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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운명을 손에 넣어버렸다 (286)화 (286/292)
  • 286화 

    머리카락도 틀어 올려 핀으로 고정시키고, 마지막으로 올망졸망한 꽃들을 단 자그마한 모자까지 살포시 얹는다. 여름용 레이스 장갑까지 끼고 나자, 그사이 성장한 라크시스가 그녀의 손가락에 푸른 사파이어 반지를 끼워주었다.

    “자, 이제 숙녀분께 레이디 옌이라는 호칭이 익숙해지도록 해드려야겠군요.”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에스코트하듯 팔을 내밀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고요?”

    “그럼요. 남는 시간 동안 잠깐만 마법 연습을 도와주겠다고 한 건데, 그것만 한 게 아니잖아요?”

    “그게, 내가 하자고 한 게 아니라……!”

    시아는 서재를 나서다 말고 새빨개져서 우뚝 멈춰 섰다. 라크시스는 뒤를 돌았다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 그의 아내는 역시 사랑스럽다. 부끄러움도 잘 타고, 놀리면 이렇게 귀여운 반응을 보이기까지 한다.

    라크시스는 바들거리는 시아에게 다가가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 그녀의 손을 들어 제 팔에 걸쳤다.

    “우리 사이에 누가 먼저 한들 어떻겠어요. 안 그런가요, 부인?”

    * * *

    모르간 남부의 작은 소도시인 테넷은 연례행사의 관광객으로 간만에 북적였다.

    “이번엔 어떤 말이 승리할 것 같아요?”

    “올해 초 정기 대회에선 옌 경의 셰리우드가 우승했었지. 황제 폐하의 샬럿도 만만치 않소만.”

    더 이상 전기 마도 시대의 고리타분한 복장을 강요하는 이들도 없건만, 올버리 경마장의 푸른 잔디 위로 모여든 여인들은 화려한 모자로 너 나 할 것 없이 옷차림을 뽐내고 있었다.

    남자들도 여인들과 다르지 않아 부티크에서 맞춤으로 제작한 정장에 매끈한 실크 모자를 머리에 얹은 채로 점잖은 척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로열 올버리 경마 대회. 소도시 테넷을 유명 관광지로 만들어 준 이 경마 대회는 ‘경마는 테넷 성의 푸른 벌판만큼 관람하기 좋은 곳이 없다’는 알리나 황제의 선언이 있은 이래, 광룡이 부활한 해를 제외하고 칠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줄곧 이곳 테넷 성의 올버리 경마장에서 열려왔다.

    갈리프콜을 태워 마차를 굴리고 마정석으로 하늘에 비행선을 띄우는 시대에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냐마는, 발 빠른 말은 오래전부터 영주의 힘을 판가름하는 척도 중 하나로 이용되곤 했다. 그리하여 교통수단으로서의 말이 필요가 없어진 시대에도 빠른 말의 소유자는 존경을 받았다. 전통과 관습을 좋아하는 제국에선 3590년대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황족과 귀족들의 명예와 과시를 위해 말을 기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 바로 테넷 성에서 그들은 명예와 과시를 위해 누구의 말이 제일 빠른가를 겨루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내기까지 더해졌으니, 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인가.

    그리하여 로열 올버리 경마 대회, 통칭 로열 올버리는 매년 수많은 관람객들을 동반하며 제국의 연례행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

    게다가 기원이 이러하니, 경마 대회 자체가 곧 사교의 장으로 기능하여 격식을 갖추지 않고는 입장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사람 차별하는 건가요? 우리가 남대륙인이라서?”

    “죄송합니다만 두 분 같은 차림으론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화려한 모자도, 격식에 맞는 정장도 입지 않은 두 남녀가 가드에게 가로막히자 화를 내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남대륙에서 온 여행객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도와주지 않았다.

    과거 제국이 남대륙에 저지른 죄를 어릴 때부터 배워온 제국인들은 대부분 ‘남대륙인 차별’이라는 말을 들으면 발작적으로 손사래를 치곤 했으나…….

    “아가씨, 제국에 오면 제국의 법을 따라야지. 그런 차림으론 황제 폐하라도 이곳에 못 들어간다우?”

    제국인들은 그들의 전통을 무시한 자들에겐 가차 없었다. 결국 여행객은 멋들어진 모자를 쓴 검은 피부의 할머니에게 된통 잔소리를 듣고 쫓겨나고 말았다.

    시아와 라크시스는 전망 좋은 관람석에 앉아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양산을 접고 시원한 그늘에 앉아있던 시아가 입구의 소란을 물끄러미 보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뭔가 변했네요.”

    라크시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되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그냥, 여러 가지가요. 제가 알던 과거가 모두 달라진 것만 같아서요.”

    라크시스는 귀빈들을 위해 준비된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시아에게 건네며 대답했다.

    “달라진 건 없어요. 모두 당신의 시간 여행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죠.”

    그게 그 말 아닌가. 시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그때 저 멀리 입구에서 군악대의 연주가 울려 퍼졌고, 누군가가 외쳤다.

    “오, 황제 폐하의 마차가 들어오나 봐요!”

    새하얀 말과 붉은 코트의 호위대가 열을 이루어 입구를 통과하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덮개가 활짝 열린 마차 안에서 쨍한 푸른색 모자를 쓴 황제가 실크 모자를 쓴 헬릭스 황자와 대화를 나누며 들어오고 있었다.

    어머니와 간간이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다 상석에서 옌 부부를 발견한 헬릭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확히는 시아를 보고 표정이 밝아진 것일 테다.

    라크시스는 심드렁하게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황자는 멀리서도 당신을 잘 찾는군요.”

    “저렇게 멀리서는 제가 보이지 않을걸요. 그냥 사람들에게 인사한 걸 텐데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요.”

    시아는 왜인지 공기가 서늘해진 것 같아 팔을 재차 문질렀다. 라크시스가 본인의 재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었지만, 그럼에도 분위기는 여전히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았다.

    시아는 라크시스를 힐끔거렸다. 이거, 과민반응이 아닐까. 지금의 시아에게 헬릭스는 마차에 탄, 팔다리가 달린 까만 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황실 일원들의 입장 행렬이 끝나고 나서야, 시아는 라크시스의 시선이 예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아야. 오늘 정말로 아름다운걸.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보겠던데.”

    시아와 라크시스가 자리한 귀빈석 바로 옆, 황실의 일원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로 들어선 헬릭스가 시아를 보자마자 이렇게 인사를 건넸기 때문이었다.

    “황자 전하도 그, 음. 모자가 참 예쁘네요.”

    “…이거? 다 똑같지 않나……?”

    당황한 헬릭스는 특징 없이 비슷하게 생긴 검은 실크 모자를 가리키며 되물었다. 그때 라크시스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테일러 메슬론의 모자로군요.”

    “아, 옌 경.”

    “노든의 대공이던 차탈 세페란테 경이 즐겨 쓰던 모자를 만든 장인의 손자가 대를 이어 운영하는 양장점의 모자이지요. 테일러 메슬론의 모자는 미묘한 곡선의 차이로 신사의 멋을 완성해 주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라크시스는 헬릭스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

    마도 시대가 시작된 알리나의 아버지 대부터 황실의 남자들이 애용해 오던 모자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하더니, 시아를 돌아보곤 저가 쓴 모자를 까딱여 보이며 이렇게 묻는 게 아닌가.

    “제가 지금 쓴 것도 테일러 메슬론의 모자인데. 이건 어떻습니까, 부인?”

    눈매를 초승달처럼 휘며 웃어 보이는 라크시스에 시아는 그의 의도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라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게 있을까요? 당신이 누구 남편인데.”

    그러면서 시아는 라크시스에게 슬며시 몸을 기댔다. 그제야 라크시스는 흡족한 얼굴을 하며 시아에게 달라붙어 있던 시선을 천천히 떼 내었다.

    그때였다.

    “남편이 라크시스 옌이라면 그리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황제 폐하.”

    황제가 들어서자 라크시스가 모자를 벗곤 정중히 인사했다. 뒤늦게 황제를 발견한 시아도 재빨리 치맛자락을 들며 인사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별일이야 있겠는가. 원래 무소식이 희소식인 법이지, 안 그런가? 옌 경.”

    “옳은 말씀이십니다. 폐하.”

    황제는 라크시스의 인사를 받으며, 시아에게 눈짓하여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레이디 옌은 잘 지냈는가? 남부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더니, 안색이 좋아진 것 같구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신혼여행이 화두에 오르자 부끄러워진 시아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황제는 그런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러곤 마련된 의자를 시아와 가까운 곳으로 살짝 끌어당겨 앉은 뒤 마치 헬릭스에게 들으란 듯이 시아에게 속삭였다.

    “레이디 옌. 괜찮은 아가씨가 있다면 귀띔해 주게. 황자도 슬슬 아내를 맞이할 나이가 되어서 말이지.”

    “폐하!”

    자신의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헬릭스가 화들짝 외쳤다. 그러나 황제는 아들의 반응을 가볍게 무시하곤, 진지하게 잔소리를 시작했다.

    “헬릭스. 네게 동생이나 방계가 있었다면 지금보단 상황이 나았겠지만 말이다. 그게 아니니 슬슬 분발해야 하지 않겠느냐.”

    “또 그 소리십니까.”

    “대마법사와 레이디 옌을 보거라. 얼마나 잘 어울리느냐. 나도 네가 이리 사는 것을 보고 싶구나. 그래, 그래서 네가 마음에 든다고 했던 숙녀는 언제 데려올 거니? 내가 반세기 전의 선황제들처럼 널 매일같이 무도회에 보내야만 하겠느냐?”

    결국 헬릭스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시무룩해진 황자가 안쓰럽긴 했지만, 황제 덕분에 미묘해질 뻔했던 분위기가 제자리를 찾아 다행이었다.

    헬릭스는 시아를 포기했으면서도 친구로서 여전히 막연한 호감을 품고 있었고, 라크시스는 이를 귀신처럼 눈치채고 질투하곤 했다.

    그리고 황제는 이 두 사람의 속을 모두 꿰뚫고 있었다.

    ‘라크는 요즘 들어 대놓고 티를 내고 있지만.’

    그러나 그마저도 고상하게 티를 내, 모르는 사람은 그것이 비꼼이나 독점욕인 것도 모를 정도였다. 시아 역시 라크시스와 내내 붙어 다니며 그의 화법에 익숙해진 덕분에 겨우 알아챘으니 말이다.

    이윽고 1부터 18까지의 숫자판이 붙은 출발대 안으로 윤승을 마친 말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기대감이 점점 고조되기 시작하고, 기수들은 긴장한 채 출발 직전의 말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황제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그녀의 말, 샬럿이 있는 5번 출발대를 바라보다 라크시스를 흘긋거렸다.

    “자, 이제 슬슬 경기를 즐기도록 하지. 그러고 보니 오늘 경기에 셰리우드가 출전한다고 했었지?”

    셰리우드는 라크시스가 소유한 말이었다.

    푸른 재킷과 모자를 쓴 기수가 10번 출발대에서 셰리우드의 고삐를 쥐고 기다리고 있었다.

    “셰리우드가 올해 초 정기 대회에서 상당한 실력을 보여줬더군.”

    “작년보다 컨디션이 좋아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샬럿을 이긴 것도 그 덕분이지요.”

    그 잠깐 사이에 황제와 고대 마법사를 찾아온 사교계의 인사들에게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황제와 라크시스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내일 경기에도 옌 경의 말이 출전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셰리우드가 아니라고 들었네만.”

    라크시스에게 말했는데, 어째 시아의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라크시스는 부인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대답했다.

    “제 아내의 말, 로렌입니다. 이름은 아내가 직접 지어줬고요.”

    그 순간, 출발대의 문이 열리며 경기가 시작되었다.

    시작은 고요했다. 지면을 박차는 우두두거리는 굉음도, 기수들의 고함도 없었다. 사람들도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한 무리의 말과 한 무리의 알록달록한 기수들을 일순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러나 말들의 격차가 점점 벌어질수록 환호성이 커졌다. 고함에 가까운 함성 속엔 힘찬 응원도, 안타까운 소리도 모두 뒤엉켜 있었다.

    관람석의 네 사람도 푸른 잔디 위를 달리는 말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선두를 달리는 건 샬럿과 셰리우드. 올해의 우승 후보와 작년의 우승 말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일, 이 위를 다투고 있었다.

    - 아― 푸른 재킷, 푸른 재킷! 셰리우드가 노란 재킷의 샬럿을 앞지르고 있습니다! 뒤따르는 초록 재킷의 어거스트! 이게 웬일입니까, 샬럿을 따라잡습니다, 어, 어어, 초록 재킷의 어거스트가 노란 재킷의 샬럿을 제치고 셰리우드도 따라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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