은 몸이 좋지 않군요. 먼저 돌아가서 쉴 테니 그대는 연회를 마무리하도록 하세요.”
“많이 편찮으신지요?”
윌리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마리안은 그녀의 두통을 절반쯤 담당하고 있을 아들에게 담담히 말했다.
“몸살기운이 약간 있습니다. 오늘 하루 쉬면 괜찮을 테니 염려하지 말아요.”
“내일 아침에 찾아뵙겠습니다. 푹 쉬십시오.”
홀 밖까지 배웅하려는 윌리엄을 만류하고 수행 하녀만 대동하여 나왔다. 대공가의 마차는 어둑어둑한 밤길을 돌아 저택으로 돌아왔다.
예정 시각보다 일찍 귀가한 주인을 맞아 하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깨끗이 세안하여 화장을 지우고 따뜻한 물에 몸을 씻었다. 아침부터 긴 행사를 치르느라 혹사당한 근육의 긴장을 꼼꼼히 마사지하여 풀었다. 침실에는 숙면을 돕는 수면향을 피웠다.
침의로 갈아입은 마리안은 하녀들을 모두 물리고 침실로 들어왔다. 벽난로의 열기로 후끈후끈 데워진 침실은 바깥과는 대조적이다.
그녀는 직접 드레스룸에서 가운을 꺼내 입었다. 레이스를 극도로 적게 쓴 단정한 가운이었다. 맨살이 보이지 않도록 꼼꼼히 여미고,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을 올려 묶었다. 심복을 맞을 준비는 끝났다.
“들어오게.”
벽난로 옆쪽의 벽이 스르릉 하는 소리를 내며 밀렸다. 마리안은 싸늘한 비웃음을 담아 비밀 통로를 보았다.
결혼하기 전 마리안의 이름은 마리안 아이든. 그리고 현재의 이름은 마리안 체 슈벤하임.
영지를 소유한 영주는 미들네임을 쓰며 배우자와 영주로서의 권리와 임무를 함께 지닌다.
죽은 제이슨은 형편없는 남자였지만 마리안이 지니어야 할 권리까지 박탈하는 형편없는 영주는 아니었다. 그는 대대로 대공 부처에게만 계승되는 대공저의 비밀 통로를 넬라가 아니라 정실인 마리안과 공유했다. 유사시에 성벽 밖까지 대피하거나 지하에 은신할 준비가 갖춰진 비밀 통로다.
물론 프레데릭도 알고 있는 통로다. 그러나 부친에게 물려받은 모든 것을 기피하는 그는 이 비밀 통로를 봉인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마리안은 통로를 유용하게 이용했다.
비밀 통로에서 나온 중년의 사내는 마리안의 전 호위기사 파이렐이었다. 프레데릭의 전 호위기사 체임트 경과 같은 이유를 들어 퇴직 서류를 꾸몄다. 가벼운 도발이자 시험이었다.
과연 마리안의 예상대로 그 얼간이는 파이렐의 뒤를 추적하지 않았다. 파이렐은 프레데릭의 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그녀의 명령을 수행했다.
“프레데릭의 측근 중 메이어 남작가의 생존자가 있다.”
파이렐은 조금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이제 와서 메이어 남작의 가치가 있습니까?”
“없다.”
단호하게 부정한 마리안은 즉시 자신의 대답 또한 부정했다.
“하지만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지. 세상만사를 다 팽개치고 다니는 얼간이가 직접 호위기사로 임명하여 가까이에 데리고 있으니 필시 이유가 있을 게다. 제가 남작가의 생존자라는 걸 서슴없이 밝히다니 맹랑한 계집이야.”
“레젠은 먼 곳입니다. 설마 발트란에 메이어 남작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가벼이 판단한 게 아닐까요.”
“그 정도로 멍청하다면 얼간이의 좋은 짝이 되겠군.”
코웃음을 친 마리안이 양손가락을 깍지 끼며 의자에 깊이 기댔다. 타닥거리며 타들어 가는 벽난로의 불길이 일렁일렁 드리웠다.
“클레타트 후작에게 알리도록.”
클레타트 후작.
황제 카를 5세의 숙부이자 정적이다. 또한 과거의 메이어 남작이 주군으로 섬기던 남자다.
“존명.”
명령을 하달받은 파이렐은 지체하지 않고 즉시 비밀 통로의 어둠으로 들어갔다. 닫힌 통로는 언제 열리기라도 하였냐는 것처럼 완벽한 벽으로 돌아왔다.
마리안은 파이렐이 남기고 간 대화의 여운이 모두 사라지자 비로소 가운을 느슨히 하고 와인을 따랐다.
‘후작도 야무지지 못하군. 아들들만 처리한 걸로 마무리 지어서는 안 되지.’
제이슨도 제 아내가 물정 모르고 귀하게만 자란 여인이라 가벼이 여기다 죽지 않았던가.
와인으로 찬찬히 입술을 적시며 연회장의 광경을 회상했다. 단순히 일개 호위기사로 여겨지지 않는 그 눈빛. 그리고 그녀를 보던 프레데릭의 눈빛.
반평생 프레데릭에게 적의를 품었던 마리안은, 그렇기에 프레데릭이라는 사람을 잘 파악하고 있다. 그건 절대 자신의 평범한 호위기사를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메이어였기에 발탁한 후 특별한 관계가 되었는지, 특별한 관계가 된 후 메이어인 걸 알고 발탁하였는지는 의미 없다. 중요한 건 현재다.
그리고 이 현재는 재미있는 일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을 마리안에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