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92)화 (292/292)

292화 

“아무튼 잘 됐다, 알버트. 이젠 의술원도 너랑 같이 다니면 되겠네.”

시아는 한시름 놨다는 표정으로 그제야 안도했다. 알버트는 시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만히 물었다.

“그런데 시아 넌 왜 의술사가 되려고 하는 거야?”

“글쎄? 그러게. 구체적으로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시아는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그냥. 모르겠어. 뭔가 이 길이 내 길 같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긴 했는데.”

그동안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의술사가 되려는 이유를 물은 사람은 없었다. 아마도 ‘의술사’라서 그랬겠지. 누구나 높이 쳐주는 직업이니까.

알버트는 생각에 잠긴 시아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수천 년 전 검은 머리 약초꾼과 함께 살던 의원 갈리프와 똑 닮아 있었다.

그녀가 의술사가 되려고 마음먹었던 건 어쩌면 사라진 기억 속에 잠재된, 본능 같은 무의식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아는 결국 답을 찾지 못하고 콧잔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마침 회복학 공부도 적성에 맞았으니 다행이지. 알버트, 넌?”

그때, 저 멀리서 시아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아야! 사진 찍게 얼른 와! 애들 다 모였어! 빨리 안 오면 너만 빼고 찍는다!”

“잠깐만! 나 빼고 찍지 마! 알버트, 우리 얼른 가자. 빨리, 빨리!”

시아는 저가 질문을 한 것도 잊고 알버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며 냅다 마리와 카트린이 모인 쪽으로 달려갔다.

흩날리는 검붉은 생머리를 따라 시아의 뒤에서 함께 달리던 알버트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조용히 대답했다.

“난 그냥 너랑 같이 있을 수만 있으면 상관없었거든.”

* * *

그렇게 시간이 흐른, 시간 여행이 모두 끝난 3580년대의 어느 날.

“그래서 끝까지 고백을 안 했던 거군요?”

시아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라크시스를 바라보았다. 랑케르트 성의 서재 소파를 가득 메운 책들이 시아가 일어나는 반동에 와르르 무너졌다.

알버트 조지 랑케, 즉 라크시스 옌이 방금 막 학창 시절 이야기의 진실을 모두 털어놓았던 참이었다.

그토록 간질거리게 굴어놓고도 어째서 알버트는 시아에게 고백을 하지 않았는가.

라크시스는 넥타이를 비틀어 풀면서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랬다간 당신이 내게 반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다른 사람 같았으면 반박했을 텐데, 그 얼굴로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어지네요.”

“어차피 과거의 저 자신과 현재의 제가 연적 관계인 셈이니 상관은 없었습니다만.”

라크시스는 또다시 셔츠 단추 두어 개를 풀어헤친 채로 차를 내리기 시작했다. 막 외출을 마치고 돌아와 놓고선 쉬기는커녕 시아에게 줄 차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라크시스 옌의 아내 사랑은 제국 전역이 모두 알 정도로 유명했다. 처음엔 힘들게 그러지 말라고 말렸던 시아도 이젠 그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라크시스가 보이는 호의를 편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시아는 찻잔을 가져온 남편의 뺨에 가볍게 키스하고는, 바닥에 떨어졌던 책을 주워 들어 라크시스의 코앞에 내밀었다.

“그래서, 이건 대체 왜 출간을 막은 건데요?”

[다이아몬드와 흑장미와 탐정]

앨런 어셔, 그러니까 슈나이더 경감의 추리 소설 연작 중 가장 최근에 발견된 미공개 원고였다. 그간 암호로 숨겨진 앨런 어셔의 원고들이 수십 년에 걸쳐 몇 년 주기로 발견되곤 했는데, 알고 보니 그 사건의 원흉이 다름 아닌 라크시스였다.

『다이아몬드와 흑장미와 탐정』은 얼마 전 테넷 성에서 열린 로열 올버리에 다녀온 날, 라크시스가 시아를 위해 깜짝 선물로 준비한 스페셜 에디션이었다.

의술원에 다니느라 한참 동안 책을 읽지 못했던 시아는 앨런 어셔의 소설을 선물 받은 기념으로 오래간만에 그의 모든 시리지를 꺼내어 읽고 있던 중이었다.

라크시스는 시아의 옆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아 태연하게 차를 홀짝였다.

“괴도 흑장미의 정체는 당신의 시간 여행 중에 밝혀져선 안 됐으니까요.”

아.

그 한마디에 시아는 라크시스의 의도를 파악했다.

마지막 시간 여행 이후 기존의 시간선이 끊어지고 새로운 시간선이 자라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시아의 인생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해진 운명을 따라 진행되어야만 했다.

그래야 스물여덟의 시아 켈튼이 홈커밍데이에 받은 일기장과 함께 다시금 시간 여행을 할 테니까.

그녀가 정해진 횟수만큼 시간의 루프를 돌다 빠져나와야지만 갈리프의 힘을 지닌 채 마지막 시간 여행을 마친 시아 켈튼이 도착할 지점이 생길 수 있었다.

시아는 이를 위해 소설의 출간까지 통제했던(그것도 암호와 미공개 원고라는, 추리 소설 작가 앨런 어셔의 명성을 해치지 않는 아주 자연스러운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서 말이다) 라크시스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대학 시절에 갈리프도흐 기록관에 못 들어가게 한 것도 시간 여행 때문이었고요?”

“그런 셈이죠. 재키 레이븐의 최후라든가 발자크 로스의 정체를 당신이 미리 알아선 안 됐거든요.”

프리드리히 암살 미수 사건 이후 결국 발자크 로스는 사형을 당했다. 물론 소공작 암살 사주만으로 사형을 당한 건 아니었고, 그간 황혼 국교회를 이용해 저주로 사람을 해쳐왔던 모든 일들이 낱낱이 드러나 최종적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발자크 로스, 즉, 카얄과 손을 잡았던 블레어가도 폭삭 망했다. 금전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정말이지 말 그대로 폭삭 망해 버려 두 번 다시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가문이 엉망이 되었으나, 놀랍게도 리암 블레어를 제외한 샤샤 블레어와 막스 블레어는 타격 없이 살아남았다.

‘오라버니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우리 이제 더 이상 서로 아는 척하지 말고 살아요.’

그게 어떻게 가능했냐 하면, 디자이너 샤샤 블레어에겐 가문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명성과 재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도련님, 아니, 미스터 막스 블레어. 일자리가 필요해 보이는데, 도와드릴까요?’

막스 블레어에게는 오직 그만을 위한 행운의 여신, 레베카 뮐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번외로 막스와 레베카는 중년의 나이가 될 때까지 느지막이 연애를 하다 결국 결혼하게 되었다고 하니, 진정한 해피엔딩이 아닐 수 없었다.

라크시스는 시아의 눈치를 살짝 보다가, 그녀의 갈리프도흐 기록관의 출입을 막았던 진짜 이유를 털어놓았다.

“…실은 그래야 당신이 황자와 자연스럽게 만나고, 그를 거절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 말에 황자와 함께 다니던 짧은 과거를 떠올린 시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와, 진짜 치밀하네요.”

“당신의 과거와 인생이 걸린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알버트 조지 랑케는 원래의 과거엔 없던 사람이었는데요?”

시아의 반박에 라크시스의 귓가가 붉어졌다. 라크시스는 딴청을 피우며 일어나 애먼 책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숙녀분, 그런 건 모른 척 넘어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만.”

“그 정도로 부탁해선 못 넘어가겠는걸요.”

또각, 또각.

마루를 울리는 귀부인의 굽 소리가 신사의 등에 점점 가까워졌다. 시아는 저에게서 등 돌린 채 책상 위의 서류들을 만지작거리는 라크시스를 붙잡아 휙 돌렸다.

“신사분. 제가 뭘 요구할지 아시나요?”

“이런, 숙녀분께선 욕심이 많으시군요.”

그 행동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던 종이 더미가 사방으로 날렸다.

떠올랐던 종이들이 내려앉고 나자, 전세가 역전된 채 책상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시아를 라크시스가 타오를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단단한 팔이 시아의 등을 받친다.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은 라크시스가 눈을 감은 시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윽고 습기 어린 숨소리가 얽혀들었다.

“…아.”

이마에서 콧잔등으로, 뺨에서 목덜미로. 서로의 얼굴을 덧그리고 탐닉하던 시아와 라크시스가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라크.”

“저도 느껴집니다.”

천칭이 움직이고 있었다. 우주의 균형이 맞추어지는 것을 느끼자마자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다시 태어나는군요.”

“과거의 기억은 하나도 없겠지만요.”

마지막 시간 여행 이후 완벽한 사도가 된 라크시스는 오래전 사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천칭을 느끼고 영혼을 인도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도의 의무를 행하는 건 아니지만, 고대 마법사로만 불리던 시절에 비해서 예민해진 감각은 중요한 영혼들이 천칭에 오를 때마다 곤두서곤 했다.

이는 갈리프의 힘을 되찾은 시아도 마찬가지였다.

라크시스는 평범한 풍경이 펼쳐져 있는 창밖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가끔 천칭이 자비로운 신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시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책상에 걸터앉은 후, 라크시스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에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테지만, 두 사람의 눈엔 우주 저편, 천칭의 그림자가 선명히 보였다.

라크시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기회를 주는 셈이니까요. 영혼의 빛이 모두 타오를 때까진 끝없이 다시 태어날 수 있죠.”

라크시스는 광활한 접시 위에서 탄생을 기다리는 영혼들을 지켜보았다. 그중 아주 작은 알갱이의 빛 하나가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다시 태어나면 광활한 우주도, 전생의 기억도 모두 잊고 다시 시작하겠지만 아직 모든 것을 기억하는 지금은 무섭기도 할 테다.

“개중엔 잘못을 뉘우치고 싶은 영혼들도 있을 겁니다. 인생을 완벽하게 사는 인간은 드무니까요. 누구나 잘못은 할 수 있고, 그런 이들에겐 기회가 필요하겠죠. 물론 그렇지 않은 인간들도 물론 있겠지만.”

곧 라크시스가 유심히 지켜보던 영혼의 순서가 다가왔다. 죽은 후 어둠 속에 오랫동안 갇혀있다 나온 작은 영혼은 에너지의 남은 양과 균형의 판단하에 결국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되었다.

아마 저 영혼은 끝없이 태어나고 또 태어날 것이다. 가진 에너지를 모두 태워 버려 바람 앞의 등불처럼 작고 연약한 빛이 되었지만, 저 영혼의 심지에는 창조주가 직접 떼어내어 빚어준 불멸의 심장이 있었으니까.

라크시스는 새로운 인생을 기다리는 미옌을 바라보며 시아와 손을 마주 잡았다.

“모든 것을 망각한 채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것도 축복이라면 축복이겠군요. 나중에 그를 한 번 만나러 가보는 것도 좋겠어요.”

시아는 대답 없이 설핏 웃었다. 그의 가슴팍에 기대어, 자신이 빚어낸 사도가 다시금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며 한참을 창가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긴 꼬리별이 된 미옌의 빛이 아스라이 사라졌을 때였다.

시아가 라크시스의 셔츠 깃을 붙잡아 당겼다.

“라크, 지금 우리가 뭐 하고 있던 중인지는 기억나요?”

라크시스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민 자신의 아내가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또 반쯤 헐벗은 그 차림이 너무나도…….

“아, 제가 숙녀분을 앞에 두고 무례를 저질렀군요.”

라크시스는 무릎을 꿇고 시아의 신발을 벗긴 후, 그녀를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

“사과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사과는 성의를 봐서 받아드릴게요, 신사분.”

침대에 누운 시아가 그녀의 옆자리를 툭툭 쳤다. 해가 중천이니 자자는 뜻은 분명 아닐 테고.

시아는 살랑살랑 눈웃음을 치며 라크시스의 베스트를 슬쩍 잡아당겼다.

라크시스의 등골을 타고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이렇게 완벽한 인생이 또 있을까.

‘행복해서 미칠 것 같군.’

라크시스는 시아를 꽉 끌어안았다.

“사랑합니다. 시아.”

설핏 미소 지은 시아는 곧 라크시스의 목덜미에 팔을 걸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도 사랑해요. 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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