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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87)화 (287/292)

287화 

결승선이 임박한 시점에서 로베르타 뮐러의 어거스트가 셰리우드와 샬럿을 근소한 차이로 앞질러 나갔다.

헬릭스는 어느새 시아가 곁에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무릎 위에서 서로 손을 꽉 잡고 셰리우드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기면 어떠하고, 지면 어떠하랴. 그러나 랑케르트 성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말과 기수가 다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시아는 이제 속으로 열띤 응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라크시스는 경기가 아닌, 경기에 열중한 시아의 옆모습만 바라보았다.

- 다시 노란 재킷의 샬럿이 앞서갑니다! 푸른 재킷, 푸른 재킷! 아― 초록 재킷의 어거스트가 푸른 재킷의 셰리우드를 앞지르는데요, 아! 푸른 재킷이 마지막으로 힘을 짜내 노란 재킷의 샬럿을 앞지르고 있습니다!

살짝 찡그린 미간, 힘이 들어간 턱과 앙다문 붉은 입술까지. 그녀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고스란히 경기가 비친다.

언제나 그렇듯, 무언가에 집중한 시아의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입 맞추고 싶다. 라크시스는 그런 생각을 간신히 억누르며, 성으로 돌아가면 그녀에게 끝없이 키스를 청하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러나 시아가 라크시스의 그런 속내를 알 리가 없었다.

- 결승선이 코앞입니다! 세 마리가 근소한 차이로 달리고 있습니다! 노란 재킷! 초록 재킷, 아― 아아! 푸른 재킷! 푸른 재킷―!

해설진의 흥분 어린 함성이 그녀의 귓전을 때린다.

- 들어옵니다, 들어옵니다, 들어옵니다! 결과는―!

셰리우드의 흩날리는 갈기 한 가닥, 기수의 땀방울까지 세고 있는 것 같은 표정으로 시아는 라크시스의 손을 잡은 아귀에 바짝 힘을 주었다.

‘셰리우드!’

* * *

로열 올버리가 끝나고 랑케르트 영지로 되돌아가는 마차 안. 시아는 경기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아 얼굴이 잔뜩 달아올라 있었다.

“시아, 어땠어요?”

“이렇게 재미있는 줄 알았으면 켈튼일 때도 가볼 걸 그랬어요. 아버지가 원체 이런 데 관심 없는 분이라 저도 잘 몰랐거든요. 사교계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가기도 그랬고요.”

라크시스는 신이 나서 대답하는 시아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오래전 그녀가 켈튼가의 일원이면서 서른이 다 되도록 로열 올버리를 한 번도 안 가보았다고 한 적이 있어 내내 경마를 싫어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토록 좋아하는 것을 보니 기우였던 듯했다.

다만 라크시스는 맞장구를 쳐주는 대신 그녀에게 바라는 대답이 있는 것처럼 흐음, 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 위로 천천히 턱을 괴었다.

“그것 말고요.”

그것 말고? 시아는 예상 밖의 반응에 눈알을 데구루루 굴렸다. 경기 관람 소감을 물은 게 아니라면, 뭘 물어본 거지?

“음, 셰리우드가 정말로 잘 달리던데요? 정기 대회를 본 적은 없지만, 왜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고 했는지 알겠던걸요. 준우승은 아쉽지만, 다음에 또 잘하면 되니까요.”

시아는 뒤늦게 우승과 준우승의 상금이 두 배 가까이 차이 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샬럿은 이겼으나, 어거스트에게는 졌다. 라크시스의 셰리우드는 최종 2위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라크시스 옌은 준우승 상금을 아쉬워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라크시스는 정말로 아쉬운 게 있는지, 시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또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것도 말고요.”

결국 시아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

“라크, 뭐가 궁금한 건데요?”

“레이디 옌이라는 호칭이 이젠 좀 익숙해졌나요?”

아.

시아는 조잘거리던 입을 꾹 닫았다. 동시에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로열 올버리가 전통적인 사교의 장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갈리프도흐 졸업 이후로 자주 보지 못했던 친구, 마리안 로젠버그와 카트린 피셔도 휘황찬란한 모자를 쓰고 테넷 성에 방문했고 의술원의 패트릭 그레이엄까지 정장을 차려입고 나타났으니 말이다.

‘어머, 레이디 옌! 못 본 새 얼굴이 폈네요! 툼르칸 제도에서 보낸 신혼여행이 좋긴 좋았나 봐요?’

친한 친구 마리는 이렇게 시아를 놀려댔고.

‘레이디 옌. 소꿉친구와 결혼한 소감은 어때? 지금까지 사귄 적 없다면서 뒤에서 우리 몰래 연애를 해놓고, 결혼까지 해치운 소감 말이야.’

결혼식까지 잘 와놓고도 아직까지 배신감을 느끼는 카트린은 이렇게 삐진 티를 냈으며.

‘축하해, 시아야. 아니지, 이젠 옌 부인이라고 해야 하는구나.’

라크시스가 연적으로도 보지 않았던 패트릭은 이렇게 축하를 보내왔다.

그 밖에도 시아를 마주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레이디 옌이라 불렀으니, 시아는 몇 달 치 호칭을 오늘 하루에 다 몰아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아는 창밖에 펼쳐진 초여름의 덩굴장미처럼 얼굴을 붉히며, 라크시스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제가 그렇게 불리는 게 좋은가요?”

“잘 안 들립니다, 부인.”

“제가 레이디 옌이라 불리는 게 좋아요?”

“죄송합니다, 부인. 바퀴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이쯤 되면 눈치챌 법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라크시스는 마차 창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곤 바깥 풍경을 보느라 못 들은 척을 하면서 시아를 곁눈질로 계속 흘끔거리고 있었다.

그의 눈매가 요망하게 휘어있다. 시아는 살랑살랑 접힌 눈매 속에서 웃음기를 잔뜩 머금고 있는 시선을 발견하곤 결국 엉덩이를 들썩이며 빼액 소리쳤다.

“제가 당신의 아내로 불리는 게 좋냐구요!”

그때, 도로의 울퉁불퉁한 턱에 바퀴가 걸리며 마차가 크게 덜컹거렸다. 그 탓에 균형을 잃은 시아가 그대로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졸지에 라크시스의 품에 안긴 꼴이 된 시아는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녀의 정수리를 향해 뜨거운 시선이 쏟아지고 있었다. 약간의 웃음소리를 곁들인 채 말이다.

“부인은 당연한 소리도 참 사랑스럽게 하는 재주가 있군요.”

라크시스는 시아를 일으켜 제 옆자리에 나란히 앉혔다. 그러곤 그녀의 무릎을 털어주며 말했다.

“연모하는 숙녀가 자신의 부인으로 불리는 것을 세상 어느 신사가 마다하겠습니까?”

시아는 또다시 라크시스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

테넷 시를 벗어난 마차 창밖으로 한적한 시골 풍경이 펼쳐졌다. 그의 어깨 너머로 바람결에 잔잔히 몸을 뉘는 풀숲이, 반짝이는 강물이, 강물에 닿을 듯 길게 늘어진 푸르른 버드나무의 줄기들이 보인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경치와 규칙적으로 들리는 마차의 바퀴 소리. 나른하고도 미묘한 공기를 가운데 두고, 풍경화의 한 폭처럼 오랜 관습의 드레스와 신사복 차림을 한 두 남녀가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시아. 레이디 옌.”

정적을 깬 건 라크시스였다.

“키스해도 됩니까?”

시아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으나, 라크시스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에, 장밋빛으로 물든 그녀의 뺨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라크시스의 콧날이 시아를 향해 서서히 기울었다.

간결하고도 깊은 입맞춤이었다. 얽어 든 입술이 떨어지고 시아는 그제야 때늦은 대답을 겨우 뱉어냈다.

“…곧 도착할 텐데요.”

그 의미를 깨달은 라크시스가 잠시 멍하니 있다, 웃음을 터뜨렸다.

“아, 방금 그 이상을 상상하셨다?”

“그야, 라크가 항상 키스로만 끝내질 않으니까……”

이렇게나 사랑스럽고 요망한 숙녀분을 보았나. 그러나 진짜로 요망한 건 바로 라크시스 자신이었다.

그는 속을 뻐근하게 채우는 열기를 느끼며 시아를 앉은 자세 그대로 안아 들었다.

“그렇다면 곧바로 성으로 모시도록 하죠, 숙녀분.”

“잠깐, 라크. 저 내일 출근해야……!”

“아직 해가 넘어가지도 않았는데요. …이런, 숙녀분께선 어디까지 상상하고 계신 겁니까?”

시아의 외마디 비명에서 많은 뜻을 헤아린 라크시스는 결국 공간이동마법을 사용했다. 익숙한 기운의 바람이 두 사람이 앉은 마차의 자리를 따라 작게 휘몰아쳤다.

라크시스는 모자를 벗어 시아에게 내밀었다. 그러곤 그녀의 눈을 쓸어 직접 감겨주며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눈 감아요. 어지러울 테니까.”

* * *

랑케르트 성의 넓은 복도를 따라 중년의 집사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켈튼 저택의 노집사 헤이든을 빼닮았으나, 그보다는 이십 년 더 젊어 보이는 집사는 다름 아닌 헤이든의 아들인 해리엇이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대로 집사 일을 해온 해리엇은 얼마 전 영주 부부의 요청으로 거금의 보수를 약속받고 랑케르트 성으로 이직한 참이었다.

사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연봉으로 계약하지 않았더라도 해리엇은 주인 아가씨, 이제는 레이디 옌이 된 시아의 요청이라면 기꺼이 이곳으로 이직을 했을 터였다.

물론 제 발로 걸어들어온 돈을 마다할 사람은 없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직업적 성취감과 삶의 행복이 완벽하게 일치하게 된 해리엇은 성의 규모에 비해 적은 수의 하인들과 말괄량이 정령들, 성안 곳곳에 빽빽하게 숨어있는 마도구 및 파이프들과 함께 오늘도 랑케르트 성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주인마님께선 앨런 어셔의 연작은 이미 모두 소장하신 것으로 아는데… 아, 그렇군.”

수도의 서점 달리아에서 라크시스의 앞으로 배달되어 온 한 무더기의 책과 수령증을 확인한 집사는 흐뭇하게 웃었다.

[다이아몬드와 흑장미와 탐정. 앨런 어셔 지음.]

두꺼운 양장 표지에 제목과 작가의 이름이 금박으로 떡하니 새겨진 밑에 바로 이런 설명이 추가된 띠지가 둘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하인드 스토리가 수록된 스페셜 에디션.]

“이런 거라면 분명 주인마님께서 좋아하시겠지.”

라크시스가 시아를 위한 깜짝 선물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해리엇은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주인 부부가 테넷 시에서 돌아오려면 아직 두 시간 정도 남았다. 열차로는 한 시간이면 가로지르는 거리이지만, 로열 올버리에 간 이상 마차를 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들이 탄 것이 증기 마차라는 것이다. 말이 끄는 옛날 방식의 마차였다면 이동 시간이 두 배 이상 더 걸렸을 터다.

‘그렇다면 지금은 두 분 모두 성에 안 계신다는 뜻과도 같지.’

회중시계를 도로 품 안에 넣은 해리엇은 잠시 고민하다, 평소처럼 라크시스의 서재에 책을 가져다 놓기로 했다.

이벤트를 위해 필요한 준비가 있었다면 주인님께서 따로 언질을 주셨을 터. 그게 아니니, 라크시스의 앞으로 온 물건은 일단 라크시스의 서재에 가져다 놓기로 한 것이다.

지나가던 정령 무리를 붙잡아 책을 들게 하고 앞장선 해리엇은 이윽고 삼층의 라크시스 서재 앞에 도착했다.

주인 부부라면 아직 랑케르트 성에 도착하지 않았으니 서재는 비어있겠지만, 해리엇은 습관처럼 서재의 문을 조심스레 두드리곤 한 박자 늦게 방의 주인을 불렀다.

“주인님.”

예상대로 대답은 없었다.

“실례하겠습니다.”

하긴 아무도 없는데 대답이 들릴 리가 있나. 그렇게 생각한 해리엇이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툭.

반들반들하게 광을 낸 집사의 구두코에 무언가가 걸렸다. 빳빳한 종이였다.

‘언제부터 있었지?’

그것도 못 보려야 못 볼 수도 없게 짙은 마룻바닥 위에 크림색 종이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주워 든 종이에는 인쇄한 듯 깔끔한 서체의 편지가, 살짝 휘갈겨진 채로 짤막하게 적혀있었다.

[서점 달리아에서 주문한 책들이라면 레이디 옌의 침실에 가져다 놓도록. 정리가 필요하면 시종을 부르도록 하겠네.]

편지의 잉크는 아직도 물기를 살짝 머금고 있었다.

아하.

해리엇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두 분 모두 이미 도착해 있으신 것이로군.’

해리엇은 굳게 닫힌 방문 앞에서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뒤를 돌았다. 여기까지 와놓고 왜 들어가지 않느냐는 듯 왱알왱알 항의하는 정령들을 이렇게 달래며 말이다.

“내가 장소를 착각한 모양이구나. 책들은 주인마님의 침실에 가져다 놓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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