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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89)화 (289/292)
  • 289화 

    “뭐야, 어떤 자식이야!”

    앨리어스는 버럭 소리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가 화들짝 굳어버리고 말았다.

    “알버트 랑케!”

    정체불명의 대마법사 소년, 알버트 조지 랑케가 서늘한 기운을 풍기며 서 있었다.

    열두 살 동갑내기의 악력이라곤 상상할 수 없는 힘이었다. 앨리어스는 피가 안 통하기 시작한 손목에서 알버트의 손을 떼 내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알버트는 앨리어스의 손목을 붙잡은 채 그를 무시하고 시아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안녕, 시아야?”

    “…알버트.”

    “뭐, 뭐야. 알버트랑 잡종이랑 둘이 아는 사이야?”

    알버트가 앨리어스의 손목을 놓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앨리어스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이번엔 진짜 맞는 줄 알고 한껏 졸아 있었던 시아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알버트를 끌어당기며 앨리어스에게 당당히 소리쳤다.

    “바보야, 서로 당연히 알지. 얘, 내 친구거든. 그렇지, 알버트?”

    그러자 알버트의 푸른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의 동조를 바라는 소녀를 잠시 바라보던 은발의 소년은 곧 해사한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주 친한 친구지.”

    * * *

    점심시간이 한창인 아카데미 건물 뒤편의 화단. 시아와 알버트는 등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차양 밑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아까 친구라고 말해 줘서 고마워.”

    불러내서 무슨 말을 하나 싶었는데, 고맙다는 인사였단 말이지.

    알버트는 그녀의 동그란 정수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슬쩍 미소 지었다.

    그녀의 과거에 최대한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까는 저도 모르게 손이 움직이고 말았다. 만약 거기서 앨리어스가 시아를 때렸다면 앨리어스의 앞길은 영원히 엉망이 되어버렸을 터다.

    정체불명의 소년 알버트 조지 랑케는 앨리어스 콘힐이라는 말썽쟁이로 하여금 취직은 물론이고, 당장 졸업도 힘들게 만들 수 있었으니까.

    어찌 보면 알버트의 개입은 장기적으론 여러 사람의 인생을 살렸다고도 할 수 있었다.

    시아는 내내 교정의 화단 흙을 발끝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알버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사실을 말했을 뿐인걸. 너랑 나는 친구니까.”

    “하지만 우리 별로 안 친하잖아.”

    어라?

    알버트, 그러니까 시아 켈튼과 동갑내기인 열두 살의 알버트 조지 랑케로 분한 라크시스는 과거의 약혼녀이자 미래의 아내요, 아직은 아무 사이도 아닌 그의 연인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우리 별로 안 친하잖아.

    우리 별로 안 친하잖아…….

    그렇게 시아 켈튼의 곁을 맴돌며 눈도장을 찍었는데, 안 친하다고? 지금 너랑 내가 안 친하다고 한 거야?

    알버트 조지 랑케가 그렇게나 켈튼저에 자주 찾아갔었는데? 켈튼 저가 낯선 아가씨가 겁먹지 않도록, 너와 최대한 자연스럽게 마주칠 수 있도록 네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면서 정원이고 주방이고 다락이고 얼마나 오랫동안 숨어서 기다렸는데?

    물론 그 성과가 그리 좋진 않았지만, 그래도!

    알버트 조지 랑케가 네게 쿠키도 가져다주고 꽃도 꺾어다 줬잖아. 직접 만든 오르골도 가져다주고 오토마톤 인형도, 보석도 가져다줬잖아.

    ‘물론 인형보단 인형의 관절이 움직이는 원리를 찾아보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만.’

    라크시스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잠시 붙잡고 있다가, 이내 얼굴에 그림 같은 미소를 덧씌웠다.

    “이제부터 친해지면 되겠네. 그렇다면 우린 진짜 친한 사이가 되는 걸 테니까.”

    그러자 시아가 손가락을 꼬물꼬물 움직이더니, 알버트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나 같은 애랑 친구 해도 괜찮겠어?”

    라크시스는 어안이 벙벙했다.

    마리안 로젠버그, 카트린 피셔와는 하루 만에 친구가 되어놓고, 앨리어스 콘힐은 이틀 만에 성격을 파악해 도발해 놓고선 자신과 친구가 되는 것은 이렇게 힘들어한다고?

    그러나 라크시스는 그 모든 감정들을 꾹꾹 누르고 우아하게 대답했다.

    “시아 켈튼 같은 숙녀에게 친구가 되어달라 청할 수 있다니, 내가 오히려 더 영광인 걸.”

    그때, 시아의 표정이 잠시 멍하게 변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아하하! 너 말투가 정말로 신기해!”

    …내가?

    “알버트 넌 진짜 도련님 같네. 고전 소설에 나오는 옛날 귀족들 말이야.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앨리어스 콘힐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완벽한 신사 같다고 말이야.”

    아, 그렇단 말이지. 라크시스는 심사가 꼬여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시아가 그의 눈치를 보며 슬쩍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 같은 애가 가까이 가면 안 될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너도 알다시피, 나 아버지의 친딸이 아니잖아.”

    아하. 그런 거였나.

    라크시스는 그제야 시아가 왜 자신을 피했는지, 자신과 친하지 않다고 했는지 알아차렸다.

    강단 있어 보여도 지금의 시아는 아직 열두 살의 정신을 가진 어린아이였다. 아무래도 앨리어스 콘힐의 잡종이라는 소리, 켈튼의 피가 이어지지 않은 켈튼 아가씨라는 사실이 어린 시아에게 많은 부담과 상처가 되어왔던 모양이었다.

    라크시스는 어린 시아에게 무어라 위로를 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러나 그런 고민들이 무색하게 시아는 곧 멋쩍게 웃으며 코끝을 긁었다.

    “…미안, 내가 너무 크게 웃었나? 음, 그렇지만 난 그런 네 모습이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했는걸.”

    그렇게 말을 고르던 시아는 한 번 고백을 시작하자 말문이 제대로 트였는지 눈을 질끈 감고 속마음을 토해 냈다.

    “사실 나 알버트 네가 좋아. 이렇게 말하니까 좀 그런가. 그냥, 입학식 날 널 처음 봤을 때부터 너랑 친구 하고 싶었어. 네가 잘생겨서 그런 건 아니고, 아, 잘생겨서 그런 것도 있는데. 그게 그냥 네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데 이런 말 해도 되는 건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해놓고 뒤늦게 눈치를 본다. 라크시스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그녀의 성격에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러니까, 어쨌거나 시아 켈튼은 자신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그것도 처음 봤을 때부터. 첫눈에.

    라크시스는 안경을 고쳐 올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그럴 수 있지. 난 괜찮아.”

    시간 여행을 하던 시아 켈튼이 괜히 저와 이어진 게 아니었다. 그의 외모가 시아 켈튼의 취향과 부합한 것이다. 거기다 그 외모를 뒷받침할 몸가짐은 덤이고 말이다.

    게다가 그녀는 앨런 어셔의 연작을 읽으면서 라크시스 옌이라는 대마법사 캐릭터가 제일 좋다고도 했었다.

    오만하고 재수 없는 성격마저 신사 같고, 그러면서도 로렌 허슬러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습이 순정적이라 마음에 든다고 했다.

    물론 이 또한 시아가 도서관 구석에 앉아 마리안 로젠버그와 카트린 피셔와 함께 떠들던 것을 엿들어서 알게 된 것이었다.

    “아까 웃은 건 널 놀리려던 게 아니라 진짜로 신기해서 그랬어. 알버트 넌, 뭐랄까. 정말 예쁘게 생겼잖아. 그런데 말투도 고상하니까 뭔가 진짜 도련님 같아서…….”

    “너도 귀족 아가씨인걸. 레이디 시아 켈튼.”

    “그렇게 말해 주는 건 너밖에 없는데.”

    “진짜인데. 진심이기도 하고.”

    다시금 열두 살 알버트의 가면을 쓴 라크시스는 토라진 듯 입술을 삐죽 내밀며 눈썹을 까딱거렸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언제나 조각 같은 표정만 짓던 알버트에게서 처음으로 감정을 발견한 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아는 손을 척 내밀었다.

    “좋아, 잘 부탁해! 친구 알버트!”

    “나도 잘 부탁해, 시아 켈튼.”

    라크시스는 시아와 악수를 하며 생각했다. 지금껏 그토록 켈튼 저를 드나들면서 단 한 번도 잡아보지 못한 그녀의 손이 이렇게 먼저 찾아올 줄이야.

    그때, 아르카나 시계탑의 종소리와 똑 닮은 종소리가 교정에 울려 퍼졌다.

    “아, 수업 시간 다 됐네. 시아야, 일단 들어갈까?”

    “응!”

    적절한 타이밍에 울려준 수업 종소리 덕분에 알버트는 악수를 하던 그대로 시아의 손을 잡고 교정을 가로질렀다.

    “그런데 알버트, 내가 널 이름으로 불러도 돼?”

    “지금까지 그렇게 불러놓고 무슨 소리야. 그렇게 따지면 나도 널 처음부터 이름으로 불렀는걸.”

    “아, 그렇네.”

    긴장이 풀린 시아 켈튼이 교실로 가는 내내 재잘거린다. 알버트는 일부러 교정을 빙 돌아갔다. 비록 교수님에게 종이 친 후에 교실에 들어왔다며 혼나긴 했지만, 소녀와 소년은 혼이 나면서도 들뜬 마음을 쉬이 가라앉히지 못했다.

    * * *

    “뭐? 이제야 겨우 손을 잡았다고? 맙소사, 자네!”

    요르문 켈튼은 박장대소했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고대 마법사가 인상을 찡그렸으나, 요르문의 웃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적당히 웃지?”

    “하지만, 푸흡, 자네가 그 얼굴로 내 딸을 꼬시는 데 실패했다고 하니, 풉.”

    결국 라크시스는 요르문의 입을 마법으로 막아버렸다. 풀로 붙인 듯 꽉 붙어버린 입술에 먹먹한 괴성을 지르던 요르문은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한 라크시스에게 싹싹 빌고 나서야 겨우 마법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라크시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도통 종잡을 수가 없어서 그래. 어린 날의 시아는 내가 알던 시아와 꽤나 다른 것 같더군.”

    “당연하지. 놀라운 속도로 정보를 빨아들이고 있지만 시아는 아직 어린애나 다름없으니까. 갈리프로서의 기억을 잃고 이 시대에 떨어지면서 갓난아이나 다름없는 정신이 된 거겠지. 겉모습이 성숙하다고 해서 시간 여행을 하던 누님을 떠올리면 안 되지.”

    실제로 시아는 고아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에도 또래보다 성숙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고아원 원장에 따르면, 으슥한 길거리에서 아이를 처음 발견했을 때만 해도 체구가 작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 기껏해야 여섯 살이 될까 말까 싶어 여섯 살이라고 나이를 정해 줬는데 얼마 안 가 말이 유창해지고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버려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그런 시아를 양딸로 데려오던 날, 요르문은 왜 평행세계의 자신이 시아를 입양했는지 깨닫고 말았다.

    호기심이었다.

    평범함의 범주를 벗어나 놀라울 정도로 지식을 빨아들이며 성장하는 아이에 대한 호기심과 동질감. 아이의 정체를 몰랐던 평행세계의 요르문은 분명 그 모습에서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영특하고 아름다우나, 가족이 없어 홀로 세상을 살게 된 아이에게서 거울처럼 자신을 비춰보았을 터다.

    라크시스는 어느덧 팔불출이 다 된 요르문을 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소파에 풀썩 앉았다.

    “잔소리는.”

    “이게 바로 아버지의 심정이라는 거다.”

    “이젠 누님이라고 안 부르나?”

    “뭐든 상관없잖아. 그렇지만 지금이 아니면 이렇게 귀여운 딸을 언제 가져보겠어.”

    라크시스는 인상을 잔뜩 찡그린 눈으로 요르문을 흘겨보았다.

    시아 켈튼의 정체를 모른다면 모를까, 그녀가 갈리프이며 시간 여행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저렇게 딸처럼 생각할 수 있다니.

    ‘다른 의미로 단단히 돌아버린 변태 같기도 하고.’

    누님을 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걱정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요르문은 자신의 양딸 시아 켈튼에게 금방 적응했다.

    이번엔 라크시스가 멀쩡히 살아있는데도, 요르문은 걸핏하면 시아를 찾아가 비어버린 애정을 충족시키곤 했다.

    한 번은 어린 시아가 켈튼저 사용인들의 응원을 한 몸에 받으며 요르문의 서재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아버지, 오이 샌드위치 드세요. 제가 만들었어요.’

    그날, 샌드위치에 보존 마법을 걸어 영원히 보관하겠다고 난리를 친 요르문을 진정시키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리고 결국 샌드위치는 라크시스의 입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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