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부> - 1. 아이리나 막델라히 (2/16)

<1부>

1. 아이리나 막델라히

의사는 말했다.

- 다행히 왼팔의 힘줄은 무사하네요. 그래도 상처가 심하니 부목을 대고 계세요. 지난번처럼 멋대로 실밥 풀면 안 됩니다. 갈비뼈도 금이 갔으니까 심하게 움직이지 말고 조심하세요.

한마디로 나을 때까지 얌전히 있으란 얘기였다.

하나 그건 ‘얌전히 있을 상황’이 준비된 후였다. 지금 중요한 건 기선제압이다.

‘기선제압. 기선제압.’

로젤린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복도를 쿵쿵 걸어갔다. 2층 계단을 올라가자 바로 목적지인 사무실이 보였다.

왼손은 목에 건 부목으로 고정해서 움직일 수 없고, 오른손에는 손도끼를 들고 있었다. 양손이 자유롭지 않으니 굳게 닫힌 문을 열 방법은 하나였다.

로젤린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발로 문짝을 뻥 걷어찼다. 순간 금이 간 늑골이 짜르르 울리며 욱신거렸으나, 경첩이 떨어져 나오며 문짝이 반대쪽 벽에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아픔을 상쇄했다.

문짝이 ‘쾅’ 하고 부딪치자마자 로젤린의 오른손에 들려 있던 손도끼가 허공을 날아갔다.

터엉!

빙글빙글 날아간 손도끼는 맞은편 책상에 앉은 남자의 머리 바로 옆에 정확히 꽂혔다.

“으, 으어, 어…….”

너무 놀란 남자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손도끼가 조금만 빗나갔다면 도끼날이 꽂힌 곳은 벽이 아니라 그의 머리통이었을 것이다.

로젤린은 목을 양쪽으로 번갈아 뚜두둑 꺾었다. 이 콜로세움의 경영자이자, 한 시간 전의 경기에서 그녀를 속인 고용주이자, 방금 죽을 뻔한 사람이자, 부모가 한스라는 이름을 붙여 준 남자의 동공이 격하게 떨렸다. 그는 손에서 떨어진 서류가 팔랑팔랑 책상에 흩어지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성큼성큼 다가온 로젤린은 한스의 책상 가장자리에 발을 턱 올렸다.

“돈 내놔.”

“무, 무, 무슨 돈?”

“오늘 경기 배당. 다섯 배야.”

처음 생각했던 두 배보다 과감하게 부풀린 액수를 거만하게 말했다. 돈 얘기가 나오자 벌렁거리던 한스의 심장은 차츰 진정되었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서 줄줄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물이라도 한잔 마시고 싶었으나 마셨다가는 체할 것 같았다. 로젤린의 눈빛이 너무 무섭다.

“두, 두 배.”

“지랄하지 마. 난 오늘 죽을 뻔했다고. 다섯 배.”

“너니까 이길 수 있다고 믿었던 거야. 봐, 내가 널 안 속였다면 오늘 이 난리가 났겠어? 네 은퇴 경기에 걸맞은 멋진 경기가 되었잖아.”

한스는 상자에 가득 쌓인 러브레터를 가리켰다. 경기가 끝나면 으레 쏟아지는 러브레터였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더 많았다. 콜로세움 천장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환호성도 한스의 극적인 연출 때문이라는 걸 로젤린도 안다.

아는 건 아는 거고, 속아서 죽을 뻔한 건 죽을 뻔한 거다.

로젤린은 양보할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오늘이 거금을 획득할 마지막 기회였다.

“네가 야바위를 안 쳐도 난 언제나 멋진 경기를 펼쳐. 다섯 배.”

“……세 배.”

살벌한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한스가 소심하게 숫자를 올렸다.

두 사람은 10분 넘게 티격태격했다. 처음 다섯 배를 말하였던 로젤린은 ‘당장 그런 목돈이 어디서 나오냐, 내가 파산하는 꼴을 보고 싶냐, 나만큼 너한테 돈 벌어 준 사람이 어디 있냐, 내가 길거리에 나앉으면 우리 직원들은 어떻게 되냐.’ 등등의 구질구질한 애원에 3.5배로 타협했다.

원래 생각하였던 두 배보다 높았기 때문에 그럭저럭 만족했다.

다섯 배로 예상하고 있던 한스도 장사꾼의 기질로 팍팍 깎는 것에 성공하여 매우 만족했다.

한스는 귀까지 찢어지려는 웃음을 애써 감추며 수표책에 서명했다. 필라헨 제국에서 가장 신용도가 높은 은행의 수표책이었다.

두 장의 수표를 받은 로젤린은 그중의 액수가 적은 한 장을 도로 한스에게 내밀었다. 한스는 서랍에서 계약서 두 부를 꺼내 그녀에게 받은 돈과 오늘 날짜를 각각 적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해 봐.”

로젤린은 잠자코 계약서를 받았다. 첫 번째 장은 계약의 구체적인 내용이고, 두 번째 장은 서명이었다. 세 번째 장부터 그녀가 10년 동안 변제한 금액과 매해의 이자 등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 계약서는 지난 10년 동안 로젤린의 시간이기도 했다. 계약서를 검토하니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감개무량하다니, 웃기잖아.’

쓴웃음을 지은 로젤린은 계약서를 도로 넘겼다.

“사기는 안 친 모양이군.”

“야, 난 돈 거래는 언제나 신용 있거든?”

한스는 툴툴거리며 계약서에 그녀의 변제가 완료되었음을 썼다. 이것으로 계약이 끝났다.

집안의 빚을 갚지 못하여 자기 자신을 판 15살 소녀는 10년 만에 빚을 청산했다.

로젤린은 무심코 숨을 들이켰다. 10년 동안 언제나 어깨 위를 누르고 있던 짐 하나가 비로소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빚을 갚고도 당분간 살아갈 자금까지 충분히 마련되었으니 일석이조였다.

“고생했다, 로젤린.”

그녀가 빚을 갚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 중 하나인 한스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로젤린은 어깨만 한 번 으쓱하고는 그녀 몫의 계약서를 받아 챙겼다.

“앞으로는 뭐할 건데?”

“당연히 기사가 될 거야.”

“또 지랄하네.”

한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10년 동안 로젤린은 많이 변했다. 예쁘게 땋아 올렸던 머리카락도 사내처럼 짧게 자르고, 사춘기 소녀답게 늘씬하였던 몸엔 탄력적인 근육이 붙었다. 뽀얀 피부에는 온갖 상흔이 남았다. 그중 가장 큰 상처는 목과 가슴을 날카롭게 찢어 놓은 마수의 발톱이었다. 그때는 정말 죽을 뻔했다.

험하게 뒹굴고 죽을 뻔한 위기도 넘기면서 말투와 성격도 거칠어졌다. 귀족이었음을 증명하는 교양과 기품은 세월에 닳아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난 반드시 기사가 될 거야.’

그러나 그 한마디는 10년 동안 변하지 않은 유일한 것이다.

로젤린은 10년 전에도, 10년 동안에도 오직 기사가 되기를 소원했다.

몰락한 가문을 재건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목표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현실성이 없는 소원이라고 한스는 생각했다. 하지만 말로 하지는 않았다. 그 말을 했다가는 벽에 꽂힌 손도끼가 두 번째로 향하는 곳이 어디일지 장담할 수 없으니까.

한스는 책상에서 일어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은퇴도 축하하고 빚 청산도 축하하는 의미에서 한잔 꺾으러 가자.”

“네가 사는 거냐?”

“쪼잔한 놈. 알았어, 내가 쏜다.”

“그럼 같이 마셔 주지.”

한스는 킬킬거리며, 관대한 척 대꾸하는 로젤린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그보다 키가 큰 그녀는 바로 한스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퍽 쳤다.

“친한 척하지 마.”

“부상자라서 봐주는 거야.”

“내가 손 하나만 써도 너 이겨.”

“한 대 때리게 해 줄 때마다 돈 주면 어쩔 건데?”

“……얼마?”

귀가 솔깃해진 로젤린과 액수를 고민하기 시작한 한스의 목소리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검투사들 중에는 아편을 복용하는 사람이 많다. 상처의 극통을 잊기 위해 아편 잎을 씹었고, 경기 전의 두려움을 흥분으로 바꾸기 위해 아편을 피웠다.

아편에 중독된다는 건 늦든 이르든 반드시 육체와 정신이 망가진다는 뜻이다. 로젤린은 검투사의 세계에 발을 디뎠던 15살 때부터 아편 과용으로 인해 파멸한 검투사들을 숱하게 목격했다.

반드시 기사가 되고 말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던 로젤린은 아편을 멀리했다. 로젤린은 진통제로도 부상의 아픔이 사라지지 않으면 아편 대신 술을 마셨다. 술이라고는 식사 때 마시는 반주가 고작이었던 귀족 소녀가 주당이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관을 겸업하는 단골 술집은 오늘도 시끄러웠다.

로젤린의 은퇴 경기가 무사히 끝났음을 축하하며 술집 주인은 오리고기를 공짜 안주로 주었다. 공짜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10년 내내 빚에 시달렸던 로젤린은 공짜를 더더욱 좋아한다.

공짜로 나온 오리구이를 뜯으며 맥주를 마시던 로젤린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의 기분이 좋아진 걸 본 한스가 넌지시 찔렀다.

“진짜 은퇴할 거야?”

“가짜로 은퇴하는 사람도 있냐.”

“경력이 좀 아깝잖아. 검투사 중에 너만 한 실력과 인지도를 가진 사람이 어디 있냐? 넌 현존하는 최고의 검투사라고.”

한스는 그녀에게 거듭 술을 권하며 은근히 설득했다. 로젤린이 벌어 온 돈은 어마어마했다. 로젤린의 아버지가 갚을 엄두도 못 내고 자살한 빚을 10년 만에 갚을 만큼.

당연히 한스도 그녀 덕에 많은 돈을 벌었다.

오늘 살아도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검투사의 세계에 여자는 드물었다. 그나마도 여자 검투사의 대부분은 성적인 유흥거리로 소비되었다. 관객들은 여자 검투사들이 찢어진 옷 사이로 맨살과 젖가슴을 드러내며 나뒹구는 모습에 환호를 보냈다.

로젤린은 직접 남자 검투사와 대등하게 겨루는 몇 안 되는 여자 검투사 중 하나였다. 그리고 검투사 세계의 정상에 선 유일한 여자 검투사였다.

최초에 관객들은 로젤린의 존재를 비웃었다. 저 여자도 얼마 못 버티고 죽거나 창녀나 다름없는 유흥거리로 굴러 떨어지리라 판단했다. 동료 검투사들도, 로젤린과 처음에 계약한 한스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모두의 예상은 깨졌다.

로젤린은 훌륭히 생존하였으며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으로 콜로세움을 압도했다. 상처투성이의 육체로 피 웅덩이를 구를지언정 로젤린은 언제나 승리했다. 승리하여 관객의 환호 속에 귀환했다.

몸값은 경기가 끝날 때마다 치솟았다. 날이면 날마다 러브레터가 - 대부분이 여자였다 - 쏟아졌다. 경기 도중엔 지나친 흥분과 감격으로 인한 호흡곤란 때문에 실려 가는 관객이 - 역시 대부분이 여자였다 - 부지기수였다. 후원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중성적이고 준수한 외모도 인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녀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최고, 최강의 검투사였다.

감히 신의 이명을 별명으로 가진 검투사는 수백 년 동안 채 다섯 명도 되지 않을 것이다.

“너도 지금이 전성기잖아. 정상의 자리에서 떠나라는 말이 있지만, 전성기를 이대로 놓치기에는 많이 아쉽지 않냐? 이제 빚 갚을 일도 없으니 몇 년만 더 일하면 돈방석에 앉을 텐데.”

로젤린은 현재 육체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능력적으로도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서른 살까지 5년만 더 일해도 떼돈을 벌 것이다. 그녀가 벌어 올 돈도 아쉽고, 검투사로서 빛날 그녀의 미래도 아쉬웠다. 한스도 콜로세움에서는 그녀의 팬이었으니까.

단숨에 잔을 비운 로젤린은 맥주 조끼를 내려놓았다.

“그 몇 년 동안 내 팔다리가 잘리거나 죽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이제까지도 잘해 왔잖아.”

“미래는 누구도 장담 못해. 오늘도 근육이 완전히 나갈 뻔한 거 모르냐?”

로젤린은 보란 듯이 부목을 댄 왼팔을 가리켰다. 지은 죄가 있는 한스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내 생각은 차치하고, 객관적인 조건만 따져도 기사가 검투사보다 훨씬 낫다고. 기사로 재직하다가 팔다리 잘리거나 죽으면 연금이라도 꼬박꼬박 나오지, 병신이 된 검투사는 그냥 끝이라고, 끝.”

‘끝’을 강하게 발음하며 로젤린은 손날로 목 근처를 탁탁 쳤다.

“뒈져도 몇 푼 안 되는 보상금만 나오고 땡이잖아? 그리고 이 일은 오래 하지도 못하는 직업인데 서른 넘어가면 어쩌란 거야? 미래가 너무 불투명해.”

“검투사 은퇴하면 사설 경호원 쪽을 알아봐도 되잖아. 안 그래도 네가 은퇴한다는 소식 때문에 널 개인적으로 고용하고 싶다는 편지가 하루에도 수십 통이 날아와. 월급은 기사 같은 박봉보다 그편이 훨씬 더 셀걸?”

“객관적인 조건에 나의 희망을 더해야지. 그럼 기사가 압승이야.”

한스의 설득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하기야 대다수의 사람도 기사가 될 것이냐 검투사가 될 것이냐 물으면 전자를 택할 것이다. 이름만 올리면 되는 검투사와는 달리 기사가 쉽게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일단 접고.

슬슬 저녁 시간이 되니 술집 안의 손님들도 늘어났다. 비어 있던 로젤린의 뒤쪽 테이블에도 두 명의 손님이 앉아 있었다.

“이야, 아이리나 막델라히 아냐? 오늘 경기 아주 멋졌어!”

“자네 마지막 경기라고 해서 암표에 프리미엄이 얼마나 붙었는지 알아? 물론 그 돈을 지불해도 전혀 아깝지 않은 경기였지만.”

로젤린과 한스를 알아본 몇몇 손님이 축하하기도 하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로젤린은 인사하는 손님들과 건배하고 술을 원샷했다. 술이 센 그녀도 꽤 취기가 올랐다.

“왜 그렇게 기사가 되고 싶은 건데? 안정적인 직업은 기사 외에도 많잖아. 네 실력과 이름이라면 고용하지 못해서 안달이 날 텐데. 솔직히 네 실력이 로열 가드가 되기에는 많이 아까워.”

“…….”

공짜 술과 공짜 안주를 앞에 놓고 수다스럽던 로젤린이 입을 다물었다. 공기가 살짝 굳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아쉬움에 되는 대로 말하던 한스도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이상한 질문이었을까.

침묵은 짧았다.

로젤린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잘 조리된 오리의 날개를 뜯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난 기사로서 명예로운 자가 되길 원해.”

더없이 평이하고 무난한 대답이었다.

“하!”

그때, 날카로운 비웃음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요즘도 기사의 명예를 운운하는 병신이 있었군.”

목소리의 주인은 젊은 남자였다.

로젤린의 시선은 금방 날카로워졌다. 그녀의 등 뒤 테이블에는 서른 전후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취기가 오른 듯 얼굴이 붉었고, 한 명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시비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남 일에 참견하지 말고 술이나 드쇼.”

상당히 기분 나쁜 시비였다. 그러나 오늘은 부상도 입었고, 공짜 술과 공짜 안주까지 대접받고 있는 중이다. 맛있는 술을 마시다가 괜히 싸움이 붙어서 기분을 망치기는 싫었다.

로젤린은 남자를 무시하려고 했지만 남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뭐야, 사내새끼가 배알도 없이 먼저 꼬리를 마는 건가?”

“……저게 진짜.”

로젤린의 미간에 짜증이 서렸다.

“야, 야. 뜨내기 주정뱅이인 것 같으니 네가 참아.”

걱정스럽게 보던 한스가 로젤린을 만류했다.

한스의 추측에 로젤린도 동의했다.

남자의 억양과 말씨는 북방계였다. 뿐만 아니라 로젤린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남자라고 착각했다.

그녀의 키는 어지간한 남자의 평균 키를 상회하고, 짧은 머리칼에 외모도 중성적이다. 뺨에 흉터까지 있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긴가민가하던 사람들도 꽤 많았다. 그들은 로젤린의 얼굴만 보고는 으레 남자라고 판단하곤 했다.

하지만 직접 이야기를 나누면 상황이 달랐다. 그녀와 한 번이라도 대면한 사람은 조금 헷갈려 하다가도 이윽고 그녀가 여자라는 걸 알아챘다. 외모와 달리 목소리까지 남자처럼 낮고 굵지는 않은 데다, 몸매도 확실한 여자 체형이었다.

지금은 늑골의 부상 탓에 보호대를 착용하고 있다. 금이 간 뼈를 고정하기 위해 가슴까지 꽁꽁 싸매 누르고 있으니 초면이라면 남자라고 착각할 만도 했다.

이 술집은 콜로세움 근방에 있었다. 대부분의 손님이 콜로세움의 관객이나 콜로세움의 관계자다. 로젤린을 모르는 사람은 곧 이방인이라는 뜻과 다름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평민이 평생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황제보다 더 인기가 높은 유명인이었으니까.

‘옷이 고급스러운 걸 보니 북쪽에서 내려온 상인인가.’

남자와 그의 동행을 한 번 훑어서 판단한 로젤린은 시비를 무시하기로 다시 결심했다. 돈 많은 상인과 대거리를 하다가 괜한 트집이 잡히면 뒤처리가 귀찮다. 기사가 되기 전에 흠이 잡힐 일은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자리 옮겨서 2차나 가자.”

“그, 그래.”

“2차도 네가 쏘는 거지?”

“알았어, 인마.”

한스는 호들갑스럽게 반응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젤린도 남은 맥주를 비웠다.

“도망인가?”

그러나 술에 취한 주정뱅이는 그녀를 쉽게 보내 주지 않았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의 동행이 더욱 당황했다.

“그만하세요. 많이 취하셨습니다.”

“아니, 그렇지만 웃기잖아. 기사? 명예? 하핫!”

남자가 어깨까지 흔들며 웃었다.

“기사는 말이야, 명예이니 기사도이니 하는 번드레한 핑계들로 광대처럼 꾸민 개새끼일 뿐이야. 제 대가리로는 생각이라는 것도 할 줄 모르고 맹목적으로 짖기만 할 뿐인 개지. 그런 개가 되고 싶다고 하는데 웃음이 안 나오게 생겼나? 지금 도망치는 꼴도 싸움에 져서 꼬리 말고 도망치는 개가 아니냐고.”

“이 새끼가!”

무시하려던 로젤린도 결국 터졌다.

그녀가 남자의 멱살을 잡자 남자의 동행과 한스가 기겁했다.

“아이고, 한스! 자네가 좀 말려 봐!”

두 사람뿐만이 아니라 술집 주인도 놀라서 발을 동동 굴렀다. 왁자지껄하던 술집의 손님들이 수런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멱살 잡힌 남자만이 히죽거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원래 이런 인간이 아닌데 오늘 술이 좀 과했어요. 죄송합니다!”

시비가 오가는 내내 안절부절못하던 남자의 동행이 허리를 꾸벅꾸벅 숙이며 대신 사과했다.

“야, 주정뱅이랑 싸워 봤자 뭐해. 기분만 잡치지. 이렇게 사과까지 하시잖아.”

한스도 애써 웃으며 로젤린을 만류했다. 로젤린은 히죽거리는 남자의 면상을 한 번 노려보고는 내팽개치듯이 멱살을 풀었다.

“이빨은 돋아난 개…… 읍!”

“프레데릭 님! 좀 조용히 하세요!!”

그래도 여전히 시비를 걸려는 남자의 입을 동행이 꽉 틀어막았다. 한스가 얼른 로젤린의 등을 밀었다. 마지못해 로젤린은 한스에게 떠밀려서 밖으로 나왔다. 등 뒤에서 술집 주인이 다음에 또 오라고 인사하는 소리가 멀어졌다.

술집 밖은 어느새 어두움이 내리고 있었다. 밀폐된 술집에서 묻어온 소란스러움과 열기가 거리의 밤바람에 쓸려 사라졌다.

“아이리나 막델라히! 당신은 오늘도 최고야!!”

건너편에서 휘적휘적 걸어가던 술 취한 남자 하나가 로젤린을 알아보고 외쳤다. 한스가 그녀를 대신하여 남자에게 대답하는 와중에도 로젤린은 자신의 손만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 남자의 멱살을 잡았던 오른손이었다.

‘……꿈쩍도 안 했어.’

멱살만 잡으려던 게 아니었다. 멱살을 잡고 남자를 일으키려 했다. 그렇지만 남자의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녀의 부상이 심하고 그녀가 진심을 다하지 않았다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는 건 이상하다. 마치 단단한 철벽에 걸쳐진 옷을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단순한 상인이 아니었나? 샌님 같아 보이는 곱상한 낯짝이었는데 예상외의 실력자였을지도…….’

아까는 남자의 시비에 화가 나서 자세히 못 봤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고급스러운 옷감으로 감싸인 몸이 꽤 탄탄했던 것 같기도 하다.

“뭐 해? 얼른 2차 가자.”

“아, 그래.”

로젤린은 한스의 재촉에 고개를 들었다. 그래, 그 남자가 상인이든 실력자든 이제 와서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그녀 자신만의 일로도 머리가 꽉 찼다.

머리를 한 번 저어서 남자에 대한 생각을 떨쳐 냈다. 그럼에도 손바닥에 남은 묘한 존재감은 다시 술잔을 들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 * *

“프레데릭 님! 어제 무슨 짓을 저지를 뻔하셨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술을 처먹으려면 곱게 처먹어야죠! 멀쩡한 사람에게 시비는 왜 겁니까?!”

“……내가 죄인이다. 그러니까 목소리 좀 조용히…… 숙취로 뇌가 쥐어짜지고 있어…….”

침대에서 죽어 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정이 생길 법도 하건만 라울은 아랑곳하지 않고 프레데릭을 쪼았다.

“어린애도 아니신데 제가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사고 못 치시게 감시를 해야 합니까?!”

행사가 지겨워서 몰래 황궁을 빠져나온 건 나고, 쫓아와서 쓸데없이 일하는 건 넌데, 왜 나한테 화를 내느냔 반박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머리가 너무 아파서 말 한마디 하기가 힘들었다.

‘숙취가 너무 심하잖아. 어제 술을 여러 종류 말아서 마시긴 했어도 이만큼 숙취가 올 정도는 아니었는데…… 죽을 것 같다. 숙취로 죽으면 숙취사인가.’

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라울이 쌀쌀맞게 내쏘았다.

“싸구려 독주를 연거푸 드시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침대에 누워서 앓고 있는 프레데릭은 알지 못했다.

그가 어제 뒷자리에서 잘 먹고 잘 마시던 남자에게 시비를 걸어 싸울 뻔한 이후의 사건을. 또 사고를 칠까 봐 두려워진 라울이 몰래 술에 약을 탔다는 것을. 그것은 주량이 센 그를 빨리 쓰러트려서 여관 겸 술집의 2층 방으로 내던지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주군이 숙취 - 정확히는 약기운 - 로 괴로워하거나 말거나 원인 제공자는 잔소리를 계속했다.

“프레데릭 님께서 기사를 싫어하시는 이유는 저도 압니다. 싫어하시는 마음을 억지로 고쳐드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요. 하지만 제발 입조심을 해 주십시오. 어제 만난 그 사람이야 프레데릭 님을 모르니 다행이지만 실수로 슈벤하임이나 발트란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가는 큰일입니다.”

“그래, 알았다. 알았으니까…… 꿀물 좀…….”

라울은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푹푹 쉬면서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프레데릭은 끙끙 앓았다. 오랜만에 방문한 황궁의 행사는 역시나 지루했고, 도망쳐서 술을 마시면서도 지루함은 풀리지 않았고, 지루함에 짜증이 났다. 그래서 평소라면 지나쳤을 기사의 언급에 유치한 시비를 걸었다.

어쩌면 속 시원하게 싸우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그를 알지 못하는 이곳에서.

‘라울이 말려서 불완전연소되기는 했지만 말이야…….’

자신의 경솔한 발언을 라울이 걱정하는 이유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오다가다 술집에서 만난 사람이다. 두 번 만날 사이도 아닌데 자신이 기사를 싫어한다는 걸 알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상념을 접은 프레데릭은 꿀물만 기다리면서 다시 앓기 시작했다.

그는 라울이 어젯밤 술에 약을 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어젯밤의 그 남자와 석 달 후에 재회하게 되리란 사실도 알지 못했다.

* * *

부상이 낫는 데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한스와의 계약이 종료되어 콜로세움 내의 개인 숙소에서도 나왔다. 로젤린은 상처를 치료하며 기사단 입단 허가를 기다리는 시간을 유일하게 남은 가족 수잔나의 집에서 보냈다.

낮에는 짬짬이 용돈도 벌 겸 검투사들의 대련 상대가 되어 주었다. 한스는 틈만 나면 새 계약을 하자고 꼬드겼다. 밤에는 이별을 아쉬워하는 사람들과 송별연을 가졌다. 그 송별연이라는 것이 거의 날마다 이어지는 술자리의 좋은 핑계인 것 같기는 했지만.

오늘은 여자 검투사인 릴리의 숙소에 옹기종기 앉아 술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로젤린 언니! 절 버리고 가시면 안 돼요오오!”

오늘 모임의 멤버 중 가장 어린 마리가 갑자기 울면서 로젤린에게 안겼다. 갑자기 안겨 드는 바람에 가득 따랐던 맥주가 조금 넘쳤다.

“왜, 왜 울어?”

열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녀가 엉엉 우니 로젤린은 대단히 당황했다. 옆에 있던 릴리가 깔깔 웃었다.

“기억 안 나요? 마리의 첫 키스 상대가 언니라고요! 그런데 가 버리겠다고 하니 애가 얼마나 상심했겠어요.”

“……내가?!”

로젤린은 경악했다.

“난 마리랑, 아니 여자랑 키스한 적이 없어!”

다른 동료도 재미있는 건수를 잡았다는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언니는 당연히 기억이 안 나죠. 언니가 술 먹고 뻗었을 때 마리가 도둑키스를 하고 도망쳤거든요.”

“……봤어?”

“봤죠!”

“봤으면 좀 말려 주지.”

“재미있는 구경을 왜 말려요.”

술기운도 올랐으니 저마다 신나게 웃었다. 로젤린은 조금 복잡한 마음으로 여전히 엉엉 우는 마리를 내려다보았다. 술도 거의 못 마시는 애가 오늘은 어쩐 일로 벌컥벌컥 마셔서 저러다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했더니.

제도 레젠에는 한스가 경영하는 콜로세움을 포함하여 세 곳의 대형 콜로세움이 있다. 천대받거나 창녀 취급을 받는 여자 검투사의 몸으로 정상에 우뚝 선 로젤린이다. 그녀는 한스의 콜로세움뿐만이 아니라 제도 레젠에 현존하는 모든 여자 검투사들의 우상이었다.

동경하는 마음이 방향을 잘못 잡아 가끔 육탄 공세를 하는 여자도 있었다. 그 상대는 검투사일 때도 있었고, 관객일 때도 있었다.

한가하게 연애할 틈도 없었고, 여자를 성적인 대상으로 본 적도 없었다. 로젤린은 그럴 때마다 정중히 거절했다. 그렇지만 동생처럼 귀여워하던 애가 울면서 안기는 건 좀 곤란했다.

서럽게 울던 마리의 울음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잠이 든 모양이다. 로젤린은 겨우 안도했다. 그사이에 다른 멤버들은 아래층의 주방에서 새 안주를 요리해서 가져왔다.

마리를 방구석에 눕히고 오니 문득 릴리가 물었다.

“근데 언니, 당시르 후작 부인에게 로열 가드의 추천서를 받았다는 소문이 진짜예요?”

다들 궁금했는지 수다도 멈추고 빤히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별로 숨길 것도 없는 내용이다.

“응.”

로젤린은 간단히 대답했다.

검투사는 연극배우와 비슷한 위치이다.

콜로세움이라는 무대에 섰을 때는 갖은 환호와 인기를 누리지만, 검투사라는 직업 자체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천하다. 검투사라는 직종이 처음 생겼을 때에는 주로 노예로 구성되었다. 그 인식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쉽게 바뀌지 않았다.

검투사 출신인 로젤린은 귀족의 추천서가 없었다면 로열 가드에 입단 신청서를 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릴리가 아쉬운 기색으로 종알거렸다.

“로열 가드라니 아까워요. 언니 실력이라면 더 좋은 기사단에 갈 수 있을 텐데.”

“맞아, 맞아. 골든 나이트도 문제없잖아요!”

“골든 나이트의 제복이 참 멋진데. 로젤린 언니에게도 잘 어울릴 거 같지 않아요?”

릴리는 물론이고 이 자리의 누구도 그녀가 로열 가드에 입단하지 못할 거라는 가정은 하지 않았다. 옹기종기 모인 여자들의 수다는 멋진 기사단 제복으로 향하고 있었다. 로젤린은 씁쓸하게 웃으며 빈 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

“로열 가드라도 될 수 있는 게 어디야.”

“언니는 원래 귀족이었으니까 골든 나이트에도 정기사로 입단 가능한 거 아니에요?”

“정확히는 몰락 귀족이지, 뭐. 그리고 귀족이었다고 해 봤자 별거 아닌 가문이었어. 메이어 남작가라고 얘기해도 아무도 모를걸.”

어느새 혀가 많이 꼬이기 시작한 릴리가 박수를 짝짝 쳤다.

“로열 가드이든 골든 나이트이든 무슨 상관이에요! 언니가 입으면 어디 제복이든 다 멋질 거야! 그치이~~?”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해? 기사단 제복을 입은 로젤린 언니라니 너무 좋다!”

“언니이~ 나중에 기사단의 제복을 받으면 꼭 제복을 입고 와 주셔야 해요. 알았죠오?”

“너희는 내가 보고 싶은 거야, 제복을 보고 싶은 거야?”

“당연히 제복 입은 언니죠!”

“제복도 좋고 언니도 좋으니, 좋은 걸 두 개 합치면 네 배!”

“열 배야!”

서로 앞뒤도 맞지 않는 수다를 늘어놓으며 동료들은 즐겁게 웃었다. 로젤린도 씁쓸한 기색을 감추고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좋은 동료이고 좋은 친구였다.

오직 빚을 갚기 위하여 시작한 검투사를 그만두는 건 아쉽지 않다. 그렇지만 동료들과 헤어지게 되는 건 아쉬웠다.

“로젤린 언니! 마셔요, 마셔!”

“언니가 떡이 되기 전에는 안 놓아줄 거니까요.”

“그렇지! 오늘은 언니가 완쾌된 지 나흘째라는 걸 축하하는 자리잖아.”

붕대를 푼 날부터 완쾌 축하연이자 송별연이라는 명목으로 술자리를 갖는 것도 나흘째다.

“야, 여기서 술로 날 이길 수 있는 애가 어디 있어?”

“에이미! 도전하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로젤린과 에이미 앞에 커다란 술잔이 탕탕 놓였다. 술잔은 금세 투명한 술로 가득 찼다.

마시라는 환호 속에 로젤린과 에이미는 꿀꺽꿀꺽 원샷으로 들이켰다. 이 소란에 깬 마리도 슬금슬금 끼어들어서 또 술을 마시려다가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어제도, 오늘도 즐거운 모임이었다.

다음 날, 로젤린은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몇 분 전에 뜯은 한 통의 편지를 읽었다.

로열 가드의 입단 탈락을 알리는 통지서였다.

어느 회사에 입사원서를 냈다.

스펙은 부족하지만 동종 업계 이력과 경력은 충분하다. 이사 중 한 명에게 추천서도 받았다. 당연히 합격할 거라고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은 미리 합격을 축하하며 나중에 자랑하라고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그랬는데 탈락했다.

서류에서 바로 떨어졌다.

당사자는 몹시 쪽팔릴 것이다.

로젤린도 몹시 쪽팔렸다.

‘아씨…… 다들 로열 가드가 될 거라고 알고 있을 텐데…….’

머리를 후려갈기는 숙취와 로열 가드가 되지 못했다는 좌절감과 쪽팔림으로 로젤린은 머리를 싸맸다.

한스만이 그녀가 기사가 되지 못했다는 걸 좋아할 것이다.

‘설마 한스 자식이 몰래 수를 쓴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여러 가지로 쪽팔리고도 민망한 상황이 닥쳐 있지만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해서는 해결이 안 된다.

밤 내내 베개에 눌리고 뻗친 머리를 대충 손가락으로 쓸면서 방을 나갔다. 벌써 해가 중천에 뜬 대낮이었다.

“일어났니? 아까 엠마가 네 방에 편지를 한 통 가져다 놨는데 그건 봤고?”

거실 겸 응접실 겸 부엌 겸 식당으로 사용하는 큰 방 하나와 작은 방 두 개가 연결되어 있는 단출한 집이다. 큰 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던 수잔나가 인사했다.

10년 전 사업이 망하고 빚더미에 앉으면서 아버지와 큰오빠는 자살했다. 작은오빠는 만삭의 아내를 남겨 두고 야반도주한 후 감감무소식이었다. 어머니는 로젤린이 어렸을 때 병사했다.

작은오빠의 아내였던 수잔나와 그녀의 딸 엠마는 로젤린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예. 좋은 아침이에요, 수잔나 언니.”

얼굴을 보자마자 바로 ‘기사단에서 떨어졌어요.’라고 대답하기에는 뭣했다. 로젤린은 머쓱하게 중얼거리면서 의자에 앉았다.

“어제 늦게 들어온 것 같던데 속은 어때? 꿀물이라도 가져다줄까?”

“아니에요. 맨날 술 먹고 오는 것도 미안한데 어떻게 언니를 부려 먹어요.”

바느질감을 내려놓으려는 수잔나를 얼른 앉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가게는요? 비워도 돼요?”

“얘는 시간이 몇 신데. 벌써 점심 먹을 때도 한참 지났어. 직원이 가게를 보고 있는 중이야. 그런데 로젤린, 아까 편지 왔을 때 겉봉을 얼핏 봤는데 발신인이 로열 가드가 맞지? 입단 신청서 결과가 나온 거야?”

사정을 모르는 수잔나는 환하게 웃으며 직구를 던졌다. 그녀가 로열 가드가 될 것이라는 확신에 찬 미소다.

잠시 잊었던 쪽팔림이 밀려왔다. 로젤린은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빨개진 얼굴을 감추었다.

“오긴 왔는데…….”

“응, 네가 검투사를 그만두면서 놀 시간이 늘어났다고 엠마가 좋아했는데 이제 얼굴 보기 또 힘들겠네.”

“그게…… 떨어졌어요…….”

흐려진 목소리는 거의 쥐구멍을 찾아 기어 들어갔다. 수잔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열 가드에서 떨어져? 로열 가드는 추천서만 있으면 누구나 입단할 수 있는 곳, 어머, 어머.”

황당하여 생각나는 대로 말하던 수잔나가 뒤늦게 말실수를 깨달았다.

개나 소나 입단할 수 있는 로열 가드에서 떨어진 장본인은 더더욱 쪽팔려졌다. 그냥 추천서도 아니고 무려 제도 귀족인 당시르 후작 부인의 추천서였는데.

“네가 전직 검투사니까 기사로서 품위 손상이 된다고 탈락시킨 걸까?”

일리가 있는 추측이었다.

불합격 통지서를 받았을 때는 여러 가지 충격 때문에 이유까지는 추측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녀가 검투사였기 때문에 입단이 안 되는 거라면 충분히 납득 가능한 이유다.

“마침 로열 가드에 공석이 생겼다고 해서 후작 부인께 추천서를 부탁드렸거든요. 정말 그런 이유라면 후작 부인께도 죄송하게 됐어요.”

“어쩌겠니. 높으신 나리들의 생각을 우리 같은 사람이 어떻게 헤아리겠어.”

만삭의 자신을 버려두고 남편이 도주하였을 때부터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은 수잔나다. 곧 충격을 회복하고 바느질감을 다시 손에 들었다.

그렇지만 로젤린은 더 울적한 기분이 되었다.

‘듣기로는 제도의 기사단 중에서 로열 가드가 제일 입단이 쉽다던데…….’

그 입단이 쉽다는 로열 가드에서도 받아 주지 않았다. 다른 기사단의 문이 과연 그녀에게 열릴 수나 있을까.

생각할수록 막막하기만 했다. 한숨이 로젤린의 입술을 적셨다.

그녀는 꼭 ‘진짜 기사’가 되고 싶었다.

아니, 되어야 했다.

* * *

‘멀쩡한 사지와 추천서만 있으면 개나 소나 입단할 수 있는 기사단’의 단장 멕켈 백작은 오늘 따라 바쁜 하루를 보냈다.

우편배달부도 아니고 귀족저의 사용인이 전하러 온 편지만 스물세 통이었고, 직접 찾아온 사람도 다섯 명이었다. 이 모든 방문이 12시가 되기 전에 일어난 일이라는 게 더 놀라웠다. 저녁까지 편지가 몇 통이나 늘어나고 방문객이 얼마나 더 들이닥칠지 상상도 안 된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모든 편지와 방문객의 용건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아이리나 막델라히가 대체 누굽니까?”

평생 콜로세움과는 인연 없이 살았던 그의 부관마저 물을 정도였다. 멕켈은 그저 쓴웃음만 지었다. 그도 대충 이름만 알고 있던 검투사의 팬이 이렇게 많은지 실감하지 못했다.

여섯 번째 방문객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찾아왔다.

“바쁘신 분을 사사로운 용건으로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부관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온 아멘텐 백작은 몹시도 민망한 얼굴이었다.

아직 용건은 꺼내지 않았지만 멕켈은 찾아온 이유를 짐작했다. 오늘 찾아온 다섯 명의 귀족들은 이렇게 서두를 뗐다.

- 아내와 누이의 부탁을 받아서 여쭤보고 싶은 게…….

“아내와 딸의 부탁이라서 실례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리나 막델라히라는 검투사가 로열 가드가 된다는 게 사실입니까?”

새로운 패턴이었다.

멕켈은 ‘아내와 누이’에 이어서 ‘아내와 딸’의 패턴도 추가했다. 오늘 안에 ‘아내와 어머니’의 부탁이라는 패턴이 추가될지도 모르겠다.

“유감이지만 그 검투사는 본 기사단에 부합하지 않는 자로 판단되어 입단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빨리 귀부인들의 입소문을 타고 이 사실이 멀리멀리 퍼져 나가기만을 바랐다.

편지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아내와 누이와 딸의 등쌀에 못 이겨서 귀족들이 직접 찾아오고 있다. 명색이 귀족이니 부관에게 접대를 맡길 수도 없었다.

멕켈은 예상하지 못한 입단 지원자로 인하여 무척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런가요.”

아멘텐은 오묘한 표정이 되었다. 안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내에게 이 말을 어떻게 전하면 될지 걱정하는 듯하기도 하다.

귀부인들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아델리나 막델라히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건 당연했다. 다른 기사단도 아니고 그녀가 입단을 희망하는 곳이 바로 ‘로열 가드’가 아닌가.

로열 가드는 황제 직속 기사단 중 하나인 근위대다.

현재 로열 가드 평기사의 주된 책무 중 하나는 수행 기사 없이 황궁을 방문한 귀부인의 에스코트이다. 에스코트를 맡는 기사는 대개 젊고 잘생기고 키도 크며 몸매도 훌륭하다. 귀부인들의 불륜 상대 퍼센티지가 높은 직종 중 하나였다.

즉 합법적으로 ‘제복을 입은 아이리나 막델라히와 단둘이 데이트를 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아멘텐도 아내가 무엇 때문에 새벽부터 계속 쪼았는지 알고 있다. 덕분에 그녀가 로열 가드에 입단하지 못했다는 걸 알고 오묘한 표정이 된 것이다.

만일 그녀가 로열 가드가 되었다면.

남자도 아닌 여자랑 어울려 다니지 말라고 아내를 다그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한데 아멘텐 백작, 저도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멕켈이 헛기침을 하며 아멘텐의 주의를 끌어왔다.

“아이리나 막델라히의 경기를 직접 참관한 적이 있으십니까?”

“아내와 딸을 따라 몇 번 보았던 적은 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보셨고요?”

“가까이에서 본 적은 없습니다. 딸아이가 거리에서 파는 그녀의 초상화를 사서 방에다 붙여 놓긴 했지만요. 여자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꽤 잘생긴 얼굴이더군요.”

가벼운 우스갯소리를 하는 아멘텐은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는 눈치가 아니었다. 멕켈도 그와 같이 생각했다. 아이리나 막델라히의 정확한 신상을 알기 전까지는.

“로젤린 메이어입니다.”

“……네?”

“아이리나 막델라히의 본명 말입니다.”

“…….”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몇 분이 지나서야 입술을 뗀 아멘텐은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설마 10년 전의 그 메이어 남작가와 관련이 있는 사람입니까?”

“메이어 남작의 고명딸이더군요. 저도 메이어라는 성만 보고 혹시나 하여 뒤를 캔 후에야 알았습니다.”

“허어…….”

아멘텐은 무겁게 탄식하며 턱을 쓸었다.

“그래서 입단을 허락하지 않으신 거군요.”

“검투사 출신이라는 건 대외적인 핑곕니다. 메이어 남작가의 사람을 또 황궁에 들일 수는 없으니까요.”

“맞는 말씀입니다…….”

중얼중얼 멕켈에게 동의하며 그는 찻잔을 들었다. 몇 마디 대화하지 않았는데도 목이 바짝 말랐다.

“로젤린 메이어가 어디까지 알고 입단하려 한 걸까요?”

“본명이나 출신을 전혀 숨기지 않는 걸 보아하니 진상을 알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입단 지원서를 받은 후 그녀의 현재 생활이나 과거 행적을 자세히 알아보았는데 의심스러운 부분도 없었고요. 몰락한 귀족가의 유일한 후계자이니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겠다, 뭐 그런 이유가 아닐까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예정이십니까?”

“그냥 두려고 합니다. 제도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사람이니 굳이 들쑤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알아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씀을 드린 것뿐이니 자작께서도 크게 신경 쓰지는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더더욱 복잡한 표정이 된 아멘텐은 메이어 남작가라는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썼다. 어느새 완전히 빈 찻잔에 멕켈이 손수 차를 따랐다.

* * *

기사의 문턱에서 미끄러진 로젤린은 백수처럼 지냈다. 아니, 백수가 맞았다. 예전처럼 콜로세움을 드나들 기력도 나지 않아서 주로 집에서 뒹굴거나 수잔나의 가게를 도와주었다.

남편은 도망치고 집안도 몰락하여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했던 수잔나는 작은 빵가게를 열었다. 평민으로서 로젤린의 작은오빠와 연애결혼을 하였던 수잔나는 당연히 직접 빵을 구울 줄 알았다.

자그마한 규모로 시작하였던 빵가게는 10년이 지나면서 제법 크게 성장했다. 수잔나는 남작가의 빚 일부도 자신이 갚겠다고 했지만 로젤린이 그것만은 극구 말렸다. 작은오빠만 아니었어도 수잔나가 홀몸으로 아이를 키우며 이렇게 고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빚까지 넘길 수는 없었다.

“로젤린 고모! 손님 왔어. 저번에도 왔던 아주머니야!”

“누구신데?”

“카트린이라는 분이래!”

양 갈래로 머리를 쫑쫑 예쁘게 땋은 엠마가 주방 밖에서 외쳤다. 화덕의 불을 보고 있던 로젤린은 다른 직원에게 일을 넘기고 밖으로 나왔다.

“어머, 로젤린. 오랜만이야.”

“안녕하세요. 카트린 씨.”

“방구석 폐인처럼 지내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어쩜, 얼굴이 칙칙하게 그게 뭐니?”

카트린이 애석한 표정으로 혀를 쯧쯧 찼다. 변명할 말도 없어서 로젤린은 그녀를 가게 뒤쪽의 응접실로 안내했다. 가게 뒤편은 수잔나의 집으로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요즘 바쁘실 텐데 어쩐 일이세요?”

로젤린은 금방 차를 내고 가게에서 파는 마들렌을 간식으로 가져왔다.

오랜 후원자인 카트린은 상단을 경영하는 상인이었다. 남편이 죽은 후 대리인을 통하지 않고 여자의 몸으로 상단을 직접 경영하는 그녀에게는 요즘이 한창 바쁜 시기였다.

“네가 백수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구경하러 왔지. 어머나, 차는 꽤 잘 우리게 되었구나? 예전에는 차를 타도 걸레를 빤 물 같더니.”

“사실은 손님 대접용으로 좋은 차를 좀 사 왔어요. 차가 좋으니까 제가 타도 먹을 만은 하더라고요.”

“나 말고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

“가끔씩요.”

한스에게 부탁하여 수잔나의 집 주소는 비밀로 했다. 그렇지만 권력이 있는 귀족 여인들이나 카트린처럼 돈 많은 사람까지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그냥 아랫사람을 시켜서 조사하라고 명령 한 번만 하면 끝이다.

“스토커들 같으니.”

자신은 마치 로젤린의 집을 조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카트린이 혀를 찼다.

껄렁거리는 남자들과는 맞짱을 떠도 여자 앞에서는 조신해지는 로젤린이 그냥 웃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기억도 있고, 수잔나가 고생하는 것도 보면서 자랐기 때문일까. 로젤린은 여자, 특히 연상의 여자 앞에서는 한없이 여려졌다.

“로열 가드도 떨어졌다면서?”

“……네.”

“쯧, 그 여자가 하는 일이 그럼 그렇지.”

로젤린을 후원하며 은근히 라이벌 관계에 있던 당시르 후작 부인이다. 카트린이 혀를 한 번 더 세게 찼다.

“널 경호원으로 고용하고 싶지만 그건 거절할 거지?”

“죄송합니다.”

“로열 가드에서도 거절당했는데 어떻게 하려고?”

“고민 중인데 잘 모르겠어요.”

로젤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제도의 기사단에서 제일 허들이 낮은 로열 가드다. 목표로 한 곳도 로열 가드였다. 그곳에서 거부당하였으니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될지 영 생각이 나지 않았다.

“꼭 제도의 기사가 되어야 하는 거니?”

“로열 가드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아요. 다만 지방 귀족에게는 제가 전혀 연줄이 없어서요. 아예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후후, 그럼 내가 기사가 될 수 있는 좋은 길을 하나 알려 줄까?”

“뭔데요?”

“키스하면 알려 주지.”

“……그건 좀 곤란한데요…….”

카트린의 미소가 어쩐지 음흉하게 보여서 로젤린은 무심코 엉덩이를 뒤로 뺐다. 이름만 기사이고 실상은 호스트나 다름없는 길을 알려 주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 설마.

왠지 뒤통수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다행히 그녀의 권유는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북쪽으로 가는 건 어때? 기사가 되기 어렵지 않은 곳이 마침 떠올랐어.”

“북쪽이요?”

“응, 너에게 딱 맞을 것 같거든. 내 생각에는 너도 마음에 들 거야.”

“어디인데요?”

솔깃한 이야기였다. 로젤린은 뒤로 뺐던 엉덩이를 다시 바짝 당겨 앉았다. 카트린이 확신에 찬 미소로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사자심공(獅子心公, The Lionheart) 슈벤하임 대공의 영지.”

* * *

백수처럼 굴러다닐 때는 굼벵이처럼 기어가던 시간이 갑자기 빨라졌다. 목표가 생긴 로젤린은 부지런하게 준비를 갖췄다.

괜히 이것저것 건드리긴 했지만 실상 그녀가 해야 할 일은 크게 없었다. 슈벤하임 대공령까지는 북쪽으로 상행을 하는 카트린의 호위 자격으로 동행하기로 했다. 여행 준비는 대부분 카트린의 상단에서 맡았다. 로젤린은 그녀 한 몸만 챙길 수 있으면 되었다.

“고모, 북쪽으로 영영 가는 거야? 거기서도 사자 같은 괴물을 잡고 그래?”

아버지도 없이 편모슬하에서 자란 로젤린의 조카 엠마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에게 가족이 없다는 건 괴롭힐 이유가 되기 쉽다. 그럼에도 엠마가 동네에서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었던 건 모두 로젤린 덕분이었다.

콜로세움 유명인의 조카라는 사실은 엠마가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인이 되기에 충분했다.

출발하는 당일 아침부터 엠마는 로젤린을 졸졸졸 쫓아다녔다. 로젤린은 지금 헤어지면 오랫동안 못 보게 될지도 모르는 조카의 이마에 키스했다.

“사자 같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북쪽에도 괴물이 많다고 들었어.”

“씨이, 난 고모가 콜로세움에서 싸우는 걸 한 번도 못 봤는데.”

“애들이 보면 안 돼, 그런 건.”

뾰로통한 엠마의 볼을 로젤린이 양손으로 장난스럽게 꾹꾹 잡아 늘렸다.

“엠마, 고모를 방해하면 안 된다고 했잖니.”

방에서 나오던 수잔나가 엠마를 꾸중했다. 엠마는 엄마에게 입을 삐죽 내밀고는 로젤린의 뒤로 쪼르륵 숨어 버렸다.

“준비는 다 끝났니?”

“막상 준비하려고 하니 제가 준비할 건 없더라고요.”

로젤린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녀가 실질적으로 한 준비라고는 옷가지를 가방에 넣는 것뿐이었다. 여장은 단출하게 챙겼다. 하드 레더 아머를 입고 길이 잘 든 바스타드 소드를 벨트에 걸었다. 예비용 단검 몇 자루도 벨트와 부츠에 찔러 넣었다. 그 외에 갈아입을 옷을 몇 벌 챙기니 준비는 전부 끝났다.

빚을 갚고 남은 돈은 침대 밑에 몰래 숨겨 두었다. 그녀의 망토를 잡고 뒤에 숨은 엠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눈을 찡긋했다. 공범자인 엠마는 금방 고모의 눈짓을 알아듣고 헤헤 웃었다. 침대 밑에 숨긴 돈은 로젤린이 출발하고 엠마가 수잔나에게 주기로 했다. 로젤린이 직접 주면 수잔나는 받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거라도 가져가. 북쪽은 여기보다 많이 춥다고 들었어.”

수잔나가 솜을 넣어 직접 지은 두툼한 겨울옷 몇 벌을 가져왔다. 출발 일정을 맞추기 위해 몇 날 며칠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언니, 고마워요.”

코끝이 찡해졌다. 로젤린은 수잔나를 꽉 끌어안았다. 키가 훨씬 작은 수잔나가 팔을 높이 올려 그녀의 짧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넌 내 동생이잖니. 멀리 떠나는 너에게 뭘 해 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언제나 네가 염려되었어.”

“저는 가족이니 어쩔 수 없었다지만, 작은오빠 때문에 괜히 고생을 한 사람은 언니잖아요.”

“남자 보는 눈은 꽤 좋다고 자부했는데 말이야.”

수잔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메이어 남작가가 몰락하였을 당시에는 많이 힘들어하였지만 이제는 농담으로 과거를 회상할 수 있게 되었다.

포옹을 푼 수잔나는 지난 10년 동안 친자매만큼 다정하게 지낸 로젤린의 손을 보듬었다.

“빚을 모두 갚았으니 이젠 너도 과거의 굴레를 털고 너 자신만을 생각하면서 행복하게 지내길 바라. 나에겐 엠마가 있는데 넌 정을 준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걱정이 돼. 때로는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게 위안이 되기도 하거든.”

“제가 의지할 사람이 왜 없어요. 언니가 있는데.”

“얘는.”

로젤린이 손을 마주 잡아 꼭 쥐었다. 낯간지러운 소리에 타박을 놓느라 수잔나는 로젤린의 대답에 숨은 의미를 놓쳤다.

‘너 자신만을 생각하면서 행복하게 지내길 바란다.’는 그녀의 당부에 로젤린이 호응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도! 나도 있잖아!”

소외되기라도 할까 봐 엠마가 폴짝폴짝 뛰며 존재감을 주장했다.

“그렇지. 우리 엠마가 있어서 고모도 언제나 힘이 나.”

“에헤헤.”

로젤린의 대답에 만족한 엠마는 이내 엄마에게 폴짝 뛰어가 손을 잡았다.

“카트린 씨는 대공령에서의 일정이 끝나면 다시 레젠으로 올라온다고 했으니까 안부편지를 부탁드릴게요. 뭐, 제가 대공령에서도 기사가 되지 못하면 카트린 씨와 같이 돌아오게 되겠지만요.”

“벌써부터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되지.”

“붙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떨어졌으니 이젠 반대로 생각을 좀 해 보려고요.”

로열 가드의 불합격 통지서를 받았을 때가 떠오른 로젤린은 멋쩍어했다.

“고모는 붙어야 해! 붙을 거야! 벌써 로젤린 고모는 기사가 될 거라고 친구들한테 소문을 다 냈단 말이야.”

“……엠마까지 쪽팔릴 일은 없도록 노력할게.”

긴 이별을 아쉬워하며 얘기하다 보니 출발 시각이 아슬아슬했다. 로젤린은 옷가지를 넣은 두 개의 행낭을 들고 집을 나왔다. 수잔나와 엠마가 골목 어귀까지 따라 나오며 그녀를 배웅했다. 한참 걷다가 뒤를 돌아보아도 두 사람은 계속하여 로젤린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10년 전 가문이 몰락하였을 때에는 수잔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젠 그녀 혼자서 가야 할 길만이 남았다.

로젤린은 마지막으로 멀리 점이 된 두 사람에게 손을 높이 흔들어 인사하고 등을 돌렸다.

카트린의 상회 건물 앞에서 만난 일행은 곧 출발했다. 먼 북쪽의 슈벤하임 대공령까지 가는 상행이니만큼 대규모 일행이었다. 상회의 직원도 많고 호위를 위해 고용된 용병도 많다. 한 달이 넘는 긴 일정이니 상품 외에도 일행이 먹을 식량과 일용품을 보관하는 수레가 두 대나 되었다.

메이어 남작가는 몰락하기 전에도 제도 레젠에 본가가 있었다. 손바닥만 하다던 - 그나마 빚 때문에 팔아 버린 - 남작가의 영지에도 내려간 적이 없는 로젤린은 장기간의 여행이 처음이었다.

“레젠 밖으로 나온 적도 없다면서? 어때? 첫 여행의 소감은?”

카트린이 마차의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마차 근처에서 말을 타고 있던 로젤린은 말을 가까이 몰았다.

“엉덩이랑 허리가 좀 아픕니다. 말을 장시간 타는 것도 처음이거든요.”

“힘들면 마차로 들어올래?”

감사한 제의였으나 로젤린은 정중히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지금 카트린 씨의 호위로 고용되었으니 상단에 고용된 용병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카트린이 소리 내어 웃었다.

“고지식하긴. 그것도 네 매력이지만.”

“……뒷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게 제일 중요한 말인걸.”

장난스럽게 희롱하는 대화를 들었는지 마차를 호위하던 용병 하나가 힐끔 곁눈질했다. 로젤린은 조금 민망해졌다. 카트린의 희롱이 농담이라는 건 알지만 다른 사람까지 들으면 민망하다.

‘나나 카트린 씨 중 한 명이 남자였으면 성희롱이었을까.’

물론 남자에게 성희롱을 당했다면 당장 고간을 걷어차서 불알을 깨 버려 주었을 것이다.

제도 레젠을 벗어나는 장기간의 여행을 시작하며 로젤린은 많이 긴장했다. 한 달 넘게 걸리는 여행이니 어떤 사고가 터져도 놀랍지 않다. 이를테면 모험 소설에서 본 것 같은 산적이나 마수의 습격 따위 말이다.

결론만 말하자면 로젤린의 긴장은 사흘째에 풀렸다. 일정은 아주 평화로웠다.

“레젠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뻗은 도로는 제국군과 기사단이 주기적으로 순찰을 하거든. 순찰하면서 마수니 산적이니 하는 것들을 쓸어버리지 않았으면 나 같이 힘없고 연약한 상인이 어떻게 상행을 나가겠니?”

로젤린은 ‘힘없고 연약한’이라는 부분을 못 들은 척하며 되물었다.

“그럼 저희가 가다가 제국군과 마주칠 수도 있는 건가요?”

“계산으로는 내일이나 모레쯤?”

카트린의 계산은 맞았다.

모레 오전 무렵에 일행은 북부 도로를 순찰하는 제국군과 조우했다. 순찰 부대를 통솔하는 기사는 카트린과도 안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친근한 어조로 몇 마디 주고받은 기사는 상행의 안전을 기원하는 인사를 남기고 일행을 지나쳤다.

가까이에서 기사를 본 건 오랜만이다. 로젤린은 실용적인 제복과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을 부러운 눈으로 훔쳐보았다.

제국군과 조우한 게 일정 중에 가장 큰 소동이었다.

낮에는 말을 타고, 밤에는 번갈아 불침번을 서는 나날이 단조롭게 반복되었다. 로젤린은 냉기가 올라오는 흙바닥에 모포를 깔고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딱딱하고 맛이 없는 육포도 오래 씹고 있으면 그럭저럭 고기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불침번을 서며 불이 꺼지지 않게 뒤적거리고 장작을 넣어야 하는 타이밍도 익혔다.

15살 이전에는 금지옥엽 막내딸로 자랐고, 15살 이후에는 콜로세움에서 뒹굴었다.

모든 게 신선하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한 달 밖에 안 되니까 신선하다는 생각을 하는 거지. 우리처럼 평생 이러고 살다 보면 시궁창 냄새가 날지언정 레젠이 얼마나 행복한 곳인지 실감하게 될 거야.”

며칠 동안 낯을 익히고 친해진 용병 한 명이 껄껄 웃었다.

“자네도 실력은 뛰어나다고 알고 있는데 우리처럼 용병이나 하는 건 어때? 상행을 주로 호위하면 일도 덜 위험하고 돈은 쏠쏠하게 벌 수 있다고.”

“돈은 검투사가 더 많이 법니다.”

“경기 한 판에 얼마길래?”

넌지시 영입을 하려고 하는 용병 대장에게 로젤린은 그녀가 마지막 은퇴 경기에서 번 액수를 알려 주었다. 그녀의 실력을 탐내던 용병 대장은 그 이후 두 번 다시 영입 시도를 하지 않았다.

카트린은 일행을 재촉하지 않았다. 오후 무렵에 도시를 지나게 되면 꼬박꼬박 여관을 빌려서 푹 쉴 수 있게 했다. 상인으로서 그녀의 신조는 사람이 곧 재산이라는 것이다.

“허헛, 참. 가끔 여자가 상단을 이끄는 건 봤지만 이분처럼 호사스럽게 가는 분은 또 처음일세.”

상행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넘었을 무렵에 들른 도시의 여관에서 주인이 중얼거렸다. 상단에서 단 두 명의 여자인 카트린과 로젤린이 같은 방을 쓰는 걸 본 후였다.

“……아무래도 여기 주인이 이상한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요.”

로젤린을 호위 용병 겸 밤상대, 즉 남자로 착각한 게 분명했다. 곧 로젤린은 그 말을 한 걸 후회했다. 카트린은 보란 듯이 팔짱을 끼고 나란히 방으로 향했다. 연상의 여자에게 한없이 약한 로젤린은 팔짱을 뿌리치지도 못하고 어물쩍 끌려왔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뭘 하나하나 신경을 쓰고 그래? 뭐라고 입방아를 찧든지 무시하고 쉬기나 해. 이 도시가 대공령의 경계인데, 이후 대공의 본성에 이르기까지는 쉴 수 있는 큰 도시가 없거든.”

“벌써 대공의 본성까지 다 왔습니까?”

카트린은 망토를 벗으며 침대에 편하게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숙박비에 비하여 침대가 낡았다고 구시렁거렸다.

“다 온 건 아니고, 이 앞으로는 길이 험해서 큰 도시가 없어. 대공령이 원래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은 아니잖아.”

“그런가요?”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했다. 멍하니 끄덕거리는 로젤린에게 카트린이 쯧쯧 혀를 찼다.

“대공령에 대해서 잘 모르는구나? 기사가 되려고 가는 곳인데 공부는 했어야지.”

카트린의 가벼운 빈정거림에 로젤린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건 ‘기사가 된다’라는 결론이지 ‘훌륭한 주군을 섬긴다’라는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당대의 슈벤하임 대공에 대해서는 어디까지 알고 있어?”

“……사자심공이라는 별명이 있다는 것까지요.”

하나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카트린이 혀를 차는 소리가 커졌다. 로젤린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상당히 젊어. 너보다 나이도 몇 살 안 많을 거야.”

“진짜요? 되게 옛날부터 사자심공이라는 소문을 들어서 나이가 많은 줄 알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10대에 대공이 된 사람이니까.”

슈벤하임 대공령의 토지는 척박하고 거칠다. 황제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아 반쯤은 독립한 영지나 다름없기도 했다. 북부의 방위를 맡고 있는 슈벤하임 대공은 대대로 영지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 제국에서 유일하게 대공으로 인정받았음에도 존재감이 희박한 이유는 그것이다.

그러나 당대의 슈벤하임 대공은 달랐다. 급사한 선친의 뒤를 이어 대공이 된 그가 북부뿐만이 아니라 제국 전토에 용맹을 떨치게 된 계기가 있었다.

“9년 전, 타둠 왕국과의 전쟁에서 슈벤하임 대공이 직접 대공령의 군대를 이끌고 지원했다는 건 알지?”

“예, 황제…… 당시에는 황태자였던가요? 아무튼 그분을 도왔다고 들었습니다.”

9년 전에는 빚을 갚기에 급급하여 전쟁의 동향이라든가 슈벤하임 대공의 전공 등은 잘 몰랐다. 그 전쟁으로 슈벤하임 대공이 유명해졌다는 결과만을 알았다.

“나도 전쟁사나 전략은 잘 모르지만, 당시에 슈벤하임 대공의 전술이 대단히 창의적이고 굉장했던 모양이야. 전쟁사의 한 페이지에 획을 그을 정도라고 하던걸? 지금도 젊으니 9년 전에는 더 젊었다는 뜻이지.”

막연히 소문만으로 접했을 때보다 더 굉장한 사람이었다. 로젤린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대단한 분의 기사단에 로열 가드에서도 탈락한 제가 입단할 수 있을까요? 전 여자이기도 한고요.”

카트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하지 마. 정기사가 되는 건 어렵지만 대공 기사단의 평기사는 실력 있고 신원만 확실하면 여자도 상관없이 누구나 합격이야. 거추장스럽게 종기사부터 시작하지도 않고 마상 시합이니 하는 것도 필요 없어. 상시 모집 중이기도 하지. 워낙에 마수들이 날뛰는 지역이다 보니 범죄자라도 모르는 척하고 기사단에 받는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거든.”

한마디로 로열 가드처럼 개나 소나 다 들어갈 수 있는 기사단이라는 모양이다. 검투사 이력 때문에 ‘개나 소’가 된 로젤린은 어쨌든 안도했다. 모로 가도 기사가 될 수 있으니 되었다.

새까만 돌로 외벽을 쌓은 슈벤하임 대공의 본성인 발트란 앞에 로젤린이 서게 된 건 그로부터 닷새 후였다.

* * *

“……데릭 님! 프레데릭 님! 어디에 계십니까!”

목청껏 외치며 찾아다니는 라울의 모습은 저택의 사용인들에게 익숙한 광경이었다. 당사자인 프레데릭에게도 익숙한 광경이었다.

애타는 라울의 외침을 무시하며 프레데릭은 하품했다. 오늘의 도피처는 나무 위. 쉽게 들키지는 않을 것이다.

이 나무 위는 이틀 전 집무실에서 도망치고 숨었을 때 발각된 곳이기도 했다. 한 번 발각된 장소에 연속으로 숨으리라고는 쉽게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라울은 나무 근처에는 오지도 않았다.

“이틀 전에도 하녀가 비명만 안 질렀으면 들통 나지 않았을 텐데.”

나무 위에서 낮잠을 자다가 잠결에 나뭇가지 밑으로 내려온 다리를 목격한 하녀가 비명을 질렀었다. 시체가 나무에 걸려 있는 줄 알았다고 했었다. 졸지에 시체 취급도 받고 라울의 잔소리도 덤으로 듬뿍 먹었다.

이번에는 불상사가 없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수령이 천 년이라는 이 나무가 오늘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좋아.”

튼튼한 나뭇가지의 아래에 보자기를 매달았다. 이것으로 이제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다리가 보자기에 걸리면 덜 내려가겠지.”

오래된 수령만큼 굵고 튼튼한 이 거목은 이파리도 아주 무성하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간단한 작업을 끝낸 프레데릭은 한껏 기지개를 켰다. 고단한 하품이 나왔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일을 억지로 하는 건 몹시도 피로하다. 날마다 잡으러 오는 라울에게는 하지 못할 미안한 말이지만.

“레젠으로 간다면 상황이 좀 나을까. 뭐, 거기에서도 지루한 건 마찬가지지만.”

등을 받칠 푹신푹신한 쿠션도 준비되어 있다. 하품을 한 번 더 한 프레데릭은 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정말이지 고단하고, 지루한 나날들이다.

* * *

생각보다 기사단 입단을 희망하는 절차는 간단했다. 물어물어 찾아간 기사단 본부 입구에서 입단 신청자라는 사실을 밝히자 바로 기사단장에게 안내되었다. 추천서를 동봉한 신청서를 보내고 한 달이나 기다려야 했던 로열 가드와는 정반대였다.

너무 진척이 빨라서 오히려 불안해졌다.

슈벤하임 대공의 직속 기사단인 아이기스 나이트의 단장은 알렉산더 던이라는 중년의 사내였다.

“흠, 검투사 출신이라…… 이력이 독특하군.”

알렉산더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카트린의 추천서를 읽었다. 기꺼이 로젤린의 신원 보증인이 되어 준 카트린은 부탁하지 않았던 추천서까지 써 주었다. 아마 당시르 후작 부인과의 경쟁 심리 때문인 것 같았다.

검투사 출신이라고 물 먹은 전적이 있는 로젤린은 알렉산더가 그 이력을 언급하자 괜히 뜨끔했다.

“포날 상단의 주인이 보증하였으니 신원은 확실할 거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알렉산더가 로젤린에게 질문했다.

“먼저 질문을 하겠다.”

“넵.”

등이 딱딱하게 긴장되었다. 어떤 질문을 할까? 여자가 왜 굳이 검투사이니 기사이니 하는 길을 걷느냐고 물을까? 어째서 기사가 되려고 하는지 물을까?

카트린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나 로젤린은 나름대로 면접 준비를 했다. 미리 대비하는 게 불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보게. 자네는 대공령에 전혀 기반이 없는 사람인데 굳이 이곳까지 내려와서 입단하겠다는 이유가 뭔가? 레젠의 기사단에 입단하려다가 못한 게지?”

예상한 질문이었다. 로젤린은 당황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로열 가드였습니다.”

“검투사로서 사지 멀쩡하게 생존했다면 실력은 확실할 거고……. 얼굴만 보면 로열 가드에 합격하고도 남았을 얼굴인데, 역시 검투사라는 출신 자체가 문제였나.”

“정확한 이유는 듣지 못하였습니다만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한데 왜 굳이 여기에서도 검투사였음을 알리나? 대공령에는 콜로세움과 같은 투기장이 없다. 자네가 비밀로 숨겼으면 검투사였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텐데.”

“예?”

이 질문에 로젤린은 오히려 당황했다.

마치 ‘해가 왜 동쪽에서 떠야 하느냐.’라는 트집을 잡힌 느낌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질문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째서 전직 검투사였다는 이력을 숨겨야 합니까?”

“아이기스 나이트도 명색이 기사단이다. 검투사 출신이라 또 거절당하리란 생각이 당연히 들지 않나?”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습니다만, 말씀하신 것처럼 아이기스 나이트는 기사단이고 저는 기사가 되고자 합니다. 무릇 기사는 검과 신념과 목숨을 바친 주군께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알렉산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음유 시인의 노래나 고전 소설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녀석이구만. 이상론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말하는 건 가산점을 주겠네.”

“감사합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은 인상을 남긴 것 같았다. 로젤린은 약간 얼떨떨하게 인사했다.

추천서를 도로 접어 봉투에 넣은 알렉산더가 미간을 찌푸렸다.

“여자 평기사라니 귀찮은 일이 하나 더 생기겠구만. 5년만인가.”

알렉산더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고 있는 로젤린은 다시 심장이 덜컹했다. 역시 여자의 몸으로 기사가 되겠다고 하는 건 검투사 출신이라는 것 못지않은 큰 패널티일까.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로젤린은 남자들과 똑같이 대우하며 굴려도 불평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말할 준비를 했다. 하나 알렉산더는 바로 로젤린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마르크! 이 녀석, 또 졸고 있는 게냐!”

“아니에요! 갑옷을 닦고 있었어요!”

옆을 보며 소리치자 집무실과 연결된 곁방의 문이 열렸다. 주근깨 가득한 소년이 뾰로통한 얼굴로 튀어나왔다. 알렉산더의 무구를 손질하고 있었다니 그의 종기사인 모양이다.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평기사 숙소 관리인에게 가서 동쪽 알파관을 비우라고 전해라.”

“거긴 지금 창고로 쓰고 있는 곳이잖아요?”

“인석아, 자꾸 말대꾸할 거냐?”

알렉산더가 눈을 부라리자 소년은 “알겠어요! 삼촌은 맨날 화만 내셔!”라고 심통 맞게 대꾸하고는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알렉산더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젤린 메이어라고 했지? 자네는 날 따라오게. 포날 부인의 추천서를 의심하는 건 아니네만 실력 확인은 거쳐야지.”

다행이다. 로젤린으로서는 지울 수 없는 검투사 이력도, 성별이 여자라는 것도 알렉산더는 문제 삼지 않았다. 실력으로 합격 여부를 판단한다면 환영이었다. 로젤린은 자신의 실력에 충분한 자신감이 있었다.

앞장선 알렉산더는 로젤린이 따라오는지도 확인하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며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로젤린도 너무 무례한 거리가 되지 않도록 간격을 유지하며 따라갔다.

‘실력이라면 뭘 보는 거지? 마상 시합인가? 카트린 씨는 마상 시합이 없다고 했지만, 기사단 내부 사정이 바뀌었을 수도 있는 거고…….’

기사도의 꽃이라 불리는 마상 시합이다.

마상 시합은 단체 경기와 일대일의 경기로 나뉜다. 실력 확인이라고 하였으니 마상 시합을 하게 된다면 후자일 것이다.

마상 시합에서는 보통 기병용 창인 랜스를 들고 겨룬다. 연줄이 없는 사람이 경기에서 승리하여 기사가 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대규모로 개최되는 제도 레젠의 마상 시합은 황제 일가가 직접 참관하기도 한다.

로젤린도 가문이 몰락하기 전에 마상 시합을 많이 구경했다. 경기장 내의 열기와 승리자에게 쏟아지는 귀부인들의 환호는 콜로세움 못지않았다.

‘작은오빠가 마상 시합에서는 한 번도 진 적이 없었지.’

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로젤린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작은오빠의 생각을 지웠다.

마상 시합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지만 기본적인 규칙과 격식은 알고 있다. 걱정이 되는 건 말을 타고 싸운 경험이 없다는 것이다. 콜로세움에서는 언제나 흙바닥에 발을 딛고 있었다.

‘상행을 따라오면서 말을 타는 건 익숙해졌으니 감각을 익히면 할 수 있을 거야.’

로젤린은 자신의 실력을 신뢰했다. 그녀가 손에 든 무기는 지난 10년 동안 단 한 번도 배신하지 않았다.

몇 분을 더 걸었을 때, 연무장처럼 보이는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휴식 시간인지 기사들은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하고 있었다.

“주목!”

공터로 들어서자마자 알렉산더가 외쳤다. 규율은 엄격하지 않은 모양이다. 기사들은 일어나거나 기사단장인 알렉산더에게 예를 갖추지도 않았다. 얼굴만 돌렸다.

기사들의 시선이 알렉산더에게 모였다. 그리고 그의 뒤에 서 있는 로젤린까지 확인했다.

“단장님! 새 입단 희망자입니까?”

“그래, 반년만의 새로운 애송이다.”

알렉산더가 긍정하자 호들갑스러운 반응이 연무장 곳곳에서 나왔다.

“오우, 저 곱상한 얼굴을 보면 성의 하녀들이 난리가 나겠구만.”

“기사가 아니라 호스트를 하지 그랬냐.”

“맥스, 새로 온 자식이 너보다 잘생겼다.”

“닥쳐! 칼질을 얼굴로 하냐?”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좋은 말로 하면 자유분방하고, 나쁜 말로 하면 기사단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다.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잘 모르겠다. 로젤린은 그냥 묵묵히 서 있었다.

“부끄러워하냐. 얼굴값을 하네.”

“우리 신입은 먼저 옷을 벗고 춤을 춰야 해. 그래서 대물로 인정이 되어야 진정한 아이기스 나이트라고 할 수 있지.”

“넌 작은 놈이 왜 그렇게 뻔뻔해?”

“야! 발기하면 커지거든?”

기사라고 하기엔 저급한 발언을 공공연하게 하던 기사 두 명이 본격적으로 티격태격했다. 긴장한 로젤린은 농담을 진담으로 해석했다.

‘진짠가…… 그런 거 안 달려 있는데 어쩌지…… 다리 길이로 대신하자고 하면 안 되나.’

그녀가 이상한 고민에 빠지기 직전, 알렉산더가 잡다한 수다들을 끊었다.

“조용, 조용! 네놈들은 채신머리라는 걸 언제쯤 배울 게냐? 아무튼 입단 허가를 내리기 전에 실력을 알아봐야겠다.”

연무장 안을 둘러본 알렉산더가 기사 한 명을 지목했다.

“아벨! 오늘은 네가 상대해라.”

덩치가 큰 기사가 머리를 긁으며 일어났다. 로젤린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근육질 허리를 가진 거구의 기사였다.

야유와 박수가 이곳저곳에서 터졌다.

“오랜만의 예쁜이니까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마라!”

“어이, 애송이! 기사단 입단에서 미끄러지면 병사로 시작해야 하니까 자신 없으면 쪽팔리기 전에 항복하고 나가!”

“아벨은 무서운 형아라서 울면서 엄마 찾아도 안 봐준다고.”

여기 기사들은 칼이 아니라 입으로 싸워도 지지 않을 것 같다. 로젤린은 긴장한 표정 그대로 걸어갔다. 아벨은 벌써 연무장 중앙에서 양손검인 클레이모어를 들고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알렉산더가 물었다.

“잘 쓰는 무기는 있나? 필요하다면 무기고에 들려도 된다.”

“대부분의 무기는 적당히 사용할 수 있으니 이 검으로 충분합니다.”

검투사는 관객의 흥미를 위하여 다양한 무기를 사용한다. 로젤린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아벨이 들고 있는 클레이모어도 쓴 적이 있다. 제일 익숙한 건 어렸을 때부터 손에 들었던 바스타드 소드였다.

로젤린은 허리에 찬 바스타드 소드를 가리켰다. 굳이 새 무기를 가져올 필요가 없다는 뜻에 알렉산더도 더 이상 참견하지 않았다.

거추장스러운 망토를 벗어 바닥에 떨어트렸다. 여행하는 내내 입고 있던 하드 레더 아머가 기사들의 눈에도 보였다. 대장간에서 방금 맞춘 갑옷이 아니라 방어구로 장시간 사용한 흔적이 있는 갑옷이 드러나자 소란은 더 커졌다. 휘파람 소리도 들렸다.

“얼굴만 번드레한 형씨가 아닌가 본데? 아벨! 고생 좀 하겠다!”

“형씨! 아벨이 엄마 부르면서 울어도 봐주면 안 돼!”

아벨이 작게 투덜거렸다.

“주둥이로만 싸울 새끼들 같으니.”

그 투덜거림에 로젤린도 속으로 동의했다.

스릉.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스타드 소드가 뽑혔다. 로젤린은 아벨의 앞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섰다. 검을 쥐자 긴장이 사라졌다.

‘콜로세움과 똑같아. 이곳도 나의 전장이야.’

검을 가슴 앞에 올리고 발을 벌리며 기수식을 취했다. 아벨도 바닥을 짚고 있던 클레이모어를 양손으로 쥐었다.

가볍기 짝이 없는 분위기였지만 확실히 기사단은 기사단이었다. 두 사람이 발검하자 장난기로 넘실거리던 연무장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조였다.

“시작!”

알렉산더의 호명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채앵! 챙!

검과 검이 부딪치는 예리한 검명이 허공을 찢었다.

아벨은 우수한 검사였다. 육중해 보이는 거구임에도 행동은 날렵했다. 체중을 실어 오는 묵직한 검격은 로젤린도 맞받아치지 못했다. 아벨의 힘을 흘려보내며 옆으로 피했다.

“곱상한 형씨! 방어만 하지 말고 제대로 덤벼 보라고!”

“아벨 놈이 생긴 건 험악해도 겁쟁이니까 불알을 똑 떨어트려 버려!”

응원인지 야유인지 알 수 없는 외침이 들렸다. 로젤린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입술을 깨물었다.

기사단원들의 말은 정확하다. 로젤린은 현재 방어일변도의 검술을 구사 중이었다.

가문이 몰락하기 전에는 교양 삼아 검술을 익혔다. 그때에도 이미 검술의 기초는 닦았지만 본격적으로 검술을 연마한 건 검투사가 된 후였다. 로젤린의 검술은 콜로세움에서 완성되었다.

그게 문제였다.

콜로세움에서는 언제나 피보라가 몰아친다. 검투사 대 검투사의 시합이든, 검투사 대 마수의 시합이든, 일대일이든, 단체전이든 같았다. 어느 한 쪽이 죽거나 중상으로 실려 나가야 경기가 끝난다.

‘조절을 못하겠어.’

로젤린은 상해하거나 살해하는 검만을 알았다.

대련하거나 지키는 검은 알지 못한다.

그녀가 여태 해 왔던 것처럼 무기에 살기를 담아 휘두른다면 로젤린이든 아벨이든 큰 부상을 당하게 될 것이다.

후배 검투사의 수련을 봐줄 때처럼 적당히 상대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아벨의 실력은 대단히 훌륭했다.

‘하지만 질 수는 없고…….’

아이기스 나이트에도 입단할 수 없다면 정말 지방의 귀족을 찾아 전전해야 할지도 모른다.

로젤린은 난처한 심정으로 몇 차례 더 아벨과 검을 부딪쳤다. 챙! 바스타드 소드를 비스듬히 들어 힘을 실어 날아오는 아벨의 클레이모어를 방어했다.

두 사람의 칼이 X 형태로 맞물렸다. 공격하는 자와 방어하는 자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속삭임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젠장, 너 뭐하는 거냐.”

아벨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알아본 것이다. 로젤린이 제 실력을 발휘하지 않고 소극적인 방어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는 짜증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상대방이 성의 없이 칼을 휘두르고 있다는 걸 알면 누구라도 화가 날 것이다.

“그게…….”

반사적으로 입술을 움직였으나 대답할 말이 없었다. 변명할 여지도 없는 상황이다. 아벨도 로젤린의 변명을 굳이 기다려 주지 않았다.

묵직한 검격이 연이어 로젤린에게 떨어졌다. 칼날이 부딪힐 때마다 저릿저릿한 통증이 손목까지 올라왔다. 완력으로는 아벨을 당할 수 없다. 발이 차츰차츰 밀리며 조금씩 후퇴했다.

“어이! 재미없게 그게 뭐냐!”

“오랜만의 신입인데 좀 더 재롱을 피워 보라고!”

“아벨! 봐주면서 해라! 애 울겠다!”

그녀가 밀려남에 따라 외침소리도 조롱에 가까워졌다.

‘……이래서는 안 돼.’

결심을 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로젤린은 칼자루를 꾸욱 쥐며 반격의 틈을 노렸다. 아벨의 검격은 연이어 휘몰아쳤다. 상대는 덩치가 큰 데다 대검인 클레이모어를 쓰고 있으니 빗나갔을 때의 빈틈도 그만큼 크다. 그 틈을 찾으면서도 로젤린은 고민했다.

‘팔을 자르거나 죽여서는 안 돼. 힘 조절을 잘 해야겠지.’

고민을 하는 중에 생긴 허점을 먼저 파고든 사람은 아벨이었다. 잠시 다른 생각에 빠졌던 그녀에게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힐난하는 것 같기도 한 매서운 공격이었다. 묵직한 투기와 예리한 검기가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방어할까.

물러날까.

짧은 순간 로젤린은 맹렬하게 고민했다.

아벨과 그녀는 체격의 차이만큼 완력도 차이가 난다. 섣불리 받아내다간 손목이 부러질 우려도 있었다. 논리적으로는 공격을 흘려보내며 일단 몸을 피해야 한다.

‘……하지만.’

로젤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까지 결투에서 미흡한 모습을 보였다. 더 이상 물러나서는 안 되었다.

“하아앗!”

로젤린은 왼쪽에서 찔러 들어오는 클레이모어를 감각만으로 받아쳤다. 예상 이상의 묵직한 충격으로 손목이 저릿저릿했다. 그렇지만 버틸 만했다.

원심력을 이용하여 한 손으로만 휘두른 클레이모어가 허공에서 멈췄다. 바스타드 소드를 역수를 쥐어 횡으로 크게 그은 로젤린은 클레이모어의 안쪽으로 미끄러지듯이 파고들었다.

숨 한 번을 쉬기도 전에 바짝 가까워진 아벨의 명치를 세게 들이박았다.

“컥!”

허를 찌른 로젤린이 체중을 실어 어끼로 세게 박자 아벨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아벨의 몸이 몇 걸음 밀려났다. 간격이 생겼다. 이어 로젤린은 그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

휘청거리던 아벨이 클레이모어를 놓쳤다. 승기는 확실히 로젤린의 손으로 들어왔다. 이겼다. 로젤린은 콜로세움에서 경기할 때처럼 승리를 확신했다. 익숙한 피비린내가 풍기는 환영이 머릿속으로 펼쳐졌다.

승리.

콜로세움의 승리.

피보라가 휘몰아치는 승리.

“그만!!”

쩌렁쩌렁한 외침에 로젤린은 흠칫했다. 그녀의 바스타드 소드가 아벨의 목젖을 긋기 직전이었다.

“……!”

크게 놀라 얼른 칼을 떨어트렸다. 눈만 휘둥그렇게 뜨고 있던 아벨도 뒤늦게야 자신의 목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손바닥에 피가 묻었다.

만약 알렉산더가 외치는 타이밍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

모골이 송연해졌다. 검투사 시합도 아니고 대련 중에 사람을 죽일 뻔한 것이다.

알렉산더를 제외한 기사단원들은 두 사람의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알렉산더가 경기가 끝났음을 알리자 야유와 휘파람 소리가 쏟아졌다.

“형씨! 여리여리하게 생긴 주제에 꽤 하잖아?”

“덩치 값 좀 해라, 이 자식아!!”

기사단원들의 요란한 야유 사이로 알렉산더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는 승리의 기쁨을 누리지도 못하고 하얗게 굳은 로젤린과, 찜찜한 표정으로 손바닥에 묻은 피를 닦는 아벨을 번갈아 보았다.

“그만둔 게 언젠가?”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말이었지만 로젤린은 알아들었다.

“……석 달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피 냄새가 덜 빠졌구만.”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찬 알렉산더는 로젤린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신입의 실력도 확인하였으니 정식으로 아이기스 나이트의 입단을 허가한다! 앞으로 로젤린 메이어는 너희와 같은 평기사다!”

“오오!”

기사단원들이 박수를 쳤다.

“그거 본명 맞습니까? 계집애 이름이잖아요!”

박수 소리 사이로 누군가가 장난스럽게 외쳤다. 알렉산더는 표정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대꾸했다.

“당연하지. 여자니까.”

그 한마디는 연무장 안을 한순간에 얼려 버렸다.

“……거짓말이시죠!”

제일 놀란 건 직접 대련하였던 아벨이었다. 곰처럼 덩치도 큰 사내가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기겁하여 되물었다. 알렉산더는 친절하게 “5년만의 여자 평기사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충격과 흥분이 기사단원에게 몰아쳤다.

“여자래! 진짜 여자야?!”

“맥스! 여자가 너보다 더 잘생겼댄다!”

“캬! 드디어 우리 기사단에도 여자님이 오셨구나!”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호들갑스러운 그 광경에서 로젤린은 아벨을 죽일 뻔했다는 충격을 조금씩 삼켰다.

아벨이 왠지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넌 그런 실전적인 검술을 어디에서 배웠나? 용병? 여자인데도?”

알렉산더가 대답을 대신했다.

“우리 신입은 전직 검투사였다고 하는군.”

그 한마디는 로젤린이 여자라는 사실을 밝힌 것보다 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신입 기사를 맞아 환호하고 박수를 치던 소란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처음 들어올 때처럼 야유하는 소리도 사라졌다.

기사들은 서로 속닥거리며 수군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급변한 공기에 로젤린은 당황했다. 주변을 훑어보았지만 그녀가 잘못 보거나 느낀 게 아니었다. 기사들의 눈초리와 표정이 확실한 증명이었다.

그녀를 둘러싼 건 명백한 경멸이었다.

발트란에 자택이 없는 기사단원을 위해 기사단 본부의 구석에는 기숙사가 있었다. 로젤린의 방은 알파관 2층이었다. 귀찮은 일이 생겼다던 말의 의미를 로젤린은 기숙사 하녀에게서 들었다.

“여자 기사분이 입단한 건 5년만이에요. 그동안 알파관 기숙사는 계속 비워져 있다 보니 거의 창고로 쓰고 있었거든요. 갑자기 청소하고 사람이 살만하게 정리하느라 고생을…… 아! 기사님이 오셔서 싫다는 건 아니고요. 멋진 기사님이 새로 오시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하녀는 즐겁게 수다를 떨며 방까지 안내했다.

방으로 들어온 로젤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녀의 말처럼 급하게 정리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창틀의 먼지는 꼼꼼히 닦이지 않았고 침대의 시트는 비뚤게 씌어져 있었으며 옷장 서랍의 구석에는 녹슨 나이프까지 있었다.

귀족으로 태어났으나 집안이 몰락한 후 스스로 자신의 일을 했던 로젤린이다. 굳이 하녀를 다시 부를 것도 없이 어수선한 방 안을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가지고 온 단출한 짐을 풀었다. 옷장 안에 수잔나가 만들어 준 옷을 하나하나 개켜서 넣는 것으로 정리는 끝났다.

‘벌써 저녁이네.’

정리 정돈에 열중하다 보니 어느덧 석양이 깔리고 있었다. 기숙사가 있으니 식사는 아마 식당에서 하게 될 것이다. 식당에 가면 아주 많은 기사단원들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녀를 경멸하는 기사단원들을.

‘어쩐담.’

로젤린은 뒷목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원래 남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계집애가 교양으로 익힌 검술로 진지하게 기사를 희망하는 또래의 소년들을 모조리 이기고 다녔다. 자존심이 상한 소년들이 좋아할 리가 만무했다.

검투사가 된 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천대받는 검투사 중에서도 천대받는 이들이 여자 검투사다. 그 여자 검투사가 포르노 비슷한 쇼를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남자와 대등하게 겨룬다고 하니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시비를 걸면서 희롱하는 놈들도 많았다.

자신의 나이가 어리기도 하고 신입이기도 하니 처음은 참았다. 참을성은 일주일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로젤린은 자신에게 제일 시비를 걸었던 검투사 세 명과 난투극을 벌였다. 그녀는 이마가 찢어지고 멍이 들었지만, 상대 검투사들은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눈알이 터지는 중상을 입었다.

비슷한 싸움은 몇 번 더 있었다. 로젤린의 몸에도 상처는 늘었으나 그 후 대놓고 시비를 거는 놈들은 없어졌다.

앞에서 뭐라고 하지는 못하고 뒤에서 욕하는 치졸한 놈들이 생겼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검투사는 뜨내기 같은 존재이다. 언제 죽을지, 언제 그만둘지 모른다.

게다가 로젤린은 빚만 갚으면 검투사를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소속감이 없는 곳의 사람들이 욕을 해 봤자 타격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검투사로 있을 때와 상황이 다르잖아.’

그녀는 진심으로 기사를 희망하였고, 막 기사가 되었다. 검투사라는 단어가 갖는 무게와 기사라는 단어가 갖는 무게는 달랐다. 뿐만 아니다. 철저한 개인플레이인 검투사와는 달리 기사들은 하나의 단체다.

기사단원들은 앞으로도 함께 지내게 될 동료들이다. 로젤린은 동료들이 욕하는 걸 듣고 싶지도 않았고, 동료들을 무시하면서 지내고 싶지도 않았다.

검투사라는 출신이 문제가 되는 거라면 자신의 태도로 조금씩 바꾸어 나갈 수밖에 없는 걸까. 고민을 이어 가고 있는데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 기사님. 식당을 소개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몇 시간 전에 안내하였던 하녀였다. 로젤린은 문을 열었다. 고개를 빤히 들고 있다가 눈이 마주친 하녀가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등을 돌렸다.

“이, 이쪽입니다. 식당 건물은 기숙사 밖에 있어요.”

계단을 내려가며 하녀는 설명을 했다.

“식사 시간은 각각 1시간씩이고 6시, 12시, 18시입니다. 배급을 받고 부족하시면 더 드셔도 상관없고요. 저녁 식사 이후에 야참을 드시려면 조리하시면 돼요. 단 주방의 식재료는 사용할 수 없으니 직접 사 오셔야 하고요.”

“알겠습니다.”

“저어…… 제가 새벽에 장을 보러 갈 때가 많으니까 기사님이 부탁하시면 대신 사 올게요.”

“네, 필요하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선히 대답하자 하녀가 괜히 싱글벙글 웃으며 총총 걸어갔다.

식당 건물은 알파관 기숙사에서 가까웠다. 로젤린은 하녀가 알려 준 식당의 문을 한 팔로 밀어 열며 눈짓했다.

“안 들어가세요?”

하녀가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고 있다는 걸 눈치챈 하녀가 후다닥 고개를 저었다.

“저, 저는 이따가 기사님들이 식사를 끝내신 후에 먹어서요! 맛있게 드세요!”

왠지 얼굴이 붉어진 하녀는 허둥지둥 사라졌다. 로젤린은 하녀의 뒷모습에 꾸벅 인사를 했다. 여자들과 금방 친해지는 것처럼 남자들과 친해질 수 없어서 안타까운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시간이 늦어 식당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오늘의 식사는 고기스튜가 주메뉴였다. 열량이 풍부한 육질 위주의 메뉴는 검투사 시절에도 자주 먹던 요리였다. 로젤린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공통점을 찾으며 스푼을 떴다.

자의식 과잉인지, 이미 검투사 출신의 신입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등이 따끔따끔했다. 지금은 신경 써 봤자 소화만 안 될 것이다. 로젤린은 식사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스튜의 반을 비웠을 무렵, 비어 있던 맞은편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로젤린은 숙이고 있던 시선을 힐긋 올렸다. 육중한 체구의 남자가 식판을 맞은편에 내려놓으며 앉았다. 아벨이었다.

“식사 맛있게 해라.”

“…….”

기껏 인사를 했는데 무시당했다. 로젤린은 민망하지 않은 척 애쓰며 잠자코 다시 스푼을 들었다.

“…….”

“…….”

서로 마주 보고 앉아서 무시하고, 무시당하며 식사하는 어색한 시간이 흘러갔다.

아벨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식사하는 로젤린과는 달리 아벨은 빠른 속도로 스튜를 비웠다. 로젤린보다 먼저 식사를 끝낸 그는 말없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무시당하는 신세이지만 검투사 출신이라는 한계를 깨려면 자신이 먼저 친근하게 다가가야 할 것 같았다. 로젤린은 어설프게 웃으며 손을 올렸다.

“좋은 저녁 시간이 되길…….”

“로젤린 메이어.”

갑자기 이름이 불려서 깜짝 놀랐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편 그녀를 내려다보며 아벨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검투사는 콜로세움에서 마수와 싸울 때가 많지?”

“보통은.”

“여긴 팔자 좋은 콜로세움의 유흥이 아니라 생존이 문제거든.”

그 말 한마디만을 남긴 아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홀로 남은 로젤린은 뒤통수를 가격 당한 느낌이었다. 어째서 아벨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하였을까.

슈벤하임 대공령, 특히 발트란은 제국 내에서 마수가 제일 많이 출몰하는 지역이다. 마수가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처럼 유흥거리로 소비되는 제도 레젠과는 달랐다.

발트란에서는 마수의 출몰이 실질적인 위협이며 곧 생존에 직결된다. 검투사들이 한낱 유흥을 위해 마수들과 싸울 때 발트란에서는 기사들이 생존의 위협 속에 마수들과 싸운다.

발트란의 기사들이 검투사를 경멸하는 건 당연했다.

* * *

태초에 하나였던 세계는 각각 신계와 마계, 물질계로 분리되었다.

인간이 살고 있는 물질계에는 세계가 분리될 당시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통칭 ‘차원의 균열’이다. 균열이 있는 곳에는 신계와 마계의 기운이 흘러들어 기이한 식물과 동물이 자라난다.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하는 이 동식물들은 대륙에서 상당히 진귀하였으나 채취하거나 사냥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균열에서 마계의 마수도 같이 출몰하기 때문이다.

차원의 균열은 대륙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중에서 균열이 제일 많이 있는 지역은 필라헨 제국의 최북단인 슈벤하임 대공령과 북국의 얼음 왕국 사이에 펼쳐진 드넓은 검은 황야였다.

슈벤하임 대공가는 대대로 마수로부터 제국을 보호했다. 슈벤하임 대공령은 필라헨 제국의 최북단이고, 영주의 본성인 발트란은 대공령의 최북단이다. 번화한 중심지에 있어야 할 영주의 본성이 가장 위험한 지역에서 방어벽이 되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균열에서 출몰하는 마수로 인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지만 그나마 안전한 곳은 있다. 발트란의 사람들은 검은 황야의 기이한 식물과 동물을 채취하고 사냥하며 살아갔다.

아이기스 나이트는 마수를 사냥하기 위해 창설된 기사단이었다.

마수를 상대하는 훈련에는 기간도 자금도 많이 필요하다. 마수와 싸우려면 다수의 미숙한 병사보다는 소수의 정예 기사가 훨씬 적합했다. 게다가 징집 기간이 있는 병사와 달리 상시 복무하는 기사가 마수를 상대하는 경험을 더 많이 쌓을 수 있는 것도 당연했다.

로젤린은 아이기스 나이트의 제1기사대에 배속되었다.

항상 사람이 부족하여 범죄자라도 들키지만 않으면 받아준다는 소문까지 있는 아이기스 나이트였으나 검투사 출신에게 보내는 냉랭함은 여전했다.

‘어쩔 수 없지.’

난처하였지만 해결 방법이 없었다. 생존을 위하여 마수와 싸우는 기사들의 눈에 유흥을 위해 마수와 싸우는 검투사가 좋게 보일 리는 없었으니까.

그래도 과거에 그녀를 질투하였던 검투사들처럼 공공연하게 시비를 걸지 않는 건 다행이었다. 같은 전장에 나서는 전우들이니 불필요한 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의식은 있는 모양이다.

오늘도 로젤린은 고의적인 무시 속에 연무장으로 왔다. 일주일이 지나니 따끔거리는 시선에 조금 익숙해진 것 같기도 하다.

개인전을 하였던 로젤린은 기사단과 기사대라는 단체 속의 전투에 대하여 배울 점이 많았다. 단체전을 배우는 재미라도 없었다면 따끔거리는 시선이 더 괴로웠을 것이다.

“아야.”

훈련 시간이 되기 전에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다가 지나가던 기사와 부딪혔다. 키가 크고 잘생긴 기사였다. 무시당하고 있긴 했지만 주변의 이야기를 훔쳐 듣기로는 맥스라고 했던 것 같다.

“안녕.”

어색하게 인사했지만 맥스는 바닥에 침을 퉤 뱉고는 자리로 걸어갔다. 어색한 인사의 울림만이 허공에 남았다.

“……진짜 어렵네.”

로젤린은 인사하기 위해 올린 손을 민망하게 내렸다. 기사가 되는 것보다 동료들과 친해지는 게 더 어려웠다.

“좋은 아침.”

그나마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아벨이 옆에 섰다. 알렉산더는 신입 기사인 그녀가 익숙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그에게 명령했다. 그 명령이 아니었으면 아벨도 자신을 무시하였을까.

‘……우울한 생각은 하지 말자.’

로젤린은 생각을 꿀꺽 삼키며 인사했다.

“잘 잤냐?”

“별로.”

원래 말주변이 없는 아벨은 무성의한 대답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로젤린도 억지로 말을 걸지 않았다.

기사단의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하루였다.

오전 훈련이 끝나고, 점심을 먹고, 오후 훈련이 끝나고, 저녁을 먹고. 일주일 전부터 반복되는 하루가 이어졌을 것이다. 연무장에 느닷없는 방문자만 없었다면.

젖형제이자 보좌관이자 잔소리꾼인 라울을 따돌리고 도망을 치려다 문 앞에서 딱 걸린 프레데릭은 오늘도 집무실에서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라울이 뭐라고 하든 하품이나 하는 태도는 전혀 진지해 보이지 않았지만, 이런 모습도 두 사람에게는 익숙한 일과였다.

“그래도 발트란에서는 내성 밖으로 도망을 쳐 봤자 금방 소문이 나서 다행입니다. 프레데릭 님의 얼굴을 대부분 알고 있으니까 레젠에 가셨을 때처럼 몰래 술집에 처박히시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냥 박힌 것도 아니고, 처박혔다고 말한 건가?”

“착각이십니다.”

“요즘 많이 건방져졌군.”

프레데릭이 투덜거렸다.

“황궁에 있으니 갑갑해서 몰래 나가 술 한잔 하고 온 게 아직도 잔소리를 들을 만큼 큰 죈가?”

“술 취해서 싸움이 붙을 뻔하셨으니까 큰 죄죠.”

“싸워도 안 져.”

“안 지는 게 문제가 아니거든요. 만약에 명색이 대공이라는 작자가…….”

“잠깐만. 너 이번에는 작자라고 말했어. 분명히 들었어.”

“제 3의 인물로 가정하는 겁니다. 대공이라는 작자가 술 처먹고 지가 시비를 걸어서 싸우다가 눈에 멍이라도 들어 보세요. 왜 다쳤냐고 사람들이 묻겠죠? 그 작자는 내가 술이 떡이 돼서 아무에게나 시비를 털다가 좀 싸웠다고 부끄러움도 모르고 대답하겠죠? 낯가죽이 두꺼운 대공이라는 작자는 그러고도 뻔뻔하겠지만 정상인의 낯가죽을 가진 보좌관은 쪽팔려서 같이 못 다닙니다.”

“……본인을 앞에 두고 너무하는데. 나도 인간으로서의 수치는 알고 있다고.”

“제 3의 인물이라니까요.”

술집에서 시비를 건 일로 술이 깨고 몇 시간 내내 잔소리를 들어야 했던 프레데릭이다. 거의 석 달이 지났지만 그때 들은 잔소리가 생생하게 기억났다.

하지만 기사의 명예이니 하는 고리타분하고 썩은 소리를 하는 놈을 두고 빈정거리는 말 한마디를 안 할 수가 있겠는가. 술에 취해서 입이 가벼워진 탓도 있으나 프레데릭은 근본적으로 기사를 경멸했다.

프레데릭의 기사 혐오는 상당히 뿌리가 깊었다.

어쨌든 석 달 전의 사건으로 인한 라울의 잔소리는 또 부활했다. 프레데릭은 매우 상처 입은 표정으로 진열장을 열고 술병을 꺼냈다. 마음의 상처는 술로 달래야 제 맛이다.

“방금 제 3자인 대공의 이야기를 듣고도 술이 넘어가십니까?”

“안 취해. 안 취한다니까.”

“그 말씀은 레젠의 술집에서도 하셨거든요.”

프레데릭은 툴툴거리는 라울의 앞에도 과실주를 한 잔 따라 주었다. 도수도 낮고 달착지근한 과실주는 그의 취향이 아니지만 라울은 좋아한다. 과연, 좋아하는 술을 입에 댄 라울의 잔소리는 잦아들었다.

‘이런 게 바로 병 주고 약 준다는 게 아닐까. 땡땡이도 주고 술도 주고.’

맞지 않는 비유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프레데릭도 과실주를 마셨다. 달달한 향이 입안에 번졌다.

“안주도 가져오라고 할까요?”

“과실주 정도에 안주가 필요 있나?”

“아무리 달고 도수가 낮아도 술은 술이죠.”

“이건 주스 수준이야. 게다가 어린애 입맛이라고. 달아.”

“어린애 입맛이라서 차암 죄송합니다.”

기후가 쌀쌀한 슈벤하임 대공령의 사람들은 추위를 잊기 위해 술을 자주 마신다. 술 마시지 말라고 잔소리하는 라울도 애주가였다.

유치한 말다툼을 티격태격 이어 가면서 프레데릭은 레젠의 기억과 함께 떠오른 당시를 회상했다. 명색이 황제 직속 기사단인 로열 가드가 불륜 집단으로 취급받고 있는 현재다. 소설이나 음유시인의 이야기 속에나 나올 법한 기사의 명예를 말하던 그 멍청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로열 가드가 돼서 유부녀와 바람이 나고 있는 건 아닌지 몰라.’

술 취해서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얼굴도 꽤 잘생겼었던 것 같다. 로열 가드의 평기사는 얼굴 반반하고 추천서만 있으면 통과되는 곳이다. 잘생긴 놈이니 로열 가드만 되었다면 귀부인들의 추파가 사방에서 쏟아졌을 것이다.

그 지경이 되고도 기사의 명예를 가슴에 품고 있을 확률은 라울이 자신과 같이 땡땡이를 칠 확률보다 낮을 것이다.

‘다음에 레젠으로 가면 로열 가드에서 그놈이나 찾아볼까.’

“참, 프레데릭 님.”

라울의 짧은 부름이 프레데릭을 회상에서 깨웠다.

“말씀드려야 할 게 있었는데 프레데릭 님을 찾느라 깜빡했습니다. 새 호위기사를 발탁하셔야겠습니다. 체임트 경이 퇴임하겠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라울은 품에서 현재 프레데릭의 호위기사인 체임트 경의 편지를 꺼냈다. 그는 슈벤하임 대공가의 봉신 가문인 체임트 남작의 동생이었다. 형의 병 때문에 휴직계를 내고 영지로 내려간 게 지난달이다.

호위기사를 그만두겠다는 뜻을 밝힐 정도라면 체임트 남작의 병이 매우 위중한 모양이다. 체임트 남작은 자식이 없으니 사망한다면 그가 뒤를 잇게 된다. 호위기사로서의 임무를 병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편지를 다 읽은 프레데릭은 라울에게 다시 내밀었다.

“조만간에 체임트 남작의 장례식이 있겠군. 젊은 나이인데 애석한 일이야.”

말과는 다르게 프레데릭의 표정은 무심했다. 라울은 그 표정을 보고도 못 본 척했다.

“새 호위기사로 생각해 두신 분은 있으십니까?”

“글쎄다…… 근데 굳이 호위기사가 필요할까? 발트란에서 나보다 더 강한 놈은 없어.”

“암살자들이 떼 지어서 몰려들면 어쩌시려고요? 다구리에는 장사 없습니다. 아무리 프레데릭 님이라도 백 명을 상대로 싸우지는 못하잖아요.”

라울은 “죽지, 뭐.”라고 태평하다 못해 짜증 나는 대꾸를 하는 프레데릭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호위기사가 꼭 프레데릭 님보다 더 강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프레데릭 님을 지키다 유사시에 프레데릭 님을 대신해서 죽는 방패가 되는 것 또한 기사의 임무입니다.”

“그러니까 난 그런 기사의 임무가 싫다고.”

“싫으셔도 별수 없습니다. 영지를 가진 귀족이 한 명 이상의 호위기사를 두는 건 국법으로 정해진 내용이니까 억울하면 법을 고치세요.”

“대공이 아니라 황제로 태어나서 법을 뜯어고쳤어야 했는데.”

프레데릭은 자칫하다가는 삼족이 몰살당할 소리를 중얼거리며 남은 술을 주욱 들이켰다.

“체임트 경 외에는 호위기사로 생각해 본 사람이 진짜 없다.”

사실은 아예 새 호위기사를 뽑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건 생략했다. 생략한 말뜻을 충분히 알아들을 라울은 그냥 프레데릭을 한 번 노려보기만 했다.

“지금 적당한 분이 없으시긴 합니다. 대부인의 입김이 확실히 닿지 않으려면 가문의 위치가 현저히 낮거나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분을 찾는 건 어떨까요?”

“인지도가 바닥인 기사라면 실력도 바닥이겠지.”

“……그렇긴 합니다.”

라울이 입을 다물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고민하는 라울을 구경하면서 프레데릭은 홀짝홀짝 술을 비웠다. 너무 달아서 영 술 맛이 안 나긴 하지만 식사 전의 간식으로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프레데릭이 무릎을 탁 쳤다.

“인지도 바닥이고 실력 좋은 인재가 있었군.”

“네? 어느 분이십니까?”

“아이기스 나이트에서 발탁하자.”

“……기사단장이나 기사대장 중에서 고르시려는 건 아니겠죠?”

“일하느라 바쁜 사람을 뺄 수가 있나. 기사단원 중에서 고를 거다.”

“안 됩니다.”

라울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부정했다.

“호위기사는 정식으로 서임 받은 정기사여야 합니다. 아이기스 나이트의 기사단원들은 기사단장과 기사대장을 제외하면 전원 평기사고요.”

“호위기사가 반드시 정기사여야 한다는 게 법으로 있는 건 아니잖아.”

“하지만 사회의 관습이라는 게…….”

“정기사들로만 데리고 다니는 건 쉽게 말해서 폼이라고, 폼. 좀 더 정중한 말로는 체면치레.”

조금 생각해 보던 라울은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기사 중에서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프레데릭의 체면은 본인부터 신경 쓰지 않는다. 대공 주제에 술 취해서 저잣거리에서 주먹다짐을 하려는 사람이 체면을 챙기겠는가.

아이기스 나이트라면 실력도 뒷받침된다.

“그럼 제가 기사단장님과 상의하여 호위기사 한 분을 뽑겠습니다.”

“아니, 내가 직접 뽑지. 필요도 없는 호위기사를 억지로 달고 다녀야 하니 그나마 눈요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 우락부락하고 시커먼 사내 녀석들 사이에서 내 심미안에 적합한 녀석은 내 눈으로 직접 판단을 해야 할 것 같군.”

프레데릭은 단호한 어조로 못을 땅땅 박았다.

“제일 잘생긴 놈으로 뽑을 거다.”

프레데릭의 심미안.

라울은 파란색 망토와 빨간색 외투와 노란색 바지와 초록색 부츠를 신은 프레데릭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연무장은 시끌시끌했지만 로젤린의 주변은 아니었다. 마치 장막이라도 두른 것처럼 그녀의 근처만 조용했다. 로젤린은 완전히 투명 인간 취급을 당하는 중이었다.

‘해코지를 하는 것보다는 무시당하는 게 낫긴 하지만…….’

로젤린은 씁쓸한 미소를 삼키며 뒤통수를 문질렀다. 동료 기사들은 그녀를 무시하는 한편으로 눈총을 주고 있었다. 뒤통수가 따갑다.

그나마 알렉산더의 명령을 받은 아벨이 대련 상대를 해 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혼자 칼을 휘두르고 있었을 것이다.

아벨은 과묵한 성격이었으므로 두 사람이 대련하는 장소에서는 칼과 칼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몸을 쓰고 있으니 차라리 나았다. 몸을 쓰는 동안은 기사로서 잘 지내게 될지, 동료들과 융화될 수 있을지, 복잡한 고민을 잠시 잊어도 되니까.

‘현실도피라고 해도 할 말은 없군.’

기사라는 이름은 얻었지만 동료들로부터 소외되고 있는 이 상황을 정말 기사라고 할 수 있을지 심란하다. 단지 기사라는 허울뿐인 직함만 갖고 있는 이 상황에서 그녀가 기사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긴 할지 걱정되었다.

“모두 대열해라!”

느닷없이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기사들은 웅성거리면서도 무장을 정리하고 빠르게 대열했다. 로젤린도 아벨의 뒤를 따라 제1기사대의 위치에 섰다.

안쪽의 문이 쾅 열렸다. 양손으로 문을 밀어젖히면서 들어온 사람은 금발의 젊은 남자였다.

‘……옷이 왜 저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하며 실소했다. 갖가지 색깔로 염색한 옷을 입는다는 건 곧 부귀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저렇게 강렬한 색상들로만 배합한 옷은 난생처음이었다.

패션센스가 무척 독특했다. 같이 길을 걷는다면 조금 부끄러워질 만큼.

눈이 부실 만큼 화려한 총천연색 옷을 입은 남자가 등장하자 연무장은 조용해졌다. 남자의 뒤를 따라 알렉산더와 낯선 청년 한 명도 연단으로 올라왔다.

“흐음.”

남자가 도열한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조용해서 아벨에게 누구냐고 물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가장 뒤쪽에 서 있는 로젤린은 남자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남자의 정체를 고민하는 사이에 그가 과장된 한숨을 쉬었다.

“너희는 어째서 오랜만에 볼 때마다 근육만 찌우고 있냐, 이 근육 돼지들아.”

남자가 먼저 입을 떼자, 아교로 입을 붙인 것 같던 기사들이 금세 수다쟁이들로 돌아왔다.

“사내라면 뭐니 뭐니 해도 근육이 아닙니까! 셔츠가 터질 것만 같은 제 대흉근의 아름다움을 느껴 보십쇼!”

“근육도 적당해야지. 너무 많이 붙이면 몸이 둔해진다.”

“제 목표는 근육으로 쿼럴이나 칼을 튕겨 내는 겁니다!”

“어떤 미친놈이 그런 짓을 해?”

“크리드요!”

크리드는 베스트셀러 모험 소설의 주인공이다. 옆에 선 기사가 타박을 놓았다.

“야, 아무리 그래도 근육으로 튕겨 내는 게 현실성이 있냐.”

“크리드는 칼에 베여도 흡, 하고 숨을 들이켜면 근육이 조여서 지혈되거든? 근육이 최고거든?”

“뇌까지 근육으로 만들지 그러셔.”

“늙어서 몸 관리 안 하면 근육이 전부 살이 된다는 게 진짜야?”

저잣거리처럼 소란스러워진 기사들의 수다를 남자의 나른한 목소리가 갈랐다.

“굳이 근육으로 튕길 필요가 있나. 손에 든 칼로 하면 되지.”

대번에 기사 한 명이 반박했다.

“화살도 아니고 쿼럴을 계속 칼로 튕겨 내는 건 무리 아닙니까. 튕겨 내더라도 손목이 나가거나 칼날이 상할 걸요.”

멍하니 오가는 얘기를 듣고만 있던 로젤린도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인 화살보다 무겁고 가속도가 붙는 쿼럴을 시야로 정확히 포착하는 건 어렵다. 칼로 튕겨 내는 건 더 어렵다.

남자가 변함없이 나른하게 대꾸했다.

“난 되는데.”

“……진짜요?”

“내가 거짓말하는 걸 봤나?”

“…….”

근육 토론을 하던 기사들은 괴물을 보는 것 같은 시선이 되었다.

로젤린도 기사들을 따라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발언에 놀라서 ‘나도 튕겨 낼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해 버렸던 그녀는 나른하게 대화하던 남자가 고개를 돌리며 얼굴을 찌푸리는 걸 목격했다. 찌푸려지자마자 곧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로젤린은 똑똑히 보았다.

기사들과는 달리 남자에게 익숙하지 않은 그녀였기에 목격할 수 있었던 찰나의 순간이었다.

‘착각일까.’

그러나 착각으로 완전히 치부하기엔 남자의 표정이 이상했다. 염증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탄식하는 것 같기도 한 아주 묘한 표정이었다.

적어도 방금까지 친근감 있게 대화한 사람들의 앞에서 가질 표정은 아니었다.

그 표정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에 연무장 안을 한 번 더 둘러본 남자가 손짓했다. 제1기사대, 즉 지금은 로젤린과 아벨만 서 있는 곳이었다.

“쟤로 하마.”

여태 조용히 있던 알렉산더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둘 중 누구입니까?”

“아벨 말고 근육이 덜 붙은 호리호리한 녀석.”

그 말 한마디만 남긴 남자는 바로 등을 휙 돌렸다. 들어올 때 인사가 없었던 것처럼 나갈 때도 인사가 없다. 바람 같은 존재감이었다.

목소리를 낮춰 뒤에 남은 청년과 몇 마디 쑥덕거린 알렉산더는 해산을 명령했다.

“모두 원위치로 돌아가도 좋다. 그리고 로젤린 메이어, 네는 10분 후에 내 집무실로 오게.”

알렉산더까지 청년과 완전히 사라졌다.

독특한 패션 센스의 남자는 왜 자신을 지목한 걸까. 로젤린은 멀뚱히 서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보다 그 남자가 누구지?

“로젤린, 제 대공 전하를 뵌 적이 있나?”

웬일로 말수 없는 아벨이 먼저 말을 걸었다. 로젤린은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데 왜 널 부르시는 거지?”

“날 부르다니? 누가?”

“몰랐나? 아까 그분이 대공 전하이시다.”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던 로젤린의 입이 떡 벌어졌다.

“뭐? 보기만 해도 눈이 어지러워지는 색깔의 옷을 입고 있던 사람이?!”

“……그런 걸 항상 입으시는 건 아니지만…… 평소에는 깔끔하고 단정하신 차림새이신데…….”

어설프게 대공의 패션 센스를 변명하는 아벨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로젤린은 황당한 시선을 대공이 사라진 방향으로 향했다.

* * *

로젤린은 고민에 휩싸였다.

일면식도 없는 슈벤하임 대공이, 주군이 자신을 찾을 이유가 없다.

‘설마 검투사 출신이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셨을까.’

기사들이 검투사를 싫어하니, 주군인 대공도 당연히 싫어할 것이다.

‘잘리면 어쩌지.’

결국 제일 큰 걱정은 이것이다. 나의 기사단에 감히 검투사 출신 따위가 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으니 해고한다는 통보를 슈벤하임 대공에게 받는 것.

아이기스 나이트에서 잘리면 이젠 진짜 지방의 귀족 영지를 전전해야 한다. 실력은 어지간한 남자가 명함도 못 내밀 정도지만 로젤린은 여자다. 그나마 황제나 대영주의 직속 기사단이니 여자 기사라도 편견을 덜 갖고 발탁하는 것이다.

지방으로 갈수록 여자가 무슨 기사냐는 비웃음을 듣는다. 그만큼 기사가 되기도 어려웠다.

‘기사가 아니라 정부가 되라는 성희롱을 받을지도 모르고, 아예 기사가 될 기회를 주지 않을지도 모르고, 마상 시합으로 발탁한다면 그나마 공정하지만 난 경험이 없고…….’

여자라는 조건만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차별을 받는 건 검투사도 똑같았지만 적어도 그때는 검투사로서 시작할 기회는 있었다. 로젤린은 자기 자신을 검투사로 팔았다.

당시 콜로세움의 경영자였던 한스의 아버지는 ‘몰락귀족인 여자 검투사의 비참함’이라는 유흥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그녀를 샀다. 로젤린이 남자에게도 뒤지지 않는 검투사로서 자신의 입지를 당당히 세우게 된 건 전부 그녀의 실력 덕분이었다.

기사로서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의 실력을 당당히 드러낼 자신이 있지만, 그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 게 걱정이었다.

제도보다 더욱 보수적이고 틀에 박힌 지방 귀족들이 여자를 자신의 기사단에 허용해 줄까.

알렉산더의 집무실로 가는 내내 로젤린의 머리에는 먹구름이 끼었다.

‘전공을 세울 유예 기간만 준다면 마수 사냥을 더 열심히 할 테니 바로 자르지는 말라고 부탁해야겠다.’

노크하며 결심을 굳혔다.

“메이어입니다.”

“들어오게.”

알렉산더의 목소리는 기사단에 입단 신청서를 내러 왔을 때와 별 차이가 없었다. 꼴깍. 로젤린은 침을 한 번 삼키고 들어갔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하네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에는 뭣하지만 마수 사냥은 자신이 있습니다!”

“뭐? 자네의 실력은 나도 알고 있네.”

오히려 알렉산더는 놀란 표정이었다. 냉큼 말을 자르고 열심히 하겠다는 간곡한 부탁을 외쳤던 로젤린은 민망해졌다.

“죄, 죄송합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아무튼 자네를 부른 건 대공 전하의 호위기사로 발탁되었기 때문이야.”

이번에는 로젤린이 놀랄 차례였다.

차라리 자른다는 말이 더 신빙성 있게 느껴졌다. 실력은커녕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이에 갑자기 호위기사라니. 실력이 뛰어난 것과 귀족을 호위하는 건 다른 영역이다.

“영주의 호위기사는 정기사만이 가능한 게 아닙니까?”

“허어.”

알렉산더는 의외라는 생각을 감추었다. 검투사로 굴러먹던 천한 출신인 그녀가 귀족의 지식을 알고 있을 줄은.

“보편적으로 호위기사가 될 자격은 정기사에게 있으나 법문화된 규정은 아니라고 하더군. 따라서 평기사인 자네도 자격 미달은 아니라는 뜻이다.”

“저도 가능했군요.”

대답은 했지만 로젤린도 완전히 이해한 눈치는 아니었다. 왜 신입 기사인 나를 일면식도 없는 대공이 친히 발탁하였는지 묻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수많은 기사들을 보고 겪은 알렉산더의 판단으로 로젤린은 우수한 전사였다. 여자는 남자보다 체력과 근력이 부족하다는 신체적인 핸디캡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인하다.

멀끔한 외모로는 짐작도 되지 않을 만큼 피나는 노력을 하였으리라.

쇼맨십을 중요시하는 검투사로 오래 일하다 보니 기술에 군더더기가 묻어 있긴 하다. 그러나 실전과 부딪치다 보면 곧 깔끔해질 것이다. 대련할 때 본능적인 살의도 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프레데릭이 호위기사로 발탁할 기사를 추천해 달라고 요구하였으면 목록의 우선순위에 로젤린을 적었을 것이다.

문제는 실력만으로 뽑는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 눈요기라도 되게 제일 잘생긴 녀석으로 뽑을 예정이다.

- 용모단정한 실력자를 뽑겠다고 하십니다.

알렉산더는 삼십 분 전에 그의 집무실에서 있었던 대화를 회상했다. 로젤린이 잘생기긴 했으니 뽑힐 조건은 아주 충분했다.

차마 네가 잘생겨서 뽑혔다는 진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로젤린이 여자라서 뽑혔을 가능성도 있으니.’

같은 눈요기라면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좋지 않겠는가. 호위기사대를 전원 여자로 구성하여 하렘처럼 과시하고 다니는 한심한 귀족도 존재하긴 한다.

눈요기감으로 호위기사를 뽑았다는 진실을 본인에게 밝히는 건 더더욱 못할 짓이다.

“대공 전하의 뜻이시다.”

책임을 프레데릭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알렉산더는 회피했다.

“큼큼, 여하튼 아이기스 나이트에서 호위기사가 선별된 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 후에 조정할 가능성도 있으나 우선, 오전에는 기사단의 훈련을 하고 오후의 개인 훈련 시간에 전하의 호위를 맡게 될 게다.”

“명심하겠습니다.”

“내성은 가 본 적이 있으니 알겠지? 오후에 대공 전하의 보좌관인 라울 듀발을 찾아가도록. 자세한 내용은 그에게 설명을 들으면 된다.”

로젤린이 왜 날 뽑았냐는 질문을 대놓고 하기 전에 알렉산더는 서둘러 그녀를 내보냈다.

‘일단 잘리지는 않았는데…….’

집무실 밖으로 나온 로젤린은 안도했다. 안도하는 한편으로 다른 고민이 생겼다. 안 그래도 기마 훈련이 부족해서 걱정인데 개인 훈련 시간에 호위를 하게 생겼다.

‘그래도 주군을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는 일이니까 잘된 걸지도 몰라.’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로젤린은 우선 기숙사로 돌아갔다.

오후라는 건 참 애매한 시간이다. 정확한 약속 시각이 없으니 일찍 가든 늦게 가든 실례가 될 것 같았다. 로젤린은 점심을 먹고 몸을 씻었다. 잠깐 고민을 하다가 가슴을 눌러 고정하는 보호대를 두르고 옷을 입었다. 오늘 바로 호위기사로 근무하게 될 수도 있다. 준비는 해 두는 게 좋을 것이다.

내성에도 사람이 많았다. 하급 관리 한 명에게 물어 대공의 보좌관인 라울의 사무실로 가는 길을 들었다.

“메이어 기사님 되십니까?”

사무실 근처까지 오자 문 앞을 지키던 병사가 먼저 인사했다.

“그렇습니다만…….”

“보좌관님은 현재 출타 중이십니다. 기사님께서 오시면 안에 들어가서 기다려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젤린은 병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문을 열었다.

사무실은 평범했다. 무구가 장식되어 있는 알렉산더의 집무실과도 달라서 딱 문관의 방이라는 걸 알 수 있는 구성이었다. 서류는 많았지만 깔끔했다. 아내나 누이가 챙겨 준 모양인지 아기자기한 소품과 화분도 있었다.

심지어 책상에서 낮잠을 자는 사람도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야.’

책상에 푹 엎드린 머리가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붉은 기가 도는 금발은 금속성의 질감이 느껴졌다. 결도 아주 곱다.

보좌관이 출타 중이라는 언급을 미리 듣지 않았다면 그가 라울인 줄 알았을 것이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잘 자고 있으니 깨우기도 좀 그랬다. 로젤린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책상 근처의 적당한 의자에 앉았다.

혼자 멀거니 앉아서 기다리고 있자니 하품이 나왔다. 책이라도 보면 덜 지겹겠으나 남의 사무실이니 함부로 책을 꺼내지도 못했다. 결국 로젤린이 할 만한 시간 때우기라고는 남자를 관찰하는 것밖에 없었다.

책상에 얹은 양팔에 머리를 베고 있다. 새근새근 숨소리까지 들려왔다. 로젤린은 무료하게 남자를 관찰했다.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옆으로 드러난 이마와 콧잔등이 매끈했다. 사춘기를 잘 보냈는지 여드름이나 주근깨 흔적도 없었다.

‘머릿결 정말 좋아 보인다.’

로젤린은 무심코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관리할 여유도 없어서 기는 대로 자르기만한 머리카락이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감촉이 거칠거칠했다.

남자의 머릿결을 한 번 만져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을 무렵에, 드디어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끄응.”

팔을 주욱 뻗으면서 일어난 남자가 하품했다. 불편한 자세로 자느라 뻐근한지 목도 이리저리 꺾으면서 주물렀다. 비스듬히 역광이 비치고 있었으나 선이 굵은 이목구비는 또렷이 보였다.

로젤린의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옆얼굴을 보며 짐작한 게 맞았다. 사내다운 윤곽이 뚜렷한 남자는, 잘생겼다.

잘생긴 남자를 보니 그녀도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그녀는 남자를 안 사귀는 거지, 못 사귀거나 관심이 없는 게 아니었다.

“자는 사이에 왔었군.”

그가 뒤늦게 로젤린을 발견했다.

“환영한다. 새 호위기사.”

누군지 궁금했지만 초면에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니 일단 그녀보다 신분은 높을 것이다. 사실 내성에서 평기사인 그녀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관등성명부터 말하려는데 남자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그는 책상 서랍을 뒤적거렸다.

“맨날 여기에 숨겨 뒀었는데…… 누구 때문인지 갈수록 영악해진단 말이야…….”

혼잣말을 중얼중얼하던 남자가 반색했다.

“오, 찾았다.”

가장 아랫단 서랍에서 남자가 서류 밑에 숨겨진 바구니 하나를 꺼냈다. 바구니에는 과자와 납작한 휴대용 술병 2개가 들어 있었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술병의 마개를 땄다.

“너도 한 잔?”

“근무시간입니다.”

“신경 쓰지 마. 묵인해 주지.”

자기가 뭐라고 묵인해 준다는 건지.

어쩐지 한심한 기분이 들었지만 목이 마르기도 했다. 로젤린은 잠자코 새 술병을 건네받아 한 모금 마셨다. 과장을 보태어 술을 물처럼 마셔대는 발트란의 술 치고는 도수가 많이 낮았다.

“술맛은 어떠냐?”

“맛있습니다.”

“싱겁지? 술 잘 마시게 생겼구만.”

“도수는 낮군요.”

“진짜 술 잘 마시냐?”

“주량 대결에서 진 적은 별로 없습니다.”

돈 내기가 걸리면 기필코 백전백승이었다는 설명은 생략했다.

“오.”

남자가 휘파람을 휘익 불었다. 경망스러운 태도였다.

“나중에 나랑 승부나 한 번 하자.”

“술을 잘 드시는 편입니까?”

“발트란의 사내가 술을 못 마시면 불알을 잘라 내야지.”

실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대충 대답을 하면서도 로젤린의 신경은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야.’

남자는 잘생겼고, 잘생겼고, 잘생겼다. 잘생겼는데, 왠지 낯이 있었다. 묘한 기시감이 신경을 갉작갉작 긁었다. 그다지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디서 봤을까. 북쪽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랑은 많이 만난 적이 없는데…….’

“말투를 보니 발트란이나 슈벤하임 토박이는 아니겠고. 레젠에서 왔나?”

“예. 레젠이 고향입니다.”

“어쩌다가 레젠 같은 곳에서 사시는 분이 이런 촌동네까지 오셨을까?”

“기사가 되려고 왔습니다.”

“레젠의 기사단들은 입단 자격이 안 된 모양이군. 하긴, 아이기스 나이트는 칼질만 잘하면 누구든지 오케이지.”

기왕이면 마수 토벌의 사명이라든가 슈벤하임 대공의 명성을 따라왔다. 라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좋고 듣는 사람도 좋은 이유를 댈 수는 없었던 걸까.

남자는 가차 없이 억측을 늘어놓으며 상처에 소금을 뿌려댔다. 그 억측이 정확해서 로젤린은 할 말이 없었다.

‘빈정거리는 말투도 왠지 귀에 익어. 재수 없어.’

잘생기긴 했지만 재수 없는 남자를 로젤린은 빤히 보았다. 릴리가 말하길 미남은 얼굴값을 해서 재수가 없다더니 정답이었다.

“처음 봤을 때도 느꼈는데…….”

남자의 시선이 로젤린의 아래위를 주욱 훑었다.

가끔 그녀를 정부로 삼고자했던 귀족들처럼 느끼하게 벗기는 시선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름도 모르는 초면의 남자에게 훑어지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체격도 호리호리하고, 얼굴도 반반한 게 영락없이 계집애야.”

“…….”

“변성기가 지나긴 했냐?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카스트라토인 줄 알겠어.”

시비를 거는 것 같은 말투였다. 하나 여자가 맞으니까 로젤린은 언짢아지지 않았다.

화도 안 내고 기분 상한 티도 안 내고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

“…….”

“…….”

남자도 입을 다물고 그녀를 응시했다. 서로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침묵의 시간이 흘러갔다.

“……자꾸 낯익은 느낌이 드는데……. 날 이전에 본 적이 없나?”

그게 바로 그녀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당신이야말로 날 본 적이 있느냔 질문을 막 하려던 때,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오래 기다리…… 프레데릭 님! 왜 또 여기 계시는, 잠깐! 숨겨 놓은 제 간식을 왜 또 뒤져서 찾아내신 겁니까!”

“이사벨이 간식 바구니를 싸주는 건 나까지 먹으라는 거야.”

“훔쳐 먹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사무실의 주인, 즉 보좌관 라울임에 분명할 것이다. 라울은 인사를 하다가 말고 남자에게 버럭버럭 화를 내고 있었다. 순식간에 소외된 로젤린은 멍하니 대화를 들었다.

그런데, 잠깐만.

‘프레데릭 님이라고?’

그녀의 기억으로 슈벤하임 대공의 풀네임은 프레데릭 체 슈벤하임이다. 설마.

“술까지 드셨습니까! 제 술은 밍밍해서 맛없다면서 왜 자꾸 드시는 겁니까?!”

“이사벨과 너의 사랑을 응원하기 위해서.”

“미친 소리 그만하세요!”

북쪽 사투리, 술, 옆에서 잔소리를 하며 말리는 목소리.

애매모호하던 단서가 하나로 합쳐졌다. 로젤린은 하마터면 짧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방금 전까지 그녀와 노닥거린 남자는, 슈벤하임 대공이며, 또한 석 달 전 그녀에게 시비를 걸어 주먹질을 할 뻔한 주정뱅이였다.

반사적으로 삿대질을 했다가 얼른 내렸다. 다행히 프레데릭과 라울은 서로 대화하고 외쳐 대느라 그녀를 보지 못했다.

- 기사는 말이야, 명예이니 기사도이니 하는 번드레한 핑계들로 광대처럼 꾸민 개새끼일 뿐이야. 제 대가리로는 생각이라는 것도 할 줄 모르고 맹목적으로 짖기만 할 뿐인 개지. 그런 개가 되고 싶다고 하는데 웃음이 안 나오게 생겼나?

맙소사.

기억에서 지웠다고 여겼던 폭언이 생생히 떠올랐다.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비명이라도 크게 꽥 질렀다면 충격이 완화되었을 텐데 속으로만 삼키고 있자니 당혹감이 쌓이기만 한다.

기사를 싫어하면서도 기사를 거느리는 남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거지?

안절부절못하는 로젤린의 시선 속의 프레데릭은 3개월 전과 똑같이 따분한 얼굴이었다.

잠깐의 소동 후 라울이 주변을 정리했다.

“들으셨으면 알겠지만 이분이 슈벤하임 대공이십니다. 첫 대면치고 민망한 상황을 연출하게 되었지만 잊어 주세요.”

라울이 정식으로 소개할 때도 프레데릭은 싱글거리는 얼굴이었다. 로젤린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인사했다.

“알아 뵙지 못하여 무례하였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뭐, 상관없어.”

프레데릭이 어깨를 으쓱했다.

라울이 피곤한 얼굴로 로젤린에게 양해를 구했다.

“지금까지 기다리시게 한 것도 미안한데,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신가요? 긴히 대공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리를 피해 달라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자리를 피하고 싶었던 참이다. 로젤린은 태연하려고 애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 옆의 방으로 들어가자 하녀가 잠시 후 다과를 가져왔다. 라울이 갈아입을 옷가지와 사적인 물건들이 있는 곁방은 대기실 용도로도 쓰이는 모양이다.

하녀가 나가자 방에는 로젤린 혼자만이 남았다. 겨우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따끈따끈한 찻잔을 양손으로 쥐며 로젤린은 석 달 전의 프레데릭을 다시 떠올렸다.

‘분명히 기사를 싫어하는 사람이었지.’

자세한 대화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당시의 감정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취중진담이라 하였던가. 술에 취하여 있던 프레데릭에게서 느껴지던 경멸은 진짜였다. 연무장에서의 위화감도 이제야 이해되었다.

‘어떻게 한담…….’

처음 만났을 당시에 로젤린이 느꼈던 분노와 짜증은 분명히 진심이었다. 지금도 비슷한 욕을 듣는다면 망설이지 않고 주먹을 휘두를 것이다.

하나 이제 그 진심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그녀의 진심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프레데릭을 주군으로 섬기게 되었다는 사실이니까.

더욱 큰 문제는 이것이다. 겨우 섬기게 된 주군이 기사를 경멸하는 사람이라는 것. 오랜 염원을 위해서 그녀는 반드시 기사로서 주군을 섬겨야 한다. 기사를 경멸하는 사람이 과연 기사를 인정할까.

막막해졌다. 차라리 돌직구를 던져 볼까. 로젤린의 한숨에 찻잔의 표면이 잘게 떨렸다.

“귀찮다고 하셨어도 관심은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여기까지 직접 행차하신 걸 보면.”

사무실의 방음은 훌륭하지만 그래도 라울은 목소리를 낮췄다. 주의해서 안 좋을 건 없다.

“그럴 리가.”

프레데릭이 하품하며 부정했다.

“낮잠을 자기에 좋은 곳이라서 왔을 뿐이야.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을 실현할 기회이기도 했고.”

“…….”

그 속담처럼, 자신의 사무실로 오기 전까지는 땡땡이를 친 프레데릭을 찾지 못한 라울이다. 말없이 노려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땡땡이 한 번에 과민 반응하기엔 그가 프레데릭과 알아 온 세월이 길었다.

오늘 잔소리를 해 봤자 그는 내일도, 모레도, 땡땡이를 칠 테니까.

“던 경에게 받아 온 자료를 드리겠습니다.”

무시하기로 한 라울은 서류를 꺼냈다. 알렉산더에게 받은 로젤린의 입단서류 및 인적사항이었다. 연무장에서 얼핏 봤을 뿐인 라울은 로젤린이 여자라는 걸 서류를 보고 난 후에야 알았다.

프레데릭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어. 귀찮으니까 중요한 것만 말해 다오.”

“중요한 건 별로 없습니다. 이름은 로젤린 메이어, 출신지는 레젠, 입단 시기는 약 보름 전, 성별은…….”

“잠깐.”

로젤린의 이름을 듣고 ‘이름까지 계집애 같은 녀석이군.’ 따위의 생각이나 하던 프레데릭이 문득 말을 끊었다.

“로젤린 메이어? 메이어, 메이어…….”

메이어라는 성씨를 입속으로 반복하던 그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맞아, 메이어. 그 메이어 가의 사람일까?”

의미심장한 물음은 도로 튕겨 나왔다. 눈을 빛내는 프레데릭과는 반대로 라울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메이어 가에 아는 사람 있습니까? 또 술 드시고 싸웠나요?”

“…….”

젖형제이자 보좌관에게마저 뿌리 깊은 불신을 심은 자신의 모습에 프레데릭은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10년 전 클레타트 후작에게 팽 당한 그 메이어 남작가.”

“10년 전이라면, 아!”

뒤늦게 라울도 짧은 탄성을 질렀다.

“메이어 남작가에 생존자가 있었습니까?”

“장남은 남작과 죽었지만 차남이 행방불명 상태라고 들었다. 적어도 시체가 발견된 건 아니란 거지.”

“한데 메이저 남작가가 어째서…… 설마 프레데릭 님께 복수하려고 하는 걸까요?”

프레데릭은 억울한 표정이 되었다.

“복수, 좋지. 근데 복수할 거라면 표적을 잘못 찾았잖아.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복수는 후작에게 해야지.”

“복수에 눈이 먼 사람의 심정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뭐, 내 호위기사가 메이어 남작가라는 게 확실한 건 아직 아니잖아.”

대화를 하며 라울의 표정은 차츰 심각해졌지만 프레데릭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기색이었다. 아까와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레젠에 사람을 보내서 따로 알아보겠습니다.”

“됐다, 됐어. 거기까지 사람을 언제 보내고 언제 알아보냐. 복수를 하겠다는 사람이 대놓고 자기 본명을 걸고 올까.”

“하지만…….”

못내 걱정스러워하는 라울에게 그는 그냥 웃었다.

“신경 쓰이면 내가 떠보든가 하지. 메이어 남작가의 생존자라고 보기에는 나이가 안 맞기도 하고.”

프레데릭이 알기로 메이어 남작의 두 아들은 자신과 나이가 비슷하거나 몇 살 위였다. 행방불명된 차남이 생존했다 하더라도 서른이 넘었을 거란 뜻이다.

반면에 로젤린은 아무리 많이 잡아도 이십 대 중반으로 보였다. 나이를 몇 년이나 깎아 먹을 정도의 동안이 아닌 이상 실종된 차남은 아닐 것이다.

막내딸이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가문이 몰락하고, 차남까지 행방불명이 된 상황이었다. 어린 딸이 무사히 살아남아 성장하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아예 막내딸은 추측에 올리지도 않았다.

메이어 남작가의 구성원에 대해서 잘 모르는 라울은 프레데릭의 호언장담을 의심하지 않았다. 언제나 게으르고 땡땡이만 치고 다니는 그의 주군이지만 할 때는 하는 사람이었다.

“메이어 경의 신원이 의심되어서 일부러 선택하신 겁니까? 가까이에서 감시하시려고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프레데릭이 쳐다보았다. 어느새 손에는 라울의 아내가 간식으로 싸준 술병이 또 들려 있었다.

“그 자리에서 로젤린 메이어라는 걸 어떻게 알았겠냐. 난 그냥 얼굴이 여기 출신이 아닌 것처럼 허여멀겋고 낯설길래 고른 거야. 죽은 아버지 마누라의 입김이 닿은 사람이 아닐까 해서.”

어머니를 칭하는 호칭이 ‘죽은 아버지의 마누라’라니 참 발칙하다. 하나 라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프레데릭이 어머니를 그렇게 지칭하여도 불효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선대 대공의 아내, 마리안 부인은 프레데릭의 의붓어머니이지 친어머니가 아니었다.

선대 대공은 가신의 아내와 불륜 끝에 프레데릭을 낳았다. 즉, 프레데릭은 사생아였다.

마리안 부인의 입장에서 프레데릭은 정부의 자식 주제에 제 아들의 자리를 차지한 놈이고, 프레데릭의 입장에서 마리안 부인은 언제 제 목을 노릴지 모르는 위험 요소였다.

“대부인의 스파이라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옆에 두고 보면 생각이 나겠지.”

무성의하게 대꾸하며 프레데릭은 방금 전 로젤린과의 대화를 회상했다.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려고 일부러 유치하게 속을 긁었는데 별 효과는 없었다. 놈은 다소 모욕적인 발언에도 자신만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감정을 감추는 훈련을 한 녀석 같지는 않았지.’

여자 같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이젠 화도 안 내는 걸까. 아니면 화를 낼 줄을 모르는 호구 같은 성격인걸까.

‘설마 진짜 여자인 건 아닐 거고.’

자신이 생각했지만 좀 웃긴 상상이었다.

“실력은 좋다던가?”

“예, 실력도 좋지만 무엇보다 검투사 출신이라서 마수를 상대하는 건 유능할 거라고 하더군요.”

“검투사 출신? 특이하구만.”

아이기스 나이트에는 범죄자 출신 - 물론 입단할 때는 신분 세탁을 한다 - 보다 더 희귀한 것이 검투사 출신이다.

요약하자면 로젤린 메이어는 대놓고 메이어 가라는 이름을 쓰고, 나이도 다르고, 무척 튀는 출신을 스스로 밝혔다. 놈이 메이어 남작가의 생존자일 가능성은 차츰 멀어지고 있었다.

“포날 상회의 주인이 쓴 추천서를 보니 레젠의 유명한 검투사였던 모양입니다. 실력은 그만큼 확실하겠지요.”

“검투사로 사지가 멀쩡한 녀석이라면 당연…… 잠깐만, 검투사라고?”

프레데릭이 로젤린을 발탁한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죽은 아버지 마누라의 스파이일 가능성.

둘째, 보기만 해도 갑갑한 근육질의 거한이 아니라는 점.

셋째, 낯익은 얼굴이라는 것.

사실 세 번째 이유가 결정적이었다.

난생처음 대면하는 사람이 낯익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원인이 있을 테니까. 프레데릭은 자신의 육감을 신뢰하는 편이었다. 경계를 하게 되든 의심을 하게 되든, 일단 가까이에 두고 보고자 했다.

로젤린과 대화하면서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라는 의혹이 사라지지 않았다. 저렇게 멀끔하고 잘생긴 사내놈이라면 쉽게 잊을 얼굴이 아닌데 기억이 나지 않아 답답했다.

애매하기 짝이 없던 기억에 쐐기가 박혔다.

검투사.

프레데릭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을 노크도 없이 열자 차를 마시던 로젤린이 놀란 얼굴로 기립했다.

“보좌관님과 대화는 다 끝나셨습니까?”

“로젤린 메이어.”

“넵.”

무심코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로젤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프레데릭은 찬찬히 그녀를 훑어보며 명령했다.

“경례를 하는 것처럼 왼팔을 가슴 앞에 수평으로 세워 봐.”

“……?”

이상하다는 얼굴이긴 했으나 로젤린은 순순히 명령에 따랐다. 그녀가 마치 부목으로 고정한 것처럼 팔을 앞으로 세우자, 재차 명령했다.

“그리고 걸어 봐라. 앞으로, 뒤로.”

로젤린은 이번에도 순순히 걸었다. 앞으로 세 발자국, 뒤로 세 발자국.

“……수고했다.”

프데레릭은 문을 쾅 열었던 것처럼 다시 쾅 닫았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아직 라울은 감도 못 잡고 있는 듯했다. 그럴 만도 하다. 석 달이나 전의 일인 데다 술집은 조명도 어둡다. 안 그래도 프레데릭이 사고를 칠까 봐 전전긍긍하던 라울이니 상대의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프데레릭은 이게 과연 몇 달짜리 잔소리일까, 고민하며 설명했다.

“쟤 걔야.”

“쟤가 걔라니요?”

“석 달 전 네 잔소리의 근원.”

심각하게 말하는 것치고 설명은 애매하다.

미간까지 찌푸리며 고민하던 라울이 석 달 전 레젠에서의 술집 사건을 떠올린 건 프레데릭이 술병을 다 비웠을 때였다.

석 달 전 술집.

기사를 경멸한다고 나불거리던 프레데릭.

그 말에 화를 내며 싸우기 직전까지 갔던 검투사.

그 검투사는, 현재 프레데릭의 기사.

…… 대형 사고였다.

“프레데릭 니이이이이임!!”

라울의 사자후가 오후의 사무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선대 대공은 프레데릭의 어머니와 애절한 로맨스를 찍었다.

물론 본인들만 애절했고, 주변인과 가족이 보기에는 흔한 불륜에 불과했다.

대공쯤 되는 지위의 귀족이면 정부를 한 명이 아니라 열 명을 거느려도 사회적인 지탄을 크게 받지 않는다. 선대 대공의 아내인 마리안 부인도 남편의 불륜을 묵인했다. 사생아를 낳았다는 걸 알아도 묵인했다. 남편이 죽을 때까지 묵인하였을 것이다.

선대 대공이 프레데릭을 정식으로 입적하지만 않았다면.

프레데릭은 검술의 천재였다.

애인의 아들인 데다, 자신을 쏙 빼닮은 프레데릭을 선대 대공은 무척 아꼈다. 거기에 재능까지 출중하다는 게 드러나니 그는 애인과 자식 사랑에 눈이 멀었다.

슈벤하임 대공령, 특히 마수의 습격이 일상화된 발트란에서 강함은 곧 가치의 기준이다. 강한 자는 존경받는다. 마리안 부인이 낳은 그의 적자 윌리엄은 유감스럽게도 평범했다.

선대 대공은 프레데릭을 정식으로 입적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후계자로 공표했다. 그러고는 그의 기반을 제대로 닦아 주기도 전에 급사했다.

당시에 슈벤하임 대공령의 정세는 뒤숭숭했다.

인망은 있으나 사생아인 프레데릭과 정실부인이 낳은 적장자인 윌리엄.

만약 프레데릭에 대한 직속 기사단의 지지가 약했거나, 프레데릭과 사이가 돈독한 황태자가 간접적인 지지를 천명하지 않았다면 대공위는 바뀌었을 것이다.

그 후로도 기사단으로 대표되는 군부는 프레데릭을 지지했다. 즉, 기사들은 프레데릭의 으뜸가는 지지 세력이었다.

프레데릭이 기사를 혐오한다는 건 최측근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당연히 기사들에게는 철저히 함구했다. 누구라도 자신이 속한 집단을 혐오하는 사람에게 충성을 바치는 건 어려울 것이다.

그 비밀을 프레데릭이 제 입으로 까발렸다.

술 취해서.

“프레데릭 님! 그러니까 제가 술은 작작 마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프레데릭은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발트란도 아니고 레젠에서 오다가다 만난 뜨내기가 아이기스 나이트가 될 줄 내가 알았겠냐.”

“그러니 평소에 입조심을 하시라는 겁니다아!!”

뒷목을 잡고 있는 라울은 고혈압으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뭐,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메이어가 석 달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프레데릭 님도 기억을 하셨는데 메이어 경이 기억하지 못할 거란 터무니없는 낙관론은 버리십시오!”

라울의 말도 맞았다. 술집에서 웬 주정뱅이가 자신의 장래 희망을 비웃으며 시비를 건 짜증 나는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테니.

프레데릭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가볍게 대꾸했다.

“내가 알아서 하마.”

“어떻게 알아서 하시겠다는 겁니까?!”

“로젤린과 한번 얘기해 보지. 겸사겸사 메이어 남작가와 관련이 있는지도 알아보고.”

“의심스럽지 않게 떠 보는 거 잘 못하시잖습니까.”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니까.”

“그냥 몰래 죽이는 건 어떨까요.”

반쯤은 진심으로 말하는 라울의 어깨를 한번 두드려 주고는 문을 열었다. 잔소리를 빙자한 대화를 반강제로 끊는 것과 다름없는 행동이다. 라울은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로젤린 메이어, 경의 임무를 설명해 줄 테니 이제 나와.”

“대화는 끝나셨습니까?”

방음 잘 되는 방에 앉아서 소동도 모른 채 차를 마시고 있던 로젤린이 일어섰다. 프레데릭은 그대로 로젤린을 데리고 복도로 나왔다. 문을 닫기 전에 날 믿으라는 듯이 찡긋 남긴 윙크에 라울은 불신의 시선으로 응답했다.

“라울이 내성과 대공저의 호위병들에게 경의 인상착의를 알려 주긴 할 테지만 나랑 다니면서 눈도장을 찍어 두는 게 좋겠지. 지리도 익힐 겸 말이야.”

짤막하게 설명하며 프레데릭은 복도의 오른편을 가리켰다. 라울을 비롯한 행정처 관리의 사무실이 있는 복도는 조용했다. 다들 열심히 일할 시간이다.

“저어기 오른쪽 복도 부근이 라울 외 다른 보좌관들의 사무실이 있는 곳인데 경이 찾아갈 일은 별로 없을 거야. 보좌관의 도움이 필요한 문제가 생기면 라울에게 직접 말하면 된다. 문제가 생길 일도 없겠지만.”

“명심하겠습니다.”

“창문 밖으로 건물이 하나 보이나? 저기 2층에 내 집무실이 있다.”

로젤린이 언뜻 보이는 건물 하나를 확인하자마자 프레데릭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사무실이 있는 건물을 나온 그는 자신의 집무실이 아니라 북쪽으로 향했다.

그의 걸음에 맞춰 빠른 보폭으로 걸으며 물었다.

“전하의 집무실로 가시는 게 아닙니까?”

“그쪽으로는 경이 갈 일이 딱히 없을 거야. 내가 집무실에 붙어 있는 날은 거의 없거든.”

집무실에서 일을 하는 게 아니면 어디에서 뭘 하는 걸까.

로젤린은 앞서 가는 프레데릭의 등을 의혹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전하, 한 가지 더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뭐지?”

“저 이외의 호위기사는 어디에서 대기하며, 구성원은 총 몇 명입니까?”

본래 이렇게 길을 알려 주고 낯을 익히게 하는 건 다른 호위기사의 일이다. 주군인 프레데릭이 친히 나설 일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프레데릭은 그 지위에 비하여 일행이 너무 단출했다.

그의 지위라면 보좌관, 호위기사, 호위병, 하인 등등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군단을 이끌고 다녀도 부족하다. 이렇게 호위기사 한 명만 덜렁 데리고 - 심지어 라울의 사무실을 나오기 전에는 홀몸이었던 듯한 - 다닐 위치가 아니다.

자신이 알고 있던 귀족의 상식과 현실이 달라서 혼란스럽다.

프레데릭이 휘파람을 불었다.

“오, 예습을 좀 해 왔나 보군? 현재 호위기사는 너 한 명이고, 대기소는 정해진 곳이 없다. 이전의 호위기사는 라울의 옆방을 빌렸으니 경도 그렇게 하면 될 거야.”

호위기사가 자신뿐이라는 말에 로젤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프레데릭이 그녀를 보며 가늘게 웃었다.

“난 귀찮은 게 질색이거든.”

귀찮은 게 싫어서 호위기사 한 명만 데리고 다니는 대공. 로젤린은 할 말을 잃고 잠자코 그의 뒤만 따라갔다.

“이제 대공저까지 가는 길을 알려 주마. 원래는 말을 타고 다니는 게 편하지만 넌 튼튼할 테니 걸어가도 되겠지?”

그의 말처럼 내성의 중앙에 있는 대공저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로젤린은 주변을 돌아보고 길을 외우려 노력했다. 길눈이 어두운 것도 아니고 대공저까지의 길도 복잡하지 않다. 길 잃고 헤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열심히 걷는 와중에 뜬금없이 프레데릭이 말문을 열었다.

“로젤린,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남동생이 한 명 있다. 네 형제는 어떻게 되지?”

부자연스러운 타이밍에 나온 부자연스러운 질문이었다. 다행히 로젤린은 길을 외우느라 정신이 쏠려서 부자연스럽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이남 일녀 중 막내입니다.”

사무실에서 나눈 대화로 볼 때 프레데릭은 자신을 남자로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후에 라울이 서류를 갖고 왔으니 자신이 여자라는 걸 알고 있으리라고 로젤린은 판단했다.

설마 측근인 호위기사를 발탁하면서 서류 확인도 안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나이는?”

“스물다섯입니다.”

“아하, 좋을 때지.”

의미 없는 대답을 하면서 프레데릭은 추측을 확신했다.

메이어 남작의 실종된 아들은 차남이고, 적어도 서른은 되었을 것이다. 로젤린 메이어는 메이어 남작가와 연관이 없다. 단순히 성씨가 같은 것 같다.

사실 로젤린 메이어가 정말 메이어 남작가의 생존자라고 해도 그는 별 상관이 없었다. 잘못 찾은 복수의 타깃을 정확히 알려 주기만 하면 끝나니까. 그 복수까지 도와줄 의욕과 의리는 없다.

2개의 담과 2개의 문을 지나 마침내 대공저에 도착했다. 투박한 내성의 분위기처럼 슈벤하임 대공저도 수수했다. 정원마저 소박했다. 레젠에서 본 귀족들의 정원은 사시사철 꽃이 피고 푸르렀는데 슈벤하임 대공저의 정원은 딱 늦가을이었다.

프레데릭이 대공저 안까지 들어가지는 않고 밖에서 설명했다.

“대공저까지 알려 주긴 했지만 경이 여기까지 올 일은 별로 없을 거야. 오후 근무 시간이 되면 라울의 사무실로 먼저 찾아가면 된다.”

“전하께서도 보좌관님의 사무실에 계십니까?”

“아니, 내가 또 도망쳤다고 라울에게 듣고 같이 찾아야 할 테니까.”

처음 근무하는 호위기사에게 땡땡이를 치겠다는 선언을 하는 그는 당당했다.

“라울과 같이 성실하게 찾아도 되고, 찾는 시늉만 해도 되고, 경도 몰래 도망쳐서 낮잠을 자도 되고, 선택은 마음대로야. 알아서 하도록.”

이쯤 되니 로젤린도 그의 호위기사라는 건 단순히 명목상의 직책이라는 걸 눈치챘다. 호위기사가 법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으면 아예 뽑지도 않았을 것 같다.

설명은 이제 대공저로 이어졌다.

“동쪽 3층에서 커튼이 내려진 큰 창이 보이나?”

“예.”

“저곳이 내 침실이다. 원칙적으로 경은 대공저 내의 어느 곳이든 갈 수 있지만 되도록 서쪽은 잊어. 내 침실, 내 서재, 내 응접실은 모두 동쪽에 있으니까 서쪽으로는 아예 가지 마라. 저택 내에서 내 거처가 어디어디인지는 집사나 하녀들에게 물어보면 될 거야.”

“알겠습니다.”

가지 말라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일단은 수긍했다. 주군의 명령에 따르는 게 기사의 도리니까.

오히려 심플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건 프레데릭이었다.

“……이유는 안 묻나?”

“가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을 내가 하긴 했지.”

뒷목을 긁적이던 프레데릭이 마저 설명해 주었다.

“저택은 중앙의 계단을 중심으로 동쪽, 서쪽으로 나눠서 각자 쓰고 있는 중이다. 별관으로 가라고 해서 들을 상대도 아니다 보니. 괜히 서쪽으로 발 디뎠다가 무시무시한 부인에게 잘못 걸리면 마음에 상처가 되는 소리를 듣게 될 거야. 음…….”

프레데릭이 말한 서쪽에서 거주하는 사람은 마리안 부인과 윌리엄이었다. 하나 대공 일가의 사정을 모르는 로젤린에게는 정확한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냥 가지 말라니 가지 말자, 라고 해석하고 있는 그녀의 턱을 프레데릭이 문득 잡았다.

“……?”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보다 키가 큰 프레데릭의 눈동자가 가만히 내려다보는 게 보였다. 붉은색에 가까운 적갈색 눈동자가 깊다. 머리칼에도, 눈동자에도 선명한 붉은 기가 감돈다. 로젤린도 무심코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용맹무쌍한 대공이라는 이미지에서 비롯된 상상과는 달리 언행이 가벼운 남자였다. 실제로 만나게 된 대공은 경박스럽기까지 한 남자다.

그렇지만 제대로 보게 된 눈매는 예리했다. 발트란의 무인답게 햇볕을 많이 쬔 피부는 건강한 빛으로 그을리고, 이목구비의 선이 굵어 무척 남자다운 분위기다. 그녀의 턱을 잡고 있는 손가락도 굵고 강인했다. 오랜 세월 단련한 무인의 손이었다.

‘초상화로 먼저 목격했으면 성격도 굉장히 사내답고 냉정한 분이라고 짐작했을 거야.’

입 다물고 있을 때 먼저 봤다면 멋있고 남자답다고 예상했을 남자가, 입을 열었다.

“경은 꽤 반반하게 생긴 얼굴이니까 호위기사가 아니라 정부를 데리고 다니는 게 아니냐는 말을 할지도?”

“…….”

성희롱이다. 로젤린의 눈가가 미미하게 떨렸다.

여자로서 당연한 거부감이 생겼다. 기사로서도 좀 짜증이 났다. 그녀를 기사가 아니라 여자로 취급한다는 뜻이니까.

‘이제까지 성희롱한 새끼들처럼 사타구니를 걷어차서 짓밟아줄 수도 없는데…….’

조금씩 치미는 짜증을 삼키고 있는데, 프레데릭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제법 반반한 얼굴을 갖고도 겨우 기사라니 활용도가 잘못되었다고 여기지는 않나? 아, 원래 로열 가드로 입단할 예정이었다던가? 거긴 얼굴 외에는 쓸모가 없는 기사단이긴 하지.”

“…….”

“로열 가드가 아니라 다른 기사단들도 몸 말고는 쓸모가 없는 건 똑같군.”

짜증이 나긴 나는데, 계속 듣다 보니 이상한 기분도 들었다. 프레데릭의 빈정거림은 너무나 노골적이고 적나라했다. 왠지 그가 일부러 도발적인 대사들을 고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화를 내면 안 되는 건가? 아니면 화를 내기를 바라시는 건가?’

라울의 사무실에서 일부러 속을 긁었던 것처럼, 한 번 더 그녀의 반응을 떠보려는 프레데릭의 속셈을 모르는 로젤린은 잠시 고민했다.

“얼굴도 잘생겼지만 실력은 더 잘생겼습니다.”

“…….”

고민하다가 겨우 대답을 하니 이번에는 프레데릭이 입을 다물었다.

“…….”

농담을 했으면 실소를 하든 어이없어하든 반응이 돌아와야 되는데 프레데릭의 시선은 ‘이상한 것’을 보는 얼굴이었다.

농담이 실패했다. 민망해진 로젤린의 얼굴이 빨개졌다. 제 입으로 잘생겼다는 말을 꺼낸 건 난생처음이었는데 이렇게 민망할 줄 알았다면 입을 다물고 있을 걸 그랬다.

“내일부터 근무하도록.”

아예 그녀의 농담을 없던 일로 취급한 프레데릭은 등을 휙 돌렸다. 더 민망해진 로젤린은 묵묵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허를 찌르는 스파이의 새로운 수법인가?’

프레데릭의 생각을 혼자 남은 그녀가 알 방법은 없었다.

* * *

검투사 출신의 신입이 슈벤하임 대공의 새 호위기사로 발탁되었다는 뉴스는 하루 만에 기사단 전체에 번졌다.

로젤린은 호위기사로서 제대로 근무하기도 전에 평소보다 훨씬 따가워진 시선을 전신으로 느껴야했다. 연무장으로 들어가자마자 쏘아보는 시선에 움찔 했을 정도다.

‘속이 쓰라리네.’

호위기사로서 섬기게 된 주군은 첫 만남부터 빈정거리고 동료들은 그녀를 백안시했다. 마음을 다잡으려고 해도 꽤나 스트레스였다.

반가운 척 인사를 해도 씹힐 거라는 걸 아는 그녀는 묵묵히 무장을 점검했다. 다른 날과 같다면 검투사들도 그녀를 무시했을 것이다.

“야, 검투사.”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맥스가 먼저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왔다. 로젤린은 주먹을 가볍게 쥐며 긴장했다.

“검투사 나부랭이가 주제를 알라고. 감히 아이기스 나이트에 입단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대공 전하를 섬겨?”

어느덧 연무장 내의 시선이 그녀에게 전부 쏠려 있었다.

‘몸을 팔아서 얻은 자리’, ‘계집년답게 다리나 벌리니 편하겠다.’ 등의 모욕적인 발언을 각오하고 있던 로젤린은 오히려 놀랐다. 화를 내긴 하지만 수준이 매우 온건하다.

‘그만큼 대공 전하나 기사단장님을 존경해서 그런가?’

그녀가 실력이 아니라 몸을 이용해서 얻은 자리라는 모독은, 곧 그녀를 발탁한 프레데릭과 알렉산더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니 말이다.

각오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양호한 수위에 로젤린의 표정이 풀렸다. 무심코 안도해 버린 로젤린은 한 발 늦게 실수를 깨닫고 고개를 푹 숙였지만 늦었다.

“젠장. 웃어? 웃은 거냐?!”

“웃은 건 아니고……. 미안하다. 긴장이 풀렸어.”

진심으로 사과를 했는데 맥스는 더 화를 냈다. 주변에서도 뻔뻔스럽게 보이는 그녀의 태도에 야유를 보냈다.

“콜로세움에서 몸이나 파는 검투사 새끼가!”

“맥스! 그 자식 죽여 버려!”

큰일났다. 어쩌지. 로젤린은 당황하여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 혼자 눈총을 사는 것이라면 참을 수 있는데 일이 커지는 것 같다.

기어이 맥스가 칼을 뽑았을 때, 새된 소리가 연무장 전체를 울렸다.

신경을 날카롭게 자극하는 마법적인 알람 소리를 로젤린은 처음 들었다. 처음 들었지만 알 수 있었다. 위험을 경고하는 알람이라는 것을.

발트란에서 기사단 전체에 경고를 할 만한 위험은 하나뿐이었다.

“마수의 습격이야.”

누군가 말하자마자 알렉산더의 종기사 마르크가 연무장으로 달려왔다. 마법으로 증폭한 마르크의 목소리가 연무장에 울렸다.

“오늘은 제1기사대의 출병입니다! 5분 후 집결하라는 명령이에요!”

“다녀오고 난 뒤에 결판을 내자고. 오늘은 절대 안 넘어가.”

맥스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윽박지르고는 자리를 떴다.

살다 보니 마수의 도움을 받는 일도 있다. 호위기사로서 근무하는 시간이 아니면 그녀도 마수의 토벌에 참가해야 했다. 로젤린은 씁쓸한 생각을 하며 집결하기 위해 달려갔다.

제1기사대의 대장인 다니엘이 브리핑을 시작했다. 마수의 위치와 종류를 알리는 짧은 브리핑이 끝나자마자 기사대는 출병했다. 로젤린은 제일 후미에서 말을 달렸다.

기사대의 행군은 북문 밖에서 잠시 멈췄다. 마수의 정확한 위치를 알기 위하여 다니엘이 마법사와 교신하는 동안 로젤린은 옆의 아벨에게 물었다.

“아까 대장이 브리핑을 하셨을 때 말이야, 마수를 빠른호랑이라고 하셨잖아. 이름이 호랑이인거냐?”

“……이 상황에 그게 궁금하냐?”

“뭐, 마수와 싸우는 게 처음은 아니니까.”

대련할 때는 긴장하더니 마수 앞에서 오히려 태연한 얼굴이다. 그런 로젤린을 희한하다는 눈으로 보면서 아벨이 설명했다.

“학자나 마법사가 붙인 학명은 하…… 뭐라고 하는 이름이 있긴 한데, 우리는 그냥 편하게 비슷한 동식물로 부른다. 빠른호랑이나 움직이는 개미지옥 같은 이름으로. 그 편이 기억하기도 쉽고 특징적이기도 하지.”

다시 진군을 시작하였으므로 로젤린은 얼른 입을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어떤 마수와 상대하게 될지 대강 짐작이 갔다. 아마도 하룬엠브라란두라는 혀가 꼬이는 이름의 마수다. ‘빠른호랑이’라니 잘 지은 이름이다.

얼마 되지 않아 마수 무리와 조우했다. 사망한 약초꾼의 살점을 뜯어 먹고 있던 이십여 마리의 마수들이 기사들을 발견하고 고개를 쳐들었다. 시체보다 생생한 먹잇감의 등장에 마수들은 이를 드러내며 포효했다.

“전원 거창!”

다니엘의 호령에 따라 3열 횡대로 대열한 기사들이 안장에 메고 온 재블린(투창용 창) 중 한 자루를 들었다. 로젤린도 훈련 받은 대로 재블린을 들었다.

“1열 투창!”

1열에 이어 2열, 3열이 차례대로 재블린을 던졌다. 수십 자루의 재블린이 마수의 위로 떨어졌다. 마수들의 돌진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지만 기세는 한풀 꺾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돌격 명령이 떨어졌다.

신속하게 마수들을 처리하기 위하여 기동성을 중시하는 아이기스 나이트이다. 마수와의 전투에서도 기마술이 기본이었다. 기사들은 고삐를 놓고 양손으로 무기를 휘두르며 마수를 처치하는 반면, 로젤린은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왼손으로 고삐를 꽉 쥐고 있어야 했다.

“조심해라.”

앞에서 덤벼드는 마수를 막는데 급급한 로젤린의 뒤에서 아벨의 묵직한 클레이모어가 날았다. 아벨은 마수 한 마리의 목을 깊숙이 벤 클레이모어를 뽑아 들었다.

“고, 고맙다.”

로젤린은 밤잠을 덜 자서라도 기마 연습을 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 그래도 동료가 등을 지켜 준다는 든든한 감각은 꽤 좋았다.

기마 전투에 당장 능숙해지지는 않았으나 한 마리를 처리하는 건 성공했다. 그사이에 주변은 많이 정리되어 있었다. 다른 마수를 상대하기 위해 말을 돌렸을 때, 불현듯 저 멀리에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울렸다.

“끼아아아아!”

흡사 비명 소리와도 같은 그 울음소리에 이어서, 땅이 쿵쿵 울렸다. 기사들은 물론이거니와 마수들까지 고개를 돌렸다. 울음소리만큼이나 거대한 그림자가 쿵쿵쿵 달려오고 있었다.

“……닭?”

새로운 마수의 생김새는 흡사 닭과 비슷했다. 아주 아주 아주 커서 해를 가릴 정도였지만.

다니엘은 당혹감을 수습하고 진열을 정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수십 년에 한 번씩 드문 빈도로 출몰하는 희귀한 마수인지라 다니엘도 직접 목격하는 건 처음이었다. 덩치만큼 강력한 놈이다. 일컫는 명칭도 아주 간단했다. 큰닭.

큰닭은 제게 익숙한 먹잇감일 빠른호랑이부터 먹어치웠다. 애처롭게 비명을 지르며 도망다니던 빠른호랑이들은 하나씩 큰닭의 배 속으로 넘어갔다.

기사들은 큰닭의 생김새에 웃어야 할지, 압도적인 힘에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도 진열을 정비했다.

기사들에게 있어서 큰닭은 새로운 마수이지만, 큰닭에게 있어서도 기사들은 새로운 먹잇감이다. 빠른호랑이를 다 먹어치운 큰닭이 흥미를 드러내며 날개를 푸드덕거렸다. 저 덩치로 날아오르기까지 한다면 아주 끔찍할 것이다.

“투창!”

우선은 창을 던졌다. 가속도가 붙었음에도 창의 대부분은 큰닭의 몸에 박히지 못하고 튕겨났다.

낯선 공격에 큰닭은 걸음을 주춤했다. 기사들이 안도의 숨을 돌리는 것도 잠시, 부리가 크게 벌어지고 보라색 연기가 퀴퀴하게 번졌다.

“후퇴하라!”

위험하다는 걸 직감했다. 즉시 명령을 내렸으나 순풍을 탄 연기가 번지는 게 더 빨랐다.

“크악!”

미처 피하지 못하고 독 연기에 휩싸인 기사 몇 명이 피거품을 토하며 말에서 떨어졌다. 다니엘은 큰닭의 주둥이에서 뿜어 나오는 연기와 발톱에 독성이 있다는 걸 겨우 떠올렸다.

기사단은 가까스로 연기가 미치지 않는 곳까지 피하였으나 접근하지 못한다면 공격할 수도 없다.

큰닭은 자신이 뿜어낸 독 연기 속을 어슬렁거리며 걷다 쓰러진 기사들과 말을 부리로 툭툭 건드렸다. 다니엘은 피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손을 쓰지도 못하고 무력하게 동료들이 잡아먹히는 모습을 봐야 하는 것이다.

그 후에는 자신들의 차례다. 이곳에서 전멸할지언정 큰닭이 발트란으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다니엘은 죽음을 각오했다.

그때였다.

독 연기를 헤치며 달려가는 한 명의 인영이 있었다. 그 인영은 독 연기도 개의치 않으며 서슴없이 뛰어들었다.

다니엘은 순간적으로 중얼거렸다.

“로젤린 메이어…….”

기사단에서 무시당하는 신입 기사가 자욱한 독 연기 속을 평지처럼 홀로 달리고 있었다.

단 한 번뿐이었지만 이 마수와는 싸운 적이 있다. 로젤린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콜로세움과 계약한 마법사가 소형화에 성공했다며 끌고 온 마수였다. 소형화했다는데도 거대하기 짝이 없는 몸체여서 도대체 원래는 얼마나 큰 놈이었는지 궁금했었다.

결과적으로 그 마수는 실패작이었다.

독 연기를 뿜어 대고 있으니 관객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연습 경기에서 놈과 겨루던 로젤린은 얼떨결에 사후 뒷수습까지 맡아서 놈을 쓰러트리긴 했으나 그녀 역시 독 연기에 중독되었다. 나흘을 혼수상태로 앓다가 깨어난 로젤린에게 마법사는 축하 인사를 했다.

- 이제 자네는 이 케브나트세움바의 독에 내성이 생겼네! 독 연기 따위 무시하고 얼마든지 싸울 수 있을 게야! 소형화하며 독도 약화되었던 게 오히려 행운이었군!

- 미친 인간아, 행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흘 동안 앓느라 손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와중에도 마법사의 얼굴을 갈겨 버렸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녀에게 독 연기는 크게 위협적이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로젤린은 망설임 없이 독 연기로 뛰어들었다.

‘발톱에는 독이 있었지…….’

콜로세움에서 놈과 겨룰 때 발톱의 독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났다. 지금은 독에 내성이 있다지만 발톱에 맞아 찢어진 피부로 직접 독이 주입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대개 동물은 배 부위가 약점이지만, 워낙 거대하기 때문인지 놈은 오히려 뱃가죽이 단단했다. 약점은 몸통의 윗부분에 있다.

로젤린은 바닥을 쓸며 퍼덕이는 날개 쪽으로 달렸다. 마수는 닭 같이 생긴 외형답게 하늘을 날지는 못한다. 날개로 올라가는 게 그나마 안전할 것이다.

“으아악!”

단말마의 비명이 들렸다. 마수가 쓰러진 기사들을 짓밟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방금 자신을 공격한 기사들을 찾고 있는 듯했다. 기사들이 산 채로 밟혀 죽는 소리와 비명이 끔찍했다. 로젤린은 이를 악물고 날개깃을 쥐며 기어 올라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균형을 잡기 힘들었다. 허리를 굽히고 반쯤 기어가는 자세로 날개 위를 달렸다.

“앗!”

날개의 반쯤 달렸을 때, 마수가 크게 홰를 쳤다. 발밑이 크게 요동쳤다. 주르륵 미끄러지던 로젤린은 아슬아슬하게 날개깃을 움켜잡았다. 간신히 떨어지지는 않았으나 깃이 세게 잡히는 촉감이 마수의 신경을 건드린 모양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마수의 고개가 날개 쪽으로 돌아왔다.

“젠장…….”

마수가 작정하고 날개를 퍼덕거린다면 버틸 자신이 없었다. 몸통까지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갑자기 마수가 주춤했다. 독 연기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기사들이 다시 투창을 시작했다. 마수의 관심은 날개에서 꼼지락거리는 귀찮은 기척이 아니라 자신을 공격하는 놈들에게 향했다.

또 한 번 보라색 독 연기를 뿜어낸 마수가 쿵쿵 달려갔다. 로젤린은 필사적으로 다시 마수의 날개 위를 기었다. 자신이 늦으면 기사들이 당하게 될 것이다.

몸통 위로 크게 점프했다. 등 중간에 떨어졌다. 날개보다는 훨씬 안정감 있었다. 이 정도면 허리를 펴고 빠르게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독 연기의 독성이 목 안을 따끔따끔하게 했다. 내성이 있다지만 오래 머무르는 건 좋지 않을 것이다.

로젤린은 마수의 몸통 위를 달려갔다. 정확한 약점은 뒤통수에 있다. 모든 게 그녀의 어깨에 걸려 있었다.

“헉, 헉!”

탁한 잿빛의 깃털이 촘촘하게 돋아난 마수의 목덜미가 바로 눈앞에 보였다. 로젤린은 바스타드 소드를 뽑아 크게 휘둘렀다. 날카로운 칼날이 볏처럼 생긴 기관으로 보호 중인 뒤통수와 목덜미 사이를 정확히 베었다.

“끼에엑!”

녹색 체액이 확 튀었다. 역겨운 피비린내가 한순간에 번졌다. 마수가 비명을 지르며 날뛰었다. 떨어지지 않도록 마수의 깃털을 꽉 쥔 채 한 손만으로 연거푸 검을 휘둘렀다.

퍽, 퍽! 마구잡이로 쑤셔 넣는 칼날이 근육과 살을 찢고 뼈에 부딪혔다. 마수는 사정없이 몸부림을 치며 날뛰었다. 몸부림을 칠 때마다 땅이 쿵쿵 파이고 체액이 그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끼아……!!”

마침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마수의 육중한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쿠웅! 하는 소리가 땅을 울리고 자욱한 흙먼지가 일어났다. 로젤린은 칼날이 완전히 상한 바스타드 소드를 내던지고 몸통 위에 주저앉았다. 그녀가 칼질을 하던 마수의 목은 반쯤 잘려 붉은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온몸은 마수의 체액으로 뒤범벅이고 지독한 피비린내가 후각까지 마비시켰다. 정신없이 달릴 때는 몰랐는데 깃털에 긁힌 자잘한 상처도 전신에 있었다. 미친 듯이 휘두르던 팔은 떨어질 것처럼 뻐근하게 아팠다.

그래도 그녀는 이겼다.

이겨서 동료들을 지켰다.

“우와아아아아!”

독 연기 저편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전투의 열기가 진하게 남아 허공을 울리는 그 환호성은, 콜로세움에서 들을 때보다 더욱 저릿저릿하게 심장을 움켜쥐었다.

“아하하.”

왠지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로젤린은 사람을 지키는 검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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