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오해와 착각 사이
정확한 학명이 무엇인지는 프레데릭도 기억나지 않는 썩은 재규어 떼의 습격 이후 며칠이 지났다. 검은 황야는 잠잠했다.
덕분에 아이기스 나이트는 기사단원들의 충분한 휴식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휴식기 없이 재차 마수의 출몰이 이어졌다면 더 큰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피해가 적다는 건 절대 아니었다.
“기사단의 반수가 사망하거나 중상으로 빠른 복귀가 어렵습니다.”
지난 며칠 동안 드물게 프레데릭의 집무실은 내도록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 방의 주인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심각함처럼, 라울의 표정도 딱딱했다.
아이기스 나이트의 사상자는 절반 이상이었다. 무척 큰 피해다. 단순히 머릿수만 맞추는 충원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마수를 토벌하는 특수한 목적의 기사단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실력이 되어야 한다. 어지간한 죄를 짓지 않는 이상 과거를 묻지 않고 입단을 허락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실력이 뒷받침되는 자를 찾기란 무척 힘들다. 초보자를 뽑아서 바닥부터 훈련시키기에는 마수의 출몰이 잦다.
고민을 해 봤자만 기사단원의 충원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프레데릭은 조금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지. 일반 병사 중 입단을 희망하는 자를 선별해라. 다소 실력이 떨어지더라도 기사대를 재분배하여 비슷하게 수준을 맞추도록. 이전에는 1개 기사대가 출병하였던 마수도 당분간은 2개 기사대로 운용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사망한 기사대장은…….”
프레데릭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사실 기사단원의 충원보다 더 큰 문제였다.
지난 전투에서 기사대장이 2명이나 전사했다. 제1기사대와 제5기사대의 대장이었다. 제6기사대장도 중상으로 당분간 복귀가 어렵다.
쓸 만한 실력을 가진 무인을 뽑는 건 어렵지만, 그 무인들을 지휘할 수 있는 장교를 뽑는 건 더 어렵다.
“……이쪽은 퇴직하거나 다른 쪽으로 빠진 기사들을 알아 봐야겠군. 내가 조금 더 고민해 보지.”
“괜찮겠습니까?”
라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혹시 대부인께서…….”
자세한 말은 하지 않고 말꼬리를 흐렸으나 프레데릭은 쉽게 알아들었다.
아이기스 나이트는 충실한 프레데릭의 기사이자 지지 세력 중 하나이다. 기사대장 급의 장교를 뽑을 때에는 마리안 부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사람을 신중히 선별했다.
그 철통같던 장벽에 기어이 틈이 생긴 것이다.
프레데릭은 어쩌겠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도리가 없지. 지금은 죽은 아버지의 마누라가 손길을 뻗는 것보다 더 시급한 게 기사단의 보강이니까.”
“기사단 얘기가 나왔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라울의 안색은 처음 기사단을 언급할 때보다 더욱 안 좋았다.
“그때처럼 섣불리 전선으로 가시는 건 삼가 주십시오. 직접 뛰어드셨다가 프레데릭 님까지 해를 입으셨으면 어찌합니까.”
“발트란의 영주가 전장에서 물러서는 걸 봤냐.”
“썩은 재규어 떼의 습격은 달랐습니다. 기사단이 전멸할 수도 있었던 전투였다고요.”
“그러니까 더욱 갔어야 했던 거지.”
프레데릭은 태연한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었다.
“기사단이 전멸하였으면 발트란까지 위험했다. 나는 그 전멸을 막아야 했고. 만에 하나 내가 죽더라도, 내 목숨 하나로 발트란의 수만 명을 살릴 수 있었다면 오히려 남는 장사가 아니냐?”
“아닙니다.”
느긋한 프레데릭의 말을 라울은 단호히 부정했다.
“사람의 가치에는 분명한 경중이 있습니다. 발트란뿐만이 아니라 슈벤하임의 모든 생명을 저울 위에 올려도 프레데릭 님의 가치에는 비할 바가 안 됩니다.”
“뭐, 그런 말을 하는 너도 전선에 따라왔잖아?”
“만에 하나 프레데릭 님이 돌아가신다면 제 목숨은 저울 위에 올릴 가치도 없으니까요.”
“오.”
시작부터 끝까지 한 톨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기에 더욱 무섭고 무거운 말이었다. 그 말의 한중간에 있는 프레데릭은 무게를 전혀 느끼지도 못하는 것처럼 가볍게 미소했다.
라울의 뜻을 부정하지는 않겠으나 수긍하지도 않겠다는 미소. 그것은 회피의 다른 이름이다. 그의 지난 삶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라울은 가만히 입술만 깨물었다.
어렸을 때의 프레데릭은 이렇지 않았다.
선대 대공이 그를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을 알리기 전까지의 프레데릭은 이렇지 않았다.
아들의 재능에 눈이 먼 선대 대공은 더욱 찬란히 빛날 수도 있었던 그의 인생을 완전히 망쳐버렸다.
결국 이번에도 먼저 말을 돌린 건 라울이었다.
“그러니까 달리는 말 위에서 일어나는 쇼 같은 건 좀 하지 마시란 겁니다. 낙마라도 하시면 어쩌시려고요?”
“흑염룡을 탔을 때가 아니면 나도 그런 정신 나간 짓은 안 해. 그리고 그때 사기를 북돋으려면 쇼라도 해야 했다고. 난 제법 검투사로서 소질이 있는지도?”
한낱 유희를 위하여 마수와 겨루는 검투사를 발트란의 사람은 경멸한다. 라울도 아직까지 로젤린에게 찜찜한 기분을 갖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프레데릭은 이번에도 예외였다. 편견도 경멸도 없는 공정한 성품인 탓이 아니다. 그에게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검투사이든, 그보다 더욱 천한 출신이든.
그의 안에 비어 있는 허망한 공간에서는 모든 의미를 상실한다.
‘난 도저히 못해.’
라울은 울적한 탄식을 삼켰다. 부하인 라울은 절대 메울 수 없는 마음의 틈이다.
그의 공허를 알고 그것을 메울 수 있을 반려자를 맞이할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으나 성과는 전혀 없었다.
‘결혼을 하시도록 권유해 볼까.’
아내가 생기고, 아이가 생기고, 피와 피로 이어진 가족이 생긴다면 조금씩 달라질지도 모른다. 결심을 굳히며 라울은 다음 용건을 가져왔다.
“검투사는 다음 생에나 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프레데릭 님이 조사해 보라고 하셨던 역대 썩은 재규어의 개체 수입니다만…….”
서류 한 장을 프레데릭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발트란에서는 마수의 종류와 개체, 출몰 빈도 등을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그중에서 썩은 재규어의 출몰만을 정리한 서류였다.
“썩은 재규어가 원래 무리 지어 활동하는 마수이긴 합니다만, 이처럼 기백 마리가 출몰한 건 없었습니다. 57년 전 백여 마리가 출몰하였던 게 가장 많았던 개체 수였습니다.”
“……이건 마법사에게 조사를 의뢰해야겠군.”
잠시 생각하던 프레데릭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비공식적인 조사로.”
“알겠습니다.”
오늘 확인해야 할 중요한 용건은 이것으로 끝났다.
마음의 여유가 생긴 프레데릭은 기지개를 죽 켜며 편히 늘어졌다. 인테리어 하나도 변한 게 없는 집무실이 부쩍 허전하게 느껴졌다.
곰곰이 그 이유를 고민하던 그의 시선이 다과가 차려진 빈 테이블로 문득 향했다.
“아하.”
“예?”
제게 말을 거는 줄 알았는지 라울이 반문했다. 프레데릭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로젤린.”
“예?”
이번의 반문은 아까와는 색이 조금 달랐다.
“어딜 갔지?”
“메이어 경은 프레데릭 님이 휴가를 주셨습니다.”
“아, 그래. 내가 휴가를 줬지. 으음. 맞아. 그랬어.”
의미 없이 중얼중얼하며 프레데릭은 빈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기마술을 가르치며 하루 중의 꽤 많은 시간을 계속 붙어 다녔더니 그새 익숙해진 모양이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로젤린도 분명히 다치긴 하였고 많이 피곤할 것이다. 그래서 며칠 호위는 신경 쓰지 말고 푹 쉬다 오라고 휴가를 줬는데, 이럴 거면.
‘그냥 집무실에서 쉬라고 할 걸 그랬나…….’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프레데릭은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로젤린이야 물론 쉬라고 하면 정말 편하게 소파에 드러누워서 쉴 것 같긴 하지만 기숙사에서 쉬는 것보다 편하겠는가.
프레데릭은 허전해 보이는 빈 테이블로부터 시선을 돌리며 미간을 문질렀다. 덕분에 라울이 묘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다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
연무장의 반이 텅 비었다.
많은 동료가 죽고, 다쳤다. 자신의 ‘동료’가 이렇게 많이 죽고 다치는 건 처음 겪었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현실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부터 로젤린은 상실감과 충격을 쉽게 극복하지 못했다.
그녀만이 아니었다. 기사단 전체의 분위기가 어둑한 잿빛이었다.
누군가가 떠들썩하게 목소리를 높여도, 이내 푹 꺾이며 잠잠해졌다. 대장까지 잃은 제1기사대와 제5기사대는 더욱 그러했다.
“……그만하자.”
로젤린은 끝내 힘없이 검을 내렸다. 그녀와 대련하던 아벨도 고개를 끄덕였다. 터벅터벅 걸어가 구석에 주저앉았다. 기사대장인 다니엘과는 많이 교류한 게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그의 부재가 가슴에 사무쳤다.
‘진짜 전쟁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버티는 걸까.’
콜로세움이라는 작은 공간 안에서 그저 싸우고, 싸우고, 싸우기만 하였던 로젤린은 아득하기 만한 상실감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몰랐다.
아벨이 그녀의 근처에 털퍽 앉는 소리가 났다.
“…….”
나란히 앉아 서로 침묵만 하고 있으니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로젤린은 그 무거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떠오르는 대로 말을 걸었다.
“맥스는 어때?”
“아직 염증이 심하긴 하지만 차도는 있다.”
마수에게 다친 상처는 일반적인 치료제로는 효과가 거의 없다. 마법사가 특별히 제작하는 약물이나 균열 근처에서 자라는 약초로 만든 약이어야 했다. 썩은 재규어는 그 별명처럼 특유의 독기로 상처가 금방 썩기 때문에 특히 더 조심해야 했다.
맥스의 상처가 꽤 깊었고 어제까지도 상처가 나을 차도가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이제 안심해도 될 모양이다.
“정말 다행이야.”
로젤린은 진심으로 중얼거렸다. 더 이상 동료가 죽는 건 싫었다.
“상처가 나아도 한동안 복귀는 어려울 거다.”
“무사히 낫는다면 다행이지.”
“전하와 출병하셨던 선배님 중 한 분이 약초를 갖고 있으셔서 그나마 빠르게 응급처치할 수 있었어.”
“참, 그러고 보니 그 기사분들은 누구시냐?”
아벨의 말에 문득 떠올랐다. 그때 프레데릭과 뒤늦게 합류하여 공격에 가세하였던 기사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이들이었다. 낯선 사람들인데도 마수를 사냥하는 솜씨는 몹시 익숙했다.
“아이기스 나이트의 선배님들. 퇴직하시거나, 다른 기사단으로 옮기시거나, 뭐, 그런 분들.”
“그렇군.”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과거에 아이기스 나이트였다면 마수와 싸웠을 테니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는 게 당연하다.
큰 의미도 없는 말을 그저 침묵을 깨트리기 위해 아벨과 주고받던 와중에 갑자기 웅성거림이 커졌다. 근래 연무장이 눈에 띄게 소란해진 적이 없기에 더욱 새삼스러운 웅성거림이었다.
웅성거림의 시작은 연무장 입구였다. 그곳에서부터 꼬리를 끌 듯이 길게 이어지며 차츰 옆으로 퍼졌다.
소란의 가운데에서 한 여성이 로젤린과 아벨이 앉은 곳으로 다가왔다. 절도 있는 걸음으로 뚜벅뚜벅 다가오는 그 여인이 입은 건 정기사의 제복이었다.
‘……여자 기사?’
로젤린의 눈이 휘둥그레졌을 때 아벨이 허둥지둥 일어났다.
“가엔라인 경!”
“오랜만이군, 아벨.”
그답지 않게 몹시 당황한 기색인 아벨에게 그녀가 가볍게 인사했다. 나이는 서른 중반쯤 되었을까. 길게 길렀다면 구불구불 아름답게 물결쳤을 곱슬머리를 짧게 자른 여자였다.
“제복에 왜 아이기스 나이트의 문장이 있습니까?”
“언제부터 이런 멍청이가 되었지? 당연히 아이기스 나이트니까 아이기스 나이트의 문장이 새겨진 제복을 입은 게 아닌가.”
여자가 타박을 주었다.
아이기스 나이트의 문장은 새까만 방패의 한가운데에 그려진 붉은색 원이다. 방패는 발트란의 성벽이자 그들의 임무인 방어벽을 상징하며, 붉은색은 피이자 생명이다.
아이기스 나이트의 문장을 새긴 정기사의 제복을 입는 건 단 하나의 경우뿐이다.
“새로운 기사대장으로 오신 겁니까?”
“사정이 그렇게 되었다. 넌 현재 제1기사대라고 들었다만 내가 맡은 건 제5기사대.”
로젤린도 그 즈음에는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떠올리는데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가엔라인 경이라는 이름은 들은 바가 있다.
바바라 체 가엔라인. 그녀가 입단하기 전에 있었던 선배 여자 기사다.
선배. 여자 선배.
그녀의 인생에 단 한 번도 없었던 단어가 등을 꼿꼿하게 세우게 했다.
바바라도 곧 로젤린을 돌아보았다.
“네가 로젤린 메이어인가?”
“저를 아십니까?”
“당연히 알지.”
로젤린을 올려다보며 바바라가 낮게 웃었다. 로젤린보다는 작은 키지만 여자 축에서는 장신이다.
“현재 아이기스 나이트의 유일한 여자 기사, 검투사 출신, 실력도 출중, 그리고 대공 전하의 호위기사.”
마지막 단어를 그녀는 특히 강하게 발음했다.
“전하께서 새 호위기사를 여자로 발탁하셨으니 대연회에서 전하의 파트너 자리를 네게 넘겨줘야겠다.”
“……뭐라고요?”
로젤린은, 감히 선배에게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느냐.’란 의미를 담은 반문을 하고야 말았다.
파트너라니? 대연회의 파트너라니?!
아내도 약혼녀도 누이도 없는 귀족의 파트너라면, 연회 내내 인형처럼 호호호 웃다가 마지막에 밤 시중까지 들기도 하는, 그런 파트너?!
파트너라는 말에 질색한 로젤린의 상상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바바라가 부담 가질 것 없다는 태도로 말했다.
“의미 그대로 연회석의 단순한 파트너이니 이상하게 여길 건 없다. 밤 시중까지 들라는 건 아니야. 대공 전하는 그런 쪽으로는 깔끔하시거든.”
바바라는 차분히 설명했다.
프레데릭은 미혼이고 약혼녀도 없었다. 반면에 그의 동생인 윌리엄은 일찌감치 결혼하여 아내가 있었다. 현재 슈벤하임 대공가의 권력은 두 형제에게 양분되어 있다.
대연회 등의 행사에서 한 쌍을 이루는 윌리엄 부부와는 달리 프레데릭은 아내 없이 홀로 행사를 진행한다. 단순히 그 모습이 보기 안 좋다는 이유만으로 바바라가 프레데릭의 파트너가 되었다.
“당연히 전하가 먼저 파트너를 요구하신 건 아니다. 라울 보좌관이 억지로 밀어붙여서 지금까지 관례처럼 이어지게 된 거지.”
“그렇습니까…….”
바바라의 설명을 이해는 했다.
두 형제가 권력을 양분하고 있다는 것은 곧 정치적인 라이벌이라는 뜻도 될 것이다. 가정을 잘 다스려야 국가도 잘 다스린다는 말이 있다. 여태 가정을 이루지 못한 프레데릭은 결혼한 동생 부부와 비교가 되고 있을 게 뻔했다.
공식적인 행사에서 형식상으로나마 아내의 자리를 채워 주겠다는 의도였다.
프레데릭이 결혼만 하면 해결되는 문제인데 서른이 넘도록 미혼이라는 것만 의아했다.
“전하의 파트너로 적합한 여성이 없어서 내가 결혼한 후에도 계속 파트너의 역할을 맡아 왔다. 파트너가 되려면 신분이 지나치게 낮아도 안 되고, 지나치게 높아도 안 되지. 귀족 여성을 파트너로 대동하면 단순한 파트너를 넘어서 혼담이 있는 상대라고 여겨지게 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기사는 적당한 신분이야.”
설명을 들으면서도 로젤린은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꼭 저여야만 합니까?”
“부담이 되나?”
“명령이시라면 따르겠습니다만, 내키지 않습니다.”
“부담될 건 없다. 공식적인 행사에서 옆자리만 채워 줄 뿐인 파트너라는 걸 참석하는 귀족과 관리가 모두 알고 있으니까 지나친 무례나 결례만 저지르지 않으면 돼.”
“어차피 모두 임시 파트너라는 걸 알고 있다면 남자가 여장을 해도 되지 않습니까?”
말을 하면서 로젤린은 별 뜻 없이 근처의 유일한 남자인 아벨을 보았다. 아벨의 어깨가 움찔했다.
“……나, 난 여장하기 싫다.”
“네가 여장하면 드레스가 찢어질걸.”
그 모습을 상상했는지 바바라가 낮게 웃었고, 아벨의 안색은 하얗게 되었다.
로젤린도 순간 상상하긴 했으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제가 여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임무를 맡는 겁니까? 저는 기사로서 대공 전하를 섬깁니다. 여자로서 전하를 섬기는 게 아닙니다.”
프레데릭의 파트너가 되도록 하라는 명령이 싫은 건 이것이다. 로젤린이 ‘기사’가 아닌 ‘여자’로서 파트너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
로젤린 메이어는 기사였다. 그리고 최후까지 기사여야 했다.
그 명제 앞에서 여자로서의 로젤린 메이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로젤린은 몰락한 가문의 빚과 명예를 자신이 짊어지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여자로서의, 아니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모두 버렸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한 기사여야 했다.
그것만이 그녀가 추락하고 더럽혀진 가문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바바라는 로젤린의 사정도, 심정도 모른다. 여자로서 섬기기 싫다는 그녀의 말을 표면적인 뜻으로만 이해했다.
“말하지 않았던가. 전하의 밤 시중까지 드는 건 아니라고. 그런 임무였으면 내 남편이 자살 기도를 하면서까지 날 말렸을걸?”
가벼운 우스갯소리를 덧붙였으나 로젤린은 입술만 깨물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건 없어. 호위를 겸하는 임무라고 여기면 된다. 단지 제복이 아닌 드레스를 입을 뿐이야.”
“……알겠습니다.”
그녀는 현재 기사이고, 바바라의 말은 설득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명령이다. 불복할 권리는 애초부터 없었다.
심란하기만 한 로젤린의 마음과는 아랑곳없이, 곧 알렉산더도 연무장으로 들어왔다. 도열한 기사들의 앞에서 알렉산더는 바바라를 비롯한 세 명의 새로운 기사대장을 소개했다.
제1기사대의 사무엘, 제5기사대의 바바라, 제6기사대의 해리였다.
기사대장이 새롭게 발탁되고 신입 기사대원을 뽑는 공고를 내며 그럭저럭 기사단의 정비가 시작된 다음 날. 로젤린도 호위기사로서 다시 근무하게 되었다.
바바라가 던지고 간 명령도 심란하다. 동료들의 빈자리도 여전히 날마다 새롭다.
로젤린은 우울한 마음으로 프레데릭의 개인 기마 훈련장으로 갔다. 기사단 본부로부터의 거리가 멀다 보니 항상 아슬아슬한 시각에 도착했는데, 오늘은 로젤린이 먼저였다. 입맛이 없어서 식사도 거의 하지 않고 나왔더니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왔다.
프레데릭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훈련장의 문은 열려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마구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내 두 마리의 흑마에게 여물을 주고 있는 프레데릭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의 뒷모습은, 등은 변함이 없다.
언제나 훈련장에서 보았던 등이었고, 전장에서 그녀의 앞에 있던 등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 안에서 이유 모를 뜨거운 기운이 왈칵 치솟았다.
“로젤린?”
인기척에 뒤를 돌아본 프레데릭의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서둘러 손을 털고 다가온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괜찮나?”
붉은 기운이 감도는 눈동자가 그녀를 감쌌다. 어루만져지는 볼이 따스했다.
“……!”
불현듯 프레데릭이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로젤린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을 얼른 내리며 사과했다.
“미안. 표정이 안 좋아보여서 나도 모르게 그만…….”
그제야 로젤린도 프레데릭이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무심코 프레데릭의 손이 닿았던 뺨을 손끝으로 쓸었다. 미적지근하게 흐려지려던 온기가 손끝으로 스며 사라졌다.
“푹 쉬고 오라고 했더니 얼굴이 이게 뭐냐. 무슨 일이야?”
“아닙니다. 그저…… 동료들이…….”
로젤린은 말끝을 흐리며 정중히 사죄했다.
“전하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나에게 미안할 게 있나. 그만큼 큰 전투를 치렀으니 당연하지.”
마수의 토벌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는 프레데릭이다. 그는 그녀가 쉽게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 조롱하거나 놀리지 않고 진지하게 응대해 주었다.
“제1기사대에서도 사상자가 열 명이 넘지. 핸텔 경도 전사하였고.”
“……예.”
“쉽게 기운을 내라는 말은 못하겠다. 어쩔 때는 가장 무책임한 말이 되거든. 시간이 약이 될 거라는 위로밖에 할 게 없군. 혹은 죽음과 상실에 익숙해지는 수밖에.”
따뜻한 위안도 아니고 진정 어린 공감도 아니다. 다만 담담하게 이어지는 경험자의 조언과 위로가 오히려 로젤린의 가슴을 두드렸다.
‘당신은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그 질문이 불쑥 튀어 올랐다가 목 끝을 넘기지 못하고 삼켜졌다.
대신 혀끝에 오른 질문은 훨씬 더 충동적인 질문이었다.
“전하는 기사들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투에서 사망한 동료는 전원이 기사다. 그리고 프레데릭은 기사를 혐오한다. 기사를 혐오하는 남자는 기사의 죽음을 무엇이라 받아들이는가.
감히 주제를 모르는 질문을 한다고 화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찮은 질문이라며 무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로젤린은 프레데릭을 믿었다.
기사를 혐오함에도 기사들의 신뢰를 받고, 기사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며, 기사들을 구하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쓴 프레데릭을 믿었다.
프레데릭은 놀랍다는 감정을 얼굴 가득히 띄웠다. 놀라움은 이내 헛웃음이 되어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내렸다.
“라울도 이런 돌직구는 던진 적이 없는데 말이지…….”
그는 가볍게 등을 돌려 여물을 먹는 흑마들에게로 걸어갔다. 답하는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로젤린의 귀까지 닿았다.
“네 말대로 난 기사를 싫어해. 십수 년이나 된 앙금이니까 쉽게 사그라지거나 버릴 수 있는 감정도 아니지. 동시에 나는 아이기스 나이트는 물론이고 휘하 기사단원들을 모두 기억하지. 우습지 않나?”
흑염룡이 낮게 울며 얼굴을 쓰다듬는 프레데릭의 손을 핥았다. 로젤린은 그의 등에 대답했다.
“이율배반적이십니다.”
프레데릭이 웃었다.
“정답이야. 나는 주군에게 충성을 바치며 죽는 것을 칭송하는 기사도의 명예를 경멸한다. 개죽음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덕지덕지 당위성을 붙이는 기사도란 것은 아주 역겹지. 하지만 일전의 전투는 다르다, 로젤린. 아이기스 나이트는 주인의 명령만을 맹목적으로 따라 짖는 개의 죽음이 아니야. 그들은 발트란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싸우고 죽었다. 나는 그 죽음을 존경해.”
말의 중간에, 프레데릭은 등을 돌렸다. 담담한 빛을 드리웠던 표정에 어느새 묘한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단순한 계산을 해 볼까. 한 명의 죽음으로 수만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넌 어느 쪽을 택할 거지?”
로젤린은 대답했다.
“한 명의 죽음입니다.”
“이유는?”
“저 또한 그것을 택하여 기꺼이 한 명의 죽음으로 대신할 테니까요.”
아하하. 낭랑한 웃음이 로젤린의 목소리와 섞이어 하늘을 날았다.
“어울리지도 않게 우중충한 이야기가 길어져 버렸군.”
프레데릭이 봉인된 피의 계약의 고삐를 던졌다.
“이런 기분일 때는 머리가 텅 빌 때까지 달리는 게 최고의 해결법이지. 좁고 답답한 훈련장을 떠나서 성문 밖으로 나가볼까? 성문 밖에서 달리는 건 처음이던가?”
그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프레데릭은 흑염룡에 올라 채찍질했다. 한 차례 높이 운 흑마가 달려갔다. 로젤린도 그의 뒤를 따라 봉인된 피의 계약을 몰았다.
따가운 바람이 볼을 스치고 프레데릭의 등은 그녀의 앞에 있다.
여자로서 그의 파트너가 되어 참석한다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다른 문제에 대한 해답은 찾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랴!”
로젤린은 말을 채찍질했다. 두 마리의 흑마가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말을 타고 동문 밖을 질주했다.
차가운 바람이 머리칼을 흩날리며 뺨을 아리게 했다. 폐 깊숙이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고 또 그녀의 숨과 함께 입 밖으로 토해졌다. 주변의 풍광이 끊임없이 뒤로 달아났다. 로젤린은 그저 달리고, 달리고, 달렸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머릿속이 텅 비었다. 세찬 바람 소리와 말이 우는소리와 지면을 힘차게 박차는 말발굽 소리만이 남았다.
그리고 프레데릭.
프레데릭은 말없이 그녀의 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그의 옷자락이 펄럭였다. 그녀보다 숱한 싸움과 숱한 죽음을 보내었을 그의 넓은 등이 앞에 있었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로젤린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등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느낌에 머리가 어지럽다.
전투가 끝나고 가슴 안에 깊이 응어리져 있던 것이 바람에 섞여 뒤로 흩날렸다.
바람이 사납게 스치는 볼이 따갑게 시리고, 손등이 차갑고, 딱딱한 안장에 오래 앉은 엉덩이가 아프고, 허벅지의 근육이 욱신거렸다. 잊고 있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앞에는 프레데릭의 등이 있다.
로젤린은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살아남은 자는, 살아남은 자의 몫과 의무를 취하여야 한다.
앞에 있는 프레데릭의 넓은 등을 보며, 그녀는 다시금 마음 안에 되새겼다.
두 마리의 흑마가 거친 숨을 뱉으며 성문 근처에서 멈췄다. 어느새 두 사람은 출발하였던 동문으로 돌아왔다. 로젤린은 오랜 승마로 인해 차가워진 손등을 주물렀다.
“감사합니다, 전하.”
“감사한 건 나야. 살아 있어서 고맙다.”
프레데릭이 희미하게 미소했다. 언제나처럼 가볍고 무게감 없는 어조인 듯하지만 로젤린은 그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담담한 그 한마디가 깊이 시렸다.
동료들의 죽음을 확인하였을 때도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로젤린은 약간 고개를 틀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 사람은 얼마나 많은 죽음을 앞서 보내었을까.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에게 감사하였을까.
그녀의 생존을 감사하는 그의 말에 솔직히 답할 수 없는 자신을 안다. 그렇기에 더욱 가슴이 시렸다.
언젠가 자신이 남겨진 모든 의무를 다하게 되면, 이 사람은…….
로젤린은 생각을 털어 냈다. 적어도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대공저로 귀택하십니까? 수행하겠습니다.”
“귀택하긴 할 테지만 지금은 아니고…… 넌 먼저 기사단으로 돌아가라. 난 들를 때가 있어.”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원래 혼자 다녔던 곳인 데다 성내라서 위험하지는 않아.”
호위기사가 되었던 초반에는 그녀를 피해 도망 다니기는 하였어도 호위를 거절한 적은 없었던 프레데릭이었다. 그런 프레데릭이 굳이 거리를 두려 하니 로젤린은 난감해졌다.
“제가 전하보다 실력이 부족하여 호위로서 부족하다는 점은 알고 있습니다만 유사시에 최소…….”
최소한 방패는 될 수 있다고 말하려는데 프레데릭이 말허리를 끊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야. 요 몇 년간 내가 본 신입 기사 중에서 널 뛰어넘을 녀석은 없을 거다. 나는 단지…….”
말을 하려던 프레데릭은 한숨을 쉬면서 말을 얼버무렸다.
“네가 보기에 그다지 좋지 않을 것 같아서 만류했다만, 생각해 보니 이것도 내가 마음대로 널 판단한 거로군.”
알쏭달쏭한 말을 남긴 프레데릭은 말머리를 돌렸다.
“같이 가자.”
“……아, 알겠습니다.”
그의 등을 보며 애매한 말의 의미를 고민하던 로젤린은 약간 늦게 프레데릭의 뒤를 따랐다. 프레데릭이 그녀의 실력을 의심하거나 그녀를 번거롭게 여겨 떨어트리려 한 게 아니라는 건 알았다. 무엇 때문일까.
성문으로 들어오며 말에서 내린 두 사람은 말없이 발트란 시내를 걸어갔다. 어렸을 때에는 평민으로 성장하고 대공위를 계승하고도 수시로 내성 밖으로 나오는 프레데릭은 익숙하게 말을 끌며 걸어갔다.
‘이상해…….’
로젤린은 그의 몇 발자국 뒤에서 걸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프레데릭의 호위기사로서 그녀는 언제나 프레데릭의 뒤에서 걸었다. 그의 등은 굉장히 익숙하다. 어쩌면 얼굴만큼 자주 본 것이 그의 등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등이 낯설었다. 아니, 낯설다는 의미는 정확하지 않았다. 항상 보아 왔던 일상적인 것이 불현듯 다른 것으로 바뀐 기분이다. 정작 프레데릭은 변하지 않았는데도.
로젤린은 그의 등을 생각했다.
전장에서 승리를 이끌던 등. 전투가 끝난 후 그녀를 업었던 등. 그녀의 앞에서 말을 달리던 등. 그리고 지금 그녀의 앞에 있는 등. 프레데릭의 등.
넓고 단단한, 사내의 등이 그녀의 시선을 가득 채웠다.
“로젤린, 다 왔다.”
걸음을 멈춘 프레데릭의 말에 로젤린은 흠칫 정신을 차렸다. 주군을 호위하면서 다른 생각을 하다니 이게 무슨 얼빠진 짓인지.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뺨을 한 번 찰싹 때렸다.
‘정신 차려야지.’
프레데릭이 도착한 곳은 한적한 주택가였다. 대낮의 주택가는 아이들의 소란이나 개들이 짖는 소리 외에는 조용했다. 그러나 프레데릭이 방문한 집은 아니었다.
“……전하…….”
안에서 문을 열고 나온 청년이 프레데릭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흐느꼈다. 로젤린도 아는 얼굴이었다. 이따금 기사단 내에서 몇 번 마주쳤던 아이기스 나이트의 평기사 브라운이다.
그제야 로젤린은 프레데릭이 직접 방문한 이유를 알았다.
브라운은 형제가 나란히 아이기스 나이트의 기사였다. 또한 브라운의 형은 2기사대의 부대장으로 썩은 재규어 떼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관은 아직 브라운의 집에 안치되어 있었다. 내일 성 밖의 공동묘지에 안장할 예정이라 했다. 브라운의 가족들은 슬픔에 젖은 와중에도 프레데릭의 방문을 황공히 맞이했다.
프레데릭은 관 앞에 고개를 숙이고 묵념했다.
“전하, 제 아들은 마지막까지 용감하였습니까? 전하의 기사로서 발트란을 훌륭히 수호하였습니까?”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은 중년의 부인이 오열했다. 프레데릭은 직접 허리를 굽혀 그녀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그의 의지는 아이기스 나이트에 있으며, 발트란과 영원히 함께할 것이네.”
통곡 소리가 높아졌다. 제 아버지가 죽은 줄도 모르고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아이의 웃음소리만이 천진했다.
로젤린은 프레데릭이 유가족을 위로하며 관 앞에서 작별을 고하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죽은 기사, 하물며 귀족인 정기사도 아닌 평기사의 가족을 직접 위문하는 주군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고통과 슬픔으로 가라앉은 그의 얼굴에서 로젤린은 또 다른 감정도 어렴풋하게 읽어 낼 수 있었다. 죄책감과도 비슷한 감정이었다.
- 시간이 약이 될 거라는 위로밖에 할 게 없군. 혹은 죽음과 상실에 익숙해지는 수밖에.
- 동시에 나는 아이기스 나이트는 물론이고 휘하 기사단원들을 모두 기억하지.
휘하의 기사단원들을 모두 기억한다는 프레데릭이다. 그가 과연 죽음과 상실에 무디어질 수 있을까.
브라운의 집을 나온 프레데릭은 몇 군데의 집을 더 방문했다. 유가족들이 슬픔으로 프레데릭을 맞고 슬픔으로 프레데릭을 보내었다.
온전한 시신을 되찾을 수 있었던 브라운의 집은 오히려 양호한 축이었다. 마수에게 물어뜯기고 사지가 잘려 턱없이 가벼운 무게의 관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비통한 통곡을 들을 때마다 로젤린의 가슴에도 슬픔이 겹겹이 쌓여 갔다.
동료의 죽음은 그녀의 고통만이 아니었다. 남겨진 자들의 슬픔과 죽은 자를 보낼 수밖에 없는 슬픔을 그녀는 알았다. 그들의 죽음을 위문하는 프레데릭의 슬픔도 알았다.
죽음을 위문하는 프레데릭의 모습은 무척이나 익숙하고 침착하다. 로젤린은 그녀가 모르는 프레데릭이 얼마나 많은 죽음을 거쳤는지 절실히 실감했다. 프레데릭의 말없는 슬픔이 그녀의 안에 쌓여 갔다.
“괜찮나?”
그러면서도 프레데릭은 그녀를 걱정했다. 익숙하게 슬픔과 고통을 안고 평상시처럼 그녀를 걱정하며 바라보는 그의 목소리가 시큰거렸다. 로젤린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서 마른침을 삼켰다.
“……늘 이렇게 하셨습니까?”
“아이기스 나이트에서 이번 전투처럼 대규모 사상자가 난 건 없던 일이라서 지휘관급의 몇 명밖에 위문하지 못하였군.”
“전투가 끝난 다음 날부터요?”
프레데릭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수많은 동료들이 죽고 다쳤다는 자신의 고통으로 허우적거리던 그녀는 그제야 프레데릭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지난 며칠이 지나며 그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익숙하게 고통과 슬픔을 삼키고 오히려 그녀를 위로했다.
로젤린은 프레데릭 체 슈벤하임이라는 남자가 등과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것을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이 사람의 짐을 조금이라도 나눠 질 수 있을까. 이 사람의 슬픔을 내가 위로할 수 있을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로젤린은 흠칫 어깨를 떨며 고개를 숙였다.
다음 날, 아이기스 나이트의 합동 장례식이 엄숙하게 치러졌다. 아이기스 나이트로서 장례식에 참석한 로젤린은 애도사를 낭독하는 프레데릭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았다.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거리인데, 그가 어떤 표정일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어떤 슬픔을 안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그러자 왠지 눈물이 나왔다.
* * *
프레데릭의 호위 임무도 예전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기사대장들이 임명된 기사단도 단원을 충원하면서 일상은 다시 천천히 로젤린의 곁으로 스며들었다.
제1기사대에 새로 부임하게 된 기사대장 사무엘은 과거에 마수사냥꾼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현재는 전쟁터에서 공을 세워 준남작의 작위를 받은 기사였다.
“핸텔 경은 나도 존경하던 기사였다. 그분의 빈자리를 내가 완전히 대신할 자신은 없지만 함께 열심히 해 보자.”
신중한 첫 인사만큼 사무엘은 진중한 사내였다. 마수를 사냥하는 기사단을 직접 지휘하는 건 처음이지만 전장의 경험은 풍부했다.
로젤린은 일개 평기사다. 그런 자신이 상관을 평가하는 건 건방지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사무엘은 훌륭하고 믿음직한 상관이 될 것 같았다.
일상이 돌아오며 로젤린의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여유가 생긴 틈에는 거의 대부분 프레데릭이 떠올랐다.
뒤치다꺼리를 도맡아하는 라울은 쉽게 동의하지 않겠으나, 프레데릭은 꽤 괜찮은 사람이다. 적어도 로젤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일개 호위기사에 불과한 그녀에게 따로 시간을 내어 성실히 기마술을 가르쳐 주고, 사소한 이야기를 할 적에도 스스럼이 없다. 권위 의식으로 아랫사람을 짓누르는 이가 아니었다.
아랫사람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고통으로 여기는 주군도 드물다. 로젤린은 그에게 큰 위안을 받은 동시에 깊이 공감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프레데릭을 섬길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누구라도 상관없던 주군이, 프레데릭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로젤린은 자신의 안에 일어난 변화를 헤아리며 고민에 잠겼다.
가슴 보호대가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오전 중에 들은 그녀는 프레데릭의 훈련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대장간에 들렀다.
가슴 보호대는 무척 훌륭했다. 대장장이에게 감사를 표하고 기숙사로 돌아오니 의외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바라였다.
“아, 왔나? 기다리고 있었다, 메이어 경.”
“가엔라인 경께서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다다음주가 수확제가 아닌가. 경이 시간이 난다면 슬슬 드레스를 맞춰야 할 시기가 되어서 말이지.”
수확제. 로젤린은 헛숨을 들이켰다.
말을 듣고 보니 바바라의 뒤에는 일행이 있었다. 재봉사와 조수들로 보이는 세 명의 여인이었다.
‘……드레스라니.’
무심코 한숨이 나왔다. 프레데릭의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치중하여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다. 대연회에 참석하려면 당연히 드레스를 입어야 하는데.
“일이 있나? 미리 말하지 않고 찾아와서 미안하다. 변명 같지만 기사대의 일로 바빠서 말한다는 걸 깜빡 잊었다.”
“아닙니다. 들어오십시오.”
로젤린은 불편한 생각을 한숨과 함께 흘려보내며 문을 열었다. 오늘이든 내일이든 드레스는 맞춰야 한다. 기사단에 갓 부임해 와서 정신없이 바쁠 바바라를 약속도 안 했으니 나중에 오라고 돌려보내기도 미안하다.
바바라 일행은 로젤린의 조촐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재봉사가 먼저 인사했다.
“재봉사인 이사벨 듀발입니다. 메이어 경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직접 뵐 수 있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정석적인 인사를 서로 하면서도 뭔가 귀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듀발이시라면, 혹시…….”
이사벨이 싱긋 미소했다.
“대공 전하의 보좌관인 라울이 제 남편입니다.”
“그러시군요.”
로젤린은 오늘도 프레데릭을 찾아다니느라 바쁜 라울을 떠올렸다.
간단한 소개가 끝나자 이사벨은 곧 로젤린의 신체 사이즈를 측정했다.
“키가 굉장히 크시네요. 다른 드레스를 수선해서 입으시기엔 힘들겠어요. 참, 갑옷은 벗으시고 가슴 보호대도 끌러 주세요.”
신장, 가슴둘레, 허리둘레, 팔꿈치 길이 등등 신체 곳곳이 기록되었다.
15살 이후로 드레스를 입어 보는 것도, 드레스를 맞추는 것도 처음이다. 그때에는 이렇게 서서 재봉사가 자신의 신체를 측정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 어머나, 로젤린 아가씨. 또 키가 크셨군요? 도련님들이 14살이셨을 때보다 더 크셔요.
- 저희 아가씨는 곧 검술로도 두 분 도련님들을 이길 거라고요.
오랜 세월 남작가의 옷을 재단하였던 재봉사가 로젤린의 몸종 하녀와 수다를 떨었다. 그사이에서 로젤린은 그냥 멋쩍게 웃고만 있었다.
- 내가 아무리 강해져도 작은오빠는 못 이겨. 큰오빠라면 지금도 이길 자신이 있어.
- 작은 도련님은 수잔나 아가씨께도 매번 지시잖아요.
- 우리 집에서 수잔나 언니가 제일 강하다는 거네?
환영 같은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로젤린은 얼른 고개를 저어 과거의 기억을 떨쳐 냈다. 이제는 완전히 잊힌 기억의 파편일 뿐이다. 지금의 그녀에게는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조수들과 신체 사이즈를 측정한 이사벨은 옷감 견본을 가져왔다.
“제도에서 오신 메이어 경의 눈에는 차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슈벤하임 대공령은 북쪽 변방인지라 제도의 최신 유행에 많이 뒤처졌으니 그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저도 무도회에 나간 적은 거의 없어서요.”
검투사가 된 후에는 가끔 그녀를 후원하는 귀부인의 파트너로 참석했을 뿐이다. 피곤한 얼굴로 기대어 서 있던 바바라가 다가와 옷감 견본을 같이 바라보았다.
“메이어 경의 머리색이 짙으니까 화려한 색이 어떤가?”
“자칫 너무 튀어 야하게 보이는 색이 아니라면 그 편도 좋지요.”
두 사람은 옷감 견본을 넘기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로젤린도 견본의 색상은 보고 있었으나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드레스를 입는 것 자체가 내키지 않으니 의욕이 생길 리가 없다.
“메이어 경께서는 어느 색이 마음에 드시나요?”
두 사람이 고르는 걸 아무거나 선택할 작정이었는데 이사벨이 그녀의 의견을 구했다.
“으음…….”
로젤린은 미간까지 찌푸리며 옷감을 보았지만 없는 의욕이 생겨나지는 않았다.
“이건 어떤가요.”
결국 그녀는 아무 옷감이나 가리켰다. 이사벨이 그녀가 가리킨 옷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은은한 은빛을 띈 연한 재색의 옷감이었다.
“메이어 경은 흰색 계열을 좋아하시나요?”
“예, 뭐.”
대충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참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다음은 액세서리 차례였다. 다행히 액세서리는 로젤린의 의견이 크게 필요 없었다. 프레데릭의 파트너로 참석하지만 부인도 약혼녀도 아닌 입장이다. 액세서리는 적당히 심플한 디자인으로 목걸이와 머리 장식 정도만 착용하면 된다고 바바라는 설명했다.
“전부 대공 전하의 사비에서 제공되는 거니까 값비싼 보석을 사적인 용도로 구매해도 무방해.”
장난스러운 뒷말도 따랐다.
빚더미에 깔려 있을 예전이었다면 혹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로젤린은 연회장에서 착용할 딱 두 개의 목걸이와 머리 장식만 준비해 달라고 말했다.
“가발도 준비해야겠군요.”
이사벨이 로젤린의 머리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짙은 푸른색이 도는 흑발은 밤하늘의 빛처럼 깊고 아름다운 색이었다. 인공적인 염색으로 유사한 색감을 내기란 어렵다.
머리카락이 짧다는 이유로 이 아름다운 색을 가발로 덮어야 한다는 게 이사벨은 아쉬웠다.
“최대한 메이어 경의 원래 모발과 비슷한 색의 가발로 마련해 보겠습니다.”
로젤린은 이사벨이 뭘 말하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얼른 이 시간이 지나기만을 바랐다.
그녀의 마음을 알았는지 이사벨은 모든 용건이 끝나마자 곧 일어났다. 로젤린은 하녀에게 부탁해서 차라도 한 잔 대접하려고 했지만 사양하고 돌아갔다. 그녀가 마치 자신의 내키지 않는 속내를 꿰뚫어 보고 먼저 자리를 비킨 것 같아서 미안했다.
그리고 그 속마음은 이사벨도 알아차린 모양이다.
“여전히 내키질 않나?”
“……죄송합니다.”
“일을 넘긴 건 나니 경이 죄송해할 것은 없지. 앞으로도 몇 번 더 들러서 가르쳐 줘야 하는데 이러다 미운털이 박히게 생기겠군.”
쓴웃음은 지었으나 언짢은 기색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거부감을 드러냈던 로젤린에게 일을 넘긴 게 미안한 눈치였다.
죄가 없는 그녀에게 불편한 기색을 계속 비치는 것도 미안해서 로젤린도 억지로 미소했다.
프레데릭은 정부가 되는 관계를 극히 혐오한다. 혈통상의 부모들이 그에게 남겨 준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그의 사전에서 정부 따위는 없었다.
사랑을 하면 결혼을 해야 한다. 결혼을 하지 못하면 헤어져야 한다. 각기 다른 사람과 결혼한 후에도 서로의 애인이자 정부로 남는 관계는 있을 수가 없었다.
이 논리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긴 했다.
프레데릭은 한 번도 정열적이고 뜨거운 사랑을 한 여자가 없으니까.
하나 대공 부인이 되기에 적당한 지위와 적당한 성품의 숙녀를 찾으면 그녀에게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노력 여부와는 달리 결혼은 하지 못했다.
마리안 부인이라는 무서운 벽을 여자들이 넘을 엄두도 못 낸 탓이다.
- 저 같은 여자가 어찌 전하의 반려가 될 수 있겠습니까.
청혼을 거절하는 여자에게 ‘내 여자 한 명은 지킨다.’라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는 않았다. 좀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것 같지 않은가.
청혼을 거절하고도 애인 관계로 남고 싶다는 여자는 프레데릭이 거절했다. 그렇게 스물 중반이 지나니 결혼할 생각도 없어졌다. 혼처를 찾는 것도 귀찮았고, 매번 차이는 것도 귀찮았다.
결혼하라고 재촉해 봐야 프레데릭이 들을 사람은 아니다. 측근들은 포기한 결혼 문제를 오히려 윌리엄이 이따금 재촉했다. 그럴 때마다 프레데릭은 대충 넘기거나,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하지, 라고 대꾸하곤 했다.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한다. 이 말은 곧 결혼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자신이 서슴없이 사랑한다고 지칭할 수 있을 만큼 특별한 여자가 생길 리가 없으니까. 프레데릭은 확신했다.
그런데 생겼다.
남자지만.
당장은 결혼이라는 단계까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어쨌든 로젤린이 그에게 의미를 갖는 사람이 되었다는 건 확실했다.
“으음.”
프레데릭은 낮게 신음했다.
사실 이런 고민도 우습다. 로젤린의 마음도 모르니 말이다. 성희롱이라고 하는 걸 보면 좀,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로젤린은 남자를 연애 대상으로 안 볼 테니까 당연한 거겠군.’
그래도 상관은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이렇게 로젤린과 대화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밤늦게까지 서재에 박혀 있던 프레데릭은 고개를 들었다.
“주인님, 듀발 님이 오셨습니다.”
“이 시간에?”
조금 놀랐다. 물론 라울이 땡땡이를 치는 그를 찾으러 대공저에 자주 방문하기는 한다. 하지만 요즘은 마수 떼의 습격으로 인한 일 처리 때문에 낮 시간에 집무실에 계속 있었다. 오후에는 착실히 로젤린과 만나긴 했지만.
급한 일인가 싶어서 얼른 들어오게 했다.
“웬일이냐? 저녁은 먹었고?”
“퇴근하려다가 낮에 깜빡한 보고가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그냥 내일 보고하지?”
“내일은 일하실 겁니까?”
확답은 할 수 없어서 프레데릭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울은 그의 반응을 무시하고 제 용건을 꺼냈다.
“원래는 가엔라인 경이 전하께 보고해야 하는 내용입니다만 낮에 기사단의 훈련이 있어서 제게 부탁했습니다.”
“오후에 찾아오라고 하면 되지 않나. 어차피 훈련장에 있을 텐데.”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요.”
‘무슨 방해?’라고 프레데릭이 생각하는 사이에 라울이 말을 이었다. 늦은 시간에 상관의 자택까지 찾아와서 업무 보고를 하는 게 달가울 리가 없다. 빨리 끝내고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메이어 경이 앞으로는 전하의 파트너가 될 거라고 합니다.”
“……뭐?”
예상하지도 못한 말이었다. 뒤통수를 후려 맞기라도 한 느낌이다. 멍하니 내뱉은 반문에 라울이 반복해서 대꾸했다.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번 수확제 대연회부터 가엔라인 경이 아니라 메이어 경이 전하의 파트너입니다.”
“……왜, 왜?”
이번의 반문은 아까보다는 뚜렷했다. 조금 목소리가 떨리긴 했지만.
“왜라뇨? 본인이 작위가 있고, 자식도 있는 유부녀를 언제까지 파트너라고 데리고 다니실 겁니까? 지금은 잠잠하지만 언제 이상한 소문이 돌지 모릅니다. 프레데릭 님의 명예는 상관없지만 가엔라인 경의 명예를 더럽힐 수는 없죠.”
“아, 아니. 그건 나도 이해하는데…… 왜 로젤린이냐?”
그야 물론 로젤린은 우락부락하게 쓸데없는 근육이 붙지도 않았다. 허리를 안거나 업었을 때 느낀 거지만 꽤 탄탄한 근육이어도 둔하지 않고 날렵하게 느껴질 정도다. 외모도 상당히 중성적이다.
여장을 해도 어색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솔직히 좀 보고 싶긴 했다.
하지만 여자 기사를 두고 남자 기사가 굳이 여장까지 하면서 파트너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나.
“가엔라인 경은 유부녀인 자신보다 귀족은 아닐지언정 미혼인 메이어 경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저도 반대는 하지 않았고요.”
이상했다. 남자를 파트너로 삼는다는 비상식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라울이 앞장서서 반대할 텐데.
고민은 깊었지만 여전히 당황하고 있는 프레데릭은 꾀꼬리처럼 반복했다.
“너까지 왜?”
“메이어 경을 마음에 두고 계신 게 아닙니까?”
이번에는 진짜 놀랐다.
‘어째서 이 자식이 나보다 더 먼저 내 마음을 꿰뚫어 본거지? 설마 낮잠 자다가 로젤린의 이름이라도 불렀나?’
놀라서 반문도 못하는 프레데릭에게 라울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쓸데없는 얘기는 빨리 빨리 끝내고 얼른 돌아가서 마누라 옆에 눕고 싶다는 게 역력히 드러나는 목소리였다.
“프레데릭 님처럼 귀찮은 걸 질색하시는 분이 이렇게 오래 개인 훈련을 하신다면 뻔한 거 아닙니까. 그것 말고도 이것저것 낌새는 있었고요.”
“…….”
그건 그렇다. 충동적으로 훈련을 시작했다가 금방 끝내버렸을 테니까.
얌전히 입을 다물었던 프레데릭은 제일 궁금한 걸 물었다.
“그럼 로젤린이 드레스도 입고, 화장도 하고, 액세서리로 꾸미고, 뭐, 그렇게 치장을 하나?”
“네, 오늘 이사벨이 메이어 경의 드레스 상담을 하러 간다고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준비까지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로젤린이 드레스를 입으려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물론 로젤린은 지금도 중성적으로 잘생겼으니 여장을 하고 드레스를 하면 상당히 잘 어울릴 것이다. 그렇지만 남자였다.
남자인 로젤린이 흔쾌히 드레스를 입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 의도로 물었지만 라울은 기사라는 그녀의 신분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가엔라인 경이 설득을 했다고 합니다.”
“……드레스를 입으라는 걸?”
“다른 여자 기사도 없으니까요.”
그것도 그렇다. 현재 여자 기사는 한 명도 없고, 남자 기사 중에서는 로젤린이 제일 훤칠하니까.
‘게다가 입술도 예쁘고 부드럽지……. 화장을 하면 더 예쁠 거야.’
남자가 굳이 여장을 해야 한다는 내용에 위화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프레데릭은 제 좋을 대로 해석하고 만족해 버렸다. 드레스를 입은 로젤린이라니.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안 온다.
괜히 두근두근해진 그는 물러가는 라울에게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하고 공상에 빠졌다.
드레스 입은 로젤린.
진짜 보고 싶다.
* * *
프레데릭은 남자와 깊은 관계가 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성적이든, 연인이든.
남자와 연애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주변에 조언을 구해 볼 사람도 없었다.
그렇지만 남자든 여자든 호감을 쌓기 위한 인간관계의 기본은 친밀함이다. 개인 훈련이라는 핑계로 날마다 얼굴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만하면 기본적인 친밀함을 쌓지 않았을까.
한편으로는 의도하지 않은 성희롱 발언이 친밀함을 깎아 먹은 건 아닌가, 하는 고민도 들었다.
다행히 다음 날 훈련장에서 다시 본 로젤린은 조금 경계하는 눈치이긴 했으나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자신을 자른다고 말할지 아닐지 로젤린도 역으로 살펴보고 있다는 건 몰랐다.
‘좋아.’
안심한 프레데릭은 신중하게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로젤린.”
“넵.”
“마수 떼가 습격했을 때 군마를 잃었다고 했었지? 새 군마는 배당받았나?”
질문이었지만 사실상 확인에 가까웠다. 마수 떼가 습격하였을 당시에 군마도 많은 피해가 있었다. 훈련 받은 기사도 그렇지만, 훈련 받은 군마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아직 군마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다. 역시 로젤린도 마찬가지였다.
“아니요. 현재 군마가 부족하여 제 개인 군마는 배당받지 못하였습니다.”
생각한 대로였다.
프레데릭은 혹시 로젤린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래? 그럼 봉인된 피의 계약을 주마.”
그래도 걱정이 되어 주절주절 몇 마디를 더 붙였다.
“아무래도 윌리엄을 낙마시킨 말이다 보니 위장하였어도 측근에게 쉽게 주기는 곤란해서 말이다. 혹시 죽은 아버지의 마누라가 말을 알아볼지도 모르는 거고. 기사인 네가 갖고 있으면 죽은 아버지의 부인도 말을 눈여겨보지는 않겠지.”
“감사합니다!”
걱정한 것과는 다르게 로젤린은 굉장히 선뜻 감사를 표시했다. 그러고 보니, 기마술을 가르쳐 준다고 했을 때도 고민하거나 형식상의 사양도 하지 않았었다. 그렇다는 건, 역시…….
‘역시 호감은 좀 있나?’
프레데릭은 무심코 어깨를 쭉 폈다. 자신감이 조금 생긴다.
잘릴 때 잘리더라도 챙겨갈 건 챙겨 가겠다는 로젤린의 생각은 알 리가 없었다.
‘설마 쩨쩨하게 줬던 말을 도로 빼앗아 가지는 않겠지.’
동상이몽 속에 봉피의 고삐는 로젤린에게 넘어갔다. 그동안 로젤린이 죽 타기도 했던지라 흑마는 순순히 그녀의 앞에 섰다.
“그런데 전하, ……혹시 말의 이름을 바꿔도 됩니까?”
“왜? 봉인된 피의 계약이 어때서?”
“아니, 그게…… 아닙니다. 그냥 그 이름으로 하겠습니다.”
약간 떨떠름해졌던 얼굴을 곧 편 로젤린은 콧노래까지 작게 흥얼거리면서 말의 갈기를 쓸었다. 엉켜 있던 말의 갈기가 그녀의 손끝으로 가다듬어지면서 부드럽게 흩날렸다.
좋은 광경이었다.
저 모습을 그대로 액자를 담아 걸어 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프레데릭은 흐뭇해했다.
내친김에 그는 아끼던 망토까지 팔랑거렸다.
“흑마를 타고 검은 망토를 펄럭거리면 죽여주는데 이것도 세트로 줄까?”
나직하던 콧노래가 딱 멈췄다. 로젤린은 그와 그의 닭 털 망토를 힐끗 보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로서는 도저히 전하의 패션 센스를 흉내 낼 수가 없어서요.”
“내 센스가 그렇게 멋진가?”
“……전하께서 만족하신다면 좋은 거겠죠. 네…….”
모호한 대답이었으나 프레데릭은 이번에도 좋을 대로 해석했다. 호감도 있고, 센스까지 멋지단다. 한 발자국 전진한 느낌이 뿌듯했다.
성희롱 사건이 있던 다음 날은 그렇게 별 탈 없이 끝났다.
‘성희롱을 사과하시려고 한 건가.’
프레데릭의 선물을 로젤린은 그렇게 해석했다. 키스 사건도 그랬지만, 무례한 행동 후에 바로 사과를 하는 면은 꽤 좋다고 생각했다.
슈벤하임 대공령에서 프레데릭은 만인지상의 위치이다. 그만한 위세를 가진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사과하는 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애초에 하지 않으신다면 더 좋겠지만, 그래도…….’
위에 있으면서도 진솔하고 책임도 질 줄 아는 사람이다. 한데 어째서 일만은 죽어도 안 하는지 더 궁금해졌다.
프레데릭도 프레데릭 나름으로 고민 중이었다.
선물을 아예 거절하지도 않고, 부담스러워하지도 않고, 적당히 좋아하며 받았다. 앞으로도 선물을 주는 건 괜찮은 방법일 것 같았다.
‘그런데 무슨 선물을 주냐고.’
여자에게 줄 선물이라면 목록을 작성할 수도 있다. 서로 잘 모르는 사이더라도 액세서리라는 만고불변의 기본 선물이 있으니까. 거기다 대공이라는 지위까지 겹치면 어지간한 여자는 선물을 사양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자에게는 뭘 주면 될까.
‘칼? 갑옷?’
왠지 무드가 없었다.
옷도 생각을 해 봤지만 늘 기사단의 제복이나 갑옷만 입고 있는 놈이니 사복 취향이 뭔지도 몰랐다.
그리고 깨달았다. 사복뿐만이 아니라 로젤린의 취향 자체를 몰랐다.
‘이럴 수가.’
프레데릭은 뼈저리게 반성했다. 취향을 아예 모르는데 무턱대고 선물을 줘 봤자 부담스럽기만 할 것이다.
‘일단 취향부터 알아야겠다.’
고민을 잠시 접은 프레데릭은 로젤린과 만날 오후의 특훈을 기다렸다.
다음 날 특훈에서 로젤린은 봉피를 타고 왔다. 자신이 선물한 말을 잘 타고 있는 걸 보니 뿌듯했다.
슬슬 상황을 살피면서 적당한 타이밍을 만들었다.
“봉인된 피의 계약은 어떠냐?”
“제 말을 아주 잘 듣습니다. 좋은 선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에 든다니 나도 기쁘군. 취향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염려했거든.”
로젤린이 ‘말의 취향? 말의 털 색깔 취향인가?’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침내 프레데릭은 원래 용건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네 취향은 뭐지? 내 호위기사로 근무한 지 제법 일수가 지났는데도 부하의 취향도 모르고 있군.”
“어떤 취향을 말씀하십니까?”
“뭐, 옷이나, 물건이나, 보석이나, 액세서리나, 그런 것들.”
프레데릭이 주고 싶어 하는 선물의 목록이라는 걸 모르는 채 로젤린은 대답했다.
“옷은 되는 대로 편한 셔츠나 바지를 입고, 물건은 환금성이 강한 것, 보석이나 액세서리는 비싼 걸 좋아합니다.”
검투사일 때 로젤린은 팬과 후원자들에게서 많은 선물을 받았다. 그 선물의 대부분은 돈으로 환금되었다. 로젤린이 빚 때문에 검투사가 되었다는 건 비밀도 아니다. 팬과 후원자들은 환금하기 쉬운 선물들을 했다.
직접 돈으로 주거나, 부담스러울 만큼 비싼 선물은 로젤린이 사양했다. 덕분에 그들은 적절한 가격의 선물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지금의 프레데릭 못지않은 고민이었다. 치열한 눈치 싸움은 덤이었다.
‘로젤린이 부담을 갖지 않을 선을 지키면서도, 다른 후원자들보다는 비싸고 좋은 걸 줘야 해!!’
그 사실은 모르는 프레데릭은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비싸다니. 얼마나 비싼 거? 비싸다는 게 어느 정도지?’
비싸다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 다르지 않은가. 게다가 두 사람은 현재 평범한 주종관계일 뿐이다. 무턱대고 비싼 선물을 준다고 로젤린이 쉽게 받을까.
‘왜 이런 걸 저에게 주십니까?’라고 물으면 대꾸할 말이 없다.
프레데릭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틀었다.
“그것 말고 좋아하는 음식 같은 건? 레젠 토박이인데 먼 북쪽으로 와서 요리가 입맛에 맞나?”
“발트란의 요리는 향신료를 덜 쓰고 조리 방법이 상대적으로 간단한 느낌입니다. 그래도 질리지 않고 맛있습니다.”
의심 없이 선선히 대꾸하던 로젤린이 낮게 탄성을 뱉었다.
“아! 발트란의 술은 무척 마음에 듭니다. 여기 술은 기본적으로 도수도 높고 자주 마셔도 주변의 눈치가 덜 보여서 좋습니다.”
맞다, 술.
프레데릭도 검지와 엄지를 딱 튕겼다. 그러고 보니 로젤린과 만났던 첫날에 얘기한 것도 술이다.
모름지기 남자끼리 우정을 다지는 방법은 술이 최고 아닌가. 프레데릭이 다지고 싶은 건 우정이 아니었지만, 아무튼.
“저녁에 술이나 한잔하러 갈까?”
이만하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대화의 흐름이 아닐까. 프레데릭은 자신의 화술이 뿌듯하였지만 곧 오산이었음이 밝혀졌다.
“……전하와 저, 단둘입니까?”
로젤린이 갑자기 경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의도하지 않았던 몇 차례의 실수로 로젤린의 안에는 ‘성희롱범’이라는 낙인이 찍혔던 프레데릭이다. 사과를 받고 앙금도 풀리긴 했지만 파트너 문제가 새로 생겼다. 술 마시러 가자는 말에 저절로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자고로 술이란 남자들이 음험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주 쓰는 방법이 아닌가. 물론 프레데릭이 그렇게까지 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여자의 본능이 경계를 곤두세웠다.
로젤린이 경계하자 프레데릭도 움찔했다.
‘뭐, 뭐야. 또 실수했나?’
슬쩍 눈치를 살펴보았다. 로젤린은 경계심만 곤두세우고 있을 뿐 혐오스러운 눈초리는 아니었다.
“그, 그렇지. 라울도 함께 가는 거지, 물론. 그렇고말고. 직속 부하들과 친목 도모를 하는 의미라고 할까. 하하하.”
얼떨결에 제일 만만한 라울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횡설수설하긴 했지만 단둘이 가자는 제안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로젤린은 표정을 풀었다.
“너무 늦게까지 마시는 게 아니라면 좋습니다.”
라울을 제물로 바치고 로젤린의 승낙을 얻었다. 프데레릭은 안도하여 가슴을 쓸었다. 또 한 걸음, 진전이다.
하지만 세상만사 반드시 뜻대로 되는 건 없다.
“안 갑니다.”
발걸음도 가볍게 사무실로 찾아온 프레데릭에게 라울은 딱 잘라 거절했다.
“……왜?”
“바빠 죽겠는데 술은 무슨 얼어 죽을 술입니까.”
그의 책상에 쌓인 서류는 도무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거리를 늘리는 주범인 프레데릭은 몹시 찔렸다.
“일하마. 내일도 안 놀고 부지런히 일할 테니까 가자.”
“그래도 안 갑니다.”
라울은 여전히 쌀쌀맞았다.
“피곤이 쌓였다고요. 술 마실 시간에 집에 가서 잠이나 잘 겁니다.”
“술 마시면 피로가 풀리지 않을까?”
“술을 마시는 것보다 이사벨 손을 잡는 게 더 빨리 풀립니다.”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은 없었다. 얌전히 입을 닥친 프레데릭에게 라울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오셨으니까 일거리는 갖고 가세요. 내일까지 일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죠?”
눈 밑이 퀭한 라울의 얼굴을 봐 버렸다. ‘내일까지 일하는 것엔 네가 술자리에 따라가는 조건이 붙어 있어.’라는 뻔뻔한 발언은 할 수 없었다.
결국 프레데릭은 일거리만 싸 들고 터덜터덜 돌아갔다.
어떻게든 약속 시각에 맞춰서 할당된 서류는 다 결재하고 차후 명령까지 끝냈다. 프레데릭은 일을 안 하는 것이지, 무능한 상관은 아니었으니까.
약속 장소는 시내의 술집이었다. 술과 안주의 질은 대공저가 훨씬 더 좋다. 기사단 본부에서 오기에도 편하다. 그러나 기사에게 상관의 자택에서 술을 마시자고 할 만큼 프레데릭이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약속한 술집까지 가면서도 걱정이 태산이었다.
‘라울이 없다고 그냥 돌아간다고 하면 어쩌나. 일부러 라울을 떼어 놓고 왔다고 의심하면 어쩌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와중에도 발걸음은 착실하게 술집으로 향했다. 슬슬 저녁을 먹고 술을 한잔하러 올 시간이다. 술집은 손님들로 붐볐다. 술집 안으로 들어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로 평민들이 드나드는 술집이다. 손님도 많고 시끄럽다. 공기 중에는 술 냄새와 요리 냄새와 시끄러운 말소리가 혼탁하게 떠다녔다. 간간이 소리를 지르거나 요란한 웃음소리도 터졌다.
“…….”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프레데릭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이 혼란함 속에서도 로젤린을 한눈에 찾았다. 뒷문 옆의 구석진 테이블에 앉은 녀석의 주변만 또렷했다. 그곳의 공기만 청량하게 씻어 내린 것만 같다.
프레데릭은 낮은 숨을 토했다가, 눈두덩을 한 번 문지르고는 로젤린에게 갔다.
“내가 많이 늦었나?”
하릴없이 물만 홀짝이던 로젤린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닙니다. 제가 일찍 나왔습니다.”
“시내가 낯설 거라고 생각했는데 잘 찾아와서 다행이야.”
“예전에 동료들과 한 번 마시러 왔던 가게라서요. 저, 그런데 보좌관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게…… 일이 너무 바빠서 나오기가 힘들다고 한다. 일부러 나오지 말라고 한 건 절대 아닌데 요즘 일이 많다 보니 상황이 공교로워졌군.”
“…….”
로젤린은 대답이 없었다. 프레데릭은 슬그머니 눈치를 살펴보았다. 로젤린과 친목을 쌓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단둘이 술을 마시는 게 내키지 않는다면 별수 없다.
“멀리 나오게 해서 미안하지만, 내키지 않는다면 다음 기회에 마시는 걸로 하지.”
“예? 아닙니다. 보좌관님도 많이 바쁘실 텐데 괜히 부담을 드린 것 같아서 죄송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하며 로젤린은 그대로 서 있었다.
술자리를 파하지 않겠다는 뜻이라는 걸 프레데릭은 잠시 후에 이해했다. 다행이다.
그가 먼저 앉자 로젤린도 앉았다.
“여기, 주문이요!”
로젤린이 점원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옆모습을 보면서 프레데릭은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술이든, 오늘은 정말 달게 느껴질 것만 같다.
약속 장소인 술집으로 가기 전에 로젤린은 고민했다.
사소하긴 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문제였다. 가슴 보호대를 할까 말까.
‘……요즘에는 사석에서 잘 안하긴 하지만…….’
검투사였을 때에는 콜로세움과 숙소 내에서도 꼬박꼬박 가슴 보호대를 하고 있었다. 저열한 놈들이 언제 어디서 수작을 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기사단은 확실히 편했다. 로젤린이 여자라는 것이나 출신 등을 문제 삼고 있는 기사단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모두가 자신을 인정한 동료가 되어 있을 거라는 순진한 상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를 꺼려 하는 기사단원이 앞에서 대놓고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입단한 초기에는 주변을 경계하기도 하고, 스스로도 조심하는 의미에서 가슴 보호대를 하고 다녔다. 기사단의 대장장이에게 새로 맞춘 가슴 보호대는 훨씬 가볍고 착용감이 좋았다.
그래도 가슴을 압박하여 누르는 것이니 갑갑했다. 방으로 돌아온 로젤린은 가슴 보호대를 제일 먼저 벗고 쉬었다.
지금은 기숙사 내라면 안하고 다닐 때가 많지만, 프레데릭 앞에서는 한 번도 벗은 적이 없었다.
‘또 이상한 짓을 하실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으음. ……. 아니, 조금은 경계하고 있나.’
고민하던 로젤린은 결국 가슴 보호대를 착용했다. 일단 호위기사이기도 하니 프레데릭과 만날 때에는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항상 갖추는 게 도리일 것이다.
그렇게 술집으로 왔는데, 막상 함께 오기로 했던 라울도 없었다.
‘어쩐담.’
솔직히 돌아갈까, 하는 고민을 한 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프레데릭의 얼굴을 보고는 그냥 자리에 앉기로 했다. 상황이 바뀌었음을 미안해하고 염려하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니 그냥 자리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대로 술자리를 파한다면 여기까지 오신 전하께도 폐가 되는 거니까.’라는 핑계가 떠오른 건 자리에 앉은 후였다.
“…….”
“…….”
자리에 앉았다. 앉긴 했는데 할 말이 없었다.
로젤린도 프레데릭도 마주 보고 앉은 채 애매하게 침묵했다. 기마술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하루에 반나절씩 매번 만났다. 그때는 대화를 하자고 의식하지 않아도 이야기가 술술 나왔는데, 막상 술자리가 마련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매일매일 보는 얼굴이니 요즘 잘 지내고 있는지나, 오늘 날씨가 좋다든가 하는 화제도 부적절하다. 로젤린은 손에 쥐고 있는 물 잔을 만지작거리다가 한 모금 마셨다. 무슨 화제로 말문을 트면 될까.
“…….”
“…….”
한없이 가라앉던 어색한 시간을 종업원이 구원했다.
“주문하신 맥주 나왔습니다!”
활기찬 목소리로 말하며 테이블에 술과 안주를 늘어놓았다. 맥주와 간단한 감자구이였다. 메뉴는 프레데릭이 주문했다.
로젤린은 먼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일전에도 왔던 가게였으므로 큰 기대 없이 마셨는데 아주 맛이 좋았다.
“전하, 그냥 맥주를 주문하신 게 아니었습니까?”
“단골 술집이라서 나에게는 조금 특별한 메뉴를 내놓지.”
프레데릭도 맥주를 맛나게 홀짝거렸다.
“커피 원액을 섞은 맥주야. 원액을 따로 술집에 맡겨 두고 있거든.”
외국에서 수입해야 해서 가격이 꽤 높기 때문에 사치품에 속하는 커피다. 로젤린도 가문이 몰락하기 전에는 종종 마셨지만 그 후에는 거의 마시지 못하게 되었다. 그 커피의 원액을 맥주에 타니 커피 향이 그윽하게 맴도는 맥주의 맛이 한결 깊었다.
“전하 덕분에 맛있는 술을 먹게 되었군요. 평민들이 드나드는 술집이 전하의 단골일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사생아라는 건 들었던가?”
“예.”
사생아라는 출생의 비밀은 큰 흠이 될 텐데 프레데릭은 스스럼없었다.
“그 시절에는 일개 기사의 아들이었으니까 이런 곳도 친구랑 자주 들락거렸지. 뭐, 어린놈에게 술은 팔지 않겠다는 주인장의 고집 덕분에 술 구경은 거의 못했지만 말이야.”
옛 시절이 떠오르는지 프레데릭의 입가에는 푸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성인이 되셨으니 말씀하신 친구 분과도 마음껏 술을 드실 수 있겠군요.”
“그렇지는 않아. 자주 만나기가 힘들거든.”
호위기사로 근무하면서 프레데릭이 사적으로 만나는 사람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프레데릭이 바쁜 건 아니니 그 친구라는 사람이 시간을 내기 힘든 모양이다. 일반적인 성인이라면 한창 바쁠 나이이니까. 물론 프레데릭은 예외다.
그렇게 가볍게 생각했는데, 프레데릭은 의외의 말을 던졌다.
“그 녀석은 레젠에 있거든. 레젠에서 널 만났던 것도 그 녀석 때문에 간 거였고.”
“레젠까지요? 상인이 아니면 고향을 떠나는 경우가 드문데 별일이네요. 혹시 상인이십니까?”
“아, 황제라서.”
“……?”
친구의 직업이 황제라는 프레데릭의 말은 친구의 직업이 평범한 아저씨라는 말처럼 자연스럽게 나왔다. 덕분에 로젤린은 ‘황제’라는 의미를 한 박자 늦게 파악했다.
현 필라헨 제국의 황제는 카를 5세이다.
로젤린은 한 번도 황제를 알현한 적이 없지만 소문에 따르면 삼십 대 초반의 남자다. 그러고 보니 황제가 황태자일 시절의 전쟁에서 프레데릭이 직접 군대를 지휘한 적도 있다.
‘……아니, 뭐. 대공이시니 당연히 황제 폐하와도 잘 아시겠지.’
새삼스럽게 그가 무척 높은 지위의 사람이라는 걸 실감했다.
제국의 유일한 대공과 일개 평기사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은 절대 프레데릭과 마주 앉아서 술을 마실 수 없는 위치였다. 평소의 영양가 없는 대화처럼 툭툭 말을 던지는 상황도 존재하지 않을 테고.
‘성정이 대범하신 건지 독특하신 건지.’
프레데릭이 이러한 성격은 좋은가.
고민에 대한 답은 쉽게 나왔다. 당연히 좋다. 마냥 가벼워 보이지만 그 내면으로 강인한 카리스마도 품고 있는 사람이다. 하면 하는 사람이 어째서 하지 않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게으른 걸까.
로젤린은 고민을 맥주와 함께 삼켰다.
맛있는 술은 미각만 즐겁게 한 게 아니었다. 어색하였던 분위기와 대화의 물꼬도 맛있는 술로 인해 풀어졌다. 뒷문 근처의 이 자리는 옆에 기둥이 있어서 다른 테이블과 떨어진 위치였다. 주변의 소란으로부터 약간 격리되어 있어서 대화를 나누기엔 제격이었다.
“사실은 오늘 전하와 술을 마시러 간다는 말에 다른 녀석들이 부러워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 자식들과도 술 마신 적은 있는데 웬 난리냐?”
“지금은 보좌관님이 안 계시지만, 어쨌든 거의 독대하는 술자리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상관이랑 술 마시면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나?”
눈치 볼 상관도 없는 사람이 묘하게 현실을 정확히 찔렀다.
본인의 앞에서 ‘전하는 기사단의 우상이시니까요.’라는 말을 하기에는 간지럽다. 로젤린은 살짝 말문을 돌렸다.
“자기들 대신 궁금한 점을 꼭 물어봐 달라고 했습니다.”
부상이 많이 호전된 맥스가 제일 크게 외쳤었다. 첫 인상은 까칠한 미남이었는데 프레데릭이 관련되면 아주 뜨거운 영혼을 가지게 되는 놈이었다.
“외람되지 않다면 제가 대표로 한 가지 질문을 해도 될까요?”
“뭔데?”
“전하께서 결혼을 안 하시는 게 정말 남자를 좋아해서 그런 건지 궁금하다고 했습니다.”
“…….”
프레데릭은 할 말을 잃었다.
얼마 전이었으면 자신 있게 부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로젤린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내가 남자 취향이라면 어떤 생각이 들 것 같냐?”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
좋은 반응인지 나쁜 반응인지 모르겠다. 잠시 고민했던 프레데릭은 경멸 같은 부정적인 반응이 아니니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아무튼 좋은 질문이기는 하다.
프레데릭은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자신도 궁금했던 걸 물었다.
“나야 그렇다 쳐도, 너도 미혼이잖아. 스물다섯이면 결혼 얘기가 많이 들려올 텐데 넌 결혼 생각이 없나?”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어서요. 결혼할 생각도, 예정도 전혀 없습니다.”
단호한 부정에 뜨끔했으나 애인이 있다는 대답보다는 낫다.
“……결혼할 생각은 없어도 취향은 있을 거 아냐?”
“그건 그렇습니다.”
“어떤 취향인데?”
로젤린은 선선히 대꾸했다.
“우선 전 외모를 많이 봅니다.”
“오.”
외모라면 자신 있다.
“키도 저보다 커야 하고요. 이건 타협 못 합니다.”
“오.”
키도 로젤린보다 더 크다. 자기보다 키 큰 여자를 좋아한다는 독특한 취향이 미심쩍긴 했지만, 일단 자신감이 조금 생겼다.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만, 자기 일을 게을리하는 사람은 싫습니다. 자신에게 성실한 사람이 좋습니다.”
“오…….”
자신감은 생기자마자 사라졌다. 마치 자신을 저격한 것 같다.
성실. 프레데릭의 인생과 가장 거리가 먼 단어다. 알면서도 혹시나 해서 물었다.
“……네가 보기엔 내가 많이 게으르겠지?”
“예.”
“…….”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한 대답이다. 프레데릭은 얌전히 입을 다물고 술을 마셨다.
그사이에 로젤린은 맥주 한 잔을 다 마시고 새 술을 주문했다. 세 번째 술이었다. 주문한 술은 금방 나왔다. 평소의 술 마시는 속도라면 프레데릭도 두세 잔째의 술을 마시고 있을 텐데 영 술맛이 안 돌았다.
“전하, 이건 제가 궁금한 건데 한 가지만 더 여쭤도 됩니까?”
“마음대로 해.”
“전하께서는 어째서 임무를 방치하십니까? 기사들을 대하시는 모습을 보면서도 어렴풋이 느꼈지만, 마수 떼가 습격하였을 때 확실히 알았습니다. 전하께서는 분명히 책임감도 있으시고 깊은 생각도 하시질 않습니까. 한데 평소에 전하께서 업무를 하시는 걸 보면 일부러 방치하고 건드리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요.”
로젤린은 예리하게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관찰은 정확했다.
이번에는 확실히 대답할 말을 잃었다. 말문이 꽉 막혔다.
어렸을 때부터 긴 시간을 보낸 카를이나 라울이라면 어렴풋이 짐작한다. 선대 대공과 아버지의 사정 때문에 그가 임무로부터 도피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지만 프레데릭의 본인 입으로 직접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사정을 말하는 건, 로젤린이라면 괜찮다. 로젤린에게는 말해도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지만 말할 수 없었다.
프레데릭은 자신의 도피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것도 확실히 자각하고 있었다. 완전히 포기하지도, 완전히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우스운 꼴을 십수 년간 이어 오고 있지 않은가.
말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그 후의 반응이 염려되었다.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로젤린이 경멸할지도 모른다.
그 하나의 생각이 프레데릭의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젠장. 프레데릭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 또한 한심하지 않은가.
“주제 넘는 질문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가 말하기 꺼려 하는 눈치이자 로젤린이 눈치 빠르게 질문을 거두었다. 주제 넘는 질문이 아니었다고 대답하고 싶었는데, 로젤린은 이미 화제를 완전히 접었다.
“안주도 맛있군요. 전하가 어렸을 때부터 있던 가게라면 적어도 20년은 되었을 테니 노하우가 쌓여 있는 걸까요?”
“……옛날부터 맛있었지.”
테이블 아래로 내린 손을 꾹 쥐었다. 다행히 대답하는 목소리는 이상하게 굳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에 로젤린도 남은 한 줄기 우려를 거두었다.
이후는 평범한 대화와 평범한 화제였다. 늘 그랬던 것처럼 시시하고, 중요하지 않고, 여유로운 이야기들.
친목을 다지겠다는 프레데릭의 의지에 부합한 건지 아닌지.
애매모호한 술자리는 그렇게 끝났다.
* * *
어젯밤의 술자리에 끌고 가려는 걸 버틴 보람이 있었다. 프레데릭은 땡땡이치지 않고 집무실에 나와 있었다. 오늘쯤에는 땡땡이를 칠 거라고 여겼던 라울은 안심했다. 내일은 또 사라지겠지만 오늘의 일거리는 우선 넘길 수 있다.
“메이어 경과 술은 잘 드셨습니까?”
프레데릭은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것처럼 보였다. 라울이 인사해도 받는 둥 마는 둥 골똘한 표정이던 그가 로젤린의 얘기에 돌아보았다.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어제 물어보려던 걸 깜빡한 게 떠올랐거든.”
“오늘 물으시면 되잖습니까?”
“물어볼 수 있는 분위기란 게 있잖아.”
“무슨 질문이시길래요?”
“남자를 좋아하는지 아니, 남자라도 괜찮은지.”
“예?”
라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질문의 핀트가 어딘지 이상했다.
로젤린은 여자다. 세상에는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도 있으니 로젤린도 여자를 좋아할 가능성은 있다. 하나 여성이라면 남성을 좋아하는 게 일반적인 성향이다. 굳이 남자를 좋아하느냐고 물을 필요가 있나? 여자를 좋아하느냐고 묻는 것도 아니고?
“뭐어…… 하녀들에게 인기는 많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도 남자를 좋아하지 않을까요?”
“애매한 의문이 아니라 나에게 필요한 건 확신이라고.”
프레데릭이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제 남자라도 괜찮은데 상대방이 남자를 싫어할까 봐 걱정이다.”
이쯤 되니 라울도 슬슬 대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그는 혼란 속에 되물었다.
“……프레데릭 님, 혹시 말씀하시는 분이 남자…… 입니까?”
“당연히 남자지. 여자라면 내가 고민을 하겠냐.”
당당한 대꾸에 라울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메이어 경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게 아니셨단 건가? 어제 같이 술 마신 사람도 분명히 메이어 경일 텐데……. 나중에 한 명 더 합석했나? 아니, 그전에 진짜 남자 취향이셔서 결혼을 안 하신건가? 귀찮아서 안 하시는 건 줄 알았는데!’
주군이 게이라는 결론 속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라울은 서류를 내밀었다. 집무실을 나와서 잠시 방황하던 그는 곧 결론을 내렸다.
‘메이어 경과 있는 걸 방해할까 봐 일부러 오후 시간을 피했는데 앞으로는 얼마든지 그 시간에 찾아가서 일을 넘길 수 있겠군.’
대공가의 후사까지 그가 간섭할 문제는 아니었다. 억지로 결혼시킨다고 프레데릭이 결혼할 사람도 아니니. 보좌관으로서 충실한 결론을 내린 라울은 뿌듯한 걸음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대체 그 남자가 누구야? 프레데릭 님이 사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황제 폐하 외에는 하나도 없는데? 설마 유부남인 폐하는 아니겠지?’
라울의 오해와 착각을 모르는 프레데릭은 마냥 혼자만의 고민에 젖었다.
‘친목 도모의 자리를 다시 갖는 게 좋을까. 하지만 또 핑계를 대면 억지스러울 것 같고.’
해결 방법을 얻지 못한 그의 고민과는 다르게 로젤린과 다시 갖는 사적인 만남은 의외로 금방이었다.
느긋한 휴일이었다.
지금까지의 휴일은 주로 동료들과 어울리며 친목을 도모했다. 그녀를 제외한 전원이 남자이니만큼 친목 도모라고 해도 술이 고작이었지만.
덕분에 술 내기로 몇 명을 보낸 로젤린의 지갑은 약간 풍족해졌다.
‘모처럼 돈도 있으니까 시내 구경이나 할까.’
항상 기사단 본부 주위만 오가느라 발트란 시내를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 발트란은 앞으로 그녀가 살아가야 할 곳이며 지켜야 할 곳이기도 하다.
발트란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둘러보고 싶었다.
아직 겨울이 찾아오지 않았지만 공기는 벌써 쌀쌀했다. 발트란의 겨울은 얼마나 더 춥고 얼마나 더 많은 눈이 내릴까. 언젠가는 발트란의 겨울에 익숙해질 때가 올 것이다.
로젤린은 망토를 여미며 무작정 발이 닿는 대로 시내를 걸었다. 길을 걷다보니 그녀가 평생 살았던 제도 레젠과 저절로 비교하게 되었다. 층층이 올라간 건물도 낮고 사방에서는 거친 북부 사투리가 들려왔다.
발전이 늦은 도시이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레젠과 큰 차이가 없었다. 웃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고 큰소리로 호객하기도 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로젤린의 입가에도 미소를 떠오르게 했다.
영지민들의 얼굴에 여유가 있다는 건 곧 영주가 통치를 잘한다는 뜻이다. 소박하지만 풍족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슈벤하임 대공령에 오길 잘했어.’
프레데릭이 어떤 통치자인지는 발트란의 거리를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매번 도망치는 그이지만 영주로서의 임무를 완전히 버리지도 않고, 난폭하게 영주민을 착취하지도 않는다.
‘마음먹고 영지를 다스리시면 훨씬 더 유능하실 것 같은데……. 얼마 전에 여쭤봤지만 대답은 하지 않으셨고. 내가 생각해도 주제넘은 질문이긴 했어.’
한 번 질문하였으나 답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일까. 생각은 자연스럽게 프레데릭으로 흘러갔다. 그녀가 지금까지 보고 겪었던 프레데릭을 떠올리면 단순히 게으르기 때문에 업무를 방치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로젤린은 걸음을 멈추었다.
‘왜 자꾸 전하를 생각하는 걸까.’
로젤린은 10년 전부터 평생 빚에 쫓기며 살아왔다. 동료들과 갖는 짧은 여유를 제외하면 로젤린의 어깨는 언제나 막대한 빚과 의무감으로 눌려 있었다. 어린 나이에 큰 짐을 안게 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도피하려고 한 적은 없지만 여유가 없었던 건 사실이다.
지난 10년간 로젤린이 제일 갖지 못한 건 바로 여유였다.
그녀의 일정표에서 불필요하게 낭비하는 시간이란 없었다. 로젤린은 죽지 않기 위해 훈련하였고 승리하기 위해 훈련했다. 다른 사람을 거듭하여 생각할 여유란 없었다. 그런 여유 시간이 있으면 머릿속으로 전투를 이미지 트레이닝했다.
- 우리가 널 계속 후원하면서 보게 되는 이유는 바로 너야. 넌 가끔씩 굉장히 위태로워 보여. 마음 편히 쉰 적은 있니?
없었다.
후원자들의 걱정에도 로젤린은 웃으면서 ‘괜찮아요.’란 대답만 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괜찮았으니까. 모든 건 로젤린이 짊어져야 할 몫이었으므로 그녀는 정말 괜찮았다.
그리고 이제 빚은 갚았다. 로젤린은 레젠을 떠나 발트란으로 왔다.
‘마음의 여유란 걸 갖게 된 걸까.’
고민해 보았지만 왠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빚은 갚았지만 그녀의 어깨에는 여전히 의무감이 남아 있었다. 여유가 과연 존재하고 있을까. 스스로도 의심되었다.
노점에서 산 꼬치구이를 씹으며 로젤린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어느덧 주변의 소란도 잘 들리지 않을 만큼 고민에 푹 빠졌다.
가족이 아닌 사람을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너무 낯설었다.
처음 레젠의 주점에서 만났던 프레데릭. 주종으로서 재회하게 된 프레데릭. 업무 중에 사라져서 낮잠을 자곤 하는 프레데릭. 그녀에게 기마술을 가르쳐 주는 프레데릭. 직접 전투를 지원하여 승리로 이끈 프레데릭. 기사를 극도로 싫어하면서도 기사의 죽음에 진심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프레데릭.
그녀는 많은 프레데릭을 보고 만났다.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하고 때로는 설레기도 하고 때로는 슬프기도 하다. 그를 떠올릴 때마다 낯선 감정이 하나씩 쌓여 갔다.
한 번의 우연한 만남으로 끝일 줄 알았던 주정뱅이가 어느덧 그녀의 안에 이렇게 커졌다.
프레데릭이 최초로 섬기게 된 주군이기 때문일까. 프레데릭의 통치 아래에 있기 때문일까. 여러 가지 생각을 했지만 시원하게 납득되는 해답이 보이지 않았다.
“휴우.”
로젤린은 걸음을 멈추며 한숨을 쉬었다.
‘나도 감정적으로는 많이 서툰 걸까. 나 자신을 모른다는 건 많이 답답하네.’
속을 터놓고 이야기를 할 친구도 없으니 답답했다. 남자와 친해져도 남자와는 나눌 수 없는 여자만의 대화가 있는데.
‘다리도 아프니까 슬슬 돌아가자.’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던 로젤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던 프레데릭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여기 어디야!’
그녀는 길을 잃었다.
맞닥뜨린 현실 앞에서 고민이 사라진 건 좋은데, 대신 길을 잃었으니 도긴개긴이다. 로젤린은 한숨을 푹 쉬며 쪼그리고 앉았다.
‘길을 못 찾겠어…….’
딴생각을 하며 걷던 중에 어디로 들어왔는지 번화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느낌이었다. 게다가 그냥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다. 주택가로 들어왔으면 차라리 나을 텐데, 아무리 봐도 이 분위기는 빈민가였다.
‘빈민가는 레젠이나 발트란이나 똑같네.’
아버지와 큰오빠가 죽고 잠시 도망치던 때 빈민가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일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지워 두었는데, 완전히 지워 버린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빈민가로 들어오게 되니 기억이 되살아났다.
하수와 쓰레기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퀴퀴하게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거리, 판자로 대충 눈비만 가리는 허름한 집, 더러운 옷을 입은 앙상한 사람들, 흉흉한 눈빛. 어느 도시를 가도 사라지지 않는 어두운 일면이 발트란에도 있었다.
빈민가로 들어왔다는 걸 인식한 순간부터 로젤린은 몇 명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적대감이 섞인 시선이다.
값지고 고급스러운 의복을 걸친 건 아니지만 로젤린은 이 거리에서 명백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깔끔한 의복도 있고 망토 안쪽에는 돈이 든 주머니도 있다. 적어도 이 빈곤한 거리의 가족이 며칠은 지낼 수 있는 돈이었다.
‘몇 명이 습격해도 무섭지는 않지만…….’
로젤린은 망토로 가려 두고 있던 칼을 밖으로 꺼내 쥐었다. 무기를 갖고 있다는 표시를 하면 무턱대고 습격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질 생각은 없지만 사람을 죽이게 되는 건 꺼려진다.
그녀는 검투사가 아닌 사람을 해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이 빈민가의 사람도 그녀가 아이기스 나이트로서 지켜야 할 사람이었다.
그녀가 칼을 쥐니 쫓아오던 시선은 곧 사라졌다. 대신 그녀가 길을 물을 사람도 사라졌다.
“물을 게 있는데.”
길바닥에 주저앉아 마른 흑빵을 씹던 소년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지만 앙상하게 마른 소년은 로젤린을 노려보곤 집으로 들어갔다.
로젤린은 머리를 긁적였다. 돈을 주면서 묻는 게 좋을까? 하지만 직접 돈을 꺼내면 다시 습격의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
짧게나마 빈민가에서 지낸 적이 있던 로젤린은 이 거리의 습성을 잘 알았다. 그녀처럼 길을 잘못 든 외지인은 가급적 튀지 않고 빨리 나가는 게 최선이다.
기사단 본부가 북쪽에 있으니 일단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방향이 같으니 걷다 보면 기사단 본부로 갈 수 있을 것이다. 길이 꼬이지만 않는다면.
‘적어도 빈민가는 탈출할 수 있겠지.’
햇살이 잘 비치지도 않고 도로가 닦이지도 않아 질퍽거리는 길로 로젤린은 부츠를 내디뎠다. 그나마 마주치는 사람들이 적은 게 다행이었다.
이십 분쯤 걷던 로젤린은 늘어뜨리고 있던 팔을 자연스럽게 가슴 앞으로 가져왔다. 칼집째 쥐고 있던 왼손이다. 망토로 가려져 있어서 뒤에서는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잘 안 보일 것이다.
로젤린은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쥐었다. 천천히 호흡을 멈추었다. 등 뒤로 걸어오는 남자의 발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지금이다. 로젤린은 칼을 뽑으며 그녀를 미행하는 남자가 있는 방향으로 크게 그었다. 남자를 제압하려 뽑은 칼이었는데, 남자는 허리를 젖혀 쉽게 그녀의 공격을 벗어났다.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며 두 번째 공격을 하려던 로젤린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전하?”
“로젤린.”
프레데릭이 애매한 표정으로 웃었다. 로젤린은 놀라서 되물었다. 이런 곳에서 프레데릭을 만난 것도 놀랍지만 프레데릭이 그녀를 쫓아 왔다는 것도 놀라웠다.
“왜 저를 추적하셨습니까?”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저 사실만을 물었을 뿐인데 프레데릭은 약간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멀리에서 뒷모습을 봤는데 네가 맞는지 아닌지 고민이 되어서 좀 쫓아오면서 보니까…… 빈민가에 네가 있을 이유가 없잖아?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아서 무시하기에도 난감했고. 의심해도 변명하기는 힘들겠지만 다른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어.”
“제가 왜 전하를 의심합니까?”
놀라긴 했으나 프레데릭이 다른 이유로 그녀를 추적하리라곤 전혀 생각지 않는 로젤린이 오히려 의아해했다.
프레데릭이 잠시 그녀를 보다가 미소했다.
“넌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을 속이면서 스파이를 하는 건 무리겠군.”
칭찬인지 욕인지 알쏭달쏭한 말이었으나 기왕이면 칭찬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좋은 게 좋은 것 아닌가.
로젤린은 칼을 거두며 물었다.
“전하께서는 어쩐 일이십니까?”
“구빈원에 볼일이 있어.”
“보좌관님도 대동하지 않으시고요?”
따로 보고를 받는 것도 아니고 직접 구빈원까지 행차했다는 것도 놀라운데, 보좌관도 없이 홀몸이었다.
프레데릭에게는 실례되는 발언이지만, 로젤린은 ‘의욕적으로 일도 안 하시는 분이 웬일이시지.’라는 생각을 해 버렸다.
“개인적으로 지원하는 사설 구빈원이라서.”
그는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물었다.
“같이 갈까?”
비번이지만 프레데릭과 마주쳤고, 호위기사로서 당연히 동행할 예정이었던 로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데릭이 가고자 하였던 구빈원은 빈민가의 외곽 지대에 있었다. 식사를 하기에는 이른 시간인데도 구빈원 근처에는 빈민들이 많았다. 거리가 묘하게 조용하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이곳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츠바덴 구빈원’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츠바덴…… 로젤린은 무심코 구빈원의 이름을 되새겼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듯한 이름이다.
구빈원 근처에 모여 있는 빈민들은 그들의 앞을 지나는 프레데릭과 로젤린을 보고도 흥미를 나타내지 않았다. 빈민들이 프레데릭에게 위해를 가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몸에 밴 대로 주변을 경계하며 걷던 로젤린은 한 가지 이질감을 느꼈다.
빈민 중에 성인 남성이 너무 많다.
그 이질감의 이유를 헤아리기도 전에 앞장선 프레데릭은 구빈원으로 성큼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전하.”
구빈원의 원장으로 보이는 후덕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그들을 맞았다. 프레데릭이 구빈원을 방문한 게 처음이 아닌지 익숙한 대응이었다. 로젤린은 프레데릭의 뒤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왔다.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으니 내가 봐야 할 서류를 가져오게.”
“알겠습니다. 전하의 은덕이 오늘도 이 거리에 크나큰 빛이 됩니다.”
의례적으로 감사를 표시한 원장은 곧 직원과 함께 서류철들을 가져왔다. 다과를 내오겠다는 것을 거절한 프레데릭의 앞에서 원장과 직원은 조용히 물러났다. 응접실에는 로젤린과 프레데릭만이 남았다.
프레데릭의 뒤에 선 로젤린은 내부를 둘러보았다. 필요한 집기만 갖춰진 소박한 응접실에 유일한 사치품이 있었다. 로젤린은 벽의 중앙에 걸려 있는 여인의 초상화를 올려다보았다.
갈색 곱슬머리를 우아하게 올려 치장한 중년의 여인이었다. 초상화를 보자마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억에 없는 초상화인데도 왠지 낯익었다. 발트란에서는 초상화를 본 적이 없으니 만약 보았다면 레젠일 텐데. 레젠에서도 유명한 사람일까.
서류를 넘기고 있던 프레데릭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 초상화야.”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툭 던진 말이었다. 로젤린은 그제야 프레데릭과 초상화 속 여인의 닮은 이목구비를 발견했다.
그녀가 알기로 프레데릭은 사생아다. 초상화의 여인은 곧 선대 대공의 정부라는 뜻이었다. 이유를 묻기에도, 대화의 소재로 삼기에도 어려운 화제다.
로젤린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프레데릭이 고개를 돌려 뒤에 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안 묻나?”
일개 호위기사인 저에게는 전하의 신변을 질문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대답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직접 말하기에는 망설여졌다. 로젤린은 말없이 고개를 한 번 숙였다. 프레데릭이 희미하게 미소했다.
“네가 물어봐 준다면 좋겠지만…… 듣기 싫어도 얘기할 거다.”
낮게 나온 첫마디를 웃음으로 얼버무린 프레데릭이 설명했다. 길고 복잡한 사연도 아니었다.
프레데릭의 어머니는 그녀가 대공의 정부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자 구빈원을 설립하여 비난을 무마하려 했었다. 자금을 융통한 건 당연히 선대 대공이었다.
프레데릭은 그 과거를 무척 감흥 없이 얘기했다.
“가문이며 지체는 어머니가 마리안 부인을 넘볼 수 없으니 사람들의 칭송이라도 들으려고 하셨던 거겠지. 죽은 아버지는 어머니를 후원해서 마리안 부인의 심기를 더 어지럽혔고…… 선대의 질척질척한 사연 때문에 탄생한 구빈원이야.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내가 제일 큰 후원자가 되었는데, 마음대로라면 후원을 접고 싶다.”
고인이 된 친부모의 이야기를 하는 프레데릭의 어조는 굉장히 무심했다. 그의 가정사를 모르는 로젤린이 듣기에도 마치 타인 같은 태도였다. 사생아이니 평범한 가정은 아니었을 테지만.
로젤린의 가족은 화목하고 애정이 깊었다. 그러나 로젤린은 세상의 가족들이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지는 않았다.
주군의 가정사다. 일개 기사인 그녀가 깊이 파고드는 것은 큰 무례가 된다. 로젤린은 대답을 신중히 고민했다.
“그렇지만 구빈원이 있어서 빈민가에 도움이 되고 있질 않습니까.”
“현재 문제가 그거야.”
프레데릭이 서류철을 탁 덮으며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부모의 이야기를 할 때보다 생동감이 있는 표정을 보니 왠지 가슴 안쪽이 시큰거렸다.
“구빈원에 지나치게 많은 후원이 들어가고 있다. 어머니의 뒤를 이어 대공인 내가 제일 큰 후원자로 있으니 귀족들도 마냥 모르는 척하기 어려워. 결과적으로 과잉 후원이야.”
과잉 후원이라는 짤막한 한마디였으나 로젤린은 곧 이해했다. 빈민 구제의 목적은 생존을 보장하고 스스로 일어서는 기회를 주는 것이지, 공짜 밥과 공짜 돈에 익숙해져 자립하기를 포기하도록 지원하는 게 아니다.
“발트란의 인구에 비하여 빈민가의 규모가 커. 공식적인 공사를 할 때에는 항상 빈민들을 먼저 고용하려 하지만 고용에 응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야. 내 직할령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방법도 쓰고 있지만 그 인원엔 한계가 있어. 마리안 부인은 차라리 빈민가를 깔끔하게 밀어 버리자는 의견을 예전부터 내놓고 있고, 나도 지원을 축소해야 한다는 건 동의하지만…….”
프레데릭이 쓴웃음을 지었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건 참 힘들군.”
죽은 그의 어머니가 초상화 속에서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중간한 사생아 따위가…….”
나지막한 혼잣말이 한숨에 섞였다. 로젤린은 그에게 대답할 말도, 질문할 말도 찾지 못하여 입술만 깨물었다.
어중간한 사생아. 깊은 자조가 섞인 그의 목소리가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얼마 전 그에게 질문하였지만 얻지 못하였던 대답을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전하께서 대공으로서의 책무에 소홀한 건 마냥 놀기 좋아하는 한량이라서가 아니라, 혹시…….’
말하고 싶은 건 있다. 묻고 싶은 것도 있다. 하나 일개 기사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로젤린은 가슴 안을 어지럽히는 충동을 눌렀다. 침묵 속에 프레데릭이 서류를 보는 기척만이 느껴졌다. 그 소리가 굉장히 쓸쓸했다.
서로의 진실과 진심을 모르는 채 시간은 시시각각 흘렀다.
수확제가 열리는 날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