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 외전 - 시아 켈튼의 소꿉친구 】
3571년의 어느 날이었다.
“카트린, 들었어? 오늘 아카데미에 새로운 학생이 온대!”
오렌지 블론드의 곱슬머리를 양 갈래로 질끈 묶은 소녀가 강의실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부채꼴 모양의 계단식 강의실에서 그런 짓을 하는 건 상당히 이목을 끄는 행동이었으나 열두 살의 소녀, 마리안 로젠버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단을 뛰어 올라가 안경을 쓴 채 책에 몰두한 소녀의 옆자리에 요란하게 앉았다.
“마리, 나 책 읽고 있잖아.”
“카트린, 그런 풀떼기 그림만 가득한 책보다 더 중요한 소식이 있다니까? 아카데미에 새로운 학생이 온다구! 그것도 삼학년 반에 말이야!”
그 말에 약초를 사랑하는 열두 살의 카트린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마리를 보았다.
“전학생이야?”
“아니, 내가 새로운 학생이라고 했잖아. 요르문 켈튼의 양녀래. 왜, 있잖아. 대마법사가 입양하기로 결정했다던 그 애!”
요르문 켈튼의 양녀라. 카트린은 얼굴에 비해 지나치게 큰 안경을 추켜올리며 미미하게 인상을 썼다.
저 멀리 강의실 반대편에 몰려있는 남자애들이 마리의 소란을 듣고 쑥덕거리고 있었다. 카트린을 발견한 무리 중 한 명이 카트린을 보고 비웃음을 흘렸다.
꼴 보기 싫은 그 모습에 한숨을 쉰 카트린은 다시금 초록색이 가득한 책에 고개를 푹 박고 중얼거렸다.
“…학기 시작될 때 같이 들어오지, 왜 중간에 들어오고 난리람. 안 그래도 저 녀석들 때문에 공부가 안 돼서 짜증 나는데 말이야.”
카트린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요르문 켈튼의 딸이 벌써부터 성가시면서도 한편으론 안쓰러워졌다.
앨리어스 콘힐. 유서 깊은 콘힐 공작의 손자로, 본인을 대단히 고귀한 핏줄이라 생각하는 저 재수 없고 싸가지 없는 꼬맹이에게 틀림없이 찍힐 테니까.
그리고 카트린의 우려대로 앨리어스 콘힐을 비롯한 한 무리의 아이들은 곧 아카데미에 입학할 요르문 켈튼의 양녀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대마법사의 양녀라고? 그럼 귀족이 아니란 거네?”
“잡종이지, 뭐. 그것도 운이 기가 막히게 좋은 잡종.”
앨리어스가 어깨를 으쓱이자, 무리의 아이들이 낄낄거렸다. 한참을 키득거리던 앨리어스는 돌연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갈리프도흐 아카데미가 어떤 곳인데 잡종 따위가 들어오는 거지? 물 흐려지게 말이야.”
“그래, 앨리어스. 잡종이 어떻게 갈리프도흐 아카데미에 들어오냐구!”
우두머리가 선동하자 추종자들이 맞장구를 친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켈튼의 양녀를 또다시 공연하게 씹어대던 앨리어스가 앉아있던 책상에서 폴짝 뛰어내리더니 교실 중심부로 천천히 걸어갔다.
“알버트, 너는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해? 잡종이 괴짜 대마법사만 믿고 학기 중간에 불쑥 들어오는 이 상황 말이야.”
앨리어스가 찾아간 사람은 은발의 소년이었다.
패거리를 끌고 가 호기롭게 말을 걸었으나,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자 앨리어스는 흠칫 굳어버리고 말았다.
알버트 조지 랑케.
동갑내기의 눈빛이라곤 상상할 수 없는, 서늘하고도 무거운 시선. 무한의 마력을 상징하는 은발도, 조각 같은 얼굴도 모두 잊게 만드는 저 푸르고 차가운 눈동자 앞에선 제아무리 앨리어스 콘힐이라도 기가 팍 죽고 만다.
찰나의 얼음장 같은 표정을 순식간에 지워낸 소년이 천천히 손가락을 들었다. 그러곤 코끝에 걸쳐 있던, 보험사정관의 조수 따위나 쓸 것 같은 안경을 살짝 끌어 올리며 입가에 미약한 미소를 띠었다.
“글쎄.”
앨리어스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잠깐, 고작 안경을 끌어 올리는 애한테 이 앨리어스 콘힐이 쫄았단 말이야?
앨리어스는 순간 욱했으나, 알버트에게 뭐라 할 순 없었다. 알버트 조지 랑케는 할아버지인 콘힐 공작이 척을 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알버트의 머리가 저렇게 반짝이는 은발인 것도 저 애가 엄청난 마법사의 핏줄이라서 그런 거라고 했다.
그런데 은발은 고대 마법사의 상징 아니었나? 레이먼드? 라이놀즈? 라크… 아, 뭐더라.
‘광룡을 물리쳤다던 고대 마법사는 라크시스 옌이었는데.’
이상하게 알버트의 정체를 궁금해할 때마다 머릿속이 엉망이 되고 만다. 그래서 더 찜찜한 것이다.
저 녀석은 모든 게 베일에 싸여 있는 데다가 아무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 소백작인 자신도, 콘힐 공작인 할아버지도 말이다! 그 사실은 앨리어스 콘힐의 자존심을 언제나 구겼다.
그러나 알버트가 다시 한번 앨리어스를 올려다보며 빙긋 웃는 순간.
“만나보면 알겠지. 그 애가 어떤지 말이야.”
“그, 그렇지?”
앨리어스는 말을 얼버무리며 물러났다. 그리고 자신이 알버트에게 쫄아서 굳어버렸다는 사실에 속으로 온갖 욕을 했다.
재수 없는 자식!
앨리어스는 그렇게 제 무리들과 뒤돌아서서 모기같이 작은 목소리로 알버트를 흉보곤 줄행랑을 쳤다.
알버트는 멀어져 가는 앨리어스를 본 체도 안 하고 턱을 괸 채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혼자 슬쩍 웃는 게 아닌가.
이 사태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카트린과 마리는 서로의 얼굴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알버트 조지 랑케는 원래 저런 애가 아닌데. 혼자 허공을 보고 웃고 그러는 애가 아닌데.
아무래도 알버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 * *
그날은 소문의 주인공이 입학하는 날이었다.
마리와 카트린은 입을 쩍 벌렸다.
“쟤가 우리랑 동갑이라고?”
교수의 뒤를 따라 교단에 오른 소녀는 삼학년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성숙하고 예쁘장했다.
새로 맞춘 교복은 옷 선이 살아있었고, 하얀 타이즈와 둥근 코의 에나멜 구두도 소공녀 같은 소녀의 이미지와 완벽히 어우러졌다.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포도처럼 검붉은 생머리에 오뚝하게 솟은 콧대, 살짝 올라간 눈매와 고양이처럼 동그랗고 큰 눈망울. 새침하게 앙다문 입술과 뺨에 맴도는 혈색까지.
요르문 켈튼이 고아원에서 데려왔다던 소녀는 누가 봐도 도도하고 완벽한 귀족 아가씨였다. 그것도 열여섯쯤 되어 보이는 진짜 ‘아가씨’ 말이다.
카트린은 저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것처럼 보이는 켈튼 가의 아가씨를 내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동갑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아카데미에 통상적으로 입학하는 나이가 열 살이라서 같은 학년끼리 대부분 나이가 같은 거니까.”
“어휴, 내가 카트린 너랑 말을 말아야지. 나이 얘기가 아니잖아.”
장내가 술렁거렸다. 벌써부터 미스 켈튼에게 반한 남자애들도 여럿이었다.
대마법사 요르문 켈튼과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는데, 세련된 외모와 한 성깔 할 것처럼 꾹 다문 입만큼은 요르문을 빼닮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앨리어스 무리는 벌써부터 시비를 걸 준비가 된 것처럼 앉은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었다. 볼품없는 여자애가 들어올 줄 알았는데, 그들의 예상과는 완전히 딴판인 소녀가 들어오니 속이 끓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소란 속에서 가장 이상한 건 다름 아닌 알버트 조지 랑케였다.
“카트린, 알버트가 저 애에게 반한 것 같지 않아?”
이런 면에서 남다른 감각을 가진 마리가 카트린을 툭 치며 물었으나,
“뭔 헛소리야?”
곧장 카트린에게 반박당하고 말았다.
교수는 웅성거리는 아이들을 진정시킨 후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문 채 옆에 서 있는 소녀에게 말했다.
“자, 시아야. 친구들에게 인사해야지?”
이윽고 적막이 찾아왔다. 그러나 함성보다도 더 뜨겁고 집요한 시선이 강의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소녀는 잠시 강의실 한편을 슬쩍 흘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녕. 난 시아 켈튼이라고 해. 잘 부탁해.”
교탁을 탕탕 내려치며 기다렸다는 듯 터져 나오는 웅성거림을 다시 한번 진정시킨 교수는 강의실 자리를 쭉 돌아보았다.
“그래, 다들 시아와 친하게 지내고. 어디 보자, 시아가 어디 앉으면 좋을까?”
그러자 마리가 벌떡 일어났다.
“교수님! 여기요, 제 옆자리가 비었어요!”
“야아, 마리안.”
카트린은 이마를 짚으며 끙끙거렸다. 예쁜 애라면 사족을 못 쓰는 마리안 로젠버그가 어디 가겠는가.
“그래, 저쪽 마리안 옆에 자리가 비었구나. 시아야, 일단 저기 가서 앉으렴.”
마리 덕에 당분간 학교 생활이 힘들게 생겼다.
카트린은 앨리어스 무리와 알버트의 시선(알버트의 시선이 정말로 뜻밖이었다)을 한 몸에 받으며 자신과 마리 옆으로 다가오는 시아 켈튼을 향해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녕, 켈튼 아가씨.”
그러나 도도하게 보였던 인상과는 다르게 시아 켈튼은 무척이나 수줍어했다.
“…안녕.”
허, 참.
카트린은 멍하니 시아를 쳐다보았다. 까탈스럽게 굴 것 같은 애가 저렇게 부끄러워하니 도리어 민망해진 건 이쪽이었다.
마리는 벌써 시아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고 있었다.
거기다 저 멀리서 알버트가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외면했지만, 카트린은 알버트가 켈튼의 양녀라는 이 예쁘장한 여자애를 보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때, 시아 켈튼이 입을 오물거렸다.
“잘 부탁해.”
그러면서 고양이처럼 샐쭉 웃는 게 아닌가. 카트린은 당황하여 결국 고개를 홱 돌리고 말았다.
“…어, 그래. 나도 잘 부탁해.”
* * *
그렇게 시아 켈튼이 아카데미에 다닌 지 일주일가량이 지났다.
“야, 잡종.”
“……”
“야, 야야. 내 말 무시해?”
또 시작이군. 카트린은 심드렁하게 옆자리를 쳐다보았다. 앨리어스 무리가 시아를 빙 둘러싸고 시비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카트린은 시아를 도와주지 않았다. 시아와 친해지고 싶어 안달이었던 마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앨리어스의 괴롭힘을 방관한 게 아니었다.
“난 잡종 아니고 시아 켈튼이거든. 여기 잡종 같은 건 없어.”
편입생 시아 켈튼이 앨리어스의 손을 탁, 쳐내며 쏘아붙였다. 그러더니 어마어마한 말빨로 앨리어스를 몰아세우는 게 아닌가.
“그리고 네가 생물학 시간에 졸아서 모르나 본데, 잡종은 서로 다른 종끼리 교배한 거라 단일종인 인간에겐 적합한 단어가 아니야. 네가 그렇게 강조하는 순종은 대부분 근친교배를 통해 유지되는 거라 유전적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지.”
“이, 이게, 잘난 척을……!”
“잘난 척 아니야. 네가 수업을 안 들은 거지.”
그러더니 시아 켈튼은 고개를 홱 돌려 앨리어스를 무시했다.
“푸핫!”
결국 카트린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삼학년에 약초학 공붓벌레인 저보다 더한 애가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심지어 앨리어스를 말로 눌러 버리기까지 하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온 것이다.
다혈질 기가 다분한 마리안도 처음 하루 이틀을 제외하곤 시아가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가만히 있었다.
고아원 출신의 켈튼 아가씨는 생각보다 정신력이 강했다. 거기다 머리도 좋아, 가문의 후광으로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겨우 통과한 앨리어스의 자존심을 아주 시원하게 긁어내리곤 했다.
‘마리, 카트린. 나 잘한 거 맞겠지?’
그리고 그렇게 실컷 약올려 놓곤 카트린과 마리에게 늘 이렇게 물었다.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한 앨리어스가 손을 들어 시아를 때리려고 했다. 그가 다른 동급생을 바닥에 눕혀 놓고 무리들과 함께 발길질을 한 적은 있었지만, 시아를 때리려고 하는 건 처음이었다.
놀란 마리안과 카트린이 벌떡 일어나 앨리어스를 제지하려고 했으나,
“카트린, 저길 봐.”
마리의 속삭임이 끝난 직후 앨리어스의 손이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