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자심공
큰닭과의 전투 이후 로젤린은 진정한 의미로 아이기스 나이트가 되었다. 공공연한 무시와 경멸의 시선은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최악의 상황을 연출할 뻔했던 전투가 성공리에 끝났다. 눈이 있는 사람은 그녀가 홀로 마수를 사냥하는 걸 목격하였고, 마음이 있는 사람은 그 모습을 깊이 새겼다.
그녀는 더 이상 경멸스러운 검투사 출신이 아니었다. 아이기스 나이트의 기사였고, 그들의 동료였다.
검과 검으로 전투에서 하나가 되고, 또 서로를 지키며 함께 싸웠다. 로젤린의 가치는 그곳에서 더욱 빛났다.
기사들은 검투사라는 편견 때문에 미안했다고 로젤린에게 정식으로 사과했다. 맥스가 제일 무안해했다. 정신없이 싸우느라 그녀는 몰랐지만 독 연기에 쓰러졌던 그는 큰닭에게 공격당하기 직전이었다.
큰닭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동료 기사들의 빈자리와 그늘은 남아 있었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현재와 미래를 살기 위하여 노력했다.
며칠 후 아이기스 나이트에 입단한 후 두 번째 마수의 토벌도 무사히 끝났다.
마수의 가죽과 발톱은 일반적인 동물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질기고 단단하다. 우선적으로 기사단의 무구에 사용하고 남는 것은 경매에 올린다. 기사단의 주된 수입원 중 하나였다.
고기는 독성이 없는 놈들을 골라서 요리해 먹기도 했다. 로젤린은 기사단에 융화하려고 노력했으나 이 마수의 고기 요리만큼은 영 입에 대지 못했다.
“야, 뭘 빼고 그러냐? 이게 비주얼은 좀 그래도 맛있다니까.”
그녀와 같은 제1기사대 중 한 명인 안토니오가 마수의 고기로 만든 스튜를 스푼으로 듬뿍 떴다. 색이 시커먼 게 마치 썩은 고기 같았다.
“노린내가 심해서 양념을 많이 하다 보니 오히려 고기 맛이 안 느껴질 정도야. 질기긴 해도 일반 고기나 다름없어.”
“……그럼 한 입만.”
큼직한 고기 한 덩어리를 그녀의 입에 넣으려는 안토니오의 손에서 로젤린은 스푼을 빼앗았다. 지옥에서 퍼온 것처럼 국물까지 새까만 스튜를 뒤적뒤적하여 그나마 작은 살점을 조심스럽게 입에 넣었다. 안토니오의 말처럼 고기의 냄새와 맛이 아니라 향신료와 양념의 맛이 진하게 입속에 퍼졌다.
전투가 끝난 후에는 으레 기숙사에서 가장 큰 건물인 식당에 모여서 술을 한잔씩 했다. 로젤린, 안토니오와 같은 식탁에 앉아 있던 다른 기사단원들도 히죽거리며 로젤린의 감상을 기다렸다. 그녀는 알지 못했지만 일종의 신입 신고식과 비슷한 행사였다.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우물우물 마수의 고기를 씹다가 꿀꺽 삼켰다. 서둘러 술로 입가심을 하자 안토니오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맛이 나쁘지는 않지?”
“쥐고기 같은 맛이야…….”
“쥐고기도 먹은 적이 있어?”
“옛날에 가끔.”
독한 술을 마시고도 입안에 고기의 식감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로젤린은 인상을 쓰면서 술을 한 잔 더 따랐다.
쥐고기를 먹은 건 집안이 몰락하였을 당시였다. 만삭인 수잔나와 빚쟁이를 피해 도망칠 때는 거지나 다름없는 궁핍한 신세였다. 쥐도 잡아먹고 박쥐도 잡아먹었다. 그러던 차에 수잔나는 사정사정하여 빌린 헛간에서 엠마를 출산했다.
엠마에게 먹일 젖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울음을 터트리는 수잔나를 보며 로젤린은 자신을 팔기로 결심했다.
- 검투사라니? 위험하잖아. 안 돼, 그러지 마. 나도 몸을 추스르면 멀리 이동할 수 있을 거야. 지방으로 도망쳐서 조용히 살자. 우리가 같이 산다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지 않겠니?
수잔나는 절대 안 된다며 로젤린을 만류했다. 검투사의 사회적인 취급은 둘째쳐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일인 것이다.
- 빚쟁이들이 돈 받아 내는 건 프로일 텐데 평생 숨어 살 수 있겠어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일자리가 많은 제도에 있는 편이 나아요. 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언제 싸워서 지는 걸 본 적이 있어요?
너무 일찍 어른이 된 15살의 로젤린을 수잔나는 더 만류하지 못했다.
로젤린은 그렇게 검투사가 되었다.
“쥐고기는 어떤데?”
안토니오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로젤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 마수고기 맛이지.”
“가죽을 씹는 맛이라는 거로군.”
“뭐야, 너도 맛있게 먹은 건 아니잖아?”
놀리려는 의도였다는 걸 겨우 눈치챘다. 짐짓 목소리를 싸늘하게 굳히자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적당히 분위기가 오르자 누군가 카드를 갖고 왔다. 금세 식탁 하나가 정리되고 판이 깔렸다. 소량의 돈을 걸고 치는 카드 게임을 구경하던 로젤린도 얼떨결에 끼어들었다.
한 푼이라도 아끼면서 살아야 했던 로젤린은 도박도 아주 잘했다. 4판 연속으로 판돈을 쓸어가는 로젤린에게 맥스가 혀를 내둘렀다.
“끝내주는 포커페이스로구만. 얼굴만 보면 완전 망한 카드만 뽑아 온 분위긴데.”
“근데 좀 웃겨서 구경하는 맛은 있네.”
누군가 카드를 칠 때마다 한껏 일그러진 표정을 유지하는 로젤린의 얼굴을 흉내 내자 다들 웃음이 터졌다. 로젤린도 피식 웃었다.
처음부터 로젤린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건 아니었다. 검투사 때의 동료인 릴리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어수룩한 표정으로 패를 다 읽혔을 것이다.
- 언니는 카드 칠 때 표정이 너무 적나라해서 알기가 쉽다니까요. 도둑잡기를 하면 맨날 지죠?
- ……응.
- 제가 도와드릴까요?
-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방법이 있냐?
귀가 솔깃해서 묻는 로젤린에게 릴리는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 언니는 어떤 남자가 좋아요? 그러니까 이상형이요.
- 내 이상형? 일단 나보다 키가 큰 남자가 좋아.
- 178㎝ 이상의 남자부터 찾아야겠네요.
- 그리고 잘생겨야지.
- 제일 중요한 조건이죠.
릴리도 목소리를 진지하게 깔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로젤린은 가끔 머릿속으로만 그렸던 이상형의 조건을 하나씩 말했다.
- 몸매는 근육질이 좋지만 너무 우락부락한 근육질은 별로야. 옷맵시가 멋지게 나오는 날렵한 근육질이 좋지. 하지만 자신의 일에 신념을 갖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면 얼굴과 몸매가 별로라도 괜찮아. 아, 그래도 키는 나보다 반드시 커야 해.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듣던 릴리가 말을 이었다.
- 그럼 언니가 들고 있는 카드마다 이상형과 정반대인 키 작고, 얼굴 못 생기고, 뚱뚱한 남자가 언니를 느끼하게 훑고 있다고 상상해 봐요.
저절로 로젤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릴리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 바로 그 표정이에요. 그 표정을 유지하면서 카드를 치면 얼굴 때문에 패가 읽히지는 않을 거예요.
자신을 스스로 고문하는 것 같기도 하고, 좋은 효과가 있을 것 같기도 한 방법이었다.
- 근데 언니는 왜 남친을 안 사귀어요? 콜로세움의 지질한 사내새끼들이야 언니를 질투해서 난리지만 밖에는 안 그런 사람도 많잖아요. 전부 거절하니까 지난번에는 델만 씨가 언니에게 잘 말해 달라면서 저희에게도 선물을 챙겨 줬다니까요.
로젤린은 카드를 들고 인상을 쓰는 연습을 하며 대꾸했다. 릴리의 말처럼 로젤린의 빚을 갚아 주겠으니 정부가 되라는 귀족도 있었고, 순수하게 고백하는 청년도 있었다.
- 연애할 여유도 없고 돈도 없으니까 그렇지, 뭐. 솔직히 말하자면 남자랑 데이트하면서 쓸 돈이 아까워. 그 돈으로 빚을 갚아야지.
- 에이, 언니. 그건 아니에요.
갑자기 릴리가 정색했다.
- 여자는 남자에게 돈을 쓰게 만들어야 하는 거라고요.
- 그, 그래?
- 그럼요! 여자랑 데이트하면서 여자 지갑을 더 많이 열게 하는 남자는 절! 대! 만나면 안 돼요. 남자가 10살쯤 연하라면 모를까.
릴리의 연애 강의는 그 후에도 줄줄줄 이어졌다. 남자와 사귄 경험이 전혀 없는 로젤린은 그녀의 열변을 멍하니 고개만 끄덕거리면서 들었다.
데이트에 쓰는 돈이 아까울 정도로 생활비를 절약하며 빚을 갚았다. 푼돈이라지만 돈이 오가는 도박을 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래도 로젤린은 이따금 카드 게임을 했다.
동료들과 어울리는 짧은 토막토막의 시간이 그녀를 빡빡하게 짓누르는 부담감에서 잠시나마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로젤린은 동료들과 함께 어울려서 수다를 떨고, 술을 마시고, 게임을 하는 시간이 소중했다.
현재의 동료들과 보내는 시간도 소중했다.
차이점이라고는 그녀의 동료가 과거에는 여자 검투사들이었고, 현재는 남자 기사들이라는 것뿐이었다.
‘릴리랑 다른 애들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문득 예전 동료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수잔나와 엠마도 그리웠다. 모두 건강히 잘 지내고 있기를 기원하며 로젤린은 동료들 사이에서 편안히 웃었다.
슈벤하임 대공령의 겨울은 일찍 오고 늦게 간다. 청명한 가을 하늘이 높았으나 공기는 제법 쌀쌀해졌다. 하녀들은 쌀쌀한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옹기종기 모여 서 있었다.
다그닥 다그닥. 기마 훈련장 저편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자 수다하던 하녀들의 얼굴이 동시에 움직였다. 이윽고 승마를 연습하고 있는 로젤린의 모습이 보였다.
“메이어 기사님! 춥지 마시라고 따뜻한 물을 끓여 왔어요.”
“얼른 땀을 닦으셔야죠. 감기 걸리시면 큰일나요.”
“마사지 돌도 따끈따끈하게 데워 왔으니까 등을 문질러 드릴게요!”
그녀가 말에서 내리자마자 하녀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어수선하게 건강을 살피는 하녀들에게 둘러싸여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웃는 로젤린을 동료 기사들이 아련하게 쳐다보았다.
“……부럽다. 5초만 저 안에 있을 수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팔 텐데.”
“부러워하면 지는 거라고. 제기랄.”
부러움 섞인 한숨이 기사들의 발밑에 깔렸다.
아이기스 나이트는 발트란의 평민들에게 일등 신랑감이었다. 정기사와는 달리 평기사는 대부분이 평민이다. 똑같은 평민이라도 기사라는 직함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기본적인 실력만 받쳐주면 입단할 수 있다지만 평생 농사나 짓고 산 농민이 ‘기본적인 실력’을 갖추기란 어렵다. 거기다 입단은 쉬워도 생존하는 건 어렵다. 항상 마수의 토벌을 하는 기사단이니까.
선망의 직업인 데다 월급도 세다. 복지도 좋다. 기사단에서 중상을 입고 퇴역하거나 사망하면 유족들에게 평생 먹고 살 보상금이 지급된다.
직업적인 조건만이 아니었다.
기사란, 특히 아이기스 나이트는 기본적으로 육체를 단련한다. 옆집 총각에게서는 보기 힘든 구릿빛 피부의 탄탄한 근육을 가진 남자들이 넘쳐 났다. 체력도 좋고, 힘도 좋다. 봄날 망아지 같은 처녀들은 가끔 기사들과 사고를 쳤다. 한 처녀가 네 다리를 걸쳤다가 발각되어서 기사단 내에서 칼부림이 일어날 뻔한 적도 있었다.
한마디로 100점 만점에서 80점은 먹고 들어가는 게 아이기스 나이트였다.
기사와 하녀의 염문도 심심치 않게 번졌다.
기사들은 기사단 본부의 하녀들 앞을 지날 때마다 괜히 앞머리를 넘기거나 멋진 포즈를 잡았다. 하녀들도 번성한 제도의 처녀들이 연극배우나 검투사를 쫓아다니듯이 기사들을 좋아했다.
며칠 전까지는 그랬다는 뜻이다.
하녀들의 관심이 로젤린에게 쏠리기 전까지만.
“솔직히 인기 있는 게 이해가 되긴 해. 이해가 돼서 더 눈물이 난다.”
말 등에 우울하게 엎어져 있던 기사가 중얼거렸다.
“로젤린도 잘생기긴 했지만 난 맥스가 더 취향인데.”
“미친놈아. 네 취향이라서 어쩔 건데.”
징그러운 소리를 한 기사는 동료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였다.
그렇잖아도 드문 여자 기사의 입단으로 하녀들의 관심이 쏠렸다. 며칠 후 큰닭을 사냥하는데 결정적인 공훈을 세우면서 그 관심은 곧 폭발적인 호감이 되었다.
우선 로젤린은 외모도 훤칠했다. 단순히 잘생기기만 한 건 아니었다. 사람 많은 기사단에는 로젤린보다 잘생기고 몸매 좋은 기사들도 분명히 있다.
하나 로젤린은 그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었다.
“저 자식은 말하는 것도 좀 간질간질하지 않냐.”
“난 좀 느끼하게 들리던데. 게이 같아.”
“사투리를 안 쓰니까 우리 같은 촌놈 귀에 그렇게 들리는 거잖아.”
태생이 귀족인 데다 평생 제도에서 살았던 로젤린이다. 검투사로 뒹굴면서 말씨는 거칠어졌지만 기본적으로 반듯하고 정확한 발음의 표준어를 구사했다.
제국의 북쪽인 발트란의 사투리는 억양이 상당히 강하고 억세다. 그 사이에서 나긋나긋하기까지 한 로젤린의 억양은 무척 튀었다. 남자들이 듣기에는 간지러웠지만 여자들의 귀에는 촌놈들과는 차원이 다른 멋들어진 제도 말씨로 들렸다. 여자는 청각에 약한 생물이었다.
“나도 표준어를 배워 볼까.”
“염병하네. 목소리는 돼지 멱따는 것 같은 새끼가 말투만 그랬어용~ 알았어용~ 한다고 좋아하겠냐?”
여자에게 인기를 얻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진취적인 목표를 가진 기사는 금방 비웃음을 당했다.
얼굴과 말투에 이어 로젤린은 매너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수잔나와 연상의 후원인들을 대하면서 로젤린에게는 여자를 배려하는 매너가 탑재되었다.
마침 나이가 가장 어린 하녀 한 명이 다리가 아프다고 콩콩 무릎을 두드렸다. 로젤린은 편히 앉으라며 의자에 손수건을 깔아 주었다. 세상에! 손수건이라니!
“……와, 씨. 난 손수건 가지고 다니는 사내새끼는 태어나서 처음 본다.”
“맞아, 맞아. 우리가 기사지 호스트냐?”
“새끼들아. 저 자식은 여자잖아.”
“여자라서 더 문제인 거야…….”
노닥거리던 기사들은 일제히 한숨을 쉬었다.
하필이면 여자가 라이벌이라니.
질투해야 하는 건지 슬퍼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빨간 머리 하녀 한 명이 셔츠의 목깃 사이로 보이는 로젤린의 흉터를 바라보았다.
“기사님, 상처는 괜찮으세요? 날씨가 궂으면 옛 흉터들이 많이 아프다면서요.”
“지금은 괜찮습니다. 아프지 않아요.”
담담히 대꾸하는 로젤린을 보는 하녀의 눈길이 아련했다. 그 하녀를 한 달 전 ‘날씨가 궂으면 옛 흉터가 아프지만 당신이 옆에 있으면 아픔을 잊을 수 있다.’라는 작업 멘트로 꼬드겼다가 차인 기사는 피눈물을 삼켰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만 상처가 너무…… 야성적이에요.”
기사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나도 상처 있는데.’
아이기스 나이트에서 큼직한 흉터 하나 몸에 달고 있지 않는 기사가 있을까. 한숨 소리가 또 나왔다.
하녀들에게 인기 폭발인 로젤린을 한없이 부러워하면서도 기사들은 멀찍이 물러나지는 않았다. 여기에 있어야 나중에 하녀들과 대화할 기회라도 생기니까.
서글픈 남자의 속성이었다.
“어이! 집합 명령 떨어졌다. 제1기사대는 연무장으로 오란다!”
집합 명령에 간신히 현실로 돌아온 기사들은 흐느적거리며 연무장으로 뛰어갔다. 로젤린도 하녀들과 작별하고 서둘러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건 다니엘이었다.
“중요한 전달 사항이 있다. 며칠 전 큰닭을 토벌한 공로로 내일 오전에 영주님께서 우리 기사대를 친히 치하하신다고 한다. 술은 적당히 마셔라. 또 영주님 앞에서 토하는 놈이 나왔다가는 죽을 줄 알아.”
“우오오! 포상금 나옵니까?!”
“휴일! 휴일도 주세요!”
연무장은 금방 또 소란스러워졌다. 흥분이 넘실대는 동료들 사이에서 로젤린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사로서의 공적을 최초로 인정받는 자리다.
로젤린은 입단하던 날에 재봉사가 만들어온 아이기스 나이트의 제복을 처음으로 꺼내 입었다. 로젤린과 같은 평기사는 옷깃과 소맷단의 장식에 푸른색 실을 사용하고, 영주에게 정식으로 서임받는 정기사는 금색 실을 사용했다.
제복의 가슴과 망토에는 슈벤하임 대공가와 아이기스 나이트의 문장이 수놓였다. 왠지 그 문장에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로젤린은 긴장으로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기숙사 밖으로 나왔다.
“어…….”
연무장에 있던 아벨이 그녀를 보고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벨만이 아니었다. 며칠 동안 많이 친해진 다른 기사들도 어쩐지 낯선 표정이었다.
“왜?”
“아, 아니다.”
이유를 물으니 하나같이 얼버무리기만 했다. 궁금하였지만 곧 말을 타고 내성으로 출발해야 했기에 더 캐물을 여유가 없었다.
“……야, 난 이제까지 로젤린이 여자라는 거 까먹고 있었어.”
“나도…….”
그녀에게 들리지 않는 곳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로젤린은 당연히 알지 못했다. 동료에게 대놓고 할 말이 아니라서 속으로만 삼켰지만 기사들의 머릿속에는 공통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저 자식한테 가슴이 있었잖아…….’
훈련이나 전투에서 불편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가슴을 단단히 동여매는 게 로젤린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그 위에 갑옷까지 입으니 나올 데 나오고, 들어갈 데 들어간 몸매가 거의 부각되지 않았다. 오늘은 훈련도 전투도 없으니 편하게 제복만 입었다.
덕분에 지금까지는 여자라는 걸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기사들이 갑자기 긴장했다. 로젤린만 묘하게 변한 공기에 갸웃했다.
‘영주님께 직접 치하받으니까 다들 긴장했나.’
앞으로도 아마 그녀는 알지 못할 것이다.
북쪽에서 주로 출몰하는 마수를 빠르게 토벌하기 위해 기사단 본부는 북문 근처에 있었다. 반면에 슈벤하임 대공의 내성이 있는 곳은 발트란의 중심부였다.
로젤린은 한 번도 황성이나 다른 영지의 내성을 구경하지 못했지만 내성이 무척 실용적으로 지어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전투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내부 장식은 투박하였지만 일정 거리마다 뚫린 총안에는 언제라도 쇠뇌를 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투석구로 오르내리는 내벽의 계단도 최단거리에 있었다.
‘이곳은 언제나 전투를 대비하고 있는 거야.’
슈벤하임 대공의 기사단은 인간과 인간의 전쟁에서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 이유를 오늘 로젤린은 알 수 있었다.
행사가 진행되는 홀로 들어섰다. 홀의 높은 천장에는 슈벤하임 대공가와 봉신 가문들의 문장이 그려진 깃발들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슈벤하임 대공가의 문장은 4색의 방패 위에 나란히 마주 보고 서 있는 두 마리의 사자다.
오전에 연습하였던대로 아이기스 나이트의 제1기사대는 일사불란하게 대열했다. 최근에 입단한 로젤린은 제일 마지막 열이었다.
정확히 11시가 되자, 홀 안쪽의 문이 열렸다. 서너 명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로젤린은 눈을 크게 떴다. 제일 앞에 선 사람은 서른 전후로 보이는 옅은 금발의 젊은 남자였다. 프레데릭이 아니었다.
남자가 상석에 앉자 다니엘이 외쳤다.
“일동 차렷, 경례!”
기사들이 인사가 끝나자 남자가 입술을 뗐다. 잔잔하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경들의 공로로 케브나트세움바의 토벌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전투였다고 들었는데 아주 훌륭하다. 케브나트세움바의 출몰이 극히 드물지만 나타날 때마다 큰 희생을 치렀는데 이번은 최소의 피해로 토벌을 성공하였으니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니엘 핸텔 경, 전사한 기사들은 누구누구인가?”
다니엘의 보고에 이어 남자는 몇 마디 더 대화했다. 로젤린은 그 대화들을 들으면서도 정신이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왜 저분을 영주님이라고 부르지?’
몹시 궁금해졌지만 행사가 이어지는 지금은 옆 사람에게 질문할 수도 없었다.
“아이기스 나이트 제1기사대 전원에게 내일부터 3일의 휴가와 포상금을 지급한다!”
“이야아!”
“앗싸! 대공 전하 최고!!”
내무관이 포상을 알려 주자 기사들이 만세를 외쳤다. 그 소리에 로젤린은 흠칫 놀라 상념에서 깨어났다. 어느 틈인지 남자는 이미 들어가고 상석은 텅 비어 있었다.
행사는 묘하게 찜찜한 느낌 속에 끝이 났다.
들뜬 동료들과는 다르게 터벅터벅 말을 몰고 기사단 본부로 돌아갔다. 동료들은 휴가를 어떻게 보내고 포상금을 어떻게 쓸지 저마다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저기, 아벨. 물어볼 게 있다만.”
“어, 어? 뭐지?”
아침에 보았을 때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당황한 얼굴로 아벨이 돌아보았다.
“아까 그분은 대공 전하가 아니시잖아?”
“아, 그거.”
아벨이 뒷목을 문질렀다.
“어제 대장도 영주님이라고 하셨지 전하를 알현한다는 말은 안 하셨다. 발트란에서 영주님이라고 하면 보통 두 분을 가리킨다. 진짜로 영주님이 두 분이신 건 아니고, 사정이 있는데…….”
말주변이 서툰 아벨은 잘 설명하지 못했다. 로젤린이 이해한 건 프레데릭 외에도 영주로서의 임무를 이행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것 정도였다.
‘명색이 호위기사인데도 전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
로젤린은 프레데릭이 낮잠을 자거나 땡땡이를 치고 있을 대공저를 바라보았다.
이런 미적지근한 상황을 이어가서는 안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 * *
그 시각, 프레데릭은 새 옷을 구경 중이었다.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새까맣고 큼직한 깃털을 촘촘히 꿰맨 망토를 이리저리 훑어보다 어깨에 두르고 끈을 맸다. 가죽이 두꺼운 데다 깃털까지 수북이 박혀 있어서 제법 묵직했다. 그리고 덥고 갑갑했다.
“라울, 이 망토가 어떠냐?”
온갖 곳에 꿴 깃털은 망토의 앞여밈에서도 뻣뻣하게 솟아나 있었다. 얼굴의 반을 가리는 깃털을 손으로 헤치면서 묻자, 유일한 관객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마왕 같습니다.”
“마왕?”
“동화책에서 제일 음산하게 킬킬거리면서 나왔다가 용사에게 처맞고 질질 짜면서 도망치는 마왕이요.”
“푸하하!”
라울은 신랄한 평을 내려 주었다. 그게 더 마음에 든 프레데릭은 크게 웃었다.
“그 마왕은 용사를 만나기 전에 더워서 진이 다 빠졌을 거다. 한겨울에 이것만 입고 설원을 뒹굴어도 감기가 안 걸리겠군.”
“모피도 아니고 닭 대가리 가죽으로 만든 망토가 그렇게 좋으십니까?”
며칠 전 아이기스 나이트가 토벌한 마수의 시체를 본 대공가 전속 재봉사는 영감을 얻었다. 그 결과가 이 망토였다.
가죽이 워낙 질겨서 이 작업을 위해 가위와 바늘도 특별 제작했다. 거기에서만 끝났다면 특이한 가죽으로 만든 평범한 망토가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재봉사의 영감이 닭 털, 아니 마수의 깃털이었다는 점이었다.
큰닭은 전체적으로 잿빛이지만 배 안쪽과 날개 끝 부분에 까만 깃털이 일부 돋아나 있었다. 원체 몸집이 컸기 때문에 일부이긴 해도 모아 놓으니 깃털이 무척 많았다. 재봉사는 신들린 듯한 손놀림으로 까만 깃털을 하나씩 정성스럽게 꿰었다.
그 결과물이 이 전위적인 스타일의 망토였다. 마치 짐승이 위협적으로 보이기 위해 전신의 털을 꼿꼿이 곤두세운 것 같다.
며칠 밤을 지새워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재봉사는 방금 이 망토를 바치고 쓰러져 잠들었다.
프레데릭은 깃털들이 정신 사납게 사방으로 뻗어 있는 독특한 망토의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반면에 라울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깃털이 전부 아랫방향으로 꿰매어졌다면 - 실체가 닭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에게는 - 멋지게 보였을 디자인이 되었을 텐데. 정신없이 뻗어 있으니 체격이 두 배로 부풀어 보이는 건 둘째쳐도, 입고 있는 프레데릭이 너무 나쁜 놈으로 보였다. 그의 주인은 게으르다 못해 가끔 그의 혈압을 위험하게 하긴 했으나 나쁜 놈은 아니었다.
“자연적으로는 보기 드문 마수였다면서. 게다가 닭고기는 맛있거든. 레젠에서 먹었던 새로운 닭 요리, 아마 튀김옷을 입히고 기름에 튀겼다고 했던가? 기가 막히는 맛이었지.”
“그건 그렇습니다.”
희한한 디자인의 망토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이유였지만 라울은 길게 토를 달지 않았다. 세상일에 흥미가 없는 그의 주인이 마음에 들어 하는 물건은 오랜만이었다. 그 기분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기왕이면 새 옷이 아니라 이 시각에 있을 기사단의 치하에 관심을 가져 준다면 더 좋겠지만.
“닭 대가리로 만든 망토가 좋으시면 그 닭 대가리들 잡아 온 기사들도 치하하시질 않고요.”
“됐다. 사람들 앞에서 그럴듯하게 말하면서 행사를 진행하는 건 나보다 윌리엄이 더 잘하니까. 오, 이 깃털 누르니까 전혀 부드럽지도 않고 단단해. 마치 아교로 굳힌 것 같군.”
불편하게 입을 가리는 깃털을 꾹꾹 누르며 프레데릭은 성의 없이 대답했다. 라울은 한숨을 쉬었다.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가끔씩은 제대로 성의 있는 모습도 보고 싶다.
그동안 로젤린은 프레데릭의 호위기사로서 충실한 하루를 보내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프레데릭은 그가 한 말처럼 어디론가 사라지가 일쑤였다.
안 찾아도 된다는 얘기를 본인에게 직접 들었으니 있으면 있는 대로 집무실에서 호위를 했고, 없으면 없는 대로 라울의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 건 다름 아닌 프레데릭의 태도 때문이었다.
레젠의 술집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녀가 호위기사로 발탁되었던 연무장에서 기사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았을 때, 그리고 호위기사가 된 그녀를 빈정거리던 모습들이 하나의 결론을 도출했다.
프레데릭은 기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주군이 기사를 불호하니 로젤린도 난감했다. 기사들의 존경을 받고 기사들과 친근하게 지내는 듯한 분위기의 프레데릭이 기사를 싫어하는 이유는 짐작도 되지 않았다.
마음은 복잡했지만 프레데릭을 신뢰하는 동료 기사들에게 질문할 수도 없는 내용이라서 속으로만 삼켰다.
그래서 프레데릭이 사라져도 굳이 찾아다니지는 않았지만 슈벤하임의 영주가 실질적으로 두 명이라는 사실도 몰랐다는 건 좀 쇼크였다.
주군이 기사를 불호하고 기피한다고 해서 자신까지 기사로서의 임무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로젤린은 결심을 굳히고 라울의 사무실로 갔다.
“프레데릭 님은 안 계십니다.”
오늘도 혼자 일을 하고 있는 라울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프레데릭이 일을 하고 있다는 대답보다 더 많이 들은 대답이었다.
다른 때였으면 알겠다고 대꾸하고 쉬었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뭔데요?”
라울이 그제야 서류에서 눈을 뗐다.
“영주님이 두 분이시라는 얘기를 오늘 들었습니다. 전하의 호위기사로서 이제까지 대공령의 상황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게 부끄럽습니다만, 영주님에 대해서 알려 주실 수 있으신가요?”
기사들도 다 알고 있는 상황이니 대수롭지 않은 질문이라고 여겼는데, 라울은 무척 놀란 얼굴이었다.
‘대부인의 스파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데? 연기인가? 연기치고는 너무 자연스럽잖아? 설마 프레데릭 님이 헛짚으셨나?’
라울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알 리가 없는 로젤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한 번 더 말했다.
“많이 바쁘시면 물러가겠습니다.”
“아닙니다.”
어깨를 움찔한 라울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는 곧 설명을 시작했다.
로젤린은 30분이 지난 후 프레데릭의 출생과 그가 대공이 될 수 있었던 배경, 그리고 현재 그의 위치와 대공가의 세력 구도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오늘 오전에 뵌 분이 윌리엄 님이십니까?”
“예, 프레데릭 님의 아우인 윌리엄 님입니다.”
그제야 두 명의 영주가 있다던 아벨의 말을 이해했다.
라울의 설명에 따르면 대공령의 행정은 윌리엄이, 군무는 프레데릭이 맡는 것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어리다고 할 수 있을 나이에 대공이 된 프레데릭은 기반을 제대로 다지지 못한 채 현재까지 왔다.
로젤린은 라울의 설명에 숨은 행간을 이해했다. 프레데릭의 주력 지지기반은 기사단 및 군부에 있다.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않은 듯하다. 큰 세력을 가진 정적이 있는데도 호위기사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한 자신을 반성했다.
“전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짐작이 가는 곳이 있으십니까?”
“워낙에 바람 같으신 분이라서 잘 모르겠군요.”
프레데릭의 행방을 묻자 어깨가 축 처지는 라울을 뒤로 하고 사무실을 물러났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걸으면서 프레데릭의 행방을 묻던 로젤린은 건물 밖에서 멈췄다.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광경이 있었다. 프레데릭의 뒤를 따라 대공저를 방문하였을 때, 눈에 도드라지게 들어온 나무가 있었다.
먼 거리였는데도 시야에 바로 들어올 만큼 아주 높은 나무였다. 자세히 보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나뭇가지도 크고, 굵을 것이다.
곧장 대공저로 향했다. 신입 아이기스 나이트가 프레데릭의 새로운 호위기사라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로젤린은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대공저의 정원까지 올 수 있었다.
‘아, 역시.’
아름드리 거목 밑에 서니 잔잔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집중해서 듣지 않는다면 알아차리지 못하였을 작은 소리였다.
‘나무를 타려면 클레이모어를 풀어 두는 게 좋지 않을까.?’
잠깐 고민했지만 그냥 어깨와 등에 비스듬히 클레이모어를 맨 채 나무를 탔다.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이윽고 나뭇잎 사이로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프레데릭은 푹신푹신한 쿠션까지 받치고 수면 중이었다. 다리 부근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보자기까지 걸려 있다.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는 건 망토라기보다는 털 뭉치라고 표현하는 게 더 어울릴 망토였다. 프레데릭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짐작도 안 가는 괴악한 털 망토를 이불처럼 덮고 있었다.
하늘로 솟은 털 위로 얼굴이 빼꼼히 드러난 모습이 왠지 우스워져 로젤린은 저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긴장이 풀렸다.
‘이상한 분이야.’
수도 없이 땡땡이를 친다는 걸 들었을 때도 떠오르지 않았던 감상이 새겨졌다.
그녀의 짧은 경험으로도 아이기스 나이트의 기사들이 프레데릭을 신뢰한다는 걸 짐작했다. 그 기사들의 충성을 받는 프레데릭은 기사라는 속성 자체를 경멸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기사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기사들에게 시시한 농담 따먹기를 하며 친밀함을 유지하기도 했다.
기이한 관계였다.
그 이중적인 모습이 로젤린의 안에 호기심을 틔웠다.
‘이분의 진심은 무엇일까.’
자신의 ‘주군’이 아닌 ‘프레데릭’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궁금해졌다고 해서 알 수도 없지만.’
일개 호위기사 주제에 건방지게 ‘당신의 진심을 말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로젤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반대편의 굵은 가지로 올라갔다. 여기도 사람 한 명이 기대어 앉을 만한 굵기는 되었다.
클레이모어를 풀어서 가슴 앞에 끌어안고 나무에 등을 기댔다. 가느다란 바람이 나뭇잎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뒤에서는 곤히 잠든 숨소리가 들려온다. 오늘도 쌀쌀한 기후였지만 햇볕은 따끈따끈했다.
어느덧 잠든 로젤린의 고개도 아래로 떨어졌다.
황당했다. 어이가 없었다.
‘뭐야, 이 자식은.’
프레데릭의 현재 심경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딱 그것이다. 이건 뭐지.
“…….”
그의 눈앞에서 로젤린은 아주 잘 자고 있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다.
프레데릭의 땡땡이 이력은 길다. 선대 대공이 그를 후계자로 점찍어 두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그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라울뿐만이 아니라 선생, 하인, 호위기사 등등 그를 쫓아오는 사람은 많았다. 지금도 라울과 호위기사가 그를 쫓아 사방을 헤매고 다닌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 같이 낮잠을 자는 놈은 처음이었다.
‘희한한 녀석이로군.’
스파이라고 의심하여 곁에 두었지만 이 자식이 스파이가 정말 맞는지 회의적인 기분이 되었다. 그동안 프레데릭은 일부러 더욱 땡땡이를 치며 로젤린을 따돌렸다. 프레데릭의 집무실뿐만이 아니라 대공저까지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으니 꼬리를 밟을 수 있으리란 계획이었다.
오산이었다. 로젤린은 프레데릭이 없다면 근무 시간이 끝날 때까지 라울의 사무실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주변을 캐고 다니는 기척도 없었다. 알렉산더의 평가로는 성실하고 근면한 기사라고 했다.
‘……잘못 짚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낮잠이 든 로젤린을 발견했다. 그를 경계하는 모습은 손톱만큼도 없는 태평한 얼굴이다.
목표물의 앞에서 낮잠이나 자는 놈이 과연 스파이가 될 수 있을까. 프레데릭의 회의감은 더욱 깊어졌다.
다시금 놈을 내려다보았다. 현재 프레데릭은 비스듬히 일어서서 로젤린의 머리 윗부분에 있는 나뭇가지를 잡고 몸을 지탱하는 자세였다. 허리가 꼬여서 좀 쑤시긴 했지만 놈을 관찰하기엔 충분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가느다란 햇살 줄기들이 로젤린의 얼굴에 쏟아졌다.
사내놈답지 않게 피부가 꽤 좋았다. 짙은 머리카락 색과 대비되어 더욱 희게 보이는 피부가 보들보들하다. 대다수가 그을린 얼굴에 거칠거칠한 기사단의 녀석들과는 대조적이었다. 뽀얀 얼굴에는 심지어 수염자국도 안 보였다.
‘사내자식이 이렇게 피부가 좋아도 되나. 더 계집애 같잖아.’
머리색보다 약간 짙은 속눈썹마저 풍성하다. 프레데릭은 속눈썹으로 감춰진 눈동자가 흑암처럼 아주 검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잠시나마 뚜렷한 감정을 갖고 시선을 마주쳤기 때문일까. 사내자식의 눈동자 색 따위를 기억하고 있다니.
“음…….”
시선을 느꼈을까. 푹 자던 로젤린이 낮은 신음을 내며 몸을 뒤척였다.
자고 있는 걸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는 게 들키기 전에 비키려 했으나 로젤린이 눈을 뜨는 게 더 빨랐다.
기억에서 되새긴 새까만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 전하? ……헉!”
호위해야 할 장본인 옆에서 태연하게 잠들어 있던 주제에, 막상 깨어나자마자 마주치니 놀란 모양이다.
동요한 로젤린의 몸이 나뭇가지 위에서 흔들렸다. 그러잖아도 나무 위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잠을 자는 건 어렵다. 균형을 잃으니 떨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꺅!”
“우왓!”
텅!
세 가닥의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로젤린의 비명과 프레데릭의 외침과 클레이모어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로젤린이 나뭇가지에서 미끄러지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날렵한 육체가 팔 안으로 깊숙이 안겼다. 짧은 머리칼이 프레데릭의 코끝을 스쳤다.
“……비누 뭐 쓰냐?”
“네?”
무심코 튀어 나간 질문에 로젤린보다 프레데릭이 더 당황했다.
“아, 아니다. 그보다 무거우니까 얼른 내려가지?”
제 입에서 나온 말에 제가 제일 당황하여 얼버무렸다. 그의 한 팔에 안겨 있던 로젤린이 나뭇가지를 잡아 몸을 지탱하고는 천천히 기둥을 타고 내려갔다.
나무 위에 혼자 남게 된 프레데릭은 그제야 긴 숨을 토했다. 로젤린은 이미 내려간 후인데도 코끝에 청량한 향기가 감도는 것만 같다.
‘사내자식의 몸에서 향기가 나는 게 뭐 어떻다고.’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남의 체향이나 맡은 자신이 한심해졌다. 그 대상이 남자라는 점에서 더욱.
프레데릭은 한숨을 쉬고는 자신도 나무 아래로 내려갔다. 1m를 남겨 두고 풀쩍 뛰니 로젤린은 이미 흐트러진 차림새를 다 가다듬은 후였다.
“송구합니다, 전하.”
사과는 담담히 하였지만 꾸벅 숙인 귓불이 붉었다. 주군 옆에서 낮잠 자다가 떨어질 뻔하였으니 저도 민망하긴 할 것이다.
“날 찾으러 왔다가 깰 때까지 기다린 놈은 있어도 같이 자는 놈은 처음이로군.”
“전하께서 너무 달게 주무시길래 그만…….”
로젤린은 더더욱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뭐냐, 결국은 낮잠을 잔 내 잘못이라는 건가?”
“원인 관계를 따지자면 전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프레데릭이 어이가 없었다. 결국은 프레데릭 탓이라는 게 아닌가. 가늘게 노려보니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새로운 호위기사는 무척 시건방진 놈이다. 프레데릭은 그가 알고 있는 로젤린의 신상명세서에 한 줄을 더 적었다.
그는 나무 위에 있을 때부터 신경 쓰이던 것을 턱짓했다.
“그 검은 뭐지?”
“클레이모어입니다.”
“종류가 뭔지는 나도 안다. 체구도 크지 않은 녀석이 투핸디드 소드를 가지고 다니니 의외라서 묻는 거야.”
프레데릭도 무인이니만큼 무기에 관심이 많다. 보편적인 장검보다 길고 무거운 투핸디드 소드는 대개 체구가 큰 기사가 쓴다. 로젤린이 지닌 게 의외였다.
로젤린의 신장은 일반 남성의 평균 이상이나 기사단에서는 딱 중간치이다. 체격도 제법 다부진 편이지만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거한은 절대 아니다. 굳이 클레이모어를 쓸 이유가 없어 보였다.
“지난번에는 바스타드 소드를 갖고 있지 않았던가?”
아이기스 나이트의 기본 무구는 가죽 경갑과 롱 소드(장검의 한 종류), 랜스(기병용 창)이다.
기사 본인이 무구를 선택할 수 있지만 기본 무구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기마 상태에서 마수와 싸우는 게 기본 전술이니만큼 빠른 기동성을 위한 경갑과 랜스가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차이점이라고는 칼 정도였다.
롱 소드와 바스타드 소드는 거의 비슷하지만 바스타드 소드와 클레이모어는 검술 자체가 다르다.
“그때는 바스타드 소드였으나 엊그제 동료 기사와 개인 대련을 하면서 검을 바꾸어 봤습니다. 손에 제일 익은 게 바스타드 소드이긴 합니다만 다른 무기들도 낯설지는 않습니다.”
“용병단에서 검술을 배웠나?”
체계적이지 않으나 실용적인 검술이라면 용병단에서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그녀가 어느 출신인지 깜빡하고 있던 프레데릭에게 로젤린은 자신의 출신을 일깨워 주었다.
“콜로세움에서는 쇼를 위해 무기가 약하게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부상당하거나 죽은 동료 검투사의 무기를 대신 쓰다 보니 어지간한 무기는 다룰 줄 압니다.”
“그러고 보니 검투사 출신이었지.”
프레데릭이 새삼스럽게 끄덕였다.
아이기스 나이트에 입단한 첫날, 검투사 출신이라는 걸 직접 밝혔을 때의 여파를 로젤린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설명을 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프레데릭의 눈치를 살폈다. 대번에 싸늘하게 식던 기사들과는 다르게 프레데릭은 별 변화가 없는 표정이었다.
로젤린은 안도의 숨을 삼켰다. 검투사 출신이든 용병 출신이든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 같다면, 자신에게 너무 유리한 해석일까.
어쨌든 프레데릭이 출신을 신경 쓰지 않으니 다행이었다. 기사를 싫어한다는 프레데릭이 검투사까지 경멸한다면 그녀의 처지도 난감해졌을 것이다.
“클레이모어도 대타로 쓰기 시작한 검이었나?”
“아니요. 클레이모어는…….”
대답하기 전 로젤린은 짧은 회상에 젖었다. 클레이모어를 처음 든 건 9년 전쯤의 일이었다.
그 즈음에는 검투사들도 여자라고 무시하는 시비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대신에 그녀의 신체적 조건이 남자보다 부족하다는 걸 새로운 시빗거리로 찾았다.
“제가 당시에 동료들보다 키도 작고 근력도, 완력도 부족하다 보니 빈정거림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래서 속된 말로 빡쳐서 클레이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오기가 생겨서 클레이모어를 쓰게 되었고, 2개월 후에 제일 빈정거렸던 놈의 목을 땄…… 죄송합니다. 경기에서 그 검투사를 이겼습니다.”
거친 말이 나올 뻔하였던 로젤린은 서둘러 고쳤으나 프레데릭의 귀에 들어간 후였다. 프레데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을 땄다’라는 말을 하려고 했을 게 분명하다.
‘보기보다 한 성깔 하는군.’
호위기사의 신상명세서에 한 줄을 더 적었다.
그린 듯한 마초 집단인 검투사의 세계에서 로젤린처럼 곱상한 녀석이 겪을 일이란 뻔하다. 그런 곳에서 자신이 당한 일을 배로 되갚아줄 정도였다니, 과연.
어디에 감탄하는 건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면서 프레데릭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놀랐다.
로젤린과 편하게 대화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스파이라는 의혹을 완전히 거둔 것도 아닌데 방금 전의 대화는 무척 자유롭다. 또 한 번, 어이가 없었다. 로젤린이 아니라 자신이.
‘……낮잠 때문인가.’
무방비하게 낮잠이나 자던 모습이 황당해서 의심마저 잊은 모양이다.
프레데릭은 로젤린을 바라보며 잊었던 의심을 다시 되새기려 했다. 그러나 의아하게 바라보는 얼굴 위로 낮잠을 자던 모습이 자꾸 겹쳐졌다. 정말 웃기는 상황이다.
로젤린이 슬쩍 시선을 내리며 사과했다.
“불쾌하셨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거칠게 자라서 무심코 비속어가 튀어나올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전하의 앞에서는 언행을 단정히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건 또 무슨 맥락에 어긋나는 사죄란 말인가. 빤히 쳐다보니 못마땅한 심사인 줄 착각한 모양이다. 못마땅한 건 맞는데 방향이 잘못 잡혔다.
프데레릭은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어디까지 나를 어이없게 만들 거지, 이 자식은.
“목을 땄다, 정도는 나도 쓰는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
로젤린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런 말 써도 됩니까?”
“마음대로 해라. 욕 한 번 했다고 자른다면 라울은 보좌관이 되지도 못했을 거다.”
왠지 이놈을 보면서 의심을 되새기려고한 자신이 한심해졌다. 힘 빠진 프레데릭의 어깨가 늘어졌다.
실바람은 살랑살랑. 햇살은 따끈따끈.
낮잠 자기 딱 좋은 평화로운 날씨에 의심을 곤두세우는 것도 우습다. 나무에서 내려올 때 바닥에 떨어진 망토를 들어 먼지를 털었다. 정원에서 풀어 기르는 새가 멀리에서 재잘재잘 우는 소리가 들렸다.
“원래는 개인 훈련을 하는 시간이었다지?”
“저는 기마술에 서툴러서 주로 승마 연습을 하며 보냈습니다.”
잠시 고민했다. 스파이인지 아닌지 확실히 관찰하려면 호위기사로서의 임무 외에도 좀 더 밀착해 볼까.
“나에게 기마술을 배울 생각은 있나?”
나쁘지 않은 핑계였다. 로젤린의 미숙한 점을 가르쳐 주는 것이니 의심도 사지 않고, 로젤린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도 있다.
“감사합니다!”
로젤린은 어려워하거나 예의상 거절하는 기색도 없이 냉큼 받아들였다. 싱글싱글 웃는 얼굴에 솔직한 즐거움마저 드러난다.
프데레릭은 더 혼란해지는 걸 느끼면서 말을 이었다.
“당장은 아니고 나중에 내가 시간이 나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불손한 의도로 던진 제의였는데 로젤린의 반응은 순수했다. 왠지 자신이 나쁜 놈이 된 듯한 기분에 한숨을 쉬며 돌아가려고 했지만 로젤린의 시선이 거슬렸다. 자꾸만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게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다.
“질문하고 싶은 게 있는 표정인데?”
기마 훈련에 대한 일정이나 질문하려는가 싶었는데, 로젤린이 질문한 건 뜬금없는 내용이었다.
“저에게 멱살이 잡히셨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프레데릭은 황당한 심정으로 반문했다.
“내 멱살을 잡겠다는 선언인가?”
“약 3개월 전쯤의 일입니다.”
“…….”
로젤린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그 일이었나.’
프레데릭도 진지해졌다. 예상외로 먼저 3개월 전의 그 일을 꺼낸 건 로젤린이었다. 역시 그녀도 자신을 기억해 낸 것이다.
현재 두 사람이 있는 곳은 대공저의 정문 앞에서 50m 떨어진 곳이었다. 조용히 대화를 나누면 정원사에게도, 저택 내의 사람들에게도, 대공저의 호위병들에게도 들리지 않는 위치다.
프레데릭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만약에 잡힌 적이 있다고 한다면, 경은 또 무엇을 질문할 거지?”
로젤린이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새까만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전하께서는 기사를 싫어하십니까?”
“…….”
좋은 돌직구라고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프레데릭과 그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프레데릭은 자신의 눈매가 날카롭다는 걸 안다. 말을 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노려보면 대개의 사람은 가슴을 졸인다. 그러나 로젤린의 검은 눈동자는 처음 질문을 하였을 때와 변함이 없었다.
“역시 그렇다고 한다면?”
“전하의 기사인 저까지 부정하십니까?”
“성립되지 않는 질문이군. 경이 나의 기사인 것과 기사에 대한 나의 호오는 무관하지 않나? 기사로서의 로젤린 메이어를 부정할 작정이라면 호위기사로 발탁하지도 않겠지.”
조금씩 부풀던 긴장은 바람 빠지듯이 사라졌다. 로젤린이 시선을 내린 것이다.
“알겠습니다. 대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대화를 접으려는 그녀의 의도를 프레데릭은 부정했다.
“이번에는 내가 묻지. 내 대답을 납득한 이유가 뭔가?”
프레데릭이 앞서 하였던 대답처럼, 로젤린의 대답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전하가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전하께서 기사로서의 저를 부정하지 않으신다면, 제 입장 또한 전하의 호오와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전하의 기사이니까요.”
“……우문현답이었군.”
즐거운 듯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프레데릭의 표정은 차츰 서늘해지고 있었다. 시선을 내린 로젤린은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프레데릭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다 등을 돌렸다. 말없이 걸어가는 그의 뒤를 로젤린이 호위기사로서 따라왔다.
규칙적이고 힘 있는 발소리가 들렸다. 굽에 단단한 구리판을 넣은 아이기스 나이트의 부츠가 정리된 도로를 탁탁 내딛는 소리였다.
프레데릭은 헛웃음을 흘렸다.
의롭지 않은 주군의 마음과 뜻을 거스르지 않고 복종하겠다는 기사라니. 최악이다. 그가 제일 혐오하는 기사의 우직한 습성이었다.
‘차라리 마리안 부인의 스파이가 낫겠군.’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담고 올려다보던 검은 눈동자가, 갑자기 불쾌해졌다.
* * *
연무장에는 아이기스 나이트들의 훈련이 한창이었다. 지금은 제1기사대 훈련 시간인 모양이다. 프레데릭은 눈에 익은 제1기사대의 얼굴들을 살피며 연무장 뒤쪽으로 걸어갔다.
조용히 단상으로 올라가 알렉산더의 옆에 섰다.
“아, 전하.”
단상 위에서 기사들의 훈련을 보고 있던 알렉산더가 뒤늦게 인사했다. 프레데릭이 뒷문으로 들어와서 훈련하는 기사들뿐만이 아니라 알렉산더도 그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오신다는 기별을 주셨다면 마중을 나갔을 텐데요.”
“공식적인 일도 아니니 번거롭게 기별할 건 뭐가 있소.”
거추장스러운 예의와 허례허식을 좋아하지 않는 그를 아는 알렉산더는 그냥 웃음만 지었다.
프레데릭은 그의 옆에 나란히 서서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안토니오와 대련 중인 로젤린이 보였다.
어제 사무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라울에게 전해 들었다.
- 정말 프레데릭 님과 윌리엄 님의 관계에 대해서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연기였다면 할 말이 없지만요…….
의심으로 시작했으나 로젤린의 태도는 자꾸만 의심을 희석시켰다.
“호위기사로 발탁된 로젤린 메이어는 어떻게 생각하오?”
“실력 좋은 녀석입니다. 올해…… 아니, 요 근래 몇 년간 입단한 평기사 가운데 로젤린 이상의 실력을 가진 녀석은 없습니다. 본인의 신상 문제가 아니었다면 제도의 기사단에 쉽게 입단했을 녀석입니다.”
“다르게 눈에 띄는 점은 없소?”
“열심히 합니다.”
“정말 제도 출신이 맞다고 보오?”
그제야 알렉산더도 프레데릭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검에 피비린내가 빠지지 않았으니 검투사 출신은 맞고, 말투로 보아서는 제도 출신도 맞습니다.”
“으음…….”
알렉산더는 추측이 아니라 그가 직접 본 것만을 말했다. 프레데릭은 팔짱을 낀 채 로젤린을 관찰했다.
프레데릭은 마리안 부인이 뒤에서 무슨 짓을 하든 대체로 방관하여 왔다. 자신의 바로 곁에 스파이를 심었다는 걸 알아도 모른 척할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기사단은 달랐다.
기사단이 그의 지지 기반이라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기사단은 슈벤하임을 지키는 창이자 방패이다. 그곳을 마리안 부인이 헤집어 분열시키는 것을 프레데릭은 바라지 않았다. 검과 창은 오로지 하나로서 슈벤하임을 지켜야 한다.
원래는 로젤린을 곁에 두고 보면서 스파이인지 아닌지 지켜보려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시간을 들이는 건 역시 프레데릭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검을 빌려 주겠소?”
알렉산더는 이유를 묻지 않고 잠자코 자신의 검을 양손으로 내밀었다. 프레데릭은 거추장스러운 망토를 벗고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훈련을 하던 기사들이 하나둘씩 그를 알아보고 행동을 멈추었다.
“전하.”
로젤린도 뒤늦게 그를 보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 프레데릭은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의심스러울 땐 직접 몸으로 부딪혀 보는 게 최고다.
“내 호위기사의 실력을 알고 싶은데 가볍게 대련 한 번 할까?”
주변이 가볍게 술렁거렸다. 그들의 주군이 기사들과 직접 대련을 하는 건 몇 달 만의 일이다.
프레데릭은 주변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로젤린만 바라보았다. 그가 며칠 동안 지켜본 로젤린이라면 기꺼이 그의 대련을 받아들일 것이다.
“제 부족함을 비웃지는 마십시오.”
예상대로 로젤린은 선선히 승낙했다. 즐거운 듯한 미소가 입가에 머물러 있었다.
두 사람의 대련을 위해 연무장의 중앙을 비웠다. 기사들은 자신의 훈련보다 이들의 대련을 더욱 관심 있게 지켜보며 주변을 크게 둘러섰다.
호각은 알렉산더가 불었다.
“시작!”
머리 위로 높이 올렸던 손이 아래로 내려오며 대련이 시작되었다.
프레데릭은 몇 미터 앞에 선 로젤린의 머리부터 발까지 천천히 둘러보았다. 칼이든 창이든 기사이든 검투사이든 자기 자신을 단련하는 자의 공통점이 있다.
아무리 다른 사람으로 가장하려 하여도 배우면서 익힌 습관이나 버릇은 쉽게 버리지 못한다.
서로를 탐색하는 짧은 시간이 끝나고 두 사람의 검이 부딪혔다.
프레데릭은 공격하고 방어하는 한편으로 로젤린을 관찰하는 눈을 거두지 않았다.
‘검을 잡는 방법과 발을 움직이는 건 제국 중앙식의 검술이 맞아. 상당히 체계적으로 검술을 배운 것 같은데? 검투사가 되기 전에 따로 검술을 배웠나?’
공격을 나누며 프레데릭은 로젤린에 대한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알렉산더의 말처럼 피비린내가 덜 빠지고 거칠긴 하여도 로젤린의 검술은 제도 레젠이 위치한 제국 중앙식이었다.
적어도 로젤린의 고향은 레젠이 맞았다. 평생 슈벤하임 대공령을 떠나지 않은 마리안 부인의 스파이일 확률은 낮았다. 물론 마리안 부인이 프레데릭의 의심을 피하기 위하여 제국 중앙 출신의 사람을 스파이로 고용하였을 가능성은 있다.
‘스파이라면 검투사라는 전직을 밝힐 필요는 없지 않을까. 지나치게 튀니까.’
로젤린과 공격을 주고받으며 생각을 거듭했다.
지나치게 생각에 몰두한 탓일까. 그는 불현듯 로젤린이 허점을 크게 치고 들어오며 검을 횡으로 베어 들어올 때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다.
챙! 세게 부딪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프레데릭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연무장 안이 술렁거렸다. 프레데릭이 대련 중에 검을 놓친 건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프레데릭도 손에서 떨어진 검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관찰도 중요하지만 너무 방심했다.
“……!”
손잡이를 발로 걷어차서 허공으로 띄운 검을 받아 쥐고 로젤린의 실력을 칭찬하려던 프레데릭의 어깨가 흠칫했다.
그와의 대련에서 우세를 잡았음에도 로젤린의 표정이 안 좋았다. 그녀는 기뻐하거나 싱글거리며 웃는 대신 언짢은 표정으로 미간을 모았다.
프레데릭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순수하게 대련을 하는 입장에서는 불쾌할 만한 정황이다.
‘저 표정까지 연기라면 검투사가 아니라 연극배우 출신이라는 게 맞겠는걸…….’
프레데릭은 그녀를 칭찬하려던 말 대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미안하다.”
주변의 기사들이 아닌, 오직 로젤린에게만 들리는 낮은 사과였다.
“이번엔 진심으로 하마.”
평소처럼 느긋하거나 가벼운 어조가 아니었다. 짧지만 진심어린 사과에 로젤린도 표정을 풀었다.
“한 번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아.”
두 사람은 검을 고쳐 쥐었다. 이번의 공격은 프레데릭이 먼저였다.
방금 전의 대련과는 완전히 다른 공세가 그의 칼끝에서 시작되었다. 로젤린도 한 점의 흐트러짐 없이 프레데릭의 공격을 막아 내며 반격했다.
공방이 끊임없이 교차했다. 연무장 내의 기사들은 숨 쉬는 것마저 잊고 두 사람의 대련을 지켜보았다.
누구보다 대련에 몰두한 건 프레데릭과 로젤린이었다. 검명이 귀를 자극하고 교차하는 칼끝이 시야를 어지럽히는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의 가장 가까운 곳에 존재했다.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이 곤두선 신경이 온전히 상대방을 담으며 탐색했다.
‘실력도 진짜군.’
프레데릭은 무심코 감탄했다. 몇 년 동안 입단한 기사 중 최고라는 알렉산더의 칭찬은 틀리지 않았다. 대련하는 사람이 프레데릭이 아닌 다른 기사였다면 필패하였을 것이다.
진심으로 대련에 임하자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인다. 그를 흔들림 없이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 확신에 찬 검끝, 청명하고 올곧은 기운, 결코 굽히지 않을 기사의 검. 아이기스 나이트의 숱한 기사들과 대련을 거듭하였을 때에도 느끼지 못하였던 로젤린만의 검이다.
동시에 기시감이 느껴졌다. 가슴이 기이하게 술렁였다.
프레데릭은 이 낯선 감정에 설렘과 불쾌감을 함께 느꼈다. 검술을 처음으로 배우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단순한 대련이 어째서 감정을 뒤흔드는 건지.
프레데릭과 로젤린의 검이 세게 맞물렸다. 호흡마저 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로젤린의 눈이 그를 직시했다. 검고 투명한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만큼은 주종 관계가 아닌 한 명의 기사로서 그를 보는 눈동자다.
‘……그런 거였군.’
그제야 깨달았다.
로젤린의 검은 그의 ‘아버지’를 닮았다. 더없이 훌륭한 기사였으며 더없이 우직한 기사였고 더없이 어리석은 기사였으며 더없이 완벽한 기사였던 그의 ‘아버지’.
로젤린 메이어는 스파이가 아닌 기사다.
프레데릭은 한 가지의 깨달음과 한 가지의 확신 앞에서 혼란스러웠다. 검투사 출신의 일개 평기사가 어째서 이미 기사로서 완성되어 있는 것인지. 그리고 왜 자신은 완성된 기사를 앞에 두고 동요한 것인지.
‘이제 와서 아버지의 그늘에 흔들리는 걸까.’
어쨌든 지금은 대련에 전심전력을 쏟아야 할 때다. 프레데릭은 애써 생각을 지우며 검을 꾹 쥐었다.
세 번 이어진 대련은 처음 프레데릭의 방심으로 인한 패배를 제외하고 두 번 다 그의 승리로 끝났다. 로젤린은 이겼을 때보다 졌을 때 더욱 가뿐한 표정이 되었다.
프레데릭은 검을 칼집에 넣으며 고민했다. 로젤린에게 기마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제안을 한 계기는 의심이었다. 로젤린이 스파이가 아니라면 훈련을 지속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로젤린의 검은 그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지나치게 완벽한 기사였으며 기사로서 완벽하게 죽은 그의 아버지.
‘……젠장.’
결국 프레데릭은 조그맣게 욕을 했다.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저 녀석이 미숙한 기마술 때문에 죽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정리하고 본래의 느긋한 표정을 회복한 그는 로젤린에게 말했다.
“조만간에 기마 훈련 날짜를 정해서 알려주마.”
“감사합니다!”
로젤린은 오히려 웃으며 반겼다.
‘네 기사도는 무엇이지?’
프레데릭은 입속에서 망설이던 질문을 삼켰다. 아버지와 닮은 로젤린에게 재차 확인을 하여 뭘 어떻게 할 작정인지 알 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확해진 것은 있었다.
건성으로 대충 하였던 훈련이 진심이 되었고, 로젤린 메이어라는 이름이 확실히 그의 안에 새겨졌다.
그 이름이 어떤 의미로 바뀔지는, 그도 아직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그럼 이만 돌아갈까. 오늘도 땡땡이를 쳤다가는 라울이 날 저주하는 인형을 만들 거야.”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뒷말에 로젤린이 솔깃해했다.
“저주 인형이 효과가 있습니까?”
“왜, 쓰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냐?”
“예.”
대답은 서슴없었다.
“살아 있으면 변비와 치질에 동시에 걸려 버리라는 저주를 하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요.”
“오, 누군데?”
“10년 전에 절 버리고 간 사람입니다.”
빚더미 속에 버려두고 혼자 야반도주한 작은오빠라는 걸 프레데릭이 알 리가 없다.
‘10년 전에 애인에게 차이기라도 했나 보군. 그때라면 15살 정도 되었을 텐데 조숙한 놈이잖아. ……뒤끝도 있는 것 같고.’
“나한테는 저주 걸지 마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가볍게 던진 농담에 정색하여 대답하는 로젤린을 남겨 두고 프레데릭은 손을 흔들며 연무장을 나갔다.
* * *
또 악몽을 꾸었다.
로젤린은 거친 숨을 헐떡이며 눈을 떴다. 눈앞에 피 웅덩이가 크게 고였다. 아니야, 이건 꿈이야. 다시 눈을 감고 3까지 헤아렸다가 떴다. 피 웅덩이와 시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살풍경할 정도로 단장되지 않은 조촐한 방의 모습이 피 웅덩이와 시체의 빈자리를 채웠다. 익숙해진 기숙사의 모습이 안정감을 주었다.
“하아…….”
큰 한숨을 뱉으며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목 뒤를 문질러 보니 식은땀이 흥건했다.
10년 전, 그녀는 아버지와 큰오빠의 시체를 최초로 발견했다.
그 후 때때로 악몽 속에서 아버지와 큰오빠를 만났다.
악몽을 꾸면 깊이 잠을 자지 못한다. 로젤린은 무거운 머리를 벽에 기댔다. 새파란 새벽의 공기가 창밖에서 스며들고 있었다.
메이어 남작가는 대대로 지방의 소박한 영지를 꾸리며 살았다. 제도 레젠으로 상경한 건 로젤린의 아버지가 남작가를 계승한 후였다.
로젤린의 아버지는 본래 후계자가 되지 못하는 차남이었다. 클레타트 후작의 기사로 봉직하던 아버지는 큰형이 갑작스럽게 병사하며 작위를 이었다. 남작이 된 아버지는 영지로 내려가지 않고 레젠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때 낙향하셨으면 사는 건 덜 부유하였어도 가문이 몰락하지는 않았을 텐데…….’
부질없는 상상이다. 알면서도 로젤린은 때때로 부질없는 상상을 했다.
로젤린의 아버지는 기사보다는 오히려 사업에 재능이 있었다. 로젤린이 태어났을 무렵에는 집안도 무척 부유해졌다. 일찍 죽은 어머니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아버지는 많은 사랑과 부유함을 로젤린에게 주었다.
그 부유함의 대가가 컸을까. 과욕이 판단을 흐리게 한 걸까.
메이어 남작가의 부는 로젤린이 태어나고 15년 후, 막대한 빚으로 돌아왔다. 사업을 시작한 이후 뒤를 봐주었던 과거의 주군인 클레타트 후작의 자금마저 횡령했다고 로젤린은 들었다.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쉽게 갚지 못할 빚 앞에서 아버지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큰오빠도 그 뒤를 따랐다.
로젤린이 발견하였을 때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었다.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하셨나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적어도 아버지의 숨이 끊어지기 전에 발견할 수 있다면, 묻고 싶었다. 어째서 이다지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느냐고. 뒤에 홀로 남을 어린 딸의 모습이 눈에 밟히지도 않았느냐고.
‘아버지는 작은오빠가 날 보살펴 주리라고 생각하셨을까.’
당신은 감당하지 못할 빚을 피하여 죽음으로 도피했다. 그럼에도 남은 자식들이 서로를 보살피며 살아갈 거라고 믿은 건 지나치게 이기적인 게 아닐까.
아버지의 믿음이야 어쨌든, 결론은 좋지 않았다.
작은오빠마저 어린 누이를 버려두고 사라졌으니까.
모든 건 홀로 남은 로젤린의 몫이었다. 가문의 빚도, 가문의 명예도.
로젤린은 가문의 빚에 자신을 팔기로 결심하였을 때, 평범한 행복도 포기했다. 가문이라는 굴레에 가장 강하게 얽매이게 된 건 죽은 아버지와 오빠도, 도망친 오빠도 아닌 바로 그녀였다.
‘결과적으로 내가 지금은 메이어 남작이기도 하지만 말이야.’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남작과 후계자가 자살하고, 차남마저 수년간 행방불명이니 작위는 자연히 로젤린에게 내려왔다. 아직은 반쪽짜리 작위였다. 황제가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젤린은 황제에게 정식으로 허락받을 예정이 없었다. 메이어 남작이라는 굴레를 그녀의 핏줄에게 또 넘길 수는 없었다.
영지도 빚 때문에 모두 팔아넘겼다. 이제 그녀가 죽으면 메이어 남작가는 끝이었다. 유일한 혈육인 엠마는 평민 수잔나의 딸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모든 건 내가 끝내자.’
로젤린은 10년간 반복하였던 다짐을 되풀이하며 일어났다. 빚은 갚았다. 이제 그녀가 등에 짊어지고 있는 건 명예였다.
기사의 명예를 제 손으로 꺾은 가족의 몫만 갚으면 모든 게 완료된다.
로젤린은 그것 하나만을 바라 여기까지 왔다.
시린 새벽빛이 방을 나가는 그녀의 그림자를 엷게 남겼다.
현재 아이기스 나이트의 여자 기사는 로젤린 한 명이었다.
과거에 여자 기사가 많을 때에는 일곱 명이었다고 한다. 그때는 여자 기숙사인 알파관의 목욕탕을 쓸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단 한 명뿐인 여자 기사를 위해 목욕탕을 개방하는 건 여러 가지로 낭비였다. 덕분에 로젤린은 하녀들의 목욕탕을 빌렸다.
“어머, 일찍 오셨네요. 좋은 아침입니다.”
새벽부터 따뜻한 물을 데우던 하녀가 인사했다.
“간밤에 잘 주무셨나요?”
로젤린도 가볍게 인사하며 물이 데워지기를 기다렸다. 레젠은 수도 시설이 잘 정비되어 있지만 발트란은 귀족 및 고급 주택가에만 수도 시설이 있었다. 기사단 본부에서는 일일이 물을 퍼서 데워야 했다.
아침부터 따뜻한 물로 씻는 사치는 누릴 수 없었다. 데운 물로 세수를 하는 게 고작이었다. 기후가 추운 곳이 아니었다면 데운 물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새벽녘의 악몽으로 머리가 무거웠지만 따끈따끈한 목욕탕의 공기에 긴장이 풀렸다. 로젤린은 작게 하품했다.
물을 데우고 있는 화덕의 불을 살피던 하녀가 문득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생각났어요?”
“그런 게 아니라요.”
그녀의 질문에 하녀가 킥킥 웃었다.
“기사님이 목욕탕을 두 번째인가, 세 번째로 쓰셨던 때가 기억이 났지 뭐예요.”
“그때 일요.”
로젤린도 실소했다.
기사단의 하인들은 하녀들의 목욕탕을 종종 훔쳐보곤 했다.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해도 그런 적이 없다고 변명만 할 뿐 음흉한 수작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로젤린이 하녀들의 목욕탕을 같이 쓰게 되었다.
그녀는 목욕탕을 훔쳐보던 하인들을 쫓아가 두들겨 패 주었다. 그 후로 목욕탕 훔쳐보는 하인들은 싹 사라졌다.
“남세스러워서 저희끼리도 말을 잘 못하던 거지만, 세탁 후에 가끔씩 손수건이며 속옷 같은 게 없어지기도 하였거든요. 바람에 날려 갔을 가능성도 있지만 찝찝하긴 하잖아요. 그런데 기사님이 폴 패거리를 묵사발로 만든 후에는 저희 세탁물이 사라지지 않게 되었어요.”
“망할 새끼들이 너무 많죠.”
검투사로 일할 때에도 여자 검투사는 남자 검투사나 하인에게도 심심찮은 희롱을 받았다. 그때마다 로젤린은 앞장서서 코뼈를 부러트려 주었다. 복수를 하려고 더러운 수작을 시도하는 놈들도 있었지만 그녀는 전부 받아치고 두 배로 갚아 주었다.
나중에는 그녀가 없어도 여자 검투사들이 먼저 주먹질을 하니 희롱은 꽤 많이 사라졌다.
말로 안 통하는 잡놈에게는 주먹을.
로젤린이 콜로세움에서 터득한 세상의 이치 중 하나였다.
“그런 놈들은 백 번 말해도 안 통하더라고요. 레젠에 있을 때도 한두 명 만난 게 아니거든요.”
“맞아요. 하여튼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밖에 없다니까요.”
로젤린과 하녀는 잠시 죽이 맞아서 변변찮은 사내놈들을 욕했다. 신나게 서로 까는 사이에 하녀들도 하나둘씩 목욕탕으로 들어올 시간이 되었다. 어느덧 물도 거의 데워졌다.
“기사님 덕분에 저희도 마음을 놓을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기사님이 아이기스 나이트에 오시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순수한 호의가 로젤린에게 밀려들었다.
로젤린은 다만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입단한 기사단이지만, 자신의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는 건 기쁘다.
내도록 무거웠던 머리의 통증이 조금 가셨다.
점심시간에 대공저의 하인이 식당까지 찾아왔다.
“전하께서 메이어 경께 전하라고 하신 서신입니다.”
로젤린은 입에 물고 있던 감자 조각을 얼른 삼키고 받았다. 말은 서신이었지만 사실은 쪽지 한 장이었다.
「내 기마 훈련장으로 1시 30분까지 오도록」
어제 기마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한 약속을 잊지 않은 모양이다. 그건 고마웠지만 의문점이 하나 생겼다.
‘대공 전하의 기마 훈련장이 어디인데……?’
로젤린은 아직 내성의 지리를 거의 모른다.
부연 설명이고 뭐고 없이 달랑 한 줄만 적힌 쪽지를 뚫어지게 봐 봤자 해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뒤늦게 하인에게 물어보자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미 사라진 후였다.
일단 밥부터 먹고 보자.
남은 스튜를 스푼으로 떠서 먹고 있는데, 식사를 끝내고 나가려던 기사들이 그녀의 옆으로 왔다.
“어이, 로젤린. 대공 전하의 호위기사로 지내는 감상은 어때?”
“진짜진짜진짜지이이이인짜 멋진 분이시지 않냐?”
“부럽다. 나도 전하의 호위기사가 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로젤린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기사들은 저마다 우르르 말을 쏟아 냈다. 스푼을 입에 문 채 멍하니 기사들의 수다를 들었다.
험한 상처를 훈장처럼 하나씩 달고 있고 우락부락한 근육을 자랑하는 사내 녀석들이 소녀들처럼 선망과 동경을 담아 반짝거린다. 지지기반이 기사들이라는 라울의 설명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지난번에 아벨이 프레데릭의 괴악한 패션 센스를 변명해 주었던 일도 떠올랐다. 말수 적은 그 녀석까지 그렇게 나올 정도라면 확실히 인망은 있는 듯하다.
‘그런데 왜 기사를 싫어한다고 하시는 걸까.’
프레데릭을 떠올릴 때마다 감도는 의문이 새록새록 되새겨졌다.
기사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째서 이 많은 기사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걸까. 가식적인 언행으로 수많은 사람을 수년이나 속이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참 모를 사람이다, 자신의 주군은.
“전하를 모시는 감상이고 뭐고…… 보좌관님을 속이고 도망치시거나 주무시는 장면밖에 못 봤어.”
솔직한 그녀의 말에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졌다.
“보좌관님 속이 시커멓게 썩는 건 대공 전하 덕분이긴 하지.”
“땡땡이치시는 건 일가견이 있으시다니까.”
“일하는 것만 빼고는 다 잘하셔.”
“저번에는 지붕 위에 올라가서 주무시는 바람에 발견한 하인이 기겁한 적도 있다면서.”
프레데릭에 대한 화제는 끊임없이 나왔다. 어느덧 그녀를 둘러싸고 프레데릭의 이야기를 하는 기사들도 몇 명 늘어났다.
‘앗, 스튜 다 식잖아.’
로젤린은 기사들의 수다를 들으면서 얼른 남은 스튜를 떴다.
“아랫사람들에게도 진솔하신 분이라는 건 알겠는데, 어떤 분이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넌지시 말을 흘려 프레데릭의 어디를 그렇게 선망하는 건지 떠보았다. 역시나 대답은 이곳저곳에서 술술술 흘러나왔다.
“타둠 왕국과의 전쟁이었지? 절벽을 거슬러 올라가서 기습하였던 그 전투! 그때 전하의 옆에서 말을 달리면 벅차오른 심장이 튀어 나갈 것 같은…….”
“야. 넌 그때 기사단도 아니었잖아. 어디서 구라를 까?”
“우리 형에게 들은 거라고!”
“그 전투에 옆집 아저씨도 참전을 하셨는데 아직도 술만 드시면 그때 일을 말씀하셔.”
그녀가 가만히 입 다물고 듣기만 해도 기사들의 수다는 이어졌다. 어느덧 대화의 주체는 로젤린이 아니라 프레데릭으로 확실히 넘어갔다.
“뭐랄까, 같이 칼을 쓰는 무인으로서도 존경스럽지. 일전에 전하 한 분과 기사단원 20명이 차륜전으로 대련한 적이 있었는데 전하는 마지막까지 무릎을 단 한 번도 꿇지 않고 20전 연승을 하셨거든.”
“그쯤 되는 수준이라면 실력이 너무 대단해서 질투도 안 나.”
말을 하던 기사들이 혀를 내둘렀다.
프레데릭의 실력을 한 차례의 대련으로 로젤린도 직접 겪었다. 통치자로서의 모습은 모르겠지만, 무인으로서는 존경할 만한 대상인 것 같다. 게으르지만 않았어도.
스튜를 다 비운 로젤린은 한마디 참견했다.
“능력이 너무 좋아서 게으르신 건가?”
“세상의 균형을 갖추기 위해서가 아니겠냐.”
“덕분에 보좌관님은 죽어나시지만 말이야.”
그녀의 말을 받은 기사들이 킬킬 웃었다. 옆자리에서 빵을 뜯어 먹고 있던 맥스가 참견했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막 나가시지는 않았다고 들었는데?”
로젤린은 맥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옛날에는 어떠셨는데?”
“젊은…… 아니, 어리셨을 때네. 전하는 11살 때 최연소 아이기스 나이트가 되셨거든. 그 나이에 어른들을 다 이겨 먹었다는 뜻이지. 아무튼 아이기스 나이트가 되셨을 때만 해도 밤잠을 잊고 수련에 몰두하고 마수 사냥에도 앞장을 서셔서, 아버지 되시는 츠바덴 경이…….”
중얼중얼 이야기를 하는 맥스의 등을 아벨이 툭 쳤다. 자신의 이야기에 몰두하였던 맥스는 깜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어…… 뭐, 그러니까…… 어렸을 때는 더 굉장하셨다고. 난 다 먹었으니까 간다.”
어설프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맥스는 허둥지둥 식탁에서 일어났다. 그의 입을 막았을 게 분명한 아벨도 모르는 척하고 옆 사람과 이야기를 했다.
다른 기사들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맥스의 말을 무시했다. 화제는 나올 뻔하였던 프레데릭의 어린 시절을 덮고 현재의 게으르지만 멋진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로젤린도 듣지 못한 척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동료가 되긴 하였으나 그녀는 발트란이 아닌 외부의 사람이다. 짧은 기간에 완전히 융화되기란 어렵다.
하지만 의문은 남았다.
‘대공 전하의 아버지라고? 선대 대공의 사생아가 아니셨나?’
의문을 해결하지 못하고 점심시간이 끝났다.
서둘러 씻은 로젤린은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동료 기사들은 이미 연무장으로 간 후다. 로젤린이 비빌 곳은 한 사람뿐이었다.
“안녕하세요, 메이어 경.”
라울은 오늘도 피곤한 안색으로 그녀의 방문을 맞았다.
“프레데릭 님은 집무실에 안 계십니다.”
“아, 예.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제게 기마술을 가르쳐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보좌관님께는 전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메이어 경에게 프레데릭 님이 직접 기마술을요?”
눈 밑의 다크서클을 문지르던 라울이 놀란 안색으로 되물었다.
“귀찮은 걸 싫어하시는 분께서 별일이네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그는 이내 아, 하고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럼 프레데릭 님도 훈련장에 계십니까? 지금 바로 프레데릭 님께 가시려는 건가요?”
“사실은 그 일 때문에 여쭤 볼 게 있습니다. 전하의 개인 기마 훈련장에서 기다리시겠다는 연락은 받았는데 제가 그곳의 위치를 모릅니다.”
“알려 드리겠습니다. 가시는 길에 프레데릭 님이 결재하실 서류도 부탁드립니다.”
로젤린에게 일거리를 하나 떠넘긴 라울은 기마 훈련장까지 가는 길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한 손에는 서류를 들고, 한 손에는 기마 훈련장까지 가는 약도를 그린 쪽지를 들고 로젤린은 사무실을 나왔다.
라울은 자세히 알려 주었지만 로젤린에게는 초행길이었다. 더군다나 내성 내는 건물도 많고 길도 복잡하다. 로젤린은 약도를 골똘히 보기도 하고, 경비들에게 묻기도 하며 복잡한 길을 이리저리 돌아갔다.
내성의 외곽에 있는 프레데릭의 개인 훈련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약속 시각을 훌쩍 넘긴 후였다. 기사단의 훈련장과 비슷하지만 훨씬 깨끗하고 인적이 거의 없었다. 입구에 있는 사람은 프레데릭뿐이었다.
순간 발을 멈출 뻔했다. 프레데릭이 또 희한한 털 뭉치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털이 아니라 털 위로 솟은 프레데릭의 얼굴에 집중하려 애쓰며 다가갔다.
“늦어.”
발을 탁탁 굴리며 기다리던 프레데릭이 대번에 언성을 높였다. 로젤린은 서류를 건네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초행이라서 길을 헤맸습니다.”
“……아, 맞지.”
사과를 들은 그는 불현듯 깨달은 얼굴로 머쓱해했다.
“네가 입단한 지 얼마 안 된 풋내기라는 걸 깜빡했군.”
담백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건 좋다. 한데 거기에도 왠지 빈정거림이 들어가 있다고 느끼는 건 이제까지 그가 한 발언들이 있기 때문일까.
‘첫인상이라는 건 역시 강렬하다니까.’
로젤린은 내색하지 않으려 얼굴 표정을 가다듬었다.
건네받은 서류를 주르륵 넘겨 확인한 프레데릭은 바닥에 대충 내려 두고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위에 돌을 하나 올려 두었다. 당장 결재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는 모양이다.
“잡담은 됐고 바로 말들부터 보여 주마.”
프레데릭이 왼손의 검지와 엄지를 입에 넣고 휘파람을 불었다.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한 차례 허공을 잘랐다. 이윽고 마구간 쪽에 자유롭게 풀어져 있던 두 마리의 말들이 뚜걱뚜걱 다가왔다.
두 마리 다 새까만 흑마였다. 체구도 비슷하고 털 색깔도 비슷하다. 안장을 벗긴다면 낯선 사람은 구분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프레데릭이 개중 붉은색 안장을 하고 있는 말의 갈기를 쓸었다. 말이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콧잔등을 그에게 비볐다. 결과적으로 그의 얼굴이 아니라 망토의 깃털에 부비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 녀석은 내 애마인 ‘흑염룡’, 저 녀석은 흑염룡의 동생인 ‘봉인된 피의 계약’이야.”
“…….”
패션 센스만 괴악한 게 아니었던가.
“뭐냐, 그 불손한 시선은.”
“아닙니다. 그저 15살 무렵에 작명하신 것 같은 이름이라서요.”
“멋있잖아?”
진심으로 멋있다고 생각하는 듯한 프레데릭을 외면하며 봉인된 피의 계약이라는 긴 이름의 흑마를 보았다.
‘이름이 너무 길잖아. 줄여서 봉피계…… 아니, 봉피라고 불러야지.’
동물들 특유의 유순해 보이는 커다란 눈망울이 끔뻑거렸다.
“아버지의 애마였던 명마의 후손이라 흑염룡은 나에게, 봉인된 피의 계약은 내 동생인 윌리엄에게 진상되었다. 한데 윌리엄이 똑똑하긴 해도 운동은 영 꽝인 몸치라서 그만 봉인된 피의 계약을 타다가 떨어졌지. 승마에 서툰 윌리엄이 봉인된 피의 계약을 어설프게 자극하기도 했고.”
봉인된 피의 계약이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프레데릭은 이야기를 이었다. 제 말을 하는 걸 아는지 봉피가 짧게 투레질을 했다.
“덕분에 죽은 아버지의 마누라가 봉인된 피의 계약을 죽이라고 난리가 났었어.”
한번 주인을 낙마시킨 말이다. 프레데릭의 죽은 아버지의 마누라, 아마도 선대 대공의 부인일 그녀의 반응은 이해가 되었다. 그래도 지금 멀쩡히 옆에 있는 걸 보면 어떻게든 살아남은 모양이다.
‘그보다 죽은 아버지의 마누라라니 괜찮은 표현인걸. 앞으로 작은오빠는 죽은 아버지의 둘째 아들이라고 불러야지.’
“전하께서 손을 쓰신 겁니까?”
“뭐, 대충 그렇지.”
프레데릭이 엷게 미소하며 봉피의 뺨을 손등으로 토닥거렸다.
“비슷하게 생긴 다른 흑마를 봉인된 피의 계약이라고 속여서 대신 죽였다.”
“그럼 이 말을 다른 사람들의 앞에서는 봉인…….”
역시 그 이름을 입으로 내뱉는 건 부끄럽다.
로젤린은 대충 얼버무렸다.
“이름으로 불러서는 안 됩니까?”
“상관없어. 봉인된 피의 계약이라는 이름은 그 후에 내가 다시 붙인 이름이니까 죽은 아버지의 마누라나 윌리엄 쪽 사람들은 몰라. 윌리엄이 원래 붙인 이름은 ‘일프’였지. ‘일 좀 해, 프레데릭’이라는 뜻이라던데.”
“…….”
어떤 의미로는 잘 맞는 형제지간이다.
말을 하면서 프레데릭은 손부채를 팔랑팔랑 부쳤다. 아무래도 더운 듯하다.
“전하, 오늘은 날씨도 좋은데 그 털 망토는 벗으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안 돼. 말을 타면서 이 망토가 뒤에 펄럭거리면 멋있을 것 같지 않냐.”
“……흑마에 까만 깃털 망토라니 색깔 조합은 괜찮겠습니다.”
도대체 저런 흉악한 깃털을 어떤 동물에게서 뽑았는지 의심된다. 로젤린이 의심하거나 말거나 프레데릭은 흡족한 표정이었다.
“여기에서는 당분간 봉인된 피의 계약을 타라. 내가 종종 데리고 나가긴 했지만 이 녀석도 속 시원히 달리지를 못해서 갑갑해하는 눈치야.”
“넵. 감사합니다.”
먼저 프레데릭이 등자에 발을 걸고 훌쩍 올라탔다. 풍성한 망토가 펄럭거리며 허공에 우아한 호선을 그렸다. 솔직히 그 장면은 괜찮았다. 잠깐 감탄했던 로젤린도 곧 그의 뒤를 따라 봉피의 등에 탔다.
프레데릭이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자, 그럼 달려 볼까.”
* * *
여느 때처럼 프레데릭에게 기마술을 배우는 날이었다. 프레데릭은 유능한 선생으로서 기마술을 가르쳐 주었다. ‘일하는 것 빼고 다 잘하시는 전하’라는 동료의 말을 확실히 이해했다.
프레데릭의 개인 교습을 받으면서 며칠 동안 로젤린의 기마술은 눈에 띄게 늘었다.
그래도 역시 프레데릭보다는 한수 아래였다.
“으앗!”
챙캉!
외마디 비명과 함께 로젤린의 손에서 바스타드 소드가 떨어졌다. 로젤린은 욱신거리는 손목을 주물렀다.
기마에 익숙해지면서 기마 전투술도 배우게 되었다. 프레데릭이 꽤 봐주면서 하고 있는데도 대련만 하면 연전연패였다. 로젤린은 세상의 모든 기병을 존경하게 되었다. 말을 타면서 무기를 휘두르는 것, 꽤 어렵다.
프레데릭이 롱 소드의 검신으로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며 로젤린의 뒤로 말을 몰았다.
“내가 가르쳐 준 걸 잘 기억하라고 했잖아.”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억하는 녀석이…….”
로젤린의 등 뒤로 완전히 돌아간 프레데릭이 그녀의 허리와 엉치뼈 사이를 팡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힉.”
난데없이 맞은 데다, 엉덩이 위의 아슬아슬한 부분이라 저절로 이상한 비명이 나갔다.
“허리에서 힘 빼. 말 위에서 긴장하는 건 알겠지만 넌 힘이 너무 들어가 있어. 봉인된 피의 계약은 함부로 기승한 사람을 내던지는 흉포한 녀석이 아니니까 걱정은 하지 말고. 윌리엄은 윌리엄이니까 낙마한 거야.”
프레데릭은 몇 마디 충고를 했다.
그의 충고를 새겨들으려 애쓰면서도 로젤린의 신경은 아까 맞은 곳으로 쏠려 있었다.
왜, 왜 하필이면 엉덩이 부근을?
허리에서 힘을 빼라는 의도라는 건 알겠는데, 알겠는데. 그래도 너무 엉덩이에 가깝지 않나.
‘……내가 예민한 건가.’
그래, 괜히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거다.
로젤린은 마음을 다잡았다. 수시로 성희롱을 해 대는 무식한 검투사 놈들 사이에서 시달렸기에 예민해진 거다.
마음만 먹는다면 품에 안을 여자가 차고 넘칠 프레데릭이 굳이 자신을 희롱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프레데릭은 기사를 싫어한다. 그의 선호 취향에 여자 기사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자신이 예민해진 거다.
생각을 정리하고 심호흡을 했다. 로젤린은 따끔거리는 허리 부근의 감각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말을 타고 있다는 걸 너무 의식하지 말고, 말이 달릴 때마다 흔들리는 리듬에 편안히 몸을 맡기라고. 넌 말을 타는 게 아니라 리듬을 타는 거야.”
프레데릭이 정말 리듬을 타는 것처럼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망토의 빳빳한 털이 흔들거렸다. 웃기는 모습이었다.
“힘을 주는 건 허벅지만으로 족해. 허리는 곧게 세우고, 다리에서는 힘을 풀어라.”
“명심하겠습니다.”
조금 한숨이 나왔다.
프레데릭의 설명은 아주 기본적인 것들이다. 로젤린도 알고는 있는데 막상 말을 타면 저절로 몸이 뻣뻣해졌다. 이제 겨우 달리는 것에 적응이 되었는데, 다음으로 무기를 들자니 도로 처음으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집안이 망하기 전에 죽은 아버지의 둘째 아들에게 승마를 배워둘 걸 그랬다.
“저도 노력하고 있지만 고삐를 한 손으로 잡으면서 균형을 유지하고, 다른 손으로는 무기를 쓴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기마에 능숙한 기사들은 고삐를 잡지도 않고 싸우지만 말이다.
프레데릭은 바로 그 능숙한 기사에 포함되었다. 방금 전에도 양손으로 칼을 쥔 채 발목을 비트는 것만으로도 말의 진행 방향을 조절했다. 기마술이면 기마술, 검술이면 검술, 못하는 게 없는 남자다.
“내 수준으로 되려면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지.”
“…….”
그건 로젤린도 안다. 알지만 직접 들으니 조금 빈정이 상했다.
“어렸을 때부터 기마술을 배우신 모양입니다.”
나도 일찌감치 배웠다면 기마술에 능숙해졌을 것이다, 라는 소심한 반항을 담아서 물었다. 프레데릭이 천천히 말을 몰아 입구 쪽으로 가며 대꾸했다. 로젤린도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그건 그렇지. 불알친구 녀석의 보모가 유목 민족 출신이라서 기마술이 굉장했거든. 친구랑 같이 그녀에게 똑같이 기마술을 배웠는데 기량의 차이가 어마무시하게 벌어진 걸 보면 역시 재능이 있었던 걸지도. 후후.”
짧은 대화에도 자화자찬을 빼먹지 않으며 프레데릭이 낮게 웃었다. 장난스러운 말과는 다르게 그의 표정은 과거를 회상하는 듯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걸음마보다 먼저 말 타는 걸 배운다는 그 유목 민족입니까?”
“맞다. 엔두르크 족이라고, 약소 부족 출신인데 제국민과 결혼하게 되어서 정착을 했지. 평범한 여자였는데도 기마술 하나만큼은 아이기스 나이트의 그 어떤 기사보다 굉장했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가 첫사랑이었지. 말을 타는 모습이 가슴을 설렐 정도로 아주 멋있었거든.”
평생 말과 함께 살아간다는 유목 민족이다. 식사도, 수면도, 전투도 모두 말 위에서 한다는 유목 민족에게 직접 기마술을 배웠다면 프레데릭의 기마술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할 것이다. 로젤린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럼 전하께서도 안장이나 등자 없어도 기마에 능숙하십니까?”
“당연하지. 비효율적이니까 급할 때가 아니면 안장 없이 기승하는 경우가 없지만.”
“그분은 지금도 발트란에 계십니까?”
프레데릭에게 기마술을 가르쳐 준 여인에게 직접 배울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로젤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야 프레데릭에게 배우니 좋긴 하다. 하지만 안 그래도 일하지 않는 그에게 합법적으로 땡땡이를 칠 빌미를 주는 것 같아서 라울에게 조금 미안했다.
“음, 글쎄.”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그가 흐리게 미소했다.
주거니 받거니 대화하는 사이에 훈련장의 입구에 다다랐다. 시중을 드는 하인이 있을 법한데도 프레데릭은 언제나 홀몸으로 다녔다.
덕분에 로젤린은 자신과 프레데릭이 마실 물과 닦을 수건 등을 모두 직접 들고 와야 했다. 오늘도 그녀는 미리 챙겨 온 물통과 수건을 재빨리 프레데릭의 앞에 대령했다.
“……덥긴 덥네. 멋이냐, 더위냐.”
그가 중얼거리면서 망토를 벗었다.
흑염룡은 깃털이 숭숭한 털 망토가 안장 위에 걸쳐지자 푸르르 하는 소리를 내면서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한낱 미물마저도 질색하는 망토를 오직 프레데릭만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물통을 머리 위에서 거꾸로 들어 한바탕 물을 뒤집어썼음에도 프레데릭은 영 개운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보기만 해도 숨 막히는 저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으면 당연히 안쪽은 땀으로 범벅일 것이다.
그는 결국 조끼와 셔츠까지 훌렁 벗었다. 탄력적인 근육으로 다져진 상반신이 햇살 아래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와. 몸매 죽이네.’
성장 과정이 그다지 조신하지 않은 로젤린이다. 새삼스럽게 남자의 상반신 누드에 숙녀다운 비명을 지르거나 눈을 가릴 필요는 없었다.
대신에 순수한 마음으로 감탄했다.
불필요한 근육과 군살은 한 톨도 허락하지 않는 단련된 무인의 몸이었다.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 대리석을 깎은들, 그녀의 눈앞에 있는 저 남자의 몸보다 완벽한 무인의 몸을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드문드문 있는 흉터마저 흉하지 않고 그가 지나온 세월을 알려 주는 하나의 증명처럼 보였다.
오래된 흉터가 길게 남은 승모근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꿈틀거렸다.
그것은 이미 하나의 아름다움이었다.
배부른 고양이처럼 햇살 아래에서 뒹굴뒹굴해도 그는 강한 남자다. 수련마저 게을리하고 있다면 절대 저 몸매를 유지할 수 없을 테니까.
‘부럽다.’
그리고 솔직히 부러웠다.
여자인 그녀는 남자보다 근육을 붙이기가 어렵다. 근력 운동에 그녀와 똑같은 시간을 투자하였음에도 훨씬 더 탄탄한 근육으로 무장한 남자들을 얼마나 부러운 눈으로 보았던가.
로젤린은 무심코 자신의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프레데릭의 근육을 자신의 몸에 붙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근육이 더 붙으면 힘도 더 세지고. 무거워서 안 쓰던 무기도 쓸 수 있을 테고.
라이벌이기도 하였던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검투사가 양손으로 클레이모어를 한 자루씩 들고 휘두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보다 근육질이 된 자신이 양손으로 클레이모어를 든 모습도 상상했다.
정말 좋았다.
“응?”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물에 젖은 머리를 털던 프레데릭이 돌아보았다. 황홀한 상상 속에 빠져 있던 로젤린은 괜히 찔끔했다. 절대 이상한 의도로 쳐다본 게 아닌데 변태라는 오해를 사면 어쩌나.
“할 말 있냐?”
“근육 만져 봐도 됩니까?”
반사적으로 불쑥 튀어 나간 대답에 제일 놀란 건 로젤린이었다. 그리고 프레데릭도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아,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하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전하의 근육이 너무 멋지셔서 그만……!”
서둘러 변명을 하였지만 어째 더 이상한 말이 되었다. 외간 남자의 근육이 멋있어서 만져 보고 싶다니. 이건 정말 빼도 박도 못하고 변태 인증이 아닌가. 그냥 외간 남자도 아니고, 그녀의 주군이다.
‘젠장. 쪽팔려.’
가능하다면 자신의 입, 아니 주둥이를 후려치고 싶다.
빤히 그녀를 바라보던 프레데릭이 이윽고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로젤린은 저도 모르게 반 발자국 물러섰다. 어깨가 흠칫 떨렸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만져 봐.”
이게 무슨 미친 소리인가. 로젤린은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네?”
“근육 만져 보라고.”
그녀의 동공이 격하게 떨리거나 말거나 프레데릭은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아니, 좀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만지고 싶지 않습니다.”
“만져.”
“거부합니다.”
“명령이다.”
“…….”
호위하는 주군에게 처음으로 받은 직접 명령이 이따위 것이라니.
개떡 같은 명령이지만 일단은 주군의 명령이다. 로젤린은 자신의 입을 도려내고 싶은 심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손만 앞으로 내밀었다.
이제껏 무슨 말을 해도 동요한 적이 없는 로젤린이 당황하는 모습을 골려 주고 싶다는 프레데릭의 속내는 몰랐다. 그녀가 프레데릭의 명령 앞에 당황하면 할수록 프레데릭이 더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보좌관인 라울이나 호위기사인 로젤린처럼, 직속 부하의 입장에서 프레데릭이 좋은 상사는 결코 아니다.
흠칫거리는 손끝에 탄탄한 근육이 닿았다.
‘오.’
로젤린은 거부감을 느끼던 것도 순간 잊고 감탄했다. 거부감보다 부러움이 더 커졌다.
‘이런 근육 나도 있었으면…….’
부러움으로 눈물을 삼키며 손끝으로 날개뼈 부근을 꾹꾹 눌렀다. 톡톡 누를 때마다 탁탁 튕겨 나온다는 느낌이 들 만큼 단단하다. 부럽다. 남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근육을 소유할 수 있다니. 부러워 죽겠다.
“…….”
그리고 슬슬, 맨몸에서 꼼지락거리는 그녀의 손끝에 프레데릭은 좀 이상한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먼저 말을 꺼내긴 했지만, 그저 한 번 놀려먹으려고 던진 말이었을 뿐이었다. 대충 만지는 시늉을 하다가 당황해서 쥐구멍이라도 찾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로젤린은 손가락으로 근육을 몇 번이나 꾹꾹 누르고 있었다. 게다가 절대 당황하는 표정이 아니다.
‘……왜 부러워하는 거냐.’
거기까지도 괜찮았다. 로젤린은 뛰어난 실력을 가지긴 했어도 우락부락한 근육질과 완력을 자랑하는 기사는 아니었으니까. 자신의 근육을 부러워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레데릭은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이상한 건 프레데릭 자신의 느낌이었다.
로젤린의 손은 물론 기사로서 단련되어 있다. 다른 기사들에 비하면 다소 작긴 했지만 다부진 손은 근육으로 단단했다. 그런데도 손끝이 묘하게 부드러웠다.
그 손끝이 그의 몸을 터치할 때마다 살짝살짝 소름이 돋았다.
‘따, 땀이 식어서 추운 거겠지.’
손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는 로젤린의 체향도 느껴졌다. 수련을 끝낸 후이니 땀범벅이 되었어야 할 텐데 로젤린에게서는 전혀 불쾌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
사내자식이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혼란에 빠진 프레데릭을 해방시킨 건 약속하지 않은 방문자였다.
“프레데릭 님! 오늘에야말로 결재를 해 주셔야겠…… 두 분, 뭐 하십니까?”
내성에서는 먼 거리다. 운동도 할 겸 도보로 오는 로젤린과는 달리 말을 타고 훈련장 안으로 들어오던 라울이 두 사람을 목격했다. 미심쩍은 목소리에 제정신을 차린 로젤린은 다급히 변명했다.
“저, 전하의 어깨가 뭉치신 것 같아서 안마를 해 드리느라요! 하, 하하! 하하하…….”
로젤린은 어설프게 웃으면서 근육 마사지를 하는 척하였으나 손발이 맞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목덜미와 어깨를 주무르자 프레데릭이 얼른 떨쳐 낸 것이다.
로젤린의 손이 닿았을 때의 오싹한 느낌이 등허리까지 짜릿하게 타고 올라왔다. 스스로에게 놀란 프레데릭의 입에서 아무 말이 튀어나왔다.
“건드리지 마. 나 거기 성감대라서 민감해.”
“……네.”
성감대라니, 뭐 어쩌겠는가.
로젤린은 다시금 죄인이 된 심정으로 얌전히 손을 거두었다. 문제는 그 후에 일어났다.
흑염룡의 안장 위에 벗어 둔 셔츠를 집으려던 프레데릭의 손이 실수로 로젤린의 가슴을 스친 것이다.
단순히 스쳤다면, 실수이니만큼 로젤린도 찜찜한 기분을 삭였을 것이다.
“음?”
더 큰 문제는, 스친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프레데릭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그녀의 가슴을 손등으로 툭툭 쳤다. 보호대를 착용한 가슴이 툭툭 두드려졌다.
“뭐가 이렇게 단단하냐? 아, 가슴 보호대 같은 걸 착용했나?”
툭툭.
툭툭.
남자의 손이 여자의 가슴을 툭툭.
“…….”
“…….”
로젤린과 라울이 침묵하는 가운데 오직 프레데릭만이 발랄하게 말을 이었다. 다행이다. 로젤린이 건드렸을 때와는 다르게 자신이 건드렸을 때는 별 느낌이 나지 않았다. 프레데릭은 안도했다. 그러니까 아까는 정말 땀이 식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그는 로젤린처럼 맨살이 아니라 셔츠 위를 건드리고 있다는 사실은 자각하지 못했다.
“요즘도 이런 걸 옷 안에 입는 녀석이 있군. 덥고 갑갑하긴 하지만 심장을 보호하기에는 나쁘지 않지. 뭐로 만든 건지는 모르겠다만, 마수의 가죽이 아니라면 마수의 가죽으로 바꾸는 게 좋을 거야. 보호대로 쓰이는 일반적인 짐승의 가죽보다 훨씬 단단하고 질기니까.”
“……매우 감사한 조언입니다만, 손을 치워 주시면 안 될까요.”
“……?”
그때까지도 로젤린의 가슴 위에 비스듬히 손등을 얹고 있던 프레데릭은 그제야 싸늘하게 식은 공기를 눈치챘다.
“뭐, 뭐야. 무슨 일 있냐? 라울, 너까지 왜 그런 얼굴인데?”
어색하게 손을 내리는 프레데릭에게 라울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진짜 실망했습니다. 제가 30년 동안 프레데릭 님을 섬겼습니다만 이런 분이실 줄은 몰랐군요.”
“뭐? 나? 내가 뭘?!”
“정말 몰라서 물으십니까.”
경멸과 혐오마저 느껴지는 살벌한 라울의 목소리에 프레데릭은 할 말을 잃었다.
로젤린은 눈을 질끈 감고 가슴 위를 두드리던 손의 감촉을 잊기 위해 노력했다. 라울은 목소리보다 더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같은 남자 가슴을 좀 건드린 게 어떻다고 이런 반응이냐.’
이유도 모르고 대역 죄인이 된 프레데릭은 묵묵히 서류만 결재했다.
어느 여자가 그렇지 않을까 싶지만, 로젤린 역시 성희롱과 성추행을 혐오한다.
로젤린처럼 빚더미에 깔린 막장 인생이 흔한 검투사들은 거칠었고, 여자 검투사는 만만한 표적이었다. 로젤린은 그럴 때마다 즉각 응징했다. 스트레스가 확 풀릴 때까지 그놈들을 패주었다.
남편이 죽어서 애 딸린 과부라는 소문이 난 수잔나에게 집적거리는 남자도 많았다. 로젤린은 그럴 때에도 주먹으로 대답을 해 주었다.
그러니 지금 로젤린은 몹시 짜증이 났다.
성추행범의 앞에서 묵묵히 돌아 나와야 했다는 사실이.
“으, 짜증 나! 짜증 나!”
아무리 외쳐 보았지만 울화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기숙사 알파관을 쓰는 사람이 그녀 혼자뿐이라는 건 다행이었다. 한밤중에 크게 외쳐도 시끄러우니 닥치라는 일갈이 돌아오지는 않을 테니까.
로젤린의 25년 인생에서 자신의 가슴을 만진 놈을 사지 멀쩡하게 보낸 적은 없었다.
가슴 위에 올려놓은 팔을 꺽은 뒤에 귀싸대기를 날리고, 배를 걷어차서 쓰러트린 뒤에, 다리 사이를 짓밟아버렸어야 했는데. 두 번 다시 헛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성추행범이 그녀의 주군만 아니었다면.
베개를 퍽퍽 치던 로젤린은 제풀에 지쳐서 늘어졌다. 한숨 소리에 베갯잇이 떨렸다.
‘결국 나를 기사가 아닌 여자로만 보고 있었다는 거잖아.’
사실 제일 싫은 건 그것이다.
그녀가 아무리 기사로서 있고자 발버둥을 쳐도 주군이 그녀를 기사가 아닌 여자로서만 취급한다는 것.
주군의 앞에 기사가 아니라 여자로서 있게 되면 그녀의 염원은 이룰 수 없다.
‘차라리 기사는 접고 정부나 되라는 제안을 받는 게 낫겠어.’
그렇다면 목적이 확실하니 속 시원히 기사단을 때려치울 수나 있지 않나.
‘가만있어 봐.’
베개가 프레데릭이라도 되는 것처럼 쥐어뜯던 로젤린은 문득 떠올렸다. 성추행이 있기 전의 상황, 즉 프레데릭의 근육을 만진 사건의 발단은 그녀가 맞았다. 실언만 하지 않았어도 근육에 감탄하는 선에서 끝냈을 것이다. 그 점은 반성했다.
한데, 애초에 프레데릭이 웃통을 훌훌 벗은 게 그녀를 여자로 취급했기 때문이라면? 부하이자 기사로서 여겨 개의치 않은 게 아니라, 여자로 취급하여 음험하게 벗은 것이라면?
“…….”
아, 아니야.
마구마구 뻗어 나가는 생각의 가지를 잘랐다. 온갖 잡념이 너무 폭주하고 있다.
어차피 잠을 자는 건 틀렸다. 로젤린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기름 램프도 켜지 않아 방 안은 깜깜했으나 익숙한 자신의 방이다.
침대 기둥에 살짝 부딪치는 사고를 제외하고 무사히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는 몹시 쌀쌀하다. 오래 있으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지만 개의치 않았다. 감기에 걸리는 것보다 속에서 울화가 끓는 게 더 참기 힘들었다.
“하아.”
심호흡을 한 차례 한 로젤린은 달렸다. 무조건 달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을 때까지. 성추행을 당한 기억과 잡념이 모두 사라지도록.
‘짜증 나!!’
그렇지만 마음의 절규는 동쪽 하늘이 밝아 올 때까지 맴돌았다.
다른 사람, 특히 라울이 듣는다면 비웃을 생각이지만 프레데릭은 요즈음 한 가지 의문에 깊이 빠져 있었다.
바로 로젤린의 성별이었다.
‘로젤린이 설마…… 여자인 건 아니겠지?’
로젤린이 남자라는 사실이야 물론 알고 있다. 알고는 있으나 어제의 사건이 자꾸 그를 심란하게 했다. 가슴 보호대 위의 가슴을 건드렸을 때, 로젤린과 라울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진짜 여자의 가슴을 건드린 파렴치한 변태를 보는 것처럼.
‘설마 여자였나?’
여자라는 의혹을 갖고 나니 로젤린의 모습도 다르게 보인다. 변성기 이전의 소년처럼 맑은 중성적인 목소리와 가늘고 섬세한 얼굴선 따위가.
‘여자치고는 너무 잘생겼긴 한데…….’
그렇게 생각을 해도 그 사건이 자꾸만 떠올랐다.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변태로 내몰렸던 그때는 정말 민망했다.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제일 빠른 방법은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다. 동시에 제일 선택하기 힘든 방법이기도 했다.
‘너 여자 아냐?’라는 질문은 어떤 의미로는 큰 모욕이 될 테니까.
같은 이유에서 라울이나 다른 기사단 관계자에게 묻기도 망설여졌다.
오늘도 라울의 눈을 피해 도망을 친 나무 위에서 프레데릭은 고민했다. 이제 와서 뒤늦게 로젤린의 입단서류를 보겠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확실하게 확인하려면 이것뿐인가.
만약 로젤린이 진짜 여자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근데 여자라고 해서 변하는 건 없지 않나. 잘생긴 놈에서 잘생긴 여자가 되는 것뿐인데?’
고민의 끝에 도달한 결론은 다소 엉뚱했다. 여자인지 몹시 궁금하지만 진짜 여자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
프레데릭은 여자 기사에 편견을 갖지 않았다. 필라헨 제국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 및 활동은 남성보다 낮고 하물며 오랫동안 고귀한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기사다.
과거에는 귀족 남성만이 될 수 있었던 기사다. 오랜 전란의 시기를 거치며 공을 세운 평민을 치하하거나, 부족한 기사단의 기사를 메우기 위하여 평민이 받아들여졌다. 여자가 기사 서임을 받게 된 역사는 더 짧았다.
천박한 귀족은 여자 기사를 정부로서 데리고 있는 이들도 있지만 슈벤하임 대공령은 아니었다. 마수의 습격이 빈번하여 범죄자까지 과거를 세탁한다면 모르는 척 받아들이는 아이기스 나이트이니만큼 실력만 있다면 여자라는 이유로 배척받지 않는다.
그리고 프레데릭 또한 달랐다.
어린 시절을 귀족이 아닌 평민과 자유롭게 보낸 프레데릭은 시야가 훨씬 넓었으며 또한 실용적이었다.
슈벤하임 대공령의 상황이 이러하니, 여자가 굳이 남장하여 기사가 될 필요도 없으며 로젤린이 여자라고 하여도 달라지는 것도 없다.
엉뚱하지만 깔끔한 결론을 내린 프레데릭은 정작 로젤린의 서류를 보기 위해 알렉산더의 집무실에 가지 못했다.
하녀들이 세탁을 하러 나무 아래의 우물로 웅성웅성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녀들 사이로 바로 내려가기엔 아무리 프레데릭이라도 좀 민망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대공저의 나무에서 땡땡이를 치는 건데.’
로젤린과 라울에게 사이좋게 한 번씩 발각된 장소라서 오늘은 장소를 옮겼는데, 괜히 옮긴 모양이다. 프레데릭은 나무 위에서 꼼짝 못하고 하녀들이 세탁을 마치고 돌아가기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빨랫방망이로 팡팡 세탁물을 두드리며 하녀들이 수다를 떨었다. 옹기종기 모인 젊은 하녀들의 수다는 일의 고충, 소문, 유행, 상사 뒷담화 등등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연애로 옮겨졌다.
지루하게 하품하며 수다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프레데릭의 귀가 번쩍 뜨이는 단어가 들려왔다.
“근데 아이기스 나이트에 새로 오신 메이어 기사님 말이야. 너도 봤지?”
“당연하지! 나도 기사단 본부로 취직할 걸 그랬나 봐. 내성에는 똥배 나온 아저씨들뿐이야. 기사단 본부로 가면 윗옷 벗고 훈련하는 기사들 보면서 눈요기라도 하지.”
“메이어 기사님도 늘씬해 보이지만 근육이 탄탄하다면서?”
제일 먼저 로젤린의 화제를 꺼낸 하녀가 키득키득 웃었다.
“내 친구가 봤는데 등에 근육이 꽉 조인 게 진짜 멋있대. 거기에 검투사 시절에 입은 상처까지 흉터로 남아 있다는데, 그게 또 어찌나 섹시한지.”
프레데릭은 조금 긴장했다. 기사가 하녀와 무슨 일 때문에 등짝을 보는 사이가 되었을까. 로젤린이 하녀를 희롱하는 상상을 해 봤지만 왠지 소름이 돋아서 얼른 멈추었다.
물론 그 하녀는 같이 목욕을 하다가 로젤린의 등을 봤을 뿐이었다.
‘옷 갈아입는데 하녀가 우연히 문을 열어서 목격한 거겠지.’
애써 생각을 돌리고 이야기에 집중했다. 수다의 중심은 로젤린이 되어 있었다.
“하녀들에게도 엄청 상냥하시대. 여자들 한 번 꼬드겨보려고 친절한 척하는 남자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니까. 예의랑 배려가 몸에 딱 배여 있어서 과하지도 않고 불쾌하지도 않고 딱 좋대.”
“기사단 본부에서 일하는 애들 부럽다…….”
“맥스 기사님을 그렇게 쫓아다니던 애니도 결국 메이어 기사님에게 넘어갔잖아.”
“걔는 원래 얼굴만 보고 쫓아다녔잖아.”
“잘생긴 게 최고긴 하지.”
“메이어 기사님은 목소리도 너무 좋아. 억양이 진짜 부드럽고 세련됐지?”
프레데릭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사투리가 하나도 없는 발음과 억양은 듣기에 좋긴 하다.
수다를 떨면서도 열심히 빨래를 하던 하녀 중 한 명이 문득 크게 웃었다.
“갑자기 예전 생각이 나네. 메이어 기사님을 잘 몰랐을 때 기사단 본부로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메이어 기사님과 마주친 적이 있거든? 길을 잘 모른다고 하셔서 안내하다가 얘기도 꽤 오래 했었어. 이제까지 기사들과 몇 번 사귀었지만 메이어 기사님과 있을 때만큼 가슴이 두근거린 적이 없더라니까.”
그러며 하녀는 꿈결처럼 중얼거렸다.
“결혼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다른 하녀들이 웃음을 터트리며 핀잔을 주었다.
“메이어 기사님이랑 무슨 결혼을 해.”
“아이참, 기사님이 누구인지 몰랐을 때라니까.”
“하긴 언뜻 보면 메이어 기사님이…….”
그때 나뭇잎이 살랑살랑 코끝을 간질여 프레데릭은 재채기를 했다. 갑자기 들려온 낯선 남자의 소리에 하녀들이 흠칫 놀랐다. 프레데릭은 머쓱한 얼굴로 나무에서 내려왔다.
“어머나, 영주님!”
“안녕하세요!”
하녀들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프레데릭에게 인사했다.
“일부러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다.”
이렇게 발각된 게 민망한 프레데릭은 헛기침을 하며 얼른 자리를 비켰다. 민망한 상황이 되긴 하였으나 성과는 있었다.
‘하녀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면 로젤린이 여자인 건 아니겠지.’
여자에게 연애 감정을 갖는 여자도 있긴 하겠으나 일단 동성 간은 결혼하지 못한다. 그러니 하녀가 순간이나마 결혼 생각을 하였던 로젤린도 여자가 아니다.
단순한 결론은 내렸지만 찜찜한 기분은 영 풀리지 않았다.
‘하루의 대부분을 나랑 보내면서 어떻게 벌써 애인까지 만든 거냐.’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함 속에 걸음을 옮겼다. 애초의 목적은 달성되었으니 기사단 본부까지 갈 필요는 없을 듯하다. 대신에 시간은 이르지만 로젤린을 훈련장으로 불러와야겠다.
그가 우물가를 떠난 후 하녀들이 나눈 대화는 당연히 못 들었다.
“영주님이 계셨다니 깜짝 놀랐네.”
“여자인 메이어 기사님과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걸 듣고 얼마나 웃으셨겠어?”
“에이, 그땐 기사님이 여자란 걸 몰랐을 때잖아.”
프레데릭의 오해에 아주 큰 일조를 했다는 것을 모르는 하녀들은 웃으며 다시 빨래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프레데릭의 집무실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성추행 사건이 불과 어제 있었는데 프레데릭은 오늘 갑자기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그녀를 호출했다.
훈련장으로 오라고 했던 처음의 용건이 집무실로 변경된 건 10분 전이었다.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니 성추행 사건도 떠오르면서 심란해졌다.
‘오늘도 이상한 수작을 하면 진짜 사타구니를 걷어차 주겠어.’
결심을 굳힌 그녀는 짐짓 태연하게 웃으며 들어가 인사했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일할 생각을 하니까 안 넘어가더군.”
책상 앞의 의자에 30분 이상 앉아 있으면 엉덩이에 욕창이 생긴다고 믿는 프레데릭이다. 서류를 쌓아두고 있는 그의 얼굴은 한껏 구겨져 있었다.
“원래는 일찌감치 훈련을 하려고 했는데 라울에게 붙잡혀서 일정 변경이야.”
왠지 그럴 것 같긴 했다. 다시 서류에 얼굴을 처박은 프레데릭을 곁눈질해 봤지만 평소와 다른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안도한 로젤린은 문 옆에 섰다. 뒷짐을 지고 문 옆에 대기한 지 5분쯤 지났을까. 프레데릭이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목소리만으로 그녀를 불렀다.
“로젤린.”
“명령하십시오.”
“거창하게 명령은 아니고, 서 있지 말고 소파에 적당히 앉아서 대기해. 집무실로 오는 사람이라고 해 봤자 누구인지 뻔하니까.”
“하지만…….”
“근처에서 군기 들어간 놈이 각 잡고 서 있으면 내가 불편해.”
“알겠습니다.”
세상만사를 슬렁슬렁 대하는 프레데릭이다. 로젤린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에는 간단한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맛있어 보이는 쿠키와 잼이었다. 손님용일까. 프레데릭을 위한 것일까.
군침이 꼴깍 넘어갔지만 참고 바로 앉았다. 프레데릭은 ‘각 잡고’ 있지 말라고 하였으나 정말 마음 편하게 아무렇게나 앉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숨을 죽이고 복도 밖을 오가는 기척에 집중했다.
도망친 프레데릭을 방치하거나, 기마술을 배우는 등으로 시간을 보냈으나 본래 호위기사의 역할은 이러한 것이다. 프레데릭에게 휩쓸려서 호위기사로서의 임무를 이행하지 않았기에 기사로 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로젤린은 반성했다.
사각사각. 팔랑팔랑.
집무실 안에 깃펜이 이따금 종이 위를 긁으며 지나가는 소리와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 위로 규칙적인 프레데릭과 로젤린의 호흡이 내려앉았다. 아침 해가 뜰 무렵에 잠깐 내렸던 여우비는 금방 사라지고, 늦가을의 높고 잔잔한 하늘이 창밖에 깔렸다.
프레데릭의 집무실이 있는 건물은 고위 관료의 집무실이 몰려 있는 곳이다. 라울의 집무실이 있는 건물과는 다르게 조용했다.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의 수도 아주 적고, 지나가더라도 발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이 건물은 하녀와 하인이 사용하는 복도마저 따로 나 있는 곳이다.
집무실은 조용하다.
그리고 로젤린은 밤을 꼬박 지새우며 운동까지 했다. 지난밤에 한숨도 자지 않았다.
“…….”
눈꺼풀이 자꾸만 아래로 내려왔다. 고개를 한 번 크게 떨구고는 흠칫 놀라 허벅지까지 꼬집었다. 짜릿한 통증으로 잠깐 달아나는가 싶었던 수마는 금세 도로 몰려와 눈꺼풀에 매달렸다.
‘안 돼. 더 이상 어설픈 모습을 보일 수는 없어……!’
로젤린은 필사적으로 졸음을 참았다. 참고, 참고 또 참았으나 따끈따끈 나른나른한 분위기는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기어이 아래로 푹, 떨어진 얼굴에서 짧은 머리칼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일하기 싫어서 죽겠다.’
엉덩이가 저릴 정도로 앉아서 서류를 보던 프레데릭은 결국 깃펜을 놓았다. 서류를 내던지고 머리 위로 기지개를 크게 켜니 좀 살 것 같았다. 그는 하품을 하며 남은 서류를 파라락 넘겼다.
매번 땡땡이는 치고 있어도 정말 중요한 서류는 제시간에 검토했다. 라울이 대공저까지 찾아와 침대 위에 서류를 놓고 가니 안 볼 수가 없는 것이다.
3분기 마감과 4분기 시작이 겹쳐서 봐야 할 것들은 많지만, 현재 결재 중인 서류들은 사소한 것들뿐이었다.
예를 들어 수확제 최종 예산안. 그리고 마리안 부인의 호위기사 한 명이 친지의 병을 이유로 휴직을 청했다든가, 같은.
‘일부러 체임트 경과 똑같은 핑계를 댄 걸까.’
그의 전 호위기사가 퇴직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마리안 부인의 호위기사도 퇴직하는 우연. 절대 우연이 아니라고 프레데릭은 판단했다.
그렇게 판단하여도, 현재의 그로서는 딱히 뒤를 캐볼 의욕은 나지 않았다.
프레데릭은 긴 한숨을 쉬며 머리를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슈벤하임 대공. 그 이름자는 작위를 계승한지 10년이 훌쩍 지나도 여전히 입안에서 까끌거렸다.
슈벤하임 경, 슈벤하임 장군. 이런 호칭이 훨씬 더 좋을 텐데.
그의 아버지가 남겨 준 유산은 하나같이 부담스러운 것들뿐이다.
“……하아.”
생각이 복잡해졌다. 프레데릭은 머리를 한 번 털고 일어났다. 의자가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렸다. 조용한 집무실 안의 정적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라울의 아내 이사벨은 으레 프레데릭의 몫까지 간식을 싸주었다. 이사벨은 요리도 잘했지만 베이킹도 잘했고, 프레데릭은 이사벨의 요리를 좋아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의 몫이 없었다.
‘라울이 어제 집에 가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지.’
라울은 여전히 쌀쌀맞다.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런 혐오스러운 시선을 받아야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로젤린이 여자였다면 죄를 지은 게 맞지만 로젤린은 남자가 아닌가. 그는 하녀의 대화로 굳힌 판단을 확신했다.
그는 찌뿌둥한 허리를 주무르며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로젤린에게 기마검술을 가르쳐 주고, 쉬다가 더워서 윗옷을 벗었다. 그러고는 녀석을 골려 주려고 장난을 좀 쳤다. 라울이 목격한 건 그때부터였다.
‘막 훈련장으로 들어왔을 때는 별다른 소리가 없었는데…….’
그렇다면 역시 로젤린의 가슴, 정확히는 가슴 보호대를 건드려 본 것 때문일까.
논리적으로 결론은 내렸지만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내자식의 가슴, 맨가슴도 아니고 가슴 보호대에, 윗옷까지 제대로 입은 가슴을 좀 만져 본 게 무슨 잘못이라고? 상대가 여자였다면 자신이 파렴치한 새끼겠지만 로젤린은 남자인데?
잠깐, 잠깐.
사내자식의 가슴?
‘설마.’
퍼뜩 스치는 생각에 프레데릭은 흠칫했다.
‘설마,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착각해서?’
반사적으로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게이라는 오해를 받다니, 정말 싫다.
서른이 되도록 결혼을 안 하고 있으니 ‘혹시 영주님이 남자를…….’하는 수군거림이 있는 건 알고 있으나 그는 보편적인 성취향의 남자였다. 여자가 좋았다.
젖형제로 같이 자란 라울이 게이라는 오해를 하다니 화가 나기에 앞서 서글퍼졌다.
라울까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할 정도라면 다른 사람은 어떻단 말인가.
‘당장 만나서 아니라고 해명을 해야겠어. 정말 순수하게 가슴 보호대가 신기해서 건드렸을 뿐이라고. ……그래도 로젤린이 신경을 쓰고 있으면 사과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테이블을 바라보았다가 잠시 할 말을 있었다.
로젤린이 또 졸고 있었다.
한 번 경험을 해서 그런지 처음 목격했을 때만큼 황당하지는 않았다.
‘서 있지 말고 쉬라고 앉게 한 것이긴 한데…….’
헛웃음이 나왔다. 직속이 된 지 얼마 안 된 부하가 자신을 편하게 여긴다고 봐야 하는 건지, 만만하게 여긴다고 봐야 하는 건지. 한때 녀석을 스파이로 의심했던 과거가 거짓말 같다.
프레데릭은 자리에서 일어나 로젤린에게 다가갔다. 한 손으로 소파의 등받이를 잡은 그는 별 생각 없이 로젤린의 앞 테이블에 있는 쿠키를 집어 먹으며 바라보았다.
로젤린은 그 와중에도 푹 잘 자고 있었다.
‘확실히 오해할 만한 인상이긴 하군.’
쿠키를 먹으면서 로젤린을 가까이에서 관찰했다. 우락부락한 사내놈들 사이에 있으면 확실히 튈 얼굴이다.
흰 얼굴은 매끈하고, 잘생겼다. 잘생겼지만 흔히 말하는 ‘남자다운’ 외모는 아니었다. 오히려 선이 가늘고 곱상한 축에 속한다.
프레데릭마저 그녀가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한 적이 있었다.
‘요약하자면 기생오라비 같은 인상인가. 여장을 해도 잘 어울리겠어.’
당사자를 앞에 두고 대단히 무례한 상상을 하며 좀 더 바라보았다.
호위기사를 발탁하기 전부터 잘생긴 놈을 옆에 둘 거라고 한 데다, 로젤린도 외모가 중성적이다. 라울이 이상한 오해를 할 만도 했다.
‘이렇게 보니 입술도 꽤 붉고 도톰하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억지로 납득시키면서 로젤린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쿠키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단지 그뿐인데 프레데릭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필이면 부스러기들이 로젤린의 입술 위로 떨어진 것이다. 로젤린의 인상을 ‘남자다움’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예쁘장한 입술 위로.
반사적으로 시선이 입술에 확 꽂혀 버린 프레데릭은 자신의 추태를 뒤늦게 깨닫고 민망해졌다.
‘입술이 예뻐 봤자 사내놈 입술이잖아.’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시선은 무심코 입술을 힐끔거리며 더듬었다
잠이 들어서 가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흰 치열과 혀가 살짝 보였다. 매끄러운 윤기를 지닌 붉은 입술과 입술보다 붉은 혀. 그 붉음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으음.”
로젤린이 잠결에 뒤척였다. 가느다란 숨결이 그에게 닿았다. 프레데릭은 크게 놀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어느 틈인지 로젤린과 거리가 너무 가까워졌다.
‘미쳤다, 프레데릭. 넌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그는 자신의 눈을 뽑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로젤린의 입술에 떨어진 쿠키 부스러기들이나 살살 털어냈다.
그리고 손을 대자마자 또 흠칫했다. 입술이 따뜻하고 보드랍다.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린 건 그때였다.
인기척에 로젤린이 눈을 번쩍 뜨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바로 위에는, 프레데릭의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은 그녀의 입술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프레데릭 형, 안에 있지? 결산보고서에서 궁금한 게 있…….”
노크도 없이 무례하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남자는 자신이 목격한 광경에 입을 다물었다.
깜짝 놀란 프레데릭은 허리를 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문간에 서 있는 남자는 딱딱하게 굳은 채 침묵했고, 로젤린은.
“…….”
세상에서 제일 경멸스럽고 흉악하고 더러운 무언가, 즉 바퀴벌레라도 보는 듯한 끔찍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아, 아니.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부, 부스러기가 떨어져서 치우려고 한 거야!”
“…….”
로젤린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남자가 도로 등을 돌렸다.
“바쁜 것 같으니까 나중에 올게. 삼십 분이면 끝나겠지?”
“그, 그게 아니라. 오해인데……! 그것보다 뭘 끝나겠다는 거야!”
남자는 그의 대답을 듣지 않고 문을 탕 닫았다.
황망하였으나 일단은 로젤린의 오해를 풀어 주는 게 급선무였다. 프레데릭은 그로부터 장장 20분 동안 자신은 절대 이상한 의도가 없었으며, 쿠키를 먹고 있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간신히 “……예.”라는 로젤린의 대답은 이끌어 냈다. 그러나 진심이 전혀 없는 대답은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걸 드러낼 뿐이었다.
프레데릭은 절망적으로 머리를 싸안았다.
길게 얘기를 해 봤자 오해만 커질 게 분명하다. 참담한 심정으로 로젤린을 내보냈다. 로젤린은 문을 나가는 순간까지 찌푸린 얼굴이었다.
사건이 있고 정확히 30분 후에, 문에 다시 열렸다.
“다 끝났어?”
“……윌리엄.”
프레데릭은 이복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감았다. 어떤 의미로는 이 녀석이 원흉이 아닌가. 이 녀석이 그때 들어온 게 아니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그가 노려보거나 말거나 윌리엄은 성큼성큼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형이 그런 취향이라는 건 몰랐는걸.”
윌리엄은 큰닭 토벌 건으로 아이기스 나이트를 직접 치하하며 보고서를 받았다. 당연히 로젤린이 여자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그런’ 취향은 ‘남자 같은 여자’라는 뜻이었으나 프레데릭은 ‘남자 취향’이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난 결백해!”
펄쩍 뛰며 부정하는 프레데릭에게 윌리엄은 불신의 시선을 보냈다.
“뭐,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는 건 형 자유지만. 그보다 서쪽 성벽의 개축 작업을 형이 승인하였던가?”
“그래, 지지난달에 마수의 습격으로 손상이 있었다.”
발트란 북부에 펼쳐진 검은 황야의 균열에서는 마수가 출몰한다.
검은 황야에는 마수의 출몰을 감지하는 알람 마법이 촘촘히 깔려 있었다. 그러나 가끔 마법이 깔려 있지 않은 지역을 우회하여 발트란까지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서쪽 성벽은 그렇게 나타난 마수를 토벌하며 일부 손상을 입었다.
“예산이 좀 이상해. 직접 봐 준다면 좋겠어.”
프레데릭은 윌리엄에게 받은 서류를 펼쳤다.
“내가 직접 서쪽 성벽까지 간 적이 있었거든. 그때 얼핏 목격했던 인부 막사의 숫자와 보고서에 있는 인부 고용수가 맞지 않아서 다른 내역도 조사를 해 봤어.”
서류에는 인부뿐만이 아니라 자재, 추가적으로 설치한 마법, 그 외의 비용 등등의 내역과 추적이 꼼꼼히 기술되어 있었다. 실질적인 금액보다 보고서에 올린 금액이 많다.
“돈을 해 먹었구만.”
프레데릭은 낮게 중얼거리며 서류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개별적인 차이는 적지만 모든 비용을 합산하면 꽤 큰 금액이다.
“수고했어. 누가 해 먹었는지는 내가 알아보마.”
“성벽 개축 작업 외에 다른 내역도 살펴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해.”
“알았어. 한 번으로 그쳤을 것 같지는 않겠군.”
회계감사관들에게 막대한 추가 임무를 부여하게 될 서류를 프레데릭은 대충 책상에 던졌다. 책상 앞에 선 윌리엄이 그를 잠시 내려다보다, 말문을 돌렸다.
“메이어 경은 평기사니까 평민이지? 난 찬성이야.”
“……무슨 찬성.”
“형수로서 찬성.”
“…….”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으로 튀어 버린 거지. 프데레릭은 신음하며 이마를 눌렀다. 입술 한 번 만진 것으로 결혼 얘기라니? 그보다 제국법에서 남자와 남자의 결혼이 가능하던가?
“오히려 기반이 없는 평범한 평민이라면 형에게는 더 나은 조건이 아닐까 싶어. 형은 어머니가 형수를 암살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지금까지 결혼하지 않은 거잖아.”
조건이고 뭐고 그 자식과 나는 아무 관계도 아니다, 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프레데릭은 이어지는 윌리엄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의 표정은 살짝 굳었지만, 윌리엄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기반이 없는 평민이라면 어머니도 형수에게 신경을 덜 쓰시겠지.”
윌리엄의 말투와 표정은 담담하였으나 친어머니의 일이다. 그의 앞에서는 프레데릭도 마리안 부인에 대한 말을 삼간다.
프레데릭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어머니가 제일 안심하시는 길은 네가 빨리 아들을 낳는 거야.”
“그럼 형이 진짜 죽을걸.”
“안 죽어. 조카를 양자로 삼아서 후계자로 정할 예정이거든.”
“내가 불임이라서 그건 안 되겠다.”
“……뭐?!”
뜬금없는 불임 선언에 놀란 프레데릭이 뭐라고 말을 붙이기도 전에 윌리엄은 이미 집무실 문을 열고 있었다.
“형이 집무실까지 끌어들여서 애정 행각을 하는 애인을 무책임하게 버리는 사람이라고는 믿지 않아. 잘해 봐, 프레데릭 형.”
그러고는 바로 나가 문을 닫았다.
“……아니, 그러니까 애인 아니라고…….”
혼자 남은 프레데릭의 억울한 혼잣말만이 집무실 안을 쓸쓸하게 울렸다.
프레데릭의 어머니는 정상적인 혼인을 하였으나 평생을 정부로 살았다. 그의 혈통 상 아버지인 선대 대공과 어머니의 사이에 어떠한 약속과 애정이 오갔는지는 알 바 아니었다. 프레데릭에게는 그저 상간남과 상간녀였다.
어려서는 친아버지라고 믿은 츠바덴 경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기에 더욱 그런지도 몰랐다.
사생아라는 자신의 혈통과 출생에 환멸감을 갖는 그는 불륜이니 정부이니 하는 관계를 지극히 싫어했다. 그는 적당한 혼처의 괜찮은 아가씨가 있으면 올바른 결혼을 하고자 했다.
마리안 부인에게 아내가 살해당하는 게 두려워 결혼하지 않는다는 윌리엄의 판단은 오해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에는 의욕이 없는 사내였으나, 자기 여자 한 명도 지키지 못할 만큼 무능한 사내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 결혼하기 싫어하는 건 여자들 쪽이었다.
가문의 격이 맞지 않는다는 등, 감히 대공가 안주인의 자리가 버겁다는 등, 갖가지 핑계를 대며 정중히 고사했다.
속내는 모두 동일했다.
‘마리안 부인의 눈 밖에 나면 생명이 위험해.’
선대 대공의 아내인 마리안 부인은 유서 깊은 아이든 백작가 출신이다. 아이든 백작가는 슈벤하임 대공령에서 슈벤하임 대공가 바로 아래의 권력을 갖고 있는 가문이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그녀가 결코 프레데릭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 않으리라는 건 짐작된다. 마리안 부인도 호락호락한 성품의 여인은 절대 아니었다.
대공가의 안주인이 된다는 달콤한 과실을 머금자마자 피 웅덩이로 추락하는 걸 반길 여인이 있겠는가. 부귀영화를 누리려면 일단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선대 대공의 사후, 마리안 부인이 윌리엄을 휘두르며 권력을 장악하는 걸 알면서도 프레데릭이 묵인하였으니 반쯤은 자업자득이었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였다.
고로, 여자를 무척 오래 만나지 못했다.
순전히 그 때문이다. 그 때문이어야 한다. 몇 시간 전, 아주 짧게 매만진 입술의 감촉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프레데릭은 한숨까지 푹 쉬었으나 마음은 전혀 가벼워지지 않았다.
* * *
로젤린은 짜증이 났다. 정말정말 짜증이 났다.
‘사람이 자는 사이에 무슨 짓을……!’
근무를 하는 도중에 졸아 버린 건 그녀의 잘못이 맞았다. 명백한 자신의 잘못까지 회피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깜빡 존 게 잘못이라고 성추행을 당해야 한다는 건 아니질 않나.
한 번은 참을 수 있었지만 두 번은 못 참겠다.
‘……차라리 그만둘까.’
더 험한 꼴을 당하기 전에 기사단을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망상에서 그칠 뿐이었다. 여자인 그녀의 입장에서 이곳보다 나은 기사단을 찾기란 무척 어렵단 걸 로젤린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일에 집중했다. 다행히 프레데릭은 그 이후에 이상한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 오히려 가끔씩 그녀의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왠지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보면 고개를 휙 돌린 적도 몇 번 있었다.
성추행만큼 짜증이 나는 건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묘했다. 성추행이 불쾌하긴 하지만 부하의 눈치를 살피는 주군이라는 모습도 썩 유쾌한 건 아니다.
그녀를 대하면서 살짝 약해진 프레데릭의 모습에 로젤린의 경계심도 조금씩 흐려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타앗!”
예리한 기합 소리가 한 차례 허공을 갈랐다. 한 배에서 태어난 두 마리의 흑마가 비슷하게 맞물리고, 챙! 하는 검명이 울렸다.
“읏……!”
몇 차례 프레데릭과 칼을 부딪치던 로젤린의 손에서 바스타드 소드가 떨어졌다. 저릿저릿한 아픔이 손목을 지나 어깨까지 올라왔다.
“이번에도 졌습니다. 대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젤린은 깍듯이 인사하며 말에서 내렸다. 요즘에는 프레데릭과 대련을 할 때가 많았다. 로젤린의 기마실력은 짧은 시간에 비약적으로 늘었다. 이만하면 기마술에 서툴다는 핀잔은 듣지 않을 정도는 되었으나 역시 프레데릭에게는 역부족이다.
‘일단 완력도 부족하고.’
로젤린은 땅에 떨어진 바스타드 소드를 집으며 자신의 손을 보았다. 거칠고 뼈마디도 불거지고 잔흉터까지 많은 투박한 전사의 손이다. 이 손에 귀족 영애의 흔적은 티끌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한계가 있는 손이다. 근력을 단련하였으니 평범한 남자는 팔씨름으로도 이길 수 있겠지만 그녀와 같은 기사나 전사에 비하면 부족한 힘이다.
‘남자보다 체력적인 한계가 있는 건 아쉬워.’
그런 한계가 있음에도 그녀에게 패배한 수많은 남자들이 들으면 상당히 억울해할 아쉬움이기도 했다. 어쨌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에게 부족한 면을 극복하는 향상성을 바라는 법이니까.
“아…… 수고했다.”
짤막하게 대답하는 프레데릭의 목소리가 왠지 굼뜨게 들렸다. 이상하게 여겨져 돌아보았으나 말에서 막 내리는 그의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착각인가. 머리를 한 번 긁적인 로젤린은 따로 챙겨 놓은 물통과 수건을 가지러 갔다.
변함없이 반복되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 풍경에 프레데릭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소한 사실만 제외하면.
말에서 내리는 척하면서 로젤린의 시선을 회피하는데 성공한 프레데릭은 말안장에 이마를 턱 박았다.
‘왜 이러는 걸까, 진짜.’
아까도 그렇게 세게 힘을 실어 칼을 내리칠 작정은 아니었다. 당황해서 그만 힘이 들어가 버린 것이다. 바로, 로젤린이 입술을 핥는 걸 봐버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로젤린이야 대련 중에 무심코 혀를 내밀었을 뿐일 것이다. 녀석은 자신이 입술을 핥았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러니 거기에 반응해 버린 프레데릭의 완벽한 잘못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 입술의 감촉을 기억하고 있는데, 마냥 모르는 척하며 의식하지 않기란 어렵지 않은가.
그런 변명을 스스로에게 붙여 보았지만, 왠지 치졸하게만 들렸다.
‘미치겠군. 저 자식은 남자라고, 남자.’
남자의 입술 감촉 따위를 떠올려서 어쩌겠다는 건가.
프레데릭은 -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 납작할 로젤린의 가슴이라든가,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 훌륭한 물건이 있을 로젤린의 다리 사이 따위를 강하게 인식했다.
그래도 입술 감촉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는 못했다. 지난 며칠 내내 못했으니 이제 와서 성공할 리는 없긴 하다. 바로 눈앞에 그 입술이 얼쩡거리고 있는데.
입술이 보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면서도 프레데릭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떠올리지 못했다. 특훈을 그만두거나 이전처럼 낮잠을 핑계로 피해 다닌다는, 즉 로젤린을 아예 만나지 않는다는 해결책을.
안장에 엎드린 채 끙끙거리고 있자니 흑염룡이 꼬리를 크게 흔들었다. 프레데릭은 보드라운 갈기를 쓸어 주며 한숨을 쉬었다.
그 상대가 여자이든 남자이든 자꾸 떠오르고 신경이 쓰이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까지 모를 만큼 프레데릭은 둔하지 않았다.
“……하아.”
저절로 한숨이 또 나왔다. 입술. 입술이 문제인가.
프레데릭은 로젤린의 여러 가지 얼굴을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의 화난 얼굴도, 멀뚱거리는 반응도, 그와 대화하며 이따금 빙긋 웃는 미소도, 무기를 손에 쥐었을 때의 진지한 표정도, 전투가 끝난 직후의 느슨한 눈매도.
그가 겪은 여러 가지 표정에 더하여, 보드라운 그 입술이 달콤하게 이름을 부르는 표정이 궁금하다. 이것은 분명, 녀석을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잔데. 남잔데……!’
마음 같아서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다.
단언컨대 프레데릭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사내자식에게 욕망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신에게 맹세해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실수든 고의든 사내놈의 입술을 만져본 게 충격적이라서 내가 착각을 하는 걸까. 그럼 다른 사내놈의 입술을 한 번 더 만져보면 중화되지 않을까.’
절망적으로 그런 상상까지 하고 있을 때에 로젤린이 수건을 내밀었다.
“물도 드릴까요?”
“아, 아니…… 고, 고맙다.”
프레데릭은 허둥지둥 수건을 받았다. 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힐끔 보니 로젤린은 수건에 물을 조금 뿌려서 얼굴을 문지르고 있었다.
날씨는 며칠 사이에 꽤 쌀쌀해졌다. 이대로 차가운 공기에 땀이 식으면 감기가 걸릴 수도 있다. 훈련장에서 기사단 본부까지는 꽤 멀다. 그러니 프레데릭의 제의는 정말 순수한 의도였다.
그의 머릿속이 무척 복잡한 상황이긴 했지만 부하에게 고의로 성희롱을 하는 남자는 절대 아니었다.
“본부로 귀환하기 전에 대공저의 내 욕실에서 씻고 가지?”
불행히도 부하의 성별을 착각 중인 프레데릭의 이 한마디는, 로젤린이 잊고 있던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성희롱.
“…….”
“길은 조금 돌아가야겠지만 기사단 본부까지 가는 것보다는 가깝…… 표정이 왜 그래?”
로젤린의 표정이 이상했다. 왠지 그녀의 앞에서는 강하게 나가지 못하고 있는 프레데릭은 반사적으로 움찔 했다.
‘이번에도 무슨 말실수를 했나?’
곰곰이 되짚어 봤지만 이상할 건 없었다. 기사단 본부보다 더 깔끔하고 시설도 좋은 그의 욕실에서 씻고 가라는 제의는 로젤린에게도 좋은 게 아닌가?
로젤린이 느리게 물었다.
“대공저의 사용인이 쓰는 욕실이 아니라, 전하의 욕실에서요?”
“……? 대공저까지 갔는데 일부러 사용인의 욕실을 쓸 필요가 있나?”
“설마 전하와 같이 씻자는 말씀을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남자끼리 같이 씻는 게 뭐가 문제가 되냐 싶었지만 로젤린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여기서는 무조건 부정의 대답을 해야 한다고 프레데릭의 본능이 외쳤다.
“그럴 리가. 비어 있는 다른 욕실은 있으니까 따로 씻으면 돼.”
로젤린이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그러고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저는 본부로 귀환하여 씻겠습니다.”
“그래 봤자 기숙사 목욕탕일 거 아니냐? 따뜻한 물을 데우는데도 시간이 걸릴 텐데?”
“하녀들의 목욕탕은 주방과 가까워서 필요하면 저 하나가 쓸 온수는 금방 부탁할 수 있습니다.”
“하녀들의 목욕탕?”
이번에는 프레데릭이 놀랄 차례였다.
이 대화의 중간에 하녀들의 목욕탕이 언급될 이유란 무엇인가.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로젤린, 너 혹시 하녀용의 목욕탕을 사용하는 거냐?”
“네.”
당당한 대답이었다.
일 더하기 일은 이라는 대답처럼 당연하고도 당당한 대꾸다. 프레데릭은 차마 거기에 대고 ‘왜?’라는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질문을 하는 자신이 비정상적으로 여겨질 만큼 당당한 대꾸였으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참으로 남자다운 대답이다.
“그, 그렇군. 좋지, 하녀 목욕탕…… 나도 좋아해…….”
프레데릭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횡설수설 중얼거렸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다시 보마.”
“물러가겠습니다.”
꾸벅 인사한 로젤린은 먼저 등을 돌리고 총총 돌아갔다. 하녀 목욕탕으로.
한 점 거리낄 것 없는 당당한 뒷모습을 보며 프레데릭은 몹시 심란해졌다.
‘낮 시간에는 하녀들도 목욕탕을 안 쓰겠지. 안 써야 해…….’
알몸의 여자들로 가득한 목욕탕에 로젤린이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건 정신 건강에 안 좋았다.
“전하.”
잘 걸어가던 로젤린이 갑자기 등을 돌렸다. 프레데릭은 흠칫하여 얼른 머릿속의 목욕탕 상상을 지웠다.
“저는 전하를 무인으로서 존경합니다. 기사로서도 충성을 바칠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고마운 말이긴 한데 분위기는 전혀 낯간지러운 찬사를 바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로젤린은 딱딱한 분위기보다 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성희롱은 부디 자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전하께 갖는 존경이 이 이상 훼손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건방진 요구라고 생각되시면 언제라도 호위기사의 임무에서 해임하시거나 기사단을 탈단하라고 명령하십시오.”
할 말을 다 끝낸 로젤린은 어딘지 속 시원한 표정으로 가던 길을 다시 갔다. 그녀의 등 뒤에는 입을 떡 벌린 채 굳은 프레데릭만이 남았다.
성희롱이란 성적으로 수치심을 주는 언행이다. 사전에서도 명쾌하게 정의하고 있는 단어였다.
프레데릭은 사전을 탁 닫으며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내 말의 어디가 성희롱이지? 욕실에서 씻고 가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한 것뿐이잖아? 같이 씻자고 강요를 한 것도 아니고?’
로젤린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상상을 했던 프레데릭의 머릿속을 들여다봤다면야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로젤린이 무슨 수로 그의 머릿속 상상을 꿰뚫어 본단 말인가.
‘……설마 꿰뚫어 봤나?’
성희롱의 사전적 의미와 그의 상식이 허물어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로젤린에게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게 더 그럴 듯했다.
‘정말 바보 같은 상상만 하는군. 그보다 그 녀석에게 성희롱의 범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야? 그걸 알아야지 앞으로 실수를 안 할 텐데.’
무슨 실수를 한 건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하나 당사자가 성희롱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변명할 말은 없다. 앞으로 또 부하에게 성희롱이나 한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주의해야 할 텐데 뭘 주의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전에, 난 왜 이렇게 사내자식을 신경 쓰고 있는 거지. ……내가 정말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남색가였나? 이제까지 남자가 아무렇지 않았던 건 단순히 취향의 남자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뿐인가? 하지만 여자를 만날 때도 서기는 섰는데?’
두꺼운 사전 위에 엎드려서 원초적인 고민을 하는 프레데릭의 귀에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청소 시간도 아닐 때에 대공저의 서재에 드나드는 사람은 한 명뿐이니 그대로 엎드린 채 있었다.
양팔에 책을 가득 안고 들어온 윌리엄이 놀란 목소리로 불렀다.
“형이 책을 읽을 때가 다 있어?”
“윌리엄. 오늘 내 욕실을 써라.”
“왜?”
“그냥.”
“뭐, 그러든가.”
책상에 책을 내려놓은 윌리엄이 별생각 없이 대꾸했다. 프레데릭은 손가락을 딱 튕기며 허리를 폈다.
“맞아.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 욕실을 쓰라는 게 성희롱이 될 수는 없는 거잖아?”
“그 말을 성희롱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
겨우 상황을 이해했는지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자한테 그런 말을 했다면 성희롱이야.”
“내가 바보냐. 당연히 남자한테 한 말이지.”
“누구?”
“로젤린 메이어.”
시큰둥하게 말을 받으며 책을 정리하던 윌리엄의 손이 딱 멈췄다. 프레데릭을 바라보는 눈이 불신으로 가득 찼다.
“……형의 호위기사 말이야?”
“응.”
“형의 호위기사가 그 말을 듣고 성희롱이라고 했다는 뜻?”
“그렇다니까.”
호응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프레데릭도 확신했다. 역시 그건 보편적인 의미의 성희롱은 절대 아니었어.
잠시 프레데릭을 보던 윌리엄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실룩거림은 이내 박장대소가 되었다.
“푸하하하하!!”
프레데릭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이 자식은 또 왜 갑자기 웃는 거지. 성희롱이 그렇게 웃긴 대화였나?’
오늘따라 그의 주변에 그가 이해하지 못할 상황들만 늘어나고 있었다.
프레데릭이 언짢아하거나 말거나 배가 아프도록 웃은 윌리엄은 간신히 진정했다. 웃음을 그친 첫마디가 “그러니까 형은 일을 좀 제대로 해야 해.”라는 말이라 프레데릭은 더 언짢아졌다.
“무슨 일?”
“보나마나 메이어 경의 서류도 라울에게만 맡기고 손가락도 안 댔지?”
“라울이 알아서 설명 다 해 주는데 굳이 서류까지 볼 필요가 있나?”
“역시 형다워.”
욕 같이 들리는 칭찬이었다.
윌리엄이 웃음의 여운이 남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며칠 전에 집무실에서 메이어 경에게 키스를 하려던 건 뭔데? 남자 취향이 생긴 거야?”
“키스가 아니라 입술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털어주던 거였다니까. 아무튼 그때는 진짜 실수였는데…….”
동생이라지만 남자를 두고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다는 걸 솔직히 고백하기는 난감하다. 프레데릭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포괄적인 단어로 뭉뚱그렸다.
“지금은 신경이 좀 쓰여.”
“남자라면서?”
“그게 문제지.”
윌리엄의 입가가 또 한 번 실룩거렸다. 다행히 이번에는 박장대소가 되지는 않았다.
“황제 폐하께 부탁해 봐. 남자와 남자가 결혼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켜 달라고. 형이 폐하께 해 드린 게 얼마나 되는데, 설마 법안 통과 하나를 안 해 주시겠어?”
“……결혼이라니 너무 멀리 나갔잖아. 로젤린이 사내자식 같지 않게 생겨서 괜히 신경이 쓰이는 것뿐이라고. 내가 설마 남색가겠냐?”
태연하기 짝이 없는 동생에게 프레데릭은 괜히 툴툴거렸다. 누구는 사춘기도 다 지나서 뒤늦은 성정체성으로 인한 혼란 때문에 괴로운데.
“뭐, 신경 쓰이기 시작하면 사귀게 되고, 사귀게 되면 결혼도 하는 거 아니야?”
“아냐! 난 여자를 좋아했고 앞으로도 여자를 좋아할 거다.”
하나밖에 없는 형의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는 윌리엄을 노려보았다. 단호하게 남색가 의혹을 부정했지만 윌리엄은 듣지도 않았다.
“메이어 경이 남자든 여자든 호위기사든 평민이든 무슨 상관이야? 새 호위기사가 메이어 경이 된 후로…….”
윌리엄이 눈가를 접으며 미소했다. 저 자식은 형을 남색가의 구렁텅이로 강제로 밀어 넣는 게 즐겁냐고 투덜거리던 프레데릭은 그의 다음 말에 숨을 삼켰다.
“형이 지루해하는 얼굴을 본 적이 없어.”
* * *
하늘이 지독히도 맑았던 어느 날, 발트란의 슈벤하임 대공저에 한 명의 소년이 섰다.
- 이 아이가 프레데릭이요.
소년의 친아버지, 제이슨은 어린 아들의 손을 힘 있게 꾹 쥐었다. 그 다정한 손짓과 아들을 내려다보는 눈매에는 애정이 가득하다. 슈벤하임 대공 제이슨을 아는 자라면 놀랄 것이다. 그 무자비하고 냉정한 사내가 봄 햇살처럼 푸근한 미소도 지을 줄 아는 자였느냐며.
그러나 프레데릭에게는 역겨움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쥐어 잡힌 손바닥 사이에서 묻어나는 체온도, 애정을 듬뿍 담은 온화한 목소리도, 자신의 것과 흡사한 적금발도, 모두, 모두, 모두, 토악질이 났다.
제이슨의 손을 뿌리치고, 발치에 침을 뱉으며, 지옥 불에 떨어지라는 저주를 하고 싶었다.
당신에게 받은 절판의 피와 지아비를 배신하고 사통한 여인에게 받은 절반의 피는 필요 없으니 가져가라고 외치고 싶었다. 혈관을 잘라 두 남녀에게 받은 피를 전부 흩뿌리고 싶었다.
그러지 못하는 것은 ‘아버지’와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소년 프레데릭은 아버지와 나눈 약속을 떠올리며 침착하고자 애썼다.
사람이 아닌 마수의 살갗에 닿은 것처럼 거부감을 자극하는 손의 감촉도 지웠다.
- …….
두 부자의 앞에 선 여인의 안색이 창백했다.
프레데릭은 엄격한 인상의 그녀가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마리안 체 슈벤하임. 제이슨의 아내. 신의 앞에 맹세하고 황제에게 인정받은 제이슨의 유일한 반려.
그럼에도 남편에게 외면받은 여자.
- 인사는 하지 않으시오? 프레데릭이 기다리고 있잖소.
- 아야!
마리안이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앞에 세워 두고 있던 소년이 짧게 비명을 질렀다. 프레데릭은 동갑내기 이복아우에게 눈길을 돌렸다. 윌리엄은 제가 내뱉은 비명에 제가 제일 놀라 얼른 입술을 깨물었다.
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어 두고만 있던 마리안이 순간 비명을 지를 만큼 세게 움켜쥔 건 모두에게 보였다. 희게 질린 손끝은 지금도 바르르 경련하고 있었다.
프레데릭도 보았고, 제이슨도 보았다.
제이슨이 미간을 좁혔다.
마리안은 그녀의 안색만큼이나 창백하게 인사했다.
- 네가 츠바덴 경의 아들인 프레데릭이냐. 최연소로 아이기스 나이트에 입단했다고 들었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고철처럼 딱딱하고 부스러기처럼 버석거리는 인사였다. 윌리엄이 불안한 얼굴로 부모를 번갈아 보았다.
윌리엄도 알고 있고, 마리안도 알고 있다.
프레데릭이 제이슨의 사생아라는 건 공공연한 소문이다. 단지 소문이다.
츠바덴 경의 아내와 결혼 전부터 관계가 있었고, 제이슨이 노골적으로 프레데릭을 총애하여도 그저 소문이다. 증거가 없는 단순한 소문.
그러나 그 소문은 제이슨이 프레데릭을 대공저로 직접 데려오며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제이슨이 짐짓 큰 목소리로 웃으며 프레데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프레데릭은 제 머리 위로 송충이가 지나가는 것 같아 치가 떨렸다. 윌리엄은 제 머리를 한 번도 어루만지지 않은 아버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마리안은 눈을 부릅떴다.
- 아니지.
제이슨이 말했다. 아들을 안은 마리안의 손이 바들바들 경련했다.
- 츠바덴 경이 얼마 전에 사망한 건 알고 있소? 내 예전에 사정이 있어 츠바덴 경에게 양육을 부탁하였으나, 일이 이리되었으니 내가 직접 이 아이를 돌볼 것이오.
가당치도 않은 헛소리다.
하나 그 헛소리를 말하는 자는 이 저택의 주인이며 이 땅의 주인이었다. 그가 지배하는 땅에서 그에게 지배되는 여자는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 ……아비를 잃은 소년을 양자로 들이시려는 겁니까.
- 말하지 않았소. 사정이 있어 츠바덴 경에게 양육을 부탁했다고.
그는 마치 소중히 아껴 온 보물을 자랑하는 것처럼 프레데릭의 어깨를 두드렸다.
- 내 아들 프레데릭이 나의 후계자가 될 거요.
대공저에는 프레데릭이 머물 준비가 이미 다 되어 있었다.
제이슨이 손수 안내해 준 자신의 방에 들어온 프레데릭이 제일 먼저 한 행동은 손 씻기였다. 손이 얼얼할 정도로 빡빡 문질러 닦은 프레데릭은 머리도 털어 냈다. 그렇게 하면 마치 감촉을 잊을 수 있을 것처럼.
- 내 아들 프레데릭이 나의 후계자가 될 거요.
그 한마디는 양해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설명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모든 것을 결정한 후에 내리는 통보였다.
프레데릭의 뜻은 한 점도 반영되지 않았다. 정실인 마리안의 뜻도 반영되지 않았다.
사생아와 정실부인의 만남이다.
프레데릭과 마리안은 절대 서로에게 좋은 첫인상을 남기지 않았다. 남길 수도 없는 관계였고, 만남이었다. 그래도 프레데릭은 마리안이 제이슨의 선언을 듣고도 그 자리에서 울부짖거나 대로하지 않은 인내심이 굉장하다고 여겼다.
어쩌면 속으로 칼을 갈기 시작하였을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무책임한 인간. 프레데릭은 제이슨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만 아니었으면 모든 것이 순리대로 되었을 것이다. 프레데릭은 자신이 제이슨의 친아들이라는 것도 싫었고, 대공이 되는 건 더욱 싫었다.
새로 받은 방은 무척 넓었다.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조촐한 집만 한 넓이다. 그 넓이가 끔찍했다.
프레데릭은 방을 둘러볼 생각도 않고 아무 의자에 주저앉았다. 과거에 쓰던 짐은 하나도 가져오지 못했다. 제이슨은 일개 기사의 아들로 살았던 과거를 지우려는 것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오게 했다.
목검이 아닌 진검을 손에 쥘 수 있게 된 날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칼까지 버리고 와야 했다.
가지고 올 수 있었던 건 몰래 옷 안에 숨겨 온 아버지의 유품 하나였다.
프레데릭은 품에서 단검 한 자루를 꺼냈다. 검붉게 변색된 피딱지가 말라붙은 투박한 단검은 아버지가 죽기 직전까지 지니고 있던 검이었다.
- 프레데릭, 너는 대공 전하의 아들로 살거라.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자신의 아내를 빼앗고, 이제는 아들까지 빼앗으려 하는 주군을 지키려다 죽었다. 앞의 사실은 생략되고 ‘주군을 지키고 전사한 기사’라는 결과만 남았다.
기사로서 명예로운 죽음이라며 칭송을 받았다.
별거 상태였던 어머니는 홀몸이 되었다.
유일한 보호자를 잃은 프레데릭은 제이슨이 거두었다.
프레데릭은 짐작했다. 아마 아버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건 자신을 죽이기 위한 제이슨의 함정이었다는 것을.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은 제이슨이다. 프레데릭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살아야 하는 시간이 끔찍했다. 살인자의 후계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 네 재능이야말로 틀림없이 나의 아들이라는 증거다.
제이슨은 크게 기꺼워하였으나 프레데릭은 부정했다.
천부적인 재능은 대대로 뛰어난 무인이기도 한 슈벤하임 대공가의 혈통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나 그 재능을 꽃 피우고 갈고닦게 이끌어 준 건 아버지였다.
프레데릭은 제이슨에게 받은 일체를 부정했다.
그렇지만 이 저택을, 제이슨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 프레데릭, 너는 대공 전하의 아들로 살거라.
아버지의 유언. 주군이 먼저 그를 배신하고 저버렸음에도, 자신을 죽이고 모든 것을 빼앗으려 한다는 걸 알았음에도, 최후의 최후까지 우직하게 충성을 바친 어리석은 기사의 유언.
프레데릭은 ‘아버지’를 부정할 수 없었다.
제이슨의 충실한 아들이 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가 선택한 건 도피였다.
* * *
- 형이 지루해하는 얼굴을 본 적이 없어.
윌리엄이 마지막으로 던지고 간 말이 새록새록 귓가에서 맴돌았다. 제이슨의 아들이 되어 대공저에서 살게 된 후, 그의 삶은 지루함과 무의미함의 연속이었다.
프레데릭은 무심코 얼굴을 문질렀다.
‘내 얼굴에서, 따분함이 사라졌다고?’
덜컹. 의자가 거칠게 뒤로 밀렸다. 초조한 프레데릭의 걸음이 서재 안을 의미 없이 배회했다.
그의 지난 인생은 도피로 점철되어 있었다.
제이슨에게 부여받은 슈벤하임 대공으로서의 임무와 책무에서 도피했다. 황제가 되고자 하는 친구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군권을 쥐지도 않았을 것이다.
프레데릭은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다. 삶 자체에 의미를 갖지도 못했다. 제이슨의 아들로 살라는 아버지의 유언이라는 족쇄를 벗어던지지도 못했다.
짜증 나고, 지루하고, 따분하고, 허무하고, 공허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가치한 것이 있다면 바로 자신의 존재였다.
“아. 그런 건가.”
문득 프레데릭은 걸음을 멈추었다. 창밖은 어느새 어둑해져 있었다.
시작은 빈정거림이었다. 그다음으로는 역린을 자극당하여 감정이 북돋아졌다. 불쾌하고 언짢기만 할 뿐이었던 녀석은 갈수록 예외적인 면을 보여 주었다.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지기도 했다.
그것이 의외였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재미.
프레데릭은 자신이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는 걸 간신히 깨달았다. 거의 느껴 보지 못하여 깨닫는 게 늦었던 생소한 감정이다.
이제 로젤린이 첫 느낌처럼 고지식하고 멍청한 놈이 아니라는 걸 안다. 강단도 있고, 뒤끝도 있다. 재능도 있었다. 사람을 가르치는 건 처음이기에 분명히 어설플 프레데릭의 훈련도 완벽하게 쫓아 왔다.
기본은 다 가르쳤다. 사실 이제 더 이상의 특훈은 필요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붙잡고 있는 건 프레데릭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다.
제이슨의 아들로 정식 입적된 후, 한 번도 애착이라는 걸 가져 본 적이 없는 프레데릭이기에.
“……맞아, 즐거워.”
프레데릭은 자신에게 확인시키는 것처럼 천천히 속닥거렸다.
로젤린과 시시한 한담을 하고, 기마술을 가르치며 서로 검을 맞대고,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달리고, 가끔씩 싸늘한 질책을 받는 시간마저 즐겁다.
자신에게 로젤린이 갖는 가치는, 이만하면 아주 충분하지 않을까.
남자이니 여자이니 하는 성별의 문제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로젤린이라는 한 명의 사람은 이미 그의 안에 깊이 들어와 있었다.
고백하면 또 성희롱범이 될 것 같은데.”
하하. 프레데릭은 실없이 웃었다. 즐거웠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남색가라는 건 무척이나 큰 약점이다. 마리안 부인이 알게 되면 당연히 정치적으로 이용할 게 뻔했다.
프레데릭 자신이 매도되는 건 상관없지만 로젤린까지 사람들의 구설수에 올라서는 안 된다.
남자이며 기사이기도 한 로젤린이 얼마나 큰 모욕감을 느낄지 상상만으로도 오싹하다.
마음이 더 커지지 않은 지금이 단념하기에 제일 좋은 때였다.
* * *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
밤을 넣어 구운 빵에 버터를 바르다가 말고 멍하니 있던 프레데릭은 흠칫 놀랐다. 노 집사가 염려하는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오늘의 야식 메뉴.
한 손에는 따끈따끈한 흰 빵, 한 손에는 버터나이프, 머릿속에는 보드라운 입술.
“……젠장.”
“주인님?”
욕설을 뱉으며 이마를 누르자 집사는 더욱 걱정스레 보았다. 프레데릭은 뒷머리를 북북 문질렀다.
“아니야. 좀 생각나는 일이 있어서.”
주인의 일에 깊이 참견하지 않도록 훈련된 집사는 곧 말을 거두었다. 입술 감촉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전투적으로 빵을 씹었으나 헛된 시도였다. 로젤린의 입술은 막 구워 낸 빵보다 더 보드라웠으니까.
마음을 단념하기로 마음먹은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조금만 방심하면 로젤린이 생각난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결혼…… 결혼을 해야겠어.”
결혼을 하면 단념하기 쉬워질지도 모른다.
‘대공령의 귀족가에서 부인을 구하는 건 글러 먹었으니까 차라리 제도 귀족이나 다른 대영주에게 혼담을 넣어 볼까. 외부에도 친정의 기반이 있는 여성이라면 죽은 아버지의 마누라도 두려워하지 않겠지.’
슈벤하임 대공가는 대대로 대공령의 귀족가와 혼인했다. 그렇지 않아도 제국의 유일한 대공가다. 외부의 대귀족과 혼인하여 세력이 커지는 걸 황제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특수한 경우이고, 황제도 이해해 줄 것이다. 황제도 윌리엄이 대공이 되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
‘적당히 힘 있는 백작가가 좋을 것 같아. 실권보다 명예가 깊은 가문으로 라울에게 알아 봐야겠군.’
그 무렵이었다.
삐이이-
한 줄기의 새된 소리가 울렸다. 발트란 북부의 검은 황야에 마수가 출몰하였음을 알리는 알람 마법이다.
프레데릭도 집사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아무리 드물어도 며칠에 한 번씩 내성과 아이기스 나이트의 본부에 꼬박꼬박 울리는 알람이었으니까.
그러나 알람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삐- 삐이이- 삐이이-
이어서 짧게 한 번. 길게 두 번.
프레데릭의 안색이 급변했다.
최고 수위의 위급 알람이었다.
잠을 자기 전에 짬이 났다. 다행히 대장간이 아직 열려 있었다.
“여성용 가슴 보호대를 찾으신다고?”
아이기스 나이트의 무구를 만드는 대장장이는 보기 드문 여자 기사라는 말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여자 기사였소?”
“여자 기사입니다.”
“아이쿠, 이거 실례.”
로젤린이 여자가 맞느냐는 듯이 훑어보던 중년의 대장장이는 바로 사과했다. 어떤 성추행범보다 훨씬 낫다.
늦은 시간임에도 기사단원들의 무구뿐만이 아니라 마수들의 가죽과 뼈 등을 다듬는 작업도 다루는 대장간은 북적거렸다.
대장장이는 소음이 조금 덜한 구석으로 로젤린을 인도했다.
“원래 가슴 보호대는 여자 기사에게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무구요. 가엔라인 경 이후 5년 만의 여자 기사가 입단하다 보니 기사단장님이 그만 깜빡하신 모양이구먼.”
“제가 쓰던 방도 이전까지 창고로 쓰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가엔라인 경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흔하지 않은 선배 여자 기사다. 지금은 기사단에 이미 없는 그녀의 거취가 궁금해졌다.
“정기사가 되셔서 현재는 군부에 적을 두고 계시지. 원래 귀족이시거든. 성함은 바바라 체 가엔라인.”
로젤린처럼 특별한 경우도 아니고, 정기사로 서임 받을 수 있을 귀족이 일개 평기사로 시작했다는 게 의외였다.
어쨌든 선배 여자 기사는 현재도 정기사로서 제 위치에 있는 것 같다. 프레데릭이 여자 기사라고 무조건 차별하는 영주는 아니라고 보아도 되는 걸까.
“지금 쓰고 있는 보호대를 보여 주시겠소?”
로젤린은 따로 벗어서 가지고 온 가슴 보호대를 건넸다. 평범한 짐승의 가죽을 몇 겹으로 덧대고 무두질한 보호대였다. 대장장이가 잠시 보호대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우리 기사단에서는 가슴 보호대로 검은 도마뱀이라 불리는 마수의 가죽을 쓰지. 일반 짐승의 가죽보다 가볍고 얇지만, 훨씬 질기고 단단하니 마음에 들 거요. 얇은 비단으로 안감을 덧대니 살갗과 직접 닿아도 해는 없고.”
반가운 설명이었다. 부드럽게 무두질을 하여도 가죽은 가죽이었다. 맨살에 직접 닿으면 쓸려서 생채기가 난다. 한 여름에도 얇은 속옷을 보호대 안에 입어야 했다.
“사이즈는 이것과 똑같이 하면 되겠소?”
“네, 부탁드립니다.”
가슴 보호대의 사이즈를 재어 따로 적은 대장장이는 다시 돌려주었다.
신나게 고개를 끄덕일 때는 좋았는데 슬슬 이야기가 마무리가 되니 궁금해졌다. 일반 짐승보다 값비싼 마수의 가죽과 점액으로 만드는 무구는 가격이 얼마나 될까.
“저, 가격은 어떻습니까?”
대장장이에게 들은 장점이 꽤 마음에 들었으므로 비싸다고 사지 않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격이 너무 값비싸면 월급을 가불 받던가, 할부 지급을 해서라도 구매하고 싶었다.
대장장이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에 말 안 했던가? 기사단이 사용하는 무구는 전부 무료로 제공되니 돈 걱정은 하지 마시오.”
과연 복지 탄탄한 아이기스 나이트.
오늘 그에게 들은 이야기 중 제일 마음에 드는 소리였다.
삐이이- 삐- 삐이이- 삐이이-
날카로운 알람 소리에 로젤린만이 아니라 대장장이도 크게 놀랐다. 그녀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반사적으로 연무장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야?”
“모르겠다. 대위급 알람이 울린 건 일 년에 한 번 있기도 드문데…….”
아벨에게 속닥거리며 물었지만 그도 자세한 사정은 몰랐다. 연무장 안은 순식간에 기사들로 꽉 찼다. 이윽고 각 기사대의 대장들이 들어왔다. 제일 앞에 선 사람은 기사단장 알렉산더였다.
“썩은 재규어 떼다. 제3기사대, 제7기사대를 제외한 모든 기사대는 출병 준비를 해라.”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기사단 본부에는 최소 2개 기사대가 대기한다. 최소한의 대기 인원을 제외한 모든 기사대가 출병해야 할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불안감으로 조금씩 수런거리던 연무장은 상황의 심각성을 알게 되자 오히려 냉정해졌다.
살얼음 같은 침묵 속에 무장을 정비한 기사단은 제1기사대를 선두로 출병했다.
한밤중의 고요한 거리를 수많은 군마들이 내달리는 소리가 두두두 울렸다. 대위급 알람을 듣지 못한 사람들도 도로를 메우며 달려가는 기사단의 모습에 불안감을 삼켰다.
북문을 나와 검은 황야로 들어선 기사단은 북쪽으로 달리고, 달리고, 달렸다.
이윽고 코를 아리게 하는 썩은 악취와 더불어 평원을 새까맣게 덮은 마수 떼가 보였다. 마수가 아니었다. ‘마수 떼’였다. 기백 마리는 되어 보이는 마수 떼가 검은 황야의 야생 동물을 사냥하며 남하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였지만, 예상 이상의 무리였다. 로젤린은 신음을 삼켰다. 주변의 동료들도 경악한 기색이었다.
발트란에서는 썩은 재규어라 불리는 이 마수와는 로젤린도 콜로세움에서 겨룬 적이 있었다. 개개의 썩은 재규어는 흉포한 육식 동물 수준이지만 무리를 짓는 것이 기본적인 습성이다. 무리를 이룬 썩은 재규어는 그 어떠한 마수보다 흉맹했다.
덕분에 콜로세움에서도 열 마리 이상을 상대하여야 했는데, 단번에 수십 배로 불어난 무리가 검은 황야에 있었다.
퍼엉, 펑!
몇 군데에서 마법으로 만든 조명탄이 하늘로 쏘아졌다.
시야를 확보하자 곧장 공격이 시작되었다.
“투창!”
아이기스 나이트의 기본 전술은 재블린(투창용 창)으로 마수의 기세를 꺾은 후 개별 공격이다. 이번에도 재블린이 어두운 하늘을 뚫고 앞에 있는 썩은 재규어 들을 꿰뚫었다.
“크르릉! 컹컹!”
그러나 썩은 재규어 떼는 수백 마리였다. 무리의 기세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기사단과 부딪힌 썩은 재규어 떼와의 전투는 순식간에 난전이 되었다.
“하아앗!”
로젤린은 짤막한 함성을 지르며 썩은 재규어에게 검을 휘둘렀다. 칼로 깊이 벤 옆구리에서 내장이 쏟아졌다. 며칠 동안 프레데릭에게 특훈을 받은 보람이 있었다. 실전에 강한 로젤린이다. 훈련을 받을 때보다 몸은 훨씬 매끄럽게 움직였다.
앞에서 점프하며 달려드는 썩은 재규어의 몸통을 칼로 꿰고는 그대로 뒤로 내던졌다. 뒤로 날아가는 마수의 시체에 다른 마수가 부딪혀서 데굴데굴 굴러 갔다.
내던지던 힘을 이용하여 원심력으로 돌아온 손은 또 다른 썩은 재규어의 머리통을 후려갈겨 터트렸다. 잘 훈련받은 군마가 쓰러진 마수를 짓밟았다. 흑염룡이나 봉피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좋은 말이었다.
썩은 재규어의 살점과 피가 온통 얼굴에 튀었다. 사방에서 마수의 포효와 기사의 함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정신없이 마수를 사냥하다 입으로 들어온 마수의 살점을 뱉었다. 언뜻 고개를 돌렸을 때 아벨의 등 뒤를 덮치는 썩은 재규어의 모습이 보였다. 아벨은 앞에서 달려드는 세 마리의 썩은 재규어를 상대하느라 뒤를 살필 여력이 없는 듯했다.
로젤린은 서둘러 말을 몰았다. 하늘로 올렸다가 수직 강하한 바스타드 소드의 칼날이 마수의 등을 날카롭게 갈랐다. 또 한 번 피분수가 솟으며 로젤린의 머리칼과 얼굴을 온통 더럽혔다.
정면의 마수들을 처리하고 숨을 헐떡이며 돌아본 아벨이 짧게 인사를 건넸다.
“고맙다.”
“별 말씀을.”
씨익 웃다가 입술에 묻은 마수의 피가 입안으로 흘러들어 얼른 뱉어 냈다. 첫 출전 때는 아벨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제는 자신도 마수 사냥에 제법 익숙해진 듯하다.
그런 여유로운 생각도 기력이 남아 있을 때야 가능했다.
기사단은 차츰 지쳐갔다. 차근차근 마수 떼를 정리하고 있으나 수가 너무 많았다.
“우왓!”
이미 몸 이곳저곳에 상처를 입은 채 버티고 있던 로젤린의 말이 기어이 마수의 공격에 목줄이 물어 뜯겼다.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는 말과 함께 나동그라진 그녀는 바닥과 부딪치는 고통에 신음하기도 전에 팔을 올렸다.
까앙!
마수의 사나운 송곳니와 바스타드 소드의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부딪혔다. 피를 머금은 썩은 재규어의 역겨운 침이 로젤린의 얼굴로 뚝뚝 떨어졌다. 은퇴 경기 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새삼 더러웠다.
“이놈이든 저놈이든 입 냄새는 하여튼, 빌어먹을!”
저도 모르게 거친 욕설을 뱉으며 발로 썩은 재규어의 몸통을 걷어찼다. 그리고 서둘러 일어나 머리통을 칼날로 내리쳤다.
“케헹!”
마수는 머리통이 잘리는 게 아니라 박살이 나서 죽었다. 로젤린은 썩은 재규어의 살점과 기름이 엉겨 붙고 칼날이 무뎌져 거의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된 바스타드 소드를 버렸다.
근처의 바닥에 예비용으로 꽂아두었던 할버드(도끼 모양이 날이 달린 창)를 가져가다 보니 그녀의 군마는 피거품을 흘리면서도 아직 살아 있었다.
“……미안하다.”
당장 치료할 수도 없다. 오래 방치할수록 고통만이 심해질 뿐이다.
로젤린은 사과하며 말의 숨통을 끊었다. 입단한 후 주욱 그녀의 파트였던 말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도 없이 신선한 피 냄새를 맡은 마수들이 몰려왔다. 로젤린은 말을 엄폐물 삼아 할버드를 휘둘렀다.
“하아, 헉!”
주변에 마수의 시체는 하나둘씩 늘어 갔다. 늘어가는 만큼 팔다리도 무거워졌다.
잠시의 소강이 찾아와 로젤린은 할버드를 바닥에 꽂으며 몸을 지탱했다. 호흡을 할 때마다 폐가 찢어질 것처럼 따가웠다.
머리카락을 타고 줄줄 흘러 시야까지 방해하는 마수의 피를 닦으려고 팔을 올리려다 신음했다. 근육이 혹사당한 어깨가 무거웠다. 어깨에 매달려 있는 게 팔이 아니라 단순한 고깃덩어리인 것만 같다.
“아아악!”
가까이에서 비명 소리가 났다.
맥스가 마수들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무너지고 있었다. 생각할 틈도 없이 그대로 뛰쳐나가 마수에게 할버드를 꽂아 넣었다. 덤벼드는 마수는 팔꿈치로 후려치곤 바닥에 메다꽂았다.
남은 마수들을 처리하고 다리를 다친 맥스를 질질 끌어 죽은 군마 뒤까지 데려왔다. 맥스는 고통으로 신음하면서도 자신의 옷을 찢어 상처를 묶었다.
“야, 로젤린.”
죽은 군마의 배에 기대어 힘겨운 숨을 헐떡거리던 맥스가 불현듯 불렀다.
피에 젖은 손이 자꾸만 창대에서 미끄러지고 있었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가죽 끈으로 창대에 손을 묶다 맥스를 바라보았다.
“오늘 네가 날 네 번이나 구했어.”
“아, 그랬냐?”
“아, 그랬냐, 는 무슨.”
맥스가 실없이 웃으며 발끝으로 로젤린을 툭 쳤다.
“여자보다 덜 잘생긴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데 여자보다 덜 세다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네.”
자존심이 상한다는 말은 했지만 악의는 없는 목소리였다. 로젤린도 피식 웃었다.
“여자가 아냐, 동료지.”
“맞는 말이네. 근데 너 허리에 피 난다. 방금 싸우다가 다친 것 같아.”
“정말?”
다치는 줄도 모르고 싸우던 로젤린을 맥스가 불렀다.
“옷 찢고 남은 거 있으니까 묶어 줄게. 이것도 피로 더럽긴 하지만 지혈은 될 거야.”
로젤린은 순순히 맥스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상처를 지혈하는 맥스의 손도 힘이 거의 빠져 덜덜 떨리고 있었다. 사방을 장악하고 있는 건 여전히 치열한 전투 소리다.
전투를 잘 모르는 로젤린의 눈에도 확실히 보였다. 기사단은 열세였다.
“아까 대장의 말을 들으니까 대기조로 있던 제3, 제7기사대도 이미 출동을 한 모양이야. 싸우다가 얼핏 제7기사대 녀석의 얼굴도 봤어.”
“……큰일이군.”
마음 한구석에는 대기 중인 기사대가 출동하면 전투를 역전시킬 수 있으리란 희망이 있었다. 한데 이미 출동하여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대답하는 로젤린의 목소리에서 기운이 푹 꺾였다.
상처를 지혈하는 맥스는 일부러 로젤린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듯했다. 그녀도 그의 심정을 알았다. 절망을 발견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자신의 눈동자에서든, 상대의 눈동자에서든.
“아마도 북문에 경비대가 대기하고 있긴 할 거야. 우리가 막지 못하면 최후의 보루가 되는 거지.”
기사단이 막지 못하면. 즉, 전멸한다면.
전멸.
로젤린은 그 단어를 곱씹었다. 곱씹은 단어는 가슴 안으로 스며들어 그녀가 언제나 새기고 있는 단 하나의 염원이 되었다.
“병사들의 피해는 우리보다 더 클 거야. 비교도 안 되게 많이 죽겠지.”
맥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로젤린도 그의 말을 이해했다. 일반 병사들은 아이기스 나이트와는 다르게 마수를 대적하는 훈련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실전에서 아주 큰 차이였다.
비슷한 특징을 가진 동물의 이름을 붙여 별명으로 부르고 있으나, 마수는 본질적으로 이형의 짐승이다. 살아 있는 마수와 처음으로 대적하는 사람은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닌 곳’의 모습과 냄새와 기운을 풍기는 이형의 짐승 앞에서 공황 상태에 빠진다.
썩은 재규어만 하여도 눈알은 다섯 개이고, 입천장에는 상어 이빨처럼 날카롭고 자잘한 이빨들이 가득 돋아나 있다. 발바닥에도 무수히 많은 발톱이 톱니처럼 돋아났다. 주둥이에 물리거나 짓밟힌다면 그대로 살점과 뼈가 으스러진다.
전투 훈련을 받지 못한 병사들이 이런 마수를 쉽게 대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소수 정예인 기사단과는 다르게 병사는 많다. 숫자로 밀어붙이면 이길 수 있긴 할 것이다. 다만 그 승리의 아래에는 무수한 시체의 산이 있으리라.
로젤린은 하늘을 한 번 바라보았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포효와 함성과 비명 사이로 조명탄의 불빛도 약해지고 있었다. 마비된 후각은 더 이상의 피비린내도 맡지 못했다.
전멸. 그곳에 속하는 로젤린 자신의 죽음.
동료와 사람들을 지키지 못하는 죽음.
맥스가 찢어지고 더러운 천을 다 묶었다. 로젤린은 시야를 가리는 핏물을 닦으며 일어났다. 이곳은 그녀가 죽어도 되는 곳이 아니었다.
“우리가 이기면 돼. 이겨서, 지킬 수 있으면 되는 거야.”
“……응, 그렇지.”
맥없는 목소리였으나 맥스는 그녀의 다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팔다리가 붙어 있고, 움직일 수 있는 한, 한 마리의 마수라도 죽여야 한다.
로젤린이 주변의 마수를 쓸어 현재 이곳은 전장의 중심에서 약간 동떨어진 곳이 되었다. 그러나 잠깐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 슬슬 마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까보다는 적은 숫자다. 기사단의 피해 이상으로 마수 떼도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승산은 아직 있다. 로젤린은 주문처럼 되새기며 마수들에게 달려갔다. 제일 앞장선 두 마리의 썩은 재규어가 크게 점프했다.
그때.
허공에서 쇄도한 세 대의 화살이 점프한 마수를 꿰뚫었다.
이어, 거의 동시에 세 대의 화살이 날아왔다.
“캬앙!”
두 마리의 썩은 재규어는 한순간에 절명했다. 숨을 한 번 쉬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크게 놀란 로젤린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머리 위를 뛰어넘는 한 마리의 새까만 말이 있었다. 흑마는 로젤린을 뛰어넘어 착지하는 동시에 마수의 머리통을 짓밟아 터트렸다.
“……흑염룡?”
아연히 중얼거리던 로젤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지. 흑염룡이 아니라, 저건.
“전하아!!”
맥스가 그녀의 중얼거림을 대신하듯이 외쳤다.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로젤린! 맥스! 살아 있냐!”
롱 보우(긴 활)의 시위에 화살 세 대를 한꺼번에 매기며 프레데릭이 물었다. 화살들은 정확히 마수의 몸통에 명중했다. 그는 명중하는 것도 보지 않으며 시위를 당기자마자 또 화살들을 시위에 걸었다. 당연히 명중할 테니 확인할 필요도 없다는 태도였다.
맥스가 다시 외쳤다.
“살아 있습니다!”
“잘했다!”
순식간에 화살통을 모두 비운 프레데릭은 양손에 각각 글레이브(날이 큰 창)를 길게 쥐었다. 그리고 글레이브를 쥔 채 일어나 등장 발을 걸고 섰다. 높이 점프하던 썩은 재규어의 머리통에 창날이 쑤셔 박혔다.
“가자, 흑염룡.”
그의 말에 호응하기라도 하듯이 한 차례 길게 운 흑염룡이 맹렬하게 달려갔다. 정지한 말의 안장 위에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세심한 균형감각과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다. 프레데릭은 그것을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 잔등 위에서 해내고 있었다. 양손으로 창까지 휘두르면서.
프레데릭이 달리는 곳마다 마수들의 비명과 시체가 꼬리처럼 길게 이어졌다. 종횡무진하며 휘두르는 창끝마다 피 보라가 치솟았다.
압도적인 무위와 존재감이 전장의 흐름을 한순간에 자신에게 끌어모아 연주한다. 이 전장의 주인은 프레데릭이었고, 지배하는 자도 프레데릭이었다. 생생한 피 비린내를 휘광으로 두르고 주검을 융단으로 깔아가는 단독 행진이었다.
그것의 다른 이름은 살육임에도, 그 광경은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웠다.
‘……흑염룡이라는 이름 진짜 잘 지었어…….’
로젤린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멍하니 프레데릭의 모습만 쫓았다. 어두운 밤을 가르며 달려가는 흑마. 마치 어둠을 가르는 등불처럼 도드라지는 선연한 금발.
눈가에 아릿한 열이 올랐다.
“언제 봐도 미친 기마술이시라니까…….”
그녀의 옆에서 맥스도 중얼거렸다. 아까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뚜렷한 희망과 선명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오롯이 프레데릭이 만든 변화였다. 그리고 그 변화는 그의 존재감을 따라 전장 전체로 퍼졌다.
이어 프레데릭의 뒤로 삼십 명에 가까운 낯선 기사들이 말을 달리며 마수를 공격했다. 새로운 지원군이었다. 그들과 함께 전장을 크게 한 바퀴 휘돈 프레데릭이 여전히 말 위에 우뚝 선 채 외쳤다. 전장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로젤린도 예외는 아니었다.
“너희의 앞에 있는 게 누구냐!”
“대공 전하!!”
“영주님이십니다!”
“너희의 뒤에 있는 건 무엇이냐!”
“발트란!!”
“가족과 친구요!”
“마누라가 있습니다!”
기사들이 프레데릭의 외침에 저마다 외쳐 댔다. 그 외침은 악에 받친 것 같기도 했고, 가슴으로부터 뻥 터져 주체하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격한 흥분 같기도 했다.
공통점은 그 모든 것의 안에 지펴진 열기. 희망과 신뢰. 이 사람과 함께 한다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절대 명제.
프레데릭이 창을 크게 휘두르며 창끝을 마수 떼로 향했다.
“그렇다면 가자!”
“우와아아아아!!”
황야를 뒤흔드는 함성이 뒤따랐다. 기사들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돌진했다. 로젤린은 입술을 한껏 깨물었다. 내도록 저릿저릿하게 아프던 어깨의 통증마저 일순간 잊었다.
프레데릭의 제일 큰 지지기반이 기사와 군부라는 라울의 설명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당연히 지지하고, 신뢰하고, 따를 수밖에 없다.
이 남자와 단 한 번이라도 같은 전장에 선다면.
“빌어먹을……!”
로젤린은 빠듯한 흥분으로 차오른 외침을 함성처럼 뱉으며 마수의 몸통에 할버드를 내리꽂았다.
심장이 그 어떤 마수를 상대할 때보다 격하게 뛰었다.
쿵쿵쿵.
쿵.
* * *
전투는 동녘이 밝아 올 무렵에 겨우 끝났다.
기사단의 승리였다.
그들은 또 한 번 동료와 가족과 친구와 발트란을 지키는 것에 성공했다.
로젤린은 마수의 시체에 기대어 힘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뒷수습을 하는 웅성거림이 들려왔지만 신경을 쏟을 기력도 없었다. 아무렇게나 늘어진 팔다리의 근육이 저리다 못해 아팠지만 마사지를 할 생각도 못했다.
지금 눈을 감으면 딱 죽은 것처럼 잘 수 있을 것 같다.
부러진 창대를 마지막으로 꽂아 넣어 관통시킨 마수의 주둥이만 기운 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났다. 기사단원 중 한 명이라고 짐작하여 살아 있다는 표시로 손만 흔들었다.
“로젤린.”
그러나 들려오는 목소리는 몹시 익숙했다.
흠칫 놀라 일어나려고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가 휘청거렸다. 단단한 팔이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그대로 있어도 돼. 다친 곳은?”
“큰 부상은 아닙니다.”
지혈도 하지 못한 크고 작은 상처들이 있으나 사지가 멀쩡하니 큰 부상은 아니었다. 프레데릭이 다행이라는 듯이 격려를 담아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했다. 살아남는 게 최고지.”
“…….”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감사의 인사는 그에게 너무나 가볍다.
로젤린은 그의 등장과 그에게서 비롯된 전장, 그로 인하여 벅차오른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갈무리하여 말하면 될지 알지 못했다. 그저 그의 얼굴만을 올려다보았다.
“전하는 되게 잘생기셨다고 생각했는데…….”
준비도 하지 않은 말이 무심코 툭 튀어 나갔다. 프레데릭이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과 머리칼에도 피가 흠뻑 튀어 있었다. 아니, 전신이 피 범벅이었다.
가느다란 미소가 로젤린의 입술에 맺혔다.
“지금도 잘생기셨습니다.”
깜빡거리던 프레데릭의 눈동자도 곧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럼. 난 항상 잘생겼지.”
“지금이라면 전하의 패션 센스와 작명 센스도 탁월하시다고 쌍수를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래 탁월한 게 아닌가?”
뭐로 만들었는지 짐작도 안 가는 괴이한 털 망토와 흑염룡을 진심으로 멋지다고 생각하는 남자는 언제나 당당했다.
“걸을 수 있겠나?”
“문제없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프레데릭이 부축을 풀자마자 로젤린은 휘청 고꾸라졌다. 다시 그녀를 붙잡은 프레데릭이 혀를 찼다.
“오기 부리기는.”
그러고는 등을 내밀었다.
“업혀.”
로젤린은 잠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프레데릭이 한 번 더 재촉했다.
“업히라고. 부상자 이송하는 곳까지 옮겨 주마. 들것에 실려 가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괜…….”
“자기 몸 상태를 정확히 아는 것도 기사의 임무지.”
“…….”
납득이 갈 것 같기도 하고, 억지 같기도 한 말이다.
로젤린은 망설이다가 그의 등에 기댔다. 프레데릭이 가뿐히 그녀를 업고 일어났다. 넓은 등이었다.
말없이 타박타박 걸어가던 그가 슬며시 사과했다.
“미안해.”
“예? 미안하시다니요?”
“……오늘, 아니 어제 낮에 집무실에서, 그거…… 신에게 맹세코 진짜 진짜 진짜 실수였긴 한데 역시 네 기분은 나빴겠지. 미안. 앞으로는 조심하마.”
아, 이 사람은.
왠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로젤린은 입술 끝을 깨물었다. 주군의 등에 업혀 있다는 사실에 긴장되었던 팔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그녀는 그의 넓은 등에 온전히 자신의 몸을 실으며 조용히 답했다.
“이미 잊었습니다.”
프레데릭이 그제야 안심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단기필마로 마수들과 싸우는 것보다 호위기사에게 사과하고 그 대답을 듣는 게, 그에게는 더 긴장되는 일인 모양이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가볍게 흔들리는 그의 등에 편히 몸을 실은 채 로젤린은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안온한 곳에 있는 기분이었다.
등에 업힌 로젤린의 숨소리가 잔잔했다. 그 숨소리에 프레데릭은 안도했다.
그는 결코 신하나 부하 기사들을 편애하거나 차별하는 주군이 아니었다. 격의 없이 대하는 경우는 많아도 사사로운 감정을 깊이 개입하지는 않았다.
대공이라는 직위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그와는 다르게 대공령의 신하와 기사들은 욕망이든 충성이든 또렷한 목적을 갖고 있다. 기사에게 갖는 불호와는 별개로 프레데릭은 그러한 면을 충분히 존중했다.
그러니 전투가 끝난 후에 프레데릭이 브리핑을 할 장교들이 아니라, 한 명의 기사를 찾는 건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전투가 끝나고 마수가 전부 토벌되었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그의 눈은 오직 한 명의 기사를 쫓았다.
‘……아니야. 전투를 끝낸 후가 아니야.’
자신의 시선이 찾는 것을 깨달은 그는 쓰게 웃었다.
흑염룡을 타고 달릴 때부터, 부상을 입은 맥스를 지키듯이 앞에 서서 마수를 대적하는 로젤린을 보았을 때부터, 마수의 피와 체액으로 범벅이 된 로젤린의 부상을 직감했을 때부터, 생각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투를 지휘하고 마수를 사냥하면서도 로젤린의 부상을 걱정하는 자신이 있었다. 단 한 명의 기사만을 편애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프레데릭은 그런 자신이 몹시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만약 로젤린이 큰 부상을 입었다면 어젯밤의 자신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는 살아오며 그 어떤 부하의 부상에 크게 동요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로젤린을 안은 팔에 힘이 꽉 들어갔다. 프레데릭은 자신의 마음을 단념하지 못하리란 걸 비로소 알았다.
‘마리안 부인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지키겠어.’
프레데릭은 대공이 된 후 최초로 자신의 의지로 결심을 굳혔다. 평생 도피하며 살았던 그지만 로젤린만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