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 (1/16)
  • <프롤로그>

    터질 듯한 열기가 콜로세움을 꽉 메웠다. 그 위를 밀도 높은 침묵이 뒤덮었다. 수천 명 관중의 시선이 한 점이 되어 콜로세움의 중앙에 못 박혔다.

    그곳에는 이십 대 중반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젊은 여성 검투사가 있었다. 짧게 뻗은 청남색 머리칼, 하드 레더 아머(가죽 갑옷)와 흰색 셔츠로도 완전히 가려지지 않는 탄탄한 근육, 왼손의 버클러(소형 방패)와 오른손의 바스타드 소드(장검의 한 종류).

    팽팽하게 긴장된 공기가 그녀를 중심으로 죄였다.

    여자의 맞은편에서 철창살이 ‘끼이이’ 하는 불길한 소리를 내며 위로 올라갔다.

    “크어엉!”

    본능적인 거부감을 일으키는 짐승의 포효가 순식간에 침묵을 찢었다. 관중들이 그 포효를 인식하는 순간, 짐승은 이미 여자에게 몸을 날리고 있었다.

    “아……!”

    탄식과 경악이 쏟아졌다.

    짐승의 기습 공격은 성공했다. 속절없이 밀려 흙바닥에 쓰러진 여자의 몸을 짐승이 내리눌렀다.

    짐승은 경기를 위하여 특별히 제작된 키메라였다. 심약한 관객들은 곧이어 펼쳐질 참혹한 살육을 상상하며 낮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짐승의 육중한 몸체에 깔려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여자가 투덜거렸다.

    ‘아가리에서 지독한 냄새가 나잖아……. 이것도 무기인가?’

    검투사의 경기는 근본적으로 쇼다.

    압도적인 능력으로 차례차례 도전자를 짓밟는 쇼도 있고, 궁지에 몰리다가 아슬아슬하게 역전하여 짜릿한 승리를 연출하는 쇼도 있다.

    오늘의 쇼는 후자였다.

    여자는 ‘최대한 밀리다가 늘 그랬던 것처럼 멋지게 반격해라.’라는 주문을 받았다.

    일반 검투사라면 생존을 장담하지 못할 버거운 상대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이기지 못할 놈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껏 수많은 마수에게 승리했다. 10년이라는 검투사로서의 이력이 곧 실력의 증명이었다.

    최대 고민은 이것이다.

    ‘어떻게 하면 폼 나게 이길 수 있을까.’

    그녀는 강자였고 쇼맨십에 충실한 검투사이기도 했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방패에 ‘깡깡’ 부딪치며 으르렁거리던 짐승의 꼬리가 갑자기 허공을 갈랐다. 여자는 본능적으로 짐승을 방패로 밀쳐 내며 옆으로 굴렀다.

    본능적인 판단은 정확했다.

    짐승의 꼬리에서 튀어나온 독침에 명중당한 흙바닥은 ‘치이익’ 하는 불길한 소리를 내며 썩어 들었다. 저 독액이 한 방울이라도 피부에 튄다면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을 것이다.

    ‘거짓말! 전갈 꼬리는 폼이라더니!!’

    이 빌어먹을 고용주가 쇼를 실감나게 하기 위하여 짐승의 능력을 축소해 알려 준 게 뻔하다. 이제 쇼는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승리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여자에게는 오랜 시간 가슴 안에 소중히 키워 온 꿈이 있었다. 여기에서 그것을 잃을 수는 없었다.

    우렁찬 포효를 내지른 짐승이 달려들었다. 여자는 바스타드 소드를 옆으로 비스듬히 들어 짐승의 주둥이와 맞부딪쳤다.

    짐승의 예리한 송곳니에 칼날이 씹혔다.

    그리고 챙, 하는 소리를 내며 칼날이 박살 났다.

    “……어?”

    부서진 칼날을 황망하게 바라보던 여자의 머리 위로 짐승이 앞발을 내리쳤다. 관중석에서 비명이 터졌다. 여자는 아슬아슬하게 앞발을 피하여 저 멀찍이 경기장의 벽으로 달려갔다.

    ‘이 개새끼가! 칼날을 가짜로 바꿨잖아!! 죽인다! 일당을 두 배로 쳐 주지 않으면 반드시 죽이겠어!!’

    극적인 쇼를 위해 과한 연출을 한 고용주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자꾸만 공격이 어긋난 짐승은 화를 내며 쫓아 왔다.

    여자는 짐승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달리는 와중에 무기로 쓸 만한 걸 찾았다. 그녀의 경기는 오늘의 마지막 하이라이트였다. 직전까지 경기가 있었으니 수거하지 못한 무기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크르릉!!”

    짐승의 포효가 가까웠다. 마침내 그녀는 적당한 무기를 찾았다.

    전투용 도끼, 배틀 액스였다.

    “흐아아압!”

    여자는 처음으로 우렁찬 기합을 내지르며 짐승에게 배틀 액스를 휘둘렀다. 평범한 여자의 완력으로는 사용하기 버거운 무기이나 그녀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제대로 손질되지 않고 험악하게 다루어진 배틀 액스는 날이 많이 상해 있었다. 짐승의 몸체를 직격한 배틀 액스는 날카롭게 몸을 가르는 대신 둔탁한 상처를 남겼다.

    몇 차례 공방이 이어졌다. 관객석은 여자의 행동에 따라 조마조마한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안도의 한숨을 흘리기도 했다.

    검투사의 기본적인 복식은 매우 가볍다. 관객들은 검투사들이 격하게 나뒹굴며 피를 흘리고 살점이 찢어지며 땀내를 물씬 풍기는 야만적이고 원색적인 결투를 원한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여자도 경갑을 입었다. 검투사는 인간 이상의 완력과 칼날 같은 발톱을 가진 짐승과 겨룬다. 한 번의 실수가 곧 죽음이었다.

    여자는 짐승의 대가리 너머로 힐긋 관객석을 훔쳐보았다. 사람들의 긴장이 극대화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자신을 속인 고용주는 짜증 나지만 도중에 무기가 부서진 건 긴장을 끌어올리기에 아주 좋은 연출이었다. 이만하면 쇼를 끝내도 될 듯하다.

    “크아!”

    그때, 짐승이 커다란 주둥이를 벌리며 여자에게 뛰어들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처음 통로에서 나올 때를 기준으로 짐승의 속도를 측정하고 있던 여자는 연기가 아니라 진짜 짐승에게 떠밀려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투구도 쓰지 않은 머리가 흙바닥에 세게 부딪치는 충격이 의식을 흔들었다.

    짐승의 송곳니가 여자를 삼켰다.

    “안 돼애!!”

    관중석의 어딘가에서 비명이 터졌다. 곧이어 콜로세움에 울려 퍼진 건 뼈가 으스러지고 살점이 뜯기는 잔혹한 소리가 아니었다. 뼈와 철이 서로 긁히면서 나는 소음이었다.

    “크으……!”

    여자는 신음하며 이를 악물었다. 머리를 씹어 먹으려던 짐승의 주둥이로 아슬아슬하게 왼팔을 찔러 넣는 건 성공했다. 팔뚝에 고정한 버클러에 짐승의 송곳니가 까득까득 맞물렸다.

    그렇지만 아랫니는 그대로 여자의 팔뚝에 꽂혔다. 팔이 떨어질 것만 같은 끔찍한 고통이었다.

    “넌, 젠장! 주둥이에서 썩은 시체의 냄새가 난다고!”

    발작적으로 외치며 오른손의 배틀 액스를 휘둘렀다. 날이 상한 배틀 액스는 둔탁하게 짐승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짐승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흔들었지만 여자는 팔을 오히려 깊게 뻗어 목젖을 꽉 움켜쥐었다.

    배틀 액스가 연이어 머리통에 내려찍혔다. 두개골이 으깨지고 허연 뇌수가 피에 섞여 사방으로 튀었다. 자욱한 피비린내가 물씬 흘러넘쳤다. 버둥거리는 짐승의 다리가 아래에 깔린 여자의 몸을 후려쳤다.

    여자는 짐승의 발악에 고스란히 노출되면서도 배틀 액스를 멈추지 않았다.

    생존을 넘어선 야만적인 광기였다. 내가 죽어도 너를 먼저 죽이고야 말겠다는. 그것은 여자가 10년 동안 생존할 수 있었던 유일한 법칙이었다.

    이윽고 “끼에에에” 하는 기괴한 단말마의 비명을 마지막으로 짐승이 축 늘어졌다. 깨진 두개골이 허옇게 드러날 만큼 대가리의 반이 부서져 있었다.

    콜로세움 안은 조용했다. 여자가 짐승을 후려갈길 때부터 관중들은 숨 쉬는 것도 잊고 경기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로 흠뻑 젖은 왼팔이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여자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금이 간 버클러를 차고 살갗이 찢어져 피가 줄줄 흐르는 왼팔을 번쩍 하늘로 추켜올렸다.

    “꺄아아아아!!”

    “아이리나 막델라히!!”

    “최고야! 언제나 당신이 최고예요!!”

    “로젤리인! 죽도록 사랑해앳!!”

    폭발적인 외침이 울려 퍼졌다. 관객들은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을 지르면서 ‘아이리나 막델라히’를 연호했다. 사방에서 꽃과 손수건이 쏟아졌다.

    여자는 아픔을 숨기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비단 쇼맨십만은 아니었다. 승리의 쾌감보다 더욱 짜릿한 미래가 펼쳐질 예정이었으니까.

    ‘이제 검투사 생활은 끝이야. 난 기사가 될 거야!!’

    아이리나 막델라히.

    살육과 승리를 주관하는 여신의 이명을 별명으로 가진 최강의 검투사, 로젤린 메이어의 은퇴 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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