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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91)화 (291/292)
  • 291화 

    “시아야.”

    알버트의 나긋한 부름에, 그의 어깨를 구경하던 시아는 번쩍 정신이 들어 말을 더듬었다.

    “어? 어, 어어…….”

    “잔느 강에서 열리는 이번 조정 경기, 보러 올 거지?”

    시아는 새빨개진 귀를 들킬세라 요란하게 주먹을 쥐며 고개를 끄덕여댔다.

    “그럼! 내가 네 경기는 늘 보러 갔었잖아.”

    “하긴, 네가 오지 않았던 경기는 단 한 번도 없었지.”

    승마나 조정 같은 종목은 늦봄이나 초가을에 한두 번 정도 경기가 열리지만 사격 등의 다른 종목은 실내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아마추어 대회도 자주 있었다.

    시아는 경기가 있을 때마다 한 번도 빠짐없이 알버트를 응원하러 갔다.

    “그나저나 다행히 졸업 전에 네가 이끄는 팀이 출전하게 되긴 했네.”

    “사실 황자 전하께서 계속 계셨더라면 어려웠을 거야. 여러모로 출중한 분이시니까.”

    갈리프도흐 아카데미 조정 클럽의 명실상부 최고의 조정 선수인 황자 헬릭스. 조정이 팀 스포츠라고 하나, 남들보다 월등한 체력과 뛰어난 리더십을 가진 헬릭스가 통솔하는 조정 팀은 언제나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황자가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던 지난 구 년 중 조정 클럽에서 활동한 사 년 동안, 갈리프도흐 아카데미 조정팀은 단 한 번도 전국구 주니어 경기에서 우승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헬릭스는 작년에 졸업하여 이번에 모르간 제1 대학, 통칭 갈리프도흐에 입학했다.

    사람들은 한때 리더가 사라지게 된 갈리프도흐 아카데미 조정 팀의 연승 기록이 깨질까 봐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아주 시기적절하게 새로운 주장이 나타난 덕에 아카데미 조정 팀의 신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알버트도 조정 클럽에 꽤 오래 있었는데 말이야. 다들 황자 전하의 팀에만 잔뜩 기대하고. 알버트도 가만 보면 진짜 괜찮고 강단 있는 애인데. 알버트의 팀도 성적이 늘 괜찮았단 말이야.’

    황자의 이야기만 나오면 알버트는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시아는 저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알버트의 양어깨를 꽉 붙잡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냐! 내 눈엔 네가 더 훌륭한걸! 네가 리드하니까 다들 잘 따라온 거야. 알버트, 자신감을 가져!”

    알버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하하!”

    곧 청량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알버트가 정말 즐겁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웃자, 시아의 뺨이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시아는 살짝 삐져 버려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기껏 응원해 줬는데 말이야. 사람 민망하게 웃기나 하구.”

    “아냐, 덕분에 정말로 힘이 났어. 고마워, 시아야.”

    알버트는 제 어깨를 쥔 시아의 손을 떼어내고, 신사가 숙녀에게 하듯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시아도 움찔거리기만 할 뿐 그를 피하진 않았다.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뭐 하는 거냐고 팔짝 뛰던 처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럼 헬릭스 전하랑은 경기에서 마주치게 되는 거야?”

    “혹시 내 팀이 질 것 같아서 그래?”

    “아니! 그건 아니고…….”

    “괜찮아. 어차피 시니어와 주니어는 서로 경기가 달라서.”

    조정을 좋아하는 황자가 이번에도 대회에 나온다는 소식이 있었지만, 조지 로열 로잉 대회에는 주니어와 시니부가 나뉘어 있어 대학 클럽 소속인 황자의 팀이 아카데미 소속인 알버트의 팀과 함께 겨룰 일은 없게 되었다.

    ‘실은 프로팀이 와도 상관은 없지만.’

    알버트는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능청스럽게 시아의 뒤로 가 품에 안았다. 소꿉친구로 위장한 대마법사는 시아의 어깨에 고개를 슬쩍 걸치며 그녀의 귓가에 중얼거렸다.

    “그럼 나 보러 와주는 거, 맞지?”

    “당연하지. 대신 이 고개는 좀 떼고 말하는 게 어떨까?”

    “너무해. 소꿉친구인데 이 정도도 못 해? 나 응원해 준다면서.”

    “무거워어! 네 고개가 무겁다구!”

    그러나 알버트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시아의 등에 달라붙어 늘어져 있었다.

    “이렇게 조금만 더 있을래. 시아야, 나 응원해 준다며. 나 이따가 연습도 가야 하는데.”

    “연습이랑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얘가 뭘 먹고 이렇게 컸나. 알버트! 무거워, 진짜 무겁다니까?”

    시아는 축 늘어진 알버트의 고개를 낑낑거리며 떼어내곤 그의 가슴팍을 두드리며 한참 동안 투덕거렸다.

    햇살이 비쳐 투명하게 빛나는 나무들 밑에서 블레이저를 입고 웃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청춘을 찍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그리고 돌아온 다음 주 토요일, 주장 알버트 조지 랑케가 이끄는 갈리프도흐 아카데미 조정 클럽팀 골든 클로버는 조지 로열 로잉 대회 주니어 부문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 * *

    “와,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아카데미 졸업 전에 그런 일들이 있었지.”

    시아는 시린 손을 호호 불며 키득거렸다.

    새하얀 반팔 유니폼에, 땀에 젖어 이마로 자연스레 흘러내린 포마드 머리. 조정 대회의 소란과 이목을 피해 작은 배에 단둘이 숨어 앉아선 잔느 강을 유유히 가로질렀던 그 옛날의 기억.

    그러다 배가 뒤집혀 수상 구조대를 부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버린 서로의 몰골을 보며 또다시 깔깔거렸더랬지.

    메달은 강에 빠트려 잃어버려 놓고도 뭐가 그리 좋았는지, 한동안 둘이서 조정 대회 때의 이야기를 그렇게나 했었다.

    시아는 발갛게 상기된 뺨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이 송이송이 내리는 겨울에 떠올리기에 딱인 따스한 기억들이었다.

    그 일로 한동안 알버트와 자신이 사귄다는 오해를 받긴 했으나, 두 사람의 강한 부정으로 소문은 결국 일축되었다.

    그렇게 마지막 클럽 활동을 하고 대학 입학 준비를 하니 어느새 남은 반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알버트는 보온 마법이 걸린 장갑을 시아의 손에 끼워주며 그녀의 콧잔등을 톡 건드렸다.

    “아직도 아카데미 졸업식 생각해? 지금 대학을 졸업하면서?”

    “그땐 너랑 아주 떨어지는 줄 알아서 그랬지. 이렇게 회복학과까지 같이 다니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알버트는 시아가 하늘을 올려다보다 떨어트린 학사모를 주워 시아에게 다시 씌워주었다. 한두 번이 아닌 듯 시아는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적당히 잔머리를 빼내어 그럴싸하게 모양까지 내주어 학사모를 쓰고도 완벽한 스타일을 만들었다. 시아는 성에로 부예진 강당의 유리창에 제 모습을 대충 비춰보았다.

    비치는 건 흐릿한 실루엣이 전부였으나, 시아가 직접 학사모를 썼을 때보다 훨씬 단정하고 예뻤다.

    역시 알버트라니까? 시아는 오랜 소꿉친구의 실력에 감탄하며 눈썹을 까딱였다.

    알버트는 그런 시아의 뒤에 천천히 다가서며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긴 시아 너랑 너무 오래 같이 있긴 했다. 십 년이 뭐야, 거의 이십 년을 알고 지낸 셈이잖아?”

    그때, 시아가 홱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넌 싫어?”

    방금 전 알버트의 말에 심기가 불편해지기라도 했는지 그녀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뭐가?”

    “…알버트 랑케. 나랑 학교 계속 같이 다닌 거 싫냐고.”

    시아는 영문모를 날카로움에 알버트가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시아는 그 이유는 말해주지 않은 채 알버트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다 알버트 저 애가 잘난 탓이다. 시아는 그녀의 소꿉친구가 만인에게 인기가 있다는 사실을 지난 대학 시절 동안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그와 자신은 언제까지나 소꿉친구일 거라 자신했는데, 그의 곁에 다른 여자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니 가시에 찔린 듯 심장이 아팠다.

    알버트와 가장 오래 알고 지낸 건 난데, 그 애가 머리카락을 만져주는 건 나뿐인데.

    그러나 알버트는 단 한 번도 시아를 친구 이상으로 대해 준 적이 없었다. 다른 여자애들을 시아처럼 대해 주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아에게 사귀자 말하거나, 마음을 고백을 한 적은 없었다.

    차라리 내가 먼저 고백해 버릴까. 시아는 한 때 그렇게 생각했으나 혹시라도 알버트가 자신의 고백을 거절할까 봐, 고백이 거절당하면 두 번 다시 예전의 소꿉친구 사이로도 돌아갈 수 없을까 봐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알버트 랑케와 미묘한 관계로 지낸 지가 벌써 스무 해가량.

    알버트는 한참을 대답 없이 서 있었다. 불안해진 시아가 알버트에게 뭐라고 말 좀 해보라며 보채기 직전이었다.

    “시아야. 내가 뭐라고 말할 것 같아?”

    시아는 덜컥 목소리를 삼켰다. 평소처럼 장난스럽지도, 능청스럽지도 않다. 지금 알버트의 얼굴엔 그녀처럼 속이 끓고, 애가 타고, 무언가를 억누른 사람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화기애애한 졸업식의 소음들이 눈송이와 함께 너른 캠퍼스에 소복이 쌓인다. 시아와 알버트의 주변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1월의 겨울처럼 파르라니 차갑고 깨끗한 알버트의 눈동자에 시아의 얼굴이 가득 담겼다. 알버트는 오직 시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해.”

    “…뭐?”

    “좋다고.”

    “…뭐가.”

    시아는 차마 장난치지 말라고 핀잔을 줄 수 없었다. 그동안 소꿉친구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들어가며 아슬아슬한 관계를 얼마나 오래 유지해 왔던가.

    좋다는 건, 나인 걸까.

    이건 고백인 걸까……?

    알버트가 한 발짝 성큼 다가왔다. 시아는 움찔거리며 한 발짝 물러섰다. 새하얗게 뒤덮인 뒤뜰 화단에 그들의 발자국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검은 벨벳 가운을 입은 그에게서 이상하리만치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시아는 다가오는 알버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다, 결국 눈을 감았다.

    나, 오늘 얼굴 괜찮나?

    코끝이 스친다. 그의 이마가 시아의 이마에 살짝 닿았을 때였다.

    알버트가 키득거리며 떨어져 나갔다.

    “너랑 같이 학교 다닐 수 있어서 좋았다고. 시아야, 혹시 딴생각한 건 아니지?”

    뭐? 시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무, 무슨 소리야. 나도 그 생각 한 거거든? 얘가 뭐래.”

    “거짓말. 너 내가 고백하는 줄 알았지?”

    “아니거든! 얘가 정말!”

    것봐, 내가 알버트 랑케에게 뭘 기대하겠어!

    시아는 전신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선 알버트의 가슴을 마구마구 두드렸다. 알버트는 재밌어죽겠다는 듯 깔깔거리면서도 시아의 주먹을 받아주었다.

    시아는 부끄러워 미칠 것 같아 결국 저 멀리 도망치고 말았다.

    차가운 눈송이를 한참 맞은 후에야 겨우 진정한 시아는 알버트를 데리고 교정 한 편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그럼 넌 이제 뭐 할 거야? 나야 의술원에 가지만, 알버트 너는…….”

    “글쎄. 아, 맞다. 나 최근에 이런 편지를 받았는데, 한번 볼래?”

    알버트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코트 주머니에서 나온 것치고 지나치게 빳빳한 것이, 마치 널찍한 서랍에 고이 모셔두었다가 갓 꺼내 든 종이 같았다. 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편지를 받아 들었다.

    [합격통지서

    수신인 : 미스터 알버트 조지 랑케

    귀하는 우수한 성적으로 자격시험을 통과하여 갈리프도흐 산하 ‘황립 의술원’의 수련의 과정을…….]

    합격통지서라니. 시아는 얼떨떨한 뒤통수를 붙잡고 있다가 뒤늦게 생글생글 웃고 있는 알버트를 발견했다.

    “뭐야, 알버트! 와, 내가 지금까지 널 얼마나 신경 썼는데 지금까지 이걸 비밀로 했던 거야? 와, 진짜 정말!”

    “하하, 졸업식에서 너 놀라게 해 주려고 했지.”

    “야, 이건 배신이라니까? 알버트 네가 의술원 떨어졌다고 해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너한테……!”

    알버트는 결국 또다시 시아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내내 헤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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