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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90)화 (290/292)

290화 

라크시스는 광룡의 봉인을 찾으러 다니던 때와는 또 다른 의미의 고생길을 걷게 된 것에 다시 한번 한숨을 푹 쉬었다.

“어쨌든 시아와 함께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군. 그녀의 모든 순간을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야.”

“자네도 그거 병인 거 알지? 집착은 좋지 않아.”

“아하, 그러는 자네는 집착의 뜻을 모르는 것 같군.”

라크시스와 요르문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아니, 막 시작되려고 하던 참이었다.

“허허, 두 분께선 여전하시군요.”

나이 든 집사의 구름 같은 웃음소리가 그들의 눈싸움을 멈추게 했다.

“헤이든?”

요르문은 아주 살짝 열린 문 틈새로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노집사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나 다가갔다.

“노크도 없이 무슨 일인가?”

“여러 차례 문을 두드렸으나 담소가 깊어지신 탓에 듣지 못하신 듯합니다. 집사된 몸으로 노크 없이 문을 연 것은 죄송하오나, 일단 고대 마법사님께서 어서 자리를 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였다.

“아버지!”

이크. 요르문과 라크시스의 눈이 마주쳤다. 라크시스는 서둘러 공간이동마법을 발동시켰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문이 벌컥 열리며 해맑은 표정의 시아가 나타났다.

요르문은 달려오는 시아를 와락 끌어안으며 딸을 기쁘게 반겼다.

“시아야! 시내에는 잘 다녀왔니? 친구들이랑 맛있는 건 많이 먹었고? 어디 보자, 엥? 얼마 안 썼구나. 돈이 모자랐나? 아버지가 용돈 많이 준다고 했잖니.”

“그게 아니라 더 먹으면 배가 터질 것 같아서…….”

“재밌게 놀긴 했고?”

“…네.”

배시시 웃는 양딸은 정말로 귀여웠다. 누님과 똑 닮은 어린아이라니. 닮은 게 아니라 시아 켈튼 본인이었지만 말이다.

이런 감정이 들 때마다 요르문은 자신이 시아를 양딸로 맞이한 것이 시간선이 만든 거대한 운명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인연이 아니고서야 과거와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데도 누님을 양딸로 맞이한 것이 이렇게까지 기꺼울 수 없을 테니까.

요르문은 반묶음 한 시아의 머리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머릿결을 따라 쓰다듬으며 흐뭇하게 말했다.

“그럼 됐네. 아주 잘했다.”

시아는 다시 한번 배시시 웃고는 가방에서 조그마한 주머니를 꺼냈다.

“아, 이건 아버지 선물이에요.”

주머니에 든 건 아주 작은 태엽 새였다. 그리 정교하지도, 모양이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어린아이의 눈으로 나름 고르고 골라 사 왔을 법한 그런 수준의 장난감이었다.

등에 달린 태엽 장치를 돌리자 새의 날개가 펄럭이듯 움직였다. 많고 많은 선물 중에서 시아가 태엽 새를 고른 건 아마도 요르문이 태엽과 나사라면 정신을 못 차리는 골방 마도 공학자이기 때문일 터였다.

그리고 실제로 요르문은 시아의 예상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시아야.”

“…혹시 마음에 안 드시나요?”

마음에 안 들 리가. 너무 좋아서 미쳐 버리겠는걸.

내 딸이, 시아가, 나한테, 처음으로, 선물을!

결국 요르문은 참지 못하고 시아를 꽉 끌어안았다.

“아버지, 숨 막혀요!”

“시아야아. 네가 나한테, 선물을……! 이 아버지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 넌 알겠니이이!”

헤이든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허허 웃었다. 그리고 부녀가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 * *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어느덧 시아가 아카데미 졸업반이 됐을 때였다.

“대박, 카트린, 이것 봐! 너 여기까지 읽었어? 고대 마법사랑 로렌 허슬러랑 글레이셜 홀에 단둘이 갔대! 이거 둘이 완전 사귀는 거 아냐? 슈나이더 경감은 어떻게 하고?”

“아, 마리! 정말! 나 거기까지 안 읽었는데 뭐 하는 거야, 진짜!”

갈리프도흐 아카데미의 도서관 한구석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끄러웠다. 구 년 내내 같은 자리를 전세 내듯 차지하고 있는 세 학생 때문이었다.

고전 명작이라 불리는 앨런 어셔의 연작의 팬인 마리와 카트린, 시아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앨런 어셔의 소설을 읽고 있었다.

책장이 닳도록 읽고 또 읽었으면서 이들이 마치 새로운 책을 읽듯이 반응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전 명작이라는 표현이 무색하게, 앨런 어셔의 연작은 현재까지도 꾸준히 출간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앞뒤가 안 맞는 상황 같으나 이는 진짜 실제 상황이었다. 과거 작고한 앨런 어셔의 집을 정리하던 중, 그의 유족이 앨런 어셔의 서재에서 수수께끼 같은 암호를 발견했고 그 암호를 따라가니 앨런 어셔의 미공개 원고 한 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 미공개 원고 맨 마지막 장에는 또 다른 암호가 적혀 있었고, 수년을 들여 암호를 풀어낸 결과 또 다른 미공개 에피소드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앨런 어셔의 연작은 그가 죽은 지 이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히 출간되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 카트린. 도서관에선 조용히 하자, 응? 지난번처럼 사서 선생님 오시면 또 혼난다구.”

“시아야, 난 슈나이더 경감이 좋아. 이런 사내 느낌 물씬 나는 남자가 좋단 말이야! 하지만 라크시스 옌도 좋은데. 아, 어쩌지? 둘 다 못 놓겠어!”

시아의 팔에 매달려 슈나이더 타령을 하는 마리안을 보고 카트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쯧쯧, 저러니 눈이 하늘에 가 있지. 얘, 마리안. 정신 차려. 그거 다 활자란다. 현실에 그런 남자 없어.”

그러나 마리안의 사랑은 카트린의 잔소리에도 끄떡없었다. 볕 좋은 창가에 앉아 책을 읽으며 오렌지 블론드를 배배 꼬던 마리안이 재깍 반박하고 나섰다.

“없긴 왜 없어? 헬릭스 황자가 있잖아! 패트릭도 서글서글하니 귀엽구, 알버트 걔도 싸가지는 없지만 냉미남 스타일인데다가 잘생겼잖아. 걔 수업 중에 손가락으로 안경 끌어 올리는 거 봤어? 완전 얼음 왕자라니까? 어떻게 졸업반이 될 때까지 내내 똑같…….”

그때였다.

“안녕?”

“왁!”

불곰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뒤를 돌아본 마리안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가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도서관 이용객들의 눈총보다도 무서운, 문제의 그 남자 알버트 랑케가 책장에 느슨하게 기댄 채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안녕. 알버트?”

“그래, 안녕. 미스 로젠버그.”

“여, 여긴 무슨 일이야?”

방금 전까지 알버트에 대해 떠들어대던 마리안은 덜덜 떨며 물었다. 카트린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마리안을 구경하고 있었다.

“마리안 네 소리가 나길래 와봤어.”

“나, 나아?”

이게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미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마리안이 유일하게 멀리하는 미인이 있었으니, 바로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알버트였다.

특유의 서늘한 분위기와 빙벽 같은 테두리를 두른 소년은 대학 입학을 코앞에 둔 지금까지도 또래 사이에서 얼음 왕자라는 유치하고도 적절한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나를, 왜……?”

카트린은 고장 난 오토마톤처럼 삐걱거리는 마리를 무시하고, 책장 뒤에 멀뚱히 앉아있던 시아를 잡아당겨 알버트 앞에 내밀었다.

“알버트. 시아 여기 있어.”

“야아! 카트린!”

“고마워, 미스 피셔.”

알버트는 놀란 토끼 눈이 된 시아를 마주하곤 싱긋 웃었다.

시아를 앞에 두고 설산이 녹아내린 듯 순식간에 피어나는 소년의 미소에, 마리안은 겁도 없이 중얼거렸다.

“어머, 역시…….”

시아는 재깍 손사래를 쳤다.

“아냐, 절대 아냐. 내가 그랬지! 알버트는 그냥 소꿉친구라고.”

“맞아, 우린 그냥 친구인걸. 그래서 말인데 실례가 안 된다면 내 소꿉친구를 좀 빌려 가도 될까?”

‘소꿉친구는 무슨.’

카트린은 속으로 피식거렸다.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 이 명제가 만약 참으로 판명 난다면, 그 근거의 구 할은 저 둘 때문이라고 감히 자부할 수 있었다.

사실 알버트가 시아의 그림자처럼 곁을 맴돌며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이나 할 법한 짓거리들(카트린은 알버트의 수작들을 언제나 ‘짓거리’라고 표현했다)을 할 때부터 알아봤다.

예컨대 도서관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책을 꺼내려던 시아가 균형을 잃고 넘어지자 마법처럼 시아를 받아안았다든가, 우연을 가장하여 수업 때마다 시아의 옆자리에 앉는다든가, 승마 클럽장의 권한을 남용하여 일부러 시아가 자주 다니는 길목의 교정을 말을 타고 달린다든가 하는 짓거리들 말이다.

아, 사격 클럽에 가입하자고 꼬셔서는 방과 후마다 단둘이 사격장에 남아 연습한 것도 추가해야 했다.

거기다 알버트가 어찌나 철저하게 준비해 다니는지, 잔디밭에 앉을 때마다 시아의 자리에 손수건을 깔아주기도 했다.

학년말마다 열리는 댄스파티의 파트너는 물론이요, 현 아카데미 학생회장인 알버트 랑케의 학생회 파트너이자 공공연한 비밀 연인으로 소문이 쫙 나 있으니, 이 정도면 말을 다 했지.

문제는 시아 역시 알버트와 이런 식으로 엮이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싫어하다마다. 알버트가 진짜 도련님, 진짜 신사 같다며 좋아하기까지 했지.’

눈치가 더럽게 없어 자신이 연애를 하고 있단 것도 모르는 게 시아의 문제라면 문제랄까. 시아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알버트에게 길들여지고 있었다.

어느덧 초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도서관 밖의 나무들이 짙은 푸름을 하나둘 입기 시작했다. 테니스 클럽의 라켓 소리가 청명하게 울렸다.

‘벌써 그때인가.’

이맘때의 잔느 강 인근은 연례행사 준비로 활기를 띠고 있을 터다. 카트린은 알버트가 시아를 왜 찾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럼 제발 좀 데려가 줄래? 우리 책 좀 읽게.”

“미안해. 시아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텐데.”

“소꿉친구분이 오셨는데 평범한 동급생이 막을 수 있겠어?”

카트린의 심드렁한 대답에 알버트가 키득거렸다.

“시아야, 잠깐 시간 돼?”

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버트를 따라나서면서도 카트린에게 속삭이듯 으름장을 놓았다.

“카트린! 먼저 읽었다고 뒷 내용 말하기 없기다!”

“그래, 그래. 얼른 가.”

결국 시아는 알버트와 함께 사라졌다.

연신 어머, 어머, 거리는 마리안을 두고 카트린은 다시금 책에 고개를 파묻었다.

* * *

“알버트, 무슨 일인데 그래?”

“시아야. 다음 주 토요일에 시간 괜찮아?”

나야 네 일이라면 언제나 시간이 되지. 하마터면 그렇게 대답할 뻔했던 시아는 뒤늦게 제게 다음 주 주말에 일정이 있었는지 기억을 하나씩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다음 주 주말이라. 흐음. 마리, 카트린이랑 서점 달리아에 가는 건 수업이 끝난 후 언제든 가능한 일이고. 갈리프도흐의 회복학과에서 주최하는 설명회는 토요일이고. 토요일? 아, 맞다. 아버지와 황궁 연회에 가는 건 이번 주 일요일이지.

다음 주 토요일?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러다가 시아는 문득 클럽들이 즐비한 아카데미 별관에서 나부끼던 현수막을 떠올렸다.

“맞다, 너…….”

“응. 나 조지 로열 로잉 대회에 참가해.”

얼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만 보면 야외활동이라곤 단 한 번도 해보지 않고 살아온 것 같은 도련님 같은 느낌인데, 알버트는 예상외로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

‘옛날에 비하면… 알버트도 많이 컸네.’

시아는 사춘기를 지나 어느덧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진 알버트를 올려다보았다. 어릴 때는 엇비슷했던 것 같은데, 여자애들 중에서도 큰 축에 속하는 시아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크다니.

어디 키뿐이랴. 시아는 무의식중에 알버트의 어깨를 훑었다.

언제 저렇게 반듯하게 벌어졌을까. 눈으로 훑는 데만 한참이 걸린다. 그렇다고 과하게 우락부락한 몸집도 아니다.

호리호리한데 잔근육이 적절히 붙어있는 것이 균형이 잡혀 아름답다는 점에서 정말이지 조각 같은 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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